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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신돌석
조선 시대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은 대부분 양반 출신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항상 위에서 시키는 사람은 양반 출신 벼슬아치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의병 중 곽재우 장군이 경상도 의령에서 이름을 떨쳤다면 의병장 신돌석은 경북 영덕에서 활동한 의병장이었다.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비록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었다.
신돌석은 7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동해안에 있는 영해에서 살았다.
신돌석은 1877년 당시의 영해, 즉 지금의 영덕에서에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동해 바닷가에 자리잡은 영덕 부근은 옛날부터 섬나라인 일본과 마주보고 있어 왜적의 노략질이 많았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여 당시의 영덕은 은 바다를 건너온 왜구들이 몰려와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가도 지켜줄만한 관군의 힘이 부족했다.
게다가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에 부임한 부사들이 백성을 괴롭혀도 호소 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영덕부근은 옛날부터 백성들의 불만이 많았다.
신돌석이 태어나기5 ,6년 전에는 부사의 착취와 괴롭힘에 참다못한 이 필제와 최시형이란 사람이 불만을 품은 일부 백성들과 함께 영해부를 습격하여 부사를 죽이고 창고를 털어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 준 적도 있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첫아들의 이름을 ‘돌석’이라고 지어 주었다.
돌석은 어려서부터 몸집이 크고 몸이 날쎄어 마을 아이들 중 우두머리 노릇을 하였다,
돌석은 30리가 넘는 먼 서당에 다녀와서도 늘 힘이 넘쳐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짓굿은 놀이를 많이 하였다.
어찌나 짓궂은 놀이를 많이 하였던지 마을 어른들은 ‘신돌석’ 이름만들어도 고개를 저었다.
어려서 짓궂은 장난을 많이 한 신돌석은 열 다섯 살쯤 되어 청소년기를 맞으면서 점점 딴사람으로 변해갔다.마을 아이들과의 시시한 장난에서 손을 떼고 좀 더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많은 사람을 두루 만나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때도 이즈음이었다.
“쯧쯧, 내가 아직까지 우물안 개구리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살았군! 나라가 이꼴인데 말야!”
돌석은 조선 땅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왜놈들의 속셈을 알고 크게 걱정하였다.
그렇지만 산골 청년의 힘으로는 마음 속으로 만 걱정 할뿐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돌석이 걱정하는 것처럼 나라의 운명은 점점 어두워 졌습니다.
1984년에는 , 동학 농민운동 소문과 함께 국모로 존경받던 민비가 일본 칼잡이에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구나!’
청년 돌석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자기도 무슨 일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였다.
이 즈음 돌석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조선을 삼키려는 왜적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였다.
“바로 그것이야!”
답답하던 돌석의 마음이 활짝 밝아졌습니다.
“나도 그 사람들처럼 의병을 일으키는 거야!”
돌석은 우선 자기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왜적과 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때 돌석의 나이는 19세로 1895년 봄이였다.
“왜군과 싸응는 것은 신나는 일아ㅣ지만 무엇을 가지고 싸우지? 저놈들은 조총을 비롯한 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돌석의 친구들이 걱정스럽게 물였다. 실은 돌석도 그게 걱정이였다.
“아직은 어쩔 수 없지. 칼이나 낫, 쇠스랑,이나 돌멩이로라도 싸워야지.”
신돌석이 굳센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돌석의 대담하고 굳센 표정에 친구들도 힘이 솟았다.
“그래, 해보자! 나라를 위한 일인데 죽음인들 두려울까?”
돌석은 소리 소문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
느닷없이 펼쳐진 기습에 일본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무슨일이야. 설마 동학군이 이곳까지 스며들진 않했을 텐데 말야. 그렇다고 남해 바다에 있는 이순신의 해군이나 곽재우 군대가 여기까지 올턱도 없었을 텐데.”
“그, 글쎄 올시다.”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한 공으로 신돌석은 영해군 의진의 중군장이란 직책을 맡게 되였다.
일본 군들도 자기들을 습격한 의병장이 영덕 출신 신돌석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뭐야, 신돌석? 어서 어서 그놈을 체포해!”
왜군들이 눈이 벌개져서 신돌석 체포에 나섰습니다.
자신의 신분이 들어난 신돌석은 고향에만 숨어있지 않고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니며 일본군들의 허점을 노렸습니다.
신돌석의 작전은 늘 바람처럼 빠르고 소리없는 그습 작전으로 이루어져 일본군을 크게 당혹시켰습니다.
험한 태백 산맥과 낙동강을 건너 문경에 나타나는 가 하면 금세 낙동강을 건너 경산 쪽으로 발을 돌립니다.
허름한 복장으로 위장한 돌석이 청도에 닿았을때입니다.
쥐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눈을 번쩍이던 돌석의 눈에 일본군들이 드어왔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돌석이 훔쳐보는 것도 모르고 일본군들은 부지런히 전선을 설치해 나갔습니다.
“이놈들이 감히 영해의 호랑이를 몰라보고!”
표범이 먹이를 해치우듯 돌석은 순식간에 일본군 다섯명을 해치웠습니다.
“수고 많이 했지만 전선이 통하기는 힘들걸!”
돌석은 순식간에 전선을 끊어버리고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허어, 또 돌석이란 놈에게 당했단 말이지? 멀리는 달아나지 못했으렸다.”
일본군들은 이웃고을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까지 지원받아 청도군 일대를 삿삿이 뒤졌습니다.
“독안에 든 쥐일께다! 이번 기회에 꼭 체포하라!”
그렇지만 신돌석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부산에서 나타나 일본군 배 한척을 침몰시킨 것입니다.
일본군들은 다시 한번 신돌석의 신출 귀몰한 핸동에 혀를 찼습니다.
“신돌석 놈이 어렸을 때부터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있었다더니 그런 소릴 들었을 법도 하군.”
마침내 신돌석에게 현상금이 붙였다.
안달이 난 일본군은 신돌석을 잡는 자에게 많은 현상금을 주겠다고 선전했습니다.
1905년, 우리 나라에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본에게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넘겨주는 을사 보호 조약체결 한 것입니다.
“을사 보호 조약은 무효다! 나라를 공짜로 일본에 넘겨주는 어리석은 일이다!”
잠시 숨어 다니던 신돌석은 자기 재산을 몽땅 팔아 군자금을 모으고 다시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300여명의 의병이 모아졌다.
“영해부에 있는 일본군을 기습 공격한다!”
신돌석 부대는 순식간에 영해부를 공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죽이고 수 많은 무기를 빼앗았다.
그러자 울진,청송, 영천 등 영해부 부근에 있는 일본군부대들에게 긴급 명렬이 떨어졌다
“영해부에 주둔한 우리 일본군이 신돌석의 공격을 받았다. 서둘러 군대를 모아 영해부에 있는 신돌석 부대를 토벌하라!”
명령을 받은 울진, 청송, 영천 등에 있던 일본 군들은 부랴부랴 신돌석 부대가 숨어있다는 영덕으로 포위망을 좁혀갔습니다.
이때 번개처럼 빠른 부대는 벌써 영덕을 빠져나와 울진으로 향하고 있였다.
“허허헛 얼빠진 녀석들 열심히 포위망을 좁하거라!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테니.”
신돌석은 일본군의 뒤통수를 후려치듯 울진 앞바다에 떠있던 왜군 군함들을 공격했다. 아무 준비도 없던 왜선 아홉 척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가라앉았다.
지형에 밝은 신돌석 부대의 번개같은 게릴라 작전에 부근의 왜군들은 손을 내저었다.
“한 줌도 안되는 신돌석 놈의 군대들에게 이렇게 당하고 만 있다니!”
“신돌석이란놈, 정말꿈에라도 만날까 두렵다!”
일본군들은 정말 ‘신돌석’이라는 말 만들어도 벌벌 떨게 되었다.
신돌석 부대 소문은 일본군뿐 아니라 부근 조선 백성들에게도 퍼져 나갔다.
“신돌석 장군은 축지법을 쓴다더라!”
“암 그럴 테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왜놈들과 싸우는 족족 이기기만 할까?”
“나도 기왕 의병이 되려면 ‘영양 호랑이 부대’라고 소문난 신돌석 부대로 가자.”
소문은 곧 신돌석 부대의 군대 수로 나타났다.
사방에서 지원자가 몰려들어 3천명을 헤아릴 정도로 늘어났다.
영양을 중심한 이웃 고을들의 일본군들이 차츰 무너져 갔다.
영양, 청송, 울진 등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신돌석은 포항을거쳐 경주에 까지 진출 했다.
경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들은 신식 총을 가지고 맹렬히 쏘아댔다.
“겁 먹지 마라! 경주에 있는 일본군들도 오합 지졸들이다!”
언제나처럼 신돌석은 경주 전투에서도 맨 앞에서 의병들들을 지휘했다.
“저 놈이다. 현상금 붙은 저놈이 신돌석이다.”
일본군들의 총탄이 신돌석 쪽에 집중되었다
“타탕, 탕!”
“탕탕!”
“엎드려라!”
소리 치며 신돌석도 몸을 숨겼다.
그런되 뒤늦게 날아온 총탄이 신돌석의 엄지 손가락에 맞았다.
“아차, 조금 늦게 피했었구나!”
신돌석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매며 다시 지휘에 나섰다.
“조금만 더 밀고 들어가자. 봐라, 일본놈들이 꽁무니를 빼고 있다!”
신돌석의 말대로 일본군들은 맥없이 무너졌다.
“그래, 소문난 대로 신돌석 부대 한테는 먼저 후퇴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야.”
경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부대도 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남긴 채 허둥지둥 달아났다.
신돌석 부대가 경상도 동해안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쓸어내고 있을 즈음 새로운 소식이 날아왔다.
조선 전국의 의병을 모아 새로운 진용을 짠다는 것이었다.
신돌석도 천 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의병들의 집합 장소인 양주로 향했다.
의병 총대장에는 경기도 여주 출신 의병장인 이인영이 뽑혔다. 이인영은 유생 출신으로 일찍이 대성전재임이란 벼슬을 하였고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원도 의병장 이은찬(李殷瓚) 등의 추대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이 되어 지평(砥平:경기 양평)․홍천(洪川)․춘천(春川) 등지에서 활약하고, 양주(楊州)에서 허위(許蔿)․이강년 등이 이끄는 각지 의병과 연합군을 조직, 13도창의총대장으로서 1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서울로 진격하기도 하였다. 관동 창의군은 이끈 이인영은 38회의 전투를 치르고,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다가 일본의 저항에 밀려 퇴각, 여주지방에서 패하였다. 그 후 시영(時榮)이라는 가명으로 충청북도 황간(黃澗)에 숨어 지내다가 일본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선출한 창의군 지도부는 각지에서 의병을 이끌고 온 의병장들에게도 각 부대를 이끌 의병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유독 신돌석에게 만은 의병장이란 칭호를 주지 않았다.
능력은 뛰어난 장수이지만 양반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였다.
신돌석은 크게 실망하여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렇지만 의병 활동을 멈출 수는 없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의병 활동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국내 상황은 나쁘게 만 전개되었다. 의병들의 군사 장비나 식량지원은 일본군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고 추운 겨울이 닥쳐오자 의병들의 사기도 차갑게 식어갔다.
신돌석도 의병 활동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신돌석은 잠시 몸을 피하려고 영덕에 있는 김상열을 찾아갔다.
김상열은 신돌석의 고종 사촌이며 신돌석 부대에서 의병 활동을 한 적도 있었다.
“아우님, 잠시 몸을 의탁하러 왔다네.”
“아이구 형님, 아 주 잘 오셨습니다.”
김상열은 신돌석을 반갑게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상열은 이미 돈에 눈이 멀어있었다.
신돌석에게 술을 잔뜩 먹여 잠재운 다음 도끼로 목을 잘라 일본군을 찾아갔다.
사나운 일본군들도 해치지 못했던 범같이 날래고 사나운 의병장 신돌석이 믿고 찾아간 고종 동생에게 허무하게 당한 것이었다.
이 의리 없는 김상열은 일본 군에게서도 칭찬 받지 못했다.
현상금은커녕 비웃음만 받고 쫒겨나왔다.
이야기를 마친 선생님의 눈에 가늘게 눈물이 번져 나왔다.
“야, 선생님이 울고 계셔.”
누군가가 속삭였다.
“김상열‘ 정말 너무 비겁하다.”
“맞다! 정말 옹짜증이야!”
아이들이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수근 거렸다.
“선생님, 선생님도 신돌석 장군이 너무 억울해서 섭섭하신 거죠? 엤날 사람들은 정말 무식해.”
좀 똑똑하다는 누군가가 화 난 듯 소리쳤다.
“잠시 조용하자!”
아이들을 한차례 둘러본 선생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이니 신돌석이 의병장이 못된 것을 이해 할 수도 있다. 또 당시 나라가 망했으니 누군가 의리없게 형이요 의병 대장인 신돌석 장군의 목을 베는 배신 행위를 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문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런 어리석은 짓이 계속되고 있다고요?”
“그래. 그 당시에 일본군과 싸웠던 모든 의병장들은 모두 독립 유공자 칭호도 받고 비석 한 개라도 세워져 있다. 그렇지만 신돌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석하난 세워져 있지않은 무명 장수로 우리 마음 속에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선생님은 정말 가슴아프다.”
6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도곡리에 있는 한말의 의병장 신돌석(申乭石:1878~1908)의 유적지.
소재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 528-1
시대 : 한말
규모 : 부지 약 1만 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