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유名儒 서경덕徐敬德과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
그리고 박연폭포朴淵瀑布 -
고려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서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많은 개성시민들이 나오고 있었다. 소학교 학생들도 보였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일반 노무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손을 들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박연폭포에서 식당으로 내려올 때는 점심시간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슨 이유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고려박물관’에는 대단한 유물들로 굉장한 감명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고려 시대 때 대학의 역할을 했던 성균관 뒤의 건물을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개성시 부산동에 위치해 있으며 송악산 동측 산록의 큰 바위 뒤의 완만한 경사지에 넓게 세워져있는 개성 성균관은 고려 초기에 세워졌고, 조선시대에 개축된 교육기관이다. 원래 이 건물은 11세기초엽에 대명궁이라는 고려의 별궁으로서 세워졌다. 그 후 이 궁전은 종종 외국으로부터 오는 국빈을 머물게 하는 숙소로도 사용되어 그 이름을 순천관이라고도 불렀다고 했다. 또 유교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관으로서도 사용되었다. 고려말기에 성균관의 책임자는 당시 저명한 유학자인 이색이었지만, 정몽주와 같은 학자들도 이곳에서 유학을 가르쳤다. 개성 성균관은 남북중심축을 따라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북측구역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남측구역으로 구분되어 배치되어있었다. 성균관 마당을 들어서면서 큰 고목들의 웅장한 모습과 마주하게 되는데 말하지 않아도 역사의 엄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건물들은 대체로 잘 보존이 되어 있었다. 단 한 가지 박물관이 너무 조잡했다. 그 귀한 유물들을 저렇게 조잡하게 전시해 놓고 관광객들에게 개방을 하다니 우리 수준으로는 강심장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도 머리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한 마디로 씁쓸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았다.
고려박물관 정문 - 오른쪽은 안내소이고, 왼쪽은 출입문이다.
성균관 안내석
성균관 은행나무 안내석
성균관 내의 고목 느티나무
성균관 느티나무 안내석
박물관에 전시된 석관
석관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
박물관을 나서면 야외 전시장이다.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불교 유물들이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였으니 개성에는 사찰들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고, 유물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불일사 5층탑이 있었다. 이 탑은 951년에 고려 광종이 모친을 위하여 세운 불일사지에 있던 것을 1960년에 개성시내의 봉평공원으로 옮긴 것이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그 때 탑 내에서 탑과 같은 형태를 한 금동제 탑이 발견되어 현재 개성역사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높이 8m의 단조로운 각형 석탑이지만, 상하 균형이 잡혀져있어 중감이 있는 고려 초기 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는 것이라고 안내원은 자랑했다.
성균관 밖에서 본 담장이고 바로 앞은 야외 전시장이다.
현화사 7층 탑이며 북한 국보다.
북한 국보인 현화사 비
불일사 5층탑
성균관 즉 고려박물관 앞에는 기념품 판매장이 있었다. 동남아나 중국 같으면 물건을 사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열기 위해서 많은 이벤트 행사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했다. 체제의 차이라는 생각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건을 사도 그만, 안사도 그만이었다. 판매장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성들이었고, 한복을 곱게 입고 있었다. 식당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은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본 바로 그런 복장이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많은 물건을 사고 있었다. 주로 말린 더덕, 말린 도라지, 북한 술, 북한 담배, 말린 두릅, 잣, 참깨, 메밀가루, 우표, 산수화 등이었다. 나는 광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남측사람들의 움직임도 그렇고 북측사람들의 움직임도 그랬다. 같은 말을 하면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 관광객들이 모두 나왔는가 보다. 서서히 고려박물관의 철문이 닫히고 있었다. 아직 오후 세시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두가 쉬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관광객들대로 안내원들은 안내원들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적었으나 안내원이나 기관원이나 판매소 일꾼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버스에 오르자, 버스는 출발했다, 16시 10분이었다. 개성공단을 지나면서 안내원은 개성공단 얘기를 했다. 개성공단은 황해북도 개성시 일원으로 총면적이 2,000만평(65.7㎢)이며, 공장구역만 800만평(26㎢)이나 된단다. 생활, 관광, 상업구역 등은 1,200만평(40㎢)를 별도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도 공사는 한창이었다. 로만손 시계는 광고도 많이 하고 있었고, 공장 기초공사도 군데군데 진행되고 있었다.
개성공단 계획도
개성공단을 돌아서 북측 C.I.Q를 도착한 것은 16시 23분이었다. 출경수속을 받기 위해서 우리 일행이 버스에서 내릴 때 그들은 수고 했습니다 라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출경수속이 진행 되었다.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다. 이미 알려진 정보에 따라 모두가 주의를 기울인 탓일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카메라를 보이면서 충전지가 소멸되어 볼 수가 없다고 했더니 에어컨 앞에 있는 의자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출경수속이 끝나자, 몇 개의 카메라를 든 그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컴퓨터가 있어 점검을 할 수 있다고 했다. 10여 분이 지나서 그는 카메라를 들고 나와서 주인에게 인계하여 주었다. 이미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철탑 위의 인공기가 너무나 선명하였다. 우리 측 안내원이 설명을 해 주었다. 마주 보이는 우리 측에는 대성동 마을이 있고, 그곳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자고 나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국기 게양대의 높이를 올리고 있었다고 했다. 더 커다란 인공기, 더 커다란 태극기가 매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수 국기 경쟁은 끝났다고 했다. 버스는 계속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측 군용 찦차가 나타나자, 대기하고 있던 많은 차량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사분계선의 철문은 아침에는 08시, 오후에는 17시에 열린다고 했다.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다고 했다. 철문은 도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의선 철로에도 있었다. 군사분계선의 그 철문이 열리지 않으면 베이징 올림픽 남북 공동 응원단도 베이징을 갈 수가 없음을 알았다. 문산역에 도착하여 4층 대합실에 오르니 17시 42분이었다. 기차가 18시 30분에 출발한다고 하니 50분정도가 남았다. 안내 전단에는 저녁을 각자 해결하라고 했는데 그 시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에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음료수와 빵을 사서 승차 후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제시 되었다. 일부 관광객들은 가지고 온 음식을 펼쳐놓고 먹기 시작했다. 그 때 삼성여행사 직원이 와서 기차로 도시락이 배달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다행이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합실로 나가기 시작했다. 여행사 직원들이 안내를 하고 있었다. 기차에 올랐다. 올 때 그 좌석에 앉기로 하자고 누군가가 말하자 금방 수용이 되었다. 자리를 정리하였다. 잠시 후 도시락이 도착했다. 물도 있고, 국도 있고, 밥도 있고, 반찬도 있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구가 종이컵에 북한산 소주를 반이나 채워 주었다. 나는 그 소주를 그대로 마셔 버렸다. 식사가 끝나자,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원주였다. 21시 20분이었다. 제천을 지나고 삼곡을 지나고 단양을 지나자, 새마을호가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풍기역에 내리니 23시 15분이었다. 처음의 일정은 24시라고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조 장로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금방 졸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꿈결 같은 하루였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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