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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8~13일까지 한일 교류회(한국의 정농회, 일본의 애농회)에 참석했습니다.
본 일정은 10~12일이지만 기간을 연장하여 별도로 일본의 여러 곳을 견학하였습니다.
8일에 김포공항을 출발하여(10:30) 나고야공항도착(12:20)했습니다.
이어 전세버스로 이동하여 기후현 다카야마(高山)의 아브라함의 집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첫날을 지냈습니다.
9일에 아브라함의 집에서 조식 후 산마치 지역, 카미산노마치(에도시절 상인들의 거리) 등을 관광하고 오후에는 시라카와고(세계문화유산) 견학하였습니다. 마침 비가 와서 매우 불편했습니다.
저녁에는 시라카와초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숙박을 했습니다.(白川町 귀농지원센터)
이날 저녁은 통역으로 수고하는 핫도리 미츠기(한국의 풀무전공부 졸업)의 부모님이 정성스럽게 만련 하였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 각자 소개를 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오래전에 한국에 나와서 정심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국에 방문했었고 전석호 목사의 집에도 갔다고 했습니다.
저가 깜작놀라 어떻게 일본인이 내 이름을 아는가? 내가 전석호라고 하자 자기도 놀라면서 반가하면서 우리 집에 왔을 때 찍은 사진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날 저녁 장시간 옛 추억을 더듬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다음날 아침(10일) 그의 마을과 집을 방문하고 본격적인 한일교류회를 위해서 나고야로 출발했습니다. 나고야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愛農유통센타 덴바쿠(天白)점 도착하여 매장을 살펴보고 愛農유통센터를 견학 후, 이케노(池野) 농장과 고바루햄 공장을 견학하였습니다. 이케노 농장과 고바루햄 공장은 오래전에 개인적으로 방문을 한 적이 있어 더 반가웠습니다.
저녁식사 후 교류회를 시작하고 기후현 에나시(岐阜縣惠那市)에서 숙박을 하였습니다.
11일 아침 식사 전에 함께모여 아침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 예배의 설교를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식사 후에는 나가노현 아치무라 (長野縣 阿智村)로 이동하여
민주개척단에 관한 강의을 들었습니다.(전문가·체험자·아치무라(阿智村) 면장)
점심은 도시락으로 대신하고 오후에도 계속 강의를 들었습니다.
일본인들도 만주개척단의 희생된 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조사하고 대처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과거정부의 잘못과 근래정부들의 안일한 대처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히루가미온천(昼神温泉)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12일 아침에도 함께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날은 일본측에서 설교을 했습니다.
이날 아침에는 오쿠다 미와꼬님(애농학교장 사모님)의 감명깊은 설교을 들었습니다.
이어 식사를 마치고 한일간의 교류회를 마치고 일본팀과 헤어졌습니다.
우리(한국)일행은 다시 나고야로 이동하여 윌 아이치 호텔에 여장을 푼 뒤 마지막 관광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행은 나고야 시내관광을 나갔지만 저만 따로 남아서 오래전서 부터 교류했던 일본인 야마자끼 마유미상을 만나기로 했습니다.(통역에는 박회진 사모님)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과거에 매년 한 번씩 만났었는데 지난 6년간은 한 번도 못 만났으니 그동안 밀린 이야기들로 수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우리는 나고야 시내로 옮겨 가장 유명하다는 닭고기 요리로 저녁을 대접받았습니다. 식사 후 통역관과 해어지고 단 둘이만 남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지리를 모른다고 전철을 타고 나를 호텔로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호텔입구에서 나는 다시 그를 전철역까지 배웅을 했습니다.
오고가는 동안 안되는 영어와 일본어로 대화를 주고받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다시금 영어와 일본어를 해야겠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3일에는 아침 조식후 전체일행이 모여 잠깐 회의를 하고 나고야 공항으로 출발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집의 목욕탕1
큰돌을 이용하여 구들을 만들었다.
아브라함집의 목욕탕2
아브라함집의 본관
산마치 지역
시라카와고(세계문화유산)1
시라카와고(세계문화유산)2
시라카와고(세계문화유산)3
귀농자 숙소에서 저녁 - 핫도리 미츠기(한국의 풀무전공부 졸업)와 아버지
순수목조주택(정부에서 지어준 귀농자숙소)
귀농자 숙소앞에서 한국팀 단체 촬영
미추키 아버지와 함께
특이하게 쌓은 표고목(삼각형으로 쌓으면 매우 많이 쌓을 수 있다)
무경운, 무비료, 무농약 당근 밭을 살펴보고 있다.
이케노 농장에서 그의 소비자 활동을 어떻게 하는지 설명을 듣고 있다.
고바르 햄 공장1
고바르 햄 공장2
아침 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이케노 농장에서 일본애농회원들과 함께
아치무라 평화 교류 세미나
만주개척단의 피해자 후카야 후지오상
야마자끼상에게 저녁식사를 대접받은 닭요리(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엄청 비싸다)
이 요리를 먹어보지 못하면 나고야의 명품을 먹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자세한 사진들은 사진방으로.......
1. 다카야마 아브라함의 집(오오고 목사)
성공회 목사였으며, 전통가옥을 인수하여 그대로 옮겨지은 아브라함의 집을 운영. 본인은 대목으로서 목공을 하며 지낸다. 오오고 목사는 아브라함의 집을 장만하기 위해 부고장을 보냈고, 찾아 온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죽을 것인데 그 때 줄 부의금을 지금 달라고 하여 지금의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살아서 조의금을 미리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집 뒤편에 있는 산책로는 참 아름답다. 48폭포라는 이름의 산책로는 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전망대에 오르면 일본의 알프스가 환하게 보인다. 비록 하룻밤이지만, 잊지 못할 깊고도 푸근한 교류를 하게 된다. 오오고 목사는 우리를 맞이하기 위하여 8,500엔 하는 숙식비용을 5,000엔으로 낮춰주었다.
2. 시라카와고
시라카와고 마을은 3원칙을 고수한다.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지만 연간 180만 명 이상이 이 오지마을을 찾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마을 시라카와고는 근처의 타테야마, 타카야마와 더불어 같이 방문하면 좋다. '팔지않고 세놓지 않고 훼손하지 않는다.’ 이 3개지를 고수하며 자기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시라카와고이다.
일본 기후현 북서부에 자리잡은 해발 500m에 형성된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이 마을의 자랑거리는 논과 밭 그리고 수로사이에 있는 '합장식 가옥'이다. 지붕의 구조는 부처에게 기도하는 손모양과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합장가옥(갓쇼즈구리)'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며, 이 지역에 흔히 볼 수 있는 억새풀과 목재를 활용한 건축물들로 독특하고 정감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1995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합장가옥들은 건축적 가치와 옛 마을을 그대로 보존한 농촌경관은 이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지켜낸 결과로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것이다. 일본이 고도 성장기를 맞이했던 1960~70년대 이 산골마을의 젊은이들은 전통산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나가기 시작하고 이 농가들도 빈집이 되면서 헐리기 시작했고 독특한 건축양식 때문에 그 모습그대로 다른 마을로 팔려나갔다. 가장 많았을 때는 1800채 이상의 합장가옥이 있었으며, 1925년대만 해도 300동에 달하던 합장가옥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113채가 남아있다.
그러던 시라카와고에 전통을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전통가옥을 보존하기시작하면서 1971년 주민들은 마을보존회를 만들어 근처의 오기마치마을과 함께 '시라카와고 오기마치 취락의 환경지키기협회'를 발족하고 전통마을보존을 위한 주민헌장을 제정했다. 이때 만들어진 주민헌장이 '팔지 말고 세놓지 말고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 일본정부의 행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된 것이다. 1998년 지방단체에서 3억엔을 출자해 '세계유산 시라카와고 합장조 보존재단'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전통가옥을 관리하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113동 가운데 전통 건축물로 지정된 것은 109동이며 대부분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 문화재이며 주민들의 거주지라는 특성상 마을보존은 주민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억새지붕을 개량할 때는 200명 가량이 필요하며 비용은 정부와 지방자체단체가 각각 65%와 25%를 부담하고 주민 부담은 10%이다. 화재에 취약한 가옥특성상 마을 상류에 600톤 용량의 저수조를 준비해두고 있으며 온갖 소방 설비를 갖추고 있다. 이 마을을 보존하는 데는 연간 5천만~7천만 엔 가량이 투입이 된다고 하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지금의 시라카와고를 만들어가고 보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3. 애농유통 센터
1983년, 池野雅道씨를 필두로 애농 생산자가 중심이 되어 설립된 식품 유통 회사. 창업이래 생산자가 운영의 중심을 담당하면서 저·무농약 재배의 안전한 농산물을 공동구입, 택배, 직매점 등의 유통 수단을 통해 판매해 왔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얼굴이 보이는 관계를 목표로 소비자의 농사 체험이나 농가와 소비자 교류 등의 프로그램도 하고 있다.
본사 아이치현 토요타시 히라하타 마치 히가시타 731번지
창립(설립) 쇼와 57년 4월 1일(1982년)
자본금 5,965만엔 / 주주 142명
대표이사 池野 雅道 (임원 6명 / 감사 위원 2명)
영업종목 유기농산물 및 무첨가 가공품 판매와 도매
연간 매출 8억 8,000만엔(2009년도)
종업원수 정사원 21명 / 파트 35명
4. NPO야하기가와 자급 마을(矢作川自給村) 이나호노사토・오바라마을(小原村)
야하기가와 지큐무라 이나호노 사토・오바라무라 농지관리센터
<NPO矢作川自給村 稲穂の里> 야하기가와 지큐무라 이나호노 사토
애농 유통센터에서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농사체험 이벤트를 실시하고 있지만 자급마을과 「일 년에 몇 차례의 농사일 체험만으로는 부족하다. 년간을 통해 쌀을 재배하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으면 한다」는 소비자의 요구에 응답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정식 NPO 법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2년이지만 9년전부터, 「워킹 홀리데이」라 칭하고 같은 활동을 해 왔다. 자급마을에서는 池野이케노씨가 농지나 기계류, 노하우를 제공, 도시에 살면서 벼농사를 하고 싶은 사람들을 받고 있다. 참가자는 주로 주말에 구 오하라 무라에 있는 논에 다니며 일년간 벼농사를 실천하고 있다. 회원의 자녀도 矢作川 에코 키즈 회원으로 활동에 참가. 연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는 여러가지 이벤트를 하는 것 외, 아이들 자신도「쥬니어의 논」이 할당되어 진흙 투성이가 되면서 벼농사를 체험하고 있다.
<오바라(小原) 농지 관리 센터>
오바라마을 주변에는 고령화에 의해 경작 방폐되는 논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고향의 농지와 농업을 지키기 위해 이케노씨는 2005년에「농업법인 오하라 농지 관리센터」를 설립. 경작할 수 없게 된 토지를 하청받아 지주를 대신하여 경작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위탁받은 3 헥타르 토지는 이케노씨에 가세해 2명의 스탭이 경작을 실시하는 것 외 그 중 1 헥타르는 야하기가와 자급 마을(矢作川 自給村)의 멤버에 의해 경작 되고 있다.
5. 산 속 햄 공방 고오바르
우찌무라 간조 정신에 의해 설립·운영되고 있는 야마가타현 독립 학원 출신 3쌍의 젊은이가 1980년에 시작한「아시아 생활농장 고오바르」가 전신. 처음에는 동료끼리 공동생활을 하며 양과 소를 기르며 생활 양식으로 시작한 것이 햄 만들기였다. 현재는, 창설 멤버 이시하라·마스모토 부부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식육가공은 심플하지만 엄선된 원재료 사용과 일체 첨가물은 사용하지 않는다. 돼지고기는 대표 이시하라 키요시씨의 아들이 사육한 것으로 식물성의 먹이만 사용 돼지의 건강 증진을 위해 EМ균을 첨가, 유전자조작 먹이는 사용하지 않는 등, 엄선 생산한 것을 사용. 닭고기는 애농관계 양계장으로부터 나온 폐계를 사용한다. 연간을 통해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도 이곳의 특징. 노동하며 체류하고 떠나는 젊은이도 많아 언제 방문해도 많은 사람이 모여 떠들썩하고 즐거운 분위기에 싸인 따뜻한 장소가 되고 있다.
11월 11일(목)
*** 아치무라 평화 교류 세미나 ***
<프로그램>
11:00~12:30 강연① 「만주 개척과 나가노현」
테라사와 히데후미씨(만주와 몽고 개척 평화기념관 사업준비회 사무국장)
12:30~13:30 점심・휴게시간
13:30~15:00 「만주 개척의 이야기」 체험자의 보고
체험담① 후카야 후지오상
체험담② 나가시마 치즈루상
15:15~16:45 강연②「평화와 지방자치」 오카니와 가즈오씨 (아치무라장)
◆ 「만주와 몽고 개척(만주 개척)」이란?
쇼와 초기, 일본은 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 건국된「만주국」에 20년간 500만명의 일본인을 이주시킨다는「만주개척이민 추진계획」을 수립 그에 근거하여 만주 땅에 전국에서 개척단이 이송되었습니다. 가장 많았던 곳이 나가노현으로 전국의 약 14%를 차지 2위의 야마가타현의 약 2. 6배에 해당되었습니다.
또한 나가노현의 실제 송출인수는 32, 992명으로 되어있다 (나가노현 개척자흥회 「나가노현 만주 개척사」에서)
1 위 나가노현 약 37, 800명
2 위 야마가타현 약 14, 200명
3 위 쿠마모토현 약 12, 700명
4 위 후쿠시마현 약 12, 700명
5 위 니이가타현 약 12, 700명
◆ 전국에서 가장 많은 개척단을 송출한 나가노현 남부의「이나다니 (伊那谷)」
당시 전국에서 약 27만명이 만주로 건너가 이주했으나 그 중 가장 많았던 곳이 나가노현이며 나가노현 중에서도 가장 많았던 곳이 이이다・시모이나(飯田・下伊那) 지방이었습니다. 이이이다・시모이나 지방 그 북쪽의 가미이나 (上伊那) 지방, 이를 포함하여「이나다니 (伊那谷)」로 통칭합니다.
【강연자 프로필】
○ 테라사와 히데후미씨(만주와 몽고 개척 평화기념관 사업준비회 사무국장)
1953년, 나가노현 출생. 나가노현 이이다 시내에서 부동산 감정사 사무소를 경영하는 한편 (회사) 중일 우호협회 전국본부 이사, 이이다 중일 우호협회 부이사, 만주와 몽고 개척 평화 기념관 준비회등으로 일중 우호활동, 만주와 몽고 개척 조사 연구 활동등 자원봉사로 종사.
○후카야 후지오상
쇼와5(1930) 년 1월, 下伊那郡(시모이나군) 마츠오무라에 6 형제중 5남으로서 태어나다. 쇼와 19년 3월, 고등과 졸업과 동시에 이바라키현의 우치바라 훈련소에 입소.
2개월 후 5월 20일 훈련소에서 직접 일본을 출발하여 구만주北安省(호크안쇼)
〈현 흑룡강성〉의「鉄麗(테츠레이) 의용대 훈련소」 입소 같은 해 9월에 三江省 湯原県「산코 의용대 훈련소」로 이동. 쇼와 20년 8월 소련 참전에 의한 교전으로 하얼삔에 피난했지만 소련군 포로가 되어 모란강 수용소에 들어가 쇼와 21(1946) 년 10월 무렵 일본의「하카타항」에 상륙하여 10월 19일에 고향의 마츠오에 귀국했다.
그 후, 건축 일에 45년간 종사 전우, 유족 지원 활동으로「젊은 개척자의 비」를 건립(오미야 신사 경내)하는 등, 의용군 체험자로서의 증언 활동에도 진력해 왔다. 현재 이다시 마츠오에 거주.
○나가시마 치즈루상
쇼와 7(1932) 년 5월, 시모이나군 야스오카무라의 나카지마 가문의 4녀로 태어나다. 쇼와 15(1940) 년 9월, 부모님과 함께 일가 10명이 구만주「삼강성〈현룡강성〉카센켄 타바론 泰阜村 분촌개척단」으로 이주.
쇼와 16년 4월 재 만주 국민학교(3년)로 전학, 쇼와 20년 4월 고등과로 진학하다. 종전 직전 쇼와 20(1945) 년 8월 아버지는 동원에 의해 출정(전후 복원) 했다. 쇼와 20(1945) 년 8월 패전. 약 1개월의 도피행을 계속, 동년 9 월초에 방정현(호세이켄)의 수용소에 이윽고 도착했다. 쇼와 21년 1월, 방정현의 중국인 일가에 의해 구출되어 그 후 쇼와 24년 1월에 중국인과 결혼. 혼자 만주에 잔류하여 7명의 아이가 태어나 개척 시대를 포함 45년간 중국에서 생활하다.
쇼와 49년, 55년 2회 일시 귀국하여, 쇼와 60(1985) 년 4월, 시모이나군 가미사토마치(현 이다시)에 자녀 둘을 데리고 53세에 영주 귀국〈남편은 다음 해 4월 중국에서 병사〉귀국후는 저널 상사 등에 13년간 근무 퇴직하다. 그 사이, 가족 전원을 초청 현재 이다시 카미사토 쿠로다에 거주.
○오카니와 가즈오씨 (岡庭一雄氏)(나가노현 시모이나군 아치무라장)
1942년 나가노현 출생. 1961년, 智村役場 사무소에 취직. 상공관광 과장, 건설과장, 환경수도 과장을 거쳐 1997년 12월 퇴직. 1998년, 아치무라 촌장으로 취임. 현재 4기째. 저서「협동으로 열어가는 마을의 미래」.
11월 12일(금)
【견학지 소개】
●昼神 (히루가미) 온천의 아침시장
미나미 신슈산만을 취급하며 매일아침 신선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나가노현의 토양은 비옥하며 강수량도 적고 밤낮의 기온차이가 많아 당도가 뛰어나고 단 과일이나 신선한 야채 재배에 적절한 지역이다.
>시간: 4월에서 10월6:00부터8:00 11월에서 3월6:30부터8:00
>장소:昼神온천관광 센터 앞에서 매일 개최
●馬籠宿숙소(마고메 숙소)
나카센도는 토카이도와 함께 에도와 쿄토를 연결하는 대동맥이었다. 토카이도에 비해 우회하며 멀기는 하나 토카이도는 오오이가와 여행수단이 차단되거나 쿠와나 이치노미야간의 뱃여행은 해상위험이 수반되는 것에 비해 나카센도의 여행에는 그러한 우려가 없었던 것에서 쿄토로부터 에도로 향하는 여인들은 거의 나카센도를 선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카센도도 결코 안전한 길만이 아니어서 특히 마고메숙소와 오치아이숙소 사이에 있는 10곡 고개(쥭교큐토게)는 험해서 여행자들간에는 木曽の桟(키소노 카케하시)는 위험한 곳으로 두려워 하고 있었다.
나카센도 69 숙소 가운데 木曾谷에는 11군데 숙소가 있고 마고메숙소는 이타바시를 첫번째로 하면 43번째가 된다. 에도에서의 거리는 83리(333 km) 남짓하다.
가도가 산기슭 뿌리에 따라 급사면을 달리며 그 양측으로 돌담을 쌓아 건물이 만들어 것에서부터「비탈이 있는 숙소」가 특징이다. 메이지 28년과 타이쇼 4년의 화재에 의해 낡은 옛 모습은 다다미같은 돌바닥과 枡形마스가타같은 옛골목길 외에는 모두 소실되었으나 그 후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妻籠宿츠마고쥬쿠와 함께 인기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