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낙봉공 제3자인 세구(世龜)의 가문이다. 세구(世龜)는 종친부 전첨을 지냈다. 세구(世龜)는 부윤 허광(許礦)의 사위이니 허광(許礦)은 양천허씨로 이름 있는 집안이다. 우의정 종(琮)의 아들이며 좌의정 침(琛)의 조카가 된다.
허종의 졸기를 인용한다.
“사신은 논한다. 허종(許琮)은 성품이 관후(寬厚) 간중(簡重)하고 자태와 의표가 빼어나고 위연(偉然)하였으며, 수염 또한 아름다워서 바라보는 자 누구나 그가 대인군자(大人君子)임을 알았다. 아무리 창졸간이라 해도 조급한 말이나 장황한 안색을 짓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여는 임금의 희로(喜怒)에 의해 끌려가지 않고 확고한 소신대로 하였다. 서적(書籍)을 널리 보았고 잡예(雜藝)에도 통하였으며,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평생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아 거처하는 곳이 좁고 누추한데도 태연하게 지냈다.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하여 장상(將相)으로서 물망이 중하여 그 한 몸이 국가의 경중에 연계되었는데, 북정(北征)의 거조를 당시의 논의가 애석해 하였다.”
허광의 아들들을 보면 맏아들 목사 순(淳)은 좌윤 심순경(沈順徑)의 사위가 되었는데 심순경은 영의정 심회(沈澮)의 손자이며 그의 증손이 선조조에 당쟁의 단초를 열었던 대사헌 심의겸(沈義謙)이다. 허광의 둘째 아들은 집의 정(淨)으로 삭녕최씨 가문의 판서 최수언(崔秀彦)의 사위가 되었는데 최수언은 세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의 손자이다. 허광의 셋째 아들은 준(濬)으로 하동정씨 가문의 별제 정승효(鄭承孝)의 사위가 되었는데 정승효는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의 손자이다.
허광에게는 고모가 여럿이 있었는데 모두가 훌륭한 집안으로 출가하였다. 허광의 고모부 신영석(申永錫)은 감찰이데 평산신씨 사간공파(思簡公派)로 명문이었다. 생가(生家)에서 성주이씨 감사 이발(李潑)의 외손자가 되는데 이발(李潑)은 고려말의 친원파(親元派) 정객으로 최고 권력자였던 문하시중 이인임(李仁任)의 조카가 되며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과는 종반간이다. 신영석의 후손은 평산신씨중 가장 번성한 문벌을 이루었는데 특히 현손인 대사성 신민일(申敏一)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 되었다.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한 신만(申晩)과 신회(申晦)는 신민일의 후손이다. 허광의 고모부 목사 박임종(朴林宗)은 좌의정 박은(朴訔)의 증손자로, 박임종(朴林宗)의 손자가 사인 박소(朴紹)인데 박소는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아 직계(職階)가 높이 올라가지는 못하였으나 인품과 덕망으로 한 시대의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며, 조선 후기에 전성기를 맞는 반남박씨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다. 박임종은 우리 낙남조(落南祖)이신 인의공(諱 潤善)의 후배위 장인 박승장(朴承長)과 대사간 소고 박승임(嘯皐 朴承任)에게는 재종조부가 된다. 허광의 고모부 홍임(洪任)의 아들은 판서 홍경림(洪景霖)과 찬성 홍경주(洪景舟)이며 허광의 고모부 강이행(姜利行)은 부사맹으로 봉화의 법전 춘양에 세거하는 강씨들은 모두 강이행의 후손들이다. 허광의 고모부 김성(金城)은 군수인데 안동김씨(先) 안렴사공파로 안렴사 김사렴(金士廉)의 후손이다. 김성(金城)의 가문에서 특기할 인물은 김성의 증손인 첨추 김진려(金進礪)로 김진려의 딸이 참판 김반(金槃)에게로 출가를 했는데, 김반(金槃)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아들로서 조선 후기에 좋은 문벌을 이루었던 사계(沙溪)의 후손은 모두가 김반의 후손들이다.
허광(許礦)의 처가를 보면 장인인 이혜(李譓)는 경주이씨 익재공파(益齋公派)로 현감이다. 이혜(李譓)는 참의 문환(文煥)의 아들로 백부인 참판 문형(文炯)에게 출계하였다. 그리고 조부는 감사 희(暿)로 희(暿)의 사위가 법흥에 세거하는 고성이씨들의 낙남조인 현감 이증(李增)이다. 고사를 보면 이증(李增)의 장인인 이희(李暿)가 경상감사를 지냈는데 안동을 순시하는 길에 병이 들어 영호루에서 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때 이증(李增)이 안동 땅을 방문하여 둘러보고는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안동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증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인 서원군(瑞原君)과 동서이다. 이희는 고려조의 문하시중으로 익재난고 역옹패설 등의 문학작품도 남긴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현손이다. 이혜(李譓)의 중부 이계반(李繼潘)은 좌의정 박은(朴訔)의 외손서인데 이계반의 손자가 판서 이사균(李思鈞)이다. 퇴계(退溪)의 형인 온계 이해(溫溪 李瀣)의 아들 이영(李寗)은 이사균의 손서가 된다. 그리고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외조모가 이사균의 딸인데 이런 관계를 따져보면 이항복의 모친은 이영의 부인에게는 고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혜(李譓)의 생가 질서(姪婿)에 김당(金瑭)이 있는데 김당은 경주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로 찬성인데 김당의 사위가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이며 심연원은 영의정 심회(沈澮)의 증손으로 후손은 청송심씨 문중에서 가장 화려한 문벌을 이루었다. 김당(金瑭)의 사위 윤회정(尹懷貞)은 파평윤씨 소정공파(昭靖公派)로 보계 상으로 명재 윤증(明齋 尹拯)의 큰집이 되는데 윤회정의 사위 신화국(申華國)은 아들이 신립(申砬) 장군이고 사위 구사맹(具思孟)은 인조의 외조부가 된다.
이혜(李譓)는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의 사위인데 김국광은 사계 김장생의 5대조가 되며 이혜의 존고모부인 기인걸(奇仁傑)은 고려말의 권신 기철(奇轍)의 아들이다.
김국광의 졸기를 본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국광(金國光)은 이간(吏幹)이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다. 세조조(世祖朝)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그 아비를 죽였다 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이루어지자, 세조가 놀라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 같은 일이 있는가?’ 하고, 김국광을 보내어 다시 국문하게 하였는데, 김국광이 그 옥사를 모두 뒤집으니, 최옥산은 마침내 죄를 면하게 되고, 추문(推問)하던 관리들이 모두 중죄(重罪)로 연좌(緣坐)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자못 임금에게 사랑받게 되었었다. 상정국관(詳定局官)이 되어서는 주대(奏對)하는 것이 임금의 뜻에 맞으니, 세조가 사리(事理)를 아는 것이 제일이라고 지목하였다. 몇 년이 되지 아니하여 판서(判書)에 발탁되고,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니, 총애(寵愛)를 받아 임명된 것이 견줄 데가 없었다. 오랫동안 무선(武選)을 관장하니, 문정(門庭)이 저자[市]와 같았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게 되었으며, 아우 김정광(金庭光)과 사위 이한(李垾)이 모두 장죄(贓罪)로 패몰(敗沒)하였다. 재상(宰相)이 되어 대간(臺諫)에게 두 번이나 논박(論駁)을 받았는데, 주상 또한 그 간악(奸惡)함을 알았다. 무릇 대신(大臣)으로서 졸하면 으레 특별한 부의(賻儀)가 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구례(舊例)를 써서 바치니, 명하여 정지시켰으며,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를 정(丁)으로 의정(議定)하자, 아들 김극유(金克忸)가 여러 번 글을 고칠 것을 논하였으나, 끝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여말의 행주기씨 가문은 기철(奇轍)이 그의 누이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자, 권력을 잡고 있었다. 기철의 가문을 보면 큰 아들인 인걸(仁傑)이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이제현의 손서가 되었고 작은 아들인 유걸(有傑)의 딸은 영해인으로 대사헌인 박경(朴經)의 부인이 되었으며 박경의 사위는 좌의정 허조(許稠)이다. 기철의 딸은 권중귀(權重貴)의 부인이 되었는데 권중귀는 정승 후(煦)의 아들이며 양촌 권근(陽村 權根)에게는 당숙이 되는데 왕실의 사성으로 왕중귀(王重貴)로도 불리었다. 권중귀의 아들 숙(肅)은 부윤으로 민중립(閔中立)의 사위가 되었는데 민중립은 한명회(韓明澮)의 처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