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설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
눅23:33-43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목사님이 가셨습니다. 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강사 숙소에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정성껏 시중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찬 것을 마시면 감기가 든다면서 콜라까지 보글보글 끌여다 주셨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경을 자주 보고 계셨는데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을 다 읽지 않고 사람 이름만 읽고 계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사람 이름만 읽으세요? 하니까
아이구 목사님!! 곧 하나님 앞에 갈텐데 성경은 다 읽어서 무엇합니까?
이 사람들이 다 천당에 있을 텐데 이름이나 외워 가야지 만나면 아는척 하지요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넘쳐 있었습니다
I. 도입 예화
뉴욕에 살고 있던 신부 한 분이 맨하탄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으슥한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 강도가 나타났습니다. "몸에 지닌 건 모두다 내놔!" 주머니를 뒤져봤더니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지갑도 두고 왔고, 시계도 차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필요하면 가져가십시오." 담배 한 갑을 내밀었습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도가 "신부님, 신부님은 사순절 기간에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나는 강도짓을 하지만 사순절 기간에는 술이나 담배를 먹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할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II. 본문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인 오늘 저는 여러분을 신비의 언덕 골고다 언덕으로 안내해 드리기 원합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에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소문인즉슨 예수와 흉악범 두 사람을 처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구경거리가 생겼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으로 밀려 왔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가운데 십자가를 세우고 좌우 편에 흉악한 강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여기 골고다 언덕은 오고 오는 세대의 인류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갈라지게 될 역사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편이든 우편이든 선택해야 하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 이것은 우연일 수 없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오래전에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두 행악자들 사이에 끼여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 좌우편의 두 사람은 온 인류를 상징하는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의 행악자가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가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분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걸 보니 적어도 이제는 메시야는 아닌가 보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의 아픔을 퍼붓고 있습니다. 조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짊어지고 마지막까지 몸부림하다가 죽어갑니다.
이 왼편의 강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그림자입니다. 조금만 인생의 어려움이 있으면 자학합니다. 저주를 퍼부어 댑니다. 이웃들을 향하여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걸핏하면 불평합니다.
오른편의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요.”
이 강도는 어떻게 주님을 그 어려운 순간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때문에 주님이 자기들과는 다른점을 발견합니다. 죄가 없이 고난당하고 계시는 구나.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서 빌 수 있었고, 이분만 믿으면 건짐 받을 수 있겠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분이야 말로 메시야구나 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메시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습니다. 여기 오른편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모든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III.십자가의 도
십자가는 멸망 받을자와 구원 얻을 자가 갈라지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분기점으로 구원자와 멸망자가 나누어집니다. 십자가는 분리의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영과 육이 나누어집니다. 하늘과 땅이 나누어집니다. 죄와 구원이 분리되어집니다. 의와 율법이, 옛사람과 새사람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세우고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고, 가라지와 알곡이 분리되어집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세우고 천당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구원과 심판이 나누어집니다. 형벌과 상급이 분리되어집니다. 기쁨과 슬픔이 나누어집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인류역사가 두 동강 났습니다. 예수님 이전(B.C), 예수님 이후(A.D)입니다. 금년을 예수님 이후 2004년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은 학벌로 갈라지는 곳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갈라지는 곳이 아닙니다. 미모로 갈라지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하면 멸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요, 십자가의 고난이 나 때문에 당한 고난이요,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임을 믿을 때 영생을 얻습니다.
히틀러 정권의 유태인 학살 집행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지내다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한 유태인이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물었을때 아이히만을 쳐다보는 순간 이 사람이 기절해 버렸습니다. 깨어난 사람에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습니까?"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장면을 한나 아렌트라는 역사학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악이 저토록 평범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망할 사람이 뿔을 달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갈 사람이 사주팔자 관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거절하면 멸망하는 것입니다.
IV. 천국에 누가 가나?
그러면 천국엔 누가 갑니까? 나 같은 죄인이 예수 믿고 가는 곳입니다. 회개한 죄인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지옥을 누가가나요?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405장의 찬송가사입니다. 이 찬송을 만든 사람은 "존 뉴턴" 목사님입니다. 40년동안 충성을 다하여 목회를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분이 목회를 하면서 평생토록 그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는 젊었을 적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 시장에 팔았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목회를 하면서도 '나처럼 끔찍한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 죄도 사함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울며 시를 썼는데 이것이 405장이 된 것입니다.
그가 82살이 되어 임종하는 순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세 번 놀라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전혀 생각밖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둘째,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셋째, 노예 상인이었던 끔찍한 존 뉴톤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 우편에서 죽어가던 두 강도의 얼굴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왼편의 강도 -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이빨을 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온 세상을 저주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얘기를 들었던 오른편 강도, 그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띠고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번 섬기던 교회에 홍 집사 두 자매가 교회를 나왔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잠자리에 들려는데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아버님이 임종을 하시려는데 빨리 오셔서 복음을 전해 주십시오." 다급하게 달려갔지요. 그런데 이미 의식이 없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진지하게 복음을 제시한 다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물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원하신다면 한번만 입을 열어서 예라고 대답해 주십시요." 입을 꽉 다물고 있습니다. "눈을 뜰 수 있습니까? 당신이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길 원하신다면 눈을 한번만 떴다 감아 주십시요." 그래도 눈을 꽉 감고 계십니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시길 원하신다면 당신의 자녀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손가락을 한번이라도 움직여 주십시요." 손가락이 꼼짝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규를 했습니다. "당신이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움직이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요. 발가락이라도 움직여 보십시요." 그랬더니 엄지발가락이 두번 까닥 까닥 움직였습니다. 두 자매와 온 가족이 박수를 치면서 "우리 아버님 예수를 영접했다구." 장례를 마치고 난 다음에도 입만 열면 "우리 목사님 복음 증거했더니 우리 아버지가 발가락 두번 움직이면서 예수님 영접했다구.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그러나 진작 전도할 일이지. 좀 진작 믿을 것이지. 마지막 숨을 거두며 의식이 없을 때 발가락 두번 까닥이고 돌아가실 게 뭐가 있습니까?
V.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오른편 강도를 보십시다.
마태복음 27장 44절과 마가복음 15장 32절에 보면 "두 강도가 함께 예수를 욕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에서 만큼은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원망했고 조롱했고, 한편 강도는 회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를 연구한 성서신학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처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강도들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는 양편 강도가 똑같이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우리야 내 죄 때문에 죽는다고 치자.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게 무력하게 죽을 그리스도가 어디 있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자기 손에 못을 박는 사람들, 조롱하는 사람들, 침 뱉은 사람들, 쓴 포도주를 입에 넣는 사람들, 예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나그네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용서하는 기도를 할 때에 오른편 강도는 회개를 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지금 회개를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습니까?
첫째,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회개의 첫걸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40절 말씀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그는 자신의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될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심판을 생각할 때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다른 친구 하나를 책망하면서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도, 최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교회에만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참으로 진실한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했습니다.
41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는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당연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 올 때마다 세상에서는 감출 수 있었고, 숨길 수 있었고, 속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앞에 설 때마다 감출 수도 덮을 수도, 덮을 수도 없어서, 숨길수도 속일 수도 없어서, 하나님 내가 범죄했나이다. 내가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사오니 주님을 찬송합니다. 여러분의 죄를 인정할 수 있을는지요. 주님 앞에 올 때마다 여러분의 죄를 고백하고 나올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그는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결백을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잎으로 시인했습니다.
41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지금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라진 예수님을 변호해야 된다면 누가 변호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12제자, 아니 적어도 베드로만은 앞을 가로막으며 이분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변호했어야 옳았을 것 아닙니까? 아니면 울고 있던 여인들과 마리아 어머니만이라도 내 아들은 죄가 없습니다. 고백하고 변호했어야 옳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십자가에 매달리는 한 강도가 모든 사람들이 조롱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들마저 비웃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관원들마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No. 아니요. 이 사람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 분이 하신 일 가운데 옳지 않은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분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만인간의 죄를 담당하실 구세주이십니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하고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너희들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인생의 고난의 현장에서 핍박의 현장에서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시인하고 인정하면 하나님 앞에서 나도 너를 인정하고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손해 볼 것 같아서 어려움 당할 것 같아서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나를 부인하면 인정하지 않으면 천군 천사들 앞에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서 나도 너를 부인 할 것이다. 나도 너를 인정할 수 없노라.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오른편 강도는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처절한 고통가운데서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인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넷째로 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42절 말씀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구원해 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살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동반자 하나가 있다는 것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이 숨을 거두실 때 함께 숨을 거둔 가련한 인생 하나가 당신 곁에 있었다는 것 기억해 주십시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놀라운 응답을 받습니다.
강조) 그 사람의 신앙의 진가를 알려면 위기 상황에 부딪혀 보면 압니다. 지금 오른편 강도는 극한의 상황에서 예수님께 신뢰를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한한 능력을 행하실 때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도시락 하나로 오천명이 먹고, 죽은 자가 살아날 때에 썩어 냄새가 나는 사람이 몸을 휘감고 있던 붕대를 거둬 치울 때에 당신은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메시야 입니다. 고백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때에 하나님다운 능력을 행할 때에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자기처럼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숨을 몰아쉬면서 안타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당신은 구세주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낙원이 주인이십니다. 이 고백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설교가 챨스 스펄전은 오른편강도의 고백에 대하여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기쁘게 받으신 예수님, 그는 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동반자가 되었고 천국에 함께 들어간 최초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것은 간단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른편 강도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십자가 주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면서 신앙인입네 하면서도 걸핏하면 신앙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비난하고 목회자를 비난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 입니까?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나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어떤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울고 따르던 여인들도 아니었고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가 최초의 천국 입성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요. 어쩌면 이땅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내 주변의 그 누구도 예수님을 신뢰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라면 분명 그의 사역은 실패한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헐떡거리고 있습니다.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신앙이 십자가의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래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놀라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VII.
우리는 모든 장소 모든 사건에서 골고다 언덕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왼편의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요 멸망의 십자가입니다. 오른편의 십자가는 영생의 십자가입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화) 제가 아는 김성배 집사님! 장군이 되고 축하파티가 열리던 날! 육군대장! 사령관이 장군진급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양주를 김성배집사님께 따라 주려하는 순간! 김집사님은 사령관에게
“대장님! 저는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그러자 대장은 김집사님에게 “예수믿나?”“예!” 자네야말로 예수를 진짜로 믿는 장군이구만!“하면서 오히려 인정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축하연의 분위기를 알고는 ”그럼 내가 콜라를 따라주지“하더랍니다. 예수 믿으려면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환경이 좋아도 나쁜 환경이어도 예수믿는 고백과 삶은 세상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죄를 선택하는 것은 왼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선택했다면 당신은 오른편에 선 것입니다. 당신이 불평하고 있다면 당신은 왼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이웃들을 향하여 감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오른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움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왼편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용서와 사랑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오른편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입술이 누군가를 저주하고 있다면 당신은 저주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누군가를 축복하고 있다면 당신은 축복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른편 강도, 그는 예수님을 만나 그 짤막한 시간을 최고, 최선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되새기는 사순절 기간 다른 것 다 잃어버려도 예수님을 사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어느 것을 선택해야 된다면 언제나 인생의 주사위를 예수님께 던지고 오른편에 던지고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최고의 기회로 삼지 않겠습니까? 오른편을 선택한 이 사람 하나님이 버리셨나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승리를 맛보리라. 네가 나와 함께 축복의 길을 걸어가리라. 네가 나와 함께 영광스런 낙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할렐루야. 이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