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10월 3.800여 명의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수성군으로 2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하여
물리친 일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 진주성에서는 성 밖의 의병등 지원군과 연락하기 위해 혹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풍등을
올리기도 했으며. 남강에 등불을 띄우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풍등과 유등은 군사적인 신호와 전술로 쓰임은 물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도
쓰였던 것이다. 1593년 곧 진주대첩을 거둔 이듬해 6월에 진주성은 10만 왜군에 점령당했다.
현재까지 진주 사람들은 이 일을 계사순의癸巳殉義 로 기리고 있다. 계사순의 이후로는 당시
순절한 7만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유등을 띄웠다. 이 전통이 연연히 이어져 오늘의 유등축제로
자리잡은 것이다. 2010년 10월 1일 밤
출처: 나무를 찾아서 나를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청산 최태준
첫댓글 오늘날의 유등축제는 본래의 뜻과 조금 빗나간 느낌의 오락성이 많이 첨가된듯 하지만 그래도 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외지 사람들까지 오게 만든건 잘한것 같습니다 진주를 사랑합니다 국화와 햇살님 언제나 고맙습니다 안병남
남강물에 유등은 지금도 아롱지는데....<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세월은 가고 노래만 남는군요.
첫댓글 오늘날의 유등축제는 본래의 뜻과 조금 빗나간 느낌의 오락성이 많이 첨가된듯 하지만 그래도 많은 시민이 참여하여 외지 사람들까지 오게 만든건 잘한것 같습니다 진주를 사랑합니다 국화와 햇살님 언제나 고맙습니다 안병남
남강물에 유등은 지금도 아롱지는데....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세월은 가고 노래만 남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