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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순절교파 견해(見解)
렛셀 피. 스피틀러
50억 인구가 이 시점에서 이 시대에 지구촌에 살고 있다. 그 중 1/3인 약 16억 인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가운데 약 절반인 9억 6백만이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한다. 그렇지만 개신교도는 로마 가톨릭과 비교해서 약 1/3보다 약간 많이 있다. 곧, 개신교도가 모두 3억 5백만이 개신교도이다. (기본적으로 개신교로 분리하지 않은 성공회 5천 2백만을 계산하지 않았음),
오순절교파의 인구 통계
이미 1982년에 데이비드 비.바렡(David B. Barrett)이 세계 그리스도인 백과사전을 출판 했을 때, 오순절 교회파와 카리스마파가 성령강림운동의 단일 교파로서 가장 큰 부문을 형성했다는 것이 분명해 졌다(1). 1988년 중간 통계에 의하면 세계에 알려진 21.4%회원이 오순절교파/카리스마파인 3억 3천 3백만 명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순절교파의 영성이 새로운 주류인 개신교 영성으로 조용히 수면위로 뜨게 되었다. 그 자체로서 운동에 의하여 동일하게 비현실화된 상태와 크기로 그리스도교회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통보된 것을 제외하고 그리고 모든 숫자가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 그리고 주류계인 개신교 부문을 따라 고전적인 오순절교파와 합쳤을 때 통계는 전체로서 그 규모를 능가 하였다. 만일 통계적인 우위보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오순절교파의 영성은 분석을 요구한다.
누가 오순절교파/카리스마파인가? 이처럼 넓게 다양한 그리스도인의 군집은 시골 산에 있는 교회에 모여든 아파라치아 산의 뱀잡이(땅꾼)으로부터 보통 여섯자리 급여를 받는 다중적인 스텝을 가지고 있는 수백만 달러의 도시의 대형 교회에 이르기까지 넓은 분포를 이루고 있다. 운동은 변한다. 시골 펜실바니아 2백여개의 꾸밈 없이 간소한 붉은 벽돌의 교회, 캘리포니아 오랜지카운티에 있는 종전에 슈퍼마켙을 급히 개조한 교회, 남 캘리포니아에 있는 테마파크(테마 공원), 오클라호마주 주류 대학 켐퍼스의 중앙에 있는 기도탑, 어머니 간호사, 피업 트럭과 남부 시골의 직공들, 견고한 상업 중심 TRANS AMS와의 여피족, 이른 아침 TV에서 소리치는 설교 그러나 독일의 천막 복음전도사의 그림이 아프리카에서 고에너지 재생 회합에 수천을 기록하고 폭약통/방갈로 병원, 에집트의 고아원, 아프리카 서해안의 나병원, 노르웨이의 일간 신문, 미시간 학교 건물을 부가하여 리스로 꾸민 그리스도 주간 학교, 기타 그리고 가톨릭 미사에서 손을 드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오순절 교파 혹은 카리스마파이다.
오순절교파의 기원과 강조
만일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변화가 지정학적으로 일정하고 예측 가능하였더라면 오순절교파는 없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언제나 발생하나 그 변화는 천문학적이다. 누가 오순절교파/카리스마파인가? 이들은 어떻게 다른가? 어떤 분별은 순차적이다.
오순절교파와 그리고 모든 변화의 카리스마교파는 성령에 강조를 두거나 성령의 은사의 현대적 적절성 안에서 그들의 신뢰에 의하여 구분되어진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모두 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정교회(비록 비삼위일체 변화가 언급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개인적 종교적 재생(새롭게 함)을 평가한다. 그들은 회복 충격을 반영한다. 신약 성경의 교회를 가끔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유사성은 끝난다. 오순절교파는 20세기의 출생을 측면으로 수십 년간 유래한다. 그들은 웨슬리교파를 주로 한 기원을 가지고 신흥 부흥운동주의자 그룹으로 비록 전체는 아니지만 19세기의 거룩한 교회로부터 크게 발생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삶에서 보다 더 어떤 것의 추구를 통하여 온전한 사랑, 그리스도인 완전, 성화와 결론적으로 성령 안에서 세례로 여러 가지로 불리 우는 버너 체험이후 개인적인 것과 교회적 갱신을 찾는다.(3) 거룩한 신체(육신)로부터 오순절교파를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의 받아드림이었다(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다양성이다). 19세기 4/4분기에 여러 가지 거룩함의 그룹이 성령 안에서 가르치며 세례를 체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순절교파의 운동의 탄생을 주었던 이 세례의 첫 “육신적 증거”로서 방언 말하는 오순절교파의 주장이었다. 다른 영적 선물, 이를테면, 치유는 초대 오순절교파 교회에 의하여 인정되었다.
아마도 생리학적 특이성 때문에 방언 말하기는 카리스마파에게도 마찬가지로 오순절 교파에 의한 다소간 시금석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대중적인 용법 안에서 쉽게 얻는 카리스마적인 특징이 핵심적인 품질로 혼돈은 있지만 성령강림운동과 카리스마파의 두 가지가 “방언운동”으로서 경멸적인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언급되었었다. 간결한 역사적인 기원은 시간 위에 부드럽게 옷을 입는다. 그래서 오늘의 세계는 퀘어크, 침례주의자 그리고 정신없이 손을 흔드는 감리교파, 기본적으로 가치를 추락시키는 조건을 많이 유포시킨 담금과 조직화를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 주변에서 모든 오순절교파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기원에서도 하지 아니한 방언 말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침례의 육신적인 증거이다. 대부분의 현대의 카리스마파(은사주의파)는 방언의 필요성을 첫 번째로 주장하지 않는다. 정말로, 카리스마파 가운데 망설임이란 오순절교파를 그들로부터 분리하는 기본 특징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약간의 독일인과 남미 고전적 오순절교파 그룹을 포함하여 첫 증거로서 방언의 단절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북미오순절교파 공동체(PFNA)의 기본적 신뢰이다.
고전적 성령강림운동주의의 변화
오순절교파 설립 명칭으로 기본적인 전기독교 교회 단체인 고전적 오순절교회파의 변화를 종교가족의 빈틈없는 분석가인 베네딕트 학자 킬리안 맥도널(Kilian McDonnell)은 세기의 전환점 위에서 형성되었던 이러한 그룹으로 고전적 성령운동주의 용어를 주조했다. 역사적으로 잘못 전달된 어떤 것이 오순절교회를 만들어 냈다. 세계 2차 대전을 따라온 이레네 전세계기독교회 환경을 만들었던 관용 없음이 새로운 성령 세례의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은 오순절 교파의 가르침을 전교회가 적용할 때를 제외하고 그들의 가정 교회에서 인색한 환영을 발견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지리학적 선상 또는 두 번째 카리스마적 지도력(개인적과 신학적 카리스마)을 따라 오순절교회의 통치의 형성에로 인도했다.
가장 오래된 고전적 성령운동의 형태로서 웨슬리파의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두 번째 정의된 사역으로서 성화의 개념을 세우는데 견고하게 집착하였다. 곧, 추가 변화, 개인적 거룩함을 향진하는 정결함의 체험, 그리고 어떤 이에 따르면 죄에 대하여 굽혀지는 것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함 등이었다. 이 그룹에서 방언 말하기를 수반하는 성령 안에서 침례가 그리스도인을 위한 세 번째 분별 체험이다. 곧, 변화와 성화가 따른다. 이 침례는 개인의 거룩함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선교(복음주의 또는 목회지도력 같은 그리스도인 봉사)를 위한 권한을 준다. 그러한 교회의 소생의 사례로 하나님의 교회(*테너시주 클리브렌드) 오순절거룩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의 교회를 포함한다.
20세기 초기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강조한 윌리암 더햄(William Durham)의 가르침을 통한 그의 종교적인 배경은 성령 운동의 나타남의 두 번째 변화-곧, 침례 또는 개혁주의적 성령운동에서 거룩함의 전통을 포함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더햄은 성령 안에서 성화와 세례를 거룩한 오순절교파에 의하여 두 가지 부속적인 체험들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제 이 성령의 두 번째 사역을 성령 안에서의 세례라고 부른다. 오순절교회의 이 부분에 의한 성화는 개혁주의 노선을 따르는 견해이다. 그리고 중생으로부터 죽음(또는 두 번째 오는 것, 무엇이 먼저 오든지)으로 진행된다. 이 그룹의 사례로서는 국제포스퀘어복음교회(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 하나님의 성회 그리고 열린성경표준교회가 있다.
고전적 성령강림운동주의의 세 번째 개념이 1916년에 일어났다. 어떤 교리적인 성명을 피하는 아이디어로서 2년 일찍이 설립된 청년하나님의성회의 2회 일반 총회에서 삼위일체(론)를 명확히 하자는 성명이 논점이 되었다. 그 활동은 문자적 성경 해석에 대하여 특정적인 오순절교파의 굴곡을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새롭게 움트는 가르침을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로스 안젤레스와 파사데나(Pasadena) 사이 캠프 회합에서 죤 세페(John Scheppe)는 사도행전으로부터 오직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를 새로운 세례주의 공식으로 결론지었다. 사도행전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고 마태복음 28장 19절의 삼위일체 공식을 사용한 곳이 없다. 유아기에 초기에 성령 강림운동에서 중요한 지도자들은 재세례를 받아드렸으며 이때 “예수님의 이름으로”를 수용하였다. 신학은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이며 예수 홀로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와 성령은 단지 호칭이거나 예수의 개념인 것을 어떤 가르침은 나타냈다.
성령강림운동의 이 부분이 반대로 삼위일체의 인격의 일신론의 종류로서 표현되었다. 이 가르침을 옹호하는 큰 그룹은 연합 오순절교파교회이다. 다른 것은 세계오순절교회성회(Pentecostal Assemblies of the World)이다. 이러한 “예수의 이름” 또는 일신론 오순절교파는 세계오순절성회에서 배제된 오순절교파를 설립하여 피하였다. 그러나 가르침은 인도네시아에서 아프리카 성령운동의 어떤 부분에 그리고 제3세계 어느 곳에서나 꽃을 피웠다.
신 오순절성령강림운동, 카리스마적 운동
성령 강림운동과 카리스마 운동 사이의 관계는 항공기와 헬리콥터 사이의 닮음과 같다. 이 둘은 일반적으로 같은 일을 한다. 다른 점보다도 유사한 점이 더 많다. 어떤 것은 모양이 나누어져 있다하더라도 뚜렷한 특성이 적용된다. 그리고 한편으로 개발되지 않았던 것이 다른 편에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 1/4분기를 통하여 성령강림운동이 점차적으로 성장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의 반대로, 특별히 2-3십년에 미국 오순절교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의 교리적인 특징(예를 들면 스콧필드의 섭리주의)을 얻었으며 더 한층 그것들을 채택하였다.
그렇지만 세계 2차 대전 이후, 성령강림운동은 트랙을 가로질려 움직였다. 위톤의 복음주의”(Wheaton evangelicalism")이라 부르는 것 안으로 근본주의 운동의 새로운 탄생이 고상한 복음주의를 허용하는 새로운 지도자들의 보다 관대한 신학적 환경과 오순절교파에 의하여 개최된 성령에 관하여 감지된 호기심 있는 개념에 대한 보상을 위하여 오순절교파의 선교사의 공적을 만들어 내었다. 1960년에 하나님의성회의 대표가 복음주의 국가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0년은 또한 캘리포니아 반뉴에스(Van Nuys)에서 영국국교회(감독교회파)의 감독 목사인 데니스 버네트(Dennis Bennett)가 봉사할 때였는데 그 역시 성령의 세례를 개인적으로 체험했다는 것을 발표했다. 다음 해인 1961년 하나님의 성회는 오순절교파의 체험의 방랑하는 해석자 데이비드 두 플레시스(David 여 Plessis)의 성직자 신임장 철회를, 1962년에 귀결된 활동을 시작했다. 예일, 프린스턴, 교회의 국가회의의 리버사이드 드라이부 교구(the Riverside Drive precincts of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제네바주재 교회연합의 세계회의(World council of Churches circles in Geneva)로 플레시스(Du Plessis)의 여행과 로마 가톨릭과의 회합에서 교회의 복음주의적 상태를 새롭게 성취하기를 증명했다. 그들은 선행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베넷트와 프레시스는 카리스마적 운동의 선구자로서 인식되었다.
베넷트는 영국구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데이비두 두 프레시스는 그들 자신의 교회에 머물면서 새롭게 성령의 세례에 대하여, 그의 상담에 대하여 넓고도 은혜롭게 기억되었다. 정말로, 이러한 충격(평화적인 전후 세계교회주의)안에서 나타난 운동으로부터 성령운동을 지울 수 없도록 분별하게 되었다.
카리스마파가 그들 자신의 주류교회에 머물면서 특유한 카리스마적 봉사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반면에 오순절교파는 빗장을 걸고 그들 자신의 종파를 형성하였다.
60년대 말까지 카리스마적 영성(은사적 영성)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나타났다. 몇 사람의 눈에 알아보기 쉬운 경우에 카리스마적 위협이 교파끼리 묶어 두려는 지역 오순절교회파의 집회를 왜곡시킨다. 이러므로 오늘 날 독립적인 카리스마적파 교회들이 존재한다. 신앙의 형태와 실천을 표현하는 어떤 것들은 카리스마파와 오순절교파 가운데 어디서나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카리스마파적 운동의 덩어리는 기존교파 지도위에 널리 펴졌다. 거의 회중을 포함한 그리스도 교인들의 주요 부분 또는 교구 안의 소그룹을 형성한 오순절교회의 경건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양친의 교파와 더불어 좋게 세워감의 안에서 국제적인 봉사로 조직된 사무실은 오늘도 장로교, 개혁주의 교회, 감리교회, 영국국교회, 루터교회, 희랍정교회, 로마 가톨릭, 메노파교회,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기타 교회가 봉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한 노력들이 오순절 교파의 강조가 초기 역사적 거절로 연결된 성령강림운동에 신학적 근접이 존재하는 곳에 최소한의 성공이 있다.
웨슬리파 감리교회와 나사렛 교회의 회원 봉사 목표로 둔 한 그룹은 공식적인 환영이 없는 이해할 수 있는 기쁨을 가진다.
리스마파의 변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오순절교파의 가치를 탐색하면서 주류 안으로 신앙과 실천, 작은 신학적 또는 비교적 교회조직의 일관성이 전체적으로 고전적 성령운동의 주장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로마 가톨릭 카리스마는 그들의 교회에 확고한 충성을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공식적으로 성직자 계급제도4)에 의하여 추천되었다. 비록 로마 신학자들이 세례(보통 유아)의 성례식에서 “중생”된 몸을 입게 된다하더라도 오순절교파 세례에 의하여 새롭게 된 평신도 카리스마적 가톨릭교인들은 유능한 카리스마적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성령의 흘러나옴으로서 성령 안에서 침례의 보다 실제적으로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된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므로 카리스마적 신학은 특별한 교회 조직적 환경 안에서 조성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교회 두 그룹의 건강한 아카데미적인 전통은 카리스마적 신학을 패션으로 하는 점을 취했으며 신앙부흥운동을 본래 기조로 하고 있는 고전적 오순절교파는 오는 날에 반지성적 가정과 실제적으로 설립된 신학을 거의 만들어내지 못하였으나 변화되었다.
요약하면 성령강림운동주의는 금세기 전반부에 그리고 카리스마운동은 후반부에 일어났다. 오순절교파는 고전적 오순절 종파를 형성하였으며 카리스마파는 주류교회인 그들 자신의 교회에 그대로 남았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오순절교파는 첫 증거로서 방언을 주장한다. 카리스마파는 일반적으로 방언을 말하나 그것을 필요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오순절교파는 생명적인 그리스도인 체험의 엄격한 계속하여 일어나는 사건을 가르친다. 침례파 오순절교파 2개의 웨슬리안적 성령강림운동 3 개의 경우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카리스마적파는 카리스마적 체험에 맞는 방법을 발견하고 그들의 현존하는 교회 조직과 신학적 전통 안에서 새롭게 되는 방법을 발견한다. 적어도 북미 변화에서 오순절파는 그들의 거룩의 기원으로부터 엄격한 사회 관습과 근본주의의 충돌을 반영하는 것 같다. 곧, 카리스마파는 담배를 피우거나 춤추는 것들에 참가하며 그들의 교회의 관습에 의존한다. 오순절교파는 장수하는 시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교단 본부, 학교, 고아원 그리고 하층 사회의 거리(우범지대) 사역 등이 예이다. 카리스마파 운동으로서는 사회적으로 덜 개발된 그들의 설비 기관을 새로운 회당(회집)으로 구성하였다. 최근에는 잡지 또는 선교 사역을 설립 했다. 그리고 주류 교회 본부와 좋은 설립 관계로서 카리스마파 운동이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영성이란 말의 두 가지 뉘앙스가 구별 되어야겠다.(5) 1909년 이래로 영성이란 말은 믿음(신뢰)과 특히 종교집단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하여 종교적 사회에서 사용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용어의 뜻은 개략적으로 초기의 기술적인 말인 종교, 경건(religio, pietas, eusebia, leiturgia), 심지어 euthusiasmus와 같은 유사한 것이다. 이런 감각에서 언어(말)는 과학적으로 중성이다. 그리스도인 영성의 전통적인 변화를 떠나서 사람들은 몰몬교, 이스람교 또는 불교 영성을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회학적 감각에서 “영성”은 성령 강림운동의 단어에 대한 고향이 아니다. 비록 단어가 그러한 전통의 약간의 나타난 학자들 가운데서 제한된 사용이 아니다. 비록 단어가 그러한 전통의 약간의 나타난 학자들 가운데서 제한된 사용을 발견한다. 사실, 빈번한 것에서 떨어지는 것은 형용사인 영적인 것이다. 오순절교파 가운데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성은 영적 존재의 개인적 또는 개인적인 질에 관계되어 진다. 그리고 “영적”이란, 전통적인 자체의 특수 용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을 의미한다. 곧, 성령의 사건에 열려 있으며 하나님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방언을 말하는 것 이외에 적어도 둘 또는 세 가지 영적 은사를 아마도 받은 사람, 곧 치유, 지식, 영분별 또는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말한다. 영적이란 다른 말로하면 대체로 성령강림운동으로서 운동 바깥에서 통상적으로 신앙으로 불리어지는 것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경우이거나 오순절교파에서의 용어로서는 영적이라는 것 또는 영성은 개인별 또는 평신도와 성직자별 개인적 자질로 간주된다. 카리스마(은사)의 사용은 개별적으로 추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 날의 은사는 너무나 장성하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은 젊다. 기독교교계의 어떠한 흐름 가운데서 카리스마파가 영성이란 용어는 그들이 형성했었던 교회의 전통의 충격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어느 현시대의 카리스마파는 오순절 교파의 용어인 이 뉘앙스를 비판 없이 채택하였다. 이 오순절교파 영성이란 용어의 뉘앙스는 등급을 허용하는 개인적인 경건의 자질과 연계된다. (보다 영적이라든가, 영성의 연약함을 뛰어 넘는다 등) 그러한 언어는 성령강림운동의 두 가지 모습을 재현한다. 곧, 개인주의에 높은 가치를 둔 대부분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이 장에서 논의 하는 것은 성령강림운동이 그 자체의 행하는 것을 거의 생각할 수 없다는 질문을 표현한다. 대부분 오순절 교파 열성주의자들은 영적 건강 운동이 평가되어질 이러한 질문을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오순절교파를 이해함에 있어서 운동이 아니다. 그러나 영성을 가진 운동을 만들어 내려는 개인 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드물게 용어를 연계 시키고 다음에 숙련의 지표와 이 책의 주제를 유지하는 오순절교파의 영성을 드려내기 위하여 충분한 포괄적인 이해로 고전적 오순절교파의 형태를 마련한다. 새로움 때문에 다양성과 카리스마파 영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기에 마련하였다. 그것은 오순절교파가 무엇이라든가 또한 카리스마적이거나 그 반대를 추정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카리스마적 영성을 구분할 수 있는 견해는 모체적인 운동인 성령강림운동의 관련된 양태의 내용 안에서 언급되어질 것이다.
성령운동 가운데서 체험의 장
영성의 차원에서 개인의 체험을 인지하는 것이 어설프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성령강림주의의 영성은 오순절교파 중에서 개인적인 신앙적 고상한 역할의 이해를 가지지 않고서는 파악할 수 없다. 신흥부흥운동 종파로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으며 가끔 각성한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 개탄한바 있었던 이기주의는 오순절교파 가운데서 장점이 있음이 분명하다.
복음주의적 이웃처럼, 그들은 예수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서 받아들이기 위하여 어느 곳에서나 사람(남/여)을 부를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성령 안에서 세례를 진심으로 찾는 신자들을 추가로 열심히 권할 것이다. 오순절교파에서 이해하기로는 이 성령세례는 세례 받는 신자가 방언을 말할 때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언이 사람의 인두에서 일어나므로 오순절교파 영성은 개인적인 체험에 높은 특별한 요구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사도행전 2, 10, 19장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오순절교파가 이러한 장, 절을 번역/통역/해석하므로)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체험을 가지지 않고서는 오순절교파 교인이 될 수 없다.
오순절교파에 의하여 실현된 체험에 대한 이 높은 고려를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가족”이란 고전 “새로운 시작(Lesslie Newbegin)” 이란 책에 요약된 분류학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6) 그 작품에서 카리스마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남인도의 교회 사제가 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오순절교파를 인식하였다. 새로운 시작((New begin)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려고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넓게는 가톨릭 전통에 속한 성공회와 다른 교회를 포함 시켰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정리하는 것이 정당하다. 새로운 시작은 지금 고전적 오순절교파의 운동이라 부르는 오순절 용어의 사용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오순절교파는 분명히 그들의 이름이 가지고 있듯이 새로운 시작의 범주 안에 속한다.
새로운 시작에 의하면 개신교는 믿음의 회중으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정교회가 중심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신성한 연합으로서의 가톨릭은 인정된 역사와 가견적(可見的)구조가 근본이며 참여에의 순종인 교회이다. 그리고 오순절 교파는 성령의 교제로서의 교회를 생각한다. 그리고 체험이 주축이다. 이러한 각각은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을 나타낸다. 모두 합법적인 그리스도인이지만 각각은 아마도 가지각색이다. 그리고 물론 각각의 모양은 세 가지 교회론(학) 어느 하나로 넘쳐 흘렸다.
오순절교회의 순종
가톨릭의 순종의 사제, 새로운 시작의 범주와 개신교/정교회는 성령강림운동을 마찬가지로 나타내는 순종은 찬송가의 주제로서 발전하였다(예를 들면, 믿음과 순종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엄격한 윤리의 선을 따라서 형성된 경건의 율법적인 형태를 따라 인도되었다. 곧, 초기에는 극장, 댄스, 노름, 담배 피는 것, 술 마시는 것 그리고 좀더 타락한 곳에서는 혼욕, 콜라마시기, 카페인 음료, 주일날 운동경기,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을 피하는 것 등이다.
물론, 로마 가톨릭이 오순절 교파가 될 때 순종의 국면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한 가지 표시는 가톨릭적 오순절 기도 그룹이 보통 사례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로마 교회의 구조와 절차와 마찬가지로 지역교회에 확실한 충성을 나타낸다.
시골 율법주의의 지역적 사례가 아직도 발견되어진다. 그것은 순종의 관련으로서성례전적인 구조 안에서 성령강림운동의 핵심을 그리기 위하여서는 부정확한 것이다. (사실, 오순절교파는 성례주의 아래서는 불편한 것이다). 체험이 5중적 요소와 장소를 차지한다.
오순절교파 정교회
정교회 역시 성령강림운동의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그 특색은 늦게 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14년에 하나님의성회가 형성되었을 때, 교리적인 성명이 제시되지 않았다. 반대로, 서문과 규약의 해설은 이러한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다.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른바 하나님의성회(하나님의 감동으로)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또는 우리 자신을 세우는) 교구로서 인식하지 않으며 그 교구는 회원들에 대하여 법과 믿음의 조항들을 제정하고 형성하며 비성경적인 비판을 가지며 교제와 비교제의 비성경적인 부분을 창출하고 요한복음 17장과 바울의 에베소서 4장 1-16절의 가르침은(이것은 우리의 마음 깊이 새긴) 그리스도의 기도에 반대되는 첫 태생의 일반 성회의 다른 회원들과 분리시킨다.(8)
단지 2 년 뒤에 최소의 교리적인 성명이 젊은 교회의 일반 삼위일체 수락이 “예수이름” 계시로서 알려지기 시작하는 것에 의하여 위험에 처하였을 때 급하게 모였다. 교리적인 성명의 근본적 전형으로서 내용은 풋내기 운동을 통하여 쓸어내기가 되었던 “예수의 이름”의 가르침의 간접적인 항변을 향하여 특정적으로 되었다.
성명의 두 번째 심위일체의 주장의 올바른 직행의 발표는 실제로 나머지 모든 성명을 함께 집어넣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포함한다. 믿음 자체의 의하여 교회를 정의하려는 경향을 가진 개신교-뉴비긴(개신교-새로운 시작)의 정교의 특색에 우선하여 위톤(Wheaton) 복음주의와 더불어 하나님의 성회와 관련된 전후의 결과로서 오순절교파 가운에서 보여 진다. 그리고 1942년 설립된 복음주의 국가협의회(NAE)안에서 가장 큰 회원 교회가 되었다. 일찍이 설명한바있는 데이비드 두 플레시스(David du Plessis)의 성직 박탈을 유도하는 옹호가 정교회의 질문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인도가 진정으로 복음주의적 오순절교회를 유도하였는가? 1961년에 발생하였던 하나님의 성회의 믿음의 성명의 유일한 대안으로 인도한 동일한 무드가 나타났었다. 데이비드 두 플레시스의 목회, 선교 자격증명서의 종료의 결과로서 일어났을 때가 정확히 1961년이었다.
신학적 의식 안에서 현저하고도 근원적인 이슈인 “오직 예수”로서 1916년 근본적 진리로 성령을 채택한 지도자들이 무죄에 관하여 전형적인 보수적인 기독론 성명이 없었다. 경건이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 새로운 복음주의의 문화에 대항하여 세울 때 매우 눈에 띄게 생략이 있었다. 복음주의는 그들의 근본주의자들의 선조들의 높은 기독론을 보존한다. 그리스도의 경건에 대한 새로운 부분을 소개했던 1961년 변경은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경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가) 처녀 탄생(마 1:23, 눅 1:31, 35)
(나) 죄 없는 생명(삶) (히 7:26, 벧전 2:22)
(다) 기적 (행 2:22, 10:38)
(라) 십자가 상의 대속(고전 15:3, 고후 5:21)
(마) 죽음으로부터 육체의 부활(마 28:6, 눅 24:39, 고전 15:4)
(바) 하나님의 오른편에 오르심(행 1:9,11, 2:33, 빌 2:9,11, 히 1:3)
성명에서 형성된 16 점이 주님의 만찬과 물세례를 취급하는 이전 분리점 안으로 통합되어 보존되었던 것이다. 근본적인 1916년 성명은 16개를 포함하지 않으나 1916년(또는 그 이전에) 17개점이 집합적 종파의 역사적 보존이 없었다. (10).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 정교를 돌아다니는 보다 많은 증거가 교리적 순수성에 대한 위원회가 1979년에 설립되었다. 이 몸은 강한 가치로서 지방 교회 주권 운동 안에서 쉽게 일어나는 새로 만들어진 교리적인 강조를 평가한다. 그룹은 교회의 개인적 목회에 의하여 표현된 가능한 표준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검토(사정)한다. 그리고 정교회의 질적인 면에 관하여서는 추천을 한다.
오순절 교파의 체험
그래서 비록 순종이 율법 안에서 그리고 성령강림운동의 헌신 안에서 빛나고 그래서 정교회가 공간적으로 성장한다고 할지라도 오순절교파를 위한 진정한 신앙은 개인적인 체험의 사건이다. 그들은 쉽게 하나님의 체험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개인적인 체험의 증거가 있고 없음에 의하여 곧, 그들의 영성인 다른 사람의 그리스도인적 자질의 진성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실은 일찍이 오순절교파의 봉사를 이룬 증거 할만한 회합 안에서 보도되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상이 사라지게 되었다. 열린 나눔의 작은 그룹이 개인적 영적 갈등이 있는 곳에서 있었고 장점이 보도 되었으며 서로간의 기도가 교환되었다.
때때로 대중의 설교를 위하여 은사를 가진 사람이 영적 체험을 고조시킨 극적인 에피소드를 토대로 한 목회를 개발할 수 있다. 오순절교파의 복음주의자인 데이브 루버(Dave Roevers)는 예를 들어 물질과 성적 탐욕을 향한 유혹으로 수천 미국고등학교의 학생을 사로잡았다. 빗나간 베트콩 탄환을 그의 손에서 착화시킨 인산염 수류탄으로 말미암아 생긴 뚜렷한 얼굴 상처는 루버가 새로운 감각의 애국주의와 신선한 개인적 도덕심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데이브 루버는 원형적 오순절교회파의 선교를 체험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을 대신하여 말씀이 말하여지도록 하여보자. 체험의 단계를 잘 보상받을 수 있는 지원자에 대한 고용주는 그들에게 고려할 수 있는 기술(숙련)을 준다. 아픈 사람은 많은 경험을 가진 의사를 찾는다. 의사들은 자신들의 훈련에 의하여 질병에 대하여 특별히 맞는 처방을 그들에게 준다. 아마도 미국 실용주의는 그 국가에서 오순절교파 가운데서 개인적인 신앙 체험의 역할을 격상 시켰다.
그래서 세계적인 오순절 교파는 개인적인 습관의 함정과 의미 없는 인생 스타일로부터 분명히 괄목할 만한 구조(구속)를 갖는 개인적 이야기 보고의 사람들이다. 특별히 흥미 있는 방언의 말함에 대하여 오순절 교파가 만드는 것은 친밀한 개인적인 체험이다.
개인적 체험은 자연스럽게 과장될 수 있다. 지역 회중 안에서 사회적 환경 안에서 좁다란 방법 안에서 개인적인 체험의 만족할 만한 단계는 쉽게 정의 할 수 있는 고정 관념이 고안되었다. 시작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은 신의 불찬성으로 회중의 거절을 혼돈하였다.1)
규모의 다른 편에서 개인적 체험의 강조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하는 자기중심의 영적 나르시즘으로 인도된다. 또한 더 나쁜 상태로서는 규범 수용과 맞지 않는 체험에 대한 체면을 키우는 엘리트주의에게도 있다. 그러한 그룹은 그들에게 공동체 또는 교회조직에 참가로 인하여 실제 참석치 못하도록 하는 격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한 특징이 어떤 지역 오순절교파 회중에게 확실한 진실인 경우, 그들은 운동을 전제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오순절교파 가운데 현명한 지도자가 많이 있다. 특별히 entrepreneurial 독립 카리스마파 지도자들과 취급하는 두 세대를 넘어 개발된 확대되고 기록된 협회 안내서 오순절교회의 설립에서 있었다. 그들의 최선으로서 오순절 교파는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을 주장하나 교회조직의 책임으로서 개인주의에 균형을 둔다. 말하자면, 용어가 비정상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면 오순절교회를 대강 살펴보면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의 고전 “신앙의 체험의 변화”에서 유행했던 역사적 종교적 감각 안에서 “신비한 체험”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방언을 말할 때 신앙적 유년기에는 보통 영적 죽음(slain in the spirit)의 존재라 불렀다. 오순절교파는 의식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모호한 "무“ 또는 자신의 사라짐을 찾지 않는다. 그들의 이따금 비전의 보도는 보다 눈을 뜬 것이다. 오순절 교파는 열반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규율의 예외가 로마 가톨릭적 성령강림운동 가운데서 나타난다. 그것은 신비적인 체험의 풍부한 전통을 끌어낸다. 한편으로 위대한 로마 가톨릭 신비 가운데 방언을 말하는 것에 대한 참조로서 십자가의 요한 또는 아빌라의 테레사 같은 사람들이다. 로서는 불충분하다.
오순절교파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의 탁월성이 분명할 때 오순절교파의 영성의 다른 모습이 준비될 것이다. 이것들은 개인적인 증거에 위치한 높은 가치를 포함한다. 생음악, 보통 약간 시끄럽게 그리고 질서 없이 보이는 구송기도와 깊은 신앙적인 감각,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표시된 흥미 그리고 비틀림의 감각이 일어날 것이다. 또는 첫 번째 오순절 교파의 체험의 산고 안에서 지나친 감성주의를 특징 짖는 것이다.
기도(祈禱)
전형적인 오순절교회의 계획 가운데서 이따금 동일한 기도를 연합하여 소리를 내는 회중을 듣는 방문자들이 있다. 오순절교회파가 그들의 가장 예배적인 때 사람들은 결혼식에서 그러하다. 가끔 읽는 기도를 포함하는 전통적인 결혼식에 사용한다. 또 다른 것은 주님의 기도이다. 일반적인 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이용되거나 보다 크게 전 세계적인 기독교 모임에서 사용된다. 보통 주님의 기도(주기도)는 더 한층 예배적 카리스마 교회 가운데서 보다 빈번하게 그리고 예지적인 것으로사용된다.
루터교회, 감독(감리)교회l, 로마 가톨릭, 여기서 그것들은 전통적으로 견고한 부분이 분명하다. 오순절파는 일반적으로 다르게 가끔 인용되지 않은 한 구절을 놀랄만한 복수형 기도로서 친근함을 보이지 않는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재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오순절 교회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혼자서 할 수 있다. 또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연합할 수 있다. 적은 수이거나 또는 수천 명이 카리스마적 집회에 함께 모일 수 있다. 여러분은 제나라 말(vernacular) 또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 즉시 한꺼번에 방언으로 함께 기도하는 오순절 교파를 듣는 것이 드물다. 각자는 다른 사건을 말한다. 찬양 지도자들은 우리와 함께 방언으로 하나님에게 기도 드립시다와 같은 말로써 그러한 표현을 요구할 수 있다. 많은 지방 교회에서 전통은 목화자의 지도 없이 잘 성정되어 있다. ‘기도 합시다.’ 라고 선언될 때 모두가 즉시 한꺼번에 방언으로 기도한다.
세속적인 소리가 옆에서 날 때 이것은 기도를 요청한 목회자에 의하여 제의된 제나라 말(vernacular)로 기도에 의하여 따를 수 있다. 또는 지도자가 지정된 어떤 사람에 위하거나 할 수 있다.
1930년에서 1940년경에 미국고전오순절교파는 기도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오늘 날 그들은 일반적으로 서거나 앉아있다. 어제와 지금 모임 개인기도에서 그들은 손을 높이 들기를 원하며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손가락을 편다. 손바닥을 앞을 손을 머리위로 들어 완전하게 펴고 가끔 유머러스한 모양을 하는 오순절 교파와 발꿈치를 허리에 붙이고 손바닥을 위로 팔을 펴는 카리스마파 사이의 구분에서는 가상보다 진실이 있다.
오순절 교파에서는 자국어를 말하는 기도가 연계된 세 가지 경우가 있다. (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주의자들도 동일하다). 이것은 복음주의자 또는 목회자가 회중에게 그를 따라 기도하기를 되풀이 요구한다. 한 문장 한 구절 -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구성된 기도도 있다. 이것은 보통 어떤 사람에게 새로운 믿음에 들어가기 위하여 말하는 것을 돕는 것으로 행하여진다.
개인적인 기도에서 오순절교파는 그들의 개인적인 언어로서 방언 말하기를 사용한다. 가끔 칭의로서 인용된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니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이다. 신약성경 해석가들의 어떤 앞선 계급에서 행하는 대로 오순절교파는 언어학적인 기도가 로마서 8장 26절이 친숙한 말씀 안에서 기록된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를 취한다.
공적 예배의 모습으로서 방언 말하기는 오순절교파 교회에서 조차 이러한 집회의 대부분이 개인적인 언어학적 기도의 습관을 확립했다. 그러한 개인적 사용에서는 통역을 일반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언어학적 그룹기도에서는 기대할만한 어떠한 통역도 없고 통역되지 아니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러한 집단의 기도는 준비가 어렵다. 비록 그것이 고전적 성령강림운동의 가장 많은 변화들의 정상적인 모습이라 할지라도 집단적 언어의 기도는 특정 종파인 카리스마파(은사파) 가운데서 비교적 빈도가 적다.
오순절 교파의 기도를 듣는 사람들은 이따금 그들의 열중과 똑바로 섬, 직립성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범죄 할 수 있거나 분명히 애처러움이 포함되어 있거나 때로는 불루칼러(노동자)사회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있거나 솔직히 삶이 거친 자들의 특권 아래 있다. 그들이 어떤 일을 - 열심과 감각으로 동일한 방법을 기도하는 것에 - 거의 헤매지 않는다. 오순절 교파를 위한 체험의 우선순위를 기억하자. 예를 들면 카리스마파는 오순절 교파에게 영성(오순절 감각에서)은 dB(데시벨)로 측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귀먹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것은 감동된 자들로 가끔 슬픔에 잠기거나 거룩한 엑센트들은 오순절교파 가운데 있는 것보다 카리스마파 가운데 더 적게 들릴 것이다. 전통적인 오순절 교파의 기도는 가끔 상처를 받거나 순종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반대되는 형상도 또한 나타난다. 오순절교파는 그들의 지도자들의 사례들에 의하여 거룩한 담대함을 배운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서 그들은 가끔 하나님(치유를 위하여) 또는 사탄(악의 영향의 삭제를 위하여)에게 호소할 것이다. 오순절 교파 TV 전도사가 일어나기 이전에 평신도의 기도가 성직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들의 효력을 맞추었다. 그런 이후에 카리스마적 명성이 있는 카리스마적 개성이 가끔 적은 백성들을 울부짖도록 몰아낸다.
기도에 관련하여 오순절 교파의 영성을 분별하는 언어로서 공적 또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준비 아래에 놓여 있다. 그들의 눈에 띄는 열정, 그들의 아픔의 표현 그리고 그것 모두를 통한 진심 안에서 개인적인 체험이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거룩한 웃음
거룩한 웃음의 개념은 많은 독자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마찬 가지로 이러한 현상을 결코 증거 하지 못하는 현대의 많은 오순절 교회파와 마찬가지로 이전시대(1950년대를 통하여)보다 더 오래된 오순절 교파는 이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찾지 않은) 웃음의 폭발 아래서는 명백히 성령의 임시적인 사역 계획이 없음을 알았다. 에피소드는 방언을 말하는 것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더 자주 웃음이 자신에게 온다. 통상적으로 그러한 표현은 교회의 앞자리에 모여든 신자들과 더불어 기도 시간에 제단 사역에서 시작됐다. 반드시 무릎 꿇은 목회자 또는 평신도 장로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적 도움이 적절하게 보이는지를 제안한다. 저자는 이러한 체험을 포함하여 사는 사람들의 기쁨의 한 종류로서 이 신성한 웃음의 영적 치료에 감사할 수 있다.
그러한 에피소드가 반복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웃음은 창출된 카리스마가 아니며 더구나 어떤 사람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찾아야하는 그러한 어떤 것도 아니다. 자발적으로 웃음이 다시 일어난다. 성경 독해 오순절교파는 욥에 대한 빌대드(Bildad)의 의견에 관하여 킹 제임스(King James Version)본을 읽었다. “보라,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붇들어 주지 아니 하신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욥 8:20-21). 그들은 쉽사리 예수님의 약속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눅 6:21). 15내지 20분 동안 더 나아가 한 시간 또는 2 시간(오순절교파의 제단 사역은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다) 많은 감동을 받은 신자는 웃는다. 하나 또는 둘 이상 약간의 사람들이 참여하나 그것은 통상적으로 단독 사건이다. 동정적인 동료 경배자들은 웃으며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현존 체험의 두려움을 공유하는 것으로 분위기는 움츠려진다.
악마전(pandemonism)
오순절 교파의 다른 모습 곧 악마전이라 정의 할 수 있는 것이 오순절교파 영성 안에서 널리 발견되었다. 이것은 악마(사탄) 또는 영을 믿는 강력함의 결과이다. 이러한 개략적인 관찰에서 편의성 또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 악마에게 공헌하게 된다. 나태 또는 욕망 같은 태도는 환영을 받지 못하며 흡연과 음주와 비관과 같은 것뿐만 아니라 보다 더 일반적인 용어가 없는 그 무엇이 증가하며, 슬픔과 통곡 같은 인간의 정서 그 무엇이거나, 평화와 사랑, 기쁨의 온전함, 감정의 넘쳐흐름이 보다 적게 감지된다. 만일 그러한 상태가 영에 의하여 원인이 된다면 치료는 그것들을 추방하여 마땅하다.
이러므로 구원의 사역이 오순절 교파 가운데서 꽃피었고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한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적인 평신도 층에 의하여서도 실천되어질 수 있었다.
아마도 카리스마적 TV 프로그램의 충격에 기인하여 오순절교파는 이 넓게 펼쳐지는 귀신숭배를 쉽게 흡수하였고 더 한층 강력한 영적 은사로서 엑소시즘(귀신물리기, exorcism)에 관계하게 되었다. 귀신이란 단어조차 킹제임스 번역본(King James Version) (그 단어는 악마(devil)이란 단어로 대체되어 사용되고 있는)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더구나 성경에서 카리스마적 은사로서 설명된 엑소시즘도 아니다.
악마전(pandemonism)이 독점적으로 그리고 전자의 오순절교파 가운데서 번성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다. 오순절교파의 몸체가 더 잘 설립 될수록 뚱한 그리스도인 삶을 고양시키지 않는다. 한 교회는 곧, 하나님의 성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악마(악령, 귀신)에 점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입장의 논문을 발간하였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의 이 말의 주제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그는 활동을 보는 악령에 주의 하여야 한다는 것을 연결시켰다. 그러나 사화산은 단순, 간결, 순간적 일견으로 충분하다.(11)
오순절 교파 사전
사람들의 영성이 그들의 언어에서 나타난다. 오순절 교파는 그들 자신의 신성한 전문 용어로만 이야기 한다. 여기에 간단한 용어 사전이 있다. 대부분은 존경할 만한 신학적 산문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전부 오순절 교파의 구어 문화와 영성을 반영하였다.
하나님의 현존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그 회합에 모여든 그리스도인들의 응집된 특별한 감각과 관련되어 있다. 문외한(외래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한 특별한 사례인 이러한 방법을 보도하여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다. 곧, 하나님은 매우 능력 있게 현존하셔서 목회자는 자신의 설교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오순절교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 있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은 가끔, 하나님의 구두 찬양에 집중하거나 그것을 연장한다. 이것은 기도 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아마도 예언과 방언의 내용에는 통역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을 설명하는 다른 방법으로 오순절 교파의 전문용어로 “주님의 능력이 내려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합동 신앙의 체험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압도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휴식 또는 성령 안으로 떨어지는 것으로서 카리스마파교회에 의하여 재부여 되었다. 신자가 신앙적 무기력으로 마루 바닥에 떨어진 곳으로부터 오순절 교회파의 봉사의 동기가 발생한다. 어떤 오순절교파는 이것을 능력 아래로 근절 시킨다고 부른다. 카리스마교회파의 리타이틀은 군사 전문가적인 언어를 피하려는 갈망에 의하여 동기화되었다.
일반적인 형태 안에서 그러한 사건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몇 십 년이 지나서 열성 있는 강단 지도자들이 통상적으로 이마에 안수하는 실제를 개발 하였다. 그 주제는 많은 관측자에게 거의 밀어서 넘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초기 오순절교파는 사람이 이 과정에서 옆 사람의 도움 없이 일정하게 일어나는 일, 성령 안에서 에피소드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것을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탐구를 고려하게 한다.
세례로 충만해 있다는 것은 실제로 성령 안에서 채워지고 성령 안에서 세례를 합성본한 것이다. 성령강림운동의 사회적 모험(함정)의 하나는 지나치게 강조하는 체험의 잠재력 안에서 나타난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성령으로부터 성령이 하신 사역-세례를 전환점으로 한다. 오순절교회에 대한 가치 있는 목표는, 넓게 달성 되었으나 때로는 위협적인 것은 말씀과 성령의 균형 잡힌 혼합에 있다.
기도 언어는 방언에 대한 최근의 동의어이다. (아마도 1965년) 그들이 말하는 방언이 현존하는 세계의 언어 중의 하나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오순절교파 가운데 동일한 이해가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천사의 방언과 방언 말함에 대하여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 거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고전 14:2). 아마도 오순절교파의 근원 보다 카리스마적인 기도 언어는 오순절 교파 가운데서는 언제나 진리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방언의 첫 번째 증거는 잔여와 축복의 능력으로 머문다. 사실 오순절 교파 교리는 성령의 세례를, 다시 따로는 방언으로 말하는 위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식의 말씀”은 오순절 교파와 카리스마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취한다. 하나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서 정확한 성경적 단어에 의하여 허용은 되었으나 요청은 되지 않았다. 은사가 언급된 (오순절에서 이해하는 사례가 어느 곳에나 발견되지만) 곳인 성경에만 있는 전형적으로 있는 강대상 지도자는 만일 허락되었다면 참석한 사람들이 그때 드려진 기도를 통하여 치유되었다고 하는 육신적 우려를 가진다. 다른 사람의 일은 질병을 추가하여 선포 되어질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신)에 의하여 계시된다고 이해된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들은 그들 홀로 그러한 말씀을 받았으므로 집회를 계획하고 신뢰성을 시험한다. 보다 균형 잡힌 오순절교파의 가르침은 어떤 신자도 그러한 말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한다. 사실, 어찌하든지 그런 사실은 거의 없다.
오순절교파 영성의 평가
오순절교파의 영성의 지나침과 부정확성은 그러한 것을 의심할 수 없는 내적 실재들 보다 더 한층 확실하다. 분명히 약점과 강점의 두 가지가 나타난다.
개인적인 체험의 강조는 개인적으로 가공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내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엘리트 의식(가상된 영적 우수성의 보장 안 된 축하)을 향하여 실상은 유혹으로 또한 인도한다. 그것이 개인적인 영적 성장이 사람의 삶과 사역(선교) 안에서 카리스마의 위상(능력)에 의하여 열리게 되는 분깃인 반면, 순례자의 진보(성장)의 가장 확실한 측정은 언제나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에 있다. 카리스마파적 재능이 구경거리가 될 일은 결코 없다.
성경의 말씀을 더 한층 잘 받아드리려면 주는 자 위에 선물을 가치 평가 하려는 유혹 앞에 그들의 예언과 엑소시즘의 효능을 변호하려는 실제적인 카리스마파에게 말씀하시는 놀라우신 예수님의 말씀 곧, 나를 떠나서는 모두가 악하니라(마 7:23). 라는 이러한 말씀 보다 카리스마파의 특성을 떼어놓을 수 없다.
성령강림운동의 직업상의 위협은 분명히 있다. 다시 말하면, 승리주의, 사랑하지 않음, 엘리트주의, 카리스마파의 특성 가운데서 왜곡된 흥미, 역사적 사회적 무감각, 신학적 빈궁 그리고 더 많은 것들에 대한 기회 등이다. 아직도 그 모든 것의 불완전으로 오늘 날의 지배적인 오순절교파의 유형은(교회의 다른 구역에 까지 이미 흘러넘친) 개인적인 믿음의 단순한 부유함을 제안한다. 곧, 성령 안에서의 기도의 능력과 또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방법 안에서 그들이 왜 실패 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영원히 사랑하는데 말이다.
노 트 (Note) :
1. David B. Barrett, World Christian Encyclopedia: A Comparative Study of Church and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 A.D. 1900-2000(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2). An important review by stephan Neil, who served as a consultant to the Encyclopedia, appears in Missionlogy: An International Review 12(January 1984), pp.5-19. Figures in the first paragraph come from Barret's annual update published as "Annual Statistical Table on global Mission: 1987,"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12(January 1987), pp.24-25.
2. Personal communication with David Barrett on December 4, 1987.
3. The intricate theological movements from Wesleyan roots have been traced competently by Donald W. Daytonk Theological Roots of Pentecostalism (Metuchen, N.J.: Scarecrow Press; and Grand Rapids, Mich.: zondervan: both 1987), a reworking of an earlier University of Chicago Ph. D. dissertation.
4. New Covenant, a leading charismatic periodical established in 1971, despite clear-cut Roman Catholic origins, reflected the broad contours of the charismatic movement in its issues published during the 1970s. But through the middle 1980s the magazine increasingly has returned to a decidedly Roman Catholic orientation.
Although the narrowed thrust may be viewed by some as counterproductive, in fact the effect is to consolidate, domesticate and integrate charismatic spirituality into the largest of Christian churches and thus to reduce its potential for divisiveness.
5. Jon Alexander treats mainly roman catholic writers when he asked " What Do Recent Writers Mean by Spirituality?" Spirituality Today 3291981), pp.247-56. But this limitation shows indirectly that the Roman Catholic tradition is the primary source of the popularity of the term today.
6. Lesslie Newbegin, The Household of God: Lectures on the Natue of the Church(New York: friendship Press, 1954).
7. "Orthodoxy," "obedient participation" (and later, "obedience") and "experience" are my terms- not Newbigin's
8. Combined Minutes of the General Council of the Assemblies of God, April 2.12, November 15-29, 1914(St. Louis, Mo,: Gospel Publishing House, 1915), p.4.
9. Constitution and Bylaws, Article 5, Section 3 in Minutes of the 41st Session of the General Council of the Assemblies of God, August 8-13, 1985(Springfield, Mo.:Publishing House, 1985), p. 106.
10. Actually there were seventeen points in the original 1916 "Statement of Fundamental Truths." Point 13 of "The Essentials of the Godhead" eventually was merged into point 2, "The One True God," where it has remained. From at least 1922 onward, the Statement itemized sixteen points.
11. My colleague Cecil M. Robeck, Jr., showed me the reference in Barth(Church Dogmatics 3.3.51, p. 519) and observed that Barth, who had just devoted 152 pages in his systematic theology to angels, would give but twelve pages to demons.
루터란파 반증(反證)
게하드 오. 포르데 (Gerhard. O. Forde)
우선 저자로 하여금 스피틀러(Spittler) 박사의 영성에 대한 오순절교파의 견해를 비평적이면서도 계몽적으로 발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는 말을 하고 쉽다. 그것은 매우 도움이 되는 논법이다.
저자는 마지막부분에서 스피틀러가 제안한 중요한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신교의 "지배적인 양육"이며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기독교회에까지 흘러들어 갔다. 그리고 개인적인 믿음의 단순한 풍성함을 제안하고 만일 이러한 방법 안에서 실천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에 들떠 있다면 왜 결점을 가지고 있는가? 어찌하든지 실용적인 논쟁이다. 만일 그것이 어떤 것을 위하여 정말로 많이 그리고 어떤 분명한 손해를 입히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면, 왜 그것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가? 그러한 사실을 제처 놓고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인 위치와 그들의 근거에 관하여 논쟁하기 위한 부분은 신학자들의 몫이다. 성령강림운동과 카리스마 운동의 재현에 신학적인 맞춤을 얻기 위하여 특별히 노력하는 이러한 경우에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스피틀러 박사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운동과 신학적으로 영성에 접근하는 어떠한 길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각 교회로부터 그리고 계속해서 운동을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반대를 고려한 사실을 한 눈으로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무엇이 이 반대와 의심의 근원인가? 한번 지적해 보자.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다 흘러버렸던 것을 믿지 않는다.
이제 이것은 소모적인 신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때를 맞춘 스캐치와 과도하게 표현된 것을 취하여야 할 것이다. 오순절 교파와 카리스마파의 영성이 땅콩 껍질 안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문제의 최고점을 표현한다. 성화와 영성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다른 점은 비록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성화를 실제로 가져오게 될 방법에서 말하는 이것이 율법과 복음을 말하는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것이 복음을 말하는데 실패를 들어내게 되고 그것이야말로 개신교의 나쁜 양심의 표현이다. 그것이 오늘날 개신교의 지배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말하지만 이러한 빛 안에서 용기가 북돋아지는 것은 아니다.
도전은 실제로 율법에 대하여 종말을 고하는 복음적 삶을 가져오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이 거룩해져야 하며,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 올 성령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그들이 이제는 의롭게 되었으므로 그들의 성화를 보여 주어야 하는가를 이야기 하도록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율법은 결코 끝이 없다. 아무리 성화를 정확하게 말한다 하더라도 복음이 가리게 되면 사람들은 율법에 다시 한번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강림운동이 거룩의 영역 밖으로 자라는 단지 우연의 일치인가?
이러한 운동이 성령을 주장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체험을 가진다면 그것은 최종적으로 목숨이 걸려 있는 성령의 신학적인 해석이다. 다시, 이것은 어떠한 깊이에서라도 그 문제를 대결하는 장소가 아니다. 말씀과 성령 사이에 여러 가지 이혼의 종류가 있다는 것을 전통을 통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으로서 충분하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하든지 그것을 넘어서 또는 위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아마도 초기와 중세기에 이것은 영적인 해석을 통하여 달성되었다. 그리고 신비한 체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개혁주의, 특히 루터의 성경해석학적 개발에서 복음이 생기발랄하며 자유로운 목소리로서 말씀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율법이 옛 자아를 사망에 그리고 새 생명을 성령 안에서 일으킬 때 일어난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다 성령은 생명을 준다.“ 이것은(성령이 적절하게 설교하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정교하게 억누름을 놓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말씀이 우리를 해방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단순히 자유롭게 떠 있거나 이 사람 저 사람을 방문하지 아니하는 순간적인 능력이 아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부양한 영의 모든 것이 복음으로부터 커다란 의심으로 떨어졌으며 사람의 미묘함이나 다른 것 안에서는 율법에 단지 구속되어진 것 같이 여겨진다. 성령은 삼위일체로부터 파송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솔직한 양식 안에서 말씀을 떠나 성령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과 성례는 악한 것이다. 왜 악한가? 왜냐하면 악령들 또한 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적의이며 고소자이며 노예의 영이다.” 라고 말한다.
이제 후기 개혁주의 세계는 일반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관념론(영성주의)의 이러한 비평에 감사하고 있다. 결과는 말씀과 성령 사이를 보다 과감하게 가르게 되었다. 중세기의 영적 주석을 거절하고 복음의 개혁의 연합(복음-말씀-성령)을 이해하는 것에 이르게 된다.
현대 개혁주의는 단지 모든 문제와 문자적 해석의 프리즘 안에 상륙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보도하는 경향으로 복음이 성경과 생명으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 안으로 저하되었다.
이러한 보도의 잘못 없는 것을 주장하기를 원하는 이러한 문자적인 해석주의자들이 성령의 외적 그리고 독립적인 표현을 신뢰하기를 일반적으로 꺼리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주의자들과 카리스마파의 사이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자 해석주의자들의 번역은 율법, 문자 안에서 성령의 체험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록 성령에 관하여 끊임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율법 안에서는 또는 율법에서는 성령이 없기 때문에 찾아야 하는 것이며 기대하거나 그 밖의 어는 곳에서나 교화하여야 하는 것이다. 영은 초월적인 것으로서, 일시적인 의제가 되었다. 만일 그러한 성령이 규격화된다면 사람은 단지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얻기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단지 주의하고 그것과 친밀하기 위한 어떠한 패션을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자신들을 다시 한 번 율법 아래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결과에서 성령강림주의는 자신의 당혹함이 진행 불확실성 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성령의 체험이 진정한 믿음을 설명하는 것에 관하여 도전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 생각으로는 스피틀러씨의 질문에 대한 성령의 신학적 이해의 관점으로부터 대답하게 될 것이다. 오순절교파와 카리스마교파는 많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가? 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복음이며 그리고 성례는 황폐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영보다 더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것(영)에 희생되지 않도록 그들을 시험하기 위한 권고(충고)를 받는다.
개혁주의파 반증(反證)
싱클레어 비. 페르그손 (Sinclair B. Ferguson)
스피틀러 교수는 오순절교파와 카리스마파의 사고의 다면화된 세계 안에서 광범위한 분야의 주제를 다루는 매우 높은 차원의 논문을 준비하였다. 그리스도 교회의 얼굴은 그러한 생각에 의하여 강력하게 영향을 받았다. 성령이 능력을 주는 방법인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관하여 심각한 질문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보다 낡은 그룹을 다루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개혁주의 신학과 오순절교파-카리스마교파 신학 사이의 대조는 적소에서 매우 고려해 볼만한 것이다. 아마도 스피틀러 박사의 개략적인 성찰에 대한 가장 좋은 간단한 대답은 개혁주의 신학이 일반적으로 오순절-카리스마교파 신학과 더불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단순히 개략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개혁주의 신학이 오순절 날과 그의 부수적인 독특하면서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는 사건을 보는 것이다. 기술적인 언어로서 그것은 구속의 역사에 속하며 개인에게는 구속을 적용하는 순서가 아닌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의 개인적 오순절을 가지도록 북 돋아지지 않았다. (또는 우리의 개인적인 갈보리). 이러한 것들은 역사에서 모든 것을 위한 모든 것의 단 한번(once-for-all)인 것이다. 그들의 결과는 즉시 우리들의 것이 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우리들이 “십자가에서 장사되고 일어나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질 때이다(롬 6:1·-10, 갈 2:20, 엡 2:4-7, 골 2:9-15, 3:1-4). 그러나 사건 그 자체는 결코 되풀이 되거나 되풀이 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개혁주의 신학은 오순절을 그리스도신학(christological)에서 그리스도 중심(christocentric) 사건으로 본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왕으로서 하늘의 보좌의 지상적 표현이다(이러므로, 본질적으로 오순절에 은사의 아낌없는 부으심은 영원한 현상이 되는 것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군주주의 보다 민주주의 안에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점 :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시몬 베드로는 오순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했다(요 16:17-11, 오순절의 특별한 예언, 행 2:22-26, 성령오심의 베드로의 설명은 그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한 것 안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사역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험하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후속사건으로 신학 안에서 그러한 체험을 공식화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러한 더 깊은 체험은 그리스도의 보다 풍부하고 보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의 부요하심이다(요 14:16-21에서 분류 안 된 패션 안에서 이것의 약속을 비교하시오).
셋째,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전능하신 사역을 계속하는 동안, 기도의 응답에 적어도 교회에 준 어떤 은사를 중간 점검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예를 들면, 만일 20세기 세상에 방언 말하는 현상이 성경의 외적 부으심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비록 카리스마교파에게는 수용되지 않겠지만) 방언을 말하는 것은 모험적으로 배울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육신적인 현상이다. (현신한 비카리스마교파로부터 들은 바로는 방언은 카리스마교파에 의하여 입 밖으로 소리 내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구별할 수 없다). 방언은 성령 사역의 필요한 표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현상의 빈도는 성령 사역의 열매라고 그 자체를 지시하지 않는다. 같은 논리로 다른 은사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카리스마적 운동(스피틀러 박사에 의하여 잘 이해했지만)의 수적인 강도의 빛 아래에서, 그것은 반응적으로 순전하며, 비경험론적이며 교리적인 것으로서 이 보다 낡은 개혁주의 입장을 취급하기 위한 일반 무대가 되었었다.
장소는 사도 시대에 가깝게 이끌어 오면서 훈련에서 어떠한 은사가 감소 됐었던 개혁주의 논쟁의 가장 간단한 표시만을 허용한다. 그리고 성경의 정경은 날로 점진적으로 더 크게 인식되어졌다.
첫째, 신비스러운 표시를 나타내고 일하는 은사는 “신약성경교회 안에서” 일반적인 장이 아니다. 그들은 새 언약(행 2:2, 14:3, 고후 3:6)의 사도적 주장(선포)과 연결된 특별히 확실케 하는 기능을 가졌다. 마치, 모세,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다니엘의 사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확정되었고 하나님의 구약의 언약 백성을 위한 비판적인 중요성의 시간 안에서 방황하였다. 사실, 성경에는 위대한 경제의 기적과 이적이 있다. 전체적으로 성경적인 패턴은 그러한 사역과 은사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정상적이기도 하고 비정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은사는 신약 성경 안에서 사도를 표시하는 일로서 - 표적, 이적 그리고 기적(고후 12:12, 행 15;12, 히 2;1-4를 비교하시오) - 사실, 이러한 선물(은사)들이 때때로 알러지(alregy)로서 넓게 퍼진 패션 안에서 교회로 분배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스테판과 빌립(그들은 사도적 권위와 인도자로서 분명하게 활동하였다)은 사도적 그룹 밖에서 기적의 사역자로서 단지 이름 없었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은사가 어떠한 율로서 계속 진행되어질 미래의 교회를 위한 사도적 견해에서 표시된 바가 없다(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대신 우리는 성경의 완전무결함에 자신의 의식의 스트레스를 발견한다.
둘째, 예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이 하나님(신)의 계시의 매개체로서 사용된 것은 비영원성을 가진다. 그들은 어린이 교회의 우림(urim)과 툼민(thummin,재판을 행하는 유대사제가 신탁을 받기 위하여 가슴바지 속에 넣었던 것으로 보석 또는 금속으로 추정됨, 출애굽기 28:30)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원성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구약 성경 안에서 사용된 아내석의 것보다 더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교회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돌아가서 “무엇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인가? 이것이 영적 분별의 생명적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 느낌, 육감 그리고 확신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비록 부차적 의식 차원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의 열매가 될 것이다.
셋째, 개혁주의 신학은 체험을 강조하는 분쟁을 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 관계는 즉시, 많은 오순절교파의 매력이다.(하나님은 오늘날 성경보다 중보자를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형제나 자매를 황당한 음모를 꾸민 것을 보는 것에 갈등한다. (방언, 예언, 거룩한 웃음, 감기의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거짓말 등등). 여기서 일어나는 질문은 성경의 권위적인 역할을 낮추는 성경 안에서 묵상적인 계시보다 어느 곳에서나 계신된 하나님의 뜻의 즉각적인 접근을 주장을 하지 않거나 그리고 그것의 충분성, 성경의 교리가 무엇이거나 공공연하게 채택하는가? 이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의 유일한 권위로 개혁주의의 원리이다. 특별히 이 논문에서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이야말로 교회의 양심과 하나님 말씀의 수호자로서 행하여야 한다는 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웨슬린안파 반증(反證)
로렌스 w. 우드 (Laurence W. Wood)
스피틀러(Spittler) 박사는 방언 말하기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필요에 의하여서 수용을 합법적으로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변화는 오순절 교파와 웨슬리의 전통 사이의 미묘한 차이이기도 하다. 이 한 가지 차이로서 오순절교파는 성화의 견해에서는 웨슬리안적 이다. 저자는 이 웨슬리 요소가 스피틀러 박사의 논문에서 전면적으로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쉽다. 더 나아가, 오순절 교파의 성령의 내적-충만에 대한 강조는 근본적으로 감리교의 명백한 개념이며 19세기 미국 웨슬리안적 거룩 전통에 의하며 나중에 안수로서 소개되지는 않았다.
웨슬리안적-거룩 전통은 신자가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스피틀러 박사는 이러한 체험의 첫 번째 육신의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은 오순절 그룹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스피를러 박사는 거룩한 그룹이 성령 안에서 세례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후반기까지는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세례의 강조 또는 성령의 충만함이 웨슬리의 가까운 친구이며 감리교 운동의 두 번째 창설자인 죤 플레처(John Fletcher)의 시대로 돌아가야 하기때문에 부정확한 것 같다. 오순절 은혜라는 저자의 책에서 저자는 플레쳐는 웨슬리의 완전한 사랑의 교리는 오순절 날의 성령의 내적-충만으로서 적용되었다는 것을 지적했었다. 이 강조는 웨슬리-거룩-전통 안에서 더 이상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웨슬리 운동의 바로 시작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모든 신자는 변화(중생)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웨슬리가 주장하지만, 그는 또한 그의 그리스도인 온전함의 계획(p. 55)에서 한 가지 참고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 성령으로 충만 되어 있는 완전한 사랑을 공식 적용하였다. 완전한 사랑으로 오순절 성령의 내적-충만의 이 공식이 웨슬리가 그의 자서전에 기록한 대로 플레처가 선호하는 표현이었다. 이것은 성화에 대한 웨슬리의 통상적인 용어가 아니더라도 성화된 삶의 핵심으로서 성령의 열매를 강조함은 암암리에 그리스도인 체험의 다른 단계의 그의 삼위일체 해석을 따라서 이 점에 대한 그것을 동의하게 하는 플레처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웨슬리가 플레처의 저서의 발간에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 분명하다.
플레처는 웨슬리에게 그의 신학을 편집하는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플레처에 대한 웨슬리의 반응은 그들의 신학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 진정한 불이치는 없었다. 흥미롭게도, 플레처는 자기 자신과 웨슬리 사이에 뒤따르는 불일치는 없었다. 라고 그의 저서를 통하여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 언어적(동사적)인 차이는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플레처는 웨슬리가 이성적인 신(하나님)의 언어와 신학적인 용어에 성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플레처는 성령 안에서 세례의 성경적 구절을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플레처는 이 공식은 어릴 때는 물론 세례를 이미 받았던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던 이 새로운 사건의 확인 안에 있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예배적인 성례전 표시였던 그들의 성공회 신학을 참조하므로 이 공식을 방어하였다. 실제로, 은혜의 두 사역에 대한 웨슬리의 교리는 저자가 오순절교파 은혜에서 지적했었던 대로 세례의 성공회적 성례전의 복음화와 확인이었다.
19세기 웨슬리안적 거룩 전통이 성령 충만한 삶을 강조하므로 웨슬리의 뿌리로부터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멜빈 디에트르(Melvin Dietre)는 19세기 초에 거룩 사상과 설교의 표현에 대한 주요한 도구로서 성령 패러다임(사례)의 오순절교파와 세례주의의 채택은 부자연스러움과 비 웨슬리안적 요소가 거룩 전통 안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웨슬리의 자신의 가르침에 무게 요소의 자연적인 성장이며 그리고 사역과 신학적 해설을 요구하는 개인과 세계 안에서 성령의 증거였다. (The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20. No.1. spring 1985, p. 67.) 그렇지만 켐프 회합 신앙부흥운동 체험은 교회의 성례전적인 이해가 근본주의자들(개인주의적인 체험)의 호의 안에서 크게 떨어졌던 감각에 뿌리를 둔 웨슬리안의 근본이다.
오순절교파의 운동은 방언 말하기의 새로운 개발로서 그리스도인 체험의 이 개인적인 개념의 보다 더 나아간 근본주의 적인 것이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방언 말하기의 일어남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진 육신적 증거가 필요 했던 것은 마찬가지로 소설의 해설이었다.
웨슬리안적-거룩 전통은 성령강림운동과 통상적으로 유사성이 많이 있다. 특히 성령의 내적 충만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의 개인적 각성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이 개인적 차원의 규정을 “체험적 신앙”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웨슬리로 하여금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수반되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첫째 성령 강림운동이 웨슬리안적-거룩 전통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만 하다. 그리스도인 체험의 증거로서 방언-말하는 것에 대한 주장은 믿음의 내적 증거로서 웨슬리 교리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내적 증거는 높게 고양된 정서적 또는 육신적인 표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신자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하나님을 받아드린 조용한 보증이었다. 웨슬리는 정서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예배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 안에서 행하여지는 것이다(고전 14:40). 그러나 19세기 미국에서 웨슬리안적-거룩 전통은 이를테면, 소리치는 것을 정서적 전시의 정도에서 성령의 증거에 대한 웨슬리의 가르침으로 성령 사역의 외적 증거로서 받아드려지게 되었다.
오순절 그룹이 방언-말함을 영성의 분명한 증거로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웨슬리안적-거룩 배경의 종류가 아니다. 이 새로운 개발은 20세기 초기에 오순절교파의 가지로부터 그들 자신을 분리하기에 바쁘던 웨슬리안적-거룩 그룹 안에서 즉각적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웨슬리안적-거룩 교회는 그들의 공적인 단어에서 “오순절”을 재빨리 빼버렸으므로 그들은 오순절교파의 교회의 새로운 출현에 연합하지 않게 되었다.
방언의 은사를 그리스도인 체험의 상급 받는 소유로서 끌어 올리는 것은 바울의 방언-말함을 가장 작은 은사로서 취급한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고전 12:27-31).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인 들이 방언-말하기의 방법에서 행하였던 것이 무엇이었든지 약간은 부정적 언급을 하였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한 부정적인 내용을 빼내고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시험하는 것은 나쁜 논쟁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웨슬리안적-거룩 작가들은 성령의 은사 목록이 있으므로 곧, 다른 편에서 방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이 완전히 빠져버린 것을 지적하였다(엡 4:11, 롬 12:6-8). 그것은 만일 방언-말하기가 영성의 시험에 그렇게 미묘하여 설명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오순절 운동이 영성의 필요한 증거로서 방언-말하기를 많은 사례 가운데서 보다 나은 카리스마교파적인 새로운 그룹의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덜 주장하게 되었다.
웨슬리안적-거룩 전통 안에서 대부분은 덜 의심하고 오순절교파와 카리스마교파를 향하여 더 친절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보다 더 개발된 전통 안에서 오순절교파 그룹의 보다 온건한 자세 때문에 그리고 카리스마교파의 갱신운동 안에서 생명적 경건 때문에 웨슬리안적-거룩 전통 안에서 대부분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경신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보다 강한 감각을 건설하기 위한 신학적인 기초를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의 의미를 보다 더 깊게 이해하도록 하게 할 수 있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을 연장하면 웨슬리안적-거룩 전통은 오순절교파-카리스마교파 운동에 부담을 가지게 된다.
웨슬리의 신학적 분별은 오순절-카리스마교회 그룹의 영적 생동력과 확실히 부합한다. 그렇지만, 웨슬리 운동은 “마음의 순수함”에 대한 의미로서 웨슬리의 강조는 오순절-카리스마교파 그룹의 연합으로 오순절교파의 영성의 핵심으로 보려고 한다. 동시에 웨슬리-거룩 전통 안에서 많은 사람들은 오순절 교파와 카리스마교파 운동이 성령 충만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었다는 방법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신자 가운데 성령의 오순절 날 외적 부으심의 이런 역동성이 없이는 성화의 웨슬리 교리는 즉각적으로 생명이 없는 윤리의 형석적인 개념 안으로 쉽게 붕괴되어질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므로 오순절교파-카리스마교파의 그리스도교의 혼합과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는 웨슬리안적-거룩 전통은 오순절 교회파의 실제의 의미보다 큰 이해 안으로 합성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합성이 발생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의 이슈가 협조관계 영안에서 웨슬리안적-거룩 전통과 오순절-카리스마 운동 사이의 우호적으로 대화의 강조가 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성령 충만한 변화와 시작의 삶의 두 가지 분명한 사건을 위한 근본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는 앵글로 가톨릭은 침례와 확인의 성령전이다. 이 주제는 교회의 연합의 본질 재시험으로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체험을 위한 성례전의 적절한 것으로 보다 더 나아간 연구/조사를 이끌어 낸다.
둘째, 성령의 열매(성화)와 성령의 은사 사이의 관계성이다. 이 논의는 성령으로 세례의 넓은 의미의 두 가지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셋째, 성령의 은사와 성경의 은사들 사이의 관계성이다. 이 주제는 하나님(신)의 통치로서 신자들에게 분배된 성령의 은사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감사로서 모든 산자들의 성령 받음의 특별한 필요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넷째, 성령의 은사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사역의 외적 증거 사이의 관계성이다. 이 주제는 믿음의 내적 보증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생활이 특화 되어진 것을 신자가 가져야 할 증거의 종류로서의 교리를 개발하여야 한다.
다섯째, 신앙 체험의 지성과 감성 성분 사이의 관계성이다. 이 주제는 특별히 신학을 형성하기 위한 근거로서 체험의 역할을 특별히 개발하여야 한다. 연장하여야 할 것은 성경적 계시의 바른 해석을 위한 필요한 근거를 신자들이 체험하는 것인가? 이다.
여섯째, 방언-말함의 역할 또는 오늘 날 세계 안에서 교회의 체험을 위해 필요한 은사이다. 이 주제는 광범위한 카리스마교파의 갱신 그룹을 위한 보다 적은 논쟁이 된다할지라도 웨슬리안적교회와 오순절그룹 사이의 그러한 대화의 가장 말썽 많은 부분이 될 것이다. 웨슬리안적-거룩 전통도 오순절교파-카리스마교파 그룹도 아닌 것이 만일 오늘날의 세계의 우리의 증거로서 가장 최대로 영향력이 있다면 그러한 논의를 피하기를 원할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차이와 유사한 전통이 대화를 통하여 크게 유익할 것이라고 믿는다.
웨슬리안적-거룩 전통과 오순절 그룹 사이의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저자는 개인적으로 현시대에 우리의 다시 사신 주님의 실재의 강력한 증거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오순절교회의 형제-자매에게 명령한다. 저자는 특별히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오순절을 체험할 필요에 대한 그들의 강조에 특히 감사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성령의 충만의 체험 안으로 들어온 신자들의 일시적인 적절성에 대하여 증거 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오순절 교파와의 명칭과 카리스마적 갱신 그룹을 하나님이 들어 올리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순절은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 만은 아니라 오늘 날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 역시 성령의 정결케 하는 능력으로 교화되었다. 확실히 이것은 성화된 삶의 핵심이다. 자부하는 지성주의와 천박한 감성주의 시대에 신자들이 거룩하신 성령으로 채워지는 성경적인 요구가 정말로 오늘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관상파의 반증(反證)
글렌 힌손
비록 영적 성장과 계발 또는 성화에 관하여 거의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것은 오순절교회의 영성에 대한 탁월한 소개서이다. 스피틀러 박사의 조항의 일반적인 본질의 결과인가 아니면 성령강림운동의 영성이 다른 요소보다 이 개념에 더 적은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사람은 가장 오래된 형태인 성령 강림운동의 웨슬리 형태가 성화에 대하여 우위를 점유하게 되나 이 논문에서 그것에 대하여 주어진 특별한 주의는 없다.
오순절교파 영성이 관상파 전통으로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체험이 있다. 두 가지 모두 중심적 관계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함을 찾는다. 정교회의 길을 조심스럽게 따르거나 또는 때때로 잘라서 말리는 공식에도 도전한다. 두 가지 모두 신학적 정확성보다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두 가지 모두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적 점령으로서 기도를 조망한다. 두 가지 모두 사단의 권세에 대한 건전한 책임을 보여주고 아마도 거룩한 웃음 안에 약속되어 있다. 두 가지 모두 그리스도인 삶과 사상 안에서 성령의 역할을 마음에 두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는 확장되며 그것으로 많은 관상주의자들이 카리스마적인 내용 안에서 오늘 행하므로 오순절교파의 정착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은 관상주의교파와 오순절교파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고서는 이 논문을 읽을 수 없다. 관상파 교회는 한 단계, 한 단계의 구속과 하나님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는 점차적인 과정을 통하여 개인의 근본적인 변화에 관련되어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순절 교파는 방언을 말하므로 연결된 어떤 종류의 일시적인 통상으로 기대한다. 신-오순절교파 또는 카리스마교파는 필요한 일로서 후자를 찾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오순절교파는 그렇게 한다. 더 한층, 그들 때문에 영성은 은혜 안에서 성장과 하나님의 지식에 대하여 그러한 체험에 보다 더 많은 초점을 맞춘다. 위대한 영적 마스터는 정규적으로 신성의 바로메타로서 체험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경고한다. 체험은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체험 후의 너무나 많은 갈망은 자기 자신을 추출하기 힘든 것으로부터 자기가 신앙적인 늪 안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건전한 영성을 바론 프리드리히 휴겔(Baron Friedrich von Hugel)이 곧, 지성적, 사회적 그리고 조직적 차원에서 체험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여러해 전에 지적했다.
이점이 영성에 대하여 “가톨릭 전통”이 오순절 교파의 전통을 비난하는 것이다. 체험에 대한 열심이 지나쳐서 성령강림운동은 때때로 지성적인 것, 신학에 관하여 차별화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반지성주의를 잘못 생각한다. 이해를 얻기 위한 믿음의 호의가 하나님의성회 안에서 신조주의의 환심 사기를 잘 설명하여 준다.
성령강림운동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서비스와 행동이다. 자인하듯이, 이러한 것들의 소홀함이 낮은 사회 경제적 사람들의 특징과 오순절교파의 후원단체를 만드는 문화적 배경이 된다. 그래서 오순절교파는 그러한 단체 안에서 사회적인 봉사를 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피틀러 박사가 영성의 개념으로서 사회적 관심사를 언급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오순절교회로서는 이것이 영성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오순절교파는 때때로 기독교계의 제도적 표현으로서 불신하는 태도를 보게 한다. 비록 스피틀러 박사가 어떤 기도의 형태를 명명하거나 또는 오순절 교회에서 사용했던 고백들, 대부분의 관찰자(참관자)들은 오순절교파가 창조한 예배와 교회 구조 안에서 명령 계통에 대한 긴장의 의식이 있다. 성령은 성령의 뜻으로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하여야 한다.
오순절교회파와 카리스마교파를 성령에 대한 그들의 강조와 다른 교회 안으로 새 생명 투입에 대하여 추천 할 가치가 있다.
카리스마적 오순절교파 운동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안에서도 가장 빠른 성장과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활발한 표현을 나타났다. 그러한 성장은 제의할 것이 없는 이 전통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모둔 분야에서 성령강림운동은 체험적인 면에서 불균형에 의하여 그 자체와 그의 사역이 위험하게 된다. 다른 요소의 어떤 것은 그 자체 안에 파고든다. 그러나 균형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함에 있어 카리스마적 방법 안에서 오순절파 신학의 재사역 없이 얻기가 힘들게 될 것이다. 아마도 개정이 말씀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지혜를 새롭게 한 강조로 출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강조는 분명히 지적, 사회적 그리고 대부분의 대표에 의하여 심각하게 무시되었던 제도적인 구형에 대하여 오순절의 관심사의 어떤 부분이 전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