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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http://cafe337.daum.net/_c21_/home?grpid=PI4J
흔들리는 아이들, 불행한 교사들
―학생과 교사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한 생각―
신연식(서울 남성중학교 교사)
Ⅰ
갈수록 행복한 교사가 줄어드는 것 같다. 교사들 중에 아이들과 하루 하루를 지내는 일이 재미있어 어쩔줄 모른다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점점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의 기쁨과 보람은 아이들 속에 있다. 아이들이 지식을 깨우치고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돕는 기쁨은 다른 직업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아이들은 별로 교사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교사가 아이들 속에 쉽게 섞여 들지 못하고 '왕따' 당하는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만족스런 수업이나 학급 운영은커녕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아이들과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들의 행동 때문에 가슴앓이하기 일쑤다. 이렇게 부대끼다 보면 '저 아이들에게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머리 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른바 교사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이요, 우리 교육의 정체성의 위기이다.
왜 이렇게 선생 노릇하기가 갈수록 재미 없고 힘들어질까?
교사를 밥벌이를 위한 직업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원인까지는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은 10여 년 전과는 '인종 자체가 달라진'(?) 아이들에게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관계의 변화에 있다. 아이들과 하나로 어우러지지 못하니 재미가 있을 리 없고, 고민하는 아이들 앞에서 무기력하니 보람이 있을 수 없다.
교육은 가치 창조 행위이며, 이는 학생과의 의사 소통을 기본 전제로 성립한다. 교사와 학생 간에 갈수록 의사 소통조차 어려워진다면 교육의 제도적 측면을 넘어 어떠한 문화적 배경에서 그러한지 새롭게 눈을 돌려야 할 일이다. 교육이 사회 공동체의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이라고 할 때, 미래 사회에 기대되는 가치 체계로서의 문화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먼저 아이들 그 자체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의 원인을 밝히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위한 교육의 본질적 구실을 되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Ⅱ
국민소득 1만불 시대가 되면서 한국은 대중 소비 사회로 진입하였다. 60년대 이후 진행된 한국 사회의 변화는 서구에서 2,3백년 간의 사회 이행이 한꺼번에 중첩적으로 이루어진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거기에다 국제구제금융 사태로 피부로 느끼듯 국제 자본의 질서에 편입된 우리 사회는 한동안 총체적 혼돈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어려운 현실에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이면에는 농업사회의 가치 질서인 가부장적 봉건 의식과 관행이 완강하게 남아 있으며, 표면에는 산업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근대적 가치와 제도가 ― 물론 서구의 근대 개념의 바탕인 이성과 합리주의마저 사실상 내적으로는 제대로 이식·정착되지 않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 주를 이루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후기 산업사회(탈근대)의 전 지구화된 자본의 문화가 상당한 속도로 전이되고 있다.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라는 현상적인 울타리는 있지만 이미 학교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가부장적 가치 질서에다 군사문화까지 덧칠된 의식에 매인 50∼60대 관리자층과 산업화 시대의 논리로 학습된 30∼40대의 평교사들, 그리고 후기 산업사회의 독자적인 문화 코드를 갖고 있는 신세대의 학생들이 물과 기름같이 섞이지 못한 채 한 울타리에서 충돌하고 서로 절망하고 있는 곳이 학교다.
전근대→근대→탈근대 사회로의 엄청난 속도로의 중첩 이행은 세대 간에 화해하기 어려운 문화의 벽을 만들었다. 의사 소통 불능 현상은 기성세대와 아이들 사이에 가로놓인 문화의 문법 자체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문화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의식을 일차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문화가 다르면 의식과 가치와 생활이 다르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농업 중심의 사회 공동체가 급격하게 붕괴되면서 이를 대체할 가치 규범과 생활 질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데서 세대 간, 남녀 간, 계급·계층 간 온갖 갈등과 혼란이 심하게 빚어지고 있다.
이는 교육 측면에서 과거에 공동체에서 교육적 기능을 감당해온 기반 자체가 와해된 것을 말한다. 교육의 기반인 가정, 학교, 지역사회, 자연과의 관계 변화가 그것이다.
대가족제도의 가정이 자연스럽게 담당해온 교육의 기능은 산업화 시대에 핵가족화되면서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부모는 가정 밖에서 늘 바쁘고 아이들은 부모가 일하는 모습을 접하지 못하고 있으며, 부모는 아이들을 학교와 사교육에 맡기면서 잠깐씩 대하는 아이들에게 물질로 보상할 뿐이다. 학교 못지 않게 가정에서도 부모 자식 간의 의사 소통은 힘들어지고 있다. 요즘 들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가족주의적 경향이 늘고 있다. 그러나 가족 단위의 레저 문화 등은 부모 자식 간의 의사 소통과 감성의 공유를 통한 교육적 기능의 회복이라기보다는 한꺼풀 뒤집어 보면 상업 자본주의가 부채질하는 또 다른 방식의 소비 양태일 따름이다.
학교 또한 마찬가지로 교육적 구실이 붕괴되고 있다. 19세기 산업사회에서 노자 계급 간 타협의 산물로 시작된 오늘날의 공교육 제도로서의 학교는 그 사회가 축적해 놓은 지식과 정보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학교는 제도화된 교육과정을 마련해 놓고 그에 따라 지식과 정보를 아이들에게 습득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권위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인터넷으로 대표되듯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대되고, 지식의 발전과 변화의 속도가 날로 달라지고, 이런 지식과 정보의 습득 방법이 획기적으로 다양화해지면서 학교의 독점적인 권위와 효율적인 기능은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이런 학교에서 습득시키려 드는 지식과 정보는 전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질이나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아이들은 부의 세습화와 교육의 양적 폭발로 부모 세대와는 달리 학교가 이미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 매력 없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고학까지 하면서 눈물겹게 노력한 부모 세대를 이해할 수 없다.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저 아이가 누구 집 자식인 줄 훤히 알 수 있었던 지역공동체가 맡아온 교육 기능은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되면서 익명의 사회가 되자 완전히 없어졌다. 지역사회는 교육적 기능은커녕 아이들을 상품의 고객으로 유혹하는 장으로 위해로운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교육이 단순히 지식의 전수 행위만이 아닌 감성과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일 때 자연의 교육적 기능은 엄청나다. 과거에 끼니를 때우려고 또는 놀이 공간으로 늘상 접했던 자연은 인간과 일치된 삶의 공간에서 산업화 이후 삶과 유리되었다. 콘크리트와 컴퓨터 등 온갖 기기에 둘러쌓인 아이들에게 자연은 이용의 대상이거나 또 다른 가상 공간일 뿐이다.
과거에는 아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일상적으로 부딪치고, 관계 맺고, 경험하면서 큰 갈등 없이 자연스럽게 그 공동체의 가치를 전수받으면서 성원으로 소속하게 되었다. 오늘에는 그러한 공동체라는 교육적 기반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또는 산업사회에서 생산의 주체였던 기성세대의 문화는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억압하고 몰이해하는 '꼰대 문화'로 부정되고 있다. 오늘의 아이들은 기성의 문화와 소비의 주체로 등장한 그들의 문화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 그들은 현실과 가상의 공간 속에서 헛갈리고 있으며, 기성의 가치체계와 제도에 길들여지거나 아니면 일탈 행동으로 저항하며 반격해오고 있다. 그들은 기성의 지배문화에 대하여 일탈로 보이는 저항적 하위문화를 형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농업사회와 근대 산업사회를 살아온 기성세대의 문화는 아이들에게 너무 낯설고 수용할 가치가 없는 무용지물로 치부된다. 공동체적 삶을 살아온 기성세대는 집단에서 자기정체성을 찾았고, 생산의 주역으로 생산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상대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후기 산업사회의 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한 아이들은 제대로 된 놀이 문화 하나 변변히 갖지 못한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소비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상업 자본주의의 공략의 대상인 아이들은 영상매체를 통해 상업 자본이 만들어낸 현란한 이미지에 욕망이 부채질되고, 정보가 홍수처럼 넘치는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으며, 어른들이 강제하는 구세대 문화의 가치체계 사이에서 자아 형성에 혼란을 겪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믿어온 노동생산의 가치와 근대의 특징적 패러다임인 이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하여조차 의심하고 있으며, 공동체의 동질성 강조를 개성을 억압하는 집단적 획일주의로 거부하고 있다.
아이들은 생산의 가치와 그를 더욱 풍요롭게 해 주는 교육의 신화에 대하여 맹신하는 부모와 교사와는 의사 소통의 통로를 닫아 버린다. 그런 어른들이 장악하고 있는 가정과 학교는 기성문화를 강제하는 억압의 공간으로 그들은 거기에 몸만 있을 뿐 마음은 이미 자기들만의 문화 속으로 떠나 있다.
Ⅲ
우리는 이제 '문화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문화란 공동체에서 의사 소통과 가치 체계의 문제이다. 때문에 이는 곧 교육의 본질적 영역이고, 교육 또한 문화의 영역이기도 하다. 문화란 특정 집단이 자연환경을 포함한 제반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하기 위하여 형성해 낸 유형 무형의 총체이다. 따라서 문화는 자연이나 사회의 환경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아이들과 의사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환경 자체가 기성세대의 그것과 급격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다름'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달라진 환경과 그에 따라 형성된 아이들의 문화 ― 청소년 문화의 양태와 그들의 의식과 생활 ― 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다름 속에서 '공존의 방식'을 발견해 내고,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공동의 가치 체계를 세워가야 한다. 정신 없는 변화에서 어른들 자신도 가치 체계가 흔들리는 형편인데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갈등이 클 것인가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은 대중 소비 사회에서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화한 문화에 대한 욕망의 주체가 되어 있다. 자라는 아이들의 자기정체성이 바로 이러한 문화 환경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영상 등 대중 매체를 통해 이미지화한 자본의 상업주의 문화는 사람과 사람, 개인과 사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정한 관계와 가치를 왜곡하고 있다. 아이들은 집단적 획일성을 부정하면서 개성과 다양성을 요구하지만 그들의 문화 현상을 들여다보면 정작 그들조차 그렇지 못하다. 컴퓨터와 텔레비전 앞에서 개별화된 그들은 외로워하고 있으며, 튀어 보이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개성이 집단에서 소외당하는 왕따의 대상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유행하는 학용품, 악세서리, 운동화나 옷이 있으면 누구도 빠짐없이 다 가져야 한다. 다양한 머리 모양과 색깔과 옷으로 꾸미면서도 똑 같은 랩송, 똑 같은 힙합춤밖에는 다른 것은 모른다. 그들은 상업 자본주의의 광고에 의해 욕망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아무 저항 없이 몰개성적으로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아이들이 가상 공간이 아닌 실제에서, 개별이 아닌 공동체에서 구체적인 삶의 부딪침을 통하여 가치를 형성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진정한 안내자로 나서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자본의 상업주의 문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의 생산자로 스스로 서도록 도와야 한다.
아이들의 문화는 이미 학교 울타리 그 너머에 있다. 대중 소비 문화가 아이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조차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자본이 주도하는 교육의 재구조화는 학교의 교육적 기능 전환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학교를 상업주의 문화의 상품 시장으로 열어가고 있다. 첨단 전자 설비와 교육내용을 담은 소프트웨어는 물론이고 수련회, 수학여행, 급식, 야외 체험학습, 책가방 없는 날, 방과후 교육활동, 각종 행사와 대회까지 속속들이 파고들고 있다. 이제야말로 교육은 단순히 지적 영역만이 아니라 아이들 삶의 전 영역으로 관심을 확대해야 한다. 일제 군국주의 교육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한 교문에서부터의 복장 검사, 거수경례, 소지품 검사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단순히 인성교육이다, 상담이다, 유해 환경 단속이다 하는 단선적인 노력만으로는 위력적으로 파고드는 대중 소비 문화의 유혹에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의 혼란과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이제는 '사회가 곧 학교'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고, 그 대응도 문화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