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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통신 <17>
은비엄마의 사는 이야기(1)
#1 밥 실컷 먹고 삽니다.
우리가 크라이스트처치로 이민 간다고 했더니 모두들 돌았다고 했습니다. 거기는 한국 사람도 없는데 왜 거길 가냐고요. 그리고 외국 나가면 쌀밥은 못해먹고 사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당시 외국여행이 완전히 처음 이였거든요. 그래서 이삿짐에 밥공기는4개만 보냈어요. 밥 먹을 생각이 아니고 그냥 기념으로 가지고 있을라고…
그때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죽어라고 밥만 해먹고 삽니다. 밥 못 먹어서 죽은 조상이 있는 듯 말이에요. 막상 와서 보니 교민도 있었고, 다 밥해먹고 살더라구요. 그리고 된장찌게를 푹푹 끓여먹기도 하고…
#2 공기의 맛 정말 시원해
크라이스트처치의 첫 인상은 무지 깨끗하고 좋았습니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처음 들이킨 공기의 맛은 정말 시원하고 맛있었거든요.
그 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지요. 1993년 7월 11일. 그 후 지금. 그냥 더 늙기 전에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해보자고 무작정 온 것이 벌써 7년이 지났습니다. 두 돌 된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이제는 거기에 둘이나 플러스가 되었습니다.
#3 은비 학교 가는 날 무지 울다
우리 은비가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간 날 저는 무지 울었습니다. 영어도 잘 못하는 아이를 교실에 떨어뜨려 놓고 오는 마음은 갈갈이 찢기고 있었지요. 괜히 이민을 왔나봐 하는 후회가 하루 온종일 머리를 어지럽혔지요. 제 옷자락을 잡고 놓지 않던 은비가 얼마나 가여운지…
하지만 다행히도 반 아이들이 우리 은비랑 서로 놀겠다고 싸움이 일어나는 다행스러운 일이 생기는 바람에 걱정도 잠시 후에는 행복으로 변하였습니다. 정말 아이들은 빠르더군요. 6개월 정도 지나니 그냥 말을 하더라구요.
#4 사우나탕 이야기
한국에는 사우나탕이 남녀로 구분이 되어 있는데 제가 사는 곳에는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긴 일인데요...
어느 날 교민 김모씨가 사우나탕에 갔습니다. 1호실, 2호실 두 곳 중에서 1호실로 들어간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유인즉 한국에서 놀러온 아리땁고 쭉쭉빵빵 뻗은 여대생 둘이 가슴을 드러낸 채 마구 땀을 흘리고 있더랍니다. 그러다 왠 동양 아저씨가 들어오니 거품을 물고 쓰러질 밖에요. 그 아가씨들은 남녀 구분이 있는 줄 알고 옆방에 남자가 있으니 당연히 나머지 방이 여탕인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 운 좋은 아저씨는 미안해하며 2호실로 들어갔지요. 그랬더니 그날은 완전히 운수가 대박 터진 날입니다. 역시 팔등신 미녀인 키위아가씨가 홀라당 벗은 채 누워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저씨가 너무 넘사스러워서(속마음은 어땠을지 상상이 가시죠?) 못 들어가고 서 있었더니 키위 아가씨가 " Come on in " 하더랍니다.
그 후로 물 좋기로 소문난 그 사우나탕은 한국아저씨들로 한동안 붐볐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바로 우리 남편이었다는 것을 저도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5 입양
어느 날 딸아이와 같은 반 아이의 엄마로부터 한 엄마를 소개 받았습니다.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온 가정인데, 그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해 입양을 하였는데 그 아이가 바로 한국아이였습니다. 남편은 의사이고 부인은 건축가인데 자기들의 입양된 아이를 위하여 한국에도 다니러 가고, 심지어는 그 아이의 친엄마와 연락을 하며 지내게 하고 싶어서 노력을 하였지만, 생모는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아이를 낳았던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해서 엄마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부모가 그 아이에게 대하는 것을 보니 복 받은 아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정말 아이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6 수고비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출산하게 되면 1,500달러, 한화로 약 120만 원 정도의 돈을 준답니다. 저는 첫아이는 한국에서 제왕절개로 낳았고 이곳에 와서 둘째를 낳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소변검사를 해서 임신인 것이 판명되면 그 소변검사비부터 공짜 입니다. 만약 임신이 아니면 돈 내야 하구요. 아무튼 저는 그로부터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진찰비는 몽땅 free였습니다.
간호사, 의사가 친절한건 말로는 표현 못합니다. 공짜로 아이 낳고 입원해 있는데 그렇게 인간대접을 받다니 정말 처음에는 괜히 미안했어요. 그리고 둘째는 순산을 했습니다. 첫아이가 수술이었다고 둘째를 똑같이 수술할 필요는 전혀 없더라구요.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요. 그리고 작년에 셋째를 낳았습니다. 역시 수술이 아니었는데 난산이었지요. 하지만 넘 건강하게 잘 크고 있습니다. 친절한 것도 모자라 아이를 낳으면 수고비까지 준다니 넷째를 한번 시도해 볼까요?
*註 : 최근 뉴질랜드 환율이 계속 오르고 있음. 10월 28일 현재 환율은 803원임(살 때 기준)
#7 번지점프 저지르고
어느 날 퀸즈타운에 놀러 갔습니다.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 5~6시간 정도 걸리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는 많은 구경거리가 있지만 특히 번지점프로 유명하지요. 한국에서 시누이아가씨가 다니러 와서 겸사겸사 놀러 간 거지요. 그리고 번지점프 하는 곳에 들렸더니 완전히 우발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뛰어내리다 죽어도 업소 탓이 아니라는, 유서가 될지도 모르는 종이에다 사인도 하고, 몸무게 달아서 내 무게에 맞는 밧줄도 고르고 마지막으로 돈도 내고…
그런데 중요한건 뛰어내리건 말건 환불을 안 해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100불이 넘는 돈만 내고 그냥 갈수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저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낙하…
전 죽어도 슈퍼맨이나 배트맨은 안 될 거예요. 그리고 죽는다 해도 절대로 투신자살도 안 할거구요. 혹시 한국에서 자연농원이나 어린이대공원에서 바이킹 타보신분들 있지요? 그것과 똑같은 기분x100배라고나 할까요? 하여간 그 이후로 정말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여행오실 기회가 있으면 한번 시도해 보세요. 좋은 추억거리가 되실 거예요.
#8 하루 종일 한국 방송 시청
그 동안 이곳 크라이스트처치 교민사회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교민업소의 숫자도 놀라웠고, 날이 다르게 늘어나는 교민의 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원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교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서 좋은 점도 있고, 또한 부작용도 생겨났습니다.
교민이 늘어 시끄러워지고 문제점도 생겨난다고 해서, 한국교민이 늘어나는 것을 무조건 싫어하기에는 동포의 정(?)에 너무 목말라했던 교민사회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한국에서처럼 살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자장면 한 그릇을 먹으려고 해도 어디서 먹는 게 좋을까 하고 고민을 할 수 있을 만큼 자장면을 파는 곳도 많습니다. 옛날에 자장면이 먹고 싶어 짜파케티라도 먹게 되면 감지덕지 하던 때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요즘은 정말 별의 별것을 다 팔더라구요.
게다가 하나 더 혁신적인 것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루 종일 한국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이곳에 비디오사업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몇 주 지난 것이 방송되는(때론 생방송도 있지만)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방송을 하루 종일 본다는 것이 나이가 들어가는 분들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아침마당'에서 이상벽씨를 보니 반갑기도 하구요. 방송을 100% 알아듣고 같이 울고 웃으면서 시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격인지…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곳에서 방송되고 있는 한국라디오 방송의 존재 입니다.
하루 종일 한국노래를 들을 수도 있고 한국어로 진행이 됩니다. 비록 오밤중에는 노래만 나온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그 시간에 제가 깨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네요.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진행자들의 말솜씨에 점점 듣는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하고 싶은 일중에 하나가 바로 '성우'거든요...
아무튼 TV에서 한국방송 보다가,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차안에서 한국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다가....이렇게만 살다보면 영어가 조금 문제되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살게 된 것이 나쁘지는 않네요.
이제는 미국의 LA도 부럽지 않습니다. 없는 게 없는 크라이스트처치 교민사회거든요. 한 가지만 조심한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상처주지 않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9 샘터
저에게 몇 해에 걸쳐 한 달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행사(?)가 있습니다.
무슨 행사인가하면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정성스럽게 배달된 선물을 받는 것이지요. 매달 똑같은 내용물의 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샘터'라는 책입니다.
만나 뵌 적이 없어서 얼굴도 모르고 제가 그분께 그런 귀한 선물을 받을 만큼 잘해드린 것도 없는데 매달 선물을 보내주고 계십니다.
샘터라는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용자체도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멀리 뉴질랜드에서 읽게 되는 샘터는 푸근함이 배가 됩니다. 이곳에서 한글로 된 읽을거리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귀하게 느껴지지요.
항상 그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대로 인사를 해본적도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도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시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뿐이지요.
#10 테리에게 생긴 특별한 일
크라이스트처치에 와서 만난 키위친구 중에 테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마흔 중반의 착하고 잘생긴 미혼남입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테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테리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유난히 미혼생활을 즐기고 잘 컨트롤하기 때문 이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러던 어느 날.......
글쎄 테리가 결혼을 하겠다고. 그것도 야사시한 중국여인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너 또 농담하는구나... 하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는데 가만 보니 농담이 아닌 거 같았습니다. 진짜 진담이었더군요. 그 순간 바로 대책회의에 들어갔습니다.
결혼식 날짜는 언제고, 우리가 도와줄 것은 없는지, 있다면 다 말하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늦은 나이에 처음 결혼을 하느라 테리는 한동안 진정도 못하고 안절부절 했습니다. 결혼하면 살아가는 것이 더욱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그 후 시간은 꿈처럼 흘러가 결혼식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집 아이들은 모두 화동으로 꾸며서 한복을 다 입혔습니다. 워낙 인물이 뛰어나다보니(애비를 닮아서) 그야말로 광이 번쩍번쩍 나더군요. 거기에 일본친구 딸은 기모노를 입고, 키위애들은 드레스를 입고, 중국애는 중국옷을 입고 그야말로 온갖 인종이 다 모여서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테리부인은 중국본토에서 발레선생님을 했던 여인이라 나이는 적지 않지만 몸매는 저의 딱 반이더군요.(혹은 1/3인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동양여인을 사모하던 테리는 호리호리 날씬한 중국여인을 낚아채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외에서 3시간정도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 다시 2차로 들어갔습니다. 중국음식점을 빌려서 피로연을 하는데 각 나라의 인종이 모두 모여 ‘손에 손잡고’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싱글로 남을 줄 알았던 테리의 결혼식은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인사말들을 저마다 남기면서요.
그중 가장 인상에 남는 말은 이곳 뉴질랜드에 유달리 아시안들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주기적으로 하는 윈스턴 피터라는 아저씨가 있는데 지금 이 결혼식에 꼭 초대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서양인이 즐겁게 일심동체가 되어서 일사분란하게 테리의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는데 왜 자꾸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느냐구요.”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날 테리의 결혼식에서는 키위친구, 미국친구, 중국친구, 일본친구, 한국친구(은비아빠..^.^)가 진짜 열심히 자기 몫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테리의 결혼식은 해피하게 마무리가 되고 지금도 둘이서 알콩달콩 살면서 깨소금을 가마니로 쌓아가고 있습니다.
테리가 결혼을 하니 불편한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무엇이냐 하면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테리의 집을 들락날락 하기가 조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착한 테리가 죽을 때까지 색시와 사랑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아껴주면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11 번개 이야기
어른들이 외국생활을 하게 되면 모두들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깨끗한 자연환경을 누리며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헐값(?)인 골프를 시도 때도 없이 치며, 온갖 정부의 혜택을 몸으로 느끼고 싶은 것이지요. 살다보면 어디에도 흠이 없는 곳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색다른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외로부터의 탈출도 아니고, 시험지옥으로부터의 탈출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단순하게 생각되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애완동물 키우기입니다.
한국에서의 아파트생활이 애완동물을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또한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애완동물에게 많은 시간을 배려하기는 힘이 듭니다. 새벽에 나가서 별이 총총하게 떠오르면 집에 오고, 그리고는 지쳐서 잠들고...
외국에 오면 아이들은 저마다 집안의 잔디밭에서 자기들만의 '예쁜 개'를 키우고 싶은 꿈을 꾸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부모들도 그런 아이들의 소원에 동조를 합니다. 정말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집을 구해 들어가면 덥석 개를 한 마리 사던지, 구하던지 합니다. 먹이도 주고, 각종 비타민도 줘보고, 개초코렛도 주고.. 하다못해 개장난감도 사주면서 며칠간 온 식구들이 엄청 재미있게 놉니다. 그 기간 동안 개는 거의 집식구와 피를 섞은 것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개가 아닌 '막내'라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요.
하지만 며칠 후 서서히 개 치닥거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귀엽던 개똥이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개똥뿐만이 아닙니다. 산책시키고 목욕시키고 먹이주고 똥.오줌 치우고.. 온갖 치닥거리를 하다보면 하루가 바쁩니다.
저도 식구들의 등쌀에 밀려서 번개라는 이름의 개를 키우지만 자기들이 알아서 돌보겠다던 처음의 약속은 다 어디가고, 저 혼자 밥주고, 똥치우고 하면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미운정'도 정이라고 싸우면서 정이 들었나 봅니다. 개를 싫어하는 사람도 키우다보니 키우게 되더군요.
요즘도 주위에서 개를 키우고 싶어 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예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로지 인생목표가 '개 키우기'인 것처럼 하루 종일 개 이야기도 많이 했었지요.
그러면 저는 번개를 키울 때의 안 좋은 점을 잔뜩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제가 내리는 결론은 그래도 번개라도 곁에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는 것입니다.
바람 불고 천둥번개가 쳐서 무서운 날, 힘들고 무서울 때 든든하게 주인 곁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우리 집 번개 입니다.
이젠 나이가 제법 들어서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하지만 그 녀석이 없어지면 마음이 많이 허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있을 때 잘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2 나는 한국인의 딸
이곳의 키위 남성들이 집안일을 무지하게 많이 도와주고 또한 아이들 키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고 휴일에는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또 다른 희생과 봉사를 하는 것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의 딸인지라 '김두한'처럼 우악스럽고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한국남성들에게 더 점수를 주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순한 양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경기도를 주름잡고(?) 다니던 남편의 모습이 기억의 한편에 '영웅'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기분을 키위여자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요?
#13 낚시 이야기
뉴질랜드는 바닷고기들도 순진한가 봅니다. 낚시를 잘하는 사람인지, 못하는 사람인지 구분을 잘 못하는지 경험이 부족한 왕초보 낚시꾼에게 서로 앞다투어 잡히려고 애쓰곤 합니다. 누가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믿지도 않겠지만 한때는 양동이가 가득 찰 만큼 잡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중에 귀여운 아기 복어는 어찌나 귀엽던지 깨물어 주고 싶었지만 독 먹고 죽을까봐 실천은 못했지요. 아기상어도 또한 귀여워서 집에 있는 어항에다 키울까 하다가 혹시 밤새 덩치가 커져서 우리 아이들이라도 잡아 먹을까봐 그냥 놓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여간 너무도 신기하고 또 신기해서 반바지를 입고 있는 다리가 샌드플라이에게 수도 없이 뜯기고 있는 것도 느낄 수가 없었지요. 허벅지와 종아리 살이 대단했으니(지금까지..) 아마도 배탈이 날만큼 피를 빨아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밤새 다리를 벅벅 긁으며 몸부림 쳤던 기억이 납니다.
즐거움의 대가는 너무도 처절하다는 뼈저린 교훈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낚시를 언제부터인지 귀찮다고 미루고, 바람이 분다고 미루고...지금까지 미루고 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렇게 즐거웠었는데 말입니다.
#14 교민들의 직업
한국에서 유능한 인재에 속했던 분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를 하셨습니다. 이민, 유학, 장기사업비자, 워크비자 등등 이유는 갖가지 입니다.
그분들이 모두들 한국에서처럼 이곳에서도 남들이 다 우러러보는 직업을 가지고 고소득을 올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이민자들이 많이 갖는 종류의 직업을 갖게 되지요. 마음 같아서는 왜 한국에서처럼 대접받고 우대받는 직업을 갖고 싶지 않겠습니까...마흔이 넘는 나이에, 혹은 쉰살이 넘는 나이에 영어권 나라에서 마음에 드는 직업을 골라서 잡는다는 것은 바램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인교민들이 종사하는 분야는 주로 데어리, 택시, 피시 앤 칩스입니다. 다른 종류의 일보다 영어를 조금 덜 사용해서 그나마 쉬운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힘든 점은 다 있습니다.
이른 새벽까지 택시를 운전하면서 술을 진탕 먹은 사람과 실랑이를 하고, 택시비가 없어서 도망가는 사람을 쫓아가느라 100m달리기도 하고 힘든 일이 많습니다. 하다못해 외상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따로 수금을 하러 가기도 하지요.
데어리를 하는 분들은 하다못해 동네 꼬마가 와서 사먹는 몇 십 원짜리 낱개 사탕까지 열심히 팔고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요즘 돈 축에도 끼지 못할 돈이겠지요. 그렇게 티끌모아 태산을 만들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피시 앤 칩스를 하는 분들 중에는 분명히 주문한 것을 가지고 가서 다 먹고 난후에 입가에는 케찹까지 묻히고 와서는 아직 안 가져갔으니 다시 주문한 것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차라리 입가에 케찹이나 지우고 오던지 말입니다..
물론 이보다 더 심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지만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겠지요.
이밖에도 많은 분들이 각종 분야의 직업과 비즈니스를 골고루 나누어 하고 계십니다. 한국에서의 지위는 잊어버리고 이곳의 실정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과감하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꼭 특별한 일을 하고 대단한 지위에 올라야만 외국생활에 성공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내 자신이 하루하루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남들의 특별한 성공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직업을 하찮게 여기고 낮추어 보는 분위기가 되어 간다면 교민사회가 자리 잡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존경받는 분위기가 더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어느 골프유학생이 하는 말 " 뉴질랜드에서는 택시기사도 골프를 치는구나"라고....
#15 때가 되면…
해외교포 중에 가장 숫적으로 우세하고 일반화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재미교포'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연예인들은 재미교포 위문공연을 많이 갔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꾸준하게 가고 있구요..
그런데 요즘 뉴질랜드의 한국인 숫자도 만만치 않아지고 있습니다. 오클랜드는 이곳 크라이스트처치보다 훨씬 많은 한국 분들이 거주하고 계시지요.. 이민 오신 분, 유학 오신 분, 관광 오신 분, 장기사업비자로 오신 분, 워크비자로 오신 분 혹은 친지방문 중이신 분...
여러가지 이유로 정말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이곳 뉴질랜드로 오고 계시고 당분간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전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재뉴교포'의 숫자도 막대해(?) 지겠지요. 물론 미국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겠지만 그래도 꽤 많은 한국인들이 자리 잡고 살고 있고, 또한 한국인 후세들을 위해서 열심히 터전을 닦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재뉴교포'들을 위한 위문공연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꼭 한국연예인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한국에서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결코 타국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적인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지요.
아무리 잘난 '스파이스 걸'들이 노래하며 춤을 추어도, 야리꾸리한 로비 윌리암스의 노래를 들어도 가슴을 흠뻑 적셔 주지는 못합니다. 살아온 문화가 틀리니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겠지요...
어쨌든....
이제는 재뉴교포를 위한 각종 이벤트가 시작되어야 할 때라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한국에서도 유학생활에 탈선한 모습만 카메라에 담아가려고 비싼 비행기값을 낭비하며 취재를 오지 말았으면 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유학생이나 교민자녀들도 취재하는 공평성을 부여하고 성공스토리도 알려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경우도 있지만 키위사회에 적응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도 알려 주시구요..
맨날 골프만 치면서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나마 그렇게도 하지 않으면 여기서 그 많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꾸 이상한 모습만 뒤져서 찍어가지 말고 열심히 사는 분들을 위한 알찬 위문공연을 기획해서 밝은 모습으로 뉴질랜드를 방문할 날을 기대해 봅니다.. 곧 이루어지겠지요...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도 오고, 국민가수 조용필씨도 오고. 한 번씩 고루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야무진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바램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