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14일 월요일에 내가 거주하고 있는 보이시(Boise)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웬델(Wendell)에는 아이다호 주에서 가장 큰 자동차 폐차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제주대 박교수와 함께 출발하였다. 지난 호에 기사를 올린 보이시 다운타운에서 진행한 클래식 카 페스티벌을 보고 난 후, 인터넷에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는데, 거기에는 자동차의 폐차장 즉,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웬델은 보이시에서 173.6 km정도 거리이며, 두 시간 반 정도 걸린다. 84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46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 쪽에 소재한 것으로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위 지도에서는 보이시에서 웬델까지의 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본 웬델의 자동차 폐차장의 모습이다.
웬델의 폐차장에서 본 첫 번째 풍경
우리는 오후 네 시경에 웬델에 도착하였다. 입구에는 고물상 건물이 바로 앞에 보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80대 정도의 백인 노인이 주인인 것처럼 뒤에 앉아 있었고, 히스패닉으로 보이는 남자가 방문기록을 해야 한다고 해서 적어 주었더니 웃으면서 사진 촬영을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부품이나 필요한 부분을 가져가는 사람에게는 대부분 무게를 달아서 얼마씩 받고 판매를 하고 있었다. 물론, 촬영하는 데에는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폐차장을 가본 적이 있었는데, 자동차를 쌓아 올리거나 한정된 공간에 모아 놓는 형식인데, 웬델은 시내와 멀리 떨어진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곳곳에 펼쳐 모은 상태로 세워놓고 방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장에서 만든 자동차를 자연에서 어쩌면 소처럼 방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동차는 소가 아니다. 소는 자연의 일부이면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만, 자동차는 폐기물 곧,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이 쓰레기는 엔진 오일 같은 기름과 타이어 그리고 고철 등이 빗물과 태양 그리고 바람에 아주 느리게 녹아내리고 산화되는 것이다. 환경오염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에 의해 파괴된 풍경을 보여준 리차드 미즈락(Richard Misrach 1949~ )의 사막의 노래(Desert Cantos)가 먼저 생각이 났고, 록 그룹 스틸리 댄(Steely Dan)의 베스트 모음집 앨범 표지에 실리기도 했던 짐 레인더스(Jim Reinders)의 카헨지(Carhenge)가 떠올랐다.
길을 따라 양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야생 사막 쑥, 아이다호 잡초(IDAHO WEEDS) 샐비어와 함께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진공상태를 느끼며 위로 걸어 올라갔다.
유리는 없는 것이 많았다.
트렁크나 문짝도 없는 것이 많았다.
어떤 자동차는 발굴해 놓은 유골처럼 차체만 보이기도 했다. 이건 숨겨진 인공적인 풍경이며, 신지형학(New Topographics)이다. 그리고 철강의 쾌락이 썩어가는 미국의 풍경이다.
물론 여기는 미국의 아이다호 주 웬델에 있는 폐차장이지 폭격으로 토양의 3/2가 사라진 한국의 매향리에 있는 농섬은 아니다.
페스티발에 나오는 클래식 카와 오래되어 폐차장에 유배된 클래식 카는 현대문명의 명과 암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밝음이 있으니 반드시 어둠이 발생되는 것이다. 웬델의 자동차 풍경은 보이시의 클래식 카 페스티발 풍경과는 다르게, 쇠의 녹이 피가 되어 흘러내리는 잔혹극(Theater of Cruelty, 殘酷劇)처럼 아주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배우이며 연극이론가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는 문명이 인간을 병들고 억압된 존재로 만들었다고 믿었으며 또한 연극의 진정한 기능은 인간에게 이러한 억압을 제거하여 본능적인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는 연기자와 관객 사이에 가로놓인 무대라는 장벽을 제거하고 주문과 신음, 비명소리, 고동치는 듯한 조명효과, 지나치게 크게 만든 무대 위의 인형과 소품 등을 이용한 가공의 경관들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풍경의 아름다움에서 잠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광경을 볼 때, '풍경=아름다움'이라는 등가는 현실 앞에서 거짓으로 밝혀진다. 기계문명의 역사 속에서 자연은 수많은 파괴와 오염으로 점철되었는데, 그 아픈 잔혹극을 나와 함께 재현해보지 않겠습니까?
네브라스카 주의 얼라이언스 부근에 설치되어 있는 짐 레인더스의 카헨지
그러한 연유와 함께, 다른 한 편에서는 폐차와 예술이 만나는 지점도 찾아볼 수 있다. 1960년대에 개념미술이 확장되고 분열되면서 대지미술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런 예술론의 새로운 전개와 함께 환경에 관한 문제를 미국에서도 부각시켰다. 1,209m의 고지대인 네브라스카 주의 얼라이언스(Alliance) 외곽에 짐 레인더스(Jim Reinders)는 ‘카헨지(Carhenge)’라는 작품으로 폐차를 오브제로 이용하여 영국의 솔즈베리평원에 있는 고대의 거석기념물 스톤헨지(Stonehenge)의 모형처럼 현대문명에 대한 성스러운 장소를 만들었다. 카헨지의 ‘헨지(henge)’는 ‘Stonehenge’에서 가져온 것이다. 카헨지는 미국의 빈티지 자동차로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회색 페인트를 스프레이로 뿌린 것이다. 1987년 6월에 하지(夏至)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지역의 하지에 해가 지는 시간은 밤 10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카헨지가 된 자동차들은 조각상들을 모시는 신전의 기둥처럼 성스럽게 건설되어 모셔지고 있다.
여러 언론에 나온 기사들을 정리해보니 시작과 컨셉은 구급차, 픽업트럭 등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를 사용해 영국의 선사시대 유적을 모델로 재구성했다고 한다. 영국 유학 시절에 스톤헨지의 역사를 연구하였는데, 1982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하지(夏至)에 자동차 ‘헨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동차 애호가였던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빈티지 자동차 38대에 회색 페인트를 뿌려 땅에 설치하였는데, 자동차 위에 차를 쌓기도 하고 반 정도 파묻기도 하는 방식을 둔탁하지만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일 년에 관광객 8만 명 이상이 관람하고 사진 찍는 관광지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 몇 개의 키워드가 관련된다. 그건 개념미술, 자연미술, 설치미술, 그리고 미니멀리즘이다.
한참을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촬영을 했더니 자동차 숫자도 줄어들면서 전봇대도 보이는 지점이 보였다. 그러니까 출입구에서 여기 까지가 폐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미국에서는 자동차를 오래 타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보이는 차들은 무척 오래된 구형들이었다.
이 작품은 토니 스미스(Tony Smith)의 죽음(Die, 1962)이다.
짐 레인더스의 카헨지가 왜 미니멀리즘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 논하려면, 우선 개괄적인 미니멀리즘에 관해서 알아야 한다. 먼저, 미니멀리즘(Minimalism, 극소주의)은 레디메이드(readymade, 旣成品)처럼 일상적인 오브제를 즉, 제품을 작품의 맥락으로 끌어 온 것이 아니다. 사물을 구성하는 물적 요소인 강철 빔이나, 모래, 흙 심지어는 보다 산업적인 원자재인 함석판, 알루미늄, 플렉시글라스, 호마이카, 형광등 등의 재료를 그대로 작품으로 전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상성과 경험성 그리고 사물성을 작품의 경계 안으로 확대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새로운 재료 또는 산업용 원자재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들은 최근에 개발된 것이거나 전에는 미술에 쓰이지 않던 것들이다. 예컨대, 호마이카, 알루미늄, 냉연강판, 플렉시글래스, 적동, 청동 등이 등장하는데 관객들에게는 친숙한 재료이기는 하나 예술로서 바라보던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 감상하면 매우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재료들이 산업용 원자재이기 때문이다.
토니 스미스의 ‘Die’ 는 입방체이다. 그리고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내면을 가진 인간을 의인화(personification)한 것이라고 한다. 왜 입방체가 사람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잔느로 올라가야 한다. 1904년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이며, ‘회상의 세잔느,1921’을 저술하기도 했던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 1868- 1941)에게 세잔느가 보낸 한 편지에서 “나는 자연에서 원추와 원통 그리고 원을 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모든 대상을 삼각형과 사각형 그리고 원으로 바라보라는 말을 뜻한다. 세잔느의 이 말을 좀 더 발전시킨 작가는 피카소이다. 그래서 그의 분석적 큐비즘에서는 사람을 점차 사각형이나 기하학적 형태로 조형한 것이다. 그러니까, 토니 스미스의 죽음 즉, ‘Die’는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보아야 감상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1939- )는 이 작품을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며, 맥락에 무관심하면서도 맥락에 의존한다.” 고 평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있는 인간의 실존 그 자체를 입방체의 형태 속으로 투사하고 있으며, 크기가 183cm×183cm×183cm로 인간의 신체의 크기와 관계가 있다. 관람자가 이 작품의 모서리와 가장자리를 보기 위해서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야 한다. 그래서 관람자는 자신의 키를 의식하면서 이 작품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 앞에 침묵하고 있는 덩어리가 현전하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시각적이고 움직이는 경험이 가장자리와 모서리들 그리고 입방체를 보고 느끼게 한다. 스미스는 관람자를 움직이게 했으며 그것을 관찰자 면전에 가져다 놓았다. 관찰자는 그 수직적 수평적 한계들을 자신의 경험 속에서 실존의 끝처럼 지각되는 그런 자신의 신체의 크기의 이미지와 대면하는 반면에 외부에 투사된 ‘자기 자신’에 대한 경험을 한다. 스미스가 1962년에 이 작품을 만들기 전에 소련의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실제로 지구를 떠나 1시간 48분 동안 달에서 지구를 일주했다. 자신이라는 고유한 존재로부터 거리를 두고 스스로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 크기의 입방체에 그런 실존적 열망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이런 실존을 스미스의 ‘죽음’에서 점점 녹슬어 가는 것에서 느껴질 수 있다면, 미국의 자동차 문명의 실존은 변두리 웬델에 와서야 폐차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넓은 황야에 버려진 수많은 자동차들은 영광스런 미국의 또 다른 면이다.
밥 딜런(Bob Dylan)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 가사가 생각났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동차를 버려야 우리는 문명의 허구에서 자유로울까?
여기 웬델에서는 히피들이 사라져서 그런지 대답해줄 바람도 불지 않았다.
황혼에서 보는 웬델의 폐차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영광과 쇠락을 나누는 자동차의 죽음이라고 생각했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동차 문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 를 생각하게 하였다. (친구야 그건 바람만이 알 수 있다네.)
나의 차에 시동을 걸고 여름밤의 바람을 얼굴에 맞히면서 카 오디오에서 나오는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들으면서 숙소로 달려왔다. 밥 딜런은 1962년 4월 16일 단 10분 만에 이 노래를 썼다고 한다. 밥 딜런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Marlais Thomas, 1914-1953)와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를 좋아했다고 한다. 둘 다 기행과 함께 파격적인 시를 뿌리다 일찍 사망한 사람들이다.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만들 때, 노예들이 불렀던 흑인 영가 ‘No More Auction Block’이라는 곡에서 멜로디를 따왔다면서 일할 때 부르는 노래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에, 이 글을 쓰면서 노벨 문학상을 딜런이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출판이 되어 책으로 나오지 않은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이 아니라 대중음악의 가사에 문학상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작가 어빈 웰시(Irvine Welsh)는 딜런의 수상을 아주 못마땅하게 트위팅했는데, 그 비틀림이 재미있어서 옮겨 보았다. 본인은 이번 시상을 “딜런의 팬이지만, 횡설수설하는 히피의 치매 걸린 전립선에서 나온 병든 노스탤지어(I’m a Dylan fan, but this is an ill conceived nostalgia award wrenched from the rancid prostates of senile, gibbering hippies.)”라고 일갈했다. 문학인들 중에서는 이번 수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의 문학을 빼앗아 간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은 인상주의 이전의 미술 작품 안에도 주인처럼 살고 있었고, 아방가르드 영화에도 거주하고 있었다. 하물며, 가사 위주의 노래인 모던 포크에는 매우 소중하게 문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오히려 문학인들의 영역이 넓어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지난 호에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자동차 문화의 화려한 면을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 웬델의 폐차장에서 본 자동차들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르토의 ‘잔혹극’을 불러 들였고, 짐 레인더스의 ‘카헨지’를 비교 시켜 보았다. 마지막에는 녹슬어 가는 자동차의 차체를 보면서 토니 스미스의 ‘죽음’을 겹쳐 보았다. 어떤 것을 보면서 많은 예와 이야기를 끌어 들이는 것은 초점이 흐려질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함유하는 넓은 면을 통해서 본질에 더 다가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