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한참이던 1952년 1월, 북한군의 주요 보급로로 사용되던 교량과 철로를 미공군이 집중공격하자 북한군은 전쟁물자를 운송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중국으로부터 수송된 전쟁물자는 평양으로 모였다가 다시 중서부전선으로 보급되고 있었고 대동강 지역에는 서부전선에서 필요한 전쟁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필수적인 10개의 보급로가 있었는데 그 마저도 미공군에 의해 하나둘씩 끊겨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던 철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승호리 철교' 였고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사실 승호리 철교는 대동강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물로 인식되어 미공군의 공습으로 일찌감치 파괴되었지만 북한군은 미공군이 다른 교량을 파괴하는 동안 본래의 철교로부터 200m 아래에 새롭게 철교를 가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많은 대공포를 배치하였으며 대공포의 강력한 화망은 베테랑 조종사라도 쉽게 뚫을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당시의 많은 미공군의 조종사들이 북한군의 대공포로 인하여 승호리 철교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북한군의 대공포 공격에 희생되는 조종사들이 생겨날 정도로 작전이 연일 실패하자 미공군 사령부 전술회의 에서 한국공군에게 맡겨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당시 이 임무를 인계받은 강릉기지의 제10전투비행전대장 이었던 김신 대령(1922~현재생존 ; 백범김구의 차남으로 제6대공참을 역임 공군 중장으로 예편)은 한국공군의 명예를 걸고 승호리 철교를 반드시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1952년 1월 12일 김두만 소령(한국인 최초 100회출격 기록자)은 F-51(MUSTANG)항공기 8대를 이끌고 강릉기지를 이륙하여 공격을 실시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첫공격에 실패한 우리나라 공군은 미공군의 교범에 따라 8,000ft에서 강하하여 3,000ft에서 폭탄을 투하한 후 이탈하는 전술로는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뒤인 1월 15일, 윤응렬 대위와 옥만호 대위가(두분다 현재생존) 각각 3기의 MUSTANG을 이끌고 출격하였으며 그들은 4,000ft고도 진입후 1,500ft까지 강하하여 공격하는 초저고도 공격전술을 구사하면서 북한군의 거미줄과 같은 대공포화망을 뚫고 폭격을 시도했습니다.
[승호리 철교 폭파 (공사 박물관 소장)]
이는 상당한 위험이 뒤따르는 공격 방법이었지만 필승의 신념으로 무장한 우리 공군 조종사들은 폭탄12발, 로켓탄20발, 기총 4,700여 발을 사용하여 마침내 승호리 철교를 폭파하는 빛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의 성공은 당시 세계 최고의 공군력을 자랑하던 미군조차 성공하지 못했던 고난도의 임무를 우리나라 공군이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