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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권 둘레길 스크랩 무등산 옛길
강산 추천 0 조회 652 10.09.16 1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등산 옛길 개념도> ☞ 지도를 클릭하면 큰 전도를 볼 수 있습니다.  


 

[새 코스] 무등산 옛길, 10월 10일부터 산수동~원효사~서석대 11.87㎞ 완전 개방

 

“싸목싸목 오감 열고 황소걸음으로 걷는 길”
황소걸음길, 연인길, 김삿갓길, 숲속의길, 무아지경길 등 이어져

 

무등산 옛길은 신수동~공원관리사무소에 이르는 포장도로 옆의 숲지대 속으로 조성했다. 현재도 작업 중이지만 일단 2구간까지 개통했다. 1구간은 산수동5거리에서 충장사~원효사에 이르는 총 7.75㎞로서 지난 5월 중순에, 2구간은 원효사~제철유적지~서석대의 4.12㎞로서 10월 10일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 총 연장거리가 11.87㎞다. 이 거리는 무등산의 높이 1,187m와 숫자가 같다.

3구간은 연말까지 가사문학과 광주의 문화를 볼 수 있는 길을 담아 개통할 예정이다. 환벽당~소쇄원~식영정~명옥헌에 이르는 15㎞ 코스다. 3구간까지 개통되면 광주의 역사와 문화를 골고루 체험하는 길이 될 것이다.

1구간 출발지점은 산수동5거리다. 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택가 바로 옆이다. 무등산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 앞에 ‘무등산옛길 입구’라고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를 걸어놓았다. 수지사 입구 비석도 같이 있다.

무등산 문화관광해설사 이애심(53)씨를 오전 10시30분에 만나 동행했다. 이씨는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매일 무등산에 오르내리며 단련된 건각을 자랑했다. 본인도 무등산에 오른 지 20년이 지났으며 “산에서 다람쥐같이 날랐다”고 했다.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체격에 발걸음도 사뿐사뿐했다. 뿐만 아니라 문화관광해설사에 숲해설가, 일어통역사 등 다양한 지식도 지녀 동행 내내 쉼 없이 정보를 제공했다.

출발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나무 쪼는 소리가 “따따따따~” 하고 울렸다. 딱따구리였다. ‘야, 도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선명한 딱따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굉장히 건강한 생태를 지닌 산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이 아니고 몇 번 계속 들렸다.

▲ 가을을 만난 무등산 억새가 석양과 어울려 아름다운 정취를 뽐내고 있다.

 

1코스는 천천히 걷기 적당한 길

이애심씨는 “광주 사람들의 무등산 사랑은 유별나서, 시에서 무등산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다“며 ”무등산 보존단체만 광주에 50여 개나 된다“고 했다. 한마디로 무등산이 훼손된다면 ‘벌떼’같이 일어나 반대운동을 벌인다는 것이다. 무등산에서 이 정도 건강한 생태가 보존되는 데 그들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소걸음길’이란 푯말이 나왔다. 출발지점부터 제4 수원지가 있는 청암교까지 황소걸음길이라 했다. ‘소에게 길을 물으며 황소걸음으로 걸읍시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걷기’ 자체가 명상과 사색을 동반하는 느림의 철학이고, 경쟁보다는 공존을, 수직의 정복보다는 수평의 평화와 안정을 꾀하는 가치를 지닌다. 그렇게 걷는 길을 천천히 걷는 동물의 대표격인 ‘황소’에 비유했으니 이 길은 아예 서 있는 듯 걸으라는 것 같다. 이씨는 “싸목싸목 오감을 열고 주변을 살피며 걷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싸목싸목’은 ‘천천히’의 광주 사투리다. 싸목싸목 걸으려니 갈 길이 바쁘다.

이 길을 통해 옛날 담양과 화순 동복 사람들이 잣고개를 넘어 광주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으로 황소를 팔러 다녔다. 시장으로 갈 때는 소와 같이 천천히 걸었지만 돌아올 때는 소 대신 두둑한 봇짐을 메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거나하게 한 잔 걸쳤음 직하다. 그 옛날 선조들의 모습이 상상 속에 그려졌다. 그대로 집에 도착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간혹 불행한 일도 발생했다. 이 길이 황소길인 동시에 두둑한 봇짐을 노리는 산적들이 우글거린 길이기도 했다. 마침 황소바위가 길 중앙에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쉬던 바위다. 산적은 방심한 사람을 최우선으로 노렸다. 서로 어떤 심정이었을까? 잠시 바위에 앉았다. 상상의 나래는 과거로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났다.

무등산 옛길은 말 그대로 옛길이다. 사람이 조성했지만 옛길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무등산 옛길‘이란 이정표에도 ‘옛길에서는 쇠지팡이가 필요없습니다. 선조들의 길에 상처를 주는 스틱 사용을 자제합시다’라고 적혀 있다.

이제는 조금 가파른 계단길이다. 바로 옆엔 지붕부터 벽까지 전체가 온통 파란색을 띤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다. 여자 무당이 신내림을 받는 굿당이라고 했다. 커다란 초가 놓여 있고 여기저기 줄도 걸려 있다.

계단길을 올라 끝을 밟으니 무진고성(武珍古城) 잣고개다. 옛날 이곳에 잣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고, 또 까치가 많이 날아온다고 해서 작고개(鵲峙·작치)로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엔 한자어로 척현(尺峴)이라고 쓰고 잣고개라 했다고 한다.

잣고개에 바로 무진고성이 길게 뻗어 있다. 무진은 광주의 옛 지명이다. 따라서 무진고성은 곧 광주산성쯤 되겠다. 

무진고성에 올라서면 도심을 내려다보는 전망대가 있지만 옛길은 무진고성 아래로 이어진다. 신라 말에 축성하여 고려시대까지 사용한 고성이다. 무진고성 동문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바로 옆에 놓인 무등로 신작로는 옛길을 단절시킨 주범이다. 하긴 길이 무슨 죄가 있으랴. 옛길을 생각없이 훼손하고 새 길을 만든 사람의 행위가 문제지.

무등로 신작로 옆으로 겨우 한 사람이 다닐 만한 숲속 길로 무등산 옛길을 연결시켰다. 찻길 바로 옆은 소음이 심해 그 위로 또 다른 길을 새로 냈다. 제각각 ‘아빠의 길’과 ‘엄마의 길’로 명명했다. 차도 옆엔 ‘달리는 차보다 걷는 우리가 편합니다’라는 푯말이 있다. 황소걸음길이 끝나갈 즈음 아빠와 엄마의 길은 서로 만났다.

 

청암교는 연인의 길·약속의 길

제4 수원지, 일명 석곡수원지를 건너는 청암교에 다다랐다. ‘연인의 길·약속의 다리(Promise Bridge)’라고 적힌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연인들끼리 손을 맞잡고 청암교를 걸으며, 사랑을 맹세하고 서로의 열쇠를 다리 철조망에 걸어놓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길’이란 설명이다.

청암교를 지나자마자 바로 청풍쉼터다. 주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소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비석엔 어디서 본 듯한 시가 새겨져 있다. 바로 김삿갓 시비다.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 시인은 무등산 주변을 떠돌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시비 주변엔 옛길을 보도한 수십 개의 신문을 스크랩해서 일목요연하게 걸어놓았다. 무등산 옛길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기는 끌었나 보다.

▲ 1 무등산 옛길 들머리인 산수동5거리. 커다란 플래카드가 무등산 옛길 입구를 가리키고 있다.

    2 무진고성 동문터. 흔적이 뚜렷하며 가끔 뱀이 올라와 늘어져 있다고 한다.

    3 청품쉼터에 있는 김삿갓 시비와 비석.

    4 무등산 옛길 제막식을 마친 광주 시장이 기념행사에 참가한 시민들과 함께 옛길을 걷고 있다.

    5 2구간에서 조금 올라가면 제철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6 무등산 옛길 2구간 개방 기념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서석대까지 오르다 중간 물통거리

       3거리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다시 숲길이다. 이 길은 김삿갓길이다. 김삿갓이 화순 적벽가는 길에 경유한 유서 깊은 길이라고 한다. 옛날 김삿갓이 지나던 길을 지금 그 사실을 떠올리며 밟고 있다. 길은 시공을 초월해서 역사를 연결시켜준다. 이 길이 아니면 언제 다시 김삿갓의 발자취를 뒤좇으며 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나.

무등산의 숲은 생태적으로 건강했다. 관목과 교목이 균형을 잘 이루고 있었다. 소나무는 드문드문했고 참나무가 우점종으로서 특히 많았다. 오리나무, 서어나무, 노간주나무 등도 군데군데 서서 자리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 중 나무 한 그루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서어나무 연리목이다. 다른 뿌리에서 자란 줄기가 중간에서 가지 하나로 연결돼 다시 자라고 있었다.

길은 계속된다. 멧돼지 흔적도 보이고,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도 다시 들렸다. 지나간 여름이 아쉬워서인지 매미 울음은 왠지 구슬펐다. 다람쥐 우는 소리도 처음 들었다. 다람쥐도 소리 내 우는 사실을 동행한 이애심씨를 통해 처음 알았다. 텃새인 수까치 울음도 더했다. 나무와 새들의 천국 같았다.

무등산 옛길은 사유지가 70% 이상이라고 했다. ‘길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애심씨는 “무등산 사랑이 극성일 정도인 광주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의 집에 도착했다. 20년 전에 1000여 평을 사서 자리 잡은 이철우씨가 주인공이다. 그는 무등산옛길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사유지를 주차장으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한참 숲속 길을 걷다가 충장사를 밑으로 보며 무등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충장사~원효사까지는 ‘숲속의길’이다. 자연의 숲속을 걸으며 내면의 자아를 찾아 명상을 하며 걷는 길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젓한 길에서도 등산객을 심심찮게 만났다. 평일임에도 이용객이 많았다. 친구와 오빠, 셋이서 왔다는 광주에 사는 주부 조소심씨는 “무등산 옛길은 가슴 설레고 편한 길”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했다. 그녀는 허리가 아파 등산을 하지 않았으나 옛길은 전혀 무리를 주지 않고 걷기에도 편하다고 자랑했다.

2구간은 군부대로 통제됐던 길 개방

▲ 원효봉 너덜겅. 이곳을 지나면 1구간이 거의 끝난다.

 

숲속 길과 관망지역인 원효봉 너덜겅에 이를 때까지 무등산 옛길은 완전한 녹색터널이다. 숲으로 뒤덮인 길이다. 마침내 원효사 일주문 앞을 지나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에 도착했다. 1구간 끝 지점이다. 점심 먹느라 조금 지체해서인지 꼬박 4시간 이상 걸렸다. 1구간은 전형적인 수평지향적인 걷는 길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젠 정상이 있는 서석대를 향해 출발이다. 이 길은 원래 통제구간이었다. 군부대가 있어 군인들과 묘지 관리인, 일부 나무꾼만 출입이 허용되던 길이었다. 사람 출입이 없으면 건강한 자연생태가 보존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원효계곡의 물소리, 건강한 생태숲에서 보내는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등으로 자연에 홀려서 걸으라는 뜻으로 ‘무아지경길‘로 명명했다. 관리사무소는 이곳의 생태를 지속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오전 9시30분, 11시, 오후 2시 등 하루 세 차례만 입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상행만 허용하고 하산은 다른 코스로 유도할 방침이다.

정말 무아지경으로 빠질 만한지 한번 가보자. 관리사무소 바로 뒤로 나 있는 오솔길로 올랐다.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다. 삼림욕하기에 적격이다. 숨을 깊이 들이켰다. 상쾌한 기분이다. 숲은 계속 이어졌다. ‘무등산 옛길은 녹색터널’이라는 말 그대로다.

제철유적지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김덕영 장군이 이곳에서 무기를 만들어 왜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원효계곡이 바로 옆으로 흘러 물소리 덕분에 제철·제련하는 소리를 감출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계곡이 말라 물은 별로 흐르지 않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참 건강한 숲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관목과 교목이 층층을 이뤄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참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지천에 널렸다. 다람쥐는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 먹이를 날랐다.
 
묘지가 간혹 보였다. 그렇다. 옛길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유하는 길이다. 묘지가 없었으면 산 자가 여기까지 올 일이 없었을 터이다. 이 길은 또한 수송부대가 떠나기 전까지 군인들이 짐을 지고 오르던 길이기도 했다. 샛길로, 계곡 지류로 난 도랑길을 따라 올라갔다.

수송부대가 있던 자리가 나왔다. 주변 석축은 그대로였다. 고무 타이어만 없어진 쇠바퀴, 이음새고리, 쇠파이프, 드럼통 등 부대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군부대가 떠난 지 40년이 되었다고 한다.

녹색터널에서 갑자기 하늘이 훤하게 가까워진 듯했다. 조금 밝아지더니 하늘이 확 트였다. 2구간 출발 이후 처음 보는 하늘이다. 그만큼 숲으로 뒤덮인 길이다. 억새가 부끄러운 듯 조금씩 모습을 보이더니 군사작전도로에 접하자 좌우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아래쪽 중봉 가는 길은 수천 평이 억새군락이다. 군사작전도로는 까만 머리를 마치 바리캉으로 한 번 주욱 민 듯한 민망한 모습이다.

▲ 1 수정병풍처럼 빛난다고 해서 서석대. 무등산 옛길의 끝 지점이다.

    2 2구간 중간지점에 있는 옛날 군부대 자리. 쓰다 버려둔 물건이 아직 남아 있다.

    3 서석대 바로 옆에 있는 무등산 옛길 끝 지점을 알리는 안내판.

 

옛길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유하는 길

이젠 수정병풍, 빛고을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서석대까지 500m 남았다. 군사작전도로에서 서석대 가는 길은 돌계단길이다. 각자 보폭에 맞추어 걸을 수 있게 크고 작은 돌로 계단을 만들었다.

드디어 서석대(1,100m)에 도착했다. 천연기념물 제465호다. ‘무등산 정상 서쪽에 위치한 서석대는 수정병풍처럼 둘러쳐져 상서로운 빛을 머금고 광주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다. 이는 한반도 육지에서는 보기 드문 주상절리대로서…’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비가 오면 실제로 반짝인다고 한다.

몇 발짝 옮기니 ‘무등산 옛길 종점, 옛 선조들이 올랐던 옛길 정상입니다. 11.87㎞ 전 구간 완주를 축하합니다’라고 적힌 이정표가 반긴다. 안내 번호는 40번이다. 이 옛길엔 300m마다 조그만 안내 기둥을 한 개씩 세워 놓았다. 1~26번까지가 1구간이고 27번부터 40번까지 2구간이다.

정상에서는 광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월출산과 내장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요즘은 시계가 뿌옇게 흐린 날이 잦다. 이 날도 그런 날이다.

바로 옆에는 천왕봉 정상으로 접근을 막는 차단막이 세워져 있다. 그곳엔 군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산길은 옛길과는 상관없이 어차피 내려와야 하기에 입석대를 거쳐 군사작전도로로 걸었다. 광주 서구 금호동에 산다는 고병섭씨 부부를 만났다. 1992년부터 무등산만 4000번 이상 올랐다고 했다. 고씨는 “무등산 옛길은 참 잘 만들었지만 1구간은 전형적으로 걷는 길로서 별로 재미가 없다“고 하자, 그의 부인은 옆에서 “나한테는 딱 맞는 길이여”라고 받아쳤다. 고씨의 말은 계속 됐다. “반면 2구간은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아주 인상적인 코스다. 지금까지 증산사지구로 많이 올랐는데, 앞으로는 이 길을 자주 이용할 것 같다.”

그와 그의 부인 말이 무등산 옛길 1구간과 2구간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것 같다. 달리 말하면 무등산 옛길 1~2구간은 트레킹과 등산을 적절히 배합한 길이라 할 것이다. 3구간은 역사, 문화탐방의 길로 연말까지 태어날 예정이다.

 

무등산 이름의 변천
무돌·무당산→무진악→서석산 등으로 불려

무등산은 백제 이전까지는 무돌이나 무당산이라고 불렸다.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을 지닌 순우리말의 조어라고 한다. 무돌이 백제시대에 와서 무돌의 ‘무‘는 한자음의 ‘武’로 표기하고, 돌은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을 따와 보배 ‘진(珍)’으로 표기하면서 무진이란 이름이 등장했다. 그래서 광주를 무진주라 하고 무등산은 무진악으로 표기했다.

통일신라 때에도 무돌을 한자에서 음과 뜻을 빌려 ‘무진악’ 또는 ‘무악’으로 표기하다가 고려시대부터 서석산(瑞石山)이라는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고 불렀던 것도 무돌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말을 한자로 옮기면 서석산이 된다.

<삼국사기>에 무진악이란 표기가 공식 기록으로 처음 나온다. 무등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초에 쓴 <고려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有無等山 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이라고 돼 있다. 무등산을 무진악이라 부르기도 하고, 서석산이라고도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조선 초 이전에 이미 무등산이란 이름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무등산이란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은 아직 없다. 몇 가지 추정만 할 뿐이다. 애초 사용했던 이름 무당산이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에서 한자가 ‘당’에서 ‘등’으로 바뀌어 무등산이 되었다는 설이 그 중 설득력이 있다.

또 다른 설은 불교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불교 용어로 ‘無等等(무등등)’은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 견줄 이가 없다는 뜻으로 무등산이라 불렸다는 해석이 있다. 때문인지 무등산에는 사찰이 많고 고승의 발자취가 잦았다.

‘빛고을’ 광주(光州)라는 지명은 정상에 있는 서석대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석대는 ‘수정병풍‘으로 불리며 상서로운 바위로 반짝이는 빛을 발한다고 해서 광주를 빛고을로 부르게 됐다.

 

무등산 옛길 탐방 가이드
옛길 종주에서 하산까지 총 9시간 이상 잡아야

무등산 옛길 들머리는 동구 산수동5거리다. 여기서 충장사를 거쳐 원효사까지 7.75㎞ 1구간은 평이한 걷는 코스다. 오르막길도 별로 없어 정상인 걸음으로 평균 3시간 남짓 소요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2구간인 원효사~제철유적지~서석대 4.12㎞는 걷는 길이라기보다는 등산코스에 가까워 정상인의 걸음으로 3시간 가까이 걸린다. 중간에 점심 식사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1구간 출발부터 서석대까지 6~7시간 잡아야 한다.

서석대에서 하산길에 들어, 입석대~장불재를 거쳐 군사작전도로로 내려올 경우 3시간 가량 걸린다. 그러면 출발에서 하산까지 총 9시간 이상 예상하고 출발해야 한다.
중간 중간에 이정표가 워낙 잘 정돈돼 있어 길을 잃거나 헤맬 우려는 없다. 1구간에서는 길을 가다 시간이 없으면 중간에 탈출로로 내려가면 된다. 수지사, 잣고개, 청품쉼터(4수원지), 화암마을, 충장사, 풍암정, 안양사, 원효사 등에 버스 승강장이 있다.

>> 교통

무등산 높이와 숫자가 똑같은 1187번이 버스터미널과 광주역을 거쳐 원효사까지 운행한다. 06:20~20:00, 25분 간격 운행. 옛길 들머리인 산수동5거리에서 원효사까지 20분 남짓 걸린다. 주말엔 많은 등산객을 감안해 1187-1, 1187-2번 버스가 추가로 투입돼 배차간격이 조금 줄어든다.

승용차를 산수동5거리 입구에 주차시키고 원효사까지 가서 다시 돌아오려면 버스를 기다려 타고 오거나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일반택시가 좀처럼 다니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콜택시를 불렀을 경우 할증료를 내야 한다. 1만5,000~2만 원. 콜택시는 여러 회사가 있다. 문의 062-515-8282, 062-227-0082, 062-515-6666, 062-576-7982

>> 찾아가는 길

승용차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동광주IC에서 화순, 동광주 방면으로 빠져나와 제2순환도로 목포, 보성, 무등산 방면으로 옮겨 탄다. 계속 가다가 두암교차로에서 무등산, 두암지구 방면으로 나와 우회전, 무등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면 장원초등학교가 나온다. 장원초교 바로 위 지점이 산수동5거리 옛길 들머리다. 장원초교와 산수동5거리 사이에 조그만 소공원이 있다. 그곳 담벼락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산수동5거리 들머리 바로 맞은편에도 몇 대 주차할 수 있다.

원효사까지 계속 가려면 무등로 끝까지 가면 된다. 이 무등로가 바로 옛길 탈출로로 연결되는 도로다.

>> 숙박

산수동5거리는 시내이기 때문에 숙박업소가 많다. 산수동5거리 주변 숙박지로는 몰디브모텔(062-223-0058), 리젠시모텔(062-226-8090), 유토피아(062-224-4590) 등이 클린 숙박업소로 지정된 곳이다.

원효사 지구엔 음식점과 단체 민박이 많다. 가족 단위의 민박은 없고, 대부분 음식점에서 단체 민박을 하는 경우다. 신성산장(062-265-8778), 산해가든(062-266-6679), 만평산장(062-266-4477), 송도산장(062-266-7513) 등이 있다.

 

[월간산 2009년 11월호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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