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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하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자’는 뜻인데, 이 말은 주로 여러 사람과 토론하거나, 남을 설득할 일이 있거나 가르칠때 쓰는 표현이다. 어떤 일에 대해 제 욕심이나 제 관점대로 처리하기보다 항상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는 ‘역지사지’는 선생의 삶의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아무리 급한 일이 벌어져도, 그가 ‘허겁지겁’ 하는 걸 뵌적이 없다. 느릿느릿, 재고 또 재고, 원론적인 것부터 헤아려 ‘원칙’에 맞는지, ‘정의’에 맞는지, ‘상식’에 맞는지를 따져 일을 풀어가는 것이 선생의 특징이다. 이런 성격은 누구에게나 쉽게 간파되는 모양이어서, 프랑스 「르몽드」의 어느 기자는 선생과 두어 시간 얘기를 해본 뒤 이런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최고의 음악은 침묵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춤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한명희 씨는 “한국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지 너머에 있는 상징적인 세계를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그것은 흐르는 물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그 사이에 인간이 있다. 항상 자연과 화합해야 하는 예술 속에 이 세 가지가 융합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한명희 씨는 낙관론자는 아니다. 그의 예의와 신중함은 매우 ‘한국적’이다.
(1998년 7월 16일 「르몽드」)
모든 것이 바삐 돌아가고, 민첩하고 재기발랄한 사람들이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시대인지라 선생이 손해 보는 일도 적지 않고, 세간에서는 ‘어려운 분’이라고도 하지만, ‘역지사지’ 하라는 ‘언어’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한명희 선생은 1939년 봄, 충북 충주시 주덕읍 창전리에서 태어났다. 충주사범 병설중학을 1등으로 입학하고,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음악을 공부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은 것 같다. 우등생이었지만, 사춘기를 보내면서 염세적 감상주의에 경도되었고, 그 영향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지원했으나, 두 번이나 낙방하는 바람에 2차 지망으로 지원한 음악대학의 ‘국악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학문의 길이 달라진 것이다.
당시 국악과는 신설학과로서 2지망으로 지원한 학생들이 많았는데, 한명희 선생은 그 중에서도 엉뚱한 생각과 행동으로 ‘전설’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음대 학생회장, 서울대 총학생회 부회장 등을 맡아 어지간히 ‘체면’을 차려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부전공 실기로 선택한 바이올린 시험장에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들어간다거나 피아노 교수 연구실 앞 복도에서 천연스럽게 아코디온 연습을 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하고 교수들을 당황케한 사람, 학교 다니는 내내 교복에 ‘내핍생활’이라는 까만 리본을 달고 다녔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올 선생의 이런 행동들은 사실 단순한 장난끼의 발동이었다기 보다는 현실에 대한 나름대로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서양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국악을 폄하하는 양악 교수들에 대한 야유, 허장성세의 세태에 대한 비판같은 것이 이렇게 표출된 것이 아닐까.
한편, 한명희 선생은 ROTC 제 2기로 군대를 제대한 후 삼성이 운영하던 중앙매스컴의 공채 3기로 입사하여 TBC(동양방송) 프로듀서로 9년간 근무했는데, 이 기간동안 명인 명창들의 레퍼터리를 전곡 녹음하여 방송 자료화하거나, 좋은 전통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우리가곡의 밤을 개최하는가 하면 방송을 통해 신작 가곡을 보급하는 운동을 펼쳐 「기다리는 마음」, 「비목」, 「얼굴」 등의 노래가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될 정도의 가곡 전성시대를 열 정도로 열심히 일을 했으면서도 별명이 ‘반골’ 이었던 것을 보면 대학시절에 보였던 이런 생각과 행동이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국립국악원장 재임시절(1997년부터 99년까지 선생은 서울시립대 교수이면서 국립국악원장직을 겸직했다)에는 행정관료, 국회의원, 국가 정책 결정자들과 교분을 나누며 국악전문 라디오 방송인 ‘국악 FM방송’을 설립하는 등 커다란 업적을 남기겼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이의 직위가 어떻더라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원리원칙을 따져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적당히 봐 넘기는 식의 태도가 아니라 현실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선생의 이런 모습을 지근거리에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의 대단했던 옛 선비들이 꼭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선생이 연구하는 대상이 만일 예술이 아니고 민생 복지나 사회 정의와 관련된 일을 하셨다면 큰 지도자가 되셨을 것이라는 생각, 또 21세기에는 문화가 시대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하니, 이런 시대 구호에 맞게 선생이 우리나라 문화정책을 총괄하는 지도자가 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그러면 ‘알량한…’ 이라는 말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역지사지’ 하는 신중한 사고력, 그리고 한국문화의 특질을 세계화 관점으로 풀어내는 해박한 지식과 깊은 통찰력으로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재상’의 일은 다른 이가 대신 할 수 있지만 독창적인 학문의 완성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선생께서 시간과 마음을 온전히 학문 연구에 쏟으셔서 한국 음악학의 철학적 체계를 정립했으면 좋겠다 싶다. 이것은 순전히 내 희망이다.
아마도 선생은 여전히 분주하실 것이다. 선생은 1991년부터 매년 중앙아시아 지역을 순회하면서 공연을 하거나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섬머 스쿨을 열어왔다. 언제나 예산이 부족해 시립대학 공무원 수준의 봉급을 쪼개 보태야 하고, 매년 선생이 직접 동행하여 이 일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몸이 축나면서도 계속하고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교류를 통해 알게 된 중앙아시아 문화를 거꾸로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일까지 벌여(선생님은 지금 한국-중앙아시아 문화예술교류회장을 맡고 계시다) 일년 중에 한달 여의 시간은 이 일을 위해 써야 한다.
또 1996년부터 매년 현충일에 강원도 화천에서 열리는 비목문화제(비목문화제는 선생의 시 ‘비목’이 매개가 되어 시작된 진혼 및 추모제 형식의 축제이다) 일을 계속 돌볼 것이며, 또 새롭게 구상하고 있는 큰 일도 분명히 해내고 있을 것이다.
선생의 바람은 덕소 자택을 문화공간으로 꾸미고, 그곳에서 작은 음악회나 시낭송회같은 문화행사도 열고, 학술 세미나 같은 것도 열면서 사람들에게 문화의 맛을 보여주는 일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곳을 선생은 이미시문화서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미시라는 이름은 이응 미음 시옷 즉, ㅇ·ㅁ·ㅅ을 응용한 단어이며 동시에 하늘(천), 땅(지), 사람(인)을 뜻하는 원(圓 , 동그라미), 방(方: 네모), 각(角, 세모)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니, 역시 선생다운 ‘작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선생께서 아무도 모르게 회갑을 넘기셨지만,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오래 오래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선생의 가르침으로 많은 이들이 문화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