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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영축산(681.5m)
창녕 영축산(681.5m)'삶속의 산' 영축산은 태산(泰山)이자 동산이었다
사람과 문화가 있고 술과 정이 넘치는 영산 땅은 3월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람에 부딪히고 술과 정에 휘청거리는 3.1민속문화축제의 현장인 영산은 길손의 눈과 마음을 막 끌어당긴다.
시장 통 골목길을 돌아 길모퉁이에 다소곳이 서있는 영산향교의 작은 표지석은 영축산 산행의 들머리임을 알려준다. 왼쪽으로는 태자봉의 순한 봉우리가 마중한다. 어느새 길손은 묵직한 한옥과 두터운 흙 담벼락에서 스며나는 진한 녹차 향기를 맡는다.
녹차 향기 따라 길손이 들어선 온돌방에는 찻잔이 순배를 돌고 있다. 이 집의 주인장 차재현씨(50세)는 소꿉친구 이우택, 황용주씨와 벌써부터 동심으로 돌아가 있는 듯 했다. 여기 세 사람이 이번 '고향의 산' 취재를 위해 동행할 영축산 길잡이들이다. 그들은 영축산 기슭 영산 땅에서 태어나 오십 년 세월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토박이들이기도 하다.
향교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의 지명은 교리다. 교리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213호 영산향교와 경남 문화재자료 109호로 지정된 신씨(靈山辛氏) 고가를 비롯하여, 200여 년 자리를 지켜온 조선 사대부의 고옥들이 이 땅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영명사를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등산화 아래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저만치 앞서 내려앉은 자리에 지게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지게 주인들은 보이지 않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온다. '참말로 옛날에 지게 많이도 지고 다녔다' 면서, 마치 지게 앞을 지나던 이우택씨가 빙그레 웃으며 지게를 지고 작대기로 목발을 두드려본다.
그렇다. 그 시대 문화는 지게와 작대기였다. 아니 그것은 삶이었다. 생존을 위해 지게를 지고 산을 올라야 했고, 나뭇짐을 지고 하산했다. 그래서 그들은 초동 친구들이다. 그 시절 춥고 배고픔을 같이했던 친구들이기에, 아름다움을 알고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계속하여 그들의 추억은 말재죽 바위와 미끄럼틀 바위로 이어진다.
그 시대의 문화는 지게와 작대기였다
사명당 스님인지문호장 할아버지의 흔적인지 알 길은 없다. 말굽자국과 코를 풀고 엄지와 검지로 바위에 쓱 문질러 닦은 손가락 자국의 흔적이 선명한 작은 바위에서 그들은 또 추억을 줍는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작은 물길을 만나자 세 사람은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산행시작 30분쯤 되었고 등산로의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한다. 차재현씨가 등산로 왼편에 누워있는 화강암의 작은 바위를 가리키며 "이것이 여자 미끄럼바윕니다" 한다. 길손은 별 생각없이 "옛날 생각하면서 미끄럼 한번 타 보시죠?" 하며 카메라를 끄집어 내는데 세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잰걸음으로 올라가 버린다.
길손도 그들을 따라 부랴부랴 5분 정도 급하게 올라갔는데, 이미 도착한 세 사람은 제법 크고 경사진 바위 위에 올라앉아 웃고 있는 것이다. 거친 숨을 고르며 바위에 걸터앉는 길손에게 차씨가 말했다.
"여기가 남자 미끄럼바윕니다. 남자는 여기서 타야 되는데, 아래쪽 여자 바위에서 타면 고추가 떨어져 버리거든요." 그제야 생각났다. 그들이 고추달린 남자였다는 사실이...
계절은 늦겨울과 이른봄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 있으면 춥고 걸으면 땀이 난다. 등산로 양편에는 겨울의 한파를 이기고 봄을 재촉하는 마삭덩굴이 작고 싱싱한 이파리를 떨치고 있다. 마삭줄의 이파리는 높이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산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올라오면서, 이파리의 색깔은 푸름에서 갈색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붉은 색이다.
등산로가 갑자기 급해진다. 고개를 숙이고 50여m를 정신없이 올라서서 다리쉼을 하노라니 지나온 발치 아래 허물어진 석축이 보인다. 어느새 길손은 석축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허물어지긴 했어도 뚜렷한 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석축이 바로 영축산(영축산성)이다.
영축산성은 신라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가야가 축성한 것으로, 그후 임진왜란 때 수축하여 접전하였다고 전한다.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이 산성은 산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였으며 면적은 37,500여 평에 달한다. 영축산성에는 성문이 하나가 있는데 지금 우리가 올라온 길이 그 유일한 문이다. 그리하여 이 골짜기를 산성골이라 부른다.
산성 안 골짜기에 물길을 막아 놓은 몇 개의 보가 보인다. 지금은 퇴적물이 쌓여 막혀 버렸지만, 그 옛날 성을 축조할 당시에 만들어진 가뭄대비 비상식수확보용 보란다. 산성 안의 등산로는 부드러운 흙길이다. 겨우내 서릿발로 알었던 땅이 녹아 신발에 흙이 달라붙기는 하지만, 펄펄 날리는 먼짓길보다는 나은 듯 싶다. 골짜기가 끝나고 작은 산마루에 올라서니 동쪽으로 구계리가 살포시 내려다보인다.
남쪽으로 흐르는 산줄기 위에 나란히 누운 무덤 2기를 지나면 경사는 더욱 가팔라진다. 경사진 흙길을 단숨에 치고 오르면 사면을 횡단하는 완만한 등로가 산성의 북면 산줄기와 맞닿아 삼거리 길을 만든다. 영축산 상봉은 오른쪽이고 왼쪽으로는 632m봉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쪽의 632m봉으로 진입한다. 용이 승천하면서 흔든 꼬리에 맞아 쪼개졌다는 용난바우를 지나면 632m봉이다. 632m봉의 꼭대기는 넓은 반석으로 형성되어 있고, 서쪽에서 보이는 모양새는 마치 다슬기 껍질이 회전하는 원뿔의 형상이다.
날씨가 흐려 멀리까지는 시야가 트이지 않지만 이곳은 조망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봉우리다. 남쪽으로는 낙남정간의 불모산, 천주산, 무학산, 여항산의 줄기가 펼쳐지고, 서쪽에는 자굴산 넘어 하늘금으로 지리산이 보인다. 북쪽으로는 황매산과 가야산, 비슬산이 다가오고, 동쪽에는 낙동정맥의 연봉이 지척에 보인다.
동심의 산은 높이로 말하지 않는다
영산 시내에서 올려다 보이는 632m봉이야말로 영축산의 시작이자 끝이다. 아래서 올려본 동심의 영축산은 태산이기도 했었고 때로는 동산이기도 했다. 동심의 산은 높이로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향의 산은 마음으로 보고 가슴으로 오르는 산이다. 교가의 노래 가락 속에서 정기를 풍기는 영축산은 태산 같았고, 삶 속에 녹아 있는 영축산은 작은 동산인 것이다. 근대 알파니즘의 도입과 함께 이 땅의 산에 높이의 개념이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우리 고유의 정서 "삶 속의 산"은 깨어지고, 무한한 높이 추구와 행위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춘다.
국립지리원 발행 5만분의 1 지형도는 이곳이 오직 632m봉일뿐, 영축산의 상봉은 북동쪽 봉우리며 이름 또한 영취산(靈鷲山)으로 달리하고 있다. 영축산의 본래 이름은 수리뫼라 하였는데 불교의 전파와 함께 영축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자로 영취산(靈鷲山)이라 표기하나 부를 때는 영축산이라 해도 천축(天竺)의 축산(竺山)이란 뜻을 가지니 영축산이라 부름이 타당하다"고 창녕군 지명사는 적고 있다.
632m봉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상봉으로 향한다. 눈앞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는 하얀 화강암이 노출된 암릉이다. 그런데 사철 푸른 솔숲으로 뒤덮이는 영축산의 소나무들이 온통 상고대가 피어난 듯 하얗게 보인다. 몇 년 전 일어난 산불로 인하여 영축산 일대가 온통 새까만 재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운 좋은 몇 그루 소나무가 바위덩어리를 방패로 불길을 피해 살아 남았다.
등산로는 바위를 오르고 내리며 돌아간다. 난이도는 없지만 영축산 산행은 암벽등반도 포함한다. 슬랩도 오르고 침니도 통과한다. 두 개의 뾰족한 암봉을 횡단하여 잿마루로 내려서서 다시 바윗길을 오른다. 한참의 오름길이 끝난 후 숨을 돌리고 커다란 입석을 돌아서 오르니 상봉이다. 가장 높아 보이던 봉우리였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른 것이다. 상봉을 알리며 서있는 정상 표지석과 측량을 위해 설치해 둔 삼각점이 눈에 들어온다.
세 명의 친구들은 준비해간 간식으로 간단히 요기만 하고 일어선다. 상봉에서 북쪽으로 돌아선 작은 산마루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없는 노란 흙이 속살을 들어내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돌도 아니요 흙도 아니며 모래도 아니다. 흙보다 모래보다도 굵은 입자를 가진 이것을 마사토라 부른다. 마사토는 흙과 돌의 중간 입자로서 물 빠짐이 매우 좋다. 영축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마사토는 소나무와 어울려 양질의 송이버섯을 탄생시킨다. 따라서 이 일대의 산 주인들은 자연이 주는 송이버섯으로, 매년 톡톡한 재미를 보고있다. 반면 역설적이긴 하지만 영축산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산불이, 이 송이버섯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배제할 수 없다.
구계리가 봉황의 둥지에서 잠들다
왼쪽으로 저만큼 발치 아래 바위에 매달린 듯 구봉사가 내려다보이고, 꼬깔봉으로 이어지는 줄기는 동진하며 흐른다. 경사가 가파른 마사토의 등산로는 걸음 걷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다. 북풍이 이리저리 스러진 죽은 소나무가 길을 막고, 산딸기 덩굴이 자랑이를 잡아당긴다. 이곳에서 등산객들은 제각각 편안한 길을 찾아 움직인 흔적으로 온 사면은 마치 거미줄로 연결된 등산로처럼 보인다.
사면을 내려서니 오른쪽으로 구계리가 봉황의 둥지처럼 산자락에 안기어 단잠에 든 듯 고요하게 보인다. 커다란 바위가 길을 가로막는다. 그런 바위의 등위에 죽은 자를 그리워 추모하는 산자의 감언이 오석에 새겨져 있다. 안타깝게도 추모비의 짧은 글귀에서 발견된 몇 자의 오자가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가던 길손에게 그만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등산로는 뚜렷하게 만들어져 있다. 몇 시간 전 632m봉에서, 상봉을 지나 꼬깔봉까지 하얀 화강암 암봉으로 연결된 산줄기를 바라보던 게으른 눈이 "어이구 저기까지 어떻게 가나" 했고, 부지런한 발은 "열심히 걸으면 끝이 있다네" 라고 말하던 자아의 내면 갈등이 떠오른다.
꼬깔봉이 눈앞이다. 영축산 보덕암 골짜기 너덜 썰매길 위에, 한 짐의 나무를 싣고 달라는 그런 기쁨이랄까. 고통스런 통증이 한계점 아래로 서서히 해소될 때 느끼게 되는 그 같은 쾌감이 지금 막 온몸으로 전해진다. 바위 봉우리 하나를 돌아올라 인기척을 따라가니 더 오를 곳이 없는 꼬깔봉 꼭대기다.
마치 바위로 형성된 봉우리가 꼬깔같이 생겼다하여, 산 아랫동네 할아버지가 불렀고 아버지가 불렀던 그 꼬깔봉이었다. 그런데 객지에 나갔던 아들은 지도 한 장을 들고 와서 꼬깔봉을 병봉(屛峰)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국립지리원 발행 5만분의 1 지형도는 이 꼬깔봉을 병봉이라 적고 있는 것이다.
영축산이 길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양 하산하는 길에는 산불의 그을음도 발목을 휘감는 가시덩굴도 없다. 그야말로 오솔길이다. 키 큰 소나무 아래 황금빛 갈비를 밟는 부드럽고 사뿐한 발걸음은 금새 양산재에 닿았다.
*산행길잡이
송이가 지천인 조망 좋고 호젓한 산
영산향교~(30분)~영축산성~(30분)~632m봉~(1시간)~영축산~(1시간)~꼬깔봉~(20분)~임도
영축산은 남쪽으로 영산면, 북쪽으로 계성면을 경계하며 흐른다. 산행 들머리가 되는 영산면 교리에는 영산신씨 고가와 영산향교가 있다. 여기서 조선 시대의 묵직한 건축물을 눈요기하고 영명사를 지나 산성골의 한적한 등산로를 따르면 632m봉까지 1시간이면 오른다.
632m봉에서 상봉까지도 1시간이 걸리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중간에 바위를 올라야 하는 주의할 곳이 몇 곳 있다.
정상에서 꼬깔봉쪽으로 5분쯤 내려서면 왼편 계곡 아래 구봉사 암자가 보인다. 이곳으로 하산이 가능하다. 능선을 따라 500m쯤 가면 왼쪽에 청련암으로 연결되는 하산길이 있다. 이후 꼬깔봉까지는 1시간 정도면 도착하고, 임도까지는 길이 좋아 20분이면 충분하다.
영축산의 종주코스인 632m봉~상봉~꼬깔봉~임도 구간을 산행하려면, 자동차를 미리 임도에 대기시켜 놓든지, 두 팀으로 나눠 각 팀이 반대방향에서 출발하여 상봉에서 만나 자동차 열쇠를 교환하는 교차 산행법도 시도해 봄직하다. 만약 자동차를 타지 않고 임도를 걸어서 하산하면 북쪽의 옥천리나 남쪽의 구계리는 너무 지루한 길이 될 것이다.
*교통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부곡행 버스를 타고 영산에서 내리면 된다. 07:00부터 20:30까지 13회 운행, 요금은 4,700원. 마산 합성동터미널에서 부곡행 버스가 07:00~20:30까지 26회 운행, 요금 2,400원. 대구 서부터미널에서 부곡행 버스가 07:00~20:30까지 17회 다니며 요금은 3,600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도 부곡행 고속버스가 하루 4회(09:45, 14:45, 16:00, 17:05) 운행한다. 요금은 19,700원이다.
*주변 볼거리
영산은 영남최초로 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린 곳이다. 매년 3월1일~3일까지 열리는 문화축제에는 무형문화재 25호 쇠머리대기와 26호 영산줄다리기 발표회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행사가 치러진다.
산행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둘러볼 곳이 있다. 영산을 감싸며 흐르는 함박산 줄기의 좌청룡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세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연지못. 1780년에 조성되어 원다리라고 많이 알려진 만년교와 조선시대 음식보관창고로 사용되었던 석빙고가 그것이다. 영산은 면 단위의 좁은 지역이기 때문에 걸어서 한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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