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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일본 최고의 목조건물’ 호류지 금당(위 왼쪽)과 5층탑은 백제인이 건축했다.
‘구다라나이’(百濟無いくだらない ).
구다라(くだら백제)와 나이(ない아니다)의 합성어이다.
일본인들이 백제 문화를 찬양하던 이 말의 어원은 “이것은 백제 물건이 아니다(これはの物では無い)”였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뛰어난 생산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백제에 대한 최상의 칭송이다.
실제로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고문서에는 백제(百濟)라는 한자에 구다라(くだら)라고 음가가 적혀 있다.
고구려의 경우 고려(高麗)라 쓰고 고마(こま)라고 읽는다. 신라(新羅)는 시라기(しらぎ)라고 읽었다.
일본에서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이유와 관련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그 가운데 국어학자 도수희 충남대 교수는 백마강 유역의 ‘구드레’ 나루를 구다라의 어원으로 지목한다.
이 구드레 나루에서 황포돛배가 일본을 오가는 과정에서 ‘구드레’가 ‘구다라’로 변했다는 주장이다.
일본 고대사 전문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는 “백제를 큰 나라로 찬양하면서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한 근거는 일본서기 속편에 등장하는 현재의 오사카(大阪) 지역을 ‘백제군’(百濟郡, 구다라 고우리)으로 부른 이유다.
오사카는 왕궁이 있던 도시였다.
구다라 대교(백제대교)
지금도 일본인들은 ‘시시하다’는 뜻으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말을 쓴다.
이 표현이 ‘백제가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고대 일본인들이 백제 문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다는 사실 말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 근초고왕대 405년에 왕인(王仁)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왔고,
성왕(聖王)대 552년에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가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했다'고 되어 있다.
660년 8월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고, 663년 6월 백마강의 마지막 결전 때까지의 3년간에 수천의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 대부분은 지식 계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새로운 농기구와 토목기술, 불사, 불경, 신의술인 침술, 고대 국가를 형성하는 율령체제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대부분의 백제문화가 유입되어 일본은 바야흐로 새로운 신문명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당시의 백제인들은 크게 우대되어, 백제의 직위를 그대로 인정받아 관료나 장군 등으로 임명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행정조직을 16관위에서 20관위로 확대 개편까지 하였다.
당시 일본정부의 요직인 국방대신, 문부대신 등을 모두 도래한 백제인들로 임명한데서 생겨난 말이 '아마쿠다리'(天下り) 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으로, 오늘날에도 고급 관료가 퇴직하고 관련기관의 간부 등으로 내려가는 것을
'아마쿠다리'라고 한다.
예전에는 백제 강으로 불렸던 히라노 강
그 당시 일본의 수도는 시가현(滋賀縣) 오오미(近江-지금의 교토 근처)였으며, 673년에 아스카 지방으로 천도하고,
또다시 710년에 '나라'로 이전하는데 이때부터 784년까지를 '나라(奈良)시대'라고 한다.
'나라'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줄임말로서,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이곳을 백제 유민들은 '나라'라고 불렀다.
후에 한자의 아데자를 붙여 '나라'(奈良)가 되었다. 백제 유민들은 사라진 조국 백제를 '큰 나라' 라고 하였다.
이 말이 변해서 '쿤나라→구다라'(百濟)가 되었고, 백제를 '구다라'라고 하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은 신라(新羅)는 '시라기', 고구려(高句麗)는 '고쿠리'라고 하면서도
백제(百濟)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하쿠사이'라 하지않고, '큰 나라' 즉 '구다라'라고 불렀다.
일본 제35대 고교쿠 여왕이 아끼던 하시히토 공주는 정원에 핀 붉은 꽃을 매우 좋아했다.
“이 꽃은 구다라(백제)에서 왔다”는 시녀 말에 공주는 “좋은 것은 모두 구다라에서 왔다”고 말하며
몹시 감탄했다고 한다. 백제 물건을 최고로 여겨 칭송했던 일본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대 백제 문화는 왜(倭)나라에 영향이 컸음을 반영하는 단어다. 백제 문화가 왕성하게 수입되던 고대 일본에서
백제 것이 아니면 시시하다는 인식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백제는 일본의 고대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일본 문화를 이루는 원류였다.
오사카에 있는 백제왕 신사. 지금도 의자왕의 아들 선광왕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아키히토 일왕이 지난 2001년 12월 23일도쿄의 왕궁(황거)에서 68번째 생일을 맞아 한 말이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간무(桓武, 781∼806 재위)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 501∼523 재위)의
자손이라고 역사책 속일본기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朝日新聞」 2001년 12월 23일자 보도).
일왕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입증할 만한 매우 중요한 행사가 2004년 8월 3일,
충청남도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거행되었다. 이 날 일본 왕실의 아사카노미야(朝香宮, 이하 조향궁)라는 이름(왕실 호칭)의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왕자가 백제 제25대 무령왕 왕릉(공주 송산리 제7호 고분)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다.
조향궁 왕자는 한국에 건너오기 직전에 도쿄의 황거에서 지금의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윤허를 받고 공주에 왔다.
조향궁 왕자는 일본 왕실에서 직접 가지고 온 고대 일본 왕실의 향(香)을 향로에다 피우며 제삿술과 제사용 음식물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렸다.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조향궁 왕자는 제사를 모시고 나자 공주 시내의 공주시청으로
오영희 공주시장을 시장실로 찾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조향궁 왕자는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향로와 향을
무령왕릉 제사 기념으로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직접 기증했다. 그가 오영희 공주시장에게 기증한 향은 1300년 전에
일본 왕실에서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일본 왕실 제사용의 향이다.
일본의 위선을 벗기고, 세계의 지성을 놀라게 한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이 한 발을 무릎에 얹은 반가·(半跏)의 자레에
오른손을 턱에 괸 채 깊은 상념에 빠진 모습 사유상(思惟像)으로 일본의 국보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를 최고로 완성시킨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접해 왔다.
고대 그리스 신들을 조각한 조상도 보았고, 고대 로마시대에 만든 수많은 뛰어난 기독교적인 예술품들도 보아 왔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그 어느 것에도 아직 완전히 초극되지 못하는 단순한 지상의 인간적인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광륭사의 불상에는 참으로 완성된 인간 실존의 최고의 이념이 남김없이 완전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이 지상에 있어서의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달성해낸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유명한 염세철학자 야스퍼스가 이미 격찬 미륵보살반가유상이다.
"똑같이 '사유'하는 모습을 표현했지만 한국의 반가사유상은 고요, 평안, 잔잔한 미소를 전해주는
반면 로댕의'생각하는 사람'은 무거운 고뇌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반가사유상이 고요와 평안을 전해주는 것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거리낌 없는 아름다움'이 구현돼 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뛰어난 장인은 돈이나 명예 등 인간적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법정스님은 유럽이 자랑하는 로뎅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해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는
동양 예술에 깃든 아름다움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웃는다. 입만 웃는 것이 아니다. 얼굴 전체가 웃고 있다. 웃으려고 의식한 것이 아니다.
삼매(三昧)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환희로 기쁨이 마음에 넘치면서 얼굴이 환하게 피어난 것이다.
조각한 것이 아니다. 적송 그 나무속에 들어앉아 삼매의 희열이 바깥으로 배어나면서 완성된 모습이다.
합장하고 가슴 두근거리며 바라다보아도 전혀 인위(人爲)를 감지할 수 없다. 전혀 구애됨이 없는 천연스러움이다.
순수 무구한 지락(至樂)의 형상을 저렇게 표현한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2008년에 발간한 <일본 속의 한민족사>에서-
이 불상에 어린 일화(逸話) 한 토막이다.
1960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도취된 일본의 한 여학생이 뛰어 들어 미륵을 얼싸 안았다가
그만 미륵의 가녀린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불상사에 전 일본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떠들썩한 매스컴에 놀라 자수한 이 학생은 그 정상이 참작되어 풀려났다. 국보를 훼손시킨 자신의 죄를 크게 속죄하기 위하여
그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고등고시를 통하여 변호사가 되어서 평생을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의 대변인으로 살고 있다 한다.
이때 그 불상에서 떨어진 나무 재질은 한국에서만 자생하는 춘양목이라는 것이 밝혀냈다.
국내 학계와 일부 일본 학계는 이 불상이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83호)과 너무 닮았고
재질이 소나무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만들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던 일본 아스카시대 나무불상 대다수는 녹나무로 만들어졌고, 소나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고대 일본은 백제와 오랜 교류를 통해 고대국가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
일본 전역에는 백제계 고분과 사찰·산성·주거시설과 다양한 부장 유물이 산재해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고대문화와 국보급 유적·유물이 백제 교류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고대 일본에서 꽃피운 백제 불교문화인 아스카(飛鳥) 문화, 한·일 고대사 연구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인 칠지도(七支刀),
일본의 국보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백제 제25대 무왕이 왜 왕실로 보내준 구다라관음(百濟觀音),
고대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나라 현 도다이지(東大寺)의 세계 최대 금동불상 ‘비로자나대불’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첫댓글 정말 유익한 글 입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귀한 글 입니다. 반가사유상을 격찬한 야스퍼스의 사유의 언어는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샘님의 보석같은 글 곱씹어 읽노라니 내가 똘똘
해 지는 것 같네요.해박한 역사적 식견에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