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坤抱會 (곤포회)
 
 
 
카페 게시글
自由 揭示板 (하고픈 말 마음대로) 스크랩 사육신의 얼이 서린 육신사
정대 추천 0 조회 188 07.08.08 02: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육신의 육신사

 

친구중 한명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서 침장류(이불,카펫등)를 생산하는 공장을 하는데

얼마전 그곳에 들렀을 때 "육신사"란 도로 이정표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절 이름이려니 했었는데 그곳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곳 이라하여 육신사란 것을 알았다.

그러던중 며칠전에 우연히 T.V를 보는데 "사육신"이란 드라마를 모 방송국에서 방영할 예정이라며

드라마를 만든 과정을 특집으로 방송하고 있었다.

배우와 촬영장소는 물론 연출은 북한에서 맡고,다른 부분은 남한에서 맡는 남북 합작품이다. 사육신이란  

말을 들은 김에 친구도 만나볼 겸 육신사를 찾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계명대학교에서 죽곡 택지지구를 지나 우회전하여 하빈면 소재지까지는 자동차로 약15분이면 충분하다.

면소재지에서 육신사까지는 약 5킬로미터이니 시내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초입의 충효문. 배롱나무(나무 백일홍)가로수가 육신사까지 길게 늘어 서있어,한여름의 운치를 더해 주고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육신사 정문 직전 오른편에 있는 충효당의 고고한 자태. 잘 가꾸어진 잔디마당과 옛 기와집이 어울린다. 

충효당(忠孝堂)은 인조 22년(1644년) 충정공 박팽년의 7대손인 금산군수 박숭고가 별당으로 건립한 것을 충효당으로

개칭하여 청년에게는 예와 음악,궁도,마술등을 실습시키고,부녀자에게는 법도를 가르쳤다고한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이었으나 1995년에 후손 박우손이 이곳으로 옮겨 돌출된 누마루를 부설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하였다.

 

육신사 정문 앞의 회화나무. 회화나무는 선비나무라 하여 옛부터 서원이나

향교에 많이 심어져왔다. 어쨌거나 나는 이만큼 큰 회화나무는 처음 보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육신사 정문. 일명 외삼문(外三門)이라 한다. 정문 좌측에는 안내소가 있고,잘 생기신 친절한 문화해설가가 계신다.  육신사는 원래 사육신의 한 사람인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만이 후손에 의해서 향사되어 오다가 현손(玄孫)인 계창공(繼昌公)이 기일(忌日)에 여섯분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어 놀라 다섯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향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육신은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이다.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낙빈서원(洛濱書院)과 함께 철폐된 뒤 1924년 낙빈서원(洛濱書院)이 재건되면서 다시 이곳으로 봉안하게 되었으며,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에 따라 구 종가터의 뒷산에 정면5칸, 측면3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시 지은 것인데 매우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삼문을 들어서면 숭절당은 정면5칸, 측면 1칸반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정면 3칸, 측면 1칸반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역시정면 3칸, 측면 1칸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사랑채 2채가 있다.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다. 광화문의 박대통령 현판을 무슨 구실로 떼어버린 이 정권이지만, 대구에 있는 저 현판은 떼어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추호도 정치적으로 어디를 염두에 두어 이런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트의 어느분이 쓰신 글을 잠시보자.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우상화를 위해 북한 전 지역의 명산대찰의 기암절벽에 새겨 넣은 글귀들을 보았을 것이다.
만약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 그런 글귀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그런 글귀들의 대부분이 개인 우상화를 위한 선동적인 문구들이므로 그 글귀들을 지우는 쪽으로 여론이 일어 날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특히 금강산의 기암절벽에 새겨진 글귀들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 글귀들을 새길 때보다 더 심한 환경훼손이 뒤따를 것인데, 어쩌면 통일 후에도 지금의 문화재청 같은 곳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심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지금 문화재청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필 광화문 현판 교체를 추진하기로 함에 따라 박 전대통령 재임기간 당시 전국적으로 문화재복원사업을 펼치면서 많은 건물을 지었고 현판의 글씨들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박 전대통령 재임당시는 대부분의 문화재나 유적지의 현판 및 기념비를 박정희체로 마감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충남 아산시의 현충사(顯忠祠•사적 제155호•이순신 장군의 사당) 편액, 경기 파주시의 화석정(花石亭•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 편액, 경기 수원시 화령전(華寧殿•사적 제115호•정조의 사당)의 운한각(雲漢閣) 편액, 경북 안동시의 영호루(映湖樓) 편액 등이라 한다.

이와 같은 유적들은 박 전 대통령 시절에 복원되거나 개축됐지만 원형이 있다는 점에서 교체 대상으로 거론될 수 있으나, 유적지 보존을 위해 새로 지은 건축물이나 기념비등에 대한 박 전대통령의 흔적을 굳이 지울 필요가 있을지에는 의문을 표하고 싶다.

문화재청 역시 다른 현판에 대한 교체계획은 없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대통령이 과거 군주시대와는 격이 다르지만, 사실 박정희 체가 그리 못난 글씨체는 아니기 때문에, 같은 논리로 치면 조선시대 왕족들이 대형건축물들에 흔적을 남긴 것과 같은 대접을 해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경기 고양시 행주산성(사적 제56호) 내 행주대첩비와 충장사(忠莊祠•권율 장군의 사당) 편액, 경기 여주군 영릉(사적 제195호) 내 세종전(세종의 유물전시관)과 훈민문(訓民門) 편액, 강원 강릉시 오죽헌(보물 제165호) 내 문성사(文成祠•율곡 이이의 사당) 편액, 안동 하회마을 내 영모각(詠慕閣•서애 유성룡의 유물전시관) 편액, 대구 달성군 순천 박씨 집성촌에 세워진 육신사(六臣祠•사육신 사당) 편액, 인천 강화도 전적지 보수화 정화 기념비 등은 김일성,김정일부자의 개인 우상숭배의 경우와 같이 박 전대통령 개인의 치적을 홍보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헌정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경우로 흘려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후세대들에게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서예에 밝은 대통령이 있었다.
그 이름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조선시대 왕족 중 명필로 이름을 날린 안평대군의 글씨체가 있었듯이 대한민국 헌정사에 대통령으로서 일필휘지를 자랑하는 박정희 체가 있었다” 는 것으로도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교육효과는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육신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광경이다. 연못과 배롱나무와 홍살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홍살문을 올라서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숭정사)의 정문인 성인문(成仁門)(일명 內三門) 과 그 분들의 업적을 새겨넣은 거대한 육각비가 서 있다.

 

육각비.육면을 둘러가며 여섯분의 공덕과 그분들의 글을 새겨 놓았다

 

박팽년(朴彭年), 의기(義氣)에 살고 충절(忠節)에 죽고
높은 의기여! 선비의 굽힘 없는 충절이여!
당시 세조를 죽이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가 실패하여 희생당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의기와 충절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에서 끝까지 의리와 충절을 지키고자 죽음을 불사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충신불사이군 (忠臣不事二君)
 
박팽년(1417 ~ 1456) 호 취금헌(醉琴軒). 태종 ~ 세조.
세종 때 집현전 학사였으며 벼슬은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사육신의 한 사람.
 
金生麗水(금생여수)라 한들 물마다 金()이 남여
玉出崑崗(옥출곤강)이라 한들 뫼마다 玉()이 날쏜야
암으리 思郞(사랑)이 重()타 한들 님님마다 좃츨야.

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곤강(옥이 나는 산)에서 옥이난다
한들 산마다 옥이 나겠는가? 아무리 사랑이 중하다고 한들 임마다 따르랴.
임금을 섬기되 분별없이 여러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비유적 표현 기교로 노래했다.
수양 대군에 의해 쫓겨난 어린 단종에 대한 애끓는 충정을 담아 노래한 작품이다.



충신불사이군 (忠臣不事二君)의 한결 같은 단종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는 의절가로 그의
가마긔 눈비 맞아와 함께 널리 흠모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세종 24(1442) 25세의 팔팔한 청년으로 집현전 학사였던 신숙주, 박팽년이 한 살 연하의 성삼문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하면서 서로의 뜻을 담은 시를 주고 받았는데, 그 중 널리 알려진 것이 위의 박팽년의 시와 성삼문(成三問)의 높은 의기를 담고 있는
다음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조들을 보면 평소 이들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의 의기가 굳게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허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낙낙장송(落落長松) 되야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졔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성삼문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박팽년은 당시 형조 참판 자리에 있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단념하였는데,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형조참판이 된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6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정(
)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
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하여 뒷날 관가(觀稼: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
하는 권농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자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뒤 박팽년의 인물됨을 너무 아껴온 세조는 사람을 시켜 비밀스레
일렀다.
"내게 돌아와 첫 모의에 참여한 것만 숨긴다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그러나 박팽년은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임금이 된 세조에게도 '상감'이라
하지 않고 그냥 '나리'라고만 불렀다. 이를 듣고 있던 세조가 소리쳤다.

"너는 나에 대해 스스로를 이미 '()'이라 일컬었는데, 이제 와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러자 박팽년이 태연스레 말했다.

"나는 상왕(문종)에게만 신()이었을 뿐이오. 충청 감사로 내려가 한 해 동안 나리에게
여러 번 장계(壯啓)를 올렸지만, 나 스스로를 신()이라 쓴 적은 없소."

정말로 그 때 올린 편지들을 가져다 확인해 보니 모두 '()'자 대신 '()'자로만 씌어 있었다. '()'자는 나리를 이르는 말이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정·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 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순()·분()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줄이 이시랴.

 
까마귀(변절하는 간신)가 한때의 눈비를 맞아 희게 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리고 야광명월의 구슬(충신)이 어둔 밤(역경)에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단종)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일편단심은 변할 줄을 모른다고 굳은 절개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마귀'와 대조적인 시어는 '야광명월' '일편단심'으로 연군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을 나타낸다. 시련 속에서도 작자가 깊이 다짐하고 있는 절의가 돋보이는 시조이다. 박팽년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에 뜻을 두고 힘을 썼지만, 같은 동지 김질의 배신으로 투옥되었다. 이에 배신자 김질이 박팽년을 살려 자기 사람으로 회유코자 하는
세조의 뜻을 받들어 김질이 직접 박팽년이 갇혀 있는 옥중으로 술을 들고 찾아가 술을 권하며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로써 은근히 박팽년의 뜻을 타진함에 화답한 작품이라 한다.
 

삼대가 멸문(滅門)의 화를 입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경술과 문장·필법에 뛰어난 존재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서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단종이 폐위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하여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간다.
 
박팽년은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 박중림 앞에서 울면서 말했다.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이렇게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
임금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것 또한 불효이니라."


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廟堂深處動哀絲       묘당심처동애사  묘당 깊은 곳에 애처로운 음악이 울리니
萬事如今摠不知       만사여금총불지  만사를 지금은 모두 모르겠네
柳綠東風吹細細       유록동풍취세세  바들은 푸르러 동풍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花明春日正遲遲       화명춘일정지지  꽃은 훤한데 봄날이 정히 더디고 더디네
先王事業抽金櫃       선왕사업추금궤  선왕의 큰 사업은 금궤에서 뽑아내고
城主鴻恩(+)玉扈성주홍은도옥호   성주의 큰 은혜로 옥잔을 기울이네
不樂何爲長不樂      불락하위장불락   즐기지 않으리 어이 길이 즐기지 않으리
答歌醉飽太平時      답가취포태평시   살컷 마시고 배부른 태평시대를 노래로 화답하네   
 
수양대군이 영의정으로 본격적인 권력의 자리에 오른 후 이를 축하하는 모임이 열리자
박팽년이 이 시를 짓고 나자 몹시 만족한 수양대군이 부중 현판에 달도록 하자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세조가 박팽년을 몹시 탐내어 조금만 숙이기만 해도 살려주고 팠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受 刑 詩
梅竹軒 成 三 問

擊 鼓 催 人 命 (격고최인명) 북을 둥둥 쳐서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는데
回 欲 斜 頭 日 (회두일욕사) 고개 돌려 바라보니 서산엔 해가 지려 하네!
黃 泉 無 一 店 (황천무일점) 황천길엔 쉬어 갈 주점도 하나 없다는데
今 夜 宿 誰 家 (금야숙수가) 오늘 밤은 누구집에서 쉬었다 갈꺼나!

* 위 詩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 단종복위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형장으로 향하면서 읊은 시로 의로운 죽음을 앞둔 선비의 기상과 여유가 만고의 충신임을 일러 무삼하리!
 
 
하위지(고려 우왕 13년 1387 - 세조 2년 1456)
 
사인증사의(謝人贈蓑衣)

남아득실고유금 男兒得失古猶今
두상분명백일임 頭上分明白日臨
지증사의응유의 持贈蓑衣鷹有意
강호연우호상심 江湖烟雨好相尋


(譯)
도통이를 보낸 준 것에 감사함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를게 없고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도통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모르겠는가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는 그 참뜻을

 

그의 범상치 않은 생애는 탄생할 때부터 특이 하였으니 그의 집 앞 시냇물이 출생하는 날부터 사흘 동안 붉게 물들었으므로 이 개천과 그의 호를 "단계(丹溪)"라 부르게 되었다.지금 경북 구미시 선산읍 서쪽 단계천에 단계교가 놓여 있고 거기에 오리쯤 서쪽에 단계선생의 묘소(선산읍 죽장리 고방산)가 있으며, 비봉산 아래 선생의 유허비각이 있다.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선생의 교훈은 민족 역사상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팽년과 그 가족이 죽거나 노비로 끌려갔는데,둘째아들 박순의 아내도 관비가되어 친정 동네로 임신이 된채로 내려왔다가 아들을 낳았는데, 죽임을 당할까봐 다른 여종의 아이와 바꿔 키웠는데 그가 사육신중에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일산이다. 종이라는 뜻으로 비(婢)로 이름이 지어진 그는 외할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라 17세 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렀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자수를 권했다.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이름을 일산(一珊)으로 바꾸고 아버지의 고향 충청도 회덕에서 이곳으로 정착하니 이른바 순천 박씨의 대구 묘골 입향조가 되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고정'인데, 이 건물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 건물이었지만,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하는데,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 들이 있다. 보물 제 554호로 지정되어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서쪽에는 온돌방과 부엌을 마련해 놓았는데 단순한 아궁이가 아닌 부엌을 한쪽 구석에 둔 것은 흔치않은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팽년의 비석에서 바라본 묘골 전경.

묘골의 행정지명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다. 구한말까지는 300여호의 집이 꽉 들어차 있었으며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호만 남아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숭정사는 사육신의 위패와 아울러 박팽년의 부친인 이조판서 중임선생을 모시고 있는데 7위의 위패를 봉안하는 까닭에 사호를 육신사로 하지 못하고 숭정사로 하게 되었다고 하며, 바깥에 알려지기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기에 '육신사'로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박팽년의 碑. 아무래도 이곳이 순천박씨가 조성한 곳이라 박팽년의 비는 따로 조성이 되어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팽년의 碑를 따라나와 담장을 돌아 나가면 시멘트 포장이 된 작은길이 나온다. 이길을 따라 약100미터 오르면 육각정이 있다. 사육신의 충절과 절개를 나타내 듯 오르는 길엔 대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있는 숲을 만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육신사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곳에 세워진 육각정. 양쪽으로 등산로가 있어 오고가는  등산객들의 쉼터는 물론 이곳에서 왜관 방향 낙동강과 묘골을 관망할 수 있다.

 

도곡재(陶谷齎)도 보수공사중이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일 하시는 분들의 식사가 진행 중이었다.도곡재는 1778년(정조 2년)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제택(第宅)으로 건립한 건물이나 1800년대에 와서는 도곡(陶谷)박종우(朴宗祐)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라 도곡재라 이름하였다.도곡재는 원래 정면4칸측면 1칸의 건물로,태백산 지역 第宅의 일반적인 사랑채 형태인데 후대에 와서 툇간을 달아내고 대청을 넓혀누처럼 꾸몄다.팔작집으로 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 


숭절당(崇節堂)은 숭정사 앞에있는 제사에 소요되는 건물로서 안채 하나와 사랑채 둘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다.

삼충각(三忠閣). 비문에는 순천 박씨 3世 記實의 碑로 기록되어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 육신사는 절개있는 선조들의 숭고한 얼과 정신이 깃든 곳이다.

이곳의 어느 현판에 이런글이 쓰여있다.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弟忠信)'이라 적힌 현판이다..  조선조 남인의 영수이자 대유학자이면서도 도인의 면모를 함께  지녔던 미수 허목(許穆) 선생의 글씨인데... 미수 허목 선생은 전서체의 대가로서 선생의 전서체 글씨는 미수체라 불렸을 정도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弟忠信)' 이라...  예와 절의를 지키고 사람 간에 염치가 있어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야하며 군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믿음이 있어야한다... 

 

나는 여기에다 채근담 전집 1장을 더하고 싶다. 

         

[채근담(菜根譚)-전집]
[1장/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을 취하지 말라]


棲守道德者 寂幕一時 依阿權勢者 凄凉萬古.
서수도덕자 적막일시 의아권세자 처량만고.

達人 觀物外之物 思身後之身 寧受一時之寂寞 毋取萬古之凄凉.
달인 관물외지물 사신후지신 영수일시지적막 무취만고지처량.

도덕을 지키는 자는 한때는 적막해도
권세에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하리라.

달인은 눈앞의 이욕을 보고도 불멸의 진리와
사후死後의 명예를 헤아리나니,
차라리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을 취하지 말지니라.



[해설]

진리를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고독한 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고독일 뿐이다.
권력에 아부하면 몸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영원한 고독 속에서 살아야 한다.
참된 인생에 대하여 스스로 깨달음이 있는 자는
현실의 영달에 미혹당하지 않고
보다 높고 큰 이상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가치있는 인생을 살아가려면
고립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권력에 편승해서 사는 자는 세상이 바뀌면
그 이름조차 금방 잊혀지고 만다.
그에 반하여 불우한 평생을 보냈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선각자들이 무수히 많다.
갖가지 모함과 중상을 받던 사람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그분에게서 배운 바가 실로 많았다'라며
감사를 느끼게 되는 수가 많다.
이는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