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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간 |
목 적 지 |
세부 사항 |
12월 20일(토) 08:30 |
한성대역(삼선교역) |
5번출구 방향 에스컬레이터 터기전 작은 심터에서 모임 |
08:50 |
작은형제회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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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성북동 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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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
길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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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하늘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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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
동마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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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숙정문입구 안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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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
성북동 심우장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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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
점심식사 |
성북설렁탕 |
12:00 |
심우장으로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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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 |
심우장 도착 |
만해 한용운 만년 기거하시고 선종하신 곳 |
(오후일정) 심우장 - 성북동비둘기 - 북정마을 - 한양성곽(혜화문 - 와룡공원) - 감사원 - 북촌 석정우물 - 가회동본당(회합, 미사등등) - 저녁회식.
12:15 |
심우장 |
만해 한용운 거처 탐방 |
12:40 |
성북동 비둘기 |
성북동 일대 조망 |
13:00 |
북정마을 |
북정마을 탐방 |
13:30 |
한양성곽 |
성북동 성곽입구 |
14:30 |
한양성곽 |
성균관대 후문 |
15:00 |
계동 |
북촌마을, 석정우물 |
15:30 |
가회동본당 |
묵상과 역사물 탐방 |
18:00 |
사목위원회의실 |
지하2층. 천주교역사와 동영상관람. 미사참례 등등. |
작은형제들의 삶
작은 형제들의 삶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즉 가난하시고 가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서 프란치스코에게 거룩한 복음을 따르도록 계시하신 것처럼,
육의 정신을 버리고 영의 정신을 따라 복음을 살아가는 데 작은 형제회의 정신이 있다. 작은 형제 회는 이러한 복음적 삶에 뿌리를 둔 겸손하고 가난한 생활을 통해 온갖 악에서 자유로이 해방되어 기쁨과 단순성 안에서 살아가는 형제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작은 형제회의 삶의 특징은 어떤 특정 활동이나 사업에 치중하여 살아가기보다는 복음적 자유로움 안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유한 정신을 이어받아 형제들의 다양한 카리스마를 꽃피우는 "사랑의 형제 회"인 것이다.
작은형제들의 발자취
작은 형제 회(프란치스꼬회)는 1209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1182~1226)에 의해 창설되었다. 성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분방하고 야심 많은 청년기를 보내던 중 일련의 계시와 나환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도와 보속의 회개 생활을 시작하였다. 성인의 모범에 감명을 받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형제들의 수는 많아져 결국 공동생활의 필요성에 의하여 1209년(혹은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간단한 회칙을 구두로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1223년 회칙을 재 작성하여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대 칙서로 인준 받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날에도 프란치스칸 생활의 기초가 되고 있는 작은 형제들의 회칙이다.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할만큼 철저히 복음적 삶에 투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가난과 겸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기에 당시의 엄격하였던 여러 수도회들과는 달리 회의 명칭을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라고 하였다. 그리고 1211년에는 관상 수녀회로서 프란치스꼬 제2회인 "글라라회"를, 1221년에는 평신도들을 위해 제3회인 "재속 프란치스꼬회"를 세워 많은 형제 자매들이 대가족을 이루게 되였다. 또한 성인은 철저히 겸손의 길을 걸었으며. 1224년 라베르나 산에서 깊은 관상과 기도 끝에 오상(五傷)까지 받으신 성인의 신심은 많은 이들을 복음적 생활에로 이끌어 왔다. 지금까지 약 800여 년에 달하는 프란치스꼬회의 역사를 통해서 본회는 수많은 성인 성녀들을 모시게 되었다.
한편 한국 진출은 1937년 9월, 캐나다 관구 소속의 두 형제가 입국하여 대전시 목동(현재의 수련소)에 자리잡고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일제 치하의 고초와 6.25 동란으로 인하여 폐쇄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돌아와 파괴된 수도원을 재건하고 본격적인 한국에서의 프란치스칸 생활을 전개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 준 관구>로 승격되고. 1987년 12윌 10일, 한국 진출 50주년을 기념하여 이태리 로마 총본부로부터 "한국 순교 성인 관구"로 인가 받아 오늘날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작은 형제 회는 복음적 정신에 따라 교회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투신하여 이웃과 더불어 복음을 실천한다."
작은 형제들의 활동
전세계적으로는 현재 113관구 18,000여 명의 작은 형제들이 선교, 학문 연구 및 교육(학교), 자선(노인복지, 나환우 복지, 빈민식당 등), 본당사목, 특수사목, 기도의 집 등 수많은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으며, 특히 이스라엘의 성지 속 관 구를 중심으로 성지 보존과 수호를 작은 형제들이 맡고 있다. 한국의 작은 형제들의 활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160여 명의 형제들이 전국 다섯 개 본당(인천, 수원, 대전, 부산, 진주) 사목을 비롯하여 나환 우 요양원(산청 성심원), 2개소의 무료 노인 요양원, 2개소의 빈민식당, 기도의 집, 교육회관(피정, 세미나 등), 수도자 신학원 등에 투신하고 있으며, 순회공동체, 파출사목, 해외선교(이스라엘, 러시아, 카자흐스탄, 일본, 중국, 미얀마)및 영신 지도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전국적으로 51개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설립되어 작은 형제들의 영적 도움을 받아 평신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관상 수도회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활동 수도회라고 말하기도 조금 모호합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철처한 관상가였으니까요.
쉽게 말하면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는 반관상, 반활동 수도회라고 말하면 좋을 듯... 물론, 관상이 우선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관상 안에서 그 다음으로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처럼 '기도와 노동'의 삶이지요.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언제나 관상, 곧 그분과의 만남의 시간을 무척 중요시 하셨지요. 아마, '제 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울만큼 사셨던 성인의 생애 역시! 관상 안에서 비롯 되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 드립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활동 외에 현재는 청소년 사목과 함께 북한 선교, 그리고 해외 선교, 관상 수도원, 생태 공동체 등의 많은 활동이 시작 되어 지고 있습니다. '작은 형제 회(프란치스코회)' 어느 특정한 사도 직이 아닌 언제나 어느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목에 항상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작은형제회 수도회관련 홈페이지 켑처)
무소유로 그리고 학승(學僧)으로 유명하셨던 단아한 법정스님과 연관이 깊은 향기로운 사찰이 바로 길상사다. 그리고 김수환추기경님의 초대로 명동대성당에서 강론(법문)까지 해주셨던 스님이 법정스님이셨다. 어느날 어느 여인으로부터 1000억원대의 가치를 지닌 부동산을 시주하겠다는 청을 받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시고 만다. 그래도 자신의 뜻을 꺽지 않으며 재차 법정스님에게 시주를 권해 성사를 시킨다. 그 사람이 바로 김영한이란 여인이었다. 백석 시인을 사랑했던 여인은 시인과 가슴아픈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시주를 하면서 법정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길상화란 법명을 얻는다. 그리고 추후 죽은 후 본인의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 하여 그렇게 홀연하게 흙으로 돌아 갔다. 뒤이야기는 향기 나는 도량에서 들려 드릴 계획입니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줄줄이 우는 깊은 산골로가 마가리(오두막)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오후에 탐방할 곳은 심우장, 성북동 비둘기, 북정마을입니다.(13:30 - 15:00)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심우장 대문을 나서면 마주치는 작은 푯말 하나, 북정마을은 한양성곽 혜화문(일명 동소문)에서 숙정문으로 연결되는 성곽밖 안부에 있는 마을 이름입니다. 달동내로서 서울의 60-70년대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마을입니다. 연탄을 사용하고 언덕받이 텃밭을 일궈 서로 나누고 사는 인심이 살아 있고 아직도 인정이 가득한 마을입니다. 이곳도 재개발하여 사라질 운명이지만 뜻이 있는 현주민들이 보존하자는 연합체를 결성하여 투쟁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마을 한복판에 마을 사람들이 제출한 오래된 사진으로 미술관을 꾸몄으며 공동 화장실을 화려한 타일로 마감하여 화장실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이발소와 구멍가게는 지금도 동내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들 모습을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정마을 오르기 전 벽체에 동판으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새겨 놓았습니다. 난개발에 의하여 비들기 거처가 사라지는 것을 가슴 아퍼하는 시인의 고뇌가 느껴지는 곳 입니다. 이곳에 서서 저 아래를 보면서 시인의 마음을 잠시 헤아리는 시간은 긍정의 시간이 될 것이라 짐작합니다.
가회동성당에서 천주교 역사와 순교에 대한 나눔과 2014년 성지순례와 걸음여행, 동영상 관람과 미사참례가 있습니다.(16:00 - 18:30) 그리고 저녁식사 나눔도 있을 예정입니다.(18:30-19:30)
가회동성당이 위치한 북촌일대는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서 조선 땅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이다. 본당 관할구역은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펼쳤던 지역으로서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면서 명동본당의 공소였던 가회동 구역(광화문 네거리에서 동으로 종로3가, 권농동을 돌아 북으로 삼청동에 걸치는 북촌 19동)에 새로운 본당 설립의 계획이 세워진다. 당시 이 구역을 맡고 있던 임병팔(林秉八) 회장을 중심으로 우선 방 하나를 얻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체 모임을 갖다가, 현재의 본당 터에 살고 있던 전길헌(全吉憲, 마리아)이 1949년 4월 자신이 살고 있던 터 292.3평(목조와즙 및 양철집 85.5평과 목조초가 23.25평)을 증여하므로 해서 첫 본당 부지를 확보했다. 이어서 동년 6월에 명동 본당의 장금구(莊金龜, 요한금구) 주임신부를 모시고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교구의 결정에 따라 동년 9월 하순에 본당 설립을 보게 되었다. 당시 본당의 신자 수는 40여명으로 전 가족이 신자인 가정은 5세대이고 외짝교우 세대를 합쳐 30세대 정도에 불과하였다.
초대 본당신부로 임명된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거처가 없어 명동에서 통근을 하며 미사집전과 본당운영을 하였으며, 뒤이어 복자수도회의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가 주임신부를 겸임하던 중 한 달 만에 6.25사변이 발발하여 본당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성당으로 사용하였던 한옥은 전쟁 중에 인민일보 사옥으로 사용하였고 인민군이 철수한 다음에는 재사용이 불가능 할 정도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이 때 황해도 사리원에서 남하한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으며, 당시 보좌신부였던 백민관(테오도로)신부가 미8군을 통하여 주한미군민간원조단(AFAK)의 원조를 받아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연건평 134평의 3층 시멘트블록 건물의 성당을 준공하고 1954년 12월 3일 성프란치스코하비에르 본당주보성인 대축일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의 집전으로 축성미사를 봉헌하였다.
성당 신축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신자들은 이후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레지오, 복사단, 학생회를 설립해 나갔다. 1963년 제6대 김철규(金哲珪, 바르나바)신부는 국유지 26.4평을 추가 매입하여 본당 부지를 확장하였다. 제7대 조인환(曺仁煥,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66년에 사제관 신축을 발의하여 제8대 최익철(崔益喆, 베네딕도) 신부 재임기인 1968년 6월 8일에 철근콘크리트슬라브식 4층 건물(연건평 179평)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유치원을 개원하고,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에 본당 묘지(5만평)를 마련하였다. 제9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 재임기인 1970년에는 성당의 지붕을 교체하고 외벽에 화강암을 붙이는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으며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정식으로 수녀원 분원을 설치하였다.
이후 본당에서는 내실에 주력하여 신심 및 전교활동을 강화함과 아울러 신심활동 단체들을 확대시켜 나갔으며 제12대 임응승(林應承, 요한) 신부 재임 시에는 성모회가 조직되었고 청년회가 설립되었으며 1982년에는 성당 외벽 보강공사와 사제관 내부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제13대 김형식(金亨植,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84년에는 원아들이 감소하여 유치원을 폐쇄하였으며 사제관 내부 구조 변경공사를 완료한 후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회에서 분원을 설치하였다. 이후 재임기간 동안에 연령회, <정의의거울>꾸리아와 반석장학회가 설립되었다. 제14대 박순원(朴蕣遠, 이냐시오) 신부는 노인들의 여가선용과 신앙지도를 겸한 프로그램으로 한솔노인대학을 설립하였으며 홀로 오갈데 없는 노인들을 위해 골롬바의 집을 구입하여 양로사업을 시작하였다. 제15대 소원석(邵元碩, 가브리엘) 신부는 레지오를 재정비하였으며, 성당 진입로의 부지 29.25평을 매입하여 현재의 성당 부지를 확정하면서 매입한 터에 사무실/교육관(지하1층 포함 71평)의 신축을 착수하였다. 1999년 4월 제16대 이문주(李文柱,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여 사무실/교육관 건물을 준공하였고 11월에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신앙의 활성화 방안으로 성서백주간을 시작하였으며, 성목요회를 조직하여 매주 교우들 간의 사귐, 섬김, 나눔을 도모하기 위해 나눔의 잔치를 시작하였다. 제17대 최승정(崔昇晶, 베네딕도) 신부는 2006년 4월에 성당 전체 구조물의 안전을 우려하여 본당 건물의 정밀안전진단용역을 실시하였고 안전문제가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진동에 의한 붕괴의 위험으로 매일 2차례의 삼종 타종을 중단시켰고 성당 재건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2010년 2월 제18대 송차선(宋次善, 세례자요한) 신부는 성당의 안전문제로 인한 재건축의 소임을 받고 부임하였다. 신자들도 재건축을 위해 화합과 일치를 도모하며 한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봉헌하고 성경읽기운동을 전개하였다. 2013년 11월 21일 준공된 새 성전은 주문모 신부에 의해 첫 미사가 봉헌됨으로서 사도직 교회가 처음 시작된 사적지로서의 위상을 반영하고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선교본당의 역할에 부합하는 성전으로 부활한 것이다.
첫댓글 자세한 길안내와 계획 정보 감사 합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평화
네~~ 그날 뵙고 행복한 걸음을 나눔하겠습니다.
가회동성당에 몇시부터인지요.?
알려주십시요ᆞ 함께하겠습니다
선교모임 끝내고갑니다
가회동 성당 지하2층, 사목운영위원회의실에서 4시부터 일정을 하려고 합니다.
참석합니다. 이름이 없군요.
민트 올려 주세요.
올리겠습니다.
아름다운시로 새벽을 열었네요.
변경된일정 잘읽었습니다.^^
네~~ 변경 내용 잘 숙지하셔서 착오없이 그날 뵙겠습니다.
형제님의 필치에 저는 감히 따라갈 엄두를 낼 수 가 없으며
더하여 자세한 계획과 설명은 뭐라 할 여지가 없습니다.
함께 함에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2014년 마감을 형제님과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날 반가운 만남 가집시다.
형제님의 과찬의 말씀, 더욱 더 노력하라는 충고로 받습니다. 함께해 주시는 두 분께 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금년을 은총과 의지로 전부 말끔하게 정리하시고 새해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꾸벅
황 영진 세레자요한. 장인숙 안젤라,,,,,,,참석합니다
올렸습니다. 수고 참 많으십니다. 챙기시는데 선수! 총무님~~
선교 모임이 당겨져서 아침부터 만나게 됐습니다 ^_^ ^^
잘 되셨군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지순례, 걸음여행 형제, 자매님들의 염려와 자매님의 소원으로 해결된 것 같습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