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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의 대화와 전복적 가역반응
윤대녕의 소설은 독특하다.1) 이 글에서 사용한 텍스트들은 다음과 같다.
『은어낚시통신』(문학동네, 1994)\『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중앙일보사, 1995)\『남쪽 계단을 보라』(세계사, 1995)\『추억의 아주 먼 곳』(문학동네, 1996)\『지나가는 자의 초상』(중앙일보사, 1996)\『천지간』(문학사상사, 1996)\"상춘곡, 1996"(『문학동네』 1996년 여름호) 이하 본문을 인용할 때는 편의상 출처의 머리글자(즉 『은』, 『옛』, 『남』, 『추』, 『지』,『천』, 『문』)와 그 쪽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그는 자신만의 글감과 스타일로 독자들을 자기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묘한 힘을 가진 작가다. 혼돈과 모색의 연대로 기록될 이 90년대의 벽두에 등단한 그는 개성 있는 고집으로 90년대 소설의 새로운 표정의 하나를 창안해내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윤대녕의 상상력은 현실 전복적 가역반응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현실은 그의 육체는 물론 영혼을 담기에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다. 그러기에 현실의 시간이나 공간이 그에게 미치는 의미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넘어서야 할 어떤 부정적 계기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친다. 현실 저편으로 추동하는 가역반응의 매개 구실로서만 현실은 의미를 지닌다. 서둘러 말하자면, 윤대녕의 가역반응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을 짐작하게 한다. 질서에서 혼돈으로,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신화적 상상력으로, 리얼리즘에서 하이퍼 리얼리즘으로의 변화라는 새로운 조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소설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리얼리티의 출현을,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을 예감케 한다.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우선 윤대녕 소설의 전체적인 표정을 간략하게나마 스케치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첫째, 이미 말한 대로 윤대녕의 소설은 현실에 지독하게 절망한 자의 문학이다. 또 운명적으로 저주받은 자들의 그림자로 을씨년스런 표정을 그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지니고 있다. 윤대녕의 인물들은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혼미의 방황을 거듭하며, 꿈을 소실한 채 고통스런 몽중보행을 계속한다. 그들은 방황과 고통 속에서 아주 힙겹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역반응에 몰입한다.
둘째, 그 가역반응은 흔히 역(逆)시간여행으로 나타난다. 현실에서의 절망과 곤혹이 그로 하여금 현실과 시간을 거슬러 아득한 기억의 저편을 꿈꾸게 한다. “세찬 물살을 가르며 수만의 은어떼들이 어디론가로 거슬러가고 있다는 환각”("은어", 『은』, 25쪽)의 상징에서 명료하듯, 존재의 시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역시간여행이 문제적이다. 이 과정에서 시간의 대화가 그의 소설의 핵심적인 기둥이다. 이 시간의 대화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환상과 실제, 추상과 구상, 시원 상태와 현실 상태가 경계를 허물고 얽설키게 된다. 특히 이 역시간여행은 현실에 대해 아주 근원적으로 반성케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아울러 그것은 신생의 현현을 꿈꾸게 한다.
셋째, 윤대녕이 벌이고 있는 시간의 대화는 종종 구체적인 현실 계기를 결여한 채 갑작스럽게 진행되거나, 2) 윤대녕 소설에서 ‘갑작스러움’을 나타내는 부사는 일종의 상투어구처럼 자주 출몰한다. ‘불현듯’ ‘순간에’ ‘불쑥’ 등등이 그런 예들인데, 이같은 부사들과 더불어 인물의 생각이나 느낌, 충동 등은 아주 빠르면서도 낯설고 때때로 파격적으로 전개된다. 이런 요소들은 윤대녕 소설의 하나의 특징을 이루면서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한다. 긍정적인 특징으로 보자면 우연성의에 가면을 쓰거나, 3) 어쩔 수 없는 의식에 의해 가려졌던 무의식의 언어적 표출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지나치게 무의식적 충동의 전경화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화자의 진지성이나 신뢰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까닭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예문들을 보면 짐작되는 바 있을 것이다.
① 나는 불현듯 거기 그렇게 밤새 서 있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은어낚시통신", 『은』, 75쪽) ② 후닥닥이라고 해도 좋을 아주 짧은 순간에 나는 돌연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은어낚시통신", 『은』, 75쪽) ③ 아무려나 그닥 중요치도 않은 그 일이 왜 불현간에 떠올랐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불귀", 『은』, 83쪽) ④ 나를 찾아왔다라고 느낀 건 그녀가 돌아가고 난 뒤에 불쑥 이마에 떠오른 생각이었다.(『추』, 7쪽) ⑤ 그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나는 불현듯 멀리 여행을 떠났던 사람이 부쳐온 편지를 받은 느낌이었다.(『추』, 9쪽) 운명의 표정3) 예컨대 이런 본문을 보자. “어느 날인가 밤늦게까지 불켜진 집이 보여 저는 그리로 들어가 봤던 거예요. 너무 지쳐 있었거든요. 잘 아시겠지만 거기가 바로 동우씨 집 마당이었구요.
우연하게도 말예요.”("지나가는 자의 초상", 『남』, 128∼129쪽), “그것은 우연이란 복면을 쓰고 슬쩍 내 옆구리를 찌르며 다가왔다.”("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남』, 248∼249쪽) 갑작스러움과 더불어 이같은 우연적인 요소도 윤대녕 소설에서 문제적인 대목이다. 질서의 세계관을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가에게 있어 저간의 ‘필연성’이나 ‘개연성’ 역시 의심스러운 요소였을 터이다. 하여 그는 과감하게 ‘우연성의 개연화’에 도전한다. 이 우연성의 개연화에서 새로운 리얼리티의 출구가 열릴 수 있다면, 윤대녕식 가역반응의 망외의 소출이 될 것이다.
에 기대거나, 4) 환상적인 분위기속5) 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그러니까 “우연 혹은 인연의 끈”("천지간", 『천』, 47쪽)을 통해 그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침강해 들어가면서 그 나름의 신비체험과 신화적 상상력의 활달한 날개를 얻는다. 이 부분이 좀더 세련되고 심화된다면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패턴의 동일성 혹은 반복의 문법을 발견할 수 있다. 등단작 "어머니의 숲"을 비롯한 초기작 몇 편을 제외하면 거의 예외 없이 그렇다. 거칠게 ‘여성과의 우연한 만남―몽환적 성합―여성의 사라짐’으로 요약될 패턴이 바로 그것이다. 파괴적이기보다는 생산적이며,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우주적이고, 사회정치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인 여성성의 대지 위에서 신생의 기억을 되찾고 신생의 현현을 예비하려는 작가의 의도적 담론으로 보여진다. 상대 여성에 대한 심화된 해석 안으로 주체의 타자성을 보다 웅숭깊게 확보해 나가는 심화 전략과 이 패턴의 전복으로 새로운 가역반응을 도모해야 하는 탈반복의 전략이 동시에 요구된다.4) “살다보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피할 수 없는 위험이나 곤혹스런 일에 직면할 때가 있는 법이다.”("카메라 옵스큐라", 『은』, 204쪽)라든지,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듣고 습관적으로 출입문을 쳐다본 바로 그 순간, 나는 일종의 운명적인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추』, 31쪽)와 같은 진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윤대녕은 ‘운명적인 예감’을 선호하는 편이다. 모호하거나 혼돈처럼 우리들의 의식 저층에 혹은 무의식 내지 집단무의식의 지대에 펼쳐져 있는 비사실적인 에너지들을 적극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활용한다.
다섯째, 비평가 김윤식이 “생리적 플롯이라고나 할 독특한 구조와 이미지를 지닌 작가”로 주목한 바 있듯이, 플롯이나 스타일 면에서의 독특함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의 소설에서 플롯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주형에서 크게 벗어나 있으며, 그의 소설 언어는 시적인 문체로 고통스런 현실과 글감을 위무하고 있다. 특히 그의 소설에서 은유의 전략은 몽환적이고 신화적인 분위기 형성에 적절한 기여를 하고 있으며, 특히 무의식의 은유는 작가가 매우 공들인 결과로 보인다.
5) ‘환상’이나 ‘환영’에 대한 윤대녕의 선호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어느 소설을 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매우 쉬운 편에 속한다. “내 눈에 환영처럼 걸려드는 게 있었다.”("눈과 화살", 『은』, 270쪽) “사실(事實)이란 문득 또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것.”("지나가는 자의 초상", 『남』, 88쪽)
2. 사회적 시간과 개인의 파국
작가 윤대녕은 81학번이다. 저 공동묘지와도 같이 어두운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시간대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다. 그가 비록 바슐라르를 즐겨 탐독했던 불문학도이긴 했지만, 어찌 80년대식 정치의 시간으로부터 함부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80년대란 자연스럽게 사회학적 상상력을 추동시킨 연대였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절망과 혐오를 내면화하게 했던 연대였는데, 이 양면 모두에서 개인은 무척이나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이나 "눈과 화살" 등 초기작에서 사회적인 시간이 문제되는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된다. 그런데 윤대녕이 문제삼는 사회적 시간은 80년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탈80년대적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80년대의 양면성을 90년대식으로 지양한 것이 윤대녕 초기 소설에서 보이는 사회적 시간의 특성이다. 즉 거대 담론이나 거대 권력에서 벗어나 미시 권력에 대한 분석적 성찰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존재방식에 대한 나름의 고뇌를 묘파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에서 주인공은 육 년 동안의 직장 생활을 마감하며 명함철을 정리하다가 “이렇게나 많이 모르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은』, 220쪽) 아연 실색하고 만다. 업무 관계로 주고받은 명함 속의 사람들을 거의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 또한 그들에게 “단지 일회용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21쪽)고 생각하며 절망하게 된다. 이런 심사 속에서 그는 모르는 한 인물에게 우정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일방적으로 약속한다. 둘은 봄날 저녁에 만나 서로 모르면서 아는 척 당구도 치고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신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작가는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허구적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6)6) 허구적 혹은 불모적 인간 관계의 문제성은 "사막에서"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등의 작품에서 ‘모래’나 ‘사막’의 메타포로 거듭 되풀이된다.
직장 일 때문에, 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차 가면을 쓴 허구적인 관계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우수를 적절히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회적 시간은 영혼의 시계가 아닌 게임의 시계에 의해 움직인다. 게임의 시계란 때때로 너무나도 가혹하게 영혼의 시계를 멈추게 하는 것이어서, 그 시계 바늘은 종종 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개인으로 하여금 파국에의 절망에 젖게 한다. 가령 작가가, “생활, 그 치명적이고도 거룩한 것. 그러나 거룩하기보다는, 악귀처럼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끝내는 거덜을 내고야 마는 지병 같은 것!”("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 『은』, 242쪽)이라고 적는다든지, “현실감각이란 게 뭔가. 나날이 수긍하고 동조하고 묵인하고 그러면서 삶에 대한 별 보상 없이 무기력하게 소모돼 가는 과정 아닌가”("그들과 헤어지는 깊은 겨울 밤", 『지』, 175쪽)라고 토로했을 때, 우리는 그 구체적인 실감을 얻게 된다. 사회적 시간, 혹은 생활에 대한 “뿌리깊은 절망에의 집착”(『은』, 256쪽)은 "눈과 화살"에서 좀더 구체화된다. 박무현의 실종과 환각적 귀환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실종된 박무현의 수기를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그 직접성의 정도가 매우 강하다.
전화요금, 전기세, 수도세, 신용카드 청구서, 투표 통지표, 인구 조사서, 백화점 판촉물, 기타 익명의 발신인들로부터의 사신(私信)들. 끔찍해라. 내가 이렇듯 누군가에 의해서 관리되고 재단되고 그들의 방식에 따라 재생산되며 살고 있다니! 그리하여 각 공공기업체, 동사무소, 구청, 은행, 신문지국, 심지어는 전화번호부에까지 올라 기록되고 통제되고 분류되고 컴퓨터에 입력돼 키보드의 자판 하나만 누르면 호출돼 명령을 받아야 하다니! 두려워라, 내 사진첩 속 빛나는 신생(新生)의 기억들은 어디로 유배됐는지. ("눈과 화살", 『은』, 276쪽)
이와 같이 제도적으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생각은 그 생각의 주인으로 하여금 ‘신생의 기억’으로부터 아득해지게 만든다. 그런데 윤대녕은 제도나 체제에 의한 개인의 소외라는 80년대식 성찰에서 그치지 않는다. 관심을 미시적으로 확산시켜 개인에 의한 개인의 상호 소외 내지 동반 파국을 조망한다. 피차 가면을 쓴 채 위장 친교를 나누다가 서로 진실을 고백하고 난 다음에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의 사내들은 다음과 같은 반성적인 담론을 이끌어낸다.
그런 눈에 보이는 거 말고, 무언가 우리를 구속하고 감시하고 지배하는 힘이 우리들 사이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마치 그물처럼 퍼져 우리들 사이에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또 우리가 그런 정체 모를 힘의 일부이거나 그 힘의 생산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가령 오늘 우리를 만나게 했던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은』, 252쪽)
독재나 파시즘 같은 눈에 보이는 거대 권력말고도 얼마든지 많은 미시 권력들이 개인들을 속박하고 있다는 성찰, 그리고 개인은 억압당하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억압을 생산하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반성적 인식은 주목에 값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도 사내에게 전화를 걸어 일방적인 약속을 하여 상대의 결혼기념일을 훼방하는 등 억압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 "눈과 화살"에서 거듭 되풀이된다. 화자는 “우리를 제도하는 힘이란 무엇일까. 아니 우리의 삶을 감시하는 눈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모든 자유와 행복이 어떤 조직적이고 거대한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박무현의 깨달음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라고 질문하면서, “우리는 차라리 나눠먹기식의 가증스런 행복을 누리며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은』, 282쪽)라며 회한에 젖어든다. 아울러 “혼자 부딪치기에는 우리가 묵인해온 가짜 욕망과 제도와 폭력의 힘이 너무나 거대하다는 것을 비로소”(『은』, 284쪽) 깨닫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여 사회적 시간에 작가는 크게 절망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절망과 고통이 이 작가로 하여금 역(逆)시간여행을 나서게 했을 것이다. 그 가역반응의 여로에서 “너와 내가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 사실은 서로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권력의 효과를 나는 거부한다”(『은』, 277쪽)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박무현이 수기에서 밝히고 있는 시원적인 것의 메타포는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것은 어떤 전사를 그린 그림이었다. 벌거벗은 원시인 하나가 마치 공룡처럼 괴기스럽게 생긴 짐승을 향해 활을 쏘고 있었다. 그림은 매우 선명했다. 담홍색과 먹색을 즐겨 쓴 색상마저. 투명한 석회질의 용해물질이 그 그림 위에 덮여 있어서였다. 언제 적 누가 남긴 그림인지 가늠키는 어려웠다. 그저 나는 랜턴 하나에 의지해 신생의 현현을 목격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차라리 괴괴한 원시의 힘이 식초산 냄새를 풍기며 내 몸을 적시고 있었다. 전사는 그렇게 완강한 힘을 끌어안은 채 동굴 내벽에 그처럼 영원히 각인돼 있었다. 산과 바다가 서로를 떠다미는 힘에 의해 경계선을 갖지 못했던 그때, 그는 서투른 힘 하나로 눈부시게 나부끼고 있었던 것이다. ("눈과 화살", 『은』, 278쪽)
박무현이 ‘신생의 현현’을 목격했다는 원시 벽화를 묘사한 대목이다. 원시적인 힘의 영원성에 매료된 모습이 역력하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하여 눈부시게 존재하는 그 원시적 힘에 대한 충격은, 그 인식의 주체로 하여금 현실 시간을 이탈하게 한다. 박무현이 현실 시간을 넘어 실종을 자행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사회적 시간으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되었던 존재가 그것을 넘어섰을 때, 당연하게도 그들은 새로운 시간 속으로 혼돈처럼 입사하게 된다. “어쩐지 지금까지 살아온 게 비현실적이고 지금 내 상태가 현실적인 것만 같”("그들과 헤어지는 깊은 겨울 밤", 『지』, 170쪽)다는 회의와 혼돈 속에서 새로운 시간 속으로 입사하고, 거기서 새로운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환각처럼 아주 색다른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현실의 3차원적 원근법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색다른 소실점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 현실과 비현실의 틈 혹은 샛길에서 작가 윤대녕은 나름의 신화적 지평을 펼쳐 보인다.
3. 신화적 시간과 자기동일성의 문제
반복이 되겠지만, 윤대녕 소설의 인물들은 “뿌리깊은 절망에의 집착”("눈과 화살", 『은』, 256쪽)을 보이는 “사막에서 사는 사람”("은어낚시통신", 『은』, 64쪽)이거나 “상처에 중독된 사람”("은어낚시통신", 『은』, 65쪽)들이다. 그들은 종종 “증거없는 현실”(『은』, 71쪽)에서 벗어나 “아득한 미지의 저쪽”("은어낚시통신", 『은』, 53쪽)을 향한 낭만적 동경으로 치닫는다. “우리는 어느 세계의 귀퉁이에 이렇게 힘겹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일까”("남쪽 계단을 보라", 『남』, 85쪽), 혹은 “정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삶의 사막에서, 존재의 외곽에서”("은어낚시통신", 『은』, 79쪽) 같은 질문이나 회의가 예의 낭만적 동경으로 질주하게 만든다. 게다가 시원적인 곳으로부터 너무 먼 곳까지 밀려난다면, 그 영원회귀의 길을 영영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심리가 그 질주를 가속화한다.
윤대녕 소설에서 영원회귀의 길은 존재의 구경적 비의를 탐색하는 도정이다. 그 탐색자는 시차(時差)의 시차(視差)를 감지할 수 있는 예외적 개인이다. 세계와 자아 사이의 균열 양상을 십 분이라는 시간차를 통해 조망하면서 새로운 시각차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바로 "남쪽 계단을 보라"이다.
……나는 피사의 사탑처럼 이미 중심 각도가 기울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때부터 나는 ‘세계’의 십 분 앞이거나 혹은 십 분 뒤인 곳에 있게 되었다고 하는 묘한 생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남들은 아홉시에 존재하고 있는데 나만이 아홉시 십분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는, 문제는 앞이거나 뒤가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에 시간차가 발생했다는 것일 터였다.
누가 나를 ‘세계’의 바깥에 슬쩍 밀어놓은 것일까. ("남쪽 계단을 보라", 『남』, 65쪽)
현실 사회에서 시간은 매우 폭력적으로 보일 정도로 균일하게 모든 개인들을 지배한다. 특히 산업 사회 이후의 시간이란 더욱 그러하다. 이런 근대 사회 이후의 사회적 시간은 영혼의 시계가 개인 차원에서 순수하게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킨다. 하고보니 자유롭게 작동되어야 할 개인들의 영혼의 시계는 저마다의 의식의 시간을 가리키지 못한 채, 공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에 종종 복속되고 만다. 그러므로 좀처럼 시차가 용납되지 않는 현실에서 시차가 발생했을 경우, 개인은 곤혹스러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동일성의 혼돈 혹은 상실로 결과될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도 그런 경우다. 하루에 세 번 겪게 되는 시차 때문에 온종일 허덕이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시차 문제를 작가는 일상적 곤란함의 차원에서 머물게 하지 않는다. 바로 존재론적인 차원의 질문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가령 지금 운행되고 있는 세계와 나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다는 거지. 누가 내 발목을 잡고 있거나 혹은 뒤에서 등을 마구 떠밀고 있다는 거지.”(『남』, 81쪽)라는 진단과 의문이 바로 그것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는 세계와 나 사이에 벌어진 시차(時差)의 틈을 새로운 시차(視差)로 응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이인 애인 세희와의 시계 맞추기를 통해서 현실적 시차로 인한 곤혹과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벌어진 틈을 통해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의식을 보인다. 탈난 사회적 현실 시간을 탈내며, 신화적 시간으로 점진적인 혹은 파격적인 입사를 감행하는 것이다. 상실한 자기동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원의 영원 상태로 회귀하고자 하는 그 입사와 탐색 과정은 때때로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이끌리는 일종의 들씌움의 상태에”("불귀", 『은』, 89쪽)서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좀처럼 트이질 않는다.
사람이 대자유의 존재라곤 하지만 한편으론 대허무, 대절망의 존재가 아니겠어요? 아마 그걸 깨닫는 순간의 상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럴 때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거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천천히 나를 벗으며 다시 길이 트이길 기다리곤 하죠. 며칠이고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면서 말이죠. 그러고 난 다음에도 좀체 길이 트이질 않는 상태라는 게 또 있어요.("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남』, 198쪽)
이곳에서 저곳으로, 역사적 현실에서 신화적 영원으로, 세속에서 신성으로 가는 길이란 실제로 얼마나 지난한가. 무작정 신의 비밀에 너무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적 표정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이 길의 곤혹스러움은 새롭게 시차(時差)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불귀"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슬픔을 가지고, 알몸이 되어 부둥켜안고 뭐라 속삭이는 순간에도 우리를 다르게 구분짓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뿐인가, 우리는 제각기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낯익은 타인들인 것이다.”(『은』, 109쪽) 같은 부분이 그 한 예가 된다 하겠거니와, 그러면 그럴수록 근원적 영원회귀에 대한 욕망은 심화되게 마련이다.
귀소하고 싶어요. 목숨을 걸고!
영원회귀? 좋지, 거기서 우리는 죽고 우리의 아들딸들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거야! ("은어", 『은』, 22쪽)
……현실적인 삶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는 살아지지 않으니까, 말하자면 지하에다 다른 삶의 부락을 하나 더 세운 거예요. 우리가 은어를 문장으로 한 것도 다른 뜻이 아녜요. 말하자면 우린 여기서 거듭나기 연습을 해요. ("은어낚시통신", 『은』, 74쪽)
이렇게 ‘목숨을 걸고’ ‘거듭나기 연습’을 하며 ‘영원회귀’를 열망한다. 열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슬러 올라가는 가열찬 은어떼의 물살에 의해 현실이 지워지고 새로운 현실의 무늬가 아로새겨질 수 있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은어"나 "은어낚시통신" 등의 단편에서 보이는 이같은 열망과 욕망은, 불교적 세계관을 기조로 한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에서 ‘휘황한 불꽃나무’ 이미지로 피어오르는가 하면,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에서는 ‘십우도’의 상징으로 상상의 길을 낸다. 장편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와 『추억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서, 그것은 자기동일성의 상실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라는 신화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갖추게 된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시간의 착종과 기억의 소거로 인한 ‘원초적인 카오스’를 경험하고 있는 인물이 기억을 회복하며 서서히 자기정체성을 발견해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소년 시절 유진과 희배와 함께 했던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그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주인공은 “나는 그때의 내 정체성을 회복하고 싶어. 거기서 나를 복원하고 싶은 거야.”(『옛』, 58쪽)는 열망을 혼돈처럼 지니고 있다. 예의 기억이 소실된 틈 속에서 자기동일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그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대기업 기획실 중견 간부에서 신문사 출판국 직원을 거쳐, 하청 번역가로 전락하는 삶을 살아간다. 기억의 틈, 자기동일성의 혼란이 왜소화된 개인의 초상을 만들어내는 까닭이다. 그러던 중 E의 다소 황당해 보이는 유도에 따라 기억을 회복하고 그 어린 시절의 시원으로 회귀하는 도중 그는 종종 ‘기시감’이라는 일종의 착시 현상에 시달린다.
슬몃 곁눈질로 보니 아닌게아니라 앞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옛』, 20쪽)
기시감…… 이라고 웅얼거리며 나는 뻐근해진 머리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옛』, 35쪽)
쇼팽네 가게의 여주인 최선주나 술집 산수유에서 얼핏 스쳐본 여인에게서 환각처럼 그 시절의 유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기시감을 비롯해서 이 소설에서 현실과 환상의 접합은 여러 군데서 중요한 소설적 형상화 원리로 작용한다. 그런 가운데 주인공은 기억의 복원을 통한 자기동일성의 발견이라는 일종의 성장의 테마를 구현해나간다. 다음은 회귀를 통해 신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돌올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대목이다.
나는 현실의 나를 보고 있다. 나. 그러나 내가 정말 나인가? 누가 과연 나를 나라고 불러줄 것인가. 기껏해야 이렇게 말하겠지. 넌 그냥 보이는 대로의 너일 뿐이야. 물론 그렇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껍데기인 나에 속해 있을 뿐이다. 나에 관한 어떤 비의(秘意)도 신성(神聖)도 간직하지 못한 채.
결론. 모든 존재의 비의와 신성은 과거로부터 온다. 그러니까 한시바삐 과거를 복원해야 한다. 매일매일 모래 위에 시간의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원회귀. 그래, 이를테면 나는 영원회귀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자리로 돌아가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국민학교 일학년부터. 좀 길고 지루하면 어때. 예전의 그 친근한 종족과 다시 산보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바둑도 두면 되잖아. 그 정도라면 이제 참을 수도 있다구.
그렇다. 영원회귀의 순간이라는 게 있어서 과거의 나와 해후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나를 통해 복원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 이 무한 순환의 궤도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용기를 내자. 인생은 용기있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물론 용기있게 대답도 해보는 거지. 까짓 것,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지금이 바로 그때야. 지금 이 순간 나에 관해서 오직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있는 거야. 내가 그동안 지어놓은 시간의 집이 헐리고 그 폐허 앞에 나는 문득 서 있는 거야. 원점회귀. 인생. 난 너를 어여쁜 여인처럼 사랑해. 그래. 인생이란 고뇌하는 어여쁜 여인이야. (『옛』, 240∼241쪽)
그런데 이 소설에서 시원 회귀는 무작정 탈현실적 신화의 지평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E와 나의 대화 부분에서 두드러지는 화두인 ‘거기에 있는 여기’와 ‘여기에 있는 거기’의 긴장 관계가 삶의 비의를 탐색하는 이 소설의 주제의식과 결부되면서 현실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는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거기’, 즉 ‘현실의 공간’에서 ‘현실인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것은 이전의 단편들과는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7)7) 주인공 나는 E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 “영원회귀. 하지만 거기 동일한 공간으론 주인이 돌아갈 수 없네. 왜냐면 자동차는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성질을 달리해서 서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돌아온 주인도 동일한 주인은 아니며 만약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동차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네. 말하자면 ‘거기에 있는 여기’에서는 동일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영원회귀의 순간은 ‘여기에 있는 거기’에서만 일어나고 있네. 여기 현실의 공간에서 말일세.”(265쪽) 바로 이 지점에서 즉자적 차원의 사회적 시간과 그 대자적 차원의 신화적 시간은 새로운 종합의 차원에서 신화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시간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영원히 동일한 신화의 시간이 현재화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여 그 자연스러움에 맡기되, 현실을 붙안고 신생의 의지를 지피고자 하는 것이다.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깊이 사색하며 살아가는 거다. (……) 살아가며 느끼기 마련인 견딜 수 없는 고통, 용서되지 않는 시간, 이 추운 겨울의 막막함, 혼자라는 두려움, 혹은 서툰 사랑 하나하나까지도, 이 모든 것을 뜨겁게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야지. (『옛』, 27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대녕의 의식은 또다시 ‘거기에 있는 여기’와 ‘여기에 있는 거기’ 사이의 시차에 시달리게 된다. 신생의 현현이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일까. 『추억의 아주 먼 곳』에서 다시 한번 기억의 혼돈 내지 자기동일성의 상실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진다. 두 살 때 죽은 언니의 이름과 나이와 생년월일을 덮어쓴 채 살고 있는 은화는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살아간다. 존재 속의 부재감, 혹은 불연속적 분열증 때문에 시달리던 그녀는 마침내 실종되고 만다. 이름과 나이와 생년월일이라는 자기를 지시하는 시니피앙과 실제 자기 몸과 영혼이라는 시니피에 사이의 근원적인 균열, 바로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동일성을 잃고 허둥대며 살고 있지 않은가요? 일치가 안 되는 자아 때문에 말예요. 일테면 어제와 오늘의 자아가 각기 다른 거예요. 불연속적이란 얘기죠. 그런 불연속성에 자꾸 빠지다 보면 점점 더 혼란스럽겠죠. 그러다가는 자아 분열 상태가 오고 그쯤 되면 누구나 떠날 생각을 한번쯤 해볼 거예요. 혼자 멀리 가게 되면 자기와 자기 주변이 투명하게 보이기도 하고 핀트가 안 맞았던 부분이 어쩌다 들어맞기도 하잖아요.” 일치되지 않는, 자아와 그것의 그림자. 나는 그 말도 가슴에 새겨넣었다. (『추』, 50쪽)
“존재 증명”(97쪽)에의 불안에 시달리기는 여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희극적인 결혼으로 어설픈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은화의 언니 문희도 그렇고, 대학 때 이복 오빠 형규에게 강간당한 유란도 자기동일성의 혼돈을 겪기는 한가지며, 주인공 동고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특히 은화의 실종을 의식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는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와는 달리 ‘거기에 있는 여기’를 새삼스레 추억하고 이끌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8)8) 결구의 다음과 같은 본문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 “그래, 때로 먼지 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낮달처럼 조용히 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제는 갈 수 없는 기억 저편에 혹은 추억 저편에. 그래 우리는 누구나 그 묵은 풍경으로부터 추억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간혹 그 안에서 들려오는 아득한 부름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갸우뚱갸우뚱, 그 먼 귓속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냐하면 아주 귀에 익은 사무친 소리이기 때문이다.”(『추』, 166∼167쪽)
윤대녕에게 있어 신화적 시간은 대화적이면서 응시적인 시간이다. 자기동일성을 상실한 채 현실의 사회적 시간을 절망 속에서 운명처럼 살아가던 존재자들이,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기 위하여 현재과 과거, 현실과 신화, 현상과 본질, 세속과 성소 사이를 대화적으로 오가며 긴장 속에서 삶의 비의를 탐색하는 역동적인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수동적인 시간일 수 없으며 역동적으로 열린 시간이다. 때때로 한 축으로 경사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윤대녕은 가능한 두 경사를 두 편의 장편을 통해 실험해보면서, 소설을 통해 궁극적인 삶의 비의를 묻는 방식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4. 타자 속으로, 혹은 시간의 그림자 가로지르기
윤대녕이 모색하는 영원회귀의 역시간여행의 여로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타자 속으로 스며드는 의식의 행로이다. 생의 비의란,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쉽게 찾아지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실제로 “가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갈 수 없”("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은』, 187쪽)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작가는 “나인 너를, 너인 나를 발견”("가족사진첩", 『남』, 184쪽)하려는 상상적인 노력을 펼쳐 보인다. 여기에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자기 안에 스며들었거나 분열된 타자와 교섭하기가 그 하나다. 이것은 다시 둘로 갈라지는데, 밖에서 자기 안으로 스며든 순수 타자와의 대화와 자기 안에서 분열된 타자와 대화적인 맞씨름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에서 보이는 “최근에 와서야 나는 E라는 존재가, 사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나를 지배하고 있던 또 하나의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내 마음의 배후.”(『옛』, 261쪽) 같은 대목이 앞의 예라면,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의 다음 부분이 뒤의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하나의 타자로 간주하고 매양 그것을 찾아다니느라 넋이 빠져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스테레오그램 같은 여자였고, 그녀 자신조차도 그 이면에 존재하는 제 모습을 보았다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란 건 하나의 타자일 거예요. 내 것이 아니란 말이죠.” (『은』, 179∼180쪽)
또다른 하나는 타자 속으로 스며들면서 타자와 교섭하는 가운데 자기동일성을 새롭게 발견해 나가거나 혹은 자기를 성장시켜나가는 경우이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에서 주인공이 쇼팽네 가게 여주인 최선주라는 타자와 교섭하는 과정을 비롯하여 윤대녕 소설에서 남녀관계나 성합장면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 이를 위해 기능한다.
타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타자와 교감하는 것에 심각한 고통이 뒤따를 수도 있다. 때때로 불안이 가중될 수도 있고, 불길한 그림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예컨대 그 불길함에 대해서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에서 술집 산수유에서 만난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 요즘 환각에 시달리고 있어요. 제 안에 낯선 존재가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어떤 그림자 같은 존재요. 제 의식이 전달되지 않는 그림자. 쉽게 말하면 몸과 마음에 역겨운 변화가 찾아온 거예요. 무서워요. 그 불길한 그림자의 정체를 모르겠는 거예요. (『옛』, 245쪽)
여기서 불길한 그림자는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현재의 기억을 뒤흔드는 과거 시간의 그림자라는 것과, 현재 의식을 뒤흔드는 무의식이란 그림자라는 것이 그 둘이다. 그런데 시간이 퇴적된 심층의 밑자리와 무의식의 밑자리는 어쩌면 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의 그림자일 것이다. 이 그림자는 하나지만 여러 차원에서 중층 결정되면서 심화된 의미를 도출해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간의 그림자 혹은 무의식을 소설적으로 언어화하고 사건화하려는 윤대녕의 상상적 책략이야말로 새로운 리얼리티의 출구를 예감케 하는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럴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오랫동안 의식의 속박 속에 억압되어 분출되지 못했던 무의식의 밑자리나, 리얼리즘의 규율에 시달려 형상을 얻지 못했던 삶의 비의에 대한 탐색 도정은 이제 우리 문학 지형도를 새롭게 황금분할하게 될지도 모른다. 윤대녕이 아마도 중요한 몫을 담당할 터이다.
무의식의 밑자리에서 또는 시간의 그림자를 가로지르며 윤대녕은 부단히 신생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에피퍼니를 구사하고 있다. 그 신생의 현현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공동묘지…… 하지만 신생을 꿈꾸는 공동묘지”("은어낚시통신", 『은』, 70쪽)에서 신생의 현현이란 실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다만 최근작에서 그 가능성의 일부를 작가 윤대녕이 보여주고 있어 다행스럽다. "천지간"에서 새로운 생명을 죽음의 그림자에서 건져내려고 공동의 노력을 보이는 것이나 "상춘곡, 1996"에서 수선화 피는 장면에서 ‘틈’의 상징성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9)9) “…… 나도 한겹씩 한겹씩 마음이 털어내지는 걸까요? 그러면서 비로소 사물이 스며들 틈이 조금씩 생기는 걸까요? 아, 그렇습니다. 그날 내가 당신에게서 보았던 것은 바로 그 틈이 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나 아닌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 말이지요. 나는 당신의 그 벌어진 틈들 사이로 고운 빛이 소리 죽여 드나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춘곡, 1996", 『문』, 325쪽)
끝으로 시간의 그림자를 가로질러 무의식의 밑자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소설 언어를 작가 윤대녕이 더욱 가다듬고, 예외적인 개인의 무의식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혹은 인류의 집단무의식까지 담아낼 수 있을 때, 그가 꿈꾸는 신생의 기억은 비의를 띤 에피퍼니 형태로서 우리 소설의 신생을 알리게 될 것으로 본다.
(계간 문학동네 1996.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