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작하며
지난 해 교지에 ‘이른바 왕따 시대의 공부 방법’이란 글을 게재하였다. 그 글에서 아주 미시적인 공부의 원리와 향상을 위한 구체적 전제 조건으로서 정당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그 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정당성의 문제가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불법 자금의 모금과 관련하여 최고 통치자로부터 제기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둘러싼 정치권의 권력 게임이 대통령과 입법부의 대립이라는 구체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사회 제 세력간의 갈등도 보다 논쟁적인 모습을 띠고 드러났다.
이라크 파병 문제를 둘러싼 이익추구 세력과 평화추구 진영간의 이견,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시민권력과 정부권력의 대립,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교육계의 혼란 등은 고전적 사회 갈등인 노사분규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제 갈등의 당사자 진영들이 서로 상대를 공격하여 파괴하는 단계로 악화되지는 않았다는 점에 나는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서 매우 다행한 일이었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여론 수렴 기관으로서 언론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언론도 문자, 방송, 인터넷이라는 매체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었고, 그 소통 방식에 있어서 대중적 특성은 대중조작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것은 급기야 언론 자체에 대한 비판과 진실 규명에 대한 논쟁으로 나아갔다. 신문과 방송의 매체비평 유의 코너와 프로그램의 증설이 이를 말해준다.
언론간의 진실 규명과 국가적 수준에서 객관성의 확립이라는 문제는 단순한 세력 싸움을 넘어서 본격적인 합리성의 대결이라는 틀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전이 아니라면 이것은 무엇보다도 교육의 문제였다. 이러한 생각이, 지난 1년간의 사회 변동을 바라보면서, 교사로서 필자가 이 글을 쓰게된 직접적인 이유이다.
지난 1년간의 한국 사회 변화가 갖는 소통(疏通)적 특성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당연히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 적응의 과정이 힘의 논리에 입각한 투쟁과 적자생존의 모습만이 아니라면, 지적되어야할 중요한 특징은 이러한 제 변화의 과정이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곧, 지난 1년간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변화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이 변화의 태풍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선출에서 예비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영웅이 시대를 이끈다는 얘기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향에서의 초점은 정치학과 사회개혁의 몫이다. 교육적 접근은 그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었다는 방향을 취해야한다고 본다. 변화를 주도한 시대적 특징의 밑바탕에 가장 넓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인터넷이다.
타 매체와 구분되는 인터넷의 특징은 쌍방향성이다. 이 상호성의 원시적이고 가장 주목할 현상이 바로 덧붙이는 글의 작성이다. 본격적인 토론 사이트가 아니라도 하나의 기사나 가십(Gossip)에 대하여 따라붙는 수많은 독자의견들을 보노라면, 선정성을 이용한 광고효과로 움직이는 여타 대중매체들이 이 점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 지난 1년간 방송매체에서 토론 프로그램의 증가는 이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 국민들이 전부터 토론을 즐겼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 주고받는 내용을 보면 토론을 즐기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화풀이나 말로 하는 전쟁에 가깝다. 인간의 숨겨진 새로운 면모를 보는 듯도 하다. 인기 있는 사이트의 덧붙이는 글들을 읽어보면, 민감한 국민적 쟁점인 경우, 상대방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이나 욕설 또 신체적 특징에 대한 공격 일색인 경우가 많다. 인터넷상에서의 신체적 공격은 불가능한 일임에도 상대방을 비판함에 있어 ‘무뇌충(無腦蟲)’이라고 몰아 부치는 표현은 허탈감과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신체적 약점을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고, 오직 있는 것은 상대의 머리를 통해 나온 의견으로서 덧붙여진 글뿐인데, 이것이 자기가 보니 도저히 말이 안된다는 의미가 바로 무뇌충인 것이다. 뇌가 없으니 생각이 없을 것은 당연하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여론을 주도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 또한 교육의 문제인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게된 의도는 지난 1년간 우리 사회가 보여준 변화를 공부와 관련하여 내 나름대로 이해하고 정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을 통하여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진실로 잘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우선, 공부와 마찬가지로 지난 1년 간 우리 사회 변동의 특징을 나는 소통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 공통성을 파악한다. 다음으로 그러한 소통이 제대로 된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터전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는 데, 이 점이 알찬 공부를 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정당성의 문제
정당하지 못한 소통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제로섬(Zero-Sum) 시스템에서 남을 짓밟고 나의 배를 불리는 일 정도이다. 그것은 동물의 왕국 그 자체이다. 야만의 세계인 것이다. 포지티브 섬의 문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자연을 상대로 할 때 정당하지 못함은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놀이 동산에서 기구 정비를 게을리 하는 것, 건설 현장에서의 백화점이나 교량의 붕괴, 우주왕복선의 폭발 등은 자연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정당성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워낙이나 효율성 신화에 물들어 있어서, 지금은 정직, 깨끗함, 당당함이라는 표현이 왜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당성이 공부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작년 글에서 충분히 지적한 것으로 보고, 이 번에는 이 정당성이 오늘날 사회 속에서 놓여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공부와 관련된 직․간접적 주체인 교사와 학부모, 교육 행정 기구의 바람직한 자세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가.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정당성
아래에 인용하는 글은 2003학년도에 본교 3학년의 한 학생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이다. 정당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기도 하고, 교사와 학부모에게 요구하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점이 있을 것으로 보여 다소 길게 끌어오기로 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나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식의 습득만이 전부인 것일까...
관료주의와 의사소통에 관하여 쭉 글을 읽어봤습니다.
(중략)
문화부장관께서 권위와 권위주의적인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에 깊은 공감을
합니다. 권위는 존경과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떠한 것, 권위주의적인 것은 그 권 위라는 것을 잘못 업어 생기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 오는 관료주의와 소통에의 문제 점.
그 권위주의적인 상황은 어른들뿐 아니라 청소년과 아이들에게서까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대처하는 방안들도 어른들과 엇비슷합니다.
적절한(정말로 '적절'인지는 의문) 처세술로 대처하고 그것에 대해 속으로 쓰릴지라
도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지 않는 청소년, 심지어 아이들까지 봅니다.
학교에서 배우고 싶은 것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함과 문제를 해결하려
는 마음가짐...(이게 권위주의와 소통의 문제겠죠...)
저는 어른들에게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타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그렇게 말하지... 나중에 봐라......”
분명히 타협과 유연함은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 개개인의 안일주의로 인해 타협하는
사람이 많고 그로 인해 자신의 자유를 죽이고는 불평하는......
그리고 그것을 후세에게 물려주는......
학교에서도 여러 선생님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주장하
는 아이를 성가시게 보이게 만드는 말들......(그런데 이것이 딱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해서 더 무섭습니다 자연스럽게 모르게 넘어가 버리니까...)
학교에서 배우고 싶은 것은 '불의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는 정신,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할까(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다......)
저도 아직 그 상황 상황에서 내 주장처럼 대처하지는 못했지만 절대로 그것에 대해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략)
위 글은 내가 문화관광부 장관의 취임사에 대한 논평을 올린 글에 대하여 이 학생이 덧붙이는 글로서 쓴 것이다. 인용 글에서 보다시피, 이 학생은 공부를 문제에 대한 해법을 주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공부가 바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문제를 풀지 못하게 하고, 자신에게 큰 해로움을 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이 학생은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위와 같이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잘못되거나 틀린 것을 알게 된다면 우선 자기 자신이 참을 수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에게 있어 모자람은 잘못으로 이해되고, 그랬을 때 그것은 좀 더 노력을 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당장 고쳐야할 시급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니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정당성이 주는 효과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인용 글의 필자가 지적한 대로 선생님을 포함한 많은 어른들과 청소년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당당하지 못함으로 해서 스스로의 자유를 속박하는 이 구조는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이 구조를 깨어버리고 당당함을 견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공부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성경말씀대로 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물론 이 학생은 그 잘못된 구조의 일단을 개개인의 안일함에서 찾고 있다. 나는 다음 다음 절에서 이 안일함이 사실은 개개인의 노력의 정도 차이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도 가능할 수 있음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그에 앞서 어른들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겁함의 색다른 모습을 언급하기로 한다.
나. 비겁함은 정당성을 통한 체계의 축성을 방해하고 사회에 퇴보를 가져온다.
정당성과 대비되는 말은 비겁함이다. 일상에서 이 비겁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부지(不知) 기수(其數)인데, 그 대표적 장면이 허물을 남으로부터 공격받을 때이다.
우리 어린 시절의 기억에 비추어 볼 때, 무릇 예절이라고 하는 것은 모자람과 오류를 지적하는 선생님과 선배와 부모님과 어른 앞에서 반성하고 개선하고 수정하는 겸손함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남으로부터 잘못을 지적 받을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속으로는 겸연쩍거나 쑥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불쾌한 심기를 숨기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오만해졌다. 그런데 이 겸손과 예절이 오만과 무례로 역전되는 구조가 재미있다. 즉, 나처럼 똑같은 유의 잘못을 지적 받는 동료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연합작전을 펴서 우리들의 잘못을 정당하게 공격한 그 상대를 오만하고 무례하며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아주 나쁜 놈으로 몰아 부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상의 대화 속에서 잘 나타나는 표현이 바로, "그래 너 잘났다. 너는 어찌 그리도 잘났냐?" 라는 비아냥거림이 그것이다. 정당한 그 상대방은 고리타분한 원칙론 자로 추락한다. 논리와 감정의 경계가 헝클어져 버리는 순간이다. 다수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원칙은 융통성을 모르는 답보적 교조주의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따돌림과 패거리 짓기이다. 이것을 좀 더 멋스럽게 얘기하면 정치라고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모습은 어른들 사회에서 너무나 정식화되어 있으며, 청소년이나 어린이 세계에서 최근 크게 문제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은 그 동안 교육의 영역에서 지켜졌던 공공성의 축이 무너지면서 이다.
그 다음 구성원들은 그러한 사회를 등지고 떠난다.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나는 우리 사는 공동체가 제로섬에서 더욱 악화되어 퇴보하고 있다고 본다. 50%에 이르는 높은 이혼율은 가정의 붕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이민과 유학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이 사회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변질된다.
개인들이 모여 이룬 사회 속에서 겸손과 오만이 역전되는 이런 구조를 좀 더 일찍이 통찰한 사람이 바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이다. 그는 도덕적인 개인과 그러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떻게 하여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가하는 모순된 문제를 고찰하면서 정의가 승리하기 위해서 힘을 지녀야 함을 얘기한다.
집단적 힘이 약자를 착취할 때, 그것에 대항해서 다른 힘이 일어나지 않는한, 그 세력 은 결코 꺾이지 않는 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만일 양심과 이성이 이 투 쟁에 끼어든다 해도, 이것들은 저 세력을 규제할 뿐이지 그것을 파멸시키지는 못한다.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서울:현대사상사, 1987, p.8.)
그의 논리를 계속 따라가면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도덕적 선의를 희생시킬 만큼 무책임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 이에서 도덕적 선의를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에, 그 힘은 강제적인 방법에 의해서 분쇄되어야 하는 바 이 방법들은 언제나 그것이 타도한 부정의 대신에 새로운 형태의 부정의를 가져오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위 책 p.39.)
그러면서 위와 같은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 원인을 다음과 같이 규명하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의 제한성, 이성이 편견과 격정에 쉽게 굴복하는 일, 그리고 특별히 집 단 행동에 있어서의 비합리적 이기주의의 끈질김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사회적 투쟁은 인간 역사 안에서 아마도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 불가피하다.(위 책 p.16.)
인간 정신과 상상력의 한계,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를 초월해서 동포의 이익을 십분 자기들 자신의 것처럼 똑똑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 유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불가피적으로 폭력을 사용한다.(위 책 p.26.)
니버의 글은 미국 사회에서 독점자본주의 체제가 극에 달하여 공황으로 폭발된 1930년대에 나온 작품이다.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에서 노동자 민중을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한 목사로서 니버가 본 산업 사회의 현실은, 인간 이성의 능력과 양심에 기대는 것을 너무나 이상적인 주장으로 여기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윤리학자이자 교육가로서 니버는 양심이 이기고 정의가 승리하는 세계를 꿈꾸었을 것이고, 그런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그의 저서의 제목인 것이다.
그의 결론은 도덕적인 개인의 윤리와 비도덕적인 집단의 윤리를 구분해서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적 및 사회적 행동과 사회 집단-국가적, 인종적, 경제적-의 그것과의 사이 에 명확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 이 구별은 순전한 개인 윤리로서는 언제 나 당황할 것이 틀림없는 정치 정책들을 정당화하고 또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위 책 p.7.)
니버가 말하고자한 주장의 한계는 분명하다. 즉 그렇게나 구분해서 파악하라고 권유한 ‘개인과 집단의 윤리가 정당한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그의 글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책은 역사적 사실과 종교적 가치의 힘이 발현되어온 과정들을 나름대로 진단하고 있지만, 너무나도 현실의 완고함에 주눅든 탓인지, 도무지 역사를 형성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힘과 그들이 이루어내는 연대성이라는 요소를 조금도 평가해주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이러한 관점을 가진 니버에게 정당성이란 것은 그저 하나의 속임수요 위선으로 비치는 단순한 현상일 뿐이다.
정당화란 것은 대체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의 탐욕이 드러날까 봐 그것을 가리려는 욕망에 의해서 조작되는 것이고, 또 사회 자체의 경향이 인간 생활의 야수적인 사실을 그 자체로부터 은폐하려는 데서 오는 것이다.(위 책 p.28.)
이러한 생각과 사유 수준을 가지고 우리는 공부를 잘 할 수 없을 것이다. 니버의 고찰은, 앞서 인용한 3학년 학생의 글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힌 그 결심을 결코 돌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니버 주장의 평가할 만한 부분은, 그가 겪었던 독점자본주의 논리가 세상을 뒤덮고 충격과 공포의 시대적 현실로서 공황이 휩쓸고 있는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겠지만, 이성의 기능과 낭만적 상상력이 증진된다면 일정 수준의 도덕적 사회의 건설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은 인터넷이 세상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뒤덮어가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것이 어떤 새로운 연대성과 보다 큰 부피의 사회적 도덕을 구축하게 할 수도 있지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니버의 저작은 인간의 심리와 욕망적 특징에 주목함으로써 사회적 도덕을 구축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에는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의 문제 의식을 분명히 하기로 하자. 그러니까 잘못도 공동으로 같이 하면 부끄러워 해야할 사실이 아니라 충분히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리는 비겁함과, 동시에 정당한 비판을 가하는 상대를 공격하는 야비함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발견하고자 한 사람으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을 주장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생각을 짚어보고자 한다.
다. 비겁함의 구조적 뿌리로서 정당성의 위기와 생활세계의 식민화
2학년의 한 학생이 두 분 부모님과 함께 학교를 그만두는 문제를 놓고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있다. 그 동안 아이는 오랫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1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용하던 아이가 갑자기 변했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부모님은 황당해 하신다. 교사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학교 다니는 것이 차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며 다시 한 번 신중히 판단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학생은 막무가내이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학교 다니기가 싫다는 것이다. 아이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또래의 아이에게 기대되는 사회화 과정으로서 학교 수업을 그 아이 내면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미의 상실인 것이다.
한 개 반 30여 명의 학생이 학급 야영을 준비한다. 전원이 참석하기란 무척 힘들다. 재미가 없어서이거나 다른 급하고 중요한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일들이 있어서이다. 자율성을 갖고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는 리더학생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회비이다. 연대감과 집합의식은 붕괴되어 있다.
어떤 서클에서는 선배들에 의한 전통적 관습의 강요와 후배들의 반발로 인해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통이 단절된다.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시선을 사회로 확장시키면 다른 많은 병리현상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아노미, 소외, 동기의 상실, 정신병 등. 이혼율의 급격한 증가, 아동 학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적개심을 표현한 것으로서 방화와 같은 범죄 현상 등은 우리가 생활하는 이 세계가 식민화 되었음을 증거하는 사회 현상들이다.
위와 같은 병리현상들은,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일상의 생활세계가 그것의 운용을 가능케 하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체계와의 관계에서 , 매개체로 기능하는 행정, 입법, 사법, 언론 권력의 작용으로 물질화, 관료화 논리에 침탈되어 식민화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하버마스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다양한 위기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시장 실패라는 경제 시스템의 체제 위기는 경제공황으로 나타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큰 정부의 출현은 불가피하다. 물론 정부의 간섭은 정부실패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서 합리성의 위기를 낳는다. 이것이 개인들에게 있어서는 믿고 따라야할 정통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정통화 위기로 나타난다. 이 정통화의 위기는 교육제도와 같은 여러 사회 문화 체제에서 동기화의 위기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정통성 위기와 동기부여의 위기는 개인이 스스로의 내부에서 삶의 동력을 이끌어내는 대자성을 잊어버리는 자기동일성의 위기인 것이다.
하버마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올 문제점을 생태학적 균형의 교란으로서 환경 문제, 국가간 균형의 붕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열핵무기에 의한 세계체제의 붕괴, 그리고 인간학적 균형을 마비시키는 사회화 양식의 변동을 들고 있다. 조금 복잡한 내용이지만 옮겨보기로 한다.
나는 사회화 과정을 안으로부터 제한하는 인간성의 심리학적 상수를 도대체 확인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그렇지만 사회체제가 그것에 의해서 지금까지 행동의 동기부여 를 낳아온 사회화의 양식에는 하나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화 과정은 언어적 상호주체성의 구조 속에서 진행되며, 정당화를 요하는 규범과 자기확인을 보증하는 해석체계 양쪽에 연결되어 있는 행동조직을 규정한다. 이 의사소통적 행동조직은 결 정을 내리는 시스템이 고도의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하나의 장해로 될 수 있다. 개개의 조직에서도 그러하지만, 사회체제의 차원에서도 그 제어능력은 결정기관 이 구성원의 동기부여로부터 기능적으로 독립함에 따라 증대하리라고 추측된다. 조직 목표의 선택과 실현은, 고도의 내부적 복잡성을 지닌 체제에서는 좁은 범위에 국한된 동기부여의 공급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널리 일반화된 동조의 풍조 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정치체제에서는 대중의 충성심이라는 형태를 띠 는 것이다.) 내적 자연을 의사소통적 행동조직 속에 매어 놓는 사회화 형태에 관한 한, 여러 결정의 - 비록 근사적으로라도 - 무동기적 수용을 보증해주는 행동규범의 정통화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위르겐 하버마스, 후기자본주의 정당성 연구, 서울:청하, 1988. pp.72-73)
인용문을 내 나름으로 간단히 이해해보면, ‘오늘날 사회는 매우 복잡해졌고 개인은 거대한 조직과 그것들이 어우러진 사회체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결정을 능동적으로 지지할 충성을 보일 수 없으며, 사회체제는 당연히 정통성에 위기를 가진다. 그리고 문제의 근원적 이유는 규범에 대한 해석을 결정짓는 의사소통적 행동조직이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인 것 같다.
매우 어렵게 보이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분석이 니버의 것과 차이를 갖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 세계 체제라는 사회 구조의 분석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버가 모순되는 거부할 수 없는 현상으로서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적 비도덕성을 끝까지 잘 조화시키자고 무책임하게 주장하는 반면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위기를 해결할 방안으로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추구를 들고 있다.
그리고 목하의 한국 사회는, 대통령이 바뀐후 10개월 남짓 지난 시간 속에서 참여와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사회 제 조직 및 세력의 의사 분출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교사인 나에게 관심을 끌게되는 것은, 언어에 본래적으로 내재한 합리성 개념을 도출함으로써 올바른 비판과 실천의 규범적 기초를 마련한다는 목표를 가지기 때문이다.
3.교육과 관련한 식민화된 생활세계의 구체적 모습들
이 장에서는 공부하는 학생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서 교육 관료, 교사, 학부모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얻도록 해보겠다.
가.교사와 학생이 공부하는 교실의 모습
효율의 논리에 빠져 원칙을 강조하지 못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작년 글에서도 이미 언급을 했다. 그리고 이 글의 처음 부분에서 인용한 3학년 학생의 글에서도 “타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하며 “은근히 자기 주장이 강한 아이를 성가신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으로 선생님들은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교사와 학생 상호 간의 민감한 내용은 접어두고, 어쩌면 조금 황당해 보이는 한 가지 현상을 언급하고자 한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대개 교실의 앞 뒤 출입문에는 조용히 출입할 것을 경고하는 조그만 표어들이 붙어있다. 그 내용들은 직접적으로 정숙을 강조하는 것에서부터 소란스러움과 문을 제대로 닫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불행과 저주를 나타내는 반어적 표현들이 주종을 이룬다.
그런데 이 표어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은유의 깊이를 통하여 촌철살인의 재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보다는, 글자의 도안화와 이미지화를 통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어온다. 거기에는 어떤 반성적 취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감각의 취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감각의 취향은 공부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내용이라는 것도 절대 신에 대해 무기력한 신도가 드리는 허무한 기도와 같은 것인 경우가 많다. 결코 반성의 취향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문 열고 다니는 사람 재수는 기본! 사스는 필수! 반드시 대학간다. 군-대!’라는 식이다.
그 다음 재미있는 현상 또 한 가지. 나름대로 공부에 집중하려고 하는 학생들은 주변의 소음을 차단하는 귀마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개 스폰지로 만들어져서 귀에 쏙 집어넣게 되어 있는 이 귀마개는 실제로 방음의 효과는 별로 없다. 그런데 조용히 자기 만의 공부를 할 때나 시험을 칠 때 이용하는 학생이 꽤 있다.
실제로 별 효과도 없는 일이 일종의 주술적 행위처럼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귀마개 현상을 공부 문화라는 시각에서 재조명해보면 이렇게 된다. 왜 정숙(靜肅)이라는 사회 현상의 경계가 교실 출입문 아니 건물의 현관문이 아니라 개인의 귀구멍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모습은 이렇다.
이렇다 보니 말인즉 말이 안 되는 어불성설의 황당한 질문이 나온다. 2학년의 어느 교실에 보강 수업을 들어갔을 때, 한 학생 왈, “ 선생님! 주변이 아무리 시끄럽더라도 조용히 책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지만, 그 아이는 매우 진지하고 그 방법론적 측면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으로 내게 질문을 했었다.
우리의 교실은 사회 변동을 좇아가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최 근년에 들어 학기말 몇 일간의 수업시간은 공부 시간이 아니라 성적 확인하고 서명하는 시간이 되었다. 급기야는 교무부장 선생님이 “지금 수업하고 있는 선생님이 계신데, 이번 시간은 학생들이 성적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라고 환기시키는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이상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은 제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수업 세계는 식민화되어 있다.
나. 교육 행정 기관의 모습
이 글의 머리 부분에서 언급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만큼, 오늘날 한국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 관료들의 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학생 정보 인권의 침해는 차치하더라도, NEIS의 문제점은 학생이라는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관료제 구조가 요구하는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만이 있을 뿐이다.
올해 3학년 학생들은 본인의 어떤 동의도 없이 자신의 공부에 관한 모든 기록이 인터넷 상에서 기록되어지고 있는 사실을 보았을 것이다. 전국의 모든 학생의 학업과 건강상태, 그들 부모님의 직업에 관한 자료가, 유출되었을 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구조 속에서, 집적되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중에 드러났지만 이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와 같은 계열에 속한 생명보험회사에서는 고객들의 정보를 보험판매원들에게 알려서 마케팅의 자료로서 활용했던 것이다.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바꾸라고 교육부에 요구했을 때, 거액의 비용을 들여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새로 시작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나라 교육을 책임진 관료들의 머리 속에 든 것은 정확히 말해 학생과 교사가 아니라 효율성이 모두인 것이다. 체계 속에 인간이 없고 물질과 자본의 논리가 우위에 있을 때, 어떤 끔찍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아주 잘 보여준 사례였다.
임시 교사에게 차 대접 심부름을 시킨 어느 교장 선생님이 세상을 등진 사건이 있었다. 또 촌지를 둘러싼 끊이지 않는 잡음들. 마지막으로 대학 입학 수학능력 시험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출제위원 선정과 문제의 사전유출 의혹 사건.
이와 같은 사회 현상들은, 이 땅의 교육이 상호 이해(理解)가 아닌 특정 개인의 성공을 위한 비사회적인 도구적 행위로 전락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부작용들이다. 오죽했으면 경제부총리가 부동산 가격 안정 정책을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내어놓았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우리 나라의 교육제도를 보고 정말 공부를 잘 할 수 있겠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다. 학부모들의 모습
사 교육에 목을 매고 있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이들이 보여주는 행태들은 식민지화된 생활세계에서 노예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이후에 연결되는 어떠한 계획도 없이 다만 자기 자식을 유망한 대학에 보내기 위한 몸부림은 모두 다 보여준다. 사실 이 땅의 대학들은 이미 진리의 상아탑이기를 포기한지 오래되었는데 말이다.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조차도 의심스러울 때 학부모들이 할 수 있는 수단이 조기 유학이다. 여기에는 목표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달성하는데 보다 효과적인 수단이 무엇일까 하는 문화적 전망은 진작부터 없다. 오직 도구적 이성이 명하는 막대한 물질의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엄청난 과외비용과 일찍 영어를 익히기 위한 혀 수술을 하는 모습은 공부의 주체로서 학생의 의도나 포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나중에 잘 되기 위해 하는 최선의(?) 노력이다.’는 모호하고 느슨한 목적아래 임시적으로 묶여있을 뿐이다.
물론 일정정도 결과에 있어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성공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만을 추구해온 행위와 그 결과로서 다음 세대가 이루어내는 사회의 모습은 비정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투입량에 대한 산출 결과를 보더라도 대단히 비효율적인 운영체제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보다 우회적인 생산방법을 사용하는 인류의 경제체제가 사실은 자연의 절대적 자원량을 매우 비효율적으로 낭비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즉, 그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서 공부한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서도 뛰어난 학업성취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는 연구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또 그에 앞서 공부를 원망하며 세상을 등지는 많은 학생들의 목숨은 무엇으로 보상해줄 수 있는가?
우리는 세상을 등지기 전에 그들로부터 공부에 관한 어떤 충분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공부는 무엇이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가를, 아니 적어도 이러한 방법은 아니다라는 어떤 반성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적합하지 않으면 세상을 등져야 하는 사회 구조는 서로가 통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고 볼 수 있다.
4.의사소통적 합리성과 교육의 제 위상 찾기
올해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여러 표현들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깊은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발언은, 대통령이 토론 중에 쓴 표현으로서 언론이 그를 희화화하기 위해 유행시킨 “......맞습니다. 맞고요......”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많은 독자 청중은 그저 3류 코메디에서 유행시킨 말쯤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문화적 창을 통해 보면 이 발화의 효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문제가 있어 해결을 위해 애쓰는 양 당사자가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표현은 “‘당신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에 더하여 이러이러하고 색다른 더 깊은 측면을 가진 것으로 보는데, 여기에 대하여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논리를 심화 확장시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합리성이다.
위와 같은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지난 1년간 한국사회의 그 많은 토론과 논쟁이 보여준 모습을 조명하면 우리는 매우 씁쓸한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가.한국 사회의 의사소통, 그 부끄러운 모습
네티즌의 덧붙이는 글을 컴퓨터에서 읽을 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욕설과 상대에 대한 근거 없는 저주를 퍼붓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보면 정말 씁쓸하다 못해 암울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TV에서 ‘......당신이 고민과 깊은 연구를 통해 계속해서 색달리 제시하는 그런 내용에 대하여 나는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입장이 나의 이익에 반(反)하며 그래서 틀렸다는 사실이다......’는 폼으로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을 줄창 지겹게 반복하여 늘어놓는 것을 토론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정말 어이가 없고 비통한 심정까지 든다. 이 땅의 교육은 도대체 무엇을 길러낸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저절로 들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적어도 분명한 것은 우리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토론의 형태이든 아니면 책읽기의 형태이든 공부도 하나의 소통행위의 과정인 이상, 이 소통의 합리성이 담보되어야만 공부를 잘 할 수 있겠다는 사실이다.
아래에서는 구체적 인물 2명을 거론함으로써 합리적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그 한 끝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위대한 철학자나 선현을 들 수도 있겠지만 이 인물들은 그렇게 유명하지는 못하다. 다만 소개하고자 하는 한 사람은 지난 1연간 우리 나라 토론의 중심에서 그 질적 버전 엎을 통하여 소통의 재미를 나에게 만끽하게 해 준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학생들에게도 인상적인 제목으로 기억되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을 쓴 사람이다.
나.유시민의 토론하기
유시민은 올해 경기도 고양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이다. 그 이후 TV 토론에 자주 등장하면서 다양한 네티즌이나 시청자들로부터 비난과 칭찬의 형태로 주목을 받게된다.
그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대부분 그의 토론과 발언 내용보다는 상대를 몰아부치는 토론 태도와 관련되며, 칭찬은 그의 치밀한 논리와 토론의 중심을 놓치지 않는 종합력과 관련된다. 여기서 국민들은 유시민에 대한 지지와 반대의 두 편으로 크게 갈라진다.
그런데 이 두 편의 의사소통 방식이 나에게는 주목할 만한 재미를 준다. 그리고 여기서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것도 같다.
즉 그의 토론 태도에 반대를 보내는 네티즌들의 표현을 보면, 토론이라는 것을 아무 이유도 없이 양보와 타협을 해도 괜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토론 곧 소통에서 파트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눈치보기이지 토론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는 오류를 수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애초부터 없다. 다시말해 왜 토론을 하는 가에 대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소통의 필요성이 근원적으로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토론에서는 “...당신의 의견에 일부분 동의합니다만, 저의 의견은 다소 다릅니다....”식의 말투는 필요없다. 동의하는 부분은 합의된 것이고, 토론은 이견의 깊이를 더욱 예리하게 분석해감으로써 잘못된 이해를 반성을 통해 올바른 이해로 옮겨가게 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그의 토론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은 그의 주장과 논리에서 합리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사회에 대한 연대와 신뢰로 나타난다. 공감을 하는 것이다. 소통이 되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통의 합리성, 그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반성의 능력이다.
다.장승수의 가장 쉬운 공부와 의지
장승수라는 인물은 노동 일을 하다가 대학입학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세칭 일류대학의 법과에 합격하여 주목을 받은 사람이다. 지금은 또 법관이 되는 시험에 합격하여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고 있다.
방송에서 이 사람을 인터뷰한 내용을 시청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이 인물이 법관이 되는 본격적인 수업을 쌓기 전에 잠시의 틈을 이용해 권투라는 스포츠를 통해 자신을 또 색다른 도전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는 그가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잡아주고 있었으며, 그에게 권투를 가르치는 사람의 평가로 아주 끈기와 근성이 있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터뷰를 보면서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표현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기자가 묻기를 “당신은 힘든 노동 일을 하다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어려운 법관이 되는 시험에 도전하여 이를 성취하였으며, 이제는 또 권투라는 스포츠를 통하여 색다른 도전을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끝없이 도전하는가?”라고 했을 때, 그가 답하기를 “도전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밋밋하고 안일한 것은 재미가 없다. (내가 특이한 인간이라서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내 삶이 그랬고, 그래서 또 이렇게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향상을 위한 노력은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삶 자체였던 것이다. 어떤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도전이 아니라 그러한 땀흘림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었다.
그는 삶을 정말 재미있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일상의 생활세계 속에서 그는 식민화된 노예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이끄는 주인이었다. 즉, 그는 합리적 의사소통 이전에 이미 실천적 차원에서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글을 마치며 - 왕따 시대의 공부 방법, 그 두 번째 결론
이 글은 새로운 대통령이 자신의 정부를 참여정부라 명명하고 “참여를 통한 토론이 활성화가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힌 이후에 정말로 우리 사회가 벌집 쑤신 듯이 시끄러워진 지난 1년 간의 사회 변화 속에, 공부를 잘 하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어떤 길이 있을 것 같아, 그 사회 변화를 한 번 정리하고자 의도한데서 시작했다.
그 결론으로서 몇 가지 공부 방법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대화와 토론은 이유있는 비판과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문제의 초점을 계속해서 붙들고 나가면서 전체의 맥락을 일관성있게 꿰어내는 종합적인 사고력이 필수적이다. 그렇지못할 때, 논점이 흐려지고 공부의 주제가 흩어져버리는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는 변화에 대한 발빠른 적응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관된 맥락을 놓쳐버린 부족한 논리의 조급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잘 알 수 있다. 그러한 난삽한 융통성보다는 논점을 분명히하는 일관성을 통해 분명한 수정을 요구받을 수 있는 확실한 공부를 해야하는 것이다.
둘째,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서 향상(向上)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공부와 자기 발전의 원리로서 향상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서 강조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공부자체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의 공부는 타인과의 구별짓기를 위한 감각의 취향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자리를 되돌아 보고 스스로 질문할 거리를 마련하는 반성의 취향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의 안주를 죽음으로 보게하고 끝없는 도전을 자연스럽게 기울이게 만들어줄 것이다. 공부가 주는 기쁨은 자문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자문을 통한 고민이, 이미 앞선 누군가가 같은 고민을 했고 그가 제시해 놓은 해답이 내가 고민해 들어가고 있는 방향과 일치됨을 깨달을 때 공부는 기쁨이 되는 것이다.
니버와 또 달리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희망의 이유’라는 에세이에서, 비도덕적 사회집단으로서가 아닌 사랑과 연민과 자기 희생의 자질이 인간에게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비록 원숭이 무리를 연구하면서 문화적 종분화라는 것이 가져온 비극과 전쟁을 보면서도 구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정말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 다.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서로를 고문하고 싸우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가장 고결하고 관대하며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들, 모든 독특한 존재들은 진전을 이루어나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매일 매초마다 이 지구상에는 마음과 마음 - 선생님과 학생, 부 모와 자식, 지도자와 시민, 작가 또는 배우와 일반 대중들 - 이 만나서 변화를 이루 어내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변화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씨앗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잘 할 수 있을 때, 이러한 씨앗들이 더욱 풍성하게 열매 맺을 수 있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