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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 길에서 줏은 맥주의 증언
조령의 맑은 공기 덕일까.
밤을 몰아내며 마셨고 잠을 설쳤는데도 거뜬한 기분이었다.
밤 사이 동생이 된 황병주와 산사의 보살을 연상케 하는 그의
부인 가평댁은 산으로 들어 갈 늙은 이를 위해 이미 새벽
식탁을 준비해 놓은 후 나를 깨웠다.
나의 거뜬한 기분은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하려 한 것 등등,
그들의 세심한 배려 덕일 것이다.
마패봉 정상
마패봉에 올라 섰을 때 우중충하고 비 올 것 같던 날씨가
산행에 알맞게 바뀌었고 새벽 식사를 든든히 해서 일까.
원기가 왕성함을 느낄 수 있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오며 부지런히 옮기는 발에 채인 캔 맥주
하나가 묵직했다.
어느 칠칠치 못한 종주자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리라.
좀 전 새벽에 무박 종주자들이 통과했음을 맥주는 말했다.
즐비하게 흩어진 지저분한 쓰레기들은 자기를 떨어뜨리고
간 그들의 소행이라고 백주가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골 백번이라도 반복하겠다.
백두대간 오염의 원흉은 대간 종주자들이라는 사실을.
당초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부봉에 오를 겨를 없이
동암문에서 평천재로 직행했을 것이다.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을 텐데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힘들여 부봉에 올라 지난 2월에 Knock해 봤던 주흘산과
인사 나누는 등 여유로웠다.
조령 이후 도처에 있는 문(門) 자 이름이 암시하듯 옛 성벽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정석대로 평천재를 거치고 탄향산을 넘어 하늘재에 내려
설 때 까지도 여유는 있었다.
빼앗긴 천금 같은 1시간
가평댁이 정성스레 싸준 주먹밥을 먹고 있는 하늘재에
산불 감시원이 나타났다.
나이도 지긋한 이 사람이야 말로 벽창호 였다.
실랑이 1시간여 만에 어딘가에 전화를 했고 그 쪽의
허락을 받는 듯 했다.
진즉 그럴 것이지.
그는 천금 같은 시간을 낭비케 했고 결국 이 늙은 이로
하여금 심한 밤 고생을 하게 한 셈이다.
충북과 경북을 가르며 반복하는 북상과 동진의 대간을
가로 지르는 하늘재의 양편에는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가 있다.
하늘재란 현세에서 내세로, 관음세계에서 미륵세계로 넘어
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일까.
포암산 정상
까다로운 너덜 같은 바윗 길 오름을 때로는 설치된 로프에
매달리면서 계속하여 포암산에 올라 섰다.
베(布)를 짜서 펼쳐 놓은 것 같은 암벽이라는 뜻이란다.
하늘재 주변의 불교 성향의 지명들이 대간 마루에 까지
올라와 있다.
'관음재'를 지나 만수봉 갈림 길 후의 대간은 800m~1,000m
대의 지루한 동남향으로 어어졌다.
시야가 확실하게 확보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만수봉 갈림길 : 제천시역 이정표의 방향표시는
모두 백두산과 지리산으로 되어 있다
부리기재에 도착한 것은 이미 어둠이 깔린 후였다.
대미산을 향해 오르다가 돌아섰다.
산불 감시원에게 빼앗긴 1시간이면 어둡기 전에 눈물샘에
도착해 지금 쯤 휴식에 들어 갈 수 있었으련만....
입산을 허용한 것만도 고마워 해야 할 판에 무슨 불만?
어차피 그리 할 꺼라면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일 뿐이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부리기재 오른 쪽 저 아래에서 불빛이 명멸했다.
문경읍 중평리 임을 지도에서 확인했다.
밤 8시, 가냘프게 비쳐 오는 불을 향해 탈출을 시작했다.
내리 꽂듯 한, 더러는 60~70도에 이를 듯한 급경사 Z길
곡예가 1시간여나 계속되었다.
자기네 끼리 불을 주고 받으며 이제 막 생업 활동을 시작한
저들 산 가족에게 또 폐를 끼치게 되었다.
덕유 삿갈골재 이후로는 야간의 진행을 잘 피해 왔건만....
깜짝 놀라 튀곤 하는 저들에게 연방 사과하며 도착한 불 밝은
집 매점에서 일부러 막걸리 사 마시며 사정해 봤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No 였다.
방을 달라는 게 아니고 마당 평상 사용의 허락을 부탁하는 것
뿐인데 아이들 교육상 좋지 않아서 안된단다.
황당한 이유, 교육이 뭔지 알고 하는 말일까?
지도상의 초등학교 폐분교에 가는 길을 물었더니 칠흑 한 밤에
'저어~기' 라는 이 고약한 인심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빈 집을 찾아 헤멨지만 허사였다.
4월 중순의 산촌 밤 공기는 후줄근해진 몸을 오싹하게 하고
밤은 깊어만 갔다.
다리 밑의 보송보송한 공간을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환한
불빛의 집을 찾아 갔다.
띄엄 띄엄 있는 가로등 말고는 온 마을이 깜깜해졌는데
유일하게 켜 있는 집이었다.
폐분교를 찾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였을 뿐이다.
선생님 같은 인상의 안경 쓴 키 큰 여인은 자초지종을 말할
겨를도 주지 않고 나를 방으로 끌어 들였다.
너무 깨끗한 방이라 지저분한 몸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따뜻한 어묵, 꼬치 한 그릇의 상을 들고 왔다.
밥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폐분교는 추워서
안되니 이 방에서 편히 쉬라는 것.
현실 같지 않았다.
내 살을 꼬집어 보고 싶었다고 할까.
새로 꾸민 듯한 따뜻한 방과 이직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은
것 같은 새 요와 이불이 더럽혀 질까 걱정되었다.
옷과 배낭에서 떨어진 산부스러기들을 두 손으로 쓸어
모아도 여전히 지저분해 민망스러웠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 지옥과 천국이 병존하는가.
나는 한 순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 온 것인가.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일까.
기침을 해도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늙은 山나그네에게 안식을 준 그녀에게 감사드리는 인사의
글을 남기고 조용히 나섰다.
벽에 걸린 몇 점의 성화(聖畵)와 새벽에 확인한 지붕 위의
십자가가 이 집이 교회와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케 했을 뿐
아무 것도 아는 것 없이 떠나 올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 나는 반갑기 그지 없는 전화를 받았다.
안경 쓴 키 큰 그녀에게서 온 것이다.
내가 남긴 글을 보고 건다는그녀는 정진이 목사.
폐분교는 수양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교단에서 매입하여
보수중이며 자기는 이 일의 책임자라 했다.
이따금 들린다는 서울에서의 재회를 간청했건만 아직 껏
이루어지지 않으니 내가 찾아가는 게 도리인 줄 알면서도
차일 피일하고 있는 것은 배은망덕이 아닌지...>
식중독에 그로기(groggy) 되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에도 여전히 꿈을 꾼 것 같기만 했다.
간 밤에 구르지 않은 것이 기적 같기만 한 된비알을 거슬러
부리기재에서 다시 대간을 타기 시작한 것은 아침 7시.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호사다마인가.
대 반전 드라마의 현장 중평리를 내려다 보며 행복한 아침 해를
감상중인 대미산 정상에 무박 종주자들이 요란하게 등장했다.
예외 없이 오물의 무단 투기라는 족적을 남기고 가거나 새벽의
고성 방가로 이 늙은 이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그들에 대한
개탄으로 아침을 여는 일이 없으면 참 좋으련만.
대미산 정상
충북과 경북의 도계로 진행되는 대간 길중 제천시역(域)에
이르러서는 색다른 이정표가 등장한다.
방향 표시를 멀리 백두산과 지리산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미산과 문수봉 갈림 길의 직각에 다름 없는 Zig - Zag로
새목재에 이르러 빵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삼일 째 된 것이라 주저되었으나 달리 먹을 게 없어서 였다.
꺼림칙 하여 조금 먹다 말았는데도 이 빵이 식중독의 주범이
되어 산 속의 긴 하루를 힘들게 할 줄이야.
약간 메스꺼운 느낌으로 시작해서 헛구역질이더니 급기야는
장이 꼬이는 것 같은 아픔으로 꼼짝 못하게 했다.
진통제를 먹고 한 동안 엎드렸다 누웠다를 반복했다.
다소 진정되는 듯 해 일어섰지만 완전히 그로기 상태였다.
이런 경우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도 한 없이 높게만 느껴진다.
이제부터 천근 같은 몸은 정신력에 엎혀 절로 갈 뿐인데
정신마져 흐려지는 듯 했다.
참외 한 조각에 황장산은 넘었으나
휴일의 대미산 ~ 황장산 구간은 인기 있는 산행 코스란다.
더구나 4월의 청명한 날씨여서 인지 꽤 붐볐다.
차갓재에서 진행을 포기하려 하는데 지쳐 보이는 늙은 이가
안쓰러웠는지 한 부부가 참외 한 조각을 주었다.
냉장해 온 듯 시원한 참외를 받아 먹는 순간 퍼뜩 정신이
새로와 지고 몸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도중 하차를 좀 더 연장하여 작은 차갓재에 도착했다.
황장산을 지근에서 바라보자 예의 고질인 욕심이 발동했다.
그러나 묏등 바위 앞에서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거운 배낭을 맨 채 20 여m 자일에 매달리기엔 팔의
힘이 너무 빠져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빈 몸으로 올라가 보조 자일로 묶은 배낭을 끌어 올리는
방식으로 해서 황쟝산 정상에 올라섰다.
황장산 정상 : Groggy 상태
정상에서 만난 진주산악회의 대규모 일행이 여기 저기에서
식사를 권하는데도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사양했다.
참외 한 조각의 힘으로 오르긴 했으나 앞으로도 만만치 않은
급경사 암릉들이 까탈을 부릴 텐데 난감했다.
노회(老獪) 만으로는 헤쳐 갈 자신이 없어 다시 어머니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고집스럽게 칼날 같은 암릉을 타고 감투봉을 넘어 황장재에
도착은 했지만 내게 남은 힘이라곤 몸, 정신 어느 것도 없었다.
이후의 벌재에 이르는 대간 길은 어렴풋할 뿐이다.
양 눈으로 확인하며 두 발로 걸어 간 길이 분명한데 왜 그럴까.
정녕 뇌의 기억장치 마저 기진 맥진 기능을 정지하고 말았던
게 아니었을까.
치마바위에 이르는 암릉 길,
오른 쪽 가파른 내리막 끝의 폐맥이재,
진주산악회 팀 사이에 끼어 900m대의 봉들을 힘들게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급전 직하로 벌재에 내려 섰다는 정도의 막연한
기억 밖에 없다. <계속>
蛇足13 :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 유감이다.
배낭만 외롭게 찍힌 것은 대간 길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蛇足14 : 6월에 대간 종주를 시작하겠다던 진주산악회 여러 분과
6월 16일 구룡령에서 반가운 재회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