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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라진 여자
물동이를 들고 안마당을 질러 길상이 달려가는데 뒤에서 불렀다.
"예."
엉겁결에 물동이를 놀고 돌아본다. 윤씨 부인은 대청에 앉아 있었다.
"예,마님."
길상이 되풀이 대답한다.
"이리 오너라."
한 집안에 기거하면서도 길상은 좀체 윤씨부인을 보는 일이 없었다. 그를 친히 부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길상이 어려워하며 부인 앞에 갔을 때
"물동이는 왜 가져가는냐?"
하고 물었다.
"예, 별당 뜰에 물을 뿌리려고 가져갑니다."
"..."
길상은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다. 댕강하게 짧아진 옷고름, 본시도 짧은데 옷고름에 끼워서 마디를 지어놓은 엽전 한 닢이 눈에 보였다. 손님에게 얻은 엽전이지만 옷고름에 매어둔 그것이 부끄럽고 꾸중들을까봐 겁이 났다.
"글공부는 하느냐?"
"예?"
놀라며 길상이 얼굴을 쳐들었다.
"노스님께서 너에게 이른 말씀이 있었다 하시더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예"
다시 고개를 숙이는데 목덜미에서 양쪽 빰으로 핏기가 번져나간다. 지척에서도 노스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남과 같이 잠잘 생각 말고 읽었던 글 다시 읽고 썼던 글 다시 쓰고, 그러면 차츰 이치를 알게 되느니라.' 그러나 구천이 떠난 후 길상은 까마득히 글공부를 잊고 있었다.
"김서방한테 일러둘 터이니 너는 사랑의 잔심부름만 하면 된다."
윤씨부인은 가라는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한참만에 어디 얼굴 한번 들어보아라."
길상은 얼굴을 들었다. 입 언저리가 파르르 떤다. 커다란 길상의 눈에 눈물이 넘쳐날 것 같다. 윤씨부인은 길상의 얼굴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찬찬히 쳐다보았다.
"노스님 말씀이 옳으시다. 눈뜬 장님이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그럼 가보아라."
"예"
장석걸음을 옮겨놓는데 긴장해서 눈앞이 캄캄하고, 뒤통수에 마님눈길이 박혀 있는 듯하여 길상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물동이를 든 그는 모퉁이를 돌아 윤씨부인의 시선에서 빠져 나왔다 느끼는 순간 뛰기 시작했다. 한달음으로 우물가까지 와서 터질 것 같은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어 우물 속을 들여다 본다. 푸른 하늘에 얼굴이 둥실 떠 있었다. 길상은 두레박을 풍덩 던진다. 얼굴이 부서져서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푸른 하늘도 쭈글쭈글 구겼다. 까대기 옆에는 지게에다 등을 받치고 삼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개똥이 녀석이 살금살금 그 곁으로 다가간다. 윤씨부인이 불러다가 각별한 말을 했다는 것은 길상의 처지로서는 과거급제한 것만큼이나 기쁘고 영광스런 일이다. 그뿐인가, 노스님이 아직 길상을 잊지 않고 윤씨부인에게 당부했다는 것은 외로운 길상에게는 더없이 애정이며 은혜였다. 지푸라기를 손에 들고 삼수 콧구멍을 노리면서 개똥이 녀석 침을 흘리며 혼자 웃는다. 웃느라고 콧구멍을 겨냥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눈뜬 장님이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저승꽃이라고들 하는, 꺼뭇꺼뭇한 점이 얼굴과 손등에 돋아났던 윤씨부인, 쏘는 듯한 눈빛. '하겄십니다. 부지런히 글씨공부 하겄십니다!' 삼수는 입맛을 다시며 얼굴을 돌린다. 길상은 물동이 가득 물을 길어 별당 뜰로 날 듯 달려간다. 재채기 소리, 다음은 삼수의 고함소리, 얼굴을 쥐어박혔는지 개똥이 우는 소리가 났다. 나무그늘 밑에, 형상에 걸터앉은 봉순네는 씨를 걷어내가며 서희에게 수박을 떠먹여주고 있었다. 시원하게 곤지머리를 한 서희는 제비새끼처럼 작은 은숯가락의 수박을 받아먹는다. 먹으면서불긋불긋하게 나돋은 이마빼기의 땀띠를 긁적거린다.
"덧나믄 우짤라고? 긁지 마시오."
하고 봉순네는 눈살을 찌푸린다. 대개 여름이면 살이 빠진다고들 하는데 봉순네는 그늘에서 일만 하여 그랬던지 여름이 오면 도리어 몸이 붇는 편이다.
"허연 살이 박속 겉구마는. 과부 야빈 데없다 카더니 참말이제, 우짤라꼬 삼복 더위에 살이 찌는지 모르겄네."
김서방댁이 부러워서 말하곤 했었다.
"이자 그만 잡사야겄소. 배탈이 나믄 안 되니께."
대접에 숯가락을 걸쳐, 평상 모서리에 놓은 봉순네는 땀에 흠뻑 젖어 등에 달라붙은 안동포 적삼 뒷도련을 치켜들고 부채바람을 넣는다.
"날씨도 푹푹 찌는구나."
제 몸을 부치던 봉순네는 부채를 되돌려 서희에게 바람을 보내면서 햇빛이 튀는 마당에 물을 뿌리는 길상을 바라본다.
"길상아!"
"야."
대답과 함께 물바가지를 든 채 쫓아왔다.
"아아니 야아가 붙이라도 끄러 오나? 와 그리 급하노."
"야?"
길상은 빙글빙글 웃는다.
"니 머가 그리 좋노. 무신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러노."
연신 웃는 낯이다.
"내가 니를 불렀는데 머를 시킬라 캤든고?"
"…"
"아 참 그렇제? 마을의 이서방한테 가서 말이다."
"야, 용이아제씨 말입니까?"
"으음 그래, 니 가서 말이다, 늠이 있이믄 잠시 다니가라고 일러라."
"야, 퍼떡 갔다오겄심다."
"길상아."
"야?"
뛰다가 돌아본다.
"읍내 장날이 언제든고?"
"모래요."
"모래? 그렇겄네. 오늘이 보자... 그라믄 가서 이르고 오니라."
"야."
길상이 행랑마당으로 돌아나옸을 때
"으으윗윗 으으윗윗...으으으으."
개똥이 울음 섞인 기성이 들렸다. 허리끈이 풀어져 내려가려는 중의 말기를 붙잡으며, 나머지 손으로 삼수를 치려고 개똥이 주먹을 휘두르며 쫓아간다.
"와 건디리 가지고 학을 떼요?"
연이 빈 삼태기를 들고 서서 구경을 하며 삼수를 힐난했다.
"내가 건디맀나! 저놈으 새끼가 내 콧구멍에!"
삼수는 개똥이를 밀쳐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싸지, 남들은 일하는데 혼자 낮잠 잤이니께."
"머라꼬! 빌어묵을 년이."
삼수는 개똥이를 밀쳐내다가
"이, 이기의? 뼈다귀가 성할 기라고?"
"와, 와 때, 때, 때이노오!"
개똥이는 어귀어귀 덤벼든다. 길상이 언덕에서 내려왔을 때 어디서였든지 팔랑개비같이 봉순이 날아왔다.
"어디 가노!"
"용이 아제씨한테 간다."
"거긴 와 가노?"
"니 어매 심부름간다."
"나도 갈란다."
봉순이는 따라나섰다. 봉순이 역시 시원한 곤지머리였다. 댕강하게 짧은 치마 밑의 종아리는 황새다리 모양으로 가늘고 길었다. 크려고 그랬던지 더위탓인지 털을 갈려는 중병아리같이 엉성해 보인다. 아이들은 마을을 향해 타둑타둑 걸어 내려간다. 나무 밑에서 풀을 뜯던 소가 꼬리질을 하며 엉덩이에 불을 파리를 쫓다가 아이들을 보고 음매― 하며 한가락 뽑는다. 하늘은 새파랗다. 강 건너 산허리에서 당산 산등성이까지. 길상은 줄을 끊고 떠내려가는 연을 따라가는가, 발부리에 생각이 없고 마냥 얼굴을 쳐들어 하늘만 보며 간다.
"길상아!"
"와."
"귀녀한테 구신이 붙었다. 커더라."
"머?"
"구천이도 밤만되믄 산에 갔다 카데."
"..."
"그것도 구신이 붙어서 그런 거라 하데. 이분에는 귀녀가 자꾸 산에 간다 안 카나."
"매욕하로 간다 카든데?"
"만날?"
"더운께."
"아니다. 구신이 붙어 그렇다 카이. 또출네도 자꾸 산에 안가더나? 구신이 불러싸아서 간다 카더라."
"누가 그러더노?"
"김서방댁이."
"미쳤다."
아이들이 용이 집에 갔을 때 강청댁은 땀을 흘리며 보리방아를 찧고 있었다.
"머하로 왔노!"
절굿공이를 절구통에 걸쳐놓고 주걱으로 보리를 모으며 아이들에게 눈을 흘겼다.
"아제씨 안 기시오?"
길상이 물었다.
"와? 논에 갔다, 와!"
화를 버럭 낸다. 길상이 주춤한다.
"틈이 있으믄 오시라 캐서."
"누가?"
"우리 옴마가요."
길상을 거들어서 봉순이 말했다.
"머할라꼬, 상 줄라꼬? 그년 기둥서방됐다고 치사할라 카더나."
어른의 체면 같은 건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광대놀음 하던 날 요눔으 새끼들이 와서 읍내에 갔지, 갔어.' 아이들이 눈엣가시처럼 밉다.
"흥! 초록은 동색이더라고 멋을 속닥거릴라꼬 오라가라 하는고? 이서방이 동네 가매가?"
주걱으로 절구통 전을 치면서 다시 절굿공이를 치켜드는데 마침 점심을 먹으려고 용이 돌아왔다.
"너거들 머하러 왔노?"
아이들은 겨우 숨을 토해낸다.
"무신 일고?"
"틈 있으믄 한분 오라 합니다."
"누가?"
"봉순이 오매가요."
"무슨 일인고?"
강청댁은 점심 마련할 기색도 없이, 보리가 물을 먹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잖았으면 바스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절굿공이로 윽박지르고 있었다.
"점심 묵고 갈 기니."
용이는 퍼놓은 멍석 위에 힘없이 주질러앉는다. 얼마 후
"무신 일로 불렀소?"
하며 용이 찾아왔다.
"이분 장날에 읍내 갈 기요?"
"…갈 일은 없지마는,"
낯색이 어두웠다.
"월선이한테 머 좀 전할라 했더마는,"
"머길래 그러요?"
"모시적삼 두 개 해놨는데 그거 좀 갖다줬이믄 싶어서."
"가지요."
이튿날 논가에서 옹두레로 물을 푸다 만 용이는 논둑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황새 한 마리가 멍청이같이 논가에 서 있었다. 졸고 있는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같이 외로워 보인다. '내일이 장날인데 내일 간다믄 또 나를 피할 긴지 모르겄다.' 강청댁이 밤에 가서 소동을 벌인 일을 모르는 용이가 다음 장날에 월선이를 찾아갔었는데 주막 문은 쇠통이 채워져 있었다. 근심이 되어 밤까지 기다렸으나 월선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튿날 해거름에 마을을 떠나 어두워져서 다시 찾아갔을 때 월선이는 몸이 아프다면서 돌아누었던 것이다. 용이를 피하는 태도였다. 왜 그리 피하느냐고 따지고 들 만큼 뱃심이 좋은 위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밤길은 멀었고 집마당에 들어섰을때 용이는 집의 기둥이 모두 흔들리는 것 같은 절망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요 며칠 동안
"사람 이러다가는 미쳤나겄다! 미쳐나겄어!"
강청댁의 입버릇이 더 자주 나오게 되었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줬으믄 과부거니 하고나 살제."
악담도 나왔다. 비위를 상하는 말이나마 걸어주었으며 때론 측은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달래기도 했었던 용이가, 들일 집안일을 하기는 하지만 말이 없고 잠자리마저 누각이 아니면 마루 한 귀퉁이에서 돌아누우면 고만이었다. 강청댁은 지은 죄가 있어 용이의 우울증을 알았으며 알고 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장날이 내일인데, 또 나를 피해서 가게를 닫아버리믄... 차라리 오늘 가는 기이 좋겄구나.' 봉순네가 전하는 모시 적삼은 월선이를 찾아가는 좋은 구실이 된다. '우째 나를 피할꼬? 무신 일이 있었일꼬? 정이 떨어졌다 말가, 의지가 못 되는 사내라고 자파했다 말가, 누구 눈맞인 사내가 생깄다 말까.' 외곬으로만 흐르는 월선이 성정을 알면서 그럴 리가 없고, 믿을 수 없고, 믿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용이는 고통스런 망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강청댁이 읍내로 가서 월선이를 두들겨준 일을 모르는 아낙은 별로 없다. 그러나 대개의 남자들은 그 일을 모르고 있었다. 가난한 농사꾼이 남의 여자 볼 새가 어디 있으며 개중에는 흉악하게 생겨 눈먼새도 찾아올리 없는 그런 남편을 가진 여자도, 여자의 마음은 이상한 것이다. 바람난 여자의 애기는 제 남편에게 하기를 좋아 하지만 바람난 남자의 애기는 여자들끼리 하고 그치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만네가 강청댁의 행동을 마땅찮게 여겨 남편에게 말한 적은 있다. 그러나 남의 일에 간섭하길 좋아하지 않는 두만아비는 용이에게 귀띔해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용이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읍내에 갈 채비를 차렸다. 강청댁은 집안을 어질러 놓은 채 밖에 나가고 없었다. 용이는 날이 빠진 낫과 끝이 뭉크러진 도끼, 호미를 챙겨 들고 집을 나왔다.
"장날은 내일이라믄서요?"
바느질을 하고 있던 봉순네가 찾아간 용이를 보고 말했다.
"연장이 시원찮아서 성냥간에 베리러 가는 길에,"
용이는 외면하며 뇌었다. 봉순네는 보자기에 싼 것을 장롱에서 꺼내어주며 말했다.
"한분 다니가라 카소. 참외도 묵고 수박도 묵고, 지금이 한창인데 와서 씨원하게 물도 맞고, 지 살기가 바빠서 그렇겄지마는 우찌 그리, 그리매도 안 뵈는고."
"칠림댈까바서 그렇겄지요."
"칠림은 무슨? 묵으믄 얼매나 묵을 기라고? 잠은 나하고 자믄 될기고, 마님께서도 한분인가 물어보시던데, 죽은 월선네 생각이 나서 그러시는지."
최참판댁에서 나온 용이는 곧장 길을 떠났다. 중도에서 나룻배를 탄 그는 일찍 읍내에 닿았다. 나룻배에서 내려서는 순간 용이는 까닭없이 마음이 시끄러웠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못 볼 것을 보러 가는지 모르겄다.' 월선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만 같은 환상이 눈앞을 막는다. '천하없이도 그럴 리는 없다. 나는 월선이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께. 산천이 변했으믄 변했지...'
마음속에 다져둔 생각, 월선이를 데리고 어디든 도망을 쳐야겠다는 생각이 솟았다. '구천이는 상전 아씨도 데리고 도망가지 않았나. 나 없다고 여편네가 못사까.' 그러나 목엣가시처럼 걸리는 일이 있었다. '예로 만난 가숙을 박대하믄 못쓰네라. 여자란 남자 하기 탓이다. 모르는 거는 가르쳐가믄서.' 강청댁에서 장가들어 정을 못 붙였을 때 모친이 타이른 말이었다. 숨을 거둘 때도 부모멧상 들 가숙을 박대하지 말라는 것이 유언이었다. '내가 떠나믄 부모 기일은 뉘가 모실 기며...' 눈에 눈물이 돈다. 주막에 못 미쳐, 외딴 길목에 대장간이 있었다. 장날이 아니어서 대장간은 한산하였다.
"오래간만이네."
대장간 주인 옥서방이 인사했다.
"일거리가 많소?"
"머 별로."
"연장 손 좀 바주겄소?"
"그러지... 금년에는 어떤가?"
"머 말이요?"
"시절 말이지. "
"낫을 들고 논에 들어가봐야 장담 안 하겄소?"
"하기사 그렇지. 하느님의 요량을 누가 알겄노."
엉성한 수염 사이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옥서방은 흙먼지 이는 밖을 바라본다.
"나 다니올 데가 있어서 갔다오겄소. 그새 손봐주소."
용이는 보자기를 들고 월선의 주막으로 갔다.
"...?"
저번 장날같이 쇠통이 걸려 있었다. '허행이구나. 어디 갔일꼬?' 용이는 문을 와락와락 흔들어 본다. 쇠퉁만 찔렀으면 그럴 리 없겠는데 문을 고정되어 옴짝하지 않는다. 용이는 허리를 굽혀 살펴본다. 못질을 해놓았던 것이다. 섬뜩한 생각에서
"월선아!"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월선아!"
소리를 질렀으나 장날이 아닌 한적한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조차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용이는 어느 골목길에 월선이 서 있을 것 같고 찾으면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읍내를 헤매기 시작했다. 몇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왔던 길을 다시와서 지나고, 기름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를 여러번 되풀이 했다. 그러다가 그는 미친 듯이 월선의 주막으로 되돌아 왔다.
"월선아!"
못질한 문을 흔들어 대다가 흐려진 눈을 거리 쪽으로 돌린다.
"어디 갔이까. 절에 갔이까? 쇳통도 아니고 못질..."
방물장수 노파가 방물이 든 버들고리를 이고 걸어온다. 장날이면 나타나는 낯익은 얼굴, 평일에는 평일에는 여염집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노파다.
"할매!"
"와 그러노?"
"여기 주막 임자, 워, 월선이라는 여자 아시오?"
"얼굴이야 익지."
"그, 그라믄 어디 갔는지 모르요? 혹시 뉘한테 들은 말이라도"
"들은 말이사 있지. 강원도 삼장시를 따라갔다 카든가?"
"야?"
"강원도 삼장시를 눈에 맞았다던가, 함께 갔다 카지, 아마."
"강원도 삼장시하고, 그럴 리가!"
"내사 강원도 삼장시가 누군지도 모르지마는 그렇게들 말하더마."
노파는 초지장같이 변해가는 용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본다.
"정말이까?"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두들 그러니께, 빚이라도 주었더나?"
세정에 빠른 방물장수 노파, 쓸개 빠진 놈아 남의 사내 따라간 계집 생각하면 뭘하나, 질금질금 눈물이 흐르는 늙은 눈이 말하고 있었다
"빚...머 그런 것도 아니요."
억지웃음을 짜내는 얼굴은 그러나 일그러지기만 했다. 노파는 방물고리를 내려놓고 주막 앞에 앉았다. 곰방대를 꺼내었다.
"담배 있이믄 한 대 주게."
용이는 쌈지의 담배를 노파 손 바닥에 부어준다.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그 계집이 자네를 버리고 갔구마."
침을 뱉아 담배를 축이면서 노파가 말했다.
"아, 아니요. 그것도 아니요"
하는데 용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내가 다 알지러. 사나이 대장부가 눈에 눈물이 나는데 아니라 카겄나?"
시체를 쪼아먹는 뫼까마귀같이 노파가 남의 슬픔을 쪼아먹듯 웃었다.
"정이란 더러운 게지."
담배에 불을 댕겨 뻑뻑 피운다. 합죽한 입속에 이가 남아 있었던지 물부리에 이빨 부딪는 소리를 내며
"잊어부리는 기이 상수네라. 또 세월이 가믄 잊어지는 기고. 그래저래 한세상을 살아보믄 눈 앞에 보이는 거는 북망산천, 죽네사네하는 것도 젊었일 적의 한때 애기 아니가. 나도 젊은 시절에는 꼴값을 하노라 노류장에서 구름겉이 놀았거마는, 더러운 정 땜에내 신세가 요리 안 되었나. 어디 마음을 허리끈으로 매어두겄나? 잊어부리는 기이 약이고 늙으믄 다 소용없네라. 늙어 고생 안 할라 카믄 재물이 있이야제 계집도 사내도 다 소용없네라. 옛말에 자식을 앞세우고 가면 배가 고파도, 허리띠에 은전을 차고 가니께 배가 안고프더라도 돈이믄 틀어진 구신, 조상도 달랠 수 있지."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며 지껄이는 노파를 멍청이 바라보고 서있던 용이는
"그, 그, 그런 기이 아니라요."
하고는 급히 발길을 돌려 놓는다. 걷는데 휘청거리는 아랫도리가 접혀서 땅바닥에 고꾸라질 것같이 보였다. '몹쓸 년! 몹쓸 계집...' 간신히 대장간까지 갔다.
"다 됐소."
쇠붙이를 뚜드리고 있던 옥서방은 다시 그것을 불간 속에 집어 넣고
"한 분 더 뚜디리야겠네."
쇠붙이가 불에서 달아오르기를 기다리며 옥서방은 허리를 두드린다.풀무 젓는 젊은이 얼굴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못해묵겄다. 오뉴월에 윤구락을 안고 살라니께,"
하다가 옥서방은 물었다.
"자네 얼굴이 와 그러노?"
"와요?"
"토사곽란이라도 만난 사람맨치로 초지장이네. 어디 아프나? 아니믄 화적떼한테 날치기라도 당했나. 아까는 안 그렇더마는."
"날치기 당했소."
길을 내다보며 되는 대로 주워섬긴다. 방물고리를 인 노파가 산밑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문 날씨, 뿌연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얼매나?"
"천 냥이요."
"신소리 하는고나."
"값으로 치믄 만 냥 십만 냥..."
하다가 중도에서 목소리는 끊어졌다. 옥서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용이 귀에는 거리에 이는 바람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실제 바람 소리는 나지도 않았지만 용이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 된 연장을 새끼줄로 엮어서 들고 대장간을 나온 용이는 한적한 장터를 되잡아 들어갔다. 그는 주막을 찾아 들어갔다. 놈팡이 같은 사내 둘이 마루에 늘어져 누워 있었다. 갈증난 사람같이 주모가 따라주는 술을 단숨에 마시고 다시 한 잔을 청했을 때, 주모는 놈팡이 한 사람하고 애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별난 인물은 아니지마는 엔간히 쓸 만은 하지."
"삼장시라믄서?"
"그렇다더만. 해마다 오는 사램이믄 내가 모를 턱이 없겄는데 나이 지긋하다니께 어떨란가. 제집이 데면데면하고,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 듯 떠나주었이니 내 손해볼 거는 없지마는 우째 시원섭섭하구마."
"허 참 내가 눈독을 딜있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었구마."
놈팡이는 누운 채 눈을 치뜨고 웃었다.
"술 안 팔라요!"
용이 술판을 쳤다. 두 번째 술도 단숨에 들이켠 용이는 엽전을 술판에 던져놓고 주막 밖으로 나왔다. 마을에 돌아온 용이는 길에서 돌이를 만났다.
"봉순어매한테 부탁받은긴데, 이거 못 전했다고."
보자기에 싼 것을 내어밀었다.
"머요?"
"가져가믄 알 기다. 가서 일러라. 문 잠가놓고 없더라고"
자기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집에 돌아온 용이는 연장을 헛간에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강청댁의 새된 소리가 쨍쨍 울렸으나 옷을 벗어 건 용이는 쓰러지듯 자리에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