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스왓 밸리안에서 탈수 증세가 날 정도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습한 더위....
20일차 (8월 5일 금요일) 마르단 주변 둘러보기
07: 10 기상
08: 00 숙소 출발
숙소에서 나와 3거리의 왼쪽편에 아침 식사를 파는 곳이 있어서 거기서 짜파티와 짜이로 아침을 때웠다. 식사를 마친 후 그제 에세를 팔던 슈퍼에 가서 에세있는거 전부 달라고 하니 8갑이 있다고 해서 몽땅 샀다. 파키스탄 담배는 맛없다. 그나마 나은 골든 스트라이크던가? 하는 것은 42루피라 비싸서 피우기가 망설여진다. 거기에 비하면 에세 라이트(파키스탄에서는 PINE)는 22루피라 저렴하고 좋은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대우 버스 터미널도 있는 곳만 있다. 보이는대로 사야한다.
3거리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와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버스 터미널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서 마르단 가고싶다고 하니까 차장들이 손짓으로 버스를 가리킨다. 마침 출발하는 후졌지만 큰 버스를 탔다. 바르단까지 버스비는 50루피/1인이었다. 특별히 지정 좌석은 없었지만 뒤쪽에 자리가 있어서 그리로 갔다. 앞에 있는 고등학교 1학년 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 자꾸만 말을 붙이는데 입맛도 없고 몸도 아파서 대충 답변만하였다.
09 : 40 티마르가하와 마르단이 갈라지는 3거리 통과
바리 콧을 지나 조금 더 가면 포장도로가 끝나고 도로 공사중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비포장도로이다. 그러나 그다지 요철이 심한 것은 아니다. 길가의 푸른 논에는 이제 모가 성큼 성큼 자라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스왓 강이 제법 강폭을 벌리며 깊지 않은 물살을 이리저리 휘감게 한다. 얕게 드러난 모래 톱, 그 위에 이름모를 풀과 꽃들이 자기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왼쪽에는 들판을 따라 가깝게 혹은 멀리 능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하나의 언덕이라고 말는 것이 좋은 작은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어개를 벌리며 아옹다옹거리고 있었다.
그제 티마르가하에서 밍고라를 갈 때 잠시 쉬었던 3거리를 통과한다. 이곳은 말하자면 스왓 밸리와 치트랄 방면이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이고 간다라의 중요한 유적지들이 분포해 있는 곳인데 우리는 시간도 그렇고 어제 너무 힘들게 헤매고 다녀서 그냥 통과하기로 하였다.
09 : 55 박케라 시내 정차
도시가 상당히 커보인다. 버스 터미널 옆에는 대우 버스 터미널도 보인다.
10 : 10 출발
덥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땀이 줄줄난다.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도 그치질 않는다. 생수만 벌컥벌컥 마신다. 여기서는 아무리 얼음 생수를 사도 10분만 지나면 미지근해진다. 그러니 꾹 참다가 생수를 산 순간 그 시원함을 맘껏 즐길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이 먹는다. 버스타고 갈 때 그렇게 물을 많이 마시면 오줌마려워서 어떡하나라고 걱정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전혀 문제없다. 전부 땀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하루에 1번 오줌누기도 힘들 정도다.
여기서부터는 포장도로지만 고개를 넘느라고 속도를 내지 못한다. 고개 정상 다와서 1차선을 교행하느라 잠시 정차하였다. 앞좌석의 여자아이가 차멀미를 하는 듯 연신 앞 유리창을 열고 침과 조금씩의 구토물을 뱉는 바람에 창문을 닫고 있으려니 더욱 더워 죽겠다.
10: 33 마르칸다 패스 정상 도착
여기는 스왓 밸리에서 첫 번째 큰 고개다. 지금까지에 비하면 그다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산 중턱을 휘감아 구불구불 길이 나 있어서 도로가 상당히 길었다. 고개 정상을 막 넘으니 산사태로 흙이 무너져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많은 차들이 양 방향에서 대기하다가 경찰들의 수신호에 따라 교행을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다. 박케라에서 올때는 고개가 그리 높은 곳이 아니었는데 정상을 넘어서니 반대편은 상당히 아래쪽에 있다.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내려가나 보다. 어럽게 조금식 나아가다가 흙 무너진 곳을 겨우 통과하나 싶었는데 반대 차선에서 웬 봉고가 추월을 하려다 쌈이 났는지 우리 차선을 가로 막고 운전기사가 나와서 악을 쓰고 난리다. 경찰이 와서 달래도 막무가내다. 버스 승객들은 뛰어가서 그걸 보면서 웃고 떠든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고 인내심이 달달 볶이는 듯 하다. 그렇치 않아도 교행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는데 (300m 통과하는데 30분 걸림) 앞뒤로 양 차선에서 차들이 꽉 막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이 자기들 눈에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구경하고 낄낄꺼리는게 이 나라 민족성까지 생각하게 한다.
11: 25 Markanda 도착
고개를 다 내려오면 그곳이 마르칸다이다. 여기서는 별로 쉬지 않고 손님만 오르내리고 바로 출발
11: 45 Dargai 통과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가랑비가 내린다.
12: 05 탁트히 바흐 잠시 정차 후 바로 출발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탁트 히 바흐 사원이 있는 곳이다.
12: 30 마르단 도착
원래는 3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지만 마르칸다 패스에서 시간이 그만큼 지체되었다. 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여기도 티마르가하처럼 별로 정이 가지 않는 분위기이다. 게다가 버스 정류장이 상당히 복잡하다. 터미널이 4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각각 가는 방향이 다른 모양이다. 영어는 한마디도 없고 모두 우루두 어라 뭐가 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일단은 숙소를 잡아야겠기에 럭샤를 불렀더니 영어를 전혀 못한다. 두 번째 럭샤를 잡았더니 아는 듯이 이야기해서 진짜 아느냐고 물으니까 그제서야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론니의지도를 보여주면서 zaman hotel을 가리키니 신문팔이 소년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럭샤꾼에게 설명해준다. 얼마냐니까 30루피를 부른다. (론니에는 시내는 5루피라고 해서 10루피에 가자고 하니까 않된단다. 아마도 합승이 아닌 경우는 그런 모양이다. 할 수 없이 20루피에 흥정을 해서 타고 갔다. 터미널에서 걸어가기에는 상당히 먼거리다. 3km 정도 떨어진 것 같았다. 중간에 마르단 박물관을 왼쪽으로 지나 시장 같은 곳으로 갔다. 자만 호텔이라고 내리니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휴업 분위기다. 럭샤꾼이 5루피 더 달라는 걸 대꾸도 않하고 20루피만 주었다. 근데 1, 2층이 모두 자만 호텔이라고 한다. 1층을 들어가보니 식당 안에 숙소가 있는데 너무 어둡고 칙칙하다. 그래서 2층으로 갔더니 웬 노인이 지키고 있다가 우릴 맞이한다. 에어컨 룸은 없고 팬 룸만 있는데 그나마 프론트 옆 방이 천장의 팬과 물을 넣어 돌리는 공기 팬이 있었다. 문제는 카운터의 노인이 전혀 영어가 않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할 줄 아는 사람 데려오라고 하였더니 알았다는 표정이다. 누군가를 찾아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시간이 10분이 지나도 오질 않아 우리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니까 잠간만 기다리리라고 한다. 20분쯤 흘러 30대 정도의 젊은이가 나타나 프론트 옆의 4호실은 450루피라고 한다. 론니에는 300루피인데 왜 비싸냐고 하니까 그건 다른 방이라면서 보여주는데 더 좁다. 아마도 공기 팬이 있어서 이 방이 제일 좋은 듯 비싸게 부른 모양이다. 할 수 없이 400루피에 합의를 보았다. 짐을 풀고 ttidnj를 하려는데 여기도 천연 핫 샤워다. 하고나니 땀이 더 흐른다. 점심을 먹어야겠기에 식당 사용이 가능하냐고 물으니 가능하단다. 부엌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 라면 이야기
나는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학창시절에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질렸다.
그렇지만 외국에 나오면 그나마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게 라면이라서 2, 3개 정도는 가지고 나온다. 국내에서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라면을 선택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삼양라면을 먹는다.) 해외에 나오니 신라면이 제일 낫다. 다음번부터는 신라면만 챙겨와야겠다.
라면의 기원은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먹는 인스탄트 라면은 그 기원이 일본이다. 일본의 라면기술을 60년대 중반에 삼양라면에서 들여와 우리나라에서도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우리나라 라면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 권에서는 신라면이 부동의 1위를 하고 있고 러시아에서는 야쿠르트의 팔도 도시락 라면이 제패하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는 일본의 견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균방식을 놓고 방사선 처리니 뭐니해서 스위스, 영국에서 우리나라 라면을 판매 금지시켜 일본 놈들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고 한다. 대개 다른 나라를 가면 그 나라에도 라면 비슷한 즉석 국수가 있다. (태국이나 캄보디아에는 라면보다는 쌀국수가 더 유명하다. 닭고기 삶은 물에 가는 국수를 넣어주는데 캄보디아에서는 “꾸이 띠우”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라면이 아닌 건 분명하다. )
중국에서야 대만에서 나온 강사부 와 홍소 우육면을 많이 먹는데 일본의 라면은 그 맛이 오묘해서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비릿한 맛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배낭족들은 중국에서는 강사부나 홍소 우육면을 대용으로 먹지만 일본의 즉석 라면은 거의 먹지 않는다. 물론 일본에서는 우동이나 소바같은 대용식이 입맛에 맞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파키스탄에도 “매기”라는 라면이 있는데 우유빛 국물이다. 맛은 글쎄? 뭐라 해야할지.... 중국과 일본 라면의 중간 정도 맛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라면 스프만 들고 비행기를 탄다. 그 나라 라면 면발에 물을 부어 우리나라 라면 스프를 넣어 먹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그 쫄깃한 면발 맛은 결코 따라 올 수 없어서 늘 50% 아쉽다.
라면이라면 일본에서는 라멘, 중국에서는 라미엔이고 중앙 아시아쪽에서는 라그만, 혹은 라흐만이라고 해서 음식 자체는 있다. 일본은 주로 규슈나 간사이쪽이 맛있게 한다. 돼지뼈 국물에 즉석 면발을 삶아 주는데 맛있다. 중국의 란저우 라미엔 역시 맛있다. 소고기 삶은 물에 면을 넣어주는 방식이다. 담백하다. 위구르 족들의 신장 라미엔은 즉석 면발에 김치찌개와 짬뽕 건대기를 섞은 듯한 건대기를 얹어주는데 얼큰하면서도 맛있다. 훈자의 라흐멘도 맛있었다. 음식에 참고가 되기를....
14: 00 Shahbaz Garhi를 가기 위해 일단 출발
나와서 럭샤를 잡고 지도를 보여주며 물어봐도 지네 옆동네도 모른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 중에 영어되는 사람이 설명해 줘도 모른다. 그것도 3대씩이나... 영어하는 사람이 그냥 택시타는게 나을 것 같다고 충고해준다. 다시 한 사람이 다가와서 한참을 우루두 어와 영어를 섞어 떠드는데 가만히 눈치를 보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데 별 도움이 않되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열심히 듣고 있던 내가 짜증이 난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다시 옆의 젊은 친구가 내 심정을 이해했는지 그러지 말고 바로 앞 은행이 시원하니 일단 열을 식히고 보란다. 그게 낫겠다 싶어서 은행에 들어가니 경비원이 의외로 친절하다. 물도 주고 에어컨 옆에 자리도 만들어주었다. 굳이 핑계를 대서 샤바즈 가리 갈려는데 어떻게 가면 좋겠느냐? 럭샤가 거기까지 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이러면 내가 또 곤란해진다. 못알아먹으니...) 사람이 오더니 내 어설픈 단어를 연결해서 제대로 이해한다. 그 사람이 럭샤를 타고 거기까지 가는건 무리다. 상당히 멀다. 그러니 그 동네까지 일단은 버스를 타고가서 거기서 방법을 찾아보라고 한다. 거기가지 가는 버스는 어디서 타느냐고 하니까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키면서 그쪽으로 럭샤를 타고가면 버스 스탠드가 있다고한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와 버스 스탠드를 갈려고 럭샤를 잡으니 이 친구도 우루두 어만 할 줄아는 모양이다. 은행안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영어 잘하는 사람, 경비원, 은행에 볼일보러 갔던 손님들이 우루루 나와서 그 럭샤꾼에게 우리가 가야할 곳을 설명해준다. 럭샤꾼이 얼굴이 밝아지면서 타라고 한다. 아마도 버스 터미널은 아니고 시 외곽에 그곳을 가는 봉고나 스즈키가 서는 곳이 있는 모양이다. 가격은 30루피라고 영어 잘하는 사람이 친절하게 일러준다. 내가 럭샤꾼에게 손바닥에 30을 써서 보여주니 끄떡인다. 다시 한번 친절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출발하였다.
14: 18 숙소 앞 출발
내가 탄 럭샤꾼은 20대 초반 같았다. 파키스탄에서 이 나이에 럭샤를 모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걸까? 사회적으로 잘나가는건지? 못나가는 건지 구분이 않된다. 암튼 이 친구 인정사정없이 몰아댄다. 손에 쥐가 나도록 옆의 쇠파이프를 잡았다.
14: 30 시 외곽의 Swabi 가는 봉고 정류장 도착
14: 35 사람이 차자 출발
이 봉고는 스와비까지 가는 것인데 우리는 샤바즈 가리간다고 하였더니 차장이 웃으면서 아! 아쇼카 부다? 그런다. 아마도 우리가 왜 가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하였더니 걱정말란다. 차비는 8루피/1인였다.
14 : 50 도착
넓은 들판을 달리다 담배 공장 앞 강다리를 건너 조금가면 좌우에 언덕 비슷한 산이 나오면 내린다.(아쇼카 부다! 그러면 내려준다.) 내려서 오른쪽 언덕에 양철지붕 씌워놓은 것이 보일 것이다. 거길 목표로 가면 된다. 평지를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된다.
가보니 입장료는 없고 동네 사람들이 원두막 같은 곳에 앉아서 놀고있다가 인사를 한다. 한국인이라니까 일본인이 아닌 걸 의아해하는 눈치다. 아쇼카 부다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부처상이 있는게 아니라 비스듬히 누워있는 큰 바위에 불교를 사방에 전파하기 위해서 아쇼카 왕이 좋은 말을 산스크리트 어로 써 놓은 것이다. 원래는 전국의 중요한 곳에(마치 대원군이 척화비를 전국에 세우듯이) 세웠겠지만 현재는 이곳과 카불 부근에 하나가 더 있다고 한다. 아쇼카왕은 여러차례의 전쟁을 통해 국력을 키우고 영토를 넓혔지만 전쟁에서의 수많은 죽음에 많은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무력이 아니라 불교로서 적들을 굴복시킬려고 하였던 것이다. 글의 내용이야 내가 잘 모르지만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아쇼카 왕의 명문(銘文)을 직접 눈으로 보니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구경한 후 내려오니 관리인이 방명록에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당당히 한국어로 기록하고 물 한잔 얻어먹었다.
15 : 15 아쇼카 부다 출발
큰 길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조금가면 3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루스탐 로드를 따라가야 chanaka dehier와 Mekha sanda를 볼 수 있다.
날이 더워서 시원한 음료수라도 하나씩 먹자고 음료수 가게를 찾는데 잘 안보였다. 서있는 사람에게 음료수 가게를 물어보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능숙한 한국어로 한국에서 왔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였더니 반갑다면서 자기 가게로 가자고 한다. 그는 3거리에서 약방을 운영하는데 마침 동영인 두사람이 다가오기에 처음에는 일본인인줄 알았는데 한국어를 사용해서 너무 반가웠단다. 그의 이름은 khan bad shah였다. 그의 한국어는 밍고라의 토라일보다도 더 무척 유창하였다. 우리가 음료수를 찾는다니까 아이를 시켜서 시원한 미린다와 콜라를 가져오라고 한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차나카 데흐리와 메카 산다를 가야한다고 하니까 그렇게 먼 곳에 있는건 아니라면서 차나카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메카 산다는 산 중턱이니까 올라가지 말라고 한다. 1시간쯤 걸리는데 길가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그런 후에 나가서 럭샤를 잡아주는데 럭샤꾼이 우리가 외국인이라고 한사코 바가지를 씌울려고 한다. 샤가 깍아보았지만 80루피 이하로는 않된다고 하는데 바가지씌운다고 한다. 부근에 럭샤가 이거 1대 밖에 없고 또 대기시간도 고려해야 해서 할 수 없이 탄다고 하였다. 갔다와서 보자고 한 후 출발하였다.
15: 50 3거리 출발
10분 정도 루스탐 방향으로 가다가 럭샤꾼이 마을 사람에게 차나카를 물어보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보이질 않는다. 나는 최소한 스투파 정도는 보이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을 청년 하나가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 친구를 따라 도로의 왼쪽으로 들어갔다. 옥수수 밭과 답배 밭을 지나 밭 두렁을따라 7분쯤 가니 나무 몇 그루가 만든 그늘송세서 여유롭게 놀고있는 소 몇 마리의 아지트가 나온다. 거길 지나 주변 평지보다 약간 올라온 듯한 곳에 이르러 여기라고 한다. 그저 텅 빈 들판에 옛 건물들의 잔해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과거에는 제법 그 규모가 컷나보다. 청년이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키는게 예전에는 가리키는 곳까지 이 건물터 였다는 뜻일게다. 한쪽의 마당도 제법 넓었고 연못의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남아 있는게 너무 적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서 돌아왔다. 도로의 럭샤에 오르니 그 청년도 따라 온다. 내가 그냥 우리끼리 간다고 해도 뭐라고 하면서 탄다. 아마도 자기도 옆 동네 가려고 타나보다라고 생각했다. 오던 길을 되돌아 조금 내려오니 차나카 건너편의 돌산 하나가 메카 산다인 모양이다. 럭샤가 멈추고 내리니 그 동네 노인이 메카 산다가 저 산이라면서 손으로 부다상을 가리키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는 모르겠다. 이 돌산 앞은 우기에는 연못비슷한 습지가 되는데 지금은 물이 말라있다고 한다. 서서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뭐가 뭔지 잘 몰라서 그냥 가자고 하였다. 그렇다고 직접 올라가기는 싫었다. 어제 너무 고생했고 오늘도 땀을 충분히 흘렸기 때문에 더 무리하다가는 정말 드러누울 것 같았다. 출발하자고 하니 그 동네 청년이 그제서야 가이드 비를 달라고 한다. 우리가 도와줘서 고맙지만 돈이 없다면서 그냥 출발하였다. 암튼 파키스탄에서는 누군가 유적지 부근에서 도와 줄때는 반드시 가이드는 필요없다고 선을 긋는게 중요하다. 이렇듯 가끔씩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역사학도가 아니면 갈 필요가 없다. 나는? 역사학도라서 갔다. 뭔가 의무감 비슷한 느낌도 있었다. 누구도 않간다면 나라도 가야지 정보를 알 수 있지 않겠나하는 생각에서다. 둘은 사실상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그러나 힘들게 찾아간 것 치고는 너무 남아 있는게 없어서 실망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호텔에서 빈둥거리는거 보다는 유의미했다.
3거리로 다시 돌아오니 럭샤꾼이 뻔뻔하게도 20루피를 더 달라고 한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잠시 노려보다가 80루피만 주고 약방으로 갔다.
※ 럭샤 탈 때 주의사항
여기서도 한가지 분명히 이야기 해야 할 것은 럭샤를 탈 때는 반드시 목적지와 요금을 분명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 내릴 때 최대한 잔돈으로 정확히 요금을 주는게 맘 편하다. 예컨대 방금 같은 경우에도 100루피짜리를 주었으면 그냥 떼먹고 갈 상황이다. 어이없이 당한게 우리도 2, 3차례된다. 그러니 가능한 한 잔돈은 슈퍼나 식당에서 미리 바꾸어서 럭샤를 탈 때 사용하는게 좋다. 그리고 우루두어만 사용하는 럭샤꾼의 경우는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주변의,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영어가 통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목적지와 요금을 흥정하여 분명히 하는게 좋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런 사람의 경우 “how much?"도 모른다. 이러때는 돈 세는 모션을 취하고 손바닥과 볼펜을 주면 가격을 적어 주는 경우도 많다. 근데 돈을 의미하는 표현이 우리는 손가락 두개로 원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엄지와 중간 손가락으로 종이 돈 세는 모션을 취해야 얼마냐는 의미로 알아듣는다.
17: 00 약방에서 샤와 대화를 나누다
약방으로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우리가 음료수를 샀다. 샤 역시 한국에서 5년간 일했다고 한다. 주로 의정부와 남양주에서 가구 공장과 문방구 용품 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는 비교적 남들보다 빠른 93년도에 가서 우리나라가 IMF가 터져 공장이 어려워지니까 할 수 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에서 살기는 어땠냐고 하니까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마디로 좋은 사장을 만난 것이다. 가족처럼 챙겨주고 같이 동해안으로 놀러도 가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사장가족과 전화 연락이 된다고 하면서 사장이 보내준 한국가요 테이프를 20개 정도 보여준다. 지금 생활은 어떠냐고 하니까 귀국하여 결혼도 하고 사는 기반도 마련했다고 만족해 한다. 내가 이 약방으로 살기에 괜챤은거냐고 하니까 웃으면서 약방은 심심해서 하는거고 자기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봉고차를 3대 사서 임대를 주었다고 한다. 그 차를 기사와 차장이 운영하는데 날마다 1대에 500루피씩 내고 간단다. 우와! 그러면 부자네요? 그러니까 만족한 표정으로 끄덕 거린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술 마시기가 상당히 힘들지만 구할 수는 있다고 한다. 얼마정도냐니까 위스키 1병에 3,000루피라고 한다. 이건 완전히 우리나라에서는 히로뽕 수준이다 하면서 같이 웃었다.
어제 밍고라에서도 그렇고 오늘 만난 샤도 그렇고 다행히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온갖 비겁하고 못난 뉴스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한이 맺혀 고향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의 대외 이미지가 어떻게 될까? 물론 외국 노동자들의 잘못으로 인한 부분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예컨대 느린 동작과 비 숙련으로 인한 불량률이라든가, 말없이 다른 공장으로 옮겨간다든가 등등... 그러나 이건 이거대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왜 임금을 체불하고 떼어먹고 동물처럼 학대하는가? 정말 나라의 망신이다. 요즈음 실업문제 떠들지만 솔직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하니까 그들이 대신 그 자리를 메워주는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들의 노동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고 웨스턴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개 조아리는 사대주의적, 기회주의적 사고방식은 정말 사라져야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를 할 때 나처럼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음료수 한잔 권해주는 인정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들의 입을 통해 우리나라가 자랑으로 여겨질 때 비로소 객관적인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는거라 생각한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아시아의 다양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네보자.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들에게 한 수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18: 10 출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금방 1시간이 흘렀다. 가야겠다고 인사한 후 나와 봉고를 잡아타고 마르단 버스 터미널로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려 과일 노점에서 조금 큼 복숭아를 3개 달라고 하였더니 40루피란다. (속으로) 이런 날 강도 같은 놈들하면서 비싸서 못 사겠다고 놔두고 조금 더 걸어 내려와 그보다는 약간 작은 황도 복숭아를 1KG에 7개를 20루피 주고 샀다.
정말 걷고 싶었다. 왜? 다시 우루두와 한국어의 전쟁을 럭샤를 사이에 두고 벌리기 싫어서다. 허지만 너무 멀어! 럭샤를 불렀다. 럭샤꾼이 잘 알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타라는 시늉을 한다. 이제 그런 것에 당할 내가 아니다. 누구 영어할 줄 아는 사람 없느냐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일단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면 주변에 10여명은 순식간에 모인다. 그들에게 우리는 참으로 재미있는 소재인 모양이다. 그 안에는 영어할 줄 아는 사람이 분명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람이 나서더니 흥정해준다. 길 가르쳐주지, 통역해주지, 나중에는 잘 가라고 악수하지 참 그런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한마디로 파키스탄은 인도정도는 아니지만 그야말로 멀티 칼라의 군상들이다. 예상대로 30루피(스왓 밸리 - 페샤와르는 전체적으로 외국인들에게는 무조건 2배 이상의 가격을 부른다.)를 부른다. 귀챦아서 20루피에 가자고 하였다. 출발해서 바자르 입구까지는 잘 갔다. PNB도 보이고 United Bank도 보이고.... 근데 어느 순간 모르겠다. 첨보는 곳이 나온다. 잠깐 세워서 물어보니 지나친 것이다. 다시 되돌아오는데 여기도 아닌듯하다. 할 수 없이 내려 20루피 주고 (어떤 인간은 자기가 길 몰라서 헤매놓고도 천연덕 스럽게 추가 요금을 요구한다. 단호히 거부하시길...) 조금 걸으니 Habib bank와 Alfalah bank보인다. 그러면 맞는 것이다. 아마도 바자르이면서 은행들이 몰려있는 곳이 자만 호텔 부근인 모양이다.
들어오니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하는데 대강 뜻은 알아듣겠는데 같은 수준으로는 대화하기 힘들어 대충 답변하고 방에 들어왔다. 짐을 놔두고 호텔 건너편의 골목에 있는 PCO로 가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1unit에 3.5루피란다. 음.... 비싸군 근데 주변에 다른 전화방이 잘 않보인다. 일단 서울 아버지와 막내 동생과 통화하여 12일에 귀국한다고하였다. 아버지는 알 카에다 조심하란다. 안해가 없는 집에 전화해서 장모께 고생하신다고 안부 전화를 하였다. 총 통화시간이 6분 정도인데 240루피 나온다. 으음.....
들어오니 천정의 팬 날개가 천저에 무딪혀 고장나고 물넣어 돌리는 선풍기는 돌긴 도는데 복도가 방보다 더 시원하다. 젠장.....
20 : 30 휴식
누워서 시체 놀이를 한다. 저녁은 사가지고 온 복숭아로 때웟다. 땀이 저절로 온몸을 타고 흐른다. 몸에서 쉰 냄새가 난다. 샤워를 해도 금방 땀이 흐르기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다. 호텔 종업원들이 들어와 겨우 선풍기 날개를 고쳐놓는다.
뒤척이다가 잠이 든 모양이다. 허리가 아파서 눈을 떠보니 01: 30이다. 어두운 방안에서 담배 한대 피워 물고 누워 있는데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생각 자체가 귀챦아진다. 그냥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잠시 후 모기가 달려든다. 온몸 곳곳이 모기들의 열추적 센서에 포착되어 벌겋게 당한다.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04: 30경 겨우 잠이 들었다.
선풍기 두개가 일으키는 소음이 장난이 아니다.
21일차 (8월 6일 토요일) 페샤와르로 이동하기
06 : 40 기상
07 : 00 숙소 출발
아침은 복숭아 1개씩 먹는 걸로 때웠다.
마침 다른 손님을 태우고 가던 럭샤를 잡아타고 출발(20루피) “탁바이” (탁트 히 바흐를 여기서는 이렇게 부른다.)가는 버스는 박물관 쪽에서 터미널 쪽으로 가자면 버스터미널로 꺽어지는 코너에 있다. 그러나 여기있는 봉고가 모두 탁바이를 가는건 아니니까 반드시 물어보고 타야한다. 근데 럭샤를 타면 영어 발음과 현지 발음이 달라서 그런지(좋은 해석), 알면서도 간으한 멀리가서 돈을 더 받자는 것인지(나쁜 해석) 암튼 몇 번을 목적지를 불러주어도 한번에 제대로 가는 경우가 적다. 오늘도 분명히 “탁바이”, “탁트 히 바흐”, “탁티 바히”를 돌아가면서 불러주었는데도 가장 가장 안쪽에 있는 라왈핀디로 가는 버스 터미널에 내려준다. 그것도 지나치려는 것을(마치 탁바이까지 가려는 것이 아니었는지?) 내가 제지해서 멈추었다. 같이 탔던 현지인은 5루피, 7루피내던데 우리에게는 악착같이 10루피를 받아낸다.
암튼 아침 바람이 상쾌한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거꾸로 길을 거슬러 간 끝에 탁바이 가는 봉고를 탈 수 있었다.
07 : 20 탁트 히 바흐 가는 봉고 출발
탁트 히 바흐까지는 7루피/1인였다. 터미널 오는 럭샤값보다 더 싸다. 피깃 웃음이 나온다.
07: 40 탁트 히 바흐 시내 도착
버스에서 내려 건너편 길 안쪽의 럭샤 몰려 있는 곳으로 갔다. 탁트 히 바흐까지는 35루피 달란다. 그냥탔다.
07: 50 탁트 히 바흐 입구 도착
내려서 언덕 위로 3분 정도 올라가니 관리인이 입장료를 징수한다. 200루피/1인
관리인을 따라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비록 탁트 히 바흐는 언덕 위에 있었지만 우데그람보다는 훨씬 낮은 곳이고 일단 올라가면 건물과 유적이 밀집되어 있어서 그다지 힘들지는 모르겠다. 물론 땀은 여전히 흐른다. 그러나 아침이라 더워 미칠 지경은 아니었다. 관리인이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고 중요한 포인트는 짚고 다니던 막대기로 가리키면서 이야기를 해주어서 대충은 알아 먹겠다. 아마도 스왓 밸리에서는 가장 크게 번성햇던 승려 교육기관이었으리라. 건물은 언덕을 따라 경사지게 구성되어 있는데 기단부의 양식은 전형적인 그리스의 기둥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었다. 건물 밑으로 내려가니 명상의 방, 혹은 침묵의 방이라는 조그마한 1인용 참선 감실도 있었다. 건물의 중간 오른쪽에는 유물들을 모아둔 일종의 미니 박물관(유물 보관실)도 철문으로 닫혀있는데 관리인이 열어주어서 같이 들어가 이것 저것 좋은 구경 많이 하였다. 관리인은 한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나름대로는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을 하지만 왠지 쓸쓸해 보인다. 알고보니 한쪽 발목 아래가 절단되어 의족을 신고 다녔다. 자기는 여기서 28년간 근무 했다고 한다. 큰 엽총도 있는 걸로 보아 한때는, 가끔은 유물 도둑놈들도 왔엇나 보다. 잘 생긴 소조 부처상 하나를 꺼내 이건 스페샬이라면서 보여준다. 그늘 속에서 쉬었다가 땀을 식히고 마저 유적을 돌아보고 나왔다. 꼭대기로 올라가니 본 건물의 꼭대기일뿐 주변 능선에는 곳곳에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인부인 듯 한 사람이 건너편 능선에서 풀을 자르고 있었다. 어린 딸들 둘이 아빠의 아침식사인 짜파티와 짜이를 가지고 올라가는데 동생이 심통이 단단이 난 모양이다. 삐져가지고 우리가 쉬고 있는 전망대에 와서 아빠에게 뭐라고 큰 소리로 언니의 못된 점을 고자질하고 있다. 옆에서 빙긋이 웃으면 쳐다보고 있으니 우릴 보더니 멋쩍게 웃는다.
08: 50 입구에서 휴식
대충 둘러보고 입구로 내려오니 관리인과 다른 사람 여럿이 있다. 그 중의 젊은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낸다. 자기는 관리인의 조카인데 여기서 같이 근무하고 있단다. 한국에 대해 이러저러한 것도 물어보고 우리가 물어보는 유적과 관련된 내용도 쉽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특히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론니(파키스탄과 KKH)의 탁바이에 관한 설명을 읽어보더니 잘못 서술된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지적해준다. 그의 말에 따르면 Tat - hi - bah는 산스 크리트어인데 탁트 = hill이고 bah= spring water란다. 또 탁트 히 바흐의 유물은 페샤와르 박물관에 있으니 꼭 거길 들려가야한다고 한다. 마르단 박물관에는 없냐고 하니까 거긴 전혀 갈 필요가 없는 곳이란다. 물 없냐고 하니까 마침 얼음을 집어넣은 시원한 물을 한 바가지 떠준다. 내가 그걸 다 먹으니 마구 웃는다. 그렇게 덥냐고 한다. 더워 미칠지경이라니까 2달만 그렇고 나머지는 그렇게 덥지 않아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한다. 옆에서 고등학생들이 구경왔다가 우리가 대화하는걸 듣고 있다가 용기를 내서 몇 가지를 물어보는데 아는데까지는 대답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자기네 나라보다 못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너 삼성, LG, 운다이, 다에우 같은 회사 아냐니까 안다고 한다. 그게 다 우리나라 회사들이라고 하니까 엉? 하는 표정이다. MP3를 꺼내 자두의 “김밥”과 코요테의 “빙고”를 들려주니까 매우 다이나믹하고 즐겁단다.
관리인이 아침을 먹자면서 짜파티와 짜이를 내어온다. 강권에 못이겨 같이 먹었다. 다시 냉수를 한잔 한 후 내려가면서 관리인에게 아침 값이라고 100루피를 주었다. 뺏긴게 아니라 내가 고마워서 주기는 처음인 것 같다. 않받는다는 걸 다음에 한국인오면 잘해주라고 하니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마고 대답해준다.
10: 15 출발
한참을 놀았더니 기운이 난다. 여기는 일단 9시가 넘으면 햇살이 장난이 아니다. 내려오니 입구에 럭샤가 하나 있는데 얼마냐니까 40루피 부른다. 학생들이 그냥 가자고 잡아 끌어서 같이 내려갔다. 3분 정도 걸으니 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서 럭샤를 잡았다. 학생들이 4루피/1인라고 말해준다.
10: 20 읍내 도착
내리면서 학생들 몫까지 20루피를 냈다. 그래도 우린 갈때에 비하면 10루피 이익 본 것이다. 학생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간다.
※ 탁트 히 바흐 가는 방법
어디서든지 간에 일단 탁트 히 바흐(탁바이) 읍내로 들어와 경찰서 앞에 내린다. 밍고라 방면으로 200m쯤 가면 파란 바탕에 우루두 어로 글씨가 씌인 곳에 럭샤가 몰려있다. 그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탁바이 가는 길이다.
10: 27 탁트 히 바흐 읍내 출발
아까 버스 내린 곳 건너편에서 봉고를 타고 마르단으로 간다. (7루피/1인)
10; 50 마르단 버스 터미널 도착
10: 55 호텔로 출발
럭샤꾼에게 자만 호텔이라고 하지 않고 “바자르”. “하비브 방크” 하니 호텔 앞에 정확히 세워준다. 다음에 가는 사람은 차라리 그게 나을 듯 싶다.
호텔 부근에서는 물 사는 곳이 조금 멀다. 터미널 방향으로 150m쯤 가면 큰 슈퍼 옆 가게에 있다 물값은 1.5L가 22 ~ 30루피인데 대개 25루피면 적당한 가격이다. 각 티슈 중간 크기를 25루피에 샀다.
11: 03 호텔 도착
샤워를 하는데 아침이라 그런지 그래도 물이 조금은 덜 데펴졌다.
11: 40 호텔 체크 아웃
루피가 좀 부족한듯해서 1달러자리 가지고 있는 것이나 환전하자고 알 파라 은행으로 갔다. 거기서는 환전을 하려면 NPB로 가란다. 파키스탄 국립은행으로 갔더니 친절하게 맞이 해 준 것은 고마운데 담당자가 3번이 바뀌면서 잡담만 나누었다. 그러길 15분 정도 지나니 한 사람이 오더니 따라오라고 한다. 바꿔주나 했더니 은행 바깥으로 나간다. 그러더니 은행 옆 페인트 가게로 데리고 간다. 황당했다. 은행에서 가게로 환전하러 데리고 갈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 주인이 1달러에 54루피를 곱할려고 해서 54가 무슨 뜻이냐고 하니까 루피란다. 내가 54루피는 않된다. 최소한 58루피는 되어야 한다. 라호르에서는 60루피에 환전했다고 하니 특유의 오른손을 획 꺽어 뭘 날리는 모션을 취한다.(이 표현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않된다. 혹은 제기랄, 말도 않돼 뭐 그럴때 스는 것 같았다. 암튼 좋지 않은 거부의 표현이다.) 그래서 알았다하고서는 달러를 빼앗아 다시 들고 나왓다.
12: 00 호텔 출발
12: 07 버스 터미널 도착
페샤와르행은 의외로 큰 버스는 없고 봉고만 있었다. 그러나 큰 상관은 없다. 큰 버스들이 몰려있는 터미널 바로 옆이 페샤와르 가는 봉고있는 터미널이다.
12: 27 마르단 출발
원래 계획으로는 페샤와르에서 카이버 패스 1일 투어를 할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여권을 분실한 관계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하루만 있다가 이슬라마바드로 가면 서울클럽으로 바로 갈건데 사실 우리 공금이 별로 여유가 없어서 조금 절약하자는 차원에서 이틀을 페샤와르에서 머물고 월요일 아침에 아슬라마바드로 가기로 하였다. 대신 페샤와르에서는 투어리스트 인보다는 로즈 호텔이 시설이나 에어컨이 좋다고 하니 거기로 가기로 하였다. 만약 너무 비싸면 할수 없다. 투어리스트 인으로 갈 수 밖에.... |
첫댓글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