稼亭先祖 遺訓: 我之子孫 百代至親 아지자손 백대지친(我之子孫 百代至親): 나의 자손들이여 백대가 지나도록 친하게 지내라! [Version 1: 나의 뿌리: 한산이(韓山李)씨29世 인재공(麟齋公)22世-광목공(光牧公)21世-안소공(安昭公)19世-직재공(直哉公)18世-회승지공(澮承旨公)15世-이사목공 (李思牧公)10世 후손] (1世) 시조 이윤경 (李允卿), 호장공. [조선식민사관 정립을 위한 공작으로 제작 날조한 묘지에 관련된 전설] "고려시대에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몹시 가난하여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며 근근히 살았다. 이윤경(李允卿)은 어느날 관가의 현감이 앉아있는 마루에 널빤지가 매년 조금씩 썩어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습기도 없는 집에 마룻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은 분명히 명당의 지기(地氣)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 이인간에게 자기가 죽으면 그곳에 몰래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유언에따라 어둠을 틈다 관가의 마룻방 밑으로 뻗쳐맺힌 혈장에다 그의 시신을 암장했다. 그 명당에 발복으로 이곡(李穀), 이색(李穡)과 같은 명인을냈다.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이 고려말 원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이곡(李穀)이 득세할 무렵 관가의 마루방밑에 그의 선조 이윤경(李允卿)이 암장된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의 법에는 관가영역은 금장지역으로 되어있어 이곡(李穀)은 처벌을 받아야 할 형편이었으나 그곳에 암장하고 그 명당의 효험으로 자신과 같은 인재가 나와 나라에 공헌하고 있는터라 임금은 선조의 무덤을 옮기는것보다 차라리 관가를 옮겨 달라는 이곡(李穀)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자 이곡(李穀)은 자비를 들여 관가를 옮겼다. 그것이 지금의 한산면사무소 자리라고 한다. 현재 옛 관가 자리에 잘모셔져 있는 이윤경(李允卿)의 묘 비석에는 (고려호장 이공지묘 高麗戶長 李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조선정신을 말살하고 한산이씨의 절개를 왜곡시키려던 조선사 편수회의 일본인 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금서룡, 1875년 ~ 1932년) 박사(조선식민사관기여학자로 친일사학자 이병도가 이마니시의 수사관보를 지냈다)가 1925년에 총독부제출한 한 고적답사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이 고려호장(高麗戶長)은 마을의 우두머리로 그 마을의 대지주의 역활을 하는 자리인데 매우 가난하여 근근히 살아간다는 가설 부터 잘못된 기술이다. 단군조선의 사실의 역사를 허구의 단군신화로 변조한 이마니시의 수법의 판박이라 하겠다. 이윤경(李允卿)의 묘소와 묘비 (2世) 1代孫 이인간 (李仁幹), 정조호장. 금석문 '경선사금구(景禪寺禁口)'에는 '고려국(高麗國) 용령(龍領) 대정(隊正) 이인간(李仁幹)이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나온다. 슬하에 장남 충진(忠進)과 차남 효진(孝進)을 두었다. (3世) 2代孫 이효진 (李孝進), 진사(進士) 봉헌대부 비서랑(奉憲大夫 秘書郞) , 2남중 차남. (4世) 3代孫 이창세 (李昌世),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判都判書), 2남중 차남. (5世) 4代孫 이자성 (李自成 ~1310년), 찬성공(贊成公)은 고려때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전북에서 정의대부 정읍감무(正議大夫 井邑監務)를 지내며 정읍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고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돌보니 그 덕성과 명성이 원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310년 고려 충선왕 때 젊은 나이로 작고 하여 원나라에서는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 秘書監承)으로 증직되고 고려조에서는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光政大夫 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었다. 부인 흥례이씨(興禮李氏)는 고려조에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 大夫人)으로, 원나라에서는 요양현군으로 추봉된 어질고 현명하신 분이었다. 찬성공이 작고 한 후 40년간 홀로 아들과 손자를 극진히 보살피고 잘 가르쳤다. 슬하에 세아들 배(培), 축(蓄), 곡(穀)을 두었다. 2남중 차남. (6世) 5代孫 이 곡 (李 穀, 1298년~1351년)은 고려 충숙왕 때 원(元)나라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원나라 한림 국사원검열(翰林 國史院檢閱)을 지냈고 충목왕 때 귀국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封)해졌다. 고려의 꽃다운 처녀들이 원나라로 끌려가는 참상을 보고 원제(元帝)에게 상소를 올려 공녀를 데려오는 일을 그만두게 한 의로운 문신이다.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편찬하고 고려왕의 실록 편찬도 도왔다. 그의 작품으로 문집 가정집이 있다. 주요작품은 차마설과 죽부인전이 있다. 부인 함창 김씨(咸昌 金氏), 이자성 (李自成)의 3남중 3남. 이곡이 여주에서 귀양살이 할 때의 이야기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동녀들을 마구 징발하여 갔기에 고려인들로부터 원성이 높았었는데 이곡이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여 동녀차출을 금지시켰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나라 관리들이 고려에 압력을 넣었고 압력을 못이긴 이곡은 어쩔 수 없이 원주 지내촌(지금의 북내면 가정리)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어느 여름 갑작스런 폭우에 금당천(金堂川)이 범람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금당천 한복판을 중심으로 여흥 쪽으로는 홍수가 넘쳐나고 강원도 쪽은 물이 얕아 낚시하기에 좋을 정도의 여울이 졌다. 이즈음 개성으로부터 하루를 사이에 두고 두 패의 군사들이 이곡을 찾아 여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먼저 내려온 군사들은 이곡을 억류하여 멀리 영해로 귀양지를 옮기게 하라는 명을 받고 오는 군사들이요, 뒤에 내려온 군사들은 귀양지를 옮기지 말고 석방하여 대궐로 모셔오라는 새로운 명을 받고 온 군사들이었다. 먼저 온 군사들은 홍수로 인해 금당천을 건너지 못하였고 하루 뒤에 도착한 군사들은 물이 빠진 금당천을 건너 이곡을 개성으로 모셔갔다. 이곡이 머물렀던 북내면 가정리(稼亭里)의 지명이 이곡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가정 이곡(李穀)의 묘소와 묘비 (서천 기산면 광암리) (7世) 6代孫(중시조 한산부원군, 0代) 이 색 (李 穡, 1328년~1396년 경상북도 영덕군출생)은 고려 말기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성리학을 조선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이제현의 제자이고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으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를 배출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외아들. [http://ko.wikipedia.org/wiki/이색] 중시조 목은 이색 (8世) 7代孫(목은2세,牧隱1代孫) 인재공(麟齋公) 이종학 (李鍾學, 1361년공민왕10~1392태조1, 진천 백원서원, 서천 문헌서원)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1374년(공민왕 23)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1388년 우대언(右代言)으로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기 전 조병육정신(助兵六丁神:군사를 陰助하는 6정신)에게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창왕 즉위 직후 성균시 관장,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 조선창업후 정도전(鄭道傳), 손흥종(孫興宗) 등이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살해.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있다. 부인 양성이씨(陽城李氏), 3남중 차남. 인재선생 년보고 인재유고 (9世) 8代孫(목은3세,牧隱2代孫) 광목공(光牧公) 이숙야 (李叔野 묘소: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월하능마을)는 인재공의 6남1녀중 장남이다. 부인 강화봉씨(江華奉氏), 광주목사(光州牧使, 정3품). 우암 송시열이 지은 [광주 목사공 휘 숙야묘표] 승정 횡예엄무년 (1862년)중춘에 은진 송시열 지음. "우리나라가 개국하고 나서 고려조의 대가댁 자손 중에 어질고 뛰어난 자를 뽑아 등용하니, 공이 문보에 적을 두지 않고 사헌부, 사간원을 차례로 거처광주 목사의 벼슬에 이르렀다. 부인은 봉씨이니, 합장 하였다. 지금 10대손인 안사 수언이 추모하여 묘석을 세웠으나 워낙 먼 조상이라 자세한 사적을 얻지 못하였다. 공은 본관이 한산이니 위로 가정, 목은, 인재 세분이 증조부, 조부, 부 이고 아래로 감사인 축, 참찬인 훈, 의정인 유청이 아들, 손자, 증손자이다. 그후로는 더욱 번창하여 명공, 현재가 이어 나왔으니 선조를 받들어 후손에게 물려준 공의 덕을 징험할수 있으리라. 공은 인재공의 유언에 따라 벼슬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선대의 업적을 이어받아 능히 왕자(王者)의 길을 빛냈을 것인데, 겨우 한 고을의 목사로 국한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화관을 출입함에 이미 명성을 아루어 더욱 빛남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한산이씨에 어진 사람이 많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아아! 여기에 있으나 저기에 있으나 언제나 기리는것은 진실로 공의 어짐이요, 나라가 망함에도 온전하여 간택에 나가서 관직에 있는 것은 성조의 충후함에더욱 느낌이 있으리라." (10世) 9代孫(목은4세,牧隱3代孫) 망월암공 (望越庵公) 이 축 (李 蓄, 1402년태종2년~1473성종4, 묘소: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은지) 자는 윤보(潤甫), 1417년, 16세에 계성전직 제수. 사선주부 거쳐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랑 및 정랑, 전농시소윤, 사헌부장령, 지사간원사, 판선공감사, 봉상시사,첨지중추부사 겸 지병조사, 이조참의. 1453년(단종1) 황해도 관찰사,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며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 해 9월에 벼슬을 사직하고 경기도 고양으로 낙향. 3년 후인 1456(세조4)년 6월 전 집현전 학자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운동 실패 (사육신의 난), 이 때 주동인물 6촌동생 휘 개 백옥헌공,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했던 6촌동생 휘 유기 도총진무공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그 가족들이 멸문의 화를 당함. 이 후로는 공은 벼슬에 완전 뜻을 버리고 고양에서 여생을 보냄. 고양에 낙향해 내려 왔을 때에 연못을 파고 숨어 산다는 뜻으로 은지라 명. 1473년(성종4)에 72세의 나이로 서거. 공의 후손들이 그 후 경기도 고양시 도내동에 주거하며 맥을 잇고 집성촌을 이룸. 공의 아드님 휘 훈 안소공, 손자 휘 유청 공편공, 증손자 휘 언호 감사공이 모두 크게 출세하는데, 안소공은 효령대군의 사위로서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고, 공편공은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감사공은 홍문관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전라감사에 이르렀다. 이후 축은 공주(公州) 동학사 숙모전(肅慕殿) 에 생육신(生六臣) 과 더불어 배향 되었다. 이숙야의 1남2녀중 외아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6장 B면【영인본】 6책 524면【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왕실(王室) / *어문학(語文學) (11世) 10代孫(목은5세,牧隱4代孫) 안소공(安昭公) 이 훈 (李 塤, 1429세종11~1481성종12, 은지 불천위 사당). 청백리, 문신. 초명은 서(墅). 자는 화백(和伯), 도옹(賭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위. 1439년(세종21) 11세나이로 관직에 나감. 정3품 제용감?군자감의 판사를 거쳐 판전농시사가 되고, 1460년 공조참의, 1462년 한성부윤?형조참의를 역임.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평대장이 되어 적의 진로을 차단. 1468년(세조14) 경기관찰사, 한성판윤 역임. 1471년(성종 2) 성종 즉위에 공이 크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에 책록되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하여졌다.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의정부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소(安昭)이다. 이축의 외아들 (12世) 11代孫(목은6세,牧隱5代孫) 공편공(恭編公) 이유청 (李惟淸, 1459세조5~1531중종26). 문신. 자는 직재(直哉).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표연말(表沿沫), 유숭조(柳崇祖) 등과 사유(師儒)로 선발되었다. 1491년 지평이 되고 1493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다시 지평으로 강등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집의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온건하게 처리하려다가 배척되어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연루되어 장(杖)100을 받고 직첩이 환수되었으며 관노(官奴)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1506년(중종 1) 사헌부집의로 복직되고, 정난공신(定難功臣)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대사헌 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1년 황해도 관찰사, 이어서 1513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151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는데, 1519년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을 몰아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워 우의정이 되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하여졌다. 1521년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공편(恭編)이다. 한산이문이 조선조에 배출한 상신 4인(14세-이산해 李山海 영의정 아성부원군, 21세-이사관 李思觀 좌의정 효정공, 23세-이경재 李景在 영의정 문간공)중 1명. 이훈의 2남3녀중 장남. 연산군때에 노비 까지 되었다가 중종 반정으로 회생되어 고급 관직에 올라 조선조 4대 명신 중의 한분으로 오른 공편공 이유청의 이야기는 홍명희의 임걱정이라는 소설 시작부에 나오는 중심 인물 이교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된 인물이다. (13世) 12代孫(목은7세,牧隱6代孫) 집의공(執義公)이언홍 (李彦洪, 1479成宗10己亥~1534明宗1丙午7월23일, 묘소: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은지) 자(字) 치천(穉川). 중종(中宗) 정축(丁丑)에 사마 관(官)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歷任)하고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종묘(宗廟) 서령(署令) 장체원(掌체院) 사의(司議), 충훈(忠勳) 경력(經歷) 첨정(僉正)등을 역임하고 청도(靑道)군수(郡守), 통훈대부 행(行) 예천군수 겸 안동진관 병마동첨절제사. 수(壽) 68세 증손(曾孫) 이덕수(李德洙)의 귀(貴)로 증(贈) 통훈대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이유청의 4남중 차남. (14世) 13代孫(목은8세,牧隱7代孫) 이 계 (李 ?, 묘소: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은지) 집의(執義)에 추증, 봉정대부(奉正大夫). 자(字) 계지(水+自之) 관(官) 어회장군 행(行) 충좌위(忠佐衛) 호군(護軍) 증손(曾孫) 이태연(李泰淵)의 귀(貴)로 증(贈) 통훈대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배(配) 숙인(淑人) 평산신씨(平山申氏) 부사(府使) 신윤형(申胤衡)의 여(女). 2남중 장남. 1-(15世) 14代孫(목은9세,牧隱8代孫) 이 회 (李 澮, 1528중종23년9월17일~1597선조30년12월6일,묘소: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은지) 충의 (忠義), 현감, 승정원 좌승지, 부인 전주이씨(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 梧里 이원익 李元翼의 누이), 이계의 5남중 장남. [회승지공(澮承旨公)] 2-(16世) 15代孫(목은10세,牧隱9代孫) 이덕기 또는 이덕소 (李德沂 또는 李德?), (1573선조계유년5월25일~1613계축년2월20일), 승정원 좌승지, 1등공신, 태인 현감(泰仁縣監), 부인 청주 한씨(淸州 韓氏), 단산 또는 단양이씨(丹山또는丹陽李氏), 이회의 외아들. 선조 179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윤9월 10일(정해) 1번째기사 [조응문·이빈·윤응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응문(趙應文)을 성균관 사성으로, 이빈(李?)을 성균관 직강으로, 윤응서(尹應瑞)를 도총부 경력으로, 이춘영(李春榮)을 도총부 도사로, 정원경(鄭元卿)을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로, 심관(沈關)을 사헌부 감찰로, 심종침(沈宗?)을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로, 이정신(李廷臣)을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박준(朴浚)을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이유홍(李惟弘)을 죽주 부사(竹州府使)로, 홍창세(洪昌世)를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이유의(李惟義)를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유명남(柳命男)을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이덕소 (李德?)를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권술(權述)을 월곶 첨사(月串僉使)로, 한여징(韓汝徵)을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로, 이자해(李自海)를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태백산사고본】 101책 179권 3장 A면【영인본】 24책 668면【분류】 *인사(人事) (계미보와 인재공파 족보 그리고 회승지공파 세보에는 이덕기 (李德沂)로 기록되어 있고 만가보와 이조실록 그리고 승정원일기에는 이덕소 (李德?)로 기록되어 있다.) 3-(17世) 16代孫(목은11세,牧隱10代孫) 이충연 (李沖淵), (1600선조경자년2월2일~1645을유년9월11일) 관직: 안성군수, 행금화현령(行金化縣令), 통훈대부(通訓大夫), 부인 여흥민씨, 파평윤씨(坡平尹氏), 이덕기 (李德沂)의 6남1녀중 차남. [[장손인 형 이중연(李重淵, 묘지: 은지첨산隱池砧山)이 자손이 없어 이충연(李沖淵)의 장남 흠직欽稷을 꾸어줌)]] 이중연(李重淵) 4-(18世) 17代孫(목은12세,牧隱11代孫) 이창직 (李昌稷), (인조계유癸酉1633년2월2일~1700경진11월15일) [생원진사시]효종(孝宗) 2년 (1651) 19세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65위, 사마시 장원, 자 우경(虞卿), 생년 계유(癸酉)1633, 합격연령 19, 경(京), 유학(幼學). 부인, 경주최씨(열녀) “한산이씨(韓山李氏) 이창직(李昌稙)의처다. 남편이 기이한 병에 걸리어 3년을 병석에 누우니 약을 쓰고 신에 빌어 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남편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자 그녀는 손가락을 세 번이나 찢는 등 살을 베인 것이 두 차례로 3일의 생명의 연장을 보았고 마침내 남편이 사망함으로 그녀도 따라서 죽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부가 이르기를 네가 죽으면 세 살난 젖먹이의 울음소리는 누가 차마 보겠는가 함으로 죽지를 못하고 그 아이를 키워 그 가문을 잇게한 열녀다.” 이충연 (李沖淵)의 6남1녀중 차남. [[이흠직(李欽稷, 묘지: 안성군 대문리 입봉하즉좌, 이중연李重淵이 자손이 없어 이충연(李沖淵)의 6남1녀중 장남 이흠직을 꾸어줌)]] 이흠직(李欽稷) 5-(19世) 18代孫(목은13세,牧隱12代孫) 이수해 (李秀楷), (1679숙종기미년4월2일~1756영조을유년2월21일) 자는 사범(士範), 正郞, 任實縣監, 통훈대부, 종2품 병마절도사. 부인 창원 황씨 (昌原 黃氏). 이창직 (李昌稷)의 3남중 3남. [[이수열(李秀烈, 묘지: 안성군 금광 사흥리 석암동, 이흠직李欽稷의 4남3녀중 차남)]] 이수열(李秀烈) 6-[1] (20世) 19代孫(목은14세,牧隱13代孫) 이사목 (李思牧), (1693숙종계유년11월17일~1775영조을미년10월5일, 묘지: 始興시흥 黔之山금지산) 자는 중술(仲述), 통덕랑(通德郞), 부호군(副護軍), 승지(承旨), 인동부사(仁同府使 1723), 오위장(五衛將 1724), 종2품 상주영장(尙州營將 1725), 부인 안동 권씨 (安東 權氏), 죽산 안씨 (竹山 安氏). 이수해 (李秀楷)의 3남1녀중 차남. [[이제상(李濟相, 묘지: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이수열李秀烈의 2남중 차남)]] 이제상(李濟相) 만가보 7-[2] (21世) 20代孫(목은15세,牧隱14代孫) 이규첨 (李奎瞻), (1741영조신유년~1802순조임술년7월14일, 묘지: 東道羅之亥坐) 자는 동보(東甫), 연산(連山)郡守, 부인 광산 김씨 (光山 金氏), 이사목 (李思牧)의 1남4녀중 외아들. 순조 4권, 2년(1802 임술 / 청 가경(嘉慶) 7년) 7월 20일(무자) 3번째기사, 충청 감사가 연산현의 백성이 본관을 칼로 찔러 죽인 일을 아뢰다. 충청 감사 조석중(曹錫中)이 연산현(連山縣)의 백성 전호길(全好吉)이 본관(本官) 이규첨(李奎瞻)을 칼로 찔러 죽이고 전호길도 또한 곧 바로 쓰러져 죽었으니 관아(官衙)에 있는 하속(下屬)들을 모두 붙잡아다 가두고 엄중하게 핵실(?實)할 일로써 아뢰었다.【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6장 B면【영인본】 47책 434면【분류】 *사법-치안(治安). 이규첨 후손이 없어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참고1) 이규욱(李奎稶)의 아들 이원재 (李原載)를 양자로 받음. [[이규동(李奎東, 묘지: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이제상李濟相의 외아들)]] 이규동(李奎東) 8-[3] (22世) 21代孫(목은16세,牧隱15代孫) 이원재 (李原載), (1793정조계축년2월3일~1850경술년3월25일, 묘지: 水原東北面石隅降基子坐) 문과(文科) 정언(正言) 절충장군 (折衝將軍), 부인 여흥 민씨 (驪興 閔氏) (묘지: 시흥소박산). 외아들 양자 [[이의재(李懿載, 묘지: 태봉하갑좌, 이규동李奎東의 2남중 차남)]] 이의재(李懿載) 9-[4] (23世) 22代孫(목은17세,牧隱16代孫) 이원효 또는 이필재 (李源孝 또는 李弼在, 1815년9월7일~1887년12월24일, 묘지: 水原茂台洞子坐) 문과(文科) 첨정 (僉正). 경주 정씨(慶州 鄭氏), 이원재의 외아들. * 후손이 없어 이윤경의 15代孫(목은10세,牧隱9代孫)으로 태인현감 이덕기(李德沂)의 장자 이중연 (李重淵)의 후손 [[이원기(李源基, 묘지: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산14-1, 이의재李懿載의 2남중 차남)]]의 5남3녀중 5남 이승태 (李承台)를 양자로 받아 대를 이었다. 이원기(李源基)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이원기 재실 10-[5] (24世) 23代孫(목은18세,牧隱17代孫) 이승태 (李承台, 묘지: 수원 동탄면 석우리, 1832년10월25일~1924년2월24일) 호는 오산(梧山), 고종(高宗) 24년(1887)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혜민원주사(惠民院主事,고종 39년 임인 1902년8월6일) 부인 여주 이씨 (驪州 李氏), 청주 한씨 (淸州 韓氏). 외아들 양자 [생부 이원기(李源基, 묘지: 안성군 원곡면 성은리 산14-1)]. [진사시]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784위(813/1055) 11-[6] (25世) 24代孫(목은19세,牧隱18代孫) 성우공(性祐公) 이명직(공문서상 식으로도 기제, 李命稙 혹은 李明稙 (공문서상 '이명식'으로도 기제한 이유는 공무원들이 한자 직稙자를 식植자로 잘못 인식하여 한글 토지대장에 식으로 기제된것임), 乙丑1865년1월11일~乙卯1915년9월7일, 수원 동탄면 석우리)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황해도 연안군수를 역임하고 1904년 종2품 내장원경에 임명되었고, 1907년에 종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崇政大夫 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되었다. 사회계몽가, 사상가이다. 자는 성우(性祐). 성명이 한산세보에는 이명직(李命稙)이다. 고종실록에 명직(命稙)의 함자중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쓴 것은 당시 궁궐에 드신후 고종 황제의 원래 이름이 목숨 명(命)자에 복복(福)자 였기에 임금의 함자를 피하여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표기하는 충신된 신하의 자세를 보인 것이다. 전임 내장원경이며 친러파의 괴수 이용익이 사리사욕으로 권력을 이용한 것과 비교되는 충신이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을 밉게 본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1915년 암살당한 독립지사였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9대 후손이다. 사상과 신념은 개화문물주의이다. 부인 전주 최씨 (全州 崔氏). 5남6녀중 장남. 형제분 충직(忠稙), 송직(松稙), 만직(晩稙-아들 舞珪), 성직(性稙), [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고조부 이명직(李命稙) 12-[7] (26世) 25代孫(목은20세,牧隱19代孫) 이철규 (李喆珪, 丁亥1887년11월22일~己未1919년10월6일, 수원 동탄면 석우리)는 대한제국 농공상부 금광국 기수(農商工部 金鑛局 技手)로서 해외 열강의 조선 잠식이 시작되던 그 혼란기에 조선의 금광등을 관리 하던 중책을 맡고 노심초사 하다가 1919년 고종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다 일제에 부친 이명직과 4년 사이로 참살당한 애국지사였다. 부인 영일 정씨 (迎日 鄭氏), 밀양 박씨 (密陽 朴氏). 3남중 장자. [애국지사 이철규, 그는 누구인가?] 금광국 기수 증조부 이철규 (李喆珪) 13-[8] (27世) 26代孫(목은21세,牧隱20代孫) 이성구 (李成求, 1908년9월18일~1981년11월23일, 화장)는 수원농림을 나온 후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滿洲國 農林局 米穀檢査官)을 지냈으며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한 독립지사였다. 부인 순창조씨(淳昌 趙氏, 1909년2월7일~1975년8월9일, 화장). 이철규의 2남중 장남. 참고: 나의 조부 이성구 (李成求) 좌로부터 조부 이성구 (李成求), 조모 조언례, 부친 방원 이성찬 14-[9] (28世) 27代孫(목은22세,牧隱21代孫) 이성찬 (李盛粲, 1927년12월5일~)은 6.25참전상이국가유공자, 경성원예학교를 나와 경무대 조경담당관과 초대 창경원 식물원장(初代 昌慶園 植物園長)과 전주농림학교에서 원예를 가르쳤으며 식물육종학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의 조교를 지냈다. 호는 방원(芳園)이다. 부인 전주이씨 (全州 李氏, 1932년6월10일~, 수필가), 외아들. [방원 이성찬 소평전] 좌로부터 방원 이성찬, 고병민, 지운 김철수, 최영전, 우장춘(중앙) 15-[10-1] (29世) 28代孫(목은23세,牧隱22代孫) 이태원 (李泰遠,음력 1955년 10월 29일~ )은 세계 최고의 안과병원인 유팬의 윌리스 아이 하스피탈에서 연구한 의학박사(醫學博士)이고 세계 최초로 안구적출없이 안구암시술을 집도한 안과전문의(眼科專門醫)이다. 1990년대초 한국에 최초로 라식기술을 도입하여 미국보다 먼저 선진의학기술을 한국인에게 제공했다. 호는 신제이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22대손이다. 도곡2동 타워팰리스 안의 타워팰리스클리닉 이태원안과의 원장이다. 대한 안과의사회 부회장, LYCOMM CEO, 강남 서초 안과의사회 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안과학), 대한 검안학회 초대회장, 대한 안과학회 전산정보위원장, 한국 원자력병원 (KCCH) 초대 안과과장, Wills Eye Hospital, on cology Service 교환교수, 대한민국 육군 군의관 대위 그리고 서울대학교 병원 안과전공의를 지냈다. 현재는 이태원안과 원장, 서울고등법원 조정위원,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대한 미용문신의학회 부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총동창회 상임이사 (운영위원), 미국안과학회 (AAO) Member, 미국백내장굴절수술학회 (ASCRS) Member, 대한안과의사회 라식/라섹 위원회 위원장이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의학박사, 산부인과전문의), 3남2녀중 장남. 16-[11-1-1] (30世) 29代孫(목은24세,牧隱23代孫) 이은수 (李垠洙, 1989년1월4일생) 이태원의 1남1녀중 외아들. 자는 동현(東鉉). 미국방성 근무. 16-[11-1-2] (30世) 29代孫(목은24세,牧隱23代孫) 이주현, 이태원의 1남1녀중 1녀. 15-[10-2] (29世) 28代孫(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창원 (李昌遠, 음력 1957년 10월 7일~ )은 대한민국의광고인으로 광고회사 대표이고 고려대에서 영화학박사 (映?學博士)과정을 수료했다. 호는 노제이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언어치료학박사, 대학교수), 3남2녀중 차남. 이창원 (李昌遠) 16-[11-2-1] (30世) 29代孫(목은24세,牧隱23代孫) 이두수 (李杜洙, 1988년1월6일생) 이창원의 2남중 장남. 자는 두열(杜烈). 연세대의대 졸. 암센터 수련의. 16-[11-2-2] (30世) 29代孫(목은24세,牧隱23代孫) 이연수 (李沇洙, 1989년8월9일생) 이창원의 2남중 차남. 미국노스웨스턴대학졸. 공군통역장교. 15-[10-3] (29世) 28代孫(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양원 (李良遠, 음력 1959년 5월 12일~ )은 대한민국의 경찰 총경(警察總警) 창영조씨(昌寧曺氏) 조기준의 부인이다. 슬하에 조명은과 조승현 1녀1남을 두었다. 3남2녀중 3째로 장녀. 15-[10-4] (29世) 28代孫(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상원 (李相遠, Samuel Sangwon Lee, 음력 1961년 6월 11일~ )은 대한민국의 5?18 민주화운동유공자, 수필가, 언론인, 사회계몽가, 사상가, 재미 농공학자, 수공학자, 수문학자, 환경공학자이다. 호는 인제(忍齊), 아호는 황장(黃薔)이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22대손이다. 사상과 신념은 자유민주주의이다. 한국잡지협회 부설 한국잡지연구소의 잡지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하여 환경공학박사가 되어 미국 국방성 수문조사관을 거쳐 미국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검사관(美國聯邦에너지規制委員會 檢査官)으로 미국관리로 근무하고 있다. 부인 안동김씨 (安東 金氏, 1963년8월21일~, 간호장교 대위전역), 3남2녀중 4째로 3남. [노란장미 이상원의 사는 이야기] 이상원 (李相遠, Samuel Sangwon Lee) 16-[11-4-1] (30世) 29代孫(목은24세,牧隱23代孫) 이경수 (李炅洙, 1989년생) 이상원의 외아들. 툴레인(Tulane University), 고려대국제학부졸. 15-[10-5] (29世) 28代孫(목은23세,牧隱22代孫) 이정현 (李定炫, 음력 1967년 10월 27일~ )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으로 영어학원 원장이다. 3남2녀중 5째로 차녀. http://blog.daum.net/enature/15851296 좌로부터 이상원 이태원 이창원 회승지공(澮承旨公)이사목공 (李思牧公)
+++ 이명직 (문신)
이명직(李命稙, 1865년 1월 11일~1915년 9월 7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독립지사, 사회계몽가, 사상가이다. 자는 성우(性祐)이다. 성명이 한산세보에는 이명직(李命稙), 고종실록에는 외직인 연안군수로 있을때는 이명직(李命稙), 내직 내장원경과 궁내부특진관에 있을때는 이명직(李明稙)이다. 고종실록에 명직(命稙)의 함자중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쓴 것은 당시 내직에 들어 고종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면서 고종 황제의 원래 이름인 목숨 명(命)자에 복복(福)자 였기에 임금의 함자를 피하여 목숨 명(命)자를 밝을 명(明)자로 표기하는 충신된 신하의 자세를 보인 것이다. 1907년 고종퇴위를 막으려다 고종과 함께 축출되어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 칩거하며 젊은 지식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해외유학을 독려하다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장기간 유숙하던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 전임 내장원경이며 친러파의 대표적 관료 이용익이 사리사욕으로 권력을 이용한 것과 비교되는 충신이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8대손이다[1]. 사상과 신념은 개화문물주의이다. 약력간략정보
정의[편집]
내용[편집]본관은 한산(韓山). 승태(承台)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기 직전 조선의 마지막 진사시인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三等)으로 입격한 뒤 관직에 올라 1895년2월19일 탁지아문(度支衙門) 주사(主事)가 되었다[2]. 이후 황해도 연안군수를 역임하고[3] 1904년 10월 종2품 내장원경(內藏院卿)이 되었다. 1906년(고종 9년) 6월 협잡으로 경무청에 체포된 민원식이 조선 거리의 비위생적인 점을 지적하고 방역과 소독 활동, 도로 포장 등의 활동을 건의하자 내부 서기(內部 書記)로 천거하여 2달만에 위생과장이 되도록 하여 8월에 일본인, 독일인, 영국인 의사들을 초청하여 경성부의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무료 진료를 실시하고, 참석자에게 구충제를 나눠주는 보건, 위생을 홍보하는 위생환등회의 개최를 성사시켰다[4]. 1907년(광무 10년)에 종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崇政大夫 宮內府特進官)에 임명되었다. 1907년 고종퇴위를 막으려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되어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에 칩거하며 젊은 지식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해외유학을 독려하다 1915년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장기간 유숙하던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 사회 활동[편집]1907년 고종퇴위를 막으려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된 후에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돌머루(석우리)에 은거하며 노작 홍사용,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등 백조파의 문인들과 토월회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치며 세상의 문물 전파와 세상 격변을 갈파하였다[5]. 나라 망할 것을 예측하고 "똑똑한 자식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라"고 전국 방방곡곡의 식견 있는 인사들의 집안에 독려 전파하였다[6]. 외국의 신식 문물을 배워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생애[편집]출생과 가계이명직은 고종 2년인 1865년 1월 11일 조선 한성부 종로 계동 13번지에서 이승태(李承台)와 청주 한씨(淸州 韓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의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이색의 차남 인재공의 17대손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이명직(李命稙)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기 직전 조선의 마지막 진사시인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으로 입격한 후 탁지아문 주사로 관직에 들어 황해도 연안군수, 내장원경, 궁내부특진관등 고종황제의 측근에 있었다 [7]. 1887년 부인 전주 최씨(全州 崔氏)와의 사이에서 구한말 금광국 기수를 지내는 아들 이철규(李喆珪)를 생산 하였다 [8]. 생애[편집]1907년 고종퇴위를 막으려다 고종퇴위와 함께 축출된 후, 수원 동탄 돌머루(석우리)에 은거하며 노작 홍사용, 월탄 박종화, 빙허 현진건등 백조파의 문인들과 토월회 회원들에게 한학과 고전 학문을 가르치며 세상의 문물 전파와 세상 격변을 갈파하였다. 사발통문을 띄워 전국 방방곡곡의 식견 있는 인사들의 집안에 똑똑한 자식 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는 길이 나라를 찾는 길이라고 독려 전파하였다.[9] 한산이씨 세보에는 1865년 1월 11일에 출생하여 1915년 9월 7일에 사망하였다. 일제에 항거하는 계몽운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와 친일파는 1915년 일본인 암살자를 호랑이 사냥꾼으로 위장하여 사랑체에 장기간 유숙하게 하여 이명직을 독살하였다. 이어 4년뒤 고종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며 극열히 저항하던 금광국 기수를 지내던 아들 이철규(李喆珪)도 일제에 의해 참살당했다. 외국의 신식 문물을 배워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경기 기흥 신갈에 있던 이명직의 묘를 이장할 때 후손과 묘역 꾼 중의 모개비(우두머리)에 의하면 이명직의 신체는 구척장신이라 하였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고종 황제도 인정한 신언서판 명필 중의 명필이었다. 2014년 3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근대서화전’이 대전 유성구 봉명동 ‘성암미술관’에서 열려 이명직(李命稙) 대감의 다수의 서화작품이 전시되었다.[10] 가족 관계[편집]
관련 서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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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일보 중에서 ㅣ 기사입력 2014/11/19 [00:19]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고려 중엽에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냈다. 호장이란 12목(牧)의 향리(鄕吏) 중 당대(堂大)의 위계(位階)를 말한다. 호장의 직책은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고려 성종 때부터 시작된 이 제도는 지방의 명망가나 호족출신이 맡았던 것이어서 한산이씨의 선계는 한산지방에서 크게 세를 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장공계가 관향을 한산으로 삼게 된 것은 충혜왕조에 진사가 되고 이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종인 문정공 이 색이 대제학, 문하시중 등 요직에 오르고 한산부원군에 봉해진 데에 연유한다. 호장공계의 주요파는 문혜공파, 판중추공파, 광복공파, 진목공파, 총제공파, 양도공파, 직강공파, 순절공파, 공무공파, 문열공파, 감찰공파, 집의공파 등이다. 한산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지명이다. 오늘날에도 한산면은 한산이씨의 텃밭이다. 이 마을에는 시조 이윤경 그리고 이 곡, 목은 이 색의 묘소가 있으며 월남 이상재의 생가와 추모비도 보존되어 있다. 목은 이 색(1328~1396)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찬성사 이 곡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급제,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대사성이 되었으며 정몽주, 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했다. 이 때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목은은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이와 관련되어 금천,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한산백(韓山伯)에 봉하고 출사(出仕)를 종용했으나 끝내 고사했다. 다음 해인 1396년 여주의 신륵사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 사인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목은은 한산이씨의 중시조로 받들어지는 거인이다. 후손들은 목은 대부터 댓수를 헤아려 ‘목 은 몇 대손’이라고 말한다. 성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목은의 문하에서는 권 근, 김종직. 변계량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배출됐다. 목은의 출생지인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전통마을에서는 해마다‘목은문화재’가 열린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 개는 한산이씨 문중을 빛낸 인물이다. 목은의 증손인 그는 일찍부터 시문에 뛰어나 세종 18년 문과에 급제하고 뒤에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사형당한다. 화담 서경덕의 문하인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토정은 그가 마포 나루에‘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토정은 선조 11년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걸인청’이란 것을 만들어 관내의 거지들을 돌본 기인이다. 천문, 의약, 음양, 복술에 통달했으며 그가 남긴‘토정비결’은 지금도 널리 애용되는 예언서다. 월남 이상재(1850-1927)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24년 9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지방판 부록을 발행하고 조석간 6면 체제를 확립했다.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1927년 3월 죽은 뒤 최초의 사회장이 치러졌고, 한산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다. 현대 인물은 이훈구(성균관대총장), 이헌구(이화여대교수), 이현복(서울대언어학과교수), 이혜구(서울대교수), 이상복(서울대교수), 이웅직(서울대교수), 이돈구(서울대교수), 이홍석(서울대교수), 이성규(서울대교수), 이준구(서울대교수), 이순구(고려대교수), 이덕봉(고려대교수), 이태원(고려대교수), 이효구(서강대교수), 이정석(이화여대교수), 이확구(연세대교수), 이성복(성균관대교수), 이경구(성균관대교수), 이일규(대법원장), 이영복(판사), 이상원(판사), 이명구(충북지사), 이기원(국방대학원교수), 이덕상 (경희대교수), 이성규(약학박사, 이화여대약대학장), 이세규(의학박사, 조선대교수), 이영규(정치학박사, 단국대대학원장), 이일규(이학박사, 동국대교수), 이진구(이화여대교수), 이홍직(문학박사, 고려대교수), 이관직(대성특수고무 사장), 이대규(중앙제약 상무), 이돈구(산업은행감사), 이명직(신학박사, 목사), 이범구(서예가), 이복규(대한건설공제조합장), 이봉구(서울신문상무), 이봉재(변호사), 이상규(태창증권사장), 이서구(극작가), 이석구(강경상고교장), 이수직(신탁은행 상무), 이영복(대한화재보험전무), 이원직 (동익산업 사장), 이윤복(쌍용시멘트전무), 이인구(대한통운상무), 이재규(의학박사, 결핵협회장), 이중구(동구출판 사장), 이창복(육군준장), 이풍구 (변호사), 이남구(육군소장), 이남규(변호사), 이훈구(제헌의원), 이진복(체신부차관), 이태현(농진청장), 이건식(김제시장), 이한수(익산시장), 이우복(대우그룹부회장), 이선규(동성제약사장), 이수복(아시아중석회장), 이관직(대성고무사장), 이은복(한국생산성본부이사장), 이준원(풍림산업회장), 이영직(동서산업사장), 이관구(조선일보논설위원, 서울신문 사장), 이종복(중앙일보논설위원), 이혜복(KBS방송위원), 이긍규(기자협회장, 국회의원), 이인구(대종회이사장), 이현복(문학박사), 이남복(약학박사), 이정복(충남대교수), 이경구(농협도지부장), 이효원(농학박사), 이홍복(국가대표사이클선수), 이성구(국가대표농구선수), 이현구(장서가), 이명복(대한교육보험감사) 씨 등이다. (무순, 전·현직 구분 안 됨) 본관 한산(韓山)은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940년(고려 태조 23)에 한산으로 고쳤다. 1175년(명종 5) 감무(監務)를 두었고 홍산(鴻山)을 겸임하였고, 후에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한산군(韓山郡)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서천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한산면으로 남아 있다. 한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한산김씨(韓山金氏), 한산이씨(韓山李氏), 한산정씨(韓山程氏), 한산조씨(韓山趙氏), 한산한씨(韓山韓氏) 등이 있다.집성촌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 마양리, 충남 서천군 한산면 온동리, 충북 청원군 오창읍 주성리, 전북 군산시 성산면 도암리, 강원도 회양군 상북면 목곡리,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 이포리, 황해도 해주군 서변면 지동리, 황해도 서흥군 용평면 월탄리 등이다. 본관 지명이 있는 충남 서천군 일원에는 875가구 2,163명이 살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758명이 있다. 문과 200명, 무과 36명, 사마시 518명, 의과 2명, 음양과 2명이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한산이씨는 1985년에는 총 28,471가구 119,180명, 2000년에는 총 42,005가구 136,61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1만4천여 가구,1만7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38616명, 부산 2970명, 대구 2277명, 인천 6212명, 경기 18335명, 강원 3241명, 충북 6625명, 충남 27797명, 전북 5953명, 전남 2051명, 경북 3009명, 경남 1927명, 제주 161명이다.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가운데서 충남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37,116명, 부산 3,007명, 대구 2,658명, 인천 10,210명, 광주 1,188명, 대전 8,393명, 울산 1,024명, 경기 34,482명, 강원 3,310명, 충북 7,362명, 충남 16,338명, 전북 5,383명, 전남 1,190명, 경북 3,060명, 경남 1,668명, 제주 226명이다. 경기, 인천, 서울, 충남, 대전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정복규의 성씨순례] [요약정보]
[상세내용]본관 연혁한산(韓山)은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때에는 마산현(馬山縣), 우두성(牛頭城)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가림군(嘉林郡: 林泉)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한산으로 고쳤다. 1175년(명종 5) 감무(監務)를 두었고 홍산(鴻山)을 겸임하였고, 후에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한산군(韓山郡)이 되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한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충청남도 한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서천군에 병합되어 지금은 한산면으로 남아 있다. 성씨의 역사한산이씨(韓山李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한편 한산이씨의 중시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며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이다.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다. 그는 1320년(충숙왕 7)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는데 원의 벼슬로는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을, 고려에서는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호장공계(戶長公系): 주요 세거지강원도 회양군 상북면 목곡리 [참고문헌]《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帝系考〉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집필자]이재옥(李載玉)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인물들][한산이씨(韓山李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고려문과
고려사마
무과문과생원시음관음양과
의과
진사시[참고1]. 한산이씨세보(판중추공파) 한산이씨(韓山李氏) 중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의 족보이다. 판중추공파는 이색(李穡)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4남인 이맹진(李孟畛)을 파조(派祖)로 하는 파이다. 세보(世譜)의 작성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상정(李象靖:대산선생)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해준 고종(高宗)을 금상(今上)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고종 대에 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구보(舊譜)의 쪽수를 참고하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보를 기준으로 해서 작성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세보에 기록된 인물 중 특히 이상정과 이광정(李光靖)의 후손들에 대해서 자세히 적혀 있다. 이황 이후 영남 학파를 중흥시킨 이상정 선생 형제분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해서 작성되었다. +++ 참고: 『고종실록(高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상지즉조32년갑오식년사마방목(上之卽祚三十二年甲午式年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B13LB-40]) 조선문과방목 http://www.koreaa2z.com/munkwa/ |
출처: 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원문보기 글쓴이: 黃薔(李相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