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자본’의 생산지로서의 학교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다양한 요소 중에서 사회와 공동체의 건강성을 유지시키고 지속시킬 수 있는 것으로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사회적 자본은 “사람으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행위하게 만드는 사회적 연결망, 상호의무감과 신뢰, 효과적인 행동을 지배하는 규범에 대한 이해와 다른 여러 사회적 자원”이라고 정의됩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불안과 불신 그리고 개인적인 고독은 사회적 자본의 감소와 관계있으며 ‘퍼트넘’과 같은 미국의 사회학자는 ‘볼링 혼자 치기’의 증가와 같은 현상에서 관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근대의 서구사회는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성공으로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사회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관료적인 조직은 효율성과 균일성 그리고 안정성을 통하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파쟁적 조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관료제의 경직성과 지나친 형식성은 조직의 목적과 관계없는 규정에 집착하게 하는 문제를 낳기도 합니다. 1950-70년대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비정부적 조직들이 관료적 조직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이 시대의 시민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미국의 반전운동이나 프랑스 68운동은 이러한 시민적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민들의 활동이 지배적 가치와 소외된 가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주된 동기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증가된 자본주의의 위기와 정보기술의 발전은 사회 조직의 성격과 형태를 급속하게 변화시켰습니다. 세계화된 환경 속에서 기업들은 기존의 구조를 포기하고 세계를 연결하는 기업망의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네트워크 환경에 기반한 기업조직 속에서 조직과 인원은 국경을 넘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세계화는 시민적 조직을 약화시키고 그 대안으로 네트워크를 통한 유연한 조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는 기존의 조직과는 다르게 구성원의 공통된 기대와 정체성을 공유하기 어려운 조직이었습니다.
네트워크의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공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고 개인적인 성장이나 건강을 목표로 하는 단체와 네트워크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서구의 주요 쟁점이었던 ‘공론장’이라는 개념이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가치를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네트워크는 점차 개인적 편견과 사적 욕구의 분출장이 되었습니다. 네트워크에서의 인기는 얼마나 전통적인 가치를 파괴하는가 하는 극단성과 충격성에서 찾아지기도 하였습니다. 네트워크는 ‘성과 폭력’이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으며 사회적 자본은 상실되었고 개인들은 더욱 철저하게 고립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네트워크는 서구의 문제점이 더욱 증가되어 나타나는 듯합니다. 서구사회가 경험했던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회정신에 대한 충분한 공유가 없이 전통적이고 위계적인 조직규범에서 급속하게 유기적이고 개인적인 네트워크 환경으로 바뀌는 바람에 시민적인 사회적 자본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한 채 전통과 새로움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강도가 증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기초한 생각과 발언에 대하여 극단적이고 경직된 태도로 비판하는 다른 생각들 그리고 거꾸로 반복 재생되는 생각들이 난무하는 네트워크 공간은 상호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파산을 증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직은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이기 하지만 관심의 공유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출발점일 것입니다. ‘사회적 자본’의 상실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이러한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이기도 하면서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학교’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즘 학교에서 휴대폰을 수업 시작 전에 수거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휴대폰 사용 때문에 수업이 방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전통적인 학교의 역할과 학생들의 익숙한 생활방식이 충돌하는 현장입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학교토론 주제로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기본권이라는 측면에서 충돌하기도 하고 학교의 본질적 역할과 학생의 변화된 수업환경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충돌하기도 합니다. 이런 대립적 관점의 해결을 서로 상대에 대한 입장의 배려를 통해서 몇 가지 규칙을 제정하여 일시적으로 봉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단순히 학교 내의 문제가 아닌 새로운 사회의 근본적 가치를 정립하기 위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문제의 설정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학교의 수업권과 학생의 기본권이라는 문제에서 좀 더 확대하여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기 위한 방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구성원들의 관계 그리고 상호신뢰를 위해서 어떤 방식이 필요하는가’로 말입니다. 여기에는 학교의 본질적인 역할이라든가 수업의 필요성, 구성원 간의 관계성 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루어진 결정은 수많은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위기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학교(생활)는 여전히 대립적 가치를 직접적 방식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자 시간적 장소입니다. 새로운 문제설정을 통해서 학교의 가능성을 찾고 싶네요. 학교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연구가 쏟아지면서도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실천적 허약성에서 ‘사회적 자본’의 생산지로서의 학교의 모습을 위한 탐색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회적 자본’이라는 상식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개념에서 말입니다.
첫댓글 나는 굶더라도 자식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던 부모님들 덕분에 우리는 배웠고 그 덕택에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다. 국가 경제 부분에서는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었고..... 이제 개인의 노후와 나라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고...나라의 살 길은 교육에 달려 있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니, 점점 더 그 의미의 중요성이 증가되고 있다. 땅도 좁고 자본도 없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인적 자원, 교육에 달려 있다. 오늘 날 세계 경제의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창의적인 제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세계 최고의 제품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다고 말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세계 최고를 지향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공교육은 그동안 밖으로는 치열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실력을, 안으로는 서로 배려하며 나눌 수 있는 인간미를 추구하였다..... 두 마리 토끼를 추구하는 교육은 어렵다. 양육강식으로 밀어부치는 교육은 쉽다. 살아남아라, 그렇지 않으면 낙오한다! 60- 90년대까지의 교육이었다. 이제 21C, 모양을 갖추지도 못한 채 세계 무대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속이 빈 강정을 모르는 오바마는 한국 교육 학부모의 치열함을 주장한다. 사교육을 공교육으로 보는 것이다. 사교육의 발달은 더욱 더 계층 간의 차별을 가져온다. 부의 세습이 이루어 진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학교, 공교육의 역할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아이들이 똑같게 배우는 것!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구성원들의 관계 그리고 상호신뢰를 위해서 어떤 방식이 필요하는가> 교육의 주제이며 목표가 될 수 있다. 철학에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으며, 심리학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용을 찾아야 하는 사회학에서 서로 부딪친다. 밥그릇 싸움이다.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자고 하지만 끝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독재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북유럽의 시스템이다. 배려! 원론을 내세우는 선명성으로는 전쟁만이 남을 뿐.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해야 한다. 배려는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이다.
배려 또한 뜬구름 잡는 허약한 말 아닌가? 아니다. 배려는 각성, 깨달음, 선택, 책임이다. 내 주장이 아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이다. 예를 들어 국어, 수학, 과학, 사회, 예술 이외의 교과 과목을 모두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에서 진로, 도덕, 안전, 정보, 한자, 봉사, 실과, 다문화, 통일....... 독립된 교육과정으로 존재할 까닭이 없다. 사회 문제 하나 터지면 곧바로 새로운 교육과정 편성이라는 웃지 못할 난리 부르스를 치는 현실이다. 초등-바른 생활, 중등-즐거운 생활, 고등-슬기로운 생활, 대학-보람있는 생활... 뭐 이런 식의 최소한의 과정으로 움직이고 대신 질적 체험 시간을 학생들에게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학교는 그 사회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모두 밝고 맑은 사회를 꿈꾼다. 밝고 맑은 어린이가 우리의 미래다. 아이들에게 빈곤의 악순환이 최소화 될 수 있는, 마음껏 뛰어놀며 성장할 수 있는 시공간이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 배우고 익히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성장이 사회적으로 풍부한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길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베품이 아닌 공존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밝고 맑은 공동체의 지속과 발전을 위한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