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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투르크 치하에서 독립을 쟁취해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해 가려던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병합된 채 유고슬라비즘을 부르짖던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의 대결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발칸 반도로부터 전 유럽 대륙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제 대세르비아주의는 그 한쪽에 카라조르지예비치 왕조를,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버팀대로 모든 세르비아 인이 살고 있는 생활권을 통일시키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앞에서 구체적으로 살펴 본 블랙 핸드의 활약이었다. 그리고 대세르비아주의의 가장 시급하고도 구체적인 목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병합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처음부터 그 종말까지 대세르비아주의와 유고슬라비즘이 구체적으로 처음 충돌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사면초가의 위급한 상황 속에서 나라를 버리고 코르푸 섬에 망명 정부를 세웠던 카라조르지예비치 왕가의 세르비아 정부는 유고슬라비즘과의 대결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유고슬라비즘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에서 망명한 명망가들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위원회(이하 유고 위원회로 약칭)라는 세력으로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이 위원회는 전쟁이 발발했던 1914년 11월 22일 이탈리아의 플로렌스(피렌체)에서 결성됐다. 전쟁 기간 동안 유고 위원회의 활동 무대는 런던이었다. 구성원의 대부분은 크로아티아에서 망명한 인사들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의 세르비아 인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테 트룸비치(Ante Trumbic), 프라노 수필로(Frano Supilo), 그리고 저명한 조각가인 이반 메스트로비치(Ivan Mestrovic)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고 위원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있던 발칸 북부 지방 인민의 권익을 연합국측에 대변하는 것을 그 첫 임무로 삼고 있었는데 그 기능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주로 해외에서 정보 기관의 자격으로서 모든 남슬라브 인(유고슬라비아 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시에 필요한 정치 활동도 아울러 수행한다.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복속되어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영토가 해방되었을 때 갖추어야 될 이 지역의 정치 조직 등에 관한 장래 계획을 세르비아 정부에 제출하는 기능을 한다.
3. 남북 아메리카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발칸 반도 출신의 슬라브 이민들로부터 정치 헌금을 받는 동시에 지원병을 뽑아 전투에 참가시킨다.
안테 트룸비치 프라노 수필로 이반 메스트로비치
물론 유고 위원회는 코르푸에 망명 중인 세르비아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아내지 못했다. 세르비아 정부가 유고 위원회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물론 위원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아래에 있던 각 슬라브 정당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때는 1915년 3월 미국의 시카고에서 열린 재미 유고슬라비아 이민 대표자 회의가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을 결정했을 때였다. 이 회의에는 모두 563 명의 대표가 모였으며 전쟁의 전개 방향과 관련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세르비아 망명 정부와 유고 위원회는 점차적으로 대결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크게 세 가지 이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차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남슬라브 민족의 영토 가운데 어느 부분이 해방되어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며 그 시기는 언제인가. 둘째, 과연 통일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셋째, 미래의 국가는 어떤 모습으로 조직되어야 할 것인가. 좀더 줄여 말한다면 영토 범위, 시기, 통일 방식, 그리고 통일 주체라는 네 가지 핵심 개념에 대한 견해차로 압축할 수 있다. 세르비아 인이 주체가 되어 점진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세르비아측의 입장이라면, 통일은 모든 슬라브 민족이 동등한 지분을 가진 상태에서 일시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견해가 유고슬라비즘의 기본 관점이었다.
세르비아의 저력 있는 정치가였던 파시치 총리는 공개적으로 19세기의 이탈리아나 독일의 통일을 예로 들면서 세르비아가 그 맹주국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서슴치 않고 강조했다. 세르비아는 일단 슬라브 제민족의 단일 국가 수립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은 대세르비아주의 그대로였다. 파시치의 머릿속에서 회전하고 있던 생각은 세르비아가 우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고, 그 다음에 몬테네그로와 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세르비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목을 맨 이유는 세르비아 필생의 소원이기도 한 꿈의 바다 아드리아 해로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유고 내전에서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투가 가장 치열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페타르 1세와 함께 한 파시치 수상
실제로 파시치 총리는 1915년 3월 연합군에 보낸 서신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세르비아의 야욕을 극명히 보여 주었다. 이때 연합국측은 파시치 총리에게 불가리아를 연합국 쪽으로 전향시키기 위해 과거 세르비아가 차지하고 있던 마케도니아의 상당 부분을 불가리아에게 주면 어떻겠느냐고 그 의중을 떠보았다. 파시치 총리는 답변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만 얻을 수 있다면 이를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마케도니아
이 같은 세르비아의 입장은 열강 중에서도 러시아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15년 러시아를 방문한 세르비아 대표단에게 러시아의 외무장관 사조노프(Sazonov)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크로아티아 인과 슬로베니아 인에 관해서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싸움을 걸었다. 만약 러시아 인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반나절이라도 싸워야 한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세르게이 사조노프- 러시아 외무장관
향후 통일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형태에 대해 유고 위원회측은 비록 카라조르지예비치 왕조 하에 있더라도 각 민족이 동등한 지분을 갖는 연방제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파시치는 세르비아가 기왕에 시행해 온 중앙 집중제가 바람직하다고 연방제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파시치의 생각은 720만에 달하는 세르비아 인이 모두 합쳐 350만에 불과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인의 명분을 위해 그 헤게모니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점진적인 대립 양상은 1916년의 이른바 러시아에 포로로 잡힌 오스트리아-헝가리 군 가운데 유고 출신 처리 문제를 놓고 마침내 본격적인 대결을 펼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징집되어 군복무 중이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인이 포로로 러시아에 억류된 수는 점점 늘어나 1916년 초에는 수천 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그나마 수용 시설의 미비와 기아, 추위로 수없이 죽어 가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세르비아 망명 정부는 이들의 인도를 공식 요구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포로들의 출신지나 민족에 상관없이 이들을 일괄적으로 세르비아에서 파견된 장교들에게 인계했다. 이처럼 민족의 출신 성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세르비아 군대에 편입한 것이 문제였다.
1916년 6월에는 이들 지원병이 4개 연대 1만 5천 명 규모로까지 늘어났다. 물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세르비아 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에서 파견된 장교들은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세르비아주의를 주입시켰으며 이 때문에 세르비아 인과 비세르비아 인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음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세르비아의 입장은 극히 약화되었다. 혁명 정부가 유고슬라비즘을 지원하는 외교정책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코너에 몰린 세르비아측은 울며 겨자먹기로 유고 위원회와 일정한 수준의 합의를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의 유화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원병 제도의 개선안은 1917년 4월 4일자 공식 문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 이 부대의 공식 명칭은 유고슬라비아 지원병 부대라고 한다.
2. 세르비아 인과 비세르비아 인 사이의 계급과 급료는 동등히 대우한다.
3. 모든 세르비아의 국기, 휘장 등은 유고슬라비아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바꾼다.
4. 민족 분규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크로아티아 인과 슬로베니아 인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예하 부대를 창설한다.
5. 이 부대는 세르비아 장교의 지휘 아래에 있지만 세르비아 군의 일부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독립된 유고슬라비아 혁명군으로 간주한다.
이와 함께 군의 복무 규율로 “모든 병사는 대세르비아주의나 대크로아티아주의 혹은 대슬로베니아주의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세르비아 정부는 여기에 하나의 단서를 달아 놓았다. 즉 세르비아 군부는 장교(비세르비아 계)들이 원하면 이들에게 세르비아 정부의 이름으로 세르비아 시민권을 부여하며, 군대 이름도 필요하다면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지원병 부대로 명명하겠다고 밝혔다. 세르비아측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통칭하는 유고슬라비아라는 용어가 있는데도 이를 피한 것은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유고 위원회에 대한 명백한 거부감의 표시였다. 세르비아의 공식 설명은 유고슬라비아라는 용어가 불가리아 인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수세에 몰린 세르비아측은 어느 정도 입장을 약화시켜 타협을 하긴 했지만 마지막에 달아 놓은 단서를 기화로 과거 블랙 핸드가 그랬듯이 세르비아화를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이 지원병 부대의 사령관은 세르비아 인인 미하일로 지브코비치 장군이 맡고 있었는데 그는 장교들에 대한 세르비아 시민권 부여 조항을 아예 내부 규율을 통해 강제적인 제도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등의 비세르비아 계열 장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초기에 세르비아 시민권을 거부한 149명의 비세르비아계 장교들은 아예 군을 떠나고 말았다.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약 두 달 만인 5월 말에는 장교와 사병을 포함하여 모두 12,735명의 군인들이 지원병 부대를 이탈했다. 초기에 약 3만 명에 달하던 병력이 2만여 명으로 줄어든 것이다.
지브코비치, 처음에는 블랙 핸드였으나 나중에 화이트 핸드의 멤버가 된다.
지브코비치 사령관은 이 같은 일련의 사태가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의 불순분자들의 선무 작업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이 직접 선동해 일어난 사태라고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세르비아 정부에 대한 비밀 보고서를 통해 이들 불순분자들의 목적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가 세르비아와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연방 공화국을 창설하려고 시도하는 책략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지원병 사태를 큰 줄거리로 세르비아 정부와 유고 위원회 간의 암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고 위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프라노 수필로는 1916년 6월 5일 세르비아 정부와 더 이상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 뒤 사임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반전에 돌입한 1917년이 되면서 세르비아 정부와 유고 위원회는 더 이상의 이런 진흙탕 속의 개싸움을 계속할 수 없었다. 급격한 국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쟁의 주전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힘이 달려 어떤 방법으로라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의 강력한 스폰서인 러시아가 종말을 고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되었다. 게다가 미국이 4월 선전포고와 함께 1차 세계대전에 공식 참전해 전쟁의 종반 양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혁명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수립한 소련의 신정부는 구체제의 입장에서 180도 선회해 유고 위원회측에 더 기울고 있었다. 소련 외무장관 파벨 밀리피코프는 1917년 3월 24일 세르비아의 입장에 쐐기를 박는 중대 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련 정부는 완전히 조직된 유고슬라비아의 창설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은 발칸의 장래와 관련한 국제 열강의 언급 중에서 처음으로 유고 위원회측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발언이었다. 이때부터 파시치 정부는 극도의 위기감에 쌓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유고 위원회측과 협상을 하면서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유고 위원회는 유고 위원회대로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대해 파격적인 유화책을 들고 나와 이 지역에서 일고 있던 반합스부르크 감정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인의 국가 수립을 모태로 설립된 유고 위원회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와의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프란츠 요셉의 계승자인 카를 1세는 1917년 3월 9일 전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게도 헝가리에 부영하고 있는 자율적인 지배권을 주었다. 이에 감복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정치인들은 3월 18일, 19일 양일간 비엔나의 제국 국회에 모여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의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카를 1세
그들은 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책에 발맞추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 구성된 제국 내 유고 자치 영역의 설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이 요구한 유고 자치 영역은 우선 이미 존재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세르비아를 배제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만의 자치 영역 설립이었다. 이러한 선서식과 자치 영역의 요구는 사실상 지극히 상징적인 정치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 이러한 정치 쇼는 실제로 정치 세력화했다. 1917년 5월 29일 제국 의회 의원 가운데 33명의 유고슬라비아 대표들은 ‘유고슬라브 코커스’라는 정치 단체를 설립했다. 충성의 선서식에서 보인 정치 상징이 정치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인 코커스 대표 안톤 코로세츠(Anton Kotosec)는 제국 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고슬라브 코커스에 서명한 의원들은 슬로베니아 인, 크로아티아 인 그리고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민주적인 기초 위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도 아래 통일시켜 자치적인 정치체제로 만들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안톤 코로세츠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세르비아 정부나 유고 위원회측 모두 극도의 위기감을 가졌다. 다시 세르비아 정부와 유고 위원회측은 망명 정부가 있던 코르푸 섬에서 의견을 절충하기 시작했다. 1917년 6월 15일부터 7월 20일까지 계속된 양자 회담에서는 특히 장래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본질에 관한 협의가 밀도있게 논의되었고 그 결론은 코르푸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내외에 공포되었다. 그러나 협의 과정에서는 유고 위원회의 트룸비치 의장이 제안한 이른바 국가 연합 형태의 국가 수립, 즉 “각 구성 영토가 독자적인 법과 행정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제안은 세르비아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한 달여 간의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7월 20일 세르비아의 파시치 총리와 유고 위원회 트룸비치 의장 간에 코르푸 선언이 서명되었다.
코르푸 선언은 전문과 14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요 조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왕국 또는 다른 이름인 유고슬라비아 인의 왕국은 하나의 영토, 하나의 시민권만이 인정되는 자유로운 독립왕국이 될 것이다. 왕국은 국민의 이념 및 감정과 분리되지 않으면서 모든 국민의 자유와 의지를 최우선으로 간주하는 카라조르지예비치 왕조를 정점으로 하는 합헌적이고도 민주적인 의회 제도를 갖춘 왕정이 될 것이다.
● 이 국가는 세르비아 인, 크로아티아 인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왕국으로 호칭되며 국가 원수는 세르비아 인, 크로아티아 인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왕이로 부른다.
● 세르비아 인, 크로아티아 인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은 왕국 내에서는 완전히 동등한 대우을 받는다.
● 모든 승인된 종교의 자유는 인정된다. 세르비아 정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그리고 이슬람은 국가 앞에서 동등한 대우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 세르비아 인, 크로아티아 인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왕국 영토는 이들 세 민족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전 지역을 포괄한다.
위의 최종 선언에서 보듯, 유고 위원회는 처음부터 타고난 정치가인 세르비아 정부의 파시치 총리의 책략에 휘말렸다. 이 때문에 심지어 유고 위원회의 내분이 가속화되어서 그 대표인 트룸비치 자신이 일부 위원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나 코르푸 선언의 가장 큰 한계는 말 그대로 선언으로 그쳤으며 전혀 법적 강제력이 없었다. 일부에서는 이 선언을 두고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의 대헌장이라고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현실은 코르푸 선언 이후 양측 긴장 관계가 더욱 고조된 것으로 나타났다.
파시치에게 코르푸 선언은 그에게 조건 지워진 열악한 정치 환경 속에서 찾아낸 생존 전략의 결과일 뿐이었다. 특히 그는 이 선언이 앞으로 실천에 옮겨야 할 강제력을 전혀 지니지 못한 선언적 의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라는 점을 유난히 강조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코르푸 선언이 아드리아 해 쪽의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의 야욕에 결정적 제동을 거는 한편, 비엔나에서 결성된 유고슬라브 코커스에 대한 세르비아측의 적절한 대응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망명 정부의 입장에선 희미해져 가는 정통성을 다시 찾는 부수적 효과도 기대했다. 더욱이 파시치는 유고 위원회나 유고슬라브 코커스를 자신과 동등한 자격의 대표로 인정하지도 않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위원회측에서 더욱 잘 알게 되었다. 흔히 쓰는 말로 코르푸 선언은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코를 푸는 정도의 휴지 조각으로 변해 버린 셈이다. 이후 양측의 긴장 관계는 일시적인 봉합 조치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고조되어 갔다.
코르푸 선언이 발표된 지 석 달여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그 유구한 역사를 마감하는 휴전 협정에 서명하기 6일 전인 1918년 10월 29일,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 의회는 선수를 쳐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인의 국민 회의’라는 정치 단체를 설립해 장래 유고슬라비아 국가 수립의 견인차가 될 것이라고 자임하고 나섰다. 이틀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칼 황제는 크로아티아 자치국을 승인했으며, 제국의 아드리아 함대를 통째로 크로아티아에 넘겨 주었다. 이는 아드리아 함대가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련의 상황에 대해 세르비아 정부측은 극도의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르비아 망명 정부는 아직 수도인 베오그라드도 수복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국민 회의측은 적어도 세르비아가 앞으로의 유고슬라비아 건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간주해 일단 대화 통로를 열기로 했다. 국민 회의 의장인 안톤 코로세츠는 세르비아측에 사절단을 보내 전쟁으로 극도의 재난을 겪고 있는 북쪽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식량 조달과 질서를 유지할 군대 파견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물론 사정이 어렵기는 세르비아측도 마찬가지여서 이에 응할 수 없었지만 양측은 이를 기점으로 대화의 기회를 마련했다. 약 한 달간의 협상 끝에 장래 문제와 관련 있는 모든 정치 단체가 제네바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키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제네바 회담이 1918년 11월 6일부터 4일간 세르비아 정부에서는 파시치 총리를 대표단으로, 유고 위원회에서는 트룸비치 의장이, 그리고 국민 회의에서는 코로세츠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제네바 회담의 중요한 의제는 국민 회의의 승인 문제, 미래 국가의 조직 문제, 그리고 이탈리아 군의 유고 영토 점령과 몬테네그로 문제 등이었다.
세르비아측은 6일 회의 개막 회담 때부터 유고 위원회를 공격하고 나섰다. 파시치의 주장은 이미 국민 회의가 새로 설립하였기 때문에 껄끄러운 대상인 유고 위원회는 이미 협상 대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코로세츠 국민 회의 의장은 유고 위원회가 국민 회의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라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파시치의 공격은 일단 끝나고 말았다.
유고 위원회의 트룸비치 의장은 자그레브에 정부가 먼저 수립되어 독립 국가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세르비아와 동등한 주체로서 통합에 동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물론 이러한 논리 뒤에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가 그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고 파시치의 반대 또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파시치는 트룸비치의 주장이 코르푸 선언에 위배되고 또 이 논리가 북쪽의 크로아티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세르비아 인을 본토의 세르비아 인과 격리시키는 책략을 담고 있다며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첫날부터 회의가 공전되면서 난상 토론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세르비아측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회의 개막 사흘째가 되자 프랑스 대통령 레이몽 프엥카레의 서한이 파시치에게 전달되었다. 그 내용는 ‘모든 유고슬라비아 인은 조금의 분열도 없이 공동 전선을 수립해햐 할 것’이라며 유고슬라비아 인의 단결을 점잖게 촉구했지만, 그 행간의 의미는 ‘세르비아가 계속 고집만 피우면 큰코 다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레이몽 프엥카레
이에 겁먹은 파시치는 코로세츠에게 서한을 보내 자그레브에서 설립된 국민 회의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인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한다고 통지했다. 국민 회의의 원래 명칭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세르비아 인의 국민 회의였다. 파시치는 나라명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이는 물론 파시치가 일생을 걸고 추구해 온 대세르비아주의를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주변 열강들에게도 이같이 해줄 것을 요청한 셈이다.
이에 따라 마지막 이틀 동안 회담이 급진전을 보여 드디어 11월 9일 제네바 선언이 채택되었다. 그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세르비아는 국민 회의를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한다. 또한 제헌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세르비아 정부와 국민 회의는 각각 고유의 영토를 통치한다.
2. 제헌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새 국가의 국사를 협의하기 위해 공동 각료 회의를 설립한다.
3.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슬로베니아의 일부로 간주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제네바 선언은 우선 유고슬라비아의 제민족은 동일하며 인종적으로 하나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또 정치 체제의 수립은 기본적으로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그리고 국민 회의가 주도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세르비아 인의 국가’ 등 세 국가가 합쳐 통일한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제네바 선언은 향후 유고슬라비아 인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기본 개념을 마련하긴 했지만 정부의 형태나 의회의 구성 등은 미래의 문제로 남겨 두었다. 특히 파시치 총리와 섭정 황태자 알렉산더는 제네바 선언이 코르푸 선언보다 후퇴한 것으로 간주하고 상당한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기회만 있으면 제네바 선언을 무효화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게다가 카라조르지예비치 왕가에 대한 부분도 모호하게 남겨 두어 알렉산더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파시치는 제네바 선언을 매듭 지은 다음 이렇게 회고했다. “통일 문제가 해결된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 세르비아 인의 굴욕인 동시에 나의 굴욕이었던 이 통일안을 받아들이면서 나의 심장은 녹슬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이런 통일을 위해 희생했던 것이다.”
세르비아의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어지자 파시치는 세르비아의 제네바 선언에 대한 반발을 회담 참석자들에게 통보한 뒤 자신은 사임서를 제출했다. 이 같은 파시치의 제스처는 일종의 제네바 선언을 무효화하기 위한 책략으로 비쳤으며, 이후 세르비아의 주도권은 파시치로부터 섭정 황태자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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