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의 칙코중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3박4일의 바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갔다. 3박4일이라고 하지만 오는데 하루 가는데 하루를 제외하면 고작 이틀을 머문 셈이다.
우리 학교의 한·일 학생 교류 행사는 지난해부터 시작되었다. 재작년에 우리 학교의 교장선생님과 학부모 대표가 일본을 방문하여 교류 협정을 맺고 작년에 처음으로 우리 아이들이 일본을 가게 되었다. 올해는 우리 학교에서 초청할 차례다. 그동안 우리 학교는 협정을 체결한 교장선생님 이래 세 번이나 교장이 바뀌었다.
올해 3월에 부임해 보니 한·일 학생 교류 행사라는 게 있었다. 교장이 누구든 간에 약속은 이행되어야 했다. 이것도 국제적인 행사임에야 더욱 신의를 저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학교에서는 일본 학생들 맞이를 위한 예산도 편성해 놓았다.
일본은 4월에 새 학년도가 시작이 되기 때문에 4월에 들어 초청의 편지를 보냈다. 초청해 주어 감사하다는 편지가 온 것은 4월 하순경이었다. 그리고 양쪽에서는 방문과 맞이를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우리는 우선 일본 아이들과 우정을 맺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홈스테이를 책임질 가정을 모집했다. 물론 두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어야 했다. 열 사람을 선발했다. 강사를 초빙하여 이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두 시간씩 일어를 가르쳤다.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사라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일본 아이들 맞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짜서 몇 번이나 검토를 하고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해나갔다.
그 무렵은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지정 문제, 일본의 후쇼샤 역사 교과서의 채택 문제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경상북도와 시마네현의 자매 관계가 파기되는 등 모든 한·일 교류 관계가 위기를 맞았다. 나중에 찍코중학교 교장선생님이 방문하여 털어놓은 말이지만, 한국에서 어떻게 맞이할까 싶어 방한이 두려웠다는 것이다. 우리측에서도 이들을 맞이해야 할까, 어찌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과 준비를 함께 했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반일의 분위기가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그들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여름방학 중에도 이들을 맞기 위한 준비들을 해나갔다. 전시회와 환영음악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매년 개최해오던 가을 축제를 이들의 방문에 맞추어 일정을 당기기로 한 것이다. 8월22일에 개학하여 25일에 이들을 맞이해야 한다. 방학중에 준비한 작품으로 전시장을 서둘러 꾸몄다.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성심을 다했다. 우리의 문화를 선양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손님맞이에는 정성을 다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림, 시화, 공작품 등으로 멋진 전시장이 꾸며졌다. 24일 오후에는 학부모, 학생 대표와 함께 개막식도 열었다.
일본 방문단이 오던 날, 그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교감, 교무 선생 그리고 운영위원장, 학부모회장께서 대절해 놓은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마성을 출발하여 김해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들을 맞아 학교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아이들 열 명과 교장, 교무 선생 그리고 통역을 대동하고 왔다. 마키다 에미코 교장 선생은 예순의 독신 여성이라고 해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교장실로 안내하여 학교를 소개했다. 깨끗하고 조용한 시골의 조그만 학교의 모습이 정답게 느껴진다고 했다.
환영식이 열렸다. 학부모들과 내빈들이 임석한 가운데 방문단과 우리가 마주보고 앉았다. 국가는 연주하지 않은 채 양국 국기에 대한 경례로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는데 그들은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양교 교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본교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어 먼 길을 오시느라 대단히 수고가 많았다, 한 시간 여의 비행으로 날아올 수 있는 거리라면 대한민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양국 간에 불편한 관계도 없지 않았음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본교 방문에 즈음하여 양교 간의 유대와 우정이 더욱 깊어지고, 나아가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취지의 환영 인사를 했다.
마키다 교장은 작년의 일본에서의 만남에 이어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것과 양교의 학생이 직접 양국을 방문하여 몸으로 피부로 서로의 풍토와 문화를 느끼고 오래 교류함으로써 우호와 친선을 도모하고 교류의 폭이 점점 넓혀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일본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등의 교류를 통해 한류 붐이 일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일본 정치가의 행동, 교과서 문제, 죽도(독도) 문제 등으로 반일 감정이 높아가고 있음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성심으로 교류하기'를 강조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7∼1755)의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정신은 지금도 정말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중기에 조선과의 실무교섭을 담당했던 일본의 외교관으로 22세 때 대마도 번의 진문역(眞文役, 한문을 다루는 관리)이 되어 1755년 88세로 작고할 때까지 오직 조선과의 외교통으로 일생을 대마도에서 보내고 결국 그 곳에 묻힌 친한파 유학자다. 마키다 교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을 의식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손님으로 온 사람의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양쪽을 서로 소개하고 아이들은 각자 자기 소개를 했다. 일본 아이들은 우리말로 소개서를 준비하여 낭독했다. 그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마키다 교장에게 인사하니 고맙다고 했다. 일본에서 준비해온 선물을 주었다. 학교에, 선생님들에게, 학생들에게 주는 선물을 따로 준비했다. 학교 선물로는 장식용 부채 하나, 선생님들에 대한 선물은 손수건 한 장씩으로 준비했다. 학생들에게 주는 선물은 작은 책갈피였는데, 전
교생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수 있는 양이었다. 그 쪽 학교 학생들이 직접 손질하여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선물 문화는 우리와 달랐다. 선물은 주고받기에 부담이 없을 만한 값싼 것으로 하되 주는 사람의 뜻과 정성이 잘 담길 수 있는 것으로 마련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면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우리네의 마음과는 달리 무척 실용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선물을 받으면 즉시 갚는 풍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분의 선물을 많이 준비해 왔던지 누가 선물을 주면 곧바로 답례하기를 잊지 않았다. 예컨대 한·일 교류를 시작했던 우리 학교의 전임 교장선생님이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학교로 와서 이들과 해후의 인사를 나누고 선물을 주었는데, 곧 바로 가방에서 꺼낸 선물로 답례를 하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경우가 밝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개인간에는 그러하면서 국가 간에는 경우가 밝지 않은 일을 왕왕 야기하는 저들의 속셈은 또한 무엇인가. 홈스테이 가정을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환영식을 끝내고 학생들은 결연
가정으로 보냈다.
문경의 어느 식당에 선생님들을 위한 만찬 자리를 마련했다. 양쪽의 선생님들 그리고 동창회장, 운영위원장이 참석했다. 불고기로 마련한 식사가 맛있다고 했다. 반찬의 가지 수가 많은 것이 놀랍다며, 일본은 필요한 것만 주문해서 먹는데 왜 이렇게 많이 주느냐고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이라 넉넉하게 대접하려 애쓴다고 말해 주었다. 술잔이 오갔다. 마키다 교장은 맥주 한 잔 정도 마실 수 있다고 했다. 동행의 야마우치 선생은 술을 좋아하는 듯했다. 소주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환담을 하다가 때로는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좌중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서먹한 기운이 조금씩 누그러져 갔다.
마키다 교장은 후쇼샤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조심스레 말했다.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 통과와 각 학교의 채택을 우려하는 편지를 받은 것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그 편지는 우리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학교와 기관에서 일본의 학교와 기관에 다 보낸 것이다. 한국민의 우려를 잘 이해하며 자기 학교가 있는 오사카에는 그 역사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학교가 한 곳도 없다고 하면서 전국적으로도 극소수의 학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학교도 그런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다고 말하며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의 입장을 한껏 존중하는 듯한 말이었다. 멀리서 달려와 피곤할 것이라며 내일 만나자고 하고, 남은 시간 편히 쉬시라며 정해 놓은 숙소로 안내하였다. 허리를 굽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했다.
방문 이틀째, 한국의 친구들 집에서 첫날밤을 머문 일본 아이들, 그리고 숙소에서 하룻밤을 세운 일본 선생님들이 모두 학교로 왔다. 오전은 이들을 위한 환영음악회와 함께 학교생활을 체험하고, 오후에는 지역에 있는 도요(陶窯)로 옮겨 도자기 제작 체험이 계획되어 있다.
일본 아이들을 환영하기 위한 작은 음악회가 진행되었다. 양국의 학생 대표가 나와 인사를 한 후 독창, 합창, 중창, 수화 노래, 댄스 등이 차례대
로 진행되었다. 일본 아이들도 모두 나와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라는 우리나라 동요를 합창하였다. 언제 그리 연습해 두었던지, 발음도 분명하게 노래불렀다. 우리 아이들이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는 모두 함께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확실히 노래와 춤에는 국경이 없는 모양이다. 사람들을 이렇게 한 덩어리로 만든다. 태권도 품세와 격파 시범이 이어질 때는 아이들의 함성이 절정에 달했다. 아이들은 함성과 함께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촬영하기에 바빴다. 마지막으로 우리 아이들이 일본 학교의 교가와 우리의 교가를 잇달아 합창으로 들려주었다.
좌중이 숙연해 졌다. 그 이튿날 아침 어느 방송국에서 이 모습을 뉴스로 내보내면서 '문경시 마성중 학생들이 자매 결연한 일본 중학교의 학생들을 맞아 그 학교의 교가를 일본어로 들려주며 이들의 방문을 따뜻하게 환영하여 문화의 벽을 넘어서고 있다'고 했다. 그랬다. 그것은 벽을 넘어 서는 일이었다. 생활 방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고 있었다. 교과서의 역사 왜곡, 독도의 영유권 다툼이 이 자리에서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른들의 부질없는 욕심일 뿐이었다. 음악회가 끝나고도 아이들은 한 동안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전시장을 함께 관람하였다. 아이들의 작품을 보며 재주가 참 좋다고 감탄하고, 학부모님들의 협찬 작품을 보며 가정과 학교간의 친밀한 유대 관계가 부럽다고 했다. 많은 시화 작품을 보며 아이들이 언제 어떻게 이런 들들을 쓰게 할 수 있느냐며 자기네 학교에서는 작문 지도를 참 어렵게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아이들은 결연된 친구들이 있는 교실로 갔다. 선생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교과 내용도 이해할 수가 없겠지만, 수업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이국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교실 생활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교감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문화 체험은 교실에서만이 아니었다. 사흘 밤을 친구들 집에 머물면서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일본 아이들이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익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 특유의 '정(情)의 문화'는 충분히 경험했을 것이다. 결연 가정의 부모님들은 이국에서 온 아이들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 함께 하는 식사를 통해 가족적인 분위기에 젖게 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여러 곳을 데리고 다니며 함께 관광과 쇼핑을 하며 이국의 정서를 느끼게 하고, 정성스런 선물도 마련해 주었다.
모두 함께 학교 급식으로 점심을 먹기도 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학생 생활을 보여 주기 위한 체험 프로그램 중에 하나였다.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일본에서도 한국의 비빔밥을 간혹 먹기도 하는데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고 했다.
오후에는 도자기 체험을 위해 지역에 있는 어느 도요(陶窯)로 갔다. 그 도요는 어느 학부모가 경영하고 있는데, 그 학부모는 우리 학교와 칙코중학교 사이의 교류를 주선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 학부모가 지도를 맡은 도자기 만들기 체험은 일본 사람들이 한국의 도자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배려하여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흙으로 그릇을 직접 만들어 보는 일을 매우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아주 귀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제작 과정과 용도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서는 쉽게 해 볼 수 없는 이런 체험들이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호기심에 빠지게 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 이튿날 일행은 문경 일원의 관광에 나섰다. 첫 코스로 철로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문경선 폐철로를 이용해 특수한 자전거를 제작하여 관광용으로 운영하는 이 철로자전거는 우리나라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뒤이어진 문경석탄박물관 견학이며 문경새재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각종 박물관, 관문, KBS촬영장 등의 모습도 이국의 문화에 대한 경이로운 체험이 되었을 것이다.
일정을 마치면 아이들은 결연 가정으로 가고 선생님들은 만찬 초대받기에 바빴다. 둘째 날 밤엔 지난 해 일본을 다녀온 분들의 초청을 받았다. 지금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분들임에도 다들 모였다. 점촌의 어느 횟집에서 만찬을 베풀었다. 재회를 반가워하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술잔을 나누다가 노래방으로 자리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노래방이란 일본의 가라오케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그들은 우리의 노래방 문화를 낯설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에서 유행한 우리나라 노래를 일본어로 노래했다. 우리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리하였을 것이다.
마지막 날 밤엔 지역의 마성면개발위원회에서 베푸는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인솔 선생님뿐만 아니라 학생들 그리고 결연 가정의 학생과 부모들을 모두 초청하였다. 이 만찬은 지역사회 차원에서 일본 방문단을 환영하는 자리이면서 내일 귀국 길에 오를 방문단을 환송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주최자인 개발위원장을 비롯하여 면장, 시의원 등 지역의 기관장들도 참석해 이들을 환영했다. 지역 사회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이국의 손님들을 영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지역 학교의 교육 활동을 성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학교의 손님을 지역사회에서 환영해 주어 고맙다는 것과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교육 활동에 매진하겠다고 인사하였다. 그리고 이 만찬이 대한민국과 일본간의 우호적인 유대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기원하며, 방문중에 불편했던 점은 너그러이 이해하셔서 좋은 추억을 안고 귀국하시기 바란다고도 말해 주었다. 마키다 교장은 이렇게 성대한 자리까지 마련될 줄은 몰랐다며 한국인들의 따뜻한 인정은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고 답례하였다. 두 나라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로 환담을 나누다가 자리를 마쳐갈 무렵, 마치 이런 자리를 예상하고 준비라도 한 듯 마키다 교장은 개발위원장을 비롯한 참석 내빈들에게 선물을 증정하였다. 고마운 일에는 반드시 보답한다는 저들의 선물 문화의 한 단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사흘 밤을 머물고 일어난 아침, 식전부터 귀국 길을 서둘러야 했다. 7시에 방문단들은 모두 모였다. 선생님과 학부모, 학생 몇 사람이 이들의 전
송을 위해 공항까지 배행하기로 했다. 떠나는 차에 오르기 전 일본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은 작별의 아쉬움에 눈시울을 적시는가 싶더니 마침내는 서로 껴안고 통곡의 울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깊은 정이 든 모양이다. 다시 만나기가 어려운 길을 떠나고 보내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아이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것 같았다.
손을 흔드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을 남겨 두고 차는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마키다 교장은 한국은 사람도 자연도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큰 걱정이 생겼다고 했다. 무슨 걱정이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일본을 방문하면 우리가 자기네들에게 했던 것처럼의 대접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자기네 학교는 우리처럼 학교와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간의 유대 관계가 원활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정으로 관계를 맺고 사는데, 일본은 개인 위주의 생활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자기 나라의 생활 방식대로 응대하면 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차가 공항에 닿을 무렵 차 안에서 일본 학생들에게 한국 친구들과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유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일에 이바지해 주기를 당부하는 인사를 했다.
공항에 내리자 아이들은 다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다시는 돌
이키지 못할 길을 떠나보내고 떠나가는 이산 가족의 작별 장면처럼 보였다. 며칠 사이에 저토록 깊은 정이 들었을까.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때의 아이들이라 어른들보다는 그 감정의 떨림이 더 클지도 모를 일이다. 저리도 순진하고 천진한 아이들의 그 아린 마음이 상상되어 지켜보는 마음 또한 아려진다. 마키다 교장, 야마우치 선생과 악수를 나누고 잘 가시라 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몇 번이나 절을 했다. 선생님은 몇 번 손을 흔들고는 탑승장안으로 들어가는데 아이들은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눈물을 닦았다. 우리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방문단을 보내고 차를 돌려 마성으로 향했다. 그들의 응접으로 얻은 피로감 때문일까, 송별의 아쉬움 때문일까. 차중의 사람들은 별 말이 없었다.
그들은 갔다. 그리고 올해의 '한·일 학생 교류 행사'가 끝났다. 우리나라로 오기까지 저쪽도 많은 준비를 했었겠지만, 우리 쪽도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힘을 합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힘이 들기도 했지만 숱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저들도 학년초부터 '국제 이해의 기초를 기른다(國際理解の基礎を育てる)'는 방침을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설정하여 '한국 마성중학교와의 교류를 통하여 외국인과 접함으로써 국제인으로서의 태도를 기른다'는 목표로 우리 학교의 방문을 추진해 왔고, 우리 학교에서도 '한·일 학생 교류 체험'을 세계 시민의 자질 함양을 위한 계기로 삼고 행사를 추진해 왔다. 이를 위하여 우리 학교에서는 그들의 방문에 맞추어 계획된 교육 활동 일정을 변경도 해야 했다. 방학을 앞당겨 마치고 예정보다 일찍 개학을 하기도 하고, 가을에 열어왔던 축제를 저들이 오는 날에 맞추어 열기도 했다. 그리고 저들이 머물 동안에는 모든 힘을 저들을 위해 쏟았다. 학교에서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홈스테이로 맞이하는 가정에서는 더 많은 정성을 기울여야 했다. 손님을 연 사흘간이나 접대하여 치송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역사회의 열렬한 호응도 그들은 여실히 보았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가졌을까. 그 속내를 알 수 없긴 하되 우리 쪽에서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정(情)의 문화'는 충분히 느끼고 갔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생활과 사고의 방식이 전혀 다른 서양인조차도 한국인의 '정'에 감탄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endrik, ?∼1692)이 쓴 '하멜표류기'에 보면 "이 세상 어느 나라의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받은 대우보다 이 우상숭배자들로부터 받은 대우가 더 인간적이었다"라고 하여 이해를 초월한 인간적인 정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하물며 한국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고 문화적인 배경에 있어서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에게는 서양인보다 한국인의 정에 대한 느낌이 더욱 쉽게 와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도 '닌조[人情]'라는 것을 중하게 여긴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은 것 같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인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와의 위치와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과 예절에 매우 민감하고 따라서 한국인처럼 자신의 본심을 상대에게 쉽게 노출하지 않으며, 항상 상대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상대로부터 '은'(恩)을 입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며 그것에 대하여 한국인처럼 진한 '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선물을 받으면 즉시 되돌려 갚는다든지, 우리의 친절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하여 다음의 접대에 대해 걱정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러한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친절과 인정을 베푼 것이 아니라 많은 부담을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키다 교장과 야마우치 선생이 공항의 탑승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허리를 굽혀 절은 했지만, 의례적인 행위로 보일 뿐 석별의 정이 그렇게 간절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부담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을 보고 돌아설 때 왠지 허전한 생각이 들었던 까닭을 다시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허전함에 겹쳐 또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본 아이들과 결연되지 않은, 학교의 대부분의 아이들의 모습이다. 환영 음악회를 함께 즐기고, 교실 수업을 두어 시간 함께 하기는 했지만 다른 모든 체험 활동은 홈스테이로 결연된 아이들끼리만 함께 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소외감이나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리하여 마음 아파하지는 않았을까. 혹 마음 아파했을 아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 마음 속 한자리가 아릿한 기운으로 차 오른다.
어쨌든 이 번 행사를 통하여 아이들은 우리 이웃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리고 일본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을 직접 보고 그들의 사고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에서 그들과의 교류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까? 그 의의가 세계 시민의 자질을 기르게 하여 국제 사회의 평화를 위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게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많은 힘과 숱한 시간을 들인 이 일이 가치로운 것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는 일이겠다. 어쩌면 그 가치가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와도 관계와 인연을 맺고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바람직한 관계가 되고 선연(善緣)이 되면 더욱 좋은 일이다. 국경을 넘은 사람들과의 관계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일에 보람을 두기로 하자. 서로 미워하지 않고, 서로 욕심내어 다투지 않는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이루는 싹이 되고 그 싹이 언젠가 꽃으로 피어 함께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참으로 보람된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잘 가거라, 일본 친구들아! 그리고 오래도록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 있기를!♣(2005.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