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최고 번화가인 강남 한 복판에 조선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의 강남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자리한 조선왕조 9대 성종의 선릉이다.
성종은 죽어서 작은 할아버지 광평대군 이여(李璵)의 묘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그의 왕릉이 들어선 것이다.
광평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학문을 좋아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34세 요절하였다.
세종 19년(1437년) 부왕의 명으로 후사가 없는 종조부 무안대군 이방번의 봉사손(奉祀孫)이 된다.
결국 연산군이 증조부 광평대군의 묘를 대모산 자락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 부왕 성종의 선릉을 쓴 것이다.
조선의 9대 왕 성종의 선릉이다.
'조선 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은 왕'이라고 해서 성종(成宗)이란 묘호(廟號)가 붙었다.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와 세자 빈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이다.
생후 두 달이 되기 전에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그를 궁중에서 키웠다.
성품이 뛰어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자을산대군이다.
할아버지 세조가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살았으면 왕위를 이어 받았을 것이다.
자연 형님 월산대군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의경세자의 동생 삼촌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조선 왕조의 왕위에 오른다.
예종도 즉위 14개월만에 일찍 세상을 떠난다.
예종에게는 원손 제안대군이 있었다. 당연히 왕위를 이어 받아야 했다.
그 자리는 다시 의경세자의 첫째 월산대군에 가지 않고 둘째 자을산대군에게 넘어간다.
예종이나 자을산대군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최고의 실세 한명희의 사위라는 점이다.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도 장인 한명회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왕위계승서열 1위 제안대군, 2위 월산대군을 제치고 3위인 자을산군이 이어 받은 것이다.
왕통의 정통성을 합리화 하기 위해 자을산군을 예종의 양자로 삼아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한명회는 셋째 딸 왕비 만들기가 실패한데 대한 집념으로 다시 넷째 딸을 기어코 왕비로 만들었다.
두 딸은 자매지간이지만 궁중에서는 숙질간이 되는 전례없는 경우가 되었다.
한명회는 왕비 두명을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것이다.
아버지 의경세자 못이룬 왕위를 형을 대신하여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9대 임금 성종이다. 즉위 후 7년 동안은 세조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아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못했으며 훈신세력이 모든 군국사무를 주도했다.
20세가 되던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했다.
성종은 20여년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을 비롯해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을 완성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왕'이라 해서 성종(成宗)이란 묘호가 붙었다.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사림세력을 등용,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보령 38세로 승하했다.
성종은 부인 12명(아들 중종과 함께 역대 임금중 공동 1위)에 16남 12녀를 두었다.
왕비는 3명이었는데 정비 공혜왕후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로서 후사가 없었다.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죽자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아 연산군을 얻었으나
윤씨의 투기가 매우 심해 왕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이 일어나자 1479년 폐위하고 1482년 사사(賜死)하였다.
이는 훗날 연산군 폭정의 계기가 된다.
이곳은 원래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무덤자리였다.
광평대군은 성종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이다. 당시 왕실에서는 이 자리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적극 반대한다. 당시 광평대군의 자손들이 병들거나 요사한 경우가 많았고,
그 주변 왕실 종친들의 무덤이 많아 이장하려면 나라에서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주(喪主)인 연산군 역시 할머니 인수대비의 의견과 같았다.
이 자리를 강력하게 추천한 이는 왕실의 외척이자 훈구공신인 영의정 윤필상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 1495년 4월에 성종의 유해가 안장돼 장례가 마무리되었다. 이미 불길한 일은 그 전부터 시작된다.
장례 한 달 전쯤인 3월, 연산군은 부왕 성종의 묘지문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날 연산군은 밥을 먹지 않았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과 왕실의 비극이 시작된 날인 것이다.
성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대모산 자락으로 이장된 광평대군의 무덤은 그 후손들의 묘들과 함께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지며, 이장된 뒤 그 후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 문중은 조선시대 문과에 850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 가운데 광평대군 후손이 115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 후손들은 이 묘역의 명당 발복이라고 믿고 있다.
성종 임금을 광평대군의 묘지에 안장시킨 윤필상은 어찌 됐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된 죄로 연산군에 의해 멀리 진도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한다.
성종의 제2 계비 정현왕후가 1530년(중종 25)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남편 성종이 승하한 날로부터 35년 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같은 해 10월 29일 선릉에 예장되었다.
정현왕후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다. 성종의 왕릉 선릉은 현재 유해가 없는 빈 무덤이라고 전한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 왜적들이 무덤을 파헤쳐 도굴하고 정자각은 불태웠다.
왕의 시신은 행방을 알 길 없다.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성종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성종의 무덤 속에는 수의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만 관에 들어 있다.
인조3년(1625) 에는 홍살문 정자각에 불이나 완전히 타버렸다. 능참봉과 능수호군은 하옥되었다.
그 다음 해 2월 4일, 2월 15일 연이어 능상에 불이 났다.
이 선릉의 묘제는 할아버지 세조의 광릉과 같은 동역이강릉(同域二岡陵)이다.
같은 영역에 두 개의 언덕(岡) 사초지가 V자로 놓여 있다. 그 언덕에 능상을 조성한 선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