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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들려준 88가지 지혜
지은이: 로렐브레닌 호프만 엮음 신미향 옮김
출판사: 사람과 책
머리말
지난 십팔 년 동안 사회 복지 사업에 종사하면서 가정 생활의 변함없는 가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분명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껴 주며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근본은 바로 부모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부모의 관심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손 가정이나 사랑 없는 가정이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생활이 풍요로워질수록 이 같은 가정이 많이 존재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되돌아 보면 향수에 젖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특히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 지난 날 부모님의 가르침과 사랑에 더욱 깊이 감사하게 된다.
우리 어머닌 193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학을 마치셨다. 어머니는 소위 '슈퍼우먼'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용감하신 분이었다. 대학 졸업 후 어머니는 디트로이트의 공립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가 후에는 병약하신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셨다. 아버지가 마흔 두 살의 나이에 대장염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어머니는 계속해서 사업을 운영해 성공 궤도에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나와 두 동생을 훌륭하게 키우셨다. 우리는 힘들었던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신 지혜와 충고 그리고 아낌없는 보살핌을 언제까지 잊지 않고 가슴 속 깊이 기억할 것이다.
나는 어머니 외에도 할머니들한테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애나 할머니는 엘레베이터가 없는 고층 아파트에서 사셨는데, 그 곳은 언제나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에는 주로 할머니 아파트에서 주말을 보냈다. 그 곳에만 가면 공주 대접을 받았는데, 특히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집안을 가득 매우 매콤한 러시아식 요리 향기를 맡으면서 느긋하게 목욕을 하던 기억이다. 목욕이 끝나고 나면 할머니가 두껍고 털이 보송보송한 커다란 수건으로 내 몸을 감싸 주셨고, 난 그렇게 몸이 마를 때까지 침대에 누워 한가하게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와 난 거실에 앉아서 과일과 사탕을 나눠 먹으며 오랫동안 텔레비젼을 보기도 했다.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은 언제나 나를 사랑 받는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만들었다.
증이모 할머니 역시 내 기억에 소중히 자리잡고 있다. 증이모 할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신경 질환을 앓았기 때문에 얼굴 근육과 목소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나는 인내와 연민을 배웠다. 할머닌 목소리 경련이 심했지만 결코 부끄러워하진 않으셨다.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일하셨기 때문에 매일 오후 할머니께서 잊지 않고 전화를 걸어 주셨고 난 할머니에게 학교생활, 성적, 또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말하곤 했다.
증이모 할머닌 일단 전화를 걸면 간단하게 끊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 전화를 도
중에 끊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난 할머니 전화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습관을 길렀다. 부엌을 치우기도, 신문을 정리하기도, 때로는 노트 정리를 하기도 했다.
정신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는 병원에서 멀지 않은 할머니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치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며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업, 관심사, 그리고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서. 할머닌 언제나 따뜻한 격려를 잊지 않으셨다.
내게는 또 한 분의 증이모 할머니가 계셨다. 도로시 할머니는 내 학교 성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렇다고 성적 때문에 날 당황하게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할머닌 내 친구들, 특히 남자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셨고, 언제나 시의 적절한 충고로 내가 사교성을 기르고 절도 있는 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언제나 집을 멋지게 꾸며 놓으셨고 예술 작품도 많이 소장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옷차림에서도 세련미가 돋보였는데 그 미적 감각을 모두 내가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아버지가 전해준 99가지 지혜(The Book of Father's Wisdom)"를 집필하는 동안 나는 어머니들이 남긴 지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역사 속에 훌륭한 여인으로 기억된 사람들은 아들과 딸에게 어떤 지혜를 들려주었을까?
공부, 사랑, 성공, 직업, 사회 생활에서 아이들이 힘든 문제에 부딪쳐 자신감을 잃고 도움을 필요
로 할 때 어떤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 주었을까? 첨단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과거 어머니들이 전해준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지금까지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이번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써 내려간 책은 없다. 수백 권이 넘는 전기, 자서전, 언행록, 서간집을 읽으며 어머니들이 남긴 보석 같은 지혜를 찾는 즐거움과 환희는 어떤 말로도 적절하게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방대하고 대담한 역사 기행을 마무리하며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첫째, 아이들이 자라서 어머니의 어떤 모습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간직할지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장 감명 깊이 읽은 회고록을 보면 그 내용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과 그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그 사랑은 과학이나 예술, 음악, 운동, 여행 유머 등 다양한 형식에 담겨 있지만 내용은 모두 같았다. 이렇게 본다면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하는 모슨 순간과 사소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어머니의 충고는 참으로 놀라운 힘을 가진다. 부모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줘도 아이들이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저명 인사들이 남긴 수많은 삶의 기록을 읽으면서 얻은 확신이 있다면 아이들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절실히 느끼는 무엇이 분명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신의 충고가 별 도움이 안 됐다고 지레 짐작할 필요는 없다.
셋째, 사랑이나 생활처럼 우리 삶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외부 환경은 변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수십 세기 전과 다를 바 없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내가 읽은 편지에 담긴 슬픔과 기쁨은 오늘까지 가슴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감정을 일일이 내보이며 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이제 난 그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비게일 알콧은 잠든 딸아이 루이자 메이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 편지를 읽고 엄마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너처럼 사랑스럽고, 이 엄마를 향해 아름다운 사랑을 간직한 딸을 주신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안 코선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이렇게 네 베개에 누워, 네 입술에 따뜻한 입맞춤을 하고, 너를 위해 작은 기도를 해 주마. 내 사랑하는 딸아!"
그레이스 헤밍웨이는 스물한 살의 철없는 아들 어네스트 헤밍웨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이 아니면 저 세상에서라도 널 지지해 줄 테다. 널 사랑하는, 그리고 너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엄마가." 이보다 더 분명한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우린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도전과 존경이 함께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무언가를 단정하고 완결지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부디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가 얼마나 끈기 있고 소중한 것인가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감사의 말
이 책을 쓰면서 참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의 소중한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엘리스 프라이드 마텔은 이 작픔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히엘 블랙 편집장의 관심을 끌게 함으로써 이 책의 출판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또한 모니카 해리스 편집장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이 책을 구상하면서 남동생 데이브와 여동생 엘리노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머니는 교사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요즘 아이들이 겪는 문제와 어려움을 자세히 설명해주신 우리 아이들 담임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 중에서도 가족들의 끊임없는 격려는 너무나 소중했다. 옆에서 엄마의 건강을 챙겨 준 애론과 제레미 덕분에 집필하는 동안 언제나 쾌활하고 균형잡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내가 이 책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교훈을 일상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완성하고 나 자신이 세운 목표를 완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 준 남편 에드워드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인생을 여는 지혜
자신의 삶에 만족해라
애니 핸더슨과 손녀 마야 안젤로우 (Annie Henderson and her granddaughter Maya Angelou)
마야 안젤로우는 1993년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서 신작 시 한 편을 낭독하면서 그녀의 인생에 또 한번의 큰 획을 그었다. 그녀는 잡지사 기자로, 작가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기사와 수십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 가운데 "새장에 갇힌 새가 우는 이유를 알아요(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 "감동받지 않을 테야(I Shall Not Be Movel)", "스바가 노래 부르다(Now Sheba Sings the Song)"등이 있으며 그녀는 퓰리처 상과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인종 차별이 남아 있던 아칸소 주 시골 지역에서 자랐지만, 전통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박사와 함께 일했다. 이후 배우, 극작가, 프로듀서, 감독으로 활약하면서 텔레비전 명사가 되었고, 캘리포니아 주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에서 미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녀는 회고록 "이제 여행을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으리(Wouldn't Take Nothing for My Journey Now)"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아칸소 주 스텐스에서 가게를 운영하시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는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가게에 들어올 때마다 늘 잊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들이 가게 문을 들어서자마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급히 부르셔서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이셨다.
"마야, 이리온, 얼른. 잘 들어!"
그리곤 손님을 대하셨다.
"토마스, 오늘은 어때?"
"별로에요, 뭐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아직도 여름이 가려면 멀었나봐요. 이젠 지쳐서 넌더리가 날 지경이라고요. 더운 건 딱 질색이거든요. 정말 죽을 맛이에요."
토마스라는 사람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베어 있었다.
그의 얘기를 듣는 내내 할머니는 팔짱을 끼고 꼿꼿한 자세로 서서 '그래? 그렇구나.'하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실 뿐이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으로는 나를 보시면서 내가 그의 불만을 들었는지 다시 확인하곤 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우는소리를 했다.
"전 쟁기질이 죽기보다 싫어요. 아무리 흙을 파봤자 남는 게 없어요. 당나귀도 제멋대로고...... 도움이 전혀 안 된다니 까요.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는데다 온 몸이 안 쑤신 데가 없고, 눈에는 온통 먼지, 심지어 코 안까지 먼지로 가득 찼어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는 역시 팔짱을 끼고 근엄한 모습으로 서서 '그래? 그래.'만 반복하며 나를 돌아보셨다.
징징대던 사람이 가게 문을 나서자마자 나를 가까이 부르시더니 수천 번도 더 하신 듯한 말씀을 또 반복하셨다.
"마야, 죄다 불평하는 소리 들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건, 백인이건 흑인이건, 이 세상 누구나 다 잠을 잤을 게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 아니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단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야지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침대는 차디찬 관이 되어 버렸고, 그들이 덮은 이불은 수의가 되어 버렸단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오늘 토마스가 잔뜩 불만을 털어놓은 더운 여름 날씨를 단 오 분이라도 즐기고 싶어했을 것이고, 아까 그 사람이 짜증내던 쟁기질을 십 분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랐을 게다.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된다. 정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일을 하면 된다. 그것마저 불가능하면 네 생각을 바꿔라.
절대 불평하지 마라."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가슴 깊게 남는 소중한 가르침이 있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 상 때부터 열세 살까지 할머니는 그런 순간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가르침을 주셨다. 불평은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클래시사 밀러와 딸 아가사 크리스티(Clarissa Miller and her daughter Agaha Chistie)
최고의 추리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는 1890년 영국 데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집에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간호사로 자원해 이하는 동안 작품 활동에 매진했고 곧 첫 작품을 출판했다.
1926년 "로저 애크로이드의 살인(The Murder of Rogger Ackroyd"은 출판되자마자 대대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이후 일흔다섯 편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했으며, 그 가운데 스물 다섯 편은 명탐정 에르큘 포와르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검찰의 증인(Witness of the Prosecution)", "나일 강의 죽음(Death of the Nile)",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Muder on the Orient Express)"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크리스티는 "자서전(An Autobiography)"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부모들은 현실적인 생각으로 자녀들의 행복과 성공에 대해 더 많이 신경 썼던 것 같다. 체면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는 일 따위는 훨씬 적었다는 뜻이다. 오히려 요즘의 부모들이 자신의 체면 대문에 자녀의 성공을 더 바라는 것 같이 보인다.
그 옛날 부모들은 객관적인 눈으로 자녀들의 능력을 판단했다. 큰 애는 아름다운 여인이 될 것이고, 둘째는 영리한 사람이, 그리고 셋째는 평범한 데다 그리 지적인 타입도 아니다. 그러니 셋째 아이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등등. 물론 때로는 부모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지만 대체로는 맞았다. 자녀에게 없는 것을 부모가 요구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위안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겸손이라는 미덕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인생이란 카드 놀이처럼 일단 카드를 늘어놓았다면 놓인 패를 보면서 무엇이 최선의 방법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당시 우리는 천재나 부잣집 아이들을 부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라
마벨 러셀과 딸 브루크 애스토어(Mobel Russel and her douagher Brooke Astor)
자선 사업가 브루크 애스토어는 뉴욕 시 최고의 명사로 알려져 있다.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에서 태어난 그녀는 정규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잡지사 기자로 성공할 수잇었다. 한 번의 이혼과 두 번의 사별 후에도 그녀는 여러 번 결혼했다. 그 가운데 전 남편 고 빈센트 애스토어는 1959년 사망 후 그녀에게 엄청난 재산을 남겼고, 덕분에 그녀는 자선 사업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막대한 재력에 사교성까지 갖춘 그녀는 박물관, 화재 보호 프로젝트, 문화 재단을 통해 활발한 자선사업을 펼쳐 나갔다. 또한 뉴욕 시립 도서관 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선전 "발자국(Footprints)"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가 배운 것은-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대화였다.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 아닌 서로를 배려하는 대화를 통해서만이 참되고 풍부한 교류를 나눌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다. 단지 생각과 의견 교환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괴로움도 함께 나누게 된다.
사실 가족이 모여 저녁을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완벽한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가 언제나 하신 말씀이 있었다.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것만큼 소중한 시간은 없을 게다. 하지만 서로가 대화를 나누려는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가 가족간의 대화를 늘 강조하셨기 때문에 나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언제나 많은 생각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네가 주위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세상에는 얘기할 게 아무 것도 없게 된단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흔히 어른들이 어린아이를 대화에 참여시켜 낯선 세상 이야기를 듣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어머니는 우리를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 주셨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 주셨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분위기에 매료되었고 대화 속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곤 했다. 그 시간들은 어머니가 내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그 선물 덕분에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루함을 느끼는 법이 없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꾼이셨다. 그리고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내가 느끼는 점을 자연스레 표현 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이 세상 누구와도 진실된 대화를 나누며 정을 쌓을 수 있었다.
자신을 믿어라
조지아나 러셀 백작 부인과 손자 버트랜드(Countess Georjiana and her grandson Berthrand)
웨일즈 출신의 버트랜드 러셀은 20세기 최고의 철학가로 논리학과 분석적 접근에서 특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작품에는 "수학 원리(Principle of Mathematics!)", "인간의 지식(Human Knowledge)"등이 잇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하게 독립을 추구했던 사색가 러셀은 반전반핵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일생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버트랜드는 네 살 때 부모를 여의고 사회 저명 인사였던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상을 역임했고 러셀 경이었고, 할머니는 해리엇 부인이었다. 버트랜드가 여섯 살 때 존 경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단둘이 지내야 했다. 그의 주요 저서만큼이나 널리 사랑받은 책 "자서전(Autobiography)"에서 버트랜드는 이렇게 회고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만큼 내게 중요한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자였으며, 정치와 종교 문제에 상당히 개방된 사고의 소유자였다. 일흔에도 유니텔리언교로 개종하실 정도로. 그러나 도덕과 관련된 일
이라면 지나칠 정도로 철두철미하셨다. 물론 할머니의 생각을 현대 심리학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만은 명확하게 서 있었다.
할머니가 늘 강조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공공 정신,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칭송 받아야 할 가치이며, 물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집착과 허영심은 악덕이다. 선량한 사람이라면 언제나 훌륭한 가치를 본받아 행동으로 옮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악랄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선량한 마음을 먹는 때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할머니는 두려움을 모르셨다. 전통 관습에 굴복하지 않았고 언제나 공익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수의 의
견이라도 무분별하게 따르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의 이런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고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또 할머니는 내게 성경을 주셨는데, 그 겉표지에는 가장 아끼는 글귀를 적어 주셨다. 그 가운데 가
장 생각나는 말이 있다. "다수의 악행을 따르지 말지어다." 할머니 덕분에 나는 두려움 없이 소수의 입장에 설
수 있었다.
캐로 맥윌리엄스와 딸 줄리아 차일드(Caro McWillams and her daughter Julia Child)
줄리아 차일드의 세계 최고의 요리 전문가이다. 지난 삼십오 년간 그녀는 "프랑스 요리의 진수(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 "요리법(The Way of Cook)", "최고의 요리사와 요리를(Cooking With Master
Chefs)"을 포함한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했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출연해 여러 편의 쇼 프로도 진행
했는데, 그 가운데 1996년 "줄리아와 함께 요리를(Baking at Julia's)"은 장기간 방송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패
시디나에서 양대전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서른일곱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파리의 유명한 코르
동 블르에서 요리 수업을 시작했다. 그녀의 인생을 그린 "인생의 묘미(Appetite for life)"에서 작가 노엘 피치
는 그녀가 따뜻하면서도 활발하고 외향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었던 것 자유 분방한 어머니 덕분이라고 말한
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줄리아의 어머니 캐로는 예의바르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과 아
이들에게는 언제나 솔직하고 거리낌없는 친구였다. 애완견을 사랑하고, 테니스를 좋아하며 친구들과 잡담을 즐
기는 솔직한 여인이었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이라면 가정 일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었
다. 그러나 캐로는 딸이라고 해서 바느질이나 몸매 가꾸는 것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언제나 아이들을 존중하면
서 놀이를 즐기고, 맘껏 웃으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도록 했으며, 무엇보다 관심 있는 일을 하도록 가르쳤다.
그녀의 자녀 중 가장 널리 이름을 떨친 줄리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정말 어머니를 사랑했고 무슨 일을 하든 어머니와 함께 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우리를 따
뜻하게 맞이해 주셨어요. 사실, 어머니라기 보다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지요. 지금도 생각나는데, 어릴 때 소
파에 주욱 누워 있는 우리에게 책을 읽어 주시곤 했어요. "전장의 아들, 봅(Bob, Son of Battel)" 같은 이야기
를 들으면서 우리 셋은 흐느끼기도 했죠. 어머니는 정말 감정이 풍부하신 분이셨어요. 그리고 아주 솔직하고
거짓이 없으셨죠. 늘 탁자에 앉으셔서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휴 더워, 얘들아, 덥지 않니? 우리 창문 좀 열자!."
어머니는 삶에 대해서도 육체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지니고 계셨어요. 굳이 어려운 말을 쓰거나 애써 잘
난 척하는 법이 없었어요. 최신 유행이나 멋진 옷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요."
최선을 다해 원하는 것을 성취해라
나탈리 펄스크와 딸 로렌 바칼 (Natalie Perske and her daughter Lauren Bacall)
아름다운 미모, 거침없는 말투에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로렌 바칼은 수십 년간 할리우드 무대를 주름 잡
은 은막의 연인이었다. 그녀는 1944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영화 "소유와 비소유(To Have and Have Not)"에
서 험프리 보카트 상대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스물 다섯 살이나 연상인 보기와 결혼했고, 스
크린 안과 밖에서 천생연분을 자랑하며 훌륭한 한 쌍을 이루었다. 은막의 스타 그레타 가르보와 마들린 다이
트리치가 그랬듯이 바칼 역시 다양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빅슬립(The Big Sleep)"에서는 부유한
가정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비비안을, "바람에 씌어진(Written on the Wind)"에서는 정신나간 아내로 분한
그녀의 연기는 어느 한 곳 흠잡을 데가 없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팔 년 정도 연기 생활을 그만두었던 그녀는
1974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Muder on the Orient Express)"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그녀는 자서전 "혼
자서(By Myself)"에서 이렇게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당신만의 꿈을 지니고 계셨다. 구혼자도 여러 명 있었던 것 같다. ...... 그러나 당신은 더욱 원대한
포부를 품고 계셨다. 어머니에게는 여자 친구가 많았는데 모두 현명하고 직업 정신이 철저하신 분들이었다. 그
중 두 분은 독신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계셨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독신을 주장하셨던
분들이었으니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아마 혼자 사셨을 것이다. 사랑에
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평생을 기다리던 왕자님이 아니라면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고 계셨으니까. 어
머니는 언제나 인격을 강조하셨다.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세상에는 옳은 일과 그른 일이 있다. 거짓말, 도둑질, 남을 속이는 일은 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직업을 가져
야 하고 또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원하는 것을 성취해라. 최선을 다하는 것만큼 자랑스러운
일은 없다. 그리고 돈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 돈을 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만일을 대비해 언제나 저축을 하도록 해라(안타깝게도 이 교훈만큼은 아직도 실천
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보통 재치 있는 분이 아니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여유 있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셨
다. 그 덕분에 힘든 시기도 거뜬히 견뎌내실 수 있었던 것 같다.
늙는다는 사실에 슬퍼하지 마라
시도니 콜레트와 딸 시도니 가브리엘(Sidonie Colette and her duaghter Sidonie Gabrielle)
콜레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여류작가, 시도니 가브리엘은 20세기 문학의 거장이다. 프랑스 생
소브웨어 엉 쀠세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초기에는 남편 헨리 고티에 빌라르와 함께 작품을 썼다. 이후 1906년
남편과 이혼하고 음악홀에서 무용수와 팬더마임 배우로 일하기도 했지만 결국 글 쓰기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
녀는 반자전적 소설인 끌로딘 시리즈 "셰리(Cheri)", "지지(Gifi)"를 통해 사랑과 질투에 빠진 여성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작가로서 명성을 쌓은 후 그녀는 특히 어머니와 가까이 지냈다. 다음 편지는 그녀의 어머니가 일흔
중반의 나이에 쓴 편지이다. 콜레트는 어머니의 편지 속에서 어머니가 늙는다는 사실을 얼마나 훌륭하게 극복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안녕하십니까. 사랑하는 딸아이와 같이 지낼 수 있도록 저를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딸아이와 함께
지내기니 제가 딸아이를 볼 기회가 얼마 드물고, 또 아이와 함께 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초대해 주신 배려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당분간은 초대에 응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안타깝군요. 사실, 제가 아끼는 분홍 선인장 꽃이 이제 막 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선인장은 선물로
받은 것인데, 아주 희귀한 종이라 이 곳 기후에서는 사십 년에 한 번 정도 꽃이 핀답니다. 이제 제가 나이가
꽤 들었으니 이번에 꽃이 피는 걸 못 보면 앞으로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송한 말씀
의 편지를 씁니다.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그 친절을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중년이 된 콜레트는 이 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형편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재능에 실망할 때마다, 나이가 들어 근육의 힘이 빠지고 욕망도 쇠퇴한 나 자신을 보며 고통스러울 때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쓴 여인의 딸이다. 이 몇 줄 안 되는 편지에는
일흔여섯이라는 나이에 여행을 준비하시다 선인장이 꽃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모든 걸 중단
하시고, 심지어 딸아이 보고 싶은 생각까지 잠재울 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 사실만은 잊지 말
자. 나는 고개 숙여 선인장 향기를 맡으며 기뻐하고 꽃마울을 터뜨린다는 약소에 환희를 느끼며 주름진 얼굴
에 환한 미소를 지으신 여인의 딸이다. 칠십오 년 동안 한 번도 지치지 않고 선인장처럼 아름다운 꽃마울을
터뜨리신 분의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교적인 태도를 길러라
팻 닉슨과 딸 줄리 닉슨 아이젠하워(Pat Nixon and her daughter Julie Nixon Eisenhower)
'팻'이라는 예명으로 세상에 더 알려져 있는 델마 캐서린 라이언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일랜드 출신
의 광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1912년 3월 16일 새벽에 태어난 그녀를 보면서 '수호신께서 보낸 선물'이라며 기
뻐했다고 한다. 곧 팻의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이사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멀지 않은 작은 농장에 자리를 잡았다.
열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팻은 아버지와 오빠 들을 위해 모든 가사를 도맡아야 했다. 열여덟 살 때
결국 아버지마저 몇 달을 병석에서 고생하시다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팻은 공부를 계속 하기로 했다. 교
내에서, 고급 백화점에서, 영화 엑스트라로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1937년 남 캘리포니아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그녀는 위티에르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듀크 법률 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개업을 위
해 고향으로 돌아 온 리차드 닉슨을 만났다. 그들은 작은 극단에서 만나 같은 연극에 출연해 친해진 것을 계
기로 1940년 6월 결혼식을 올렸다. 닉슨이 전심전력을 다해 정치인으로 자리를 잡는 동안 언제나 동반자로서
함께하며 두 딸아이 트리샤와 줄리를 길렀다.
"정치를 하려면 마음을 모두 바쳐야 한다."
팻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의 딸 줄리 닉슨 아이젠하워는 저서 "팻 닉슨,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Pat
Nixon, The Untold Story)"에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부통령 시절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별로 없는 까닭에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우리와 어
울려 놀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훈육은 어머니가 도맡으셨다. 아버지는 엄하게 야단치실 때도 "얘
야, 아버지라면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는 정도로 그치셨다. 반면 어머니의 훈육은 엄한 부분이 있었다. 모든
게 표정으로 대변되었다. 동생 트리샤와 나는 어머니의 차갑고 화난 표정을 '그 표정'이라고만 불렀다. 어머니
는 우릴 때리거나 목소리를 높이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대신 혹시라도 어머니의 표정을 감
지하지 못하고 계속 잘못을 저지르면 더 큰 벌을 받아야 했다. 그 벌은 침묵이었다. 어머니가 일단 말씀을 안
하시면, 보통 때의 그 인자하신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근접도 불가능할 정도로 무서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가 화내시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어머니도 자주 집을 비우셔야 했고, 휴가를 함께 보내지 못하거나 학교 소풍에도 참
가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런 우리를 달래는 일도 역시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래서인지 집에 계실 때면 어머
니는 가능한 한 모든 시간을 우리와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셨다. 동물원, 박물관, 극장, 스케이트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함께 놀아 주셨다. 1960년 7월 25일 시카고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시작되었다. 그 때 트리샤와
나는 캘리포니아의 몬테시토 캠프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갈 날을 몇 주 앞 둔 어느 날 어머니로부
터 편지를 받았다.
'야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말 새겨서 들어라'로 시작한 그 편지는, 비밀 경호원 아저씨들이 트리샤와 나를
할머니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며, 시카고에 도착하면 할머니가 정성을 다해 마련한 새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편지에는 당신의 삶의 철학을 담은 충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 일부다.
"이제, 네가 불평했던 그 친구들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사람들 중에는 친절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거다. 그들과 똑같은 사
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면 그들도 좋은 쪽으로 바뀌게 된단다. 이게 바로 삶의
진리란다. 사랑한다. 엄마가."
개혁을 향한 집념
엘리자베스 캐이디 스탠톤(Elizabeth Cady Stanton)
노예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톤은 친구 루크레티아 모트와 함께 1848년 뉴욕의
세네카 폴즈에서 "여성 인권 대회(the Women's Rights Convention)"을 조직했다. 일곱 아이의 어머니인 스태
톤은 여성이 평등해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한 참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평생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
다. 그녀는 성경을 새롭게 저술한 "여성의 성경(the Women's Bible)"을 편집하면서 여성의 권이향상을 옹호하
는 견해를 포함시켰다. "여성의 성경" 서두에서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개혁은 상호 연관되어 있고, 올바른 원칙을 세우려는 노력은 분야에 관계 없이 서로를 강하게 만든다
는 점을 기억하자. 타협을 일삼는 개혁론자는 진실이 가장 탄탄한 기초라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한 사람이
다. 인생의 목표는 인류의 진보 과정에서 보잘 것 없이 성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최고로 꼽히는 진리를 따르며 완벽한 인격을 다듬어 가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를 아끼는 사람이 되라.
마가렛 미드와 딸 메리 캐서린 베이튼슨(Margaret Mead and her daughter, Mary Catherine Bateson)
저명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인류학에 몸 담은 최초의 여성이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동시에 지
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모아의 성년식(Comming of Age in Samoa)", "뉴기니에서의 생활
(Growing Up in New Guinea)", "문화와 책임(Culture and Commitument)"등을 집필했다. 그녀는 육아, 결혼,
성과 사랑 등을 주제로 이종 문화를 비교하며 풍부한 저술 활동을 펼쳤고, 1969년에는 타임지에 '올해의 어머
니'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수십년간 '국립 자연사 박물관' 관장을 역임하
기도 했다. 몇 번의 유산 경험이 있었던 그녀에게 의사들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녀는 1939년 건강한 딸을 출산했고, 메리 캐서린이라고 이름지었다. 메리는 후일 회고록 "딸의 눈으로(With a
Daughter's Eye)"에서 어머니의 훌륭하신 가르침에 대해 적고 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스스로의 몸을 아까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특히 월경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
을 갖지 않기를 바라셨다. 온갖 세상을 다 돌아보신 어머니는 지구 어느 곳에서는 월경 불순을 아예 모르고
살기도 하고, 또 생리통을 전혀 불편함으로 느끼지 않는 곳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호주에 있을 때라고
기억된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던 어느 날, 월경을 시작한 지 이삼 일 지난 후 난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정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너무 행복하다고 어머니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 때 어머니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성
장하고 또 사랑한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우리 몸의 변화로 알 수 있는 자연과의 일치감이 무성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 순간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는 여성들이 몸으로 느끼고 남성들도
간접적으로 느끼는 월경이 인간이 가진 자연에 대한 리듬 감각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느꼈고, 바
로 그 점에서 어머니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가져라.
도로시 로뎀과 딸 힐러리 로뎀 클린턴 (Dorothy Rodham and her daughter Hillary Rodham Clinton)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제 4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은 같은 여세대 여성들의 우
상으로 떠올랐다. 웰레슬리 대학과 예일 법률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는 한 때 닉슨 전 대통령
의 스캔들 조사를 담당한 상원 워터게이트 위원회에서 변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무남독녀 첼시를 기르는 데 힘을 쏟았다. 영부인이 된 후에도 그녀는 여러 분야에서 적극
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합니다(It Takes a Village)"를 출판했고, 특히 어린
이 문제에 관해 더욱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47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녀는 세 살 때 파크 리지라는 느
릅나무 모양으로 생긴 마을로 이사갔다. 이사 후의 사건을 작가 노먼 킹은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The
Woman in the White House)"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힐러리는 교외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마을로 이사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시카고의 아파트에
살면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로 둘러싸이게 된데다 그들
의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태도에 놀라 겁에 질린 것이다. 힐러리가 네 살쯤 되던 어느 날, 특히 밉살맞던 여자
아이가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하자 힐러리는 엄마를 찾아 집으로 뛰어갔다. 그 아이는 새로 이사온 아이를 울
려서 다른 아이에게 힘을 과시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녀의 어머니 도로시 로뎀은 어린 딸이 새로운 환경을 두
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힐러리,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그 애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다. 또 한 가지는 맞서 싸우는 거다." 그러
면서 어머니는 격언을 들려 주셨다. "돌맹이나 나무 막대로 맞으면 뼈가 부러질 수는 있다. 하지만 욕설 때문
에 다치는 일은 없다. 알겠니?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때까지 한 번도 또래 아이들과 다퉈본 적이
없던 힐러리에게 싸움은 너무 낯선 단어였다. 그래서 그녀는 첫 번째 충고를 따르기로 하고, 그 여자 아이를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자 다시 집으로 달려왔고, 어머니에게서 위안을 찾으
려 했다. 어머니는 딸아이가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아무런 대항을 못하는 걸 보자 상당히 놀랐다. "힐러
리, 네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엄마하고 여기 집안에서만 놀 수 있다. 그게 싫다면 밖에 나가 저 아이와 맞
서야 한다. 어느 것을 택하겠니?" 한동안 힐러리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싸운다는 건 너무나 새로운 일이었다.
한참 후 마음 속으로 싸울 준비를 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커튼 뒤에서 조심스럽게 내다보았다. 그
여자 아이는 힐러리에게 다가와 가슴을 때리고 발로 차면서 길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어머니는 딸아이를 위해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때 힐러리가 힘겹게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사십여 년 전 딸아이의 모습을 회상하며 말했다.
"힐러리는 다시 일어서더니 그 아이에게 가서 받은 그대로 되돌려 주더라고요. 사실, 그런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었어요. 누군가 자신을 괴롭히면 맞서 대항해야죠."
행동으로 옮겨라
안나 드 밀레와 딸 아그네스 (Anna De Mille and ger daughter Agnes)
디자이너 오릴버 스미스가 이런 말을 했다. "아그네스 드 밀레가 루이 14세 궁에서 춤을 췄다면 전세계 역
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사실, 아그네스는 세상을 바꾸었다. 무용의 세계를. 그녀는 전통적인 민속춤을 현대 무
용과 발레에 절묘하게 접목시켜 독특한 스타일의 미국 무용을 창출했으며, '엘레트 예술'을 유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오클라호마!(Oklahoma!)", "회전목마(Carousel)", "브리가둠(Brigadoom)"과 이제 고전으
로 불리는 갖가지 브로드웨이 쇼에 출연해 미국 뮤지컬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녀는 수많은 유명 인사
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 가운데 연예계 인사로는 찰리 채플린, 노엘 카워드, 마사 그래햄, 코울 포터, 리차드 로
저스, 오스카 햄머스타인 등이 있다. 그녀는 영향력 있는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극작가 겸 감독인 월리엄드
밀레였고,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감독 세실 B. 드 밀레는 그녀는 삼촌이다. 그러나 이그네스의 인생을 변화시킨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작사 캐롤 이스턴은 "중단 없는 삶, 아그네스 드 밀레(No Intermission:
The Life of Agnes De Melle)"에서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 안나는 체구는 작지만 넘치는 매력과 타오르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반면에 생활은 매우 검소했다. 그
녀에게 있어 시간과 돈은 삶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헛되이 낭비하는 걸 죄악처럼 여겼
다. "행동으로 옮겨라." 이것은 그녀의 좌우명이자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되새겨 준 훈계였다. 아그네스의 한
소꿉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아그네스 어머니는 세상에서 꼭 지켜야 하는 개인적, 사회적 행동 규범이 있다고
늘 강조하셨어요. 교양있는 여자 아이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놀이를 해야 하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렇지만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모습도 볼 수
있었죠.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전부 스웨터와 치마를 입고 다니는데 아그네스는 손으로 자수를 놓은 주름치마
만 입어야 했기 때문에 힘들어 한 적도 있어요. 아주머니는 리본 색깔이 맞지 않거나 위치만 잘못 달려 있어
도 난리 법석을 피우셨거든요. 지금도 뒷마당 어귀에서 못마땅한 목소리로 소리치시던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
리는 듯해요." "아그네스, 머리 좀 고쳐라." "아그네스, 이렇게 엉망으로 어질러 놔야겠니? 방에 발도 디딜 수
없구나."
사랑은 현명하게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제인 오스틴은 세계 최초인 여류 소설가로 인정받고 있다. 19세기 초 그녀는 여러 편의 대작을 발표해 명성
을 얻었으며, 특히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엠마(Emma)", "감성과 이성(Sense and Sensibility)"
은 지금까지도 꾸준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그녀는 당시의 여자로서는 드물게 고등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우정, 사랑,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주요 주제로 다뤘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사랑하는 질녀들이 애정 문제로 고민할 때마다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1814년 11월 그녀는 사랑으로 번민하
는 질녀 패니 나이트에게 편지를 썼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네가 처음 고민을 털어놨을 때 그 점에 대해 좀더 주의를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땐 사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둘 사이가 깊어지고 사랑하는 연인으로까지 발전하리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 점을 간과하고 말았구나. 사랑하는 패니! 네 실수는 여자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한 첫 남자다. 첫사랑이란 강한 매력과 힘을 갖고 있는 법이란다. 그렇지
만 너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 가운데, 후회가 없는 사람을 찾기 힘들 게다. 그의 인격과 너를 향한 사랑을
볼 대 절대 수치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까지 네가 일조한 부분
도 분명 있다. 너도 그 사람을 사랑했잖니?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으니까 말
이다. 가족, 친구들 사이에서 그의 위치와 인격, 특히 드물게 친절한 마음 씀씀이, 철저한 원칙, 타당한 생각,
훌륭한 습관 등을 보고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만큼 그 사람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다. 지금부터
는 조금 다른 부분에서 얘기를 해야겠다. 지금 섣부르게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하고 싶구나. 네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애정 없는 결혼만큼 불
행하고 참기 어려운 건 없다. 만약 그의 결점이 장점보다 훨씬 커 보인다면, 그리고 그의 결점이 계속 너를 괴
롭힌다면 당장 그와 헤어져라. 현재 상황에서 더 이상 결정을 미뤄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든지, 아니면 만날 때마다 차갑게 대해서 그에게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든지,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너와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 역시 한동안 무척 힘들어 할 게다. 하지만 그런 아픔은 충
분히 극복이 가능하다는 게 내 신념이고, 너도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메리 루스 조이너와 딸 재키 조이너 컬시(Mary Ruth Joyner and her daughter Jackie Joyner Kersee)
재키 조이너 컬시는 세 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포함해 총 여섯 개의 메달을 딴 세계적인 육상선수이다. 현재
여성 7종 경기(남성 10종 경기와 비슷한) 부문 세계 신기록 보유자이며, 비록 깨지기는 했지만 넓이뛰기 부문
신기록을 보유했었고, 미국 국가대표 농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 재키는 재클린 케네디의 이름
을 딴 것이다. 그녀는 동 세인트 루이스의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부
모는 가난한 십대 부부로 시작했지만, 딸아이의 천부적인 재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육상 경기에 출전해 처음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녀의 어머니 메리 루스는 그녀가 스무 살 때 뇌막
염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인생관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자서전 "일종의 우아함
(A Kind of Grace)"에서 다음과 같이 어머니 이야기를 적고 있다.
열여섯 살 때, 난 야구 선수 한 명과 사랑에 빠졌다. 운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 때문에 그 애를 특히 좋아했
다. 그는 예의바른 소년이었고, 데이트를 할 때도 우리 어머니 지시대로 귀가 시간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밤
열시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그래서 어머니도 점점 그를 마음에 들어 하며 '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졸업이 가까워오자 그는 내게 성관계를 요구해왔고, 나는 곧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어머니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시며 반대하셨다. "지금 너흰 아이를 낳을 처지가 못 된다. 그 녀석이 아이
를 원하면 다른 여자와 사귀라고 해라. 넌 아직 할 일이 많아." 물론 난 그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스스로도 그
렇게 진지한 관계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여학생과 데이트하기 시작했
다. 난 그와 헤어지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 난 침대에 누워 밤새 울었다. 비록 헤어진 사이
였지만 그의 행동이 배신처럼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 때 엄마가 방으로 들어오셔서 옆에 앉으셨다. 난 눈물
을 닦으며 그 얘기를 했다. "재키, 지금은 물론 가슴이 아플 거다. 그렇지만 고통이란 사라지기 마련이다. 머지
않아 네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엄말 믿으렴." 어머닌 내 등을 토닥거려 주셨다.
두려움을 현명하게 극복해라
에비 리와 딸 돌리 파턴 (Avie Lee and her daughter Dolly Parton)
시골 출신 가수 중에 돌리 파턴만큼 세계적인 가수로 성공한 사람도 드물다. 1967년 "덤 블론드(Dumb
Blond)"로 첫 히트곡을 발표한 후 그녀는 총 여섯 권의 앨범을 제작했고, 세계적으로 오백만 장 이상의 판매
를 기록했다. 이 후 그래미 상을 수상한 그녀는 작사가로 활약했고, 또 영화계로 진출해 "9 to 5(Nine to
Five)", "스틸 마그놀리아(Stell Magnolias)", "텍사스의 홍등가(The Best Little Whorehouse in Texas)" "사랑
의 카운셀러(Straight Talk)"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녀의 고향 테네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테마 유원지 돌
리우드를 세웠는데, 지금가지 해마다 수만 명의 팬들이 그 곳을 방문한다. 가난한 시골 가정에서 열두 명의 아
이들 속에서 자란 그녀가 이룬 성공은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그녀는 자서전 "돌리, 나의 인생과 아직 못
다한 일(Dolly, My Life and Other Unfinished Business)"에서 어린 시절에 받은 영감에 대해 적고 있다. 다음
은 그 일부이다.
어머니는 불쾌하거나 무서운 일까지도 놀이처럼 만들어서 우리가 어려운 순간을 재치 있게 넘기도록 하셨
다. 특히 로커스트 리지의 낡은 집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 아버지는 여행을
떠나셨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서 우리를 돌봐야 했다. 그런데 하필 하늘이 새까맣게 변하면서 태풍이 몰려올
기미가 보였다. 난 어머니가 걱정하실 거라 짐작했지만 어머닌 절대 내색하시지 않으셨다. 어머닌 우리 모두
집 안으로 불러 모아 새로운 놀이를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파와 다른 가구를 뒤집어서 벽
쪽으로 밀어 붙이라고 하셨다. 이 말에 남동생들은 신이 나서 펄쩍펄ㅉ거 뛰었다. 다른 때 그런 일을 했다간
볼기를 맞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제 폭풍이 몰아친다고 상상하는 거야. 알
겠니? 모두 안전하게 소파 밑으로 들어가는 거다. 시작!" 물론 폭풍은 상상이 아니었다. 어머닌 우리가 놀라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린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상이 현실로 변하기 시작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나뭇가지가 부러져 집으로 날아들어 왔다. 우리 집은 산과 산 사이 계곡에 있었기
때문에 평소 돌풍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날은 돌풍이 마치 성난 거인처럼 시커먼 혀를 낼름거리며
마을을 덮치고 있었다. 어머닌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이제 폭풍이 얼른
지나가고 무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우린 모두 기도했다. 특히 조금 큰 아이들은 진심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비바람 소리가 끔찍했다. 마치 기차가 집 안을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얼마 후 비는 그쳤고 바람소리
도 멈췄다. 밖으로 나와 둘러보니 모든 게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혔고 채소밭은 망가지고 울
타리는 아예 날아가고 없었다. 집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우리의 기도가 정말 효력이 있었다면, 그건 어머
니의 기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분명한 행동 규칙을 마련해라
매들라인 렝글(Madeleine L'Engle)
매들라인 렝글은 모든 연령층이 사랑하는 작가로 마흔다섯 권 이상의 책을 썼다. 그 가운데 아이들이 좋아
하는 공상소설 "시간의 지혜(A Wrinkle in Time)"도 있다. 그녀는 소설과 비소설 부문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
고, 자신의 문학을 주제로 시민단체, 학교, 종교단체에 출강해 강연을 하기도 했다.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녀는
1920년대 뉴욕의 풍부한 독서와 문화를 경험하면서 자랐다. 처음엔 배우로 활약했지만 이후 작가로 변신해 코
네티컷에서 대가족을 부양하며 살았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가득 찬 회고록 "고요의 주기(A Circle of
Quiet)"에 육아, 인성개발, 가족생활 등에 관한 자신을 의견을 담았다.
그녀의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갑자기 친구 부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들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로 결
정했다. 갑자가 부모를 잃은 일곱 난 소녀는 혼란스러운데다 화가 나 있었다. 그 아이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했다. 그녀 부부는 처음 몇 달 동안 친절하고 끈기 있게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아이
는 계속해서 반항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고 아이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이는 자기 침대
를 정리할 필요도 없었고 식탁 차리는 걸 도울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양부모의 관심이 사라진 걸 느끼고 아
이는 겁에 질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를 거들기 위해 자진해서 식당으로 들어왔다. 다음은 회고록 중
렝글 부부가 육아에 대해서 적은 부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 준 일이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면 그건 우연이거나 기적이었다는 생
각이 든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되
었다. 아이들은 아마 우리의 선의보다는 실수를 보고 더 많이 배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린 아직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다.
스스로를 지켜라.
어네스틴 로스와 딸 다이아나 (Ernestine Ross and her daughter Diana)
연예계의 슈퍼스타 다이아나 로스는 1950년대 디트로이트의 중하층 집안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던 그녀는 '더 수프림즈(the Supremes)'로 알려진 여성 트리오에서 리드 싱어로 활약했고, 이십
대 초반에는 모타운 레코드사의 최대 히트 가수로 성장했다. 1969년 그녀는 솔로로 데뷔했고, 곧 '언젠가 우린
함께 하겠지요(Someday We'll Be Together)', '손을 뻗어(Reach Out Touch Somebody's Hand)', '너무 높은
산은 없어(Ain't No Mountain Enough)'로 새로운 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영화계에도 진출해 "마호가니
(Mahogany)"와 "기운 없는 여인(Lady Sings the Blues)"에서 열연하기도 했다. 그녀는 라이브와 텔레비젼 콘
서트를 통해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회고록 "참새의 바람(Secrets of a Sparrow)"에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교훈에 대해 적고 있다.
여덟 살이 되던 어느 날, 난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왔다. 얻어맞은 자국으로 얼굴은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또래 아이에게 맞았다고 어머니에게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늘 충고하신 대로 같이 싸우지 않으려고 물러섰다
가 당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 부은 빰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 애들이 너한테 뭐하고 했니?" "검둥이라
고 불렀어요." 그 말에 어머니의 얼굴이 차갑게 굳으셨고, 화를 내셨다. "너를 검둥이라고 부르는 사람한테 그
렇게 맞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니? 잘 들어라. 물러서지 말고 같이 싸워야 한다. 그래야 해. 엄마가 아이
들하고 싸우라고 한 적 있니? 없잖아? 그렇지만 이건 다른 문제다. 네 소중한 삶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 누구
도 네 존재를 미천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일주일 뒤 어머니는 다시 내 코피를 닦아 주시고 멍을
쓰다듬어 주셔야 했다. 난 아이들과 싸웠지만 이기질 못했다. 너무 화가 나고 수치스럽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
날 일은 학교에서 일어났다. 그날 오후는 모든 게 지저분하고 더러워 보였다. 몇몇 아이들이 날 괴롭히기 시작
했고, 지독한 욕설을 퍼붓고 놀리며 도망가 버렸다. 난 그들이 날 못난 사람으로 느끼게 하려 한다는 걸 알았
고,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곤 아이들을 쫓아가 한 대 쳤다. 그렇지만 다시 두
대를 맞았고 얼굴을 긁혔으며, 아이들은 또 깔깔거리며 도망가 버렸다. 난 교과서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집
가까이 왔을 때 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제부터 꼭 싸울 거다. 엄마가 말한 대로 싸워서 이길 거다. 그래
야만 한다. 더 이상 코피도 흘리지 않을 거다. 난 결심을 했다. 엄마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번만
은 나 스스로 결심을 한 것이다. 다시는 그 누구도 날 무시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난 강해져서 투지 있
게 싸울 필요가 있었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였다.
겸손함을 배워라.
도로시 워커 부시와 아들 조지 (Dorothy wallker Bush and her son George)
조지 부시는 미국의 제41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의 오랜 정치 생활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정력적으
로 활동하는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에게 주신 믿음이 언제나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작가 허버트 팔메트는
"조지 부시: 고독한 별의 삶(George Bush: The Lige of a Lone Star Yankee)"에서 부시 가문에서 자주 화제
에 오르는 이야기 가운데 다음 일화를 전한다.
이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가 첫아이, 즉 부시 대통령을 임신했을 때의 일화다. 그녀는 임신 9개월째임에도 불
구하고 메인 주의 켄느벙크포트의 여름 별장에서 가족들과 함께 소프트볼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타석에서 그
년는 홈런을 쳤고, 홈으로 열심히 달려오다 갑자기 소리를 질렸다. "아, 아기가 나오려고 해요. 병원으로 데려
가 줘요!" 바로 그 날, 첫 번째 아기 조지 부시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이런 태도는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특히 아이들은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존중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
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계속해서 주의를 주었다. 부통령 시절에도 조
지 부시는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연설하는 도중에 부통령인 그가 다른 서류
를 읽고 있는 것처럼 텔레비젼에 비쳤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질타에 조지 부시는 대통령의 연설문을 읽고 있
었다고 해명했지만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부시 대통령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 자랑을 지나치게 한
다고 어머니로부터 자주 야단맞는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흔한 살 때, 아들이 1992년 대선
에 낙선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부시는 어머니 방에서 임종을 지키던 중 어머니가 늘 사용하시던
성경과 청소년 시절 자신이 어머니께 부친 편지들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걸 보았다. 다음은 그가 전하는 어
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닌 우리 가족에게 등대 같은 존재였지요. 우리의 중심이셨고, 우리 모두를 밝혀 주는 등불 같은 존재였
지요. 나방이 불빛을 보고 모여들 듯 우린 그렇게 어머니 주위에 모였어요. 어머닌 늘 우리 곁에 계셨고 강인
함과 힘을 보여 주셨지요. 한 번도 오만함을 모르셨던 어머니는 사랑과 친절을 베푸셨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라. 결코 상처를 주어선 안 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현명하게 생각해라.
애이들 메스웰과 손자 빌 게이츠 (Adelle Maxwell and her grandson Bill Gates)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설자이고 최고 경영자인 빌 게이츠는 세계 제일의 부자이다. 그는 1960년대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릴 때부터 영리해 학교 선생님들은 그에게 적합한 교육을 준비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게이츠의 아버지는 성공한 변호사로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냈고, 어머니 역시 사회 단체 및 자선
사업으로 바빴다. 가족 분위기는 아주 단란했는데 특히 게이츠는 외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
은 작가 스테판 메이스네스와 폴 앤드류가 집필한 빌 게이츠의 자서전 "게이츠(Gates)"의 일부분이다.
게이츠와 여동생이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늘 "갬(Gam)"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린 외할머니게서 반겨
주셨다. 그 시간에 어머니는 봉사 활동을 하느라 집을 비웠기 때문에 주로 외할머니가 그들을 돌보았다. 하지
만 할머니는 사위가 불편해 할까봐 게이츠의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에 가시곤 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외할머니
는 대리모 같은 존재여서 엄마들이 바쁜 틈틈이 아이들을 봐주었다. 외할머니는 늘 과자를 만들어 놓고 아이
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외할머니는 손자 게이츠를 카드의 '3'을 뜻하는 '트레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는 이
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게임을 무척 좋아했고, 특히 카드 놀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어린 손자에게 솔리테르(혼
자 두는 카드), 피쉬, 진(2인 카드 놀이), 브리짓 등 다양한 게임을 가르쳤다. 외할머니는 고등학교 시절 반대
표로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낭독했으며, 학교 농구팀에서 포워드로 활약했다. 그래서 게임은 할머니에게 단순히
시간을 떼우는 일이라기 보다는 기술과 지능을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언젠가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우
린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브리짓을 했어요. 할머닌 늘 '영리해야 한다. 알겠니?'하고 말씀하셨지요."
게이츠의 집에서 종류의 관계 없이 늘 게임이 벌어졌다. 보드게임에서 조각그림 맞추기까지 다양했다. 저녁
식사 후 카드 놀이로 설거지 당번을 정하기도 했다. 게임을 하던 중 가장 놀라웠던 순간은 바로 게이츠의 부
모가 갑자기 임신 사실을 밝혔을 때였다. 그들은 외할머니 집 거실에서 낱말 맞추기 게임을 통해 게이츠와 여
동생에게 간접적으로 그 사실을 알렸다. 두 아이는 낱말을 끼워 맞춰 부모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알아 맞혔다.
"곧 꼬마 손님이 온다?" 그리고 1964년 6월 게이츠의 막내 여동생 리비가 태어났다. 외할머니의 지적인 면은
특히 게이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늘 책을 읽어 주셨고, 덕분에 게이츠는 여러 분야
에 관심을 가진 독서광이 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고전인 "샤로테의 거미집(Charlotte's Web)", "돌리틀 박사
(Dr. Dolittle)"와 "돼지 프레디(the Freddie the Pig)", "톰 스위프트(Tom Swift)", "타잔 시리즈(the Tarzan
series)" 그리고 더불어 수학과 과학책도 빠짐없이 읽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집 근처에 있는 공공 도서관에서
개최하는 독서 경연대회 참가한 게이츠는 남학생들 사이에는 단연 일등이었고 때론 여학생들까지도 제치기도
했다. 1987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은 게이츠가 새로 지은 거실에 모여 앉았다. 그 곳에서 게이츠는
외할머니에 대한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했다고 그의 어머니는 전한다. "그 때 게이츠는 외할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사람으로 표현했지요. 외할머니가 보여 주신 규율과 가치관이 그 애에게 대단한 영감을 준 것 같
아요."
분별력을 키워라
도로시 윌리엄스와 딸 린나 (Dorothy Williams and her daughter Lynna)
제2차 세계 대전 후 텍사스 주에서 자란 린나 윌리엄스는 애틀란타 주의 에모리 대학에서 영문학 부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으며, 창의적인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것 외(Things Not Seen and
Other Stories)"등이 있고 신문 기자와 정치 연설 원고 작성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녀는 수필 "내가 아는 모든
것(Everything I Know)"에서 자신의 문체를 포함한 다양한 면에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적고 있
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일 년 동안 언어치료를 받았는데, 그 덕분에 제가 참 많이 변한 것 같아요. 그 때
이후론 우리 집안의 전통처럼 오 분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어머니께서 제가 고
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중요한 규칙을 가르치려고 그렇게 애쓰신 게 아닌가 해요. 앉을 땐 다리를 모으고 앉
아라. 여름에는 레이온으로 만든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상스러운 말은 삼가라. 값싼 선물일수록 더욱 진심이
담긴 감사의 편지를 써라 등등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래도 어머니께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신 건
이거라고 생각해요. 네가 아는 걸 전부 말한 필요는 없다. 맞죠?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을 정
도니까요. 이제야 어머니께서 정말 강조하신 건 분별력과 신중함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말씀
을 드릴 때면 어떤 일이라도 진실하고,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여야 했어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 왜 일어났는
지 정확하게 말하는 습관을 길렀죠. 한참 뒤 제가 신문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제 재능은 바
로 어머니께서 길러 주셨다는 걸 깨달었어요.
자신 있게 표현해라.
리아 스필버그와 아들 스티븐 스필버그 (Leah Spielberg and her son Steven)
스티븐 스필버그는 단연 20세기 영화계 최고의 거장으로 꼽힌다. 그는 스물여덟 살 때 히트작 "죠스(Jaws)"
를 감독한 뒤 연이어 세계 최고의 히트작을 만들었는데, 그의 작품은 흥행에서 뿐 아니라 예술성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가 만든 영화에는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ird Kind)", "이티
(E.T.)",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 "칼라 퍼플(The Color Purple)",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쉰들러 리스트(Schindler List)" 등이 있다. 스필버그는 1950년대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중산층 유대가문에
서 자랐다.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스필버그는 풍부한 창의력을 바탕으로 아마추어 영화를 제작
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이러한 아들의 자기 표현을 끊임없이 지지해 주셨다. 작가 조셉 맥브라이드는 "스티
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에서 이렇게 전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릴 때부터 워낙 조숙했기 때문에 가문의 랍비였던 피셸 골드펠더가 어머니 리아에게
독특한 아들을 교육시키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어느 날 그느 스필버그가 장난감(아마, 소
방차였던 것 같다)을 안 사 준다고 골을 내고 있는 걸 보았다. 결국 집안을 온통 소란스럽게 만들자 스필버그
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사 주세요. 결국 사 주게 될 거잖아요?" 어머니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어머니는 그때 골드펠드 선생이 해 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스티브한테 안 된다고 말하지 마세요.
어쨌든 갖고 싶은 건 다 갖게 되잖습니까. 차라리 시간과 힘을 아끼는 게 효율적입니다. 그러니 사 달라고 하
면 얼른 사 주세요." 어떻게 아들을 그렇게 훌륭하게 키웠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난 우리 아이
에게 자유를 줬어요. 그 애는 하고 싶은 일이라며 무엇이든 다 했어요. 어쩌면 기분 나는 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특히 짜여진 규칙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스티브는 정말 놀라운 재능을 보였어요. 그것만은 부인
할 수 없죠.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재능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거죠."
독특한 소질을 개발해라
메리 트럼프와 아들 도날드 (Mary Trump and her son Donald)
뉴욕 시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란 도날드 트럼프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인물이
다. 젊은 시절 그는 주택 부동산 개발업을 하시던 아버지를 도와 함께 일하다 나중에 아버지 회사 '트럼프 오
가니제이션'을 물려받았다. 1970년 후반 뉴욕의 부동산 시장이 거의 바닥세를 면하지 못했을 때도, 그는 대담
하게 사업을 확장하며 연이어 대규모 건물을 건축했다. 후일 상당한 수익을 낸 트럼프 타워도 이때 지은 건물
이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의 뛰어난 거래 수완과 열정적인 홍보 전략은 결국 그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
다. 1990년 부도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 신규 프로젝트를 발표해 언론과 세인의 관심을 끌
며 그 입지를 더욱 굳혔다. 그는 특히 아버지와 사별한 후 홀로 되신 어머니에게 지극 정성을 다했다. 자서전
"거래의 예술(The Art of the Deal)"에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쇼맨십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어머니는 언제나 극적이고 웅장한 일을 좋아하셨다. 물론 아
주 평범한 주부이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가슴에 품고 계신 분이셨다. 어느 날 스코틀랜
드 출신이신 어머니가 하루 종일 꼼짝도 않고 텔레비젼 앞에 앉아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을 지켜보시던 모
습은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화려함, 웅장함, 황실과 그 신비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 날 아버지가
거실을 서성거리시면서 하시던 말도 잊을 수가 없다. "여보, 제발, 텔레비전 좀 꺼줘.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저건 다 꾸민 거라구." 그러나 어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감각 면에서 두 분은 극과 극이었다. 어머니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아버지는 현실성을 추구하셨고 재능과 효율을 최고로 생각하셨다.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는 지혜
타인에게 따뜻한 관심을.......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Diana, Princess of Wales)
비록 파란만장한 짧은 삶을 살고 갔지만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는 세상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여인이었다. 영리하고 매력적이었던 그녀도 어린 시절에는 자신감이 부족해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1997년 8
월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서야 그녀는 자기 자신과 맡은 임무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비록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 생활은 불행과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그녀는 두 아들 해리와 윌리
엄 왕자의 교육만큼은 언제나 순결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 다음은 앤드루 모턴이 그녀의 생을 그린 책 "다이
애나, 그녀의 진실(Diana, Her True Story)"의 일부이다.
왕세자비는 두 왕자가 학교의 왕실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삶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
했다. 언젠가 그녀는 에이즈 후원 모임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도 그런 유혹을 많이 느낍니다. 비단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리와 윌리엄 왕자가 고통과 불행을 모른 채 살게 한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 그 애들을 위하는 길
일까요? 언젠가 아이들이 현실을 알게 된다면 그 때는 너무 늦지 않을까요? 저는 제 나름대로의 신념에 기초
해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여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나머지는 아이들 자신에게 달린 거지요."
그녀는 특히 왕위를 계승할 윌리엄이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을 보고, 그리고 아버지를 보면서 윌리엄은 이미 어느 정도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얻
은 것 같아요. 그 애는 세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아요." 그녀는 두 왕자를 데리고 노숙자들이 기거하는 숙소를
찾거나 투병 중인 환자를 만나러 병원을 방문하곤 했다. 어느 날 바실 흄 추기경과 함께 런던 도심의 노숙자
보호시설을 은밀히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잊지 않고 윌리엄 왕자를 데리고 갔다. 많은 사람들이 사
회의 쓰레기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아들에게 소개해 주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넘쳐흘렀다. "윌리
엄 왕자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던지."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바
실 흄 추기경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왕자는 정말 비범한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쩜 그런 위엄을
갖추셨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6월 셋째 주는 영국 상류사회가 고급 샴페인과 훈제 연어와 축제로 흥청거리
는 때이다. 이 기간 동안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는 두 왕자를 데리고 하층민이 모여 사는 임시 숙소를 찾았다.
그 곳에서 윌리엄 왕자는 체스를 두었고, 해리 왕자는 카드 놀이를 했다. 두 시간 후 두 왕자는 보다 성숙하고
현명한 모습으로 켄싱턴 궁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필요한 지식을 갖추었어요.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씨는 뿌려졌다고
생각행.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처럼 우리 왕자들이 그 지식을 키워 나갈 수 있길 바래요. 왕자들에게 원하
는 것이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얼마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지, 어떤 고통을 겪는지, 무
엇을 바라고, 무엇을 꿈꾸고 사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자라는 거예요."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크리스틴 드 빠상 (Christine de Pisan)
베니스 출생의 크리스틴 드 빠상(1365-1429)은 어릴 때 프랑스로 이사한 뒤 그 곳에서 열다섯의 나이에 결
혼했다. 결혼 후 채 십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세 아이와 어머니와 질녀를 부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작가로 성공해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여류 소설가가 됨으로써 가장으로서 짊어
져야 하는 고달픈 현실은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많은 책을 섭렵한 그녀는 도덕적
문제와 일상 생활의 실용적인 면에 특히 많은 관심을 두었다. 다음은 "여인의 도시(The City of Ladies)"의 후
편인 "여인의 도시에서 찾은 보물(The Treasure of the City of Ladies)"의 일부이다.
공주나 귀부인이 자비를 베풀면, 보통 사람이 행하는 덕보다 세가지 면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우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겸손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므로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덕도 더욱 커
진다. 둘째,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지원과 위안을
줄 수 있다. 셋째, 평민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영주이므로, 그들이 베푸는 선은
아래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영주와 귀부인 등 권위 있는 사람이 덕행을 쌓으면 그 덕은 더욱
빛을 발하고, 악을 행하면 그 해악이 하늘까지 미치게 된다. 고귀한 자선은 착한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
다. 공주는 다시 선한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그들이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
을 갖게 된다. 또 그렇게 되면,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것만큼이나 기뻐하게 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말만 들어도 함께 축하해 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착한 사람들이
끈기 있게 버틸 수 있고, 나쁜 사람들이 개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루이자 펄러와 손자 앤드류 영 (Louisa Fuller and her grandson, Andrew Young)
앤드류는 시민권 보호 운동가로 사십여 년 동안 공직 생활에 헌신했다. 뉴올린즈 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장관을 역임했고, 1960년에는 마틴 루터 킹 2세 박사가 이끄는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the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에 참여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킹 박사와 함께 일했으며
1964년부터 1970년까지 SCLC의 상임 이사로 일하면서 남부 전역에 만연했던 흑인차별주의를 폐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아 주 대표로 하원에 진출함으로써 1871년 이후 200년 만에
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흑인이 되었다. 카터 행정부 시절에는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했다. 팔 년동안 애틀
란타 시 시장으로서 눈부신 활동을 펼친 그는 현재 미국 흑인 사회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자서전
"가벼운 짐: 인권 운동과 미국의 변화(An Easy Burden: The Civil Rights Movement and the
Transformation)"에서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외할머니는 당신 자식이 여덟 명이나 되었지만 여러 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셨다. 우리 가족의 개방적인
태도와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동정 어린 마음은 할머니와 부모님의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으
로 생각된다. 가정 생활 곳곳에서는 신앙심이 베어 있었고 종교는 일상생활의 지침이었다. 할머니는 우리 동네
에서 구걸하러 오는 사람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누구라도 할머니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지나 방랑자들 대부분이 기차를 타고 우리 마을에 들러 몇 달씩 머무르다 가곤 했는데, 아마도 자기
들끼리 소문을 퍼뜨린 모양인지 이런 말이 떠돌았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 되면 클리블랜드
가 2224번지로 가 봐. 거기 가면 친절한 흑인들이 있을 거야. 그 중에 펄러 부인이라는 약간 밝은 피부를 가진
여인에게 부탁하면 뭐라도 얻을 수 있다구. 버터 바른 빵 한 조각이라도 말이야.'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제
공하는 일은 할머니가 스스로에게 부여하신 임무처럼 보였다. 사실 따뜻한 음식을 건넬 때만큼 할머니가 행복
해 보이신 적은 없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뉴올린즈에는 구걸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빈
곤층을 돕기 위한 제도가 아직 정비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땐 자진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도 많았고, 그들 중 누구도 그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이용당할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사랑을 베풀어라.
라첼 보크와 손녀 윌라 캐더 (Rachel Boak and her granddaughter Willa Cather)
윌라 캐더는 미 중서부 초원 지역의 삶을 여러 편의 소설에 담아낸 유명한 작가이다. 그녀는 1873년 버지니
아 주 윈체스터 근처의 농장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홉 살 되던 해 네브래스카 주로 이사했고, 그 곳에서 대학
까지 마쳤다. 후일 그 곳은 그녀가 쓴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했다. 캐더는 처음 몇 년은 기자, 유명 잡지
편집장, 교사로 일했고, 서른 아홉의 나이에 소설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녀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오, 개척자여 (O Pioness)", "대주교의 죽음 (Death Comes for the Archbishop)", "나의 안토니아 (My
Antonia)"와 퓰리쳐상 수상작인 "우리 중 한 명 (One of Ours)"이 특히 유명하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
나지 않아 캐더는 '여성의 직업으로써 간호사에 대해(Nursing as Profession for Women)"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다. 다음은 그 일부다.
할머니는 정식 간호사도 아니셨고, 제대로 된 보수를 받지도 못했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랑으로 평
생을 바치셨다. 혼자서 돌볼 아이들만 해도 여러 명이었지만 언제나 헌신적으로 일했다. 할머니와 함께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홍역에 걸려 밤새 앓을 때 변함 없이 옆에서 간호해 주시
고, 백일해에 걸려도 곁을 떠나지 않는 그 정성.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애정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 할머
니는 간호사로서 우리 가족뿐 아니라 백 크린 주민을 위해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쓰고 환자를 돌보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달래 주었다. 어린아이가 화상으로 고통받을 때, 과로로 쓰러진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할
때, 쓰러진 나무통 아래 꼼짝없이 끼어 신음하는 남자를 볼 때, 옻나무 밭에서 일하던 아이가 칼에 다리를 베
었을 때면 마을 사람들은 의사를 부르러 가는 길에 늘 할머니를 잊지 않았다. 할머니 역시 당신 문제만으로도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그런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을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으셨다.
작가 샤론 오브리엔은 "떠오르는 세력(Emerging Voice)"에서 이렇게 말한다. '라첼 보크 할머니가 도서관에
소장될 훌륭한 책을 쓰신 적은 없다. 그러나 그녀의 책에 나오는 가족은 어떤 가족보다 따뜻하고 애정 어린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할머니는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보살피는 동정심 많고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여성
의 모범이셨다.'
진정한 사랑이란
루이베리 발렌타인 벨 에버네티와 아들 랄프 (Louivery Valentine Bell Abernathy and her son Ralph)
알바니아 주 시골 출생인 랄프 에버네티는 흑인 차별이 특히 심한 환경에서 자랐다. 일찍부터 그는 인도주
의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는 마틴 루터 킹 박사를 도와 인권 운동가로 많은 활동을 했다.
1961년 그는 조지아 주 애틀란타의 웨스트 헌터 가의 침례교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인권운동에 몸담았던 수
십 년간 이 직책을 계속 유지했다. 1968년에는 킹 박사의 뒤를 이어 '남부 기독교 지도회 회의(the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uncil)'의 의장직을 맡았으나 십 년 뒤 의회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그러나 선거
에서는 패배를 맛보았다. 최근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다음은 그의 자서전 "그리고 벽이 무너지
기 시작했다 (And the Walls Come Tumbling Down)"의 일부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는 강인함, 독립심, 도덕적 고결함을, 그리고 어머니에게서는 친절, 사랑, 예의범절을 배웠
다. 대가족 출신의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옷, 장난감 등 모든 것을 대물림 받아야 했다. 그런데 학교에 입학하
자 내 책이 갖고 싶었다. 책은 내게 특별한 의미였고, 그런 내 마음을 어머니는 잘 이해해 주셨다. 하지만 아
버지는 아주 현실적인 분이셨다. 가장으로서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나중에 두 명이 더 늘었다-을 보살펴야
했기 때문에 따로 책을 사 줄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으셨다. 나의 계속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책보다 더 급한 일이 많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셨고, 결국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
았다. 그 때 나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가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이
었다. 남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놀라움과 더
불어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필요한 책을 사지 못해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그리
고 내일까지는 마련할 거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내 마음은 너무나 무거웠다. 아버지
가 어떤 분이시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날 방과 후 현관문을 열자 식탁 위에 책이 차곡차곡 정돈된
채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바로 내가 원했던 책들이었다. 한 군데 구겨지거나 찢긴 데 없는,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새 책이었다. 책을 본 순가 난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곧장 부엌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껴안았다. 나
중에 밭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이실 뿐 더 이상 얘기를 꺼내
지 않으셨다. 그 날 오후 나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사회 정의에 관심을
필리아 홀츠만과 딸 엘리자베스 (Filia Holtzman and her daughter Elizabeth)
뉴욕 브룩클린에서 태어난 하버드 법률 대학원을 졸업한 엘리자베스 홀츠만은 평생을 공직 생활에 바쳤다.
서른 한 살 그녀는 쉰 살의 베테랑 하원의원 엠마뉴엘 셀러와 겨루어 그를 누르고 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연속 4선을 기록했다. 그녀는 연방 정부의 성차별적 정책 요소를 없애고 이민 정책을 수정하기 위해 많은 노
력을 기울였다. 이후 1980년 다시 공화당 후보 알폰세 다마토와 상원의석을 놓고 접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만다. 그녀는 팔 년간 브룩클린 지방 검찰총장을 역이한 후, 뉴욕 시의 회계 감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다음
은 그녀의 자서전 "누가 쉬울 거라 했던가? (Who Said It Would Be Easy?)"의 일부이다.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비엘아우아 체르코프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미국으로 이민 오셨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어에 능통하신 어머니는 검열국에서 기밀 업무를 담당하셨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브룩클린 대학 야간 학부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나중에는 헌터 대학으로 옮기셨고 러시아어과 학과장이
되셨다. 어머니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언제나 학문적인 분위
기로 가득 차 있었다. 거실에서는 대학생들이 차를 마시며 갖가지 토론을 벌였고, 어머니의 동료 교수분들도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되었다. 모두들 어머니를 존중했다. 어머니는 항상 사회 정의 실현에 관심을 가지셨고,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평화 시위에 참가하시곤 하셨다. 어머닌 폭력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강
조하시면서 특히 미국의 흑인 차별정책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설명해 주셨다. 어릴 때 학교를 마치고 집
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거실에 앉아 공산주의 척결을 내세웠던 매카시의 청문회 연설의 듣던 생각이 난다.
그 때 어머닌 얼마나 좌절하셨는지....... 어머니 덕분에 난 어린 나이에 우리 사회에서 자해되고 있는 사회 부
정에 대해 눈뜰 수 있었다.
생명을 소중히 다루어라
제인 클레멘스와 아들 마크 트웨인(사무엘 클레멘스) (Jane Clemens and her son Mark Twain(Samuel
Clemens))
미조리 태생의 사무엘 클레멘스는 필명 마크 트웨인으로 더 잘 알려진 미국 문학계의 거장이다. 19세기 후
반에 발표된 그의 작품에는 "허클베리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 "아더왕 법정에 선 코네티컷 양키(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
가 있다. 그의 작품에는 소박한 유머와 당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 있다. 그는 평생 모든
생명이 겪는 고통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에서 그는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전한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살 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거리로 달려나가 두꺼운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심하게
때리고 있던 거친 마부와 맞서신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마부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은 후 불쌍한 미물을 대신
해서 감동적인 말로 마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부는 자기 잘못을 시인하며 다시는 말을 학대하지 않
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의 성장 환경으로 보아 그가 지키지 못할 약속이 틀림없었다. 고통받는 동물을 대
신해서 용감히 맞서는 모습은 어머니가 평생을 간직한 태도였다. 그렇다고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을 모욕하려
는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예의 바른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역경을 이겨 나가셨다. 그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선의는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공동체의 가치를 배워라
베티 샤베즈 (Betty Shabazz)
말콤 X의 부인 베티 샤베즈는 1997년 6월 정신 장애를 앓고 있던 손자의 방화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디트로이트에서 성장한 그녀는 터스키기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던
중, 1958년 당시 할렘가의 제7 사원에서 일하던 말콤 X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칠 년 후 쌍둥이를 임
신하고 있던 그녀는 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남편의 연설에 참가했다가 남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간호사
라는 자신의 직업에도 불구하고 연단에서 총상으로 만신창이가 돼 쓰러진 남편에게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주
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그녀는 힘과 용기와 위엄의 상징이었다. 결코 불행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학업에
몰두해 교육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행정관으로 일했다. 또한 인권 운동의 기수로 활약한 그녀는 언론의
끊임없는 간섭에 시달리면서도 여섯 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그녀는 뉴욕 브룩클린의 메드가 에반스 대학의 홍
보국장과 제도 개선실의 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녀는 죽기 한 달 전, 결국 마지막이 된 업스케일 지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공동체 창조를 위해 필요한 어린이 교육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은 그 일부
이다.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고유한 권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점입니다. 어린이들 역시 부모가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과 사회가 그들을 아낀다는 것을 알아
야 합니다. 아이들이 이러한 신념을 갖지 못하면 그건 바로 우리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타락과 붕괴의 궁극적인 책임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
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안일한 자세로 정치인들만 비난하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불만을 터뜨립니다. 이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가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두가 각자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낸다면 지금처럼 소
수의 사람에게 모든 짐을 지울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진정한 사랑의 가치
글래이디 사라 레멘과 딸 레이첼 나오미 (Gladys Sara Remen and her daughter Rachel Naomi)
의학박사 레이첼 나오미 레멘은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한 내과 교육의 선구자이다. 스탠포드 의과대학에 재
직한 수,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가정의학과 지역 의료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 이
십 년 동안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중시하며 특히 암치료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부엌의
지혜: 가슴을 쓰다듬어 주는 이야기(Kitchen Table Wisdom: Stories That Heal)"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 이름은 레이첼이다. 외할머니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난 오십 년 동안 다른 이름, 즉
나오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내가 사십대 중반이 되었을 때, 당시 여든다섯 살이셨던 어머니가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 수술은 어려울 뿐 아니라 성공률도 낮은 것이었다. 수술 후 어머니는 의식을 되찾기는 하셨지만 심
각한 정신 혼란을 겪었고 유일한 혈육인 나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간호사들이 위안을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허둥댔다. 어머닌 날 알아보지 못할 뿐말 아니라 환각 증세까지 보이셨다. 물건들
이 침대로 기어오른다고 하거나 등에서 물이 흐른다고 말씀하기도 했다. 비록 어머닌 날 알아보진 못하셨지만
자주, 그것도 오랫동안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린 주로 과거에 대해서, 특히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
셨지만 주위 사람들이 성인으로 여겼던 외할머니 얘기를 많이 했다. 어머닌 외할머니가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
들에게 베푼 사랑의 친절에 대해 말씀하셨다. 외할머니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셨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과 격려를 마다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또한 어머닌 외할머니의 겸손과 위대한 학식에 대해서 그리고 어릴 때 러시아에서 겪었던 가난과 고통
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 곳 러시아에서 사람들은 우리 가족을 학대하고 증오했지만 외할머닌 분노가 아니라
연민으로 오히려 그들을 감싸안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을 떠나기 얼마의 어느 날이었다. 난 어머니에게 날 알아보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어
머닌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그럼, 내 사랑하는 딸이잖니." 마음이 편안해진 내가 의자에 앉으려 하자 어머니
가 날 밀어 내셨다. 그 방에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거 앉으면 안 돼." 나는 내 귀를 의심
하며 의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왜요, 어머니?" "할머니가 앉아 계시잖니." 나는 얼른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
머닌 내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계신 게 분명했다. 어머닌 빈 의자를 향해 내 어린 시절에 대해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를 말했다. 외할머니에게 말을 건네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서 왜 난 할머
니를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아니, 어떤 면에선 감동적이었다. 가끔씩 어
머니는 말을 듣는 표정이다가 외할머니가 하는 말을 내게 전해주곤 하셨다. 어머닌 왜 외할머니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지었는지를 외할머니께 설명해 주셨고, 나 역시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
께 아버지가 지금까지 나를 나오미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며 사과히기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후,
어머닌 지치신 듯 잠시 누워 눈을 감고 계셨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두
사람 모두 내 곁에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이제 아무나 날 집으로 데려 가 줘." 그리곤 다시 눈을
감으셨고, 잠이 드셨다. 결국 어머닐 데리고 가신 분은 외할머니였다. 당시 내게느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
이었지만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많은 위안을 가져다 준 것 같았고, 돌아가신 후 나 역시 자주 그 때 일을 떠올
리게 되었다. 난 오랫동안 만성병과 투병하면서 신체적 한계를 극복했다. 쉰 살까지 의학계에 계속 몸담고 있
었고, 예순에 스탠포드 의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여성은 더욱 드물었다. 난 많은 도전과 한계를 훌륭히 이겨
냈다. 그러나 따뜻한 친절을 베풀진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난 이제야 개닫게 되었다. 아무리 위대한 성
공을 거뒀다 하더라도 난 중요한 걸 놓쳤다는 걸. 그래서 난 쉰 살 생일을 맞으면서 내 진짜 이름인 레이첼을
쓰기 시작했다.
정신적 이상을 세워라.
한나 채플린과 아들 찰리 (Hannah Chaplin and her son Charlie)
영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찰리 채플린은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은 영화 배우이자 감독이다. 그는 여
덟 살 때 보드빌 배우로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1914년 "배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에서 트램프 역을 맡아 열연함으로써 스타덤에 올랐다. 왜소한 체격에 마치 영양실조라도 걸린 모습
의 채플린의 찌그러진 중절모와 꼭끼는 양복, 대나무 지팡이로 우스꽝스럽게 치장하고 걸음걸이도 곧 넘어질
듯 불안했다. 그러난 누구라도 그에게서 묻어나는 자신감과 모험을 향한 도전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의 등불
(City Lights)", 아돌프 히틀러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등 그의 명작에는 유머를 통한 따끔한 사회 풍자가 녹아 있다. 그의 연기를 통해 관객들은 사회의 빈곤층과
소외계층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자서전(My Autobiography)"에서 채플린은 어머니에게 배운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썼다.
어느 저녁, 나는 열병을 앓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확히 말해 늦은 오후였다. 어머니는 창문을 뒤로 하
고 앉으셔서 신약성서와 가난한 사람과 어린이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정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만의 독
측한 방법으로 들려주셨다. 때로는 읽다가 연기를 하기시도 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도 했
다. 내가 아팠기 때문에 그렇게 감정이입을 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만큼
분명하고 호소력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껴본 적은 없다. 어머닌는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하셨고, 램프를
켠 후 다시 그리스도가 전한 사랑과 믿음을 내게 전해 주셨다. 그리스도가 환자들에게 불어넣어 준 위대한 믿
음과 그리스도의 옷깃만 만져도 모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책을 읽는 동안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그날 밤 너무나 감동받아서 그 자리서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나의 마음을 읽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네게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주어진 운명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란다, 찰리." 오클리 거리의 어두컴컴한 지하 방에서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을 전해 주셨다. 문학과 연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풍부한 주제였던 사랑, 동정 그리고 인간애를.
편견을 극복하라
안네 해밀과 아들 피트 (Anne Hamil and her son Pete)
피트 해밀은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이다. 1935년 뉴욕 브룩클린에서 아일랜드 부모 사이에 태어난 그는 미
해군에 복무하고 멕시코 시 대학, 프랫 학교, 시각예술대학에서 수학했다. 1960년 '뉴욕포스트' 지에 입사해
1965년부터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면서 도시 빈민, 인종 차별, 베트남 반전운동 등의 사회문제를 다룬 기사로 세
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로버트 F. 케네디와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데일리 뉴스'와 '빌리지 보이스'에서 칼럼니스트로 일했다. 현재 '뉴욕 타임즈 매거진'에서 이십오 년 동
안 기고가로 활약 중이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이기도 한 그는 언제나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
졌다. 그는 베스트셀러 "나의 인생: 피트 해밀 회고록(A Drinking Life: A Memoir)"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인
생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어머니와의 대화를 소개했다.
어머니는 벨파스타에서 생긴 일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가슴 아파하셨다. 벨파스타는 우리 같은 카톨릭과
또 다른 크리스챤인 개신교로 나누어져 있는 도시다. 몰론 진실된 개신교도들도 있었지만 어머닌 대부분이 지
독한 편견론자라고 말하셨다.그 곳에서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고 편견론자들이 마더 갱을 구성했을 당
시 어머니는 어린 소녀였다. 그 곳에는 장갑차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
일랜드와 카톨릭 신자들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 곳 벨파스타는 바로 편견론자들이 만들어 가는 도시였
다. 이런 이야기는 무섭고 등골이 오싹했지만, 나는 어머니께 부탁해서 여러 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내 눈에
비친 어머니는 놀라운 사람이었다. 어릴 때 그 어떤 영화보다 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지만 언제나 웃는 모습
으로, 또 행복할 때면 휘파람까지 부셨다. 자유가 있는 미국을 사랑한고 말씀하시면서. 자유는 재산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고 어머닌 말씀하셨다. "잊지 마라, 우린 지금 자유하단다. 넌 앞으로 절대 편견론자가 되어선 안
된다." "편견론자가 뭐예요?" "편견론자란 증오심을 품은 사람이다. 편견론자는 카톨릭 신자를 미워하고 유대
인을 미워한다. 그리고 흑인을 미워한다. 가난한 건 죄가 아니지만 편견을 가지는 건 죄악이다. 그러니 결코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서는 안 된다." "네, 엄마. 절대 안 그럴 게요."
애비 알드리치 록펠러 (Abby Aldrich Rockefeller)
애비 알드리치는 로드 아일랜드 주의 상원의원 넬슨 알드리치의 딸로 쾌활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
다. 그녀는 1894년 당시 스탠다드 오일사의 후계자로 이름 높았던 멋진 청년 존 D. 록펠러 2세를 만나게 되었
다.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칠 년이 흐른 뒤에야 존 록펠러는 그녀에
게 자신 있게 청혼할 수 있었다. 후일 록펠러는 작가 버니스 커트가 쓴 "록펠러 가문의 여인, 애비 알드리치
록펠러(Abby Aldrich Rockefeller: The Woman in the Family)"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비는 정말 쾌활하고 젊음이 넘치는 여자라 세상 모두를 사랑했죠. 그래서 애비가 왜 나 같은 사람과 결
혼하려 할까 생각하며 청혼을 망설일 수 밖에 없었죠." 두 사람은 1901년에 결혼했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와 언제나 낙관적인 자세로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애비의 성격은 남편의 좁고 관료주의적인 사고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기르면서 남편의 시야를 넓혀 록펠러 가문의 재산
으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과 도와 오늘날처럼 자선과 예술 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도록 이끌었다. 1923년 2
월 애비 록펠러는 세 아들 존 D. 록펠러 3세, 넬슨, 로렌스에게 다음과 같은 깊은 안목이 담겨 있는 조언을 해
주었다.
오랫동안 이 엄마가 가슴에 품고 생각해 온 문제가 하나 있다. 엄마가 세상을 경험하면서 그 확신은 더 굳
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의 뿌리는 인종 차별과 편견이라는 생각이다. 그건 타당한 이유 없이, 또는
부당한 이유로 다른 사람이나 국가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사람들
은 바로 유대인들과 흑인들이다. 유럽에서는 좀 다르다.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인을, 그리고 이탈리아인은 오
스트리아인을 싫어한다. 그런 식으로 발칸 반도의 모든 나라가 서로를 미워하고 또 터키인이라는 공동의 적을
만들었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너희는 아직 어리다. 그리고 아직 어떤 사람도 너희에게 상처를 주
지 않았다. 얘들아, 너희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정당한 기
회를 줄 때 가능하다. 미국 한가운데서 끔찍한 인종 폭력과 폭동이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결코 씻지 못할 불명예다.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흑인들에 비하면 비야만적이지만 여전히 지독한 부정
의 원인이 되고 있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인생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너희가 좋은 모범을 보이면 동생들도 너희를 따르게 될 것이다.
남을 대접하라
도로케아 샤베즈와 아들 세자르 (Dorotea Chavez and her son Cesar)
세자르 샤베즈는 1962년 '미국 농민 동맹(the United Farm Workers of America, UFWA)'을 창설한 카리스
마적인 지도자이다. UFWA는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UFWA가 세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세바즈가 양배추와 포도 등 슈퍼마켓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조
직했을 때였다. 그의 부모는 멕시코 이민자였다. 그는 아리조나 주 산간벽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가난을 직접 경험하며 자랐다. 미국 경제가 대공황으로 침체에 빠지자 그의 가족은 이주 노동자로 전략했고,
때문에 아이들은 서른여 개 학교를 전전해야 했다. 다음은 세자르 샤베즈의 회고록 "라 까우사의 자서전
(Cesar Chavez, Autobiography of La Causa)"의 일부이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내어 우리와 대화를 나누시면서 자주 속담을 인용하셨는데, 언제나 숨은 의
도가 있었다.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소를 소유하는 자는 도살하는 자만큼 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어머니는 충고도 잊지 않으셨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냥 놔두거나 도중에 함부로 야단을 치
시는 일도 없었다. 모든 게 일종의 교육 과정이었다. 뒤돌아보면 어머니의 얘기가 내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
지 실감하게 된다. 그 때는 어머니가 비폭력을 역설하고 계시다는 걸 몰랐다. 나중에 간디와 성 프란시스를 비
롯한 비폭력 운동가들의 삶을 접한 이후에야 어머니의 의도를 깨닫기 시작했다. 당시는 싸움을 피하면 남자도
아니라는 분위기가 만연했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한 쪽 빰을 맞았으면 다른 쪽 빰도 내주는 게
최선책이다. 하나님은 네 눈과 이성과 혀라는 무기를 주셨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라도 대화로 해결이 가능하
다.
후일 샤베즈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는 어머니는 말씀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어요. 나중에서
야 얼마나 소중한지 새록새록 깨닫게 되었지요. 지금은 어머니의 충고에 정말 감사하고 특히 스페인 어를 할
때면 몇 가지를 기억해뒀다 써먹기도 해요."
줄리아 데이비스와 손자 베이야드 러스틴 (Julia Davis and her grandson Bayard Rustin)
베이야드 러스틴은 미국 인권 운동가 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다양한 모습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1963년
워싱턴 D.C에서 거행된 역사적인 인권 행진을 주도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행진은 마틴 루커 킹 2세
박사의 연설 'I Have a Dream'으로 더욱 유명하다. 러스틴은 남부지역 흑인 인권 운동의 촉발제였던 1955년
과 1956년 몽고메리 버스 파업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킹 박사의 비폭력 운동의 전신이 된 단체인 '남부 기독
교 지도자 회의(The 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uncil)'를 처음 계획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64년부터
1987년까지 그는 에이 필립 랜돌프 연구소에서 상임이사를 역임하며 간디의 평화주의 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헌신했다. 미국 인권운동을 이끈 뛰어난 전략가들이 많았지만, 그는 킹 박사, 제임스 파머, 도로시 하이트, 로
이 윌킨스, 휘트니 영 등 흑인 지도자들과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 했다. 작가 제비스 앤더슨은 "베이야드 러스
틴: 내가 목격한 불행(Bayard Rustin: Troubles I've Seen)"에서 비폭력 운동을 향한 러스틴의 열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그 중 할머니는 특히 도덕적, 종교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다. 할머니는
어릴 때 배웠던 퀘이커교의 가치를 고스란히 전수해 주셨다. 러스틴은 말했다. "할머니는 흥분했을 때는 말을
삼가고 냉정을 되찾은 후 말을 하라고 하셨어요. 사람을 미워하는 건 너무나 지루한 일이라고요. 혹시 낮에 말
다툼이라도 하면 우리는 화해를 하기 전에는 잠자리에 들 수 없었죠. 할머니는 누가 먼저 싸움을 걸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어요. 먼저 잘못한 사람을 찾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하셨어요." 또한 할
머니가 늘 강조하시던 단순한 진리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완벽한 인간으로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카말라 네루와 딸 인디라 간디 (Kamala Nehru and her daughter Indira Gandhi)
인디라 간디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총리직을 역임한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 이후 1980년 재임돼
1984년까지 임기를 훌륭히 마쳤다. 총리가 되기 전 그녀는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내각에서 정보 방송부 장관
을 역임하면서 인도 사회에 뿌리깊은 방송 심의 규제를 완화시켰고 가족 계획에 관한 텔레비전 교육 프로젝트
를 승인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녀는 인도의 초대 총리이자 마하트마 간디의 동지였던 지와하랄 네루의 딸
이다. 그녀는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영국 정부에 체포되어 일 년 삼 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지만
출옥 즉시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강철 같은 의지를 보여 준 바 있다. 그녀는 마흔이 되기 직전 의회당의 집행
위원회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당내에서 안정적인 입지를 확보하며 서열을 높여 갔다. 작가 인데르 말호트라는
"인디라 간디: 그녀의 인생과 정치 역정(Indira Gandhi: A Personal and Political Biography)"에서 영감이 뛰
어났던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적고 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그녀의 아버지 쪽 가족들은 모두 사치를 즐기는 편이었다. 따라서 그녀에게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의
근검절약을 가르치는 데는 어머니가 훨씬 더 적합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는 잦은 체포와 감금으로 고통
받을 때 언제나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더 나아가 직접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민족
주의 운동에 참여해 함께 투쟁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인디라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십 년 후 그녀는 한 여성 세미나에 참석한 자리에서 어머니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저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어머니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해내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간디 선생님의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평생 걸어오던 길
을 바꾸려 하셨을 때였습니다. 당시 전 가족이 나서서 반대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만은 용기와 인내로 아버지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아버지는 민족주의 전선에 참여할 수 있었고,
또 민족주의 운동 덕분에 우리 가족의 생활 아니 더 나아가 인도의 역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을 쌓는 지혜
아이의 개성을 존중하라
낸시 에디슨과 아들 토마스 (Nancy Edison and her son Thomas)
토마스 에디슨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이다. 그는 전구와 축음기 등을 발명했고, 기존의 전화, 타
자기, 발전기, 전차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어머니 낸시와 아버지 사무엘 토마스 사이에 일곱 명의 아
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오하이오의 산간지역에서 미시간 주 포트 휴론으로 이사를 했고, 그 곳에
서 그의 아버지는 곡물과 벌목 사업을 했다. 작가 닐 볼드윈은 "에디슨, 20세기의 발명가 (Edison: Inventing
the Century)"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에디슨은 포트 휴론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녔다. 그 학교는 전 학년이 한 반이었고, 학생들 나이는 다섯 살부
터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에디슨은 그 곳으로 이사한 뒤 잦은 감기와 호흡기 질환에다 성홍열까지
앓았기 때문에 학교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에디슨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불러 주는
단어는 적어 않고 공책에다 낙서만 하고 있는 걸 보고는 다른 학생들 앞에서 그를 놀리고 손찌검까지 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에디슨은 당시 일을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학관이 학교를 방문했
는데, 선생님이 나를 가리키며 머리가 나빠서 더 이상 학교에서 가르칠 가치도 없다고 말했지요. 그 말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충격이었고, 난 어린 마음에 너무 슬퍼서 울음을 터트리며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그 일을
얘기했어요. 그 때 어머니가 어떻게 느끼셨을지 짐작이 가요. 어머니는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곧장 학교로 가 선생님과 만나서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리고 에디슨이 선생
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말을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에디슨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후일 작가는 에디슨 전기에 이렇게 썼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기존 관습과 형식에 얽매여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사회의 족쇄와 고삐에 묶이
고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나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입니다. 너
무나 진실하게 갖고 계셨어요. 난 어머니를 위해 살겠다고 생각했고, 어머니만은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공부하는 즐거움
줄리아 코울먼과 제자 지미 카터 (Julia Coleman and her pupil Jimmy Carter)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미합중국 제39대 대통령을 역임한 후 지금까지 세계 무대에서 적극적인 활약을 펼치
고 있다. 그는 작가, 연설가, 국제 분쟁 중재자로서 헌신적인 활동을 하며 많은 업적을 쌓았다. 조지아 주 시골
에서 땅콩 농장을 경영하는 기업가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카터는 대공황 때문에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을 부모님과 함께 등학교 때 선생님을 꼽았다. 1975년 대통령
으로 당선되기 전, 선거운동 당시 발간한 자서전 "최고가 되기 위해서(Why Not the Best?)"에서 그는 줄리아
코울먼 교장을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준 훌륭한 스승으로 소개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최근에 돌아가신 줄리아 선생님은 평생을 독신으로 사셨다. 학생들에게 언제나 교실의 테두리를 벗어나 더
큰 문화적인 지식을 쌓도록 독려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 수필 경연대회, 음악 감상, 단막극 제작, 철자
대회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는 모든 학생이 빠짐없이 토론에 참여해야 했고, 시
나 성경 구절을 외워 낭송하거나 철자대회에서 실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또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하모니카나 우쿨렐레 아니면 피콜로라도 연주해야 했다.
여러 면에서 줄리아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비록 작은 키에 어깨가 조금 구부정하
셨지만 선생님 모습은 그렇게 우아해 보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얼굴은 다양한 표정을 담아냈다. 특히 아끼
는 시를 낭송하거나 밀레, 게인즈 버러, 휘슬러, 조슈아 레이놀즈 경의 등의 미술 작품을 보여 주실 때는 더욱
그랬다. 내가 열두 살 되던 해 어느 날, 선생님은 나를 부르시고는 이제 나도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를 읽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책제목만 듣고 카우보이와 인디언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얼마
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중에 도서관에서 그 책이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가 쓴 소설로 장작 1400쪽에
달하는 책이라는 걸 알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후 "전쟁과 평화"는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 되
었다.
페이지 할머니와 손자 던 라더 (Grandmother Page and her grandson Dan Rather)
텍사스 주 월톤 출신의 던 라더는 미국의 저명한 뉴스 캐스터이다. 그는 1961년 휴스톤 소재 CBS방송국 자
회사에서 일하던 당시 허리케인 칼라를 취재함으로써 방송국 고위인사들의 눈에 띄었고, 이후 전국 프로그램
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존 F. 케네디 암살사건,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등 큼직큼직한 뉴스를 보도
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쌓아갔고, 특히 수세에 몰린 리차드 닉슨 전 대통령과의 생방송 논쟁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1964년 이 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민주당과 공화당 전당대회를 취재했으며, "카메라는
결코 잊지 않는다(The Camera Never Blinks)" 등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록 "나는 기억한
다(I Remember)"의 일부이다.
친가와 외가를 합쳐 대학을 간 사람은 나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내가 대학 진학을 하게
되었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집안의 가장이셨던 페이지 할머니는 마차를 타고 다니며 자랐
고,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의 소유자이셨다. 할머니는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서 밥짓고 빠래하신 후 곧 들로 일
하러 나가셨다.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신 후에도 밤에 또 다시 요리와 바느질을 해야 했지만 언제나 책을 가
까이 하는 여유를 잃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가정 환경도 장서르 쌓아놓고 독서를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석탄 램프 옆에 앉아 소중하게 간수하시던 로벅 백화점에서 나오는 씨앗
이나 가사일을 주제로 한 도서 카탈로그를 보며 큰 소리로 어머니에게 읽어 주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로 카탈
로그가 새 것으로 바뀌는 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할머니는 한 쪽 한 쪽 꼼꼼하게 읽어 주셨다. 할머
니에게 시어스 백화점의 카탈로그는 꿈이 담긴 책이었다. 그것은 식물과 채소 재배가 아니라 바로 할머니의
꿈을 재배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의 관심을 모으는 데 독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사실 할머
니 본인도 책읽기를 정말 좋아하셨다. 지금도 할머니가 부르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던, 이리 오렴, 할머니가
책 읽어 줄게." 그 말을 듣는 즉시 나는 한달음에 할머니께 달려갔다. 할머니가 그렇게 부르시면 이야기 시간
이란 뜻이었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성경 이야기였다. 성경은 우리 가족에게 글자 그대로 열려 있는 책이었
다. 성경책이 펼쳐 있지 않은 모습을 보기가 드물었을 정도였으니까. 펼쳐 있는 책은 살아있다고는 말이고, 언
제나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경은 바로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할머니는 성경 구절 가운데
내가 어디를 가장 좋아하는지 알고 계셨고, 늘 여리고 전투에서 여호수아가 세운 훌륭한 업적을 읽어 주셨다.
할머니의 종교적 가치관을 과소평가 하려는 뜻은 전혀 없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성경을 읽어 주실 때 할머
니는 신앙심을 고취시키려 한다기 보다는 재미를 더해 주려는 생각이 더 많으셨던 것 같다. 당시 여호수아는
나의 실베스타 스탤론쯤이라고 할까? 그는 텍사스의 시골 마을 블루밍톤에 살던 한 소년의 영웅이었다.
쟈니 로원과 아들 칼 (Johnnie Rowan and her son Carl)
칼 로원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흑인 언론인이다. 사십여 년이 넘게 언론에 종사하면서 그는 신문
칼럼니스트로 다양한 언론상을 수상했으며, 텔레비젼 쇼 '인사이드 워싱턴(Inside Washinton)'에서는 패널리스
트로, 라이오에서는 자신의 전국 프로그램 '로원 리포트(The Rorwan Report)'의 진행자로 바쁘게 뛰고 있다.
그는 테네시 주 맥민빌에서 아주 가난하게 자랐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군에 입대해 최초의 흑인 장
교로 임관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네아폴리스 스타' 지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미국 최남단 지역의
잔혹한 흑인 차별주의를 취재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핀란드 주재 미국 대사와 미 정보국 국장을
역임했다. 그의 공직 생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흑인으로서 처음으로 내각에 기용되었고, 미 국가 안
보 위원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장벽을 부수며(Breaking Barriers)"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
상했다.
백 원, 십 원을 아껴서 먹을 음식을 사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 작품이나 비싼 잡지를 살 수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내 교과서만이라도 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바람이 들어와 손발이 시린 추운 겨울이나 무더
운 여름, 매일 밤 거실의 깜박이는 등유 램프 앞에 앉아서 눈살을 찌푸리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이걸 읽어 봐라' '저 단어를 써 보렴' '4 곱하기 3은 뭐지?' 하며 내 공부를 봐 주시던 아름다운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자신의 능력에 관계 없이 격려와 칭찬이 스스로를 존중하게 만들고 배움을 향한 욕
망을 북돋아 주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만드는 자극제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계셨음에 틀림없다. 어머
니가 불러 주는 단어를 완벽하게 적어 보일 때면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우리 아들보다 공부 잘하는
애는 없을 거야, 그치?" 그런 어머니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도무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아이들을 이해하라
마리아 몬테소리 (Maria Montessori)
마리아 몬테소리는 현대 교육사에서 가장 커다란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그녀는 1870년 이탈리아에서 태어
나 로마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는데, 여성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1890년 자시의 학교를 세워 어린이
의 자연적, 자발적 학습 능력을 중시하는 혁신적인 교육 방법을 시도했다. 그녀는 특히 암기 위주의 틀에 박힌
교육을 떠나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고 참여를 통한 교육을 강조했다. 오늘날도 전세계 수많은 유치원에
서 몬테소리식 교육 방법에 기초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녀는 저서 "흡수하는 마음 (The Absorbent
Mind(1949))"에서 오십 년 교육인생을 회고하며 이렇게 적었다.
우리 학교는 학교라기 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집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이질
적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하나로 동화될 수 있는 그런 집을 만들고 싶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채 다섯
살도 되기 전에 일고 쓰는 법을 익혔다. 아무도 가르쳐 준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당시만 해도 네 살 반밖에 안
된 아이가 글을 쓴다거나, 어른들이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배우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마치 기적처럼 여겨졌다. 사실 우린 오랫동안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해서 실험을 반복한 후에야 우리는
어린이들은 문화를 '흡수'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란 인위적인 노력 없이 흡
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우리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분야를 접하게 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읽
고 쓰는 것 이상의 내용을 너끈히 '흡수'하는 것이었다. 식물학, 동물학, 수학, 지리학 할 것 없이 재빠르게, 조
금도 지겨워하지 않으면서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교육이란 선생님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과정
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교육은 선생님의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님이 할 일은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적합한
특수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
메이벨 미첼과 딸 마가렛 (Maybelle Mitchell and her daughter Margaret)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는 1937ssu 퓰리처 상을 수항했고, 이 년
후에는 영화로 제작돼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바로 작가 미첼의 어린 시절과 성
장 환경에 기초하고 있다. 그녀는 1900년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애틀란타 저널에서 기자로 일하기도 했으나,
1926년 작가가 되기 위해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일한 작품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했다. "바
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출판되기까지 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출판되자 마자 베스트셀러 되었고,
단 육 개월 만에 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남북전쟁과 그 후 재건 기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연예계의 새로운 신화를 창출하며 주인고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라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마가렛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론 더 이상 작품을 출판하지 않았고, 결
국 마흔 아홉상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작가 안네 에드워즈는 그녀의 생을 그린 전기 "타라로
가는 길 :마라렛 미첼의 삶(Road to Tara: The Life of Margaret Mitchell)"에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스 불루바드 학교에서서의 첫 날, 마가렛은 돌아오자 마자 어머니에게 산수 시간이 너무 어렵다며 앞으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머니 메이벨은 딸아이를 미첼 가문의 멋진 마차에 태우고는 직접 말고삐를
잡고 근처 클레이톤 카운터와 핏제랄드 농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히 달렸는지 마가렛은 떨어
지지 않기 위해 의자를 꼭 잡아야 했다. 한동안을 달린 후 어머니는 마차 속도를 늦추면서 주위의 낡은 농장
의 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옛날에는 훌륭한 재력가들이 이 저택에서 살았단다. 이제 낡고 허물어진데다 일
부는 셔먼 장군이 남부로 진격한 이후로 계속 이 모양으로 남아 있지. 가문이 산산조각 나자 저택들도 산산조
각 나 버렸다. 저기 있는 저 집, 보이니? 저 저택에 살았던 사람들은 저택만큼이나 초라해지고 말았단다." 그
녀는 떨고 있는 딸아이를 붙잡고 길 반대편 쪽에 서 있는 낡기는 했지만 잘 가꾸어진 저택을 가르키며 말했
다. "이제, 저 집을 보아라. 저기에 사는 사람들은 저 저택만큼이나 튼튼하다. 마가렛, 기억해라. 저 사람들이
예전에 살던 세상은 평화롭고 안전했다. 물론 지금 네가 사는 세상도 그렇다. 하지만 앞으로 앞으로는 어떤 일
을 겪게 될지 모른다. 저 낡은 저택처럼 네 세상도 무너질 수 있다. 네가 그런 도전에 맞서 싸울 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면 그냥 쓰러지는 거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거다. 알겠니?"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는 황혼이 내리는
시골의 침묵을 날카롭게 갈랐다. "사람들은, 특히 여자들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네가 편하게 지내던 세상이 무너진다면 네게 남는 것은 힘과 머리 속에 든 지식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 불평말고 내일 학교에 가거라. 그리고 산수를 정복해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그리없었다. 이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다시 마차를 몰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학업에 충실해라
줄리아 울프와 아들 토마스 (Julia Wolfe and her son Thomas)
비록 서른여덟의 짧은 생을 살고 갔지만 토마스 울프는 자전적 소설 "고향을 바라보라, 천사여(Look
Homeward, Angel)", "시간과 강에 대하여(Of Time and the River)"와 유고집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You
Can't Go Home Again)"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시저인 부드러움과 찬물을 끼얹은 듯한 섬뜩함이
어우러진 그의 스타일은 일면 산만해 보인다는 평을 받으면도 독자에게 커다란 정서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노스 캐롤라이나 주 아쉬빌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다. 그의 문학적 감각
은 주위 환경보다는 어머니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일찍이 아들의 문학적 소질에
주목하고 계속해서 발전시키도록 끊임없이 독려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얼마 후 작가 존 테리는 "토마스 울프
가 보낸 편지 모음집(Thomas Wolfe's Letters his Mother Julia Elizabeth Wolfe)"에서 두 모자의 돈독한 관
계를 그렸다. 다음은 그 일부로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성 피터스버그에서 긴 휴가를 보내는 동안 나는 토마스를 데리고 근처 학교에 들렀다. 그 곳 선생님
은 토마스를 반기며 같이 공부하자고 하셨지만, 교과서가 완전히 달랐다. 당시만 해도 책을 다시 사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것을 안 토마스가 말했다. "엄마,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괜히 쓸데없이 돈을 쓰
는 것 같아요. 게다가 집에 가도 학교에선 다른 책으로 공부하니까 여기서 새로 산 책은 쓰지도 못할 텐데요.
뭐, 마침 교과서도 갖고 왔으니까 이걸로 공부하는 게 어때요? 어머니가 선생님 대신 가르쳐 주시면 되잖아
요." "정말 그래도 되겠니?" "물론이죠."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함께 공부를 했다. 토마스를 종종 웃으며 말
했다. 엄마, 수업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내가 말했다. "왜 그러니?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니?" "맞아요. 이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토마스와 함께 공부했
다. 토마스는 수업 시간 내내 한 번도 지루해 하지 않았다. 학교 수업시간보다 훨씬 길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토마스는 전과 같은 반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토마스에게
물었다. "얘야, 왜 집에 책을 가져오지 않니?" "그럴 필요가 없어요. 엄마랑 성 피터스버그에 있을 때 다 공부
한 건데요. 아직 한 달쯤 더 있어야 새 내용으로 들어갈 걸요?" 토마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창의력을 키워라
재크린 케네디 오나시스 (Jacqueline Kennedy Onassis)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예순다섯 생일을 얼마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
는 유산을 남기고 갔다. 그녀는 편집장, 예술 애호가로 활동하며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세인들로
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가족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은 모습이 있다면, 그
것은 1963년 남편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을 당시 그녀가 보여 준 침착하고 위엄 있는 모습일 것이
다. 그녀의 의연한 태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기에 충분했다. 이 후 그녀는 혼자서 두 아이 캐를라인과
존을 기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작가 빌 애들러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 그녀가 말하는 자신의 모
습 (Jacqueline Kennedy Onassis: A Portrait in Her Own Words)"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그녀의 철학을 적
고 있다. 그녀는 무엇보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강조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 아니 그냥 수채화 물감을 마음대로 뿌리게 한다거나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도록 놔두는
것이 교육의 첫 단계라고 생각해요. 전 그림을 그릴 때마다 캐롤라인이 함께 그릴 수 있도록 옆에 물감을 준
비해 줘요. 붓에다 물을 적셔 여기저기 그림을 그려서 곧 엉망으로 만들고 말지만,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아이들에게는 엄마와 함께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만큼으로 소중한 기억인 것
같아요. 그런 방법은 아이들의 숨은 재능을 계발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제 경우처럼 가
끔 가족들이나 좋아해 줄 만한 그림이라도 몇 점 그릴 수 있게 되겠죠. 같이 쉬면서 즐거움을 나눌 수 있거든
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는 창의력을 키워 주려고 무척 노력하셨어요. 열 살쯤 되었을 때 어머니 생신 선물로
제임스 러셀의 '라운폴 경의 비전(The Vision of Sir Launfal)'을 암송한 적이 있어요. 제 시집에서 찾은 시였
는데 열한 쪽이나 되는 긴 시였지만 끝까지 다 외웠어요. 그 때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랑. 지금도 정
확하게 외울 수 있을 정도니가요. 그런 제 경험으로 비춰 보면, 어릴 때 젊음을 간직하도록 배운 사람은 언제
나 젋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요리에 관심을
매리 비어드와 아들 제임스 (Mary Beard and her son James)
제임스 비어드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요리사로 평생을 현대 서양 요리학 강좌에 바쳤다. 오fp곤 주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 몇 년 동안 음성학과 연극 공부를 위해 유학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우로 빛을 보지
못한 그는 1935년 극장을 떠나 요식 사업에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으며, 5
년 뒤 첫 요리책을 출판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비어드는 뉴욕 시로 옮겼고, 그 곳을 주무대로 1946
년에는 NBC 방송국에서 처음으로 요리 프로그램을 맡았다. 그의 신념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이용해
신선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곧 세상에 널리 알려졋다. 1985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제임스 비어드 요리학교의 운영을 맡아 요리학원, 시민 단체, 및 일반 여성을 대상으로 요리 강좌
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 후 작가 이반 존스는 그의 생을 저술한 "에피큐리안 딜라이트 (Epicurean
Delight)"에서 어린 제임스가 어머니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적고 있다. 제임스가 식당에서 보내
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지만 여덟 살이 되자 드디어 빵을 태우지 않고
구워 냈다. 이에 멈추고 않고 그는 계속해서 어머니로부터 교양 교육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함
께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두 모자는 기차나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떠났
고, 그 곳에서 예술과 요리, 그리고 어머니 메리의 멋진 친구들을 만나 교양을 쌓아갔다. 어머니는 다양한 사
람들과 교제했기 때문에 배우, 실내 장식가, 가수를 포함해 예의바르고 강인한 여성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솔라리와 호화로운 뷔페 식당 말퀜드에서 맛본 최고급 음식, 팰리스 호텔의 유리로 둘러싸인 정원에
서의 차 한 잔, 잭스의 가재요리, 샌드 댑, 아매론, 테어즈에서 유명 인사들과 어울려 함께한 저녁 식사는 그에
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오레곤의 여름 별장에서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작은 나무 스토브와 그 곳의
작은 부엌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놀라운 솜씨는 지금도 경탄을 자아낸다. 그 손맛은
한 번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완벽 그 자체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제임스 버어드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했던 멋진 여름 소풍들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레곤 해변에서 보낸 그 바쁜 나날들은 내 추억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 이 세상 어느 곳도 내 요리 인생에 그만큼 커다란 영향을 준 곳은 없다. 물론 파리는 예
외가 되겠지만."
성공을 꿈꾸는 지혜
정치적 감각을 키워라
메리 캘디컷과 딸 헬렌 (Mary Caldicott and her daughter Helen)
호주 출산의 헬렌 캘디컷은 의사가 된 수 낭포성 섬유증을 앓는 어린이 치료에 평생을 바쳤다. 그러던 중
1970년과 1980년대 정치 혼란에 휩쓸리면서 그녀는 자신의 천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후 그녀는 하바드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회책임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 또는 WAND)'를 창
설해 초대 의장직을 맡았다. 이 두 단체는 현재 반핵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캘디컷은
각국의 지도자와 언론인을 만난 자리에서 그리고 연설을 통해 수천 명의 관중에서 특유의 우아함을 장기로 핵
무기 감축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1985년 PSR의 자매단체인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International
Physicians for the Prevention of Nuclear 또는 IPPN)'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도 캘디컷은
세계 평화와 핵무기 감축을 역설하며 지칠 줄 모르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도덕적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자서전 "필사적인 열정(Desperate Passion)"에서 그녀는 이렇게 회고한다.
어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당신이 그토록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었던 진실을
추구하는 이성과 더 많은 정보를 향한 갈증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정치와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다. 모
르는 게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고고한 정치적 감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당신의 분석은 언제나 옳았다. 언제나....... 사십 년 전 이미 어머니는 세계 인구 과잉이 몰고
올 끔찍한 결과에 대해 걱정하셨고, 1960년대 초 벌써 컴퓨터 때문에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날 것을 예견하
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난 어머니의 그런 장점을 물려받은 것이다.
목표는 높게
아비게일 아담스와 아들 존 퀸지(Abigail Adams and her son John Quincy)
아비게일 아담스는 미국 역사상 독특한 입지를 확립한 인물이다. 독립 전쟁 당시 위대한 애국심의 발현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 그녀는 존 아담스 전 대통령과 결혼해 아들 존 퀸지 아담스를 낳고 또 아들을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매사추세츠 주 웨이머스의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당시 대부분의 여
성이 그랬듯이 학교 교육의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많았던 그녀는 많은 책을 섭렵했으며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공직에 몸담았던 남편 때문에 그녀는 남편과 오랫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다. 존 아담스는
대륙회의에 대표단으로 파견되었고, 해외 특사로도 근무했으며 새 헌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되
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오십 년 이상을 함께 살며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언제나 직언을 두려워 않는 강
직함 덕분에 더욱 존경받았던 그녀는 1780년 당시 열두 살 난 아들 존 퀸지에게 다음과 같은 통찰력이 담긴
조언을 했다.
천재라도 부러워하는 삶이 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평화로운 삶이나 안정된 생활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
는다. 키케로가 카달리나, 밀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독재에 자극받고 분노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탁월한 웅
변가로 빛날 수 있었을까? 강건한 정신은 고난과 싸우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역사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지혜와 통찰력은 안락과 여유가 아니라 고된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강력한 필요가 위대한 덕을
만든다. 정신이 고양되고 마음을 동화시킬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자극받고 깨어날 때만이 영웅이아 위대한 정
치인이 될 수 있다.
마틴 선생과 제자 아이작 아시모브 (Miss Martin and her pupil Isaac Asimov)
아이작 아이모브는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지만 그 중에서도 공상 과학 소설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가
운데 미래주의 소설 "로보트(I, Robort)", "환상 여행(Fantastic Voyage)", "파운데이션(Foundation)" 시리즈가
유명하다. 화학자였던 그는 TV 시리즈 "스타트랙(Star Trek)"을 제작할 때 과학 자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1923년 겨울 가족을 따라 미국 브룩클린으로 이민 왔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천재성
을 보였지만 고집만은 보통이 아니어서 종종 인내심을 잃거나 지나치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교육
은 받지 못했지만 성실하게 산 사람들로, 그가 지나치게 행동할 때는 엄하게 벌을 주기도 했다. 아시모브는 여
러 권의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그 중 한 권 "아직도 생생한 기억(In Memory, yet Green)"에서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 마틴에 대한 고마움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마틴 선생님은 내가 만난 선생님 중 가장 훌륭하신 분이셨다.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주셨고, 부당하
게 야단을 치는 일도 없었다. 그 중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철자 대회에서 부진한 성적을 낸
후 괴로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분이 바로 마틴 선생님이시다. 학기마
다 철자 대회가 있었는데, 새 학기가 되자 마틴 선생님은 우리에게 대회 참가를 원하는 학생이 있냐고 물으셨
다. 내가 손을 들지 않자 선생님은 그 이유를 물으셨다.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제가 지난번에 졌
으니까 이제 아이들은 제가 나가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 그러자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번 학기 철
자 시험에서 아이작이 최고 점수를 받았으니까 선생님은 대회에 나가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아이작이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들어 보세요." 그 때서야 선생님이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한 아이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어 나를 지지했고, 그 덕분에 나는 반 대표로 대회에 나갔
다. 4, 5, 6학년 모든 반 대표가 참가해 겨루는 대회였다. 나는 다시 불안했고 긴장했지만 적어도 지난번보다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다. 나는 첫 문제부터 자신 있게 적어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등을 했다. 부상으로 만년필을 받았는데, 내 평생 처음 가져본 것이
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온후한 분이셨다. 6학년이 된 후 선생님을 몇 번 뵙기는 했지만 그 후에는 우리 집이
이사를 하는 바람에 한 번도 소식을 전해듣지 못했다. 마틴 선생님, 어디 계시든 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
습니다.
나탈리아 긴즈버그 (Natalia Ginzburg)
부모가 사회주의였던 나탈리아 긴즈버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브루지에서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살아
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류 작가로 평가를 받으며 알베르토 모라비
아와 이탈로 칼비노에 비견되곤 했다. 저서에는 "가족 속담(Family Sayings)", "도시로 가는 길(The Road to
the City)", "우리의 지난 날(All Our Yesterdays)"이 있다. 긴즈버그는 이탈리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프
랑스 문학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녀의 저서 "작은 덕(The Little Virtures)"에서 그녀가 자녀교육
에 관해 느낀 점을 적은 부분이다.
자녀 교육만큼은 작은 덕목이 아니라 위대한 덕을 가르쳐야 한다. 검소함이 아닌 관대함과 물질적 부를 초
월할 수 있는 마음을,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닌 용기로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자세를, 영악함이 아닌 솔직함과
진실에 대한 사랑을, 기교가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제를, 성공을 향한 욕망이 아닌 삶에 대한 애정과
지식에 대한 갈증을 가르쳐야 한다. 요즘 어쩌다가 부모와 자식간에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기면 -물론 양쪽
모두 편견과 부끄러움과 심리적 두려움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가 극히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반드
시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부모가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아
이들은 자신을 닮지 말고 더 강인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녀교육에서 그 무엇보다 명
심해야 할 점은 아이들이 삶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도록 도와 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랑은 다양한 형태
를 띨 수 있다 부모가 어떤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되며, 아이가 천재나 예술가, 영웅이나 성자가 되기를 강요하
거나 바라서은 안 된다. 대신 모든 것을 감싸 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인내심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그 무
엇보다 훌륭하고 고귀한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미니 버크와 딸 마가렛 버크 화이트 (Minnie Bourke and her daughter Margaret Bourke White)
마가렛 버크 화이트는 미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사진작가이다. 포춘 지와 라이프 지에서 일하 서 그녀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전국적인 명사였다. 그녀의 수상작품은 주로 시골 지역의 가난, 나찌 공격 하 러시아에서
의 사랑, 마하트마 간디 생존 당시의 인도 상황, 제2차 세계 대전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차별정책을 주
제로 담고 있다. 그녀는 뉴저지 주 바운드 브룩에서 태어나 아낌없는 사랑으로 감싸 주면서도 투철한 직업 정
신으로 성공을 이룩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마가렛은 특히 출판계에서 일했던 어머니 미니의 영향을 많이 받
았다. 자서 전 "나의 자화상(Portrait of Myself)"에서 그녀는 이렇게 회상한다.
진실에 대한 사랑은 작가가 준수해야 할 제1원칙이다. 나의 경우 어머니가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혹시 접시를 깨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언제나 이렇게 묻곤 하셨다. "마가렛, 우연한 사고였니, 아
니며 부주의했던 거니?" 부주의해서 그랬다고 말하면 벌을 받았고, 사고였다고 하면 용서해 주셨다. 나는 스스
로의 행동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일찍부터 교육받았고, 그 점에서 어머니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
다. 그런 어머니의 교육 덕분에 나는 깨진 접시보다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가 한층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뒤돌아보면 어머니의 규칙 가운데 일부는 지나칠 정도로 스파르타 식이었지만 그것 역시
존경한다. 엄격한 규칙 속에 배어 있는 훌륭한 교훈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학교 시험에서 혹시 열두
문제 가운데 열 문제를 골라 답하라는 문제가 나오면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가렛, 제일 어려운 문제
열 개를 고르도록 해라." 쉬운 길은 피해라! 힘든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
세련된 교양을 길러라
호텐스 칼리슬과 딸 키티 칼리슬 하트 (Hortense Carlisle and her daughter Kitty Carlisle Hart)
배우이자 가수인 키티 칼리슬은 평생 예술과 공익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육십여 년간 그녀는 영화, 브
로드웨이 극장, 뉴욕 시 오페라 단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물론 장기 쇼 프로그램 "진실을 밝히자면 (To
Tell the Truth)"을 비롯한 여러 편의 텔레비전 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퓰리처 상 수상의 영광을 안은
극작가이자 감독인 모스 하트와 결혼했으며, 1976년과 1996년 사이 '뉴욕 주 예술위원회(New York State's
Council on the Arts)' 회장직을 역임했다. 그녀의 공직 생활을 기리기 위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플라자에 키티
칼리슬 극장이 최근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그녀는 자서전 "키티(Kitty)"에서 다음과 같이 어린 시절을 회상한
다.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 친구분들은 어머니에게
재혼을 권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을 처분했다. 한 손에는 바이올린을 들고, 다른 손은 내 손을 꼭 쥔 채.......
무엇이 어머니로 하여금 유럽행을 택하게 만들었을까? 진짜 이유는 아마 나를 향한 어머니의 야망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적당한 혼처를 찾기를 바라셨다. 물론 당시 우리 지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멋진 결혼
을 꿈꾸셨다. 어머니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속에 나오는 부인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딸을 유럽으로 데리고 가
세기의 결혼식을 성공시키는 소설 속의 여인들과는 달리 우리는 재산과 사교계 인맥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
마음속 어디선가에는 나를 잘 키워 부유한 귀공자와 결혼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 당시 내가 열한 살 난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어머니는 참으로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파리에서 나는 정말
진보적인 교육을 받았다. 손을 안 댄 과목이 없을 정도였다. 언어, 웅변, 예술사, 비교 종교학 등등. 당시 유럽
에서는 대학을 가는 여성도 없었을 뿐 아니라 여성을 위한 학위 과정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는 나에게 교양을 심어 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전심전력을 다하셨다. 내가 친구가 없어 심심하다고
불평하면 어머니는 근엄한 얼굴로 말씀하시곤 하셨다. "파리에 박물관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루브르 박물관
이나 그르벵 박물관에 가려무나. 아니면 콘서트나 오페라도 좋지 않니? 네 마음이 바로 너의 집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닦아야 하지 않겠니?"
도전하는 정신
아비게일 케이와 딸 메리 케이 아쉬(Abigail Kay and her daughter Mary Kay Ash)
메리 케이 아쉬는 이십오 년 동안 방문 판매원으로 일했다. 1963년에는 은퇴를 결심했지만 채 한 달을 넘기
지 못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책을
쓸 계획이었지만 마음을 바꿔 여성들에게 무궁무진한 직업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문 판매 회사를 설립하기
로 했다. 새 회사 설립을 위해 그녀는 평생 동안 모은 돈 오천 달러를 투자하고, 당시 스물한 살의 아들 리차
드의 도움을 받아 그 해 9월 메리 케이 코스미틱스라는 회사를 설립해 기업가로 변신했다. 오늘날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는 전세계 스물여섯 개국에 47만 5천 명의 뷰티 컨설턴트라고 불리는 방문 판매원을 두고 있다.
1980년 남편 멜이 암으로 사망한 후 메리는 암치료 연구를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텍사스
주 의회가 유방암 조기발견을 위해 유방 X선 촬영을 의료보험에 포함시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
을 했다. 또한 암 연구 기금 조성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1993년에는 달라스주 성 바오르 메디컬 센
터 내에 암 면역 치료 연구를 위한 메리 케이아쉬 센터를 설립했다. 1996년 그녀는 여성 암 치료 연구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메리 케이 아쉬 자선 재단을 창립했다. 그녀는 자서전 "메리 케이(Mary Kay)" 외에 두 권의
베스트셀러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다(You Can Have It All)"와 "메리 케이의 사람관리(Mary Kay on People
Management)"를 저술했다. "메리 케이"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그 곳에서 삼 년 동안 결핵치료를 받으신
후에 퇴원하셨지만 평생을 환자로 지내면서 집에서 세심한 간호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휴스톤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며 혼자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말을 들은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전부 에이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어머니와 나 자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언제나 최고일 수만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패
배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는 미래를 보고, 다음 기회에 더 잘 할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에게 언제나 승리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건 중요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패배하기 마
련이지만, 패배는 오히려 소중한 배움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내게 심어 준, 패배에 굴하지 않는 정신
덕분에 난 어려운 시기에 너끈히 극복할 수 있었다.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라
베아트리스 로버츠와 딸 마가렛 대처 (Beatrice Roberts and her daughter Margaret Thatcher)
마가렛 대처는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다. 그녀는 린콜른샤이어의 중상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그녀
의 가문은 정치와 인연이 많았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한동안 화학자
로 일했지만 결혼 후 두 아이를 기르면서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계에 뛰어들어 보수당 당
수로 선출되었고 1975년 마침내 수상직에 올랐다. 그 후 십오 년 동안 그녀는 정치적 지도자로서 영국을 이끌
었다. 그리고 세 번 연속 수상을 역임함으로써 20세기 최장기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긴축 정책을 둘러싸
고 보수당의 내분이 심해지자 결국 수상직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이 년 후 영국 왕실에 의해 일대귀족 작위를
받았다. 그 후로도 그녀는 대중 연설, 저술 활동 및 그녀의 이름을 딴 사립 재단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며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그녀는 자서전 "권력을 향한 길(The Path to Power)"에서 어린 시절을 회
상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우리 가족은 주로 스키그니스로 휴가를 떠났는데, 그 곳에서도 한가하게 낮잠이나 자면서 시간을 보내기 보
다는 활동적인 일을 해야 했다. 196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내 가슴속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
감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우리 가정을 지키는 위대한 존재였다. 가사를 돌보시고 필요할 때면 가게를 운영하시
며 아버지를 물심양면 지원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시장으로 당선되었을 때 어머니는 교회에서 다양한 자원 봉
사활동에 참여하셨다. 그 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드레스 재봉 등의 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셨고,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불평불만을 모르셨다. 현모양처였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우리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셨
다. 어머니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아버지로부터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접목시키는 데 필요한 적극적인 자세는 바로 어머니에게
서 물려받은 것이다.
목표 성취를 위해 끊임없이 매진하라
제인 리노와 딸 자넷 (Jane Reno and her daughter Janet)
자넷 리노는 미국 최초의 여성 법무장광이다. 그녀는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한 후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997년 초 재임되었다.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출신의 그녀는 하버드 법과 대학원 시절 몇 안되는
여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졸업 후에는 고향 플로리다로 돌아가 검사로 재직했다. 1978년 11월 플로리다 주 검
찰총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 네 번이나 재선되었다. 그녀의 주요 업적으로는 청소년 법률 제도 개혁, 이혼
후 자녀 양육에 태만한 아버지에 대한 책임 강화 및 마이애미 마약 법원 설립 등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 제인
은 아이들을 기른 후, 마이애미 뉴스의 취재 기자로 활동할 정도로 적극적인 분이셨다. 작가 폴 앤더슨은 "자
넷 리노: 옳은 일을 찾아서(Janet Reno: Doing the Right Thing)"에서 이렇게 전한다.
자넷 리노의 어머니는 외향적이고, 진솔하며, 때로는 황당할 정도로 색다른 주장을 피력했던, 참으로 독특한
분이셨다. 언젠가 리노는 여권주의에 찬성하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제 어머니는 항상 최선
을 다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올바른 일을 하며, 나 자신을 한 명의 '인간'으로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녀
는 어머니가 생활에서 보여 준 결단력을 특히 존중했다. 상원 법사 위원회에서 가진 임명 비준 청문회에서 그
녀는 1948년부터 2년에 걸쳐 가족들이 손수 집을 지은 일화를 말하면서 그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강조했
다. "우리 네 형제는 모두 연년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커 가면서 집이 너무 좁았지만 당시 아버지 월급으로는
생활하기도 빠듯한 상황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어머니가 학교로 우릴 데리러 오셔서는 느닷없이 집을
지을 거라고 하셨어요. 우린 집 짓는 방법을 아시느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어머니는 배우면 된다고 말씀하셨어
요. 그리고 어머니는 정말 벽돌공, 전기공, 배관공을 직접 찾아가 집 짓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워 오셨어요. 곡
괭이와 삽을 들고 손수 연못을 파고, 벽돌을 쌓고, 전기 배설을 깔고 배관을 설치했어요. 혼자서 하시기에 벅
찬 일은 아버지가 밤늦게 퇴근하셔서 도와 주셨지요. 그 후로 우린 계속 그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전 힘든 문제
에 부딪치거나 곤경에 빠졌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입구에 서서 우리 집을 봅니다. 그 집은, 올바른 일을 하
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라면 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 증거인 셈이거
든요."
성공을 위한 금언
안네 브래드스트리트(Anne Bradstreet)
안네 브래드스트리트는 대영제국 식민지 시절 최초로 주목받은 미국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시집 "열 번째
뮤즈가 최근 미국에 나타났다(The Tenth Muse Has Lately Sprung Up in America)"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시집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과학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영국 린콜린샤이어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이주 당시 이미 결혼한지 이 년째였던 그녀는 미국에
도착한 후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고, 청교도회의 의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종교적 신념이 투철했다. 그
녀였지만 청교도회의 여성 차별에는 반대했다. 그녀는 1664년 3월 24일 아들 사이몬에게 자신의 책 "신성하고
도덕적인 망상(Meditations Divine and Moral)"을 바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언젠가 네가 이런 말을 했었지. 이 엄마를 볼 수 없을 때를 대비해 네가 간직할 수 있는 글을 하나 남겨
달라고. 이 짧은 명상록이 네게 가장 적합하고 또 내게도 별 어려움 없이 남길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
음은 명상록에서 그녀가 직접 발췌한 부분이다.
1. 세상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물체도, 취할 수 있는 행동도, 즐길 수 있는 선도, 느끼거나 들을 수 있는 악
도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접근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런 사람은 신앙심이 깊고 현명한 사람이다.
2. 돛은 크지만 짐이 실리지 않은 배는 쉽게 전복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머리에 든 지식은 방대하나 가슴속
에 고귀함을 간직하지 못한 사람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
3. 듣기 좋은 말은 달콤한 꿀과 같다. 삼키면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위장에서 체하고
만다.
4. 아이들은 성향이 제각각이다. 어떤 아이는 소금만 뿌려 두면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고기 같지만 어떤 아
이는 반드시 설탕으로 보관해야 하는 부드러운 과일 같다. 따라서 아이들의 성겨을 파악해 그에 맞게 키우는
부모야말로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5. 지혜를 모르는 권위는 칼날 없는 도끼다. 좋은 일을 하려다 오히려 상처만 내고 만다.
레나 로스(Lena 깨소)
19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무한한 기회와 자유의 땅 미국은 보다 나은 삶을 희구하는 독일 유대 젋은이들에
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다음은 1854년 레나 로스라는 중년 여인이 미국으로의 여정을 앞둔 아들 모세에게 전
해 준 조언의 일부이다.
아버지가 네 또래 청년들에게 필요한 모든 조언을 이미 하신 걸로 안다. 모쪼록 아버지 말씀을 최대한 따르
기 바란다. 그런데도 이 어미가 몇 마디 거들지 않을 수가 없구나. 우선 네가 목표했던 일을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끈기를 가지고 임해야 한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법이지만 예상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떤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결코 인내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더 마음에 새겨 둬야 할 얘기를 하겠다.
네 자신의 인격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특히 너보다 못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더 그렇다. 네 인격에 흠을
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여성이나 남성 누구를 대하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너보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너보
다 못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지만 부자들보다 훨씬 정직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올
바른 사람을 만나면 그 지위가 높지 않더라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 네가 좀 더 철이
들면 엄마 말을 이해하게 될 거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훌륭한 명성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다. 한 번 경
멸받거나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면 결코 헤어나지 못한다.
미니 싱클레어와 손자 데이브 토마스(Minnie Sinclair and her grandson Dave Thomas)
데이브 토마스는 유명한 웬디스 패스트푸드 체인점 창설자로 텔레비전 광고에 자주 출연했기 때문에 미국에
서는 이미 친숙한 얼굴이다. 그는 여러 병원 및 의학 연구소를 지원하며 활동적인 자선사업을 펼치고 있다.
1990년 그는 '만인을 위한 입양 프로젝트'라는 백악관 프로젝트의 대변인을 맡았고, 현제 데이브 입양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애틀랜타 시에서 태어났지만 친부모의 얼굴을 모른다. 갓난아기 때 미시간 주 칼라미주에
살던 토마스 부부에 의해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대공황 때문에 직장을 찾아 잦은 이사를 한 양아
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는 자서전 "데이브의 길(Dave's Way)"에서 근면 성실하셨던
할머니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적고 있다. 다음은 '할머니의 인생 철학(Gramma Minnie's Lessons for
Living)'라는 제목의 내용이다.
1. 적은 것에서 많은 것을 얻어라. 낭비해서는 안 된다. 시간을 보내는 것도 현명해야 한다. 일을 할 때는 믿
음이 가도록 해야 한다.
2. 열심히 일해라. 그러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은 사라질 것이다. 풀이 죽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 마라. 할 일
을 챙겨서 해라. 밖으로 나가서 무슨 일이든 해라.
3. 안이한 방법에 의지하기 마라. 그러면 질이 떨어진다. 품질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는 것이다. 사람들은
품질이 떨어지는 상품을 원하지 않는다.
4. 재미있게 일해라. 어떻게 시간을 쪼게 쓸지, 미리 계획을 세워라. 그리고 놀 때는 노는 것에만 집중해라.
일도 가능한 한 재미를 찾아가며 해야 한다.
5. 엄격하되 인간에 대한 관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네 가치관을 보여 주어라. 네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해야 한다.
6. 문제가 생기면 직접 부딪쳐 해결해라.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는 자세를 사람들이 알도록 해라.
7. 기도해라.
끈기를 배워라
아그네스 메이서와 딸 캐서린 그레햄(Agnes Meyer and her daughter Katharine Graham)
월스트리트의 큰손이자 미국 정계의 거물을 부모로 둔 캐서린 그레햄은 20세기 정치계 최대 유력 가문의 자
손이다. 1933년 그녀의 아버지가 워싱턴 포스트를 매입한 순간부터 그녀는 워싱턴 정계와 운명을 같이하며 수
많은 환희과 고통을 겪었다. 1963년 남편 필 그레햄이 자살한 이후, 캐서린은 혼자서 워싱턴 포스트를 이끌어
나가야 했다. 처음 얼마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그녀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고, 더 나아가 펜타곤 지까지 출간했
다. 또한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기자에게 닉슨 전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진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처음으로 조
사하도록 한 사람도 그녀였다. 오늘날 캐서린 그레햄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성으로 꼽
히고 있는데, 베스트셀러 작가, 미 정계의 귀부인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그녀는 자서전 "개인의 역사(Personal
History)"에서 어머니에 대해 회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족끼리의 캠핑과 소풍을 자주 마련했는데, 그 덕
분에 인생에 대해 한 발씩 더 다가설 수 있었고 독립심도 강해졌다고 한다. 1936년 여름 캐서린은 가족들과
함께 록키 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다음은 그 여행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들과 보모들은 낚시를 하며 놀았다. 참, 아버지는 감기에 걸리셨다. 어머니는 여행 때면 언제나 그날그
날 한 일을 간다하게 기록해 두셨는데, 다음은 그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 삶에 대한 어머니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정말 힘들다. 그렇지만 힘든 고비를 넘기고 다시 원기를 회복해 도전하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이런 교훈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육체 뿐 아니라 정신적
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새롭게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순간, 다시 말해 인생의 광활한
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지낸다. 정신적, 육체적 이유로 그들은 처음 피로감이 느껴지면 그 자리서
포기하고 만다. 그 때문에 진정한 노력에서 얻어지는 영광과 환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을 아는 사람이 되라
루비 덴드리지와 딸 도로시 (Ruby Dandridge and her daughter Dorothy)
도로시 덴드리지는 1950년대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헐리우드 영화계를 주름잡은 은막의
스타이다. 한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소유한 그녀는 미국에서 영화 배우로 성공한 최
초의 흑인 여성이다. 그녀는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카르멘 존스(Carmen Jone)"에 출연해 아카데미 주연상 후
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포기와 베스(Prgy and Bess)", "태양의 섬(Island in the Sun)" 등 많은 작품
에 출연했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성공 덕분에 그 때까지 우스꽝스런 '아줌마' 배역만 맡던 흑인 여
성 배우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배우이자 코미디언이
었던 어머니가 특별히 마련해 준 연극에 출연하면서 연기인생을 시작했다. 그 경험은 이후 연극배우로, 영화배
우로 진출하는 데 있어 발판이 되었다. 작가 도날드 보글은 "도로시 덴드리지(Dorothy Dandridge)"에서 다음
과 같이 전한다.
학교에 다니기 전에 도로시는 어머니가 시를 외고 낭송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어머니가 가
장 좋아한 시인은 폴 로렌스 던버였다. 도로시는 어머니의 일거수 일투족, 목소리 변화, 표정 연기 등 분위기
에 완전히 몰입되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지친 몸으로 돌아와 너무 피곤해서 그 날 밤은 무대에 설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때 도로시는 말했다. "엄마, 내가 대신할게." 그리고 네 살밖에 안 된 도로시는 부엌에 서서
어머니가 외던 던바의 시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어머니가 하시던 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해 보였다. 어머니
는 연기자의 본능으로 딸의 재능을 확신하고 당신 대역으로 딸을 무대에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날 저
녁, 교회에서 완벽한 연기로 관중석의 어른들로부터 압도적인 찬사를 받는 귀여운 딸 아이를 자랑스럽게 지켜
보았다. 어머니가 도로시에게 평생을 반복해서 들려 주신 말씀이 있었다. "넌 나처럼 부엌에서 허드렛일이나
해서는 안 된다. 결코 이런 일을 하게 만들지 않을 거야. 알겠니? 하녀라니 말도 안 돼. 절대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엄마가 보살펴 줄 테니 걱정 마라." 당시는 연예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연예계는 신분상승의 지름
길이기도 했다. 결국 도로시는 어머니 덕분에 성공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도나 픽커와 딸 수잔느 파렐(Donna Ficher and her daughter Suzanne Farrell)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자랄 때만 해도 로베르타 슈 픽커는 후일 자신이 뉴욕 시립 발레단의 최연소 발
레리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개구쟁이였던 그녀는 나무 타기, 가장놀이 등 갖가지 놀이를 즐
기며 광대가 되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나 몇 년간 발레 교습을 받은 뒤 열네 살에 뉴욕 시립 발레단의 안무가
였던 조지 발렌샤인에 의해 발탁됐고, 1961년부터 그가 운영하던 미국 발레단에서 주연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은퇴하지 전까지 그녀는 우아한 연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출연작으로는 "돈키호테(Don
Quijote)", "백조의 호수(Swan Lake)",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볼레로(Bolero)"와 특히 많은 찬
사를 받은 "니진스키(Nijinsky)", "신의 광대(Clown of God)"가 있다. 지금까지 발레를 가르치며 적극적인 활
동을 하고 있는 그녀는 자서전 "공중을 붙잡고(Holding On to the Air)"에서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어머니는 자립 정신을 강조하는 가정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일을 할 때나 놀 때 책임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구라도 소질이 없으면(예를 들면 나는 미술을 못했다) 곧 수업을 중단시켰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거
는 기대는 어마어마했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이진 않았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어머니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현
실적인 방법으로 추구하셨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늘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당시의 전
형적인 어머니들과는 달랐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과외 교습은 빼놓지 않고 시켰지만 수업을 지켜보면서 얼
마나 잘하고 있나 노심초사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내셨으면서도 예술을 알면
결코 외롭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사실 나도 혼자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춤을 출 때면, 설사
혼자 추는 춤이라 해도 한 번도 외롭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
신을 믿는 지혜
가난한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of Calcutta)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하신 테레사 수녀는 당신이 제2의 조국으로 삼은 인도와 세계 스물다섯 개국에서 가난
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인간의 존엄성을 시어 주기 위해 지난 오십여 년을 헌신하신 분이다. 처음에 수
녀님은 캘커타의 수녀원에서 선생님으로 일했고, 이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는데, 결국 1937년 하나님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팔 년 후 수녀원을 떠나 캘커타의 빈민굴로 들어가 그 곳에서 갈 곳 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데려다 음식과 옷과 약을 제공하며 보살펴 주었다. 1957년부터는 나병 환자와 자연재해로 인
한 난민을 돌보기 시작했다. 테레사 수녀님의 고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1년 교황청으로부터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이, 1979년에는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수녀님은 저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Life in the
Spirit)"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주위에서 외면당한 사람, 사랑받지 못한 사람, 알콜 중독자, 가난에 찌든 자, 버림
받아 고독한 사람, 소외된 사람, 최하층민, 나병 환자 이들은 우리 사회가 짊어져야 하는 짐이다. 모든 희망과
삶에 대한 신념을 잃은 사람, 웃음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사랑과 우정이라는 따뜻한 인간의
손길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 우리가 이들에게 등을 돌린다
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이고, 결국 이 생을 마감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는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 모든 것을 심판받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에게 놓여진 길은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든지 아니면 '밖'으로 내쳐지든지. 그래서 나
는 여러분 모두가 재산과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가난한고 병든 사람들에게 자선과 사랑을 베풀어 그들 안
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란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사랑과 우정을 갈
구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풍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사랑으로 지어진 따뜻한 가정을 잃은 사람들
이다. 그들은 여러분 가까이에 있을 수도 멀리 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족 속에, 이웃 속에, 조국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배고프고, 벌거벗고, 병들어 고통받게 될 것
이다.
균형잡힌 생활을 꾸려나가라
귈레켈 (Gluckel of Hameln)
17세기 독일의 유복한 유대 가문에서 태어난 귈레켈은 열네 살의 나이에 결혼해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진주 사업에 종사하며 독일 전역으로 사업망을 확대했다. 이후 그녀는
메쯔 지방 출신의 부유한 은행가와 결혼하지만 결국 남편 사업의 부도로 모든 재산을 잃고 곤공한 처지로 전
락하고 말았다. 당시 마흔여섯 살의 귈리켈은 자식들이 현명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회고
록을 썼다. 다음은 그녀가 남긴 조언의 일부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너희들을 위해 따로 도덕에 관한 책을 쓸 생각은 없다. 물론 쓰자면 쓸 수야 있겠지만
이미 현자들이 남긴 책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아마, 사후에도)을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성스러운 성경도 있잖니.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은 이것뿐이다. 부디 인내심을 키워라.
일말의 거짓과 속임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훌륭한 일은 없다.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
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신앙심이 깊은 체해서는 안 된다. 존경과 헌신은 담아 기도해라. 기도 시간에 돌아다니
거나 잡담을 해서는 안된다. 위대하신 창조주와 대화를 나누는 성스러운 시간에 다른 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커다란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하나님이 네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게 해
서야 되겠니? 또 한 가지, 아무리 바빠도 정기적으로 성경을 공부할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성경 공부가 끝난
후 네가 맡은 소임을 충실히 하거라. 가족을 부양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명령이자 남자의 의무라는 걸 잊지
마라.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아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신앙심을 길러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Mary, mother of Jesus)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는 별로 말이 없으신 분으로 전해진다. 그녀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녀에
게 바쳐진 성모 마리아 찬가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찬가는 카톨릭 자유 운동을 중심으로 많이 암송되
었지만 중남미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금지되어 있다. 다음은 누가복은 1장 46절가지의 전문(대한성서공회 개역
한글판 참조)이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
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
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우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
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테레사 매카시와 딸 메리 (Therese McCarthy and her daughter Mary)
메리 매카시는 오십여 년을 문한 비평 분야에 종사한 미국 최고의 비평가이다. 그녀는 직접 작품을 쓰기도
했는데, "더 그룹(The Group)", "아메이카의 새(Birds fo America)", "식인종과 선교사(Cannibals and
Missionaries)"등의 장편 소설, 단편, 수필, 여행집, 자서전 등을 출판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시사풍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매카시는 시애틀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친지들이 많은 미네아폴리스로 이사가 조부모
와 함께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카톨릭 소녀의 추억(Memories of a Catholic Girhood)"에서 어린 시절
에 대한 향수를 적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마리아의 자녀다."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아버지 키가 얼마나 큰지를 자랑하듯이 이렇게 어
머니 자랑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결혼 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천주교에 개종하셨다. 나는 마리아 자녀가 무엇
을 뜻하는지도 몰랐지만,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모습을 통해 아주 멋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사실, 마리아의
자녀는 예수 교우회 회원을 뜻하는 말이다). 어머니는 천주교로 개종한 사실을 자랑스러워했고 행복해 하셨다.
어머니를 보면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자 특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종교는 하나
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었다. 어릴 때 어머닌 생활 면면에서 한 가지 생각을 심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
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부모님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은 매일 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 심리 분석가는 그런 경
험은 자기 만족감을 가져다 주기 마련이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우린 지나치게 만족하거나 자만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건 오히려 경외심과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감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중
에 부모님이 우릴 너무 아껴 주셔서 우리가 버릇이 없어졌다는 얘길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린 정
말 버릇없는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인 불평불만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우린 있는 그래
도에 정말 만족했으니까.
신념을 가져라
도라 번범과 아들 조지 번스 (Dora Birnbaum and her son George Burns)
조지 번스는 타고난 연기 재능뿐 아니나 백 살이라는 장수로 널리 알려지 미국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삼십
오 년 동안 그레이스 앨런의 상대로 솔직한 남자역을 맡았던 그는 특유의 삐딱한 표정과 시가를 피는 모습으
로 유명하다. 그는 여든의 나이에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후, 새로운 전기를 맞아 인기를 얻었고, 백 살 생일이
몇 주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구십여 년에 걸친 연기 생활은 20세기 초 보드빌로 시작해,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나이트클럽, 베스트셀러 소설, 음반, 비디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게 걸쳐 빛을 발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오, 하나님(Oh, God)"에서 풍성한 바지, 운동화, 골프 모자로 분하고 하나님 역을 맡았
다. 언젠가 그는 "날 웃게 해줘서 고마워요, 번즈 씨(Thanks for Making Me Laugh, Mr. Burns)"라는 글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엔 하나님이 어떤 종류의 화장품을 사용하는지 몰라서 그 역을 맡을지 망설였습
니다. 그런데 한참 생각을 해 보니, 꼭 하나님 역을 못 할 것도 없겠더라고요. 지금 내 나이라면 어떤 역을 맡
아도 기적이라 생각했죠." 그는 아흔여덟 번째 생일이 되던 날 라스베가스에서 치러진 파티에서 이렇게 말했
다. "여기 있으니 정말 좋네요. 사실 아흔여덟이면 그 어디에 있어도 행복하다오." 그는 마지막 저서 "백 년,
백 가지 이야기(One Hundred Years, One Hundred Stories)"에서 다음과 같은 옛날 이야기를 전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아주 현실적인 분이셨다. 그 어느 것에도 당황하는 법이 없으셨다. 어떤 문제가 생
겨도 어떻게든 해결하신 분이셨다. 내가 일곱 살 때 어머니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웃에 살던 또래 유대인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린 스스로 '꼬마 4중주(the Peewee Quartet)'
라는 이름도 지었다. 그때 시내에 '시겔 앤 쿠퍼'라는 대형 백화점이 있었다. 그 백화점에서는 해마다 행사를
개최했고, 그 중 하이라이트가 뉴욕의 모든 교회 대표들이 출연하는 아마추어 장기자랑 대회였다. 그 때 우리
동네에는 장로교 교회가 있었다. 어떻게 교회가 우리 동네에 들어섰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잘 알려지
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까닭에 그 교회는 대회 참가자를 구할 수 없어서 목사님이 우리들에게 교회를 대표
해 참가해 달라고 요청하셨다. 물론 우린 응했다. 그리고 일요일 우리 네 명의 유태인 소년은 '꼬마 4중주'라는
이름으로 장로교 교회를 대표해 노래를 불렀고, 그 첫 곡은 '아일랜드인이 웃을 때(When Irish Eyes Are
Smiling)'였다. 그 뒤에는 '마더 매커리(Mother Machree)'를 불러 결국 일등을 했다. 교회는 부상으로 자주색
벨벳 제대포를 받았고 우리는 잉거솔 시계를 받았다. 당시 싯가로는 팔십오 센트 정도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흥분해서 집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어머니에게 자랑했다. 그 때 어머니는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계셨다.
"엄마, 난 더 이상 유태인 안 할 거예요!" 이 말에 어머닌 분명 충격을 받으셨을 테지만 아무런 내색도 않으셨
다. 그냥 날 바라보시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니?" "지금까지 칠 년 동안 유태
인으로 살았는데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잖아요. 그런데 단 하루 동안 장로교 신자가 되니까 시계가 생겼어
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손목을 들어 보이며 어머니에게 시계 자랑을 했다. 어머니는 역시 아무런 동요 없이
시계를 바라보고는 말씀하셨다. "우선 빨래 너는 것 좀 도와주지 않겠니? 그리고 나서 장로교 신자가 되렴."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빨래를 너는 동안 빨래에서 떨어진 물이 팔을 타고 시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고장이 났고, 난 다시 유태인이 되었다.
서로 돕는 미덕
마타 앰리타난다마이 (Mata Amritanandamyi 'The Mother')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가 남성이지만 힌두교에서는 종종 여성들이 사찰을 짓고 영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
다. 이들 여성 지도자들 가운데 흥미를 끄는 인물이 바로 마타 앰리타난다마이다. 그녀는 1953년 인도 서부 클
라라 주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데, 지난 십
년간 유럽과 북미 지역을 해마다 여행하며 진리를 전파했고, 지칠 줄 모르는 연민으로 인해 그녀는 따르는 숭
배자들에게 '어머니(the Mother)'라고 불린다. 1993년 그녀는 '시카고 세계 종교 의회'에서 힌두교의 대표로 선
출되었다. 다음은 그녀의 연설을 발췌한 것이다.
종교는 사람들이 사랑과 평화라는 확고한 진리를 갖고 영생을 추구하려는 강력한 욕망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종교간의 사랑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사랑, 평화, 협력,
비폭력을 21세기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의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된 사람
은 수천, 수만 명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