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문에 대한 생각, 앎과 삶의 일치 원효가 생각한 학문은 바른 마음[一心], 바른 인식[和諍], 바른 실 천[無碍]으로 요약된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철학의 근본문제인 존재와 인식과 실천의 문제로 직결된다. 즉 마음을 바르게 해야 대상 [所緣境]이 정확히 보이고, 대상을 바르게 인식해야만 그것을 정확 히 볼 수가 있다. 또 세상에 이익이 되어야 대상과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효는 대상을 바르게 인식해야 된다는 것을 특히 강조했 다. 바로 보아야만 바로 행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본질, 즉 어떠한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바르게 봄[正觀]으로부 터 올바른 삶의 방식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식과 실천, 즉 앎과 삶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를 넘어서는 보편적 삶을 사는 보살의 바라밀행의 다른 표현이다.
무릇 한 마음의 근원은 있음과 없음을 떠나서 홀로 깨끗하고, 삼공[我空, 法空, 俱空]의 바다는 참됨과 속됨을 아우르며 잠연(湛 然)하다. 잠연하므로 둘을 아울렀어도 하나가 아니고, 홀로 깨끗하 므로 가생이를 떠났으나 가운데도 아니다. 가운데가 아니면서 가 생이를 떠났으므로, 있음이 아닌 법이 없음에 머무르지 않고, 없음 이 아닌 모습이 있음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울렀으므로, 참됨이 아닌 것이 속됨이 되지도 않고, 속됨이 아닌 이치가 참됨이 되지도 않는다.
{금강삼매경론}의 대의문(大義文)에 나와있는 이 글에는 학문에 대한 원효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마음을 바르게 해야만 바른 인식이 가능하듯이 비록 추상적인듯 하지만 일심(一心) 의 근원에 대해 명료하게 정의내리고 있다. 그는 있음과 없음, 참됨 과 속됨, 가생이와 가운데라는 이항대립을 두고 어느 한 쪽 켠에 서지 않는다. 그는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아우르고, 둘을 아우르면서도 하나가 아닌 논리방식을 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뜻인 일심(一心) 에 계합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입장을 유보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금강경}의 즉비(卽非)의 논리와도 같은 비논리의 논리, 비합 리의 합리, 역설의 진실을 통해 자신의 학문관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다툼을 지양하고 바른 인식을 이끌 어내 오는 것이다. 한 마음이 지니고 있는 두 측면을 종합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어떠한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때문에 바른 마음을 통해 바른 인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바른 실천, 즉 여러 사람들에 게 이익이 되는 삶을 살았던 갓이 바로 그의 보살행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앎과 삶의 일치가 바로 원효의 학문에 대한 생각이며 그것은 그의 삶과 생각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원효의 사상적 흐름 이 일심(一心)과 화쟁(和諍)과 무애(無碍)로 이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개 열반의 길[道]됨은 길이 없으면서도 길 아님이 없고, 머무 름이 없으면서도 머무름 아님이 없다. 이것은 그 길이 아주 가까우 면서도 아주 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이 길이라는 것이 더욱 고요하고 더욱 시끄러운 증거이다. 더욱 시끄럽기 때문에 소리가 울려 여덟 음[八音]이 허공에 두루하면서도 그침이 없고, 더욱 고 요하기 때문에 열 가지 모습[十相]을 멀리 떠나서 진제(眞諦)와 함 께하면서도 잠연하다.
현실적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지는 논리방식은 이가(二 價)논리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생사와 열반, 있음과 없음, 참됨과 속됨, 멂과 가까움, 시끄러움과 고요함 등 상대적이고 이항대립적인 사유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느낌의 좋음과 나쁨이라는 일차적 분별심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무명 [惑]에 의해 업(業)이 쌓이고 고통(苦)이 생겨난다. 그래서 원효는 마음을 바르게 해야 대상을 차별 없이 바라볼 수 있고, 또 대상을 바르게 인식해야 그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거기에서 바른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학문적 진실의 탐구[앎]와 종교적 수련[삶]이 일치하기 위해서도 이 세 가지 의 관계설정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상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고서는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이 바른 의식 을 지닐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원효가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서 행동 하고 살았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선결조건에 대한 극복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출가자에서 거사, 광대 등으로 변신하면서 좁은 주장에 사로잡히 지 않고 보다 크고 넓은 주장을 했던 원효! 앎(인식)과 삶(실천)을 일치하고자 노력했던 보편적 삶! 우리는 그에게서 참다운 불학하기 의 한 모범을 볼 수 있다. 배우고 묻는 것을 업으로 하는 학자는 연구(학자)와 학습(교육 자)의 두 몫을 요구받는다. 자신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원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보살적 삶이 윤리적인 행위의 한 측면 이라면, 진리를 향한 논리적 탐구는 배움과 물음의 또 다른 한 측면 일 것이다. 학자들로서의 길과 교육자로서의 길을 요구받는 불(교) 학자의 불학하기는 어떠한 모습을 지녀야 할까? 이것이 불학자에 게 주어지는 화두이다. 이 화두를 푸는 과정이 곧 불학하기의 과정 일 것이다. 진실에 대한 논리적 탐구[앎]와 윤리적인 행위[삶]의 모범이 동시 에 이루어져야만 진실한 인간으로서의 학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 다. 이 두 축이 새의 두 날개처럼 나란히 갖춰져야 바른 비행(飛行), 즉 앎과 삶의 일치가 가능할 것이다. 원효의 불학하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범적 모습은 바로 이 두 축의 회통과 실현이라는 점이다. 2) 실천 우위의 텍스트 비평[敎判] 텍스트는 다양하게 정의되기 때문에 한 개념으로만 고정할 수는 없다. 텍스트는 표현이라거나 경계설정, 그리고 구조의 문제로 대별 된다. 텍스트의 기호들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텍스트는 외적 구조들과도 대립된다. 텍스트는 자연언어의 기호를 통해 표현되며, 언어와 발화에 대한 소쉬르적 이율배반에 의해 텍스트는 항상 발화 의 영역에 속한다. 텍스트의 경계는 고유하지만 포괄과 배제의 원리 에 따라 그것의 구성과 관계없는 물질적으로 구현된 모든 기호들과 대립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경계에 의해 구분되지 않는 모든 것에 저항하기도 한다. 텍스트의 체계가 복잡한 하위 체계들의 구조로 분해될 수 있다는 사실은 내적 구조에 속하는 일련의 성분들이 상이한 유형의 하위체 계 속에서의 경계들(장, 절, 행, 반행의 경계)로 소용된다는 것을 수 반한다. 이것이 바로 텍스트의 계층성이다. 텍스트의 구조 역시 두 개의 경계, 즉 내적구조와 외적구조로 구분된다. 이러한 텍스트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비평할 것인가라는 문제의 식에 의해 텍스트 크리틱이 성립되었다. 텍스트 크리틱은 텍스트에 관한 다양한 시각의 접근법을 총칭한다. 이를테면 텍스트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 언어학적 측면, 구조주의적 측면, 역사적 측면, 사회 학적 측면, 신화적 측면, 심리학적 측면, 정신분석적 측면 등 다면의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는 시각을 말한다. 불학 연구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형식의 하나가 되어왔던 교판 역시 이 텍스트 크리틱이었다. 교판이란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줄임 말이다. 즉 교판은 불설 전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한 해석틀이며, 경 교(經敎)에 대한 텍스트 비평이다. 다시 말하면 경전이라는 텍스트 를 비평의 시각에 의해 적재적소에 자리매김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불경이 지니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의미와 내용 및 방법적 의미를 전체적인 입장에서 조망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또 교판이 경전연구의 체계인 경학(經學)의 분류법이라는 측면에 서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효가 활동했던 7세기 동아시아의 불학은 현장의 신역 이래 상당 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불학이 인도이래 중국으로 전래되 면서 자생적인 논리방식에 의해 체계화되어 있었고, 무수한 불학자 들에 의해 깊이 천착되고 연구되어 예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중에 서도 그들의 경교(經敎) 이해 방식이자 텍스트 크리틱인 교판(敎判) 은 동아시아 여러 불교 국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오랜 역사동안 인도와 서역에서 건너온 많은 전법승(傳法僧)들과 중국에서 건너간 구법승(求法僧)들에 의해 중국으로 들여온 불경은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한역(漢譯)작업을 전면적으로 전개했다. 그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자 중국인들은 여러 종류로 번역된 불경들을 목록을 통해 정 리할 필요를 느꼈다. 전법승과 구법승들에 의해 무수한 경전들이 번역되자 중국인들은 그 경전들 중에서 무엇이 구극(究極)의 불설 (佛說)인가를 판단하고자 했다. 그래서 불설 전체를 합리적으로 판정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이 바로 교판(敎判)의 형성과정이며 동양에 서의 텍스트 크리틱의 시작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판은 인도에도 있었지만 이 교판은 역시 지극히 중국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중국의 교판은 자기 종파[自宗]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동아시아 불학 이해 방식의 하나인 교판, 즉 텍스트 크리틱은 원효 에게도 역시 중요한 방법론이었다. 그는 텍스트 비평의 눈인 교판을 통해 자신이 바라본 경교의 이해틀을 정립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교판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원효의 텍스트 크리틱[敎判]은 한 종파의 우월성에 매이지 않고 경전의 보편적인 해석의 틀로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원효의 교판은 전체에 대한 통찰 위에서 정립된 통불교(通佛敎)적 교판으로 서 교(敎, 이론)와 관(觀, 실천)을 함께 닦는 체계로 정립된 것이다. 그것은 곧 귀일심원(歸一心源)과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축, 다시 말 하면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축을 동시에 설 정하는 체계를 보인 것이다. 원효는 텍스트 크리틱을 통해 불학하는 눈을 만들어가면서 실천의 궁행을 펼쳐나갔던 것이다. 원효는 특히 {대승기신론소}에서 인도 대승불교의 2대학파인 중 관파와 유가파의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비평함으로써 그의 눈을 일 심을 중심으로한 실천의 문제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눈을 일심과 일승사상에 겨냥하고 있다. 이 근거의 싹은 원효사상의 회통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교판 관(敎判觀)이자 텍스트 크리틱의 눈이기도 하다.
'{중관론}과 {십이문론} 등은 두루 집착을 타파(打破)하고 타 파(打破) 또한 논파(論破)하여 타파하는 것[能破]과 타파되는 것 [所破]을 다시는 허용(許容)할 수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은 가고는 두루하지 못하는 논[往而不偏論]이다. {유가론} {섭대승론} 등은 철저하게 깊고[深]·얕음[淺]을 세우고 법문을 판별하여 자기가 세운 법을 융통스럽게 버릴 길이 없게 된 것이니, 이것은 주고는 빼앗지 못하는 논[與而不奪論]이다.'
반야중관학의 텍스트는 존재에 대해 부정[空, 破, 眞]의 미학을 머금고 있고, 유가유식학의 텍스트는 존재에 대해 긍정[有, 立, 俗]의 미학을 머금고 있다고 그는 보고있다. 허나 오히려 줌과 빼앗음, 세 움과 깨뜨림의 이항 대립과정이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조화와 화해 의 논법인 화쟁법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됨[眞]과 속됨[俗]이 둘이라는 분별이 없으면서도 어느 하나만을 고수하지도 않는다[眞 俗無二, 不守一]는 원효의 논리방식인 것이다. 원효는 깨끗함[淸淨] 과 더러움[染汚], 자리와 이타, 부정과 긍정이라는 이항대립을 극복 할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텍스트 크리틱을 통해 시각을 제시한 다. 대승불교의 교과서적 텍스트인 {대승기신론}에 대해 그는 다음 과 같이 비평한다.
'이제 이 논은 지혜롭고 어질며 현묘하고 광박하여 세우지 않음 이 없으면서 스스로 버리고[無不立而自遣], 타파(打破)하지 않음 이 없으면서 다시 허용한다[無不破而還許]. 다시 허용한 것은 저 간 자로 하여금 극(極)에 이르러서는 두루 섬을 나타내고,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이 준 자가 궁극(窮極)에 이르러서는 빼앗음을 밝 혀준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론(理論)의 조종(祖宗)이요, 뭇 쟁론 (諍論)의 평주(評主)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텍스트 크리틱을 통해 긍정과 부정을 아우르는 화쟁법으로 서 여래장계의 대표적 논서인 {대승기신론}에 깊은 시선을 주고 있 다. 그의 패러다임이 일심(一心)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도 {화엄경} 및 {금강삼매경론}과 더불어 이 논서였음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대승기신론별기}와 {대승기신론소}를 통해 일심사상의 이론적 토 대를 마련하고, {금강삼매경론}을 통해서 일심사상의 실천적 측면 을 보완하고 있으며, {화엄경소}를 통해 일심사상을 화엄일승사상 으로 종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저서에서 텍스트 크리틱을 통해 자신의 교판을 세우고 있다. 원효는 그의 대표적 술어인 '종요'류, 즉 {대혜도경종요} {열 반종요} {법화종요} {미륵상생경종요} 등에서는 대·소승, 즉 성문 장(聲聞藏)과 보살장(菩薩藏)의 두 교판으로 자신의 설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반야를 화엄과 동격의 구경요의교(究境了義敎)로 자리매 김 시킨다. 그의 독특한 조어(造語)로 경 이름을 붙인 {대혜도경종 요}(大慧度經宗要)에서 혜관(慧觀)의 돈(頓)·점(漸) 오시(五時, 四 諦·無相·抑揚·一乘·常住)설과, {해심밀경}을 소의로 하는 법 상종의 삼종법륜(三種法輪, 四諦·無相·了義)설을 소개한 뒤, 원효 는 {대품반야}가 {대혜도경종요}에서는 두 번째의 무상시(無相時) 로 판석되고, {해심밀경}에서는 두 번째의 무상법륜(無相法輪)으로 판석된 것은 그럴 듯 하지만 '이치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理必不 然]고 주장한다. 그리고 {화엄경}과 같이 {대품반야}도 무상(無上) 하고 무용(無容)한 구경요의(究竟了義)라고 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법화종요}에서도 그는 {해심밀경}의 삼종법륜설 (三種法輪說)을 소개한 다음 거기에서 {법화경}이 불요의(不了義, 제1·2法輪)로 판석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논리적 근 거로서 다른 3종법륜(根本·枝末·攝末歸本)설에서 이 {법화경} (제3법륜)이 {화엄경}(제1법륜)과 함께 구경요의(究竟了義)로 판석 되고 있음을 들고 있다. 원효는 또 그의 교판에 관한 견해로서 {열반종요}에는 중국의 남방사(南方師)가 주장하는 인천(人天)·삼승차별(三乘差別)·공 무상(空無相)·법화(法華)·열반(涅槃)의 돈(頓)·점(漸) 오시설 (五時說)에 {열반경}을 요의경(了義經)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북방 사(北方師)들이 주장하는 반야(般若)·유마(維摩)·법화(法華)· 열반(涅槃) 등이 모두 요의경(了義經)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원효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남·북 교판에 대해 '만일 한 쪽에만 한결같이 그렇다고 집착하면 두 설을 다 잃을 것이요; 만일 상대를 인정해 주어 자기 설만 고집함이 없으면 두 설을 다 얻을 것이다'고 갈파한 뒤 5시(時) 4종(宗)으로 경전의 깊은 뜻을 판석하려는 좁은 견해를 경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효는 {대품반 야}·{법화}·{열반}·{화엄} 등을 다 같이 구경요의(究竟了義)라 고 보는 포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새로운 교판(敎判, 敎相判釋)으로서 삼승통교와 삼승 별교, 일승분교와 일승만교의 4교판을 짜면서 일승분교(一乘分敎) 에 여래장과 대승윤리를, 일승만교(一乘滿敎)에 보현교(普賢敎)로 서 화엄(華嚴)을 짝 지우고 있다. 그만큼 그의 사상은 {기신론}과 {화엄경}에 깊이 부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독창적인 교판을 수립한다. 그는 {법화경}의 삼승(方便) 일승(眞實)설에 의거하여 '승문(乘門) 에 의해 4종을 약설(略說)한다'고 말하면서 다음의 사교판(4敎判)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 三乘別敎 ------ 四諦·緣起經 등 ----- 未明法空 +------ 三乘通敎 ------ 般若·深密經 등 ----- 諸法空 +------ 一乘分敎 ------ 瓔珞經·梵網經 등 ----- 隨分敎 +------ 一乘滿敎 ------ 華嚴經 普賢敎 ----- 圓滿敎
원효는 먼저 삼승을 별교와 통교로 나눈다. 그리고 일승을 분교와 만교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삼승과 일승을 나누어 설명하는가? 그렇게 구별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원효는 그 기 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승(二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일승(一乘)이라 하고, 그중 에서 보법(普法)이 안 나타난 것을 수분교(隨分敎)라 하고, 보법 (普法)을 밝힌 것을 원만교(圓滿敎)라 한다.
삼승별교에는 아직 존재[法]의 공성(空性)에 대한 이해는 없다는 [사제경]과 [연기경] 등의 아함교의(敎義)를 짝 짓는다. 그리고 삼 승통교에는 모든 존재의 공성(空性)에 대한 이해가 있는 {반야경}과 {심밀경}을 짝짓는다. 즉 중관교의와 유식교의를 삼승통교에 넣은 것이다. 원효의 4교판의 독창성은 특히 삼승의 상위개념으로서 일승(一 乘)을 분교(分敎)와 만교(滿敎)로 나눈 점이다. 그리고 일승분교(一 乘分敎)에 대승윤리에 해당하는 {보살영락본업경}과 {범망경}을 넣은 것은 기존의 교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설정이 다. 뿐만 아니라 일승만교에 보현교로서 보법(普法)인 {화엄경} 을 짝 지은 것도 탁절(卓絶)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삼승을 별교와 통교로 가르는 기준이 '법공'(法空, 존재의 공함)의 측면이었다면, 일승을 분교와 만교로 가르는 기준을 일체법에 두루하여 걸림이 없 이 상입(相入)하고 상시(相是)한다는 '보법'(普法)의 측면으로 삼았 기 때문이다. 그는 또 반야중관계와 해심밀유식계를 삼승 안에 묶어버리고 여 래장계·대승윤리와 화엄을 일승에 짝짓는다. 대승윤리를 삼승(성 문·연각·보살승)의 상위개념인 일승(一佛乘)에 짝지은 것은 인간 의 욕망의 절제는 연기(緣起)에 대한 사무친 이해 위에서 나올 수 있다는 통찰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삼승보다 일승이 나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심(一乘)을 지닌 중생 스스로가 실천을 통해 이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원효가 삼승 위에 일승을 설정한 것은 삼승보다 일승이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가르침에는 삼승도 있고 일승도 있으나 모두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부합되기 때문에 평등 무차별하여 동일하다 는 것이다. 다만 실천을 위한 순서적 차등일 뿐 모두다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실천을 위한 사다리로서 제시된 것일 뿐이다. 원효가 대승윤리를 반야중관계와 해심밀유식계보다 상위에 설정 한 것도 바로 주어(主語, 주체)를 지니고 사는 인간의 실천행에 가장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심(一心)을 발견한 원효의 마음 도 바로 이 대비심(大悲心)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대비심은 덕상과 상응한다. 어떠한 구체적인 사태[事]와 추상적인 원리[理]에 즉(卽) 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편견과 편애가 없을 때 덕상은 비로소 만들어 지는 것이다. 원효의 무애(無碍)는 바로 이 대비심의 구체적 실천이 며 덕상(德相)의 투영 모습이다. 한없는 낮춤 속에 갈무리된 무한한 자부심을 우리는 소성거사(小姓, 小性居士) 원효에게서 읽을 수 있 는 것이다. 원효의 덕상은 바로 이 낮춤의 미학(美學)인 것이다. 보살 의 미학 역시 바로 이 낮춤의 미학인 것이다. 원효는 나누는 기쁨을 삶의 존재이유로 삼는 보살의 실천행을 자기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인 가치의 잣대로 설정한다. 이것이 바로 삼승의 상위개념인 일승(一乘) 안에 바로 이 대승윤리, 즉 연기 (緣起)에 대한 사무친 통찰 위에서 우러나오는 욕망의 자발적 절제 를 담고 있는 경전({영락경}·{범망경})과 보현교(普賢敎), 즉 자기 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질서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보살행을 머금 고 있는 {화엄경}을 짝 지우고 있는 이유이다. 따라서 원효는 바로 이점에서 주체적 인간의 모습을 실천 행위 위에서 제시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원효의 텍스트 비평의 눈인 원효 교판(敎判)이 새로움을 주는 것은 바로 대승윤리, 즉 보살의 윤리를 통해 욕망의 절제를 위한 실천 수행의 문제를 중심으로 교판을 짜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교판(敎判)은 교(敎, 敎學)와 관(觀, 수 행)이 포괄된 체계 위에서도 실천 우위의 패러다임을 머금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3) 다양한 주장에 귀 기울이기[和諍] 원효는 텍스트 비평의 눈을 통해 자신의 불학하기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불학을 전개하면서 먼저 그 이전 시대의 모든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뒤에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다. {열반종요}에서 '불성'에 대해 언급할 때나 {십문화쟁론} 에서 4구(句) 100비(非)의 다양한 논의를 종합 정리할 때나 기존의 모든 주장들을 다 수용한 뒤 그 주장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열반종요}에서는 종래의 불성에 관한 여섯 법사들의 주장들을 열거하면서 비평한다. 첫째는 백마사 애(愛)법사의 기술에 대한 축도생(竺道生) 법사의 설인 당래(當來)에 있을 불과(佛果, 當 有佛果)를 불성의 체(體)로 삼는다는 주장에 대해 '일천제 등은 선법 이 없지만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기 때문에 미래에는 그들도 선법이 있을 것이다. 현재세는 번뇌를 인연하여 능히 선근을 끊었기 때문이지만 미래세에는 불성의 힘으로 인연하여 마침내 선근을 생 할 것'이라는 {열반경} [사자후보살품]을 근거로 들어 논파한다. 그러면서 당래불과(當來當果, 當果)를 불성의 바른 인(因)으로 삼는 다는 불설을 논거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드러낸다. 계속해서 둘째는 장엄사 승민(僧旻)법사의 설에 대해서, 셋째는 광택사 법운(法雲)법사의 설에 대해서, 넷째는 양무제(簫焉[衍이라야 옳다]天子)의 설에 대해서, 다섯째는 새 법사(玄 ) 등의 설에 대해 서, 여섯째는 진제(眞諦) 삼장의 설에 대해서 일일이 경증(經證)을 들어서 비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효는 자신의 저서에서 종래의 다양한 주장을 언급 하면서 그 주장들이 지니고 있는 잘못된 점을 반드시 경에 근거하 여 하나하나 비판해 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한다. 본디 다툼이란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어떠한 편견 에 의해 상대방의 학력이나 신분, 인격 따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때문에 상대방의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니까 궤변이 나오거나 쓸데없는 논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판단했다면 자신의 주장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싸움이 일어날 리가 없다.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인가를 집어내지 못함으로써 말이 번거 로워지고, 감정이 실리게 됨으로써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옳고 남은 그릇되었다'[我是他非]는 '자찬훼타'(自讚毁他)의 입장이 싸움의 근원이 된다. 모든 주장은 자신의 이해(理解) 정도에 기인하 는 것이기도 하지만, 논쟁이 깊어질수록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해 (利害)에 근거해서 주장하기 마련이다. 이미 뱉어버린 말에 대한 책 임이 결국은 자신의 말을 합리화시키는 논리로 무장된다. 그 논리의 무장에 의해 다툼은 치열해 진다. 그런데 상대방의 이해(利害)와 요구가 나의 이해와 요구와 다르다 면 굳이 분쟁이 필요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이해와 요구를 통일 시키기 위한 조정(조화)과 화해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원효의 논 법, 즉 화쟁(和諍)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는 화쟁을 통해 부처 의 뜻이자 모든 것의 근거인 일심, 다시 말해서 모든 주장을 조화시 키고 화해시켜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한마음[一心]에 계합시킨다. 이른바 바다가 모든 강줄기들을 다 받아들이듯이, 거울 이 모든 사물을 다 받아들이듯이 화회의 바다인 화쟁회통의 논법인 것이다. 그는 종래의 무수한 주장에 귀 기울이는 겸손한 자세를 견지함으 로써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견해 가 없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인지 를 정확히 파악하기 때문에 다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 의 확고한 이론적 정립이 있다면 상대방의 주장을 듣지 않을 수 없 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집어낼 줄 아는 눈을 갖추기 마련이다. 원효가 남의 주장, 즉 종래의 다양한 주장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명료한 논지를 전개해 가는 것은 그의 학문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학문에서는 담론이 부단히 요구된다.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 다면 논의가 진행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 담론은 반드시 상대방 (논적과 독자)을 의식하고 전개되어야만 한다. 상대를 의식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상호 인정에 의해 논의가 출발된 다면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남을 의식하지 않고 뱉어내는 논리가 상대방보다 앞서가 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것은 상대방의 지근(知根) 의 뿌리가 얕아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입론자가 미래적 통찰의 눈에 의한 예견의 측면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허나 그럴 경우는 자신의 논리를 쉬운 문체에 담아 담론을 전개해가야만 불필요한 오 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결국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무슨 얘기를 하는가를 들어주는 자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상대방 이 말하는 바가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끝까지 그 주장을 듣고 난 뒤에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다툼을 지양하는 지름길이다. 원효가 보여준 불학하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한 주장에 귀 기울 이기, 즉 화쟁(和諍)에의 부단한 노력이라는 점이다. 4) 근기와 끈기, 모심[孝]과 섬김[順] 붇다의 가르침은 살아있는 것들의 성불(成佛)을 목표로 한다. 성 불에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력문(自力門)과 다른 어떠한 힘을 빌어 하는 타력문(他力門)이 있다. 선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본래면목을 보고 확철대오하는 상근기가 있 는 반면,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성불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살 의 대비심이나 붇다의 위신력으로 성불의 길로 이끌어 나아가는 길 이 있다. 정토는 바로 이렇게 스스로 성불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성불의 문을 보다 넓히기 위해 설정된 공간이다. 즉 정토는 고통받는 사람들 의 아픔을 해소시킨 안락한 곳이다. 다시 말해서 정토는 고통이 사라 지고 즐거움이 극에 이르른[極樂] 곳이다. 그것이 마음속의 정토이 든 마음 바깥의 어떠한 공간에 설정되었든 정토는 현실적 인간들에 겐 희망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근기(根機)는 그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이자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어떠한 목표로 나아가는 원동력인 끈기이다. 끈기는 사물과의 부딪침 속에서 생겨나는 질기 디 질긴 집요함이지만, 어떠한 목표를 성취시킬 수 있는 그릇이나 안목의 의미로서의 근기 역시 끈기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성불할 가능성을 머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 佛性]는 점에서 보면 끈기는 근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분명히 부처가 될 깜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도에서 포기하면 그는 그 정도의 근기로 평가받고 만다. 성불이라는 분명한 목표의 성취에 대한 평가기준이 근기에 있다면 그것은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치리들만 성불하는 것도 아니며, 중간치기나 하 치리들도 성불이란 목표를 향해 달려감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한 선 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붇다는 현재세에 번뇌를 인연하여 능히 선근 을 끊었기 때문에 도저히 성불하지 못하는 일천제에 대해서도 미래 세에는 선법이 있어 선근을 생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한 점에서 근기는 타고난 틀이기보다는 지극히 후천적인 끈기이며, 끈 기는 근기를 드높이는 원천이 된다. 우리 '민족의 부처님'인 원효(塞部) 역시 이 푸르른 강산[靑丘]의 잠룡(潛龍)으로서 평생을 이 땅의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그들의 삶을 보다 질적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일생을 보냈다. 원효의 삶을 추적해보면 그는 자유인으로 살다가 갔지만 그의 가슴 속은 언제나 현실적 인간들의 고통을 최소화(현실적 인간) 내지 무 화(보살적 인간)시키려는 대비심의 물결로 가득 찼었다. 이른바 학력[身分]도 없고, 믿는 구석[背景]도 없는 이들에게 어떻 게 하면 고통이 사라진 세계 혹은 한 순간이라도 괴로움이 없는 세계 를 스스로 맛보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원효였다. 나무아미타불 을 열 번만 외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한 원효는 이 근기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근기 이해에 탄력을 주었던 것이다. 현실적 인간들의 안목으로 보면 원효의 걸림 없는 삶의 방식은 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원효의 행동거지는 자유 자재한 그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의 삶에는 절도가 있었다. 막행막식(莫行莫食)에도 절도가 있는 법. 원효는 자신의 행위를 언 제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삶의 절도와 매듭을 부여하는 계(戒)에 대한 이해가 어떠했을까? 그는 계를 삼취정계(三聚淨戒)에 효순(孝順)하는 것으로 파악했 다. 삼취란 부모와 스승과 상가를 말한다. 이는 보살이 바라제목차를 비로소 맺을 때 부모와 스승과 상가에게 효순하고 지극한 진리(법) 에 효순하는 것을 말한다. 효순이란 모심과 섬김이며, 어기지 않는 행이다. 즉 효순은 효도스 런 행의 뜻이며 순종하고 순종한다는 의미이다. 원효는 이 효순의 대상을 삼취정계로 설정한다. 삼취정계란 첫째는 섭율의계(攝律儀 戒)로 효(孝)를 삼고 섭정법계(攝正法戒)와 섭선법계(攝善法戒)로 순(順)을 삼으며, 둘째는 계를 받는 체로써 효를 삼고 따라서 행하는 것으로써 순을 삼으며, 셋째는 지음이 없는 계로써 효를 삼고 적극적 으로 행하는 계로써 순을 삼는다고 했다. 원효는 그의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 '부모와 스승과 상가에 효 순하고 지극한 진리(法)에 효순하라'고 하면서 효(孝)가 곧 계(戒)라 고 하였다. 이것은 동방의 효도사상과 불교의 지계정신이 근원적으 로 동일한 것임이 확인되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효순의 뜻은 삼취정계를 실현함으로써 더욱 빛나게 되는 소이를 밝힌 것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원효는 자유자재한 자신의 삶의 모습이 효순(孝 順)이라는 틀에 의해서 전개되는 것이다. 참다운 계란 삼취정계라는 대상을 향해 효순하는 것이므로 막행막식만을 보고 그를 재단할 수 없다. 원효는 계의 본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제시했다. 즉 공문 (空門)에 집착하여 소승율의계를 벗어날 줄 모르면 이승의 낙공(落 空)에 불과하지만, 만일 막행막식주의로 범계를 꺼리지 않는데 물들 다 보면 이것은 중도를 모를 뿐 아니라 삿된 견해와 어리석은 견해에 얽혀 한량없는 죄업을 짓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계의 인과법을 의지하여 자유자재한 심성(心性)의 중도(中道)를 실현하 려는 것이 대승계의 근본 가르침이라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원효는 '있다는 데만 집착하지도 말고, '계체'가 없는 것이란 데에만 집착하지도 말아서 중도에 계합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하고 있다. 그래서 이 중도의 '계체'에 계합하려면 결국 {범망경} 과 [보살도정신] 조에서 상세하게 소개된 삼취정계의 정신을 수지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며, {범망경}에서 열거하는 십중대계(十重 大戒)를 중심으로 48경계(輕戒)의 정신을 실천하는 가운데 성취되 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보살의 지계정신은 이와 같이 자신을 위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한 행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 기준은 중도적 계율관인 것이다.
보살계(菩薩戒)란 흐름을 거슬러서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는 나루터요, 사악함을 버리고 올바름으로 나아가는 긴요한 문이 다. 그러나 사악함과 올바름의 모습은 쉽게 드러나도 죄(罪)와 복 (福)의 본성은 분별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더러는 속마음은 실제 사악하면서도 겉치레는 올바른 듯하며, 더러는 겉으로 하는 행동 은 물들었으나 속마음의 순박하고 깨끗하며, 더러는 하는 일이 약 간의 복에 합치되는 듯하나 실제로는 큰 우환을 초래하기도 하며, 더러는 마음과 행동이 심오하고 원대하면서도 얕고 가까운 것에 도 위배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더러움만 오로지 하는 도인과 사사 로움만 추구하는 사문(沙門)들이 오래도록 사이비 행동을 하면서 진정함을 잊어버리고 심오한 계를 매번 거역하며 천박한 행동을 구한다.
보살계란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나루터이지만 그 나루터가 보살이 나아갈 궁극은 아니다. 나루터란 무엇인가?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관문이 아닌가?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매이면 목표에 도달하기 어렵다. 보살이 나아가야 할 궁극은 상구보리(上求 菩提)요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야뇩 다라삼먁삼보리]을 깨닫기와 그 깨달음을 나누기이다. 그런데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고 일률적인 계상(戒相)에 집착해서 그것만을 고수한다는 것은 계(戒)에 대한 소 극적인 인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만 될 어떠한 고정적인 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즉 계체(戒體)는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나 계상(戒相)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중생구제라는 면에서 보살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가 문제가 된다. 즉 중생 제도를 위한 파계가 어떻게 선업이 될 수 있는가? 즉 계를 지킴과 범함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원효는 네 가지의 인(因)과 네 가지의 연(緣)을 들어서 보살계 와 소승계의 차이점을 밝혀내고 있다. 아래는 십중계의 하나인 자찬 훼타계(自讚毁他戒)에 네 가지 인(因)을 적용시킨 문장이다.
무릇 모든 계의 경우가 다 그렇듯이 그 가운데 한 두 가지만 들어서 말하고자 한다. 처음의 (나는 높이고 남은 내리는) 계에 대 하여 몇 가지 경우를 보기로 한다. 첫째의 자찬훼타계에는 네 가지 차별이 있다. 만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심을 일으키도록 하고자 한다면, 나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것이 복(福)이지 범한 것은 아 니다. 만일 방일(放逸)하거나 무기심(無記心)으로 말미암아 나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었다면, 이는 범한 것이되 마음이 물든 것은 아니다. 또 만일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사랑의 감정에서 나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었다면, 이는 마음이 물든 것이되 중계(重戒) 를 깨뜨린 것은 아니다. 끝으로 만일 재물이나 명예를 탐하고 남의 존경을 얻고자 일부러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헐뜯었다면, 이는 중 계(重戒)를 범한 것이지 경계(輕戒)는 아니다.
이처럼 원효의 계학에서 죄를 범했느냐[犯], 지켰느냐[持]의 기준 은 그 동기(因緣)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 행위가 어떠한 인연에 따라 서 나쁜 것[罪]과 좋은 것[福]이 되는지,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이 되는지를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외형적 행위만을 가지고 지계와 범계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원효는 대승계를 특히 {범망경}과 {보살영락본업경}을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수행자는 중생제도를 위해서 소소(小小)한 계(가벼운 계)에 매이지 말라고 한다. 원효는 당시의 {사분율} 중심의 계율 이해를 {범망경}과 {보살영락본업경} 중심의 대승보살계사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대승보살계를 {보살계본지범요기} (菩薩戒本持犯要記)에서 아래와 같이 분류하고 있다.
경구죄(輕垢罪) 중에 갈래를 세세히 논하자면 가짓수가 8만 4천 이지만, 중요한 것을 묶어서 들면 세 가지이다. 혹은 44 가지이니 달마계본(達摩戒本)에서 말한 바요, 혹은 48 가지이니 다라계본 (多羅戒本)에서 판별한 바요, 혹은 246 경계(輕戒)이니 {별해탈계 경(別解脫戒經)}에서 세운 바이다. …… 중계(重戒) 중에 합해서 얘기하면 10 가지가 있으며, 그 종류를 따지자면 또한 세 가지가 있다. 혹은 소승과 함께하는 중계(重戒)이니 앞의 넷을 이름이요, 혹은 소승과 함께하지 않는 중계(重戒)이니 나중의 넷을 가리키며, 혹은 재가보살의 중계(重戒)를 세웠으니 십중계(十重戒) 가운데 앞의 여섯을 말한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원효는 대승보살계를 유가계본 인 달마계본과 범망계본인 다라계본으로 이원화하여 가르고 있는데 이는 원효의 독특한 생각이다. 이는 유가계본인 달마계본이 {유가사 지론}에 의거한 삼승의 교의이기 때문에 '법을 버리거나 계를 범하 여 잃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범망계본인 다라계 본은 {영락경}에 의거한 일승의 교의이기 때문에 법을 버림이 없고 계를 범하더라도 계를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같은 보살계라 하더라도 삼승교에 속하면 대승보살계로서 제외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원효 계학이 일승교의인 {범망경}을 본위로 하여 삼승 교인 유가계를 포섭하게 되는데 특히 {범망경}의 정신적인 계조(戒 條)를 유가(瑜伽)의 법상(法相)에 이해 이론적으로 정리하려고 하였 기 때문인 것이다. 원효의 욕망의 절제에 대한 생각을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 밝히 고 있다. 이 저술은 계를 지님[持]과 범함[犯]에 대한 그의 생각을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른바 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인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 있지만 현실적 인간들의 겉과 속은 예측해 볼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넘어서는 어떠한 원리를 위해 자기 몸둥어리를 던지는 보살은 겉과 속이 한결같아야만 한다. 대승 보살계는 이러한 정신으로 수놓아져 있다. 원효는 대승계를 특히 {범망경}과 {보살영락본업경}을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수행자는 중 생제도를 위해서 소소(小小)한 계(가벼운 계)에 매이지 말 것을 말하 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계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원효가 그의 계율 관련 저술에서 보여주는 것은 대승보살계는 수행자가 계체(戒體)의 입장에서는 변함없이 지켜야 될 것이나 계상 (戒相)의 입장에서는 고정되거나 일률적인 사고를 전환시키기를 촉 구한다. 즉 소소한 계를 깨뜨림에 있어서도 그 '동기'가 중요한 것이 지, 그 결과만을 보고 처벌할 것이 아니다. 다만 참회를 통해 수행자 개개인의 내면적 각성을 중시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결국 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모심[孝]과 섬김[順]에 있어 얼마만큼 의 탄력과 역동이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대승윤리로서의 행동지 침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떠한 대상과 정황을 만날 때 어떻게 처신 해야하는가? 원효는 계체와 계상의 입장에서, 그리고 보살계와 소승 계의 입장에서 동기[因緣]라는 축에 의해 명쾌하게 설명해 냈던 것 이다. 따라서 모든 계의 운용에 있어 효순의 대상이 부모와 스승과 상가뿐만 아니라 우주법계를 향한 효순심(孝順心)으로 전개되고 있 는 것이 원효의 계학이 보여주는 특징인 것이다.
5. 불학은 보편적 인간학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원효의 불학은 보편적 인간학을 지향하 고 있다. 보편적 인간학이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린 지평에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보편'이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많은 개물의 어느 것에도 동일한 의미로서 공유되는 어떠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학이란 인간에 대한 연구 이다. 인간이란 동물이 다른 동물과의 동질성과 변별성은 무엇인지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즉 언어, 사유, 가족, 생물, 문명, 문화 등의 다양한 시각에서 인간을 파악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라 는 연기적 동물이 지니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여 연구하는 학문 일반을 인간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보편적 인간학이라고 할 때 그 보편성의 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의 거리의 최소화라는 한 축과, 둘째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물학적인 조건의 동일성이 라는 또 다른 한 축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곧 보편적 인간학을 지향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건강한 불학하기는 이 보편성의 두 축에 대한 이해 위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1) 모든 학문은 인간학 학문이란 배움[學]과 물음[問]의 의미를 머금고 있다. 예로부터 학문은 '문학'(問學)이라 하여 '배움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 배움이란 무엇인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공부의 과정이다. 가만히 눈을 뜨고 사물을 보라. 거기 에는 그 사물의 움직임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 배움의 대상 이 인간일 경우에는 몸으로 짓는 것, 입(말)으로 짓는 것, 생각(마음) 으로 짓는 것이 어떠한 것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짓는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가? 그 행위는 상대를 감동시키기도 하고 자극시키기도 한다. 인간이 자연에 가하 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유기체 사관으로 보면 나의 행위에 대해 자연도 동일하게 반응한다. 카버라라고 하는 식물학자는 죽기 얼마 전에 자신의 실험실에 찾아온 한 방문객에게, 길고 민감한 손가락을 뻗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 꽃을 만진다는 것은 곧 무한성을 만진다는 것입니다. 식물은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나는 저 꽃을 통해 언제나 곁에 침묵하고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한성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것은 지진 이나 바람 물 같은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식물학자의 발언이지만 사물의 총화인 세계에 대한 진지 한 배움의 자세에서 나온 통찰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러한 발언 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무한성을 만진다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들의 에너지가 뿜어내는 파장을 만진다는 것일 것이다. 그 파장은 그의 들숨과 날숨이 움직이는한 흐름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식물이 일으 키는 파장이 동물이 일으키는 파장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바로 식물 과 동물이 지니고 있는 유기체적인 보편성이 있는 것이다. 좀더 구체 적인 예를 들어보자.
1966년 2월 어느 아침 미국의 클리브 백스터라는 사람이 피검열체 의 피부 전기 저항을 측정하는 장치인 거짓말 탐지기를 식물에 사용 하여 인간의 영역으로부터 존재 전체의 세계로 확대시킨 결과를 발 표했다. 사무실 화분에 물을 주고 그는 곧 고무나무 잎의 습도 증가 상태를 거짓말 탐지기 테이프에 기록하는 방법을 통하여 물이 뿌리 로부터 앞으로 올라오는 정도를 측정해 보고 싶었다. 수분의 상태가 전기 저항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원리를 착안해서다. 그는 실험에 착수하여 탐지기의 두 전극을 잎 양쪽에 설치하고 물을 주어 전후의 결과 반응을 검증해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 다. 그는 다시 협박과 회유의 방법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 는 그 방법으로 잎 하나를 뜨거운 커피가 들어 있는 잔에 담궈 보았 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냥불을 켜서 잎 을 태워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런 결심을 하는 순간 잎을 태우지도 않았는데 단지 결심 한 바로 그 순간 거짓말 탐지기의 기록 침이 심하게 튀었다. 테이프 에 연결된 기록 침이 감정의 급곡선을 그으면서 파동쳤다. 백스터는 다시 살아있는 바다 새우 몇 마리를 고무나무 화분이 놓인 사무실로 가져와서 한 마리씩 끊는 물에 떨어뜨려 보았다. 식물 이 이 상황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역시 산 새우가 뜨거운 물에 떨어지는 순간 거짓말 탐지기의 기록 침은 심하게 튀었다. 그는 다시 죽은 새우를 같은 방법으로 끓는 물 속에 던져 보았는데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을 줄 알았던 식물이 이렇게 반응하는 모습을 인간들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내가 꽃을 향해 노래를 부르면 꽃은 더욱 더 꽃잎을 활짝 피운다. 이렇게 작용에 대한 반응이 인간 과 사물의 총화인 세계(자연) 사이에서 벌어진다. 현실적 인간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시력이 약한 것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속적 관심의 부족과 오만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과녁은 바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움과 물음 그 자체인 것이다. 불학하기는 바로 이러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예민하고도 따뜻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모든 학문이 인간학이라는 측면은 바로 다름아 닌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언어학, 가족학, 민속학, 신화학 등 인간에 관한 전 영역까지도 이해의 영역으로 설정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의 총화인 세계 역시 인간의 의식의 스크 린에 투영된 하나의 피사체(영상)로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는 인간학 과 관련을 맺고 그 이해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문이 인간학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 이해에 대한 무한히 열린 지평, 즉 자연(세계) 이해의 지평까지 포괄하는 전체적인 통찰 위에 서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인간과 세계 안에서 불학하기 붇다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해 통찰한 사람이다. 그는 연기 (緣起)라는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끊임없는 관계의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현실적 인간들의 삶의 총화인 일체(一切)는 인간(6근)과 세계(6경, 자연)를 매개하는 인간의 의식활동(6식)으로 구성된다. 우리의 삶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어떠한 연속의 체계로 구성된다. 그 연속의 원리, 즉 연기법은 인간과 세계에 관한 통찰의 벼리이자 서로 관련되어 있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의 세계[法界]에 관한 이법이다. 따라서 연기를 매개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 으며, 나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것도 고유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해 어떠한 집착을 하지 않음으로써 언 제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의 욕망 이라는 고정된 범주를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언제나 탄력과 역동이 개재될 수 있다. 따라서 불학은 어떠한 고정성에 대한 부정의 기초 위에서 출발한다. 불학은 붇다가 말하는 깨달은 존재[覺者]에 대한 연구, 즉 붇다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라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학이라고 할 때 이 용어 의 함의는 이 두 측면을 다 머금고 있으면서도 특히 '부처의 가르침 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으로 무게가 옮아간다. 따라서 불학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라는 측면에서 출발하 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대상화시켜 나와 구분된 무엇 으로 설정해 놓고 공부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된다. 불학은 불교하 기에서 비롯되어 불학하기로 전개된다. 학문을 하는 학자의 불학하 기의 궁극적 내용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 보리]을 깨닫기와 그 깨달음을 뭇 삶들과 나누기이다. 그런 점에서 불학자는 인간학자인 것이다. 불학하기는 바로 이러한 두 개념, 즉 부처에 대한 연구와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에 대해 '하는 자'로서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들이 불학의 대상이 아니라 불학하는 내 삶의 내용인 것이다. 불학자는 바로 불교적 인간이 지향하는 모습인 '발심하는 존재로서 의 깨닫기'와 '서원하는 존재로서의 나누기'라는 면을 간과한 채 문 자로 기록된 실내의 닫힌 텍스트에만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 내의 닫힌 텍스트뿐만 아니라 옥외의 열린 텍스트 모두가 불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자연)이 살아있는 텍 스트이다. 거기서 만나는 유기체들과 무기체들이 모두 내 불학하기 의 대상이며 내용인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진 원효의 삶과 생각은 바로 이러한 불학하기 의 한 모범인 것이다. 그의 삶과 생각의 역정이 일심(一心)과 화쟁 (和諍)과 무애(無碍)로 나타나듯이 이러한 세 축은 바로 우리 불학 자(인간학자)들이 배우고 물어야 할 불학하기의 한 전형인 것이다. 불학자들은 원효의 삶에서 넉넉함과 풍부함을 배워야 하고, 원효의 생각에서 명료함과 정치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바른 마음과 바른 인식, 그리고 바른 실천의 틀을 제시한 원효의 학문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것은 인식과 실천, 즉 앎 과 삶의 일치를 모색했던 원효의 불학하기의 내용인 것이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이 두 축의 행복한 만남을 우리는 원효에게서 볼 수 있다. 원효의 불학이 오늘날에도 생명력 을 머금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점에 있다. 불학하기의 한 모범으로서 제시된 원효의 삶과 생각은 오늘 우리 불학이 나아가야 될 미래적 비젼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 과 세계에 대한 통찰의 '깊이'에서 나오는 '철학(불학)의 보편성'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의 '너비'에서 나오는 '문학(언어)의 보편 성'이다. 언어적 측면이나 사상적 측면이 너비와 깊이를 모두 머금 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점에서 원효는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당대뿐만 아니라 전 시대 및 다음 시대까지의 인간과 자연(세계)에 대한 통찰의 시선 을 주면서 불학을 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원효의 불학 함이 머금고 있는 보편성과 포괄성의 내용을 묻고 배우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효의 공부론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이 해 위에서 시작되고 거기서 완성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