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콤 (Catacombe –카타콤베)
로마를 찾는 성지 순례객들의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곳은 바로 카타콤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고대 로마 아피아 가도를 따라 세바스티아노 성문 밖을 나서면 로마 시대 유명 인사들의 무덤터들이 나타나는데(당시 성 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던 관계로) 순례객들이 찾아가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좀 더 떨어진 지하 묘지 카타콤이다.

성 칼리스토 카타콤 내부
본래 카타콤은 로마 밖 아피아 가도 지역에 기원전 1세기부터 형성된 로마 서민층들의 지하묘소이다. 묻힐 땅이 부족해 결국 지하를 파고 넓은 공간을 마련해 손쉽게 매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교의 박해(로마의 황제들 중에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황제는 카라칼라와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 발레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공동 묘지를 색출하고,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가 시작되면서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을 이곳에 묻기 시작했으며 생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으로 피신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본래 무덤은 신성한 곳으로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는 금기지역이었고 또한 카타콤의 그물망 구조로 들어온 자들이 출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들어오기를 꺼려해 안전한 피신처가 되었다. 결국 카타콤은 그리스도인들의 피신처와 무덤터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성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카타콤 위 들판에 있는 양떼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313년부터 시작된 카타콤 성지 순례는 거의 4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성지 순례객들이 벽 위에 새긴 기도문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카타콤은 로마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그들로부터 약탈을 당하였는데 이는 죽은 자가 지녔던 귀금속을 그대로 관속에 넣어 주는 로마의 장례 풍습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8세기부터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순례객들의 발길은 카타콤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며,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는데 10-16세기는 카타콤이라는 말 자체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시대였다.
17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당시 고고학 분야의 대가였던 안토니오 보시오(1575-1629)의 연구에 의해 약 삼십여 곳의 카타콤이 발견되었고 약 2백년이 지난 후 예수회 신부이자 고고학자였던 주세페 마르키의 카타콤 연구에 관심을 갖은 그의 제자 조반니 바티스타 데 로시의 끈질긴 노력과 인내로 1854년 로마의 세바스티아노 성문 가까운 들판의 땅 밑에서, 3세기 때의 교황 무덤과 체칠리아 성녀의 무덤을 발굴함으로써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카타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세바스티아노 성문
첫댓글 샬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