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이 깔리면 옛 레닌동상 아래로 10대들이 모여든다. 과거 폴리타주 콜호즈의 젠트랄(중앙구역) 길목에는 레닌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1985년 조용히 동상이 끌어내려졌다. 붉은 청년단이 혁명을 떠받쳐 온 레닌동상터가 이제는 10대들의 `접선장소'로 둔갑했다. 혁명의 열기는 사라진 지 오래고 조숙한 아이들은 키스나 그 밖의 사랑찾기에 열중한다. 소련연방 해체이후, 10여년간 밀어닥친 변화를 상징하는 현장.
좀더 나이가 든 축(20대 초반)은 카페로 진출한다. 젠트랄에는 카페가 세 군데 있는데 모두 고려인이 운영한다. 하이네켄 맥주가 진출했지만 값이 비싸고 지방맥주는 맛이 싱겁다. 그래서 보드카와 코카콜라를 마신다. 당구 치면서 술 마시고 노래방 화상기 앞에서 러시아나 미국 노래를 부른다. 주말에는 제법 성장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춤에 취한다. 결혼 석달만에 이혼한 코사크인 굴리아(22)는 블루스를 추면서 `토요일, 기다렸어요'한다. 춤은 토, 일요일 밤에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평일 밤 10시가 넘으면 모든 것이 종료된다. 깜깜 절벽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 중앙로를 밝혔던 가로등은 꺼졌다. 이따금 순찰차가 불 빛을 번득이며 휑한 광장을 가로지른다. '경찰국가'의 냄새가 난다.
고려인, 카자크인, 우즈베크인, 타타르, 루스키, 위구르, 우크라이나 등 4431명의 다민족사회인 젠트랄 구역. 고려인이 2513명으로 단연 '고려인 촌'이다. 이곳에서만큼은 다민족 우즈베크 때문이 아니라 고려인에게 '괴롭힘 당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농장은 절단난 상태.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심지어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이 방문했을 정도로 구소련에서도 소문났던 폴리타주 콜호즈. 대부분의 경작지는 목화밭이다. 그러나 국제 목화값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고려인이 '눈물겹게' 보급한 논만 조금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장시간 차를 타고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당연히 식량은 자급이 안된다. 오로지 면화만 짓는 셈이다.
콜호즈는 독립채산제이나 5년간 적자상태다. 빈땅이 늘고 있다. 지난해 일값을 지불하지 못했다. 일값을 못받으니까 청년들은 도시로 떠났다. 토지소유는 여전히 사회주의 집단소유방식인지라 콜호즈는 방대한 땅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아렌다'(일종의 임차농) 방식으로 빌려줘 농사짓게 하지만 이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은 대학 보내-)
폴리타주의 위대한 신화를 창조했던 전임 위원장 황만금은 사회주의 노력영웅이었다. 구소련 노력영웅 800명 중에서 200명이 고려인이다. 황만금의 아들은 거대한 온실을 '아렌다'해 토마토 등을 온실재배, 수십만달러를 벌어들인 재력가다. 고려인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다. 식자층이 많은 덕분에 농촌을 떠났다. 역설적으로 고려인이 건설한 콜호즈도 차츰 타민족에게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누구 누구는 도시에서 한탕해 달러를 벌었다'는 풍문이 시골까지 파다하다. 고려인들의 꿈은 '화려한 자본의 나라' 한국을 향한다. '일확천금'을 벌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타슈켄트 시내의 가라오케에서 만난 김 알렉산드로브나(21)는 타슈켄트 국립대학 재학생으로 술집에 나온다. 한 달에 30달러씩(약 3만5000원) 1년만 일하면 한국에 갈 여비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한국의 노련한 '사기꾼'들이 비즈니스로 들어와 천민자본주의 동네에서 배운 솜씨로 가난한 고려인을 등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길거리에서 만난 키르키즈족 여성이 느닷없이 이렇게 내뱉는다. "한국사람, 나빠요!"
러시아로부터의 실질적 '독립'을 위해 화폐 '숨'을 발행했다. 법정환율은 달러당 130숨이지만 순진한 관광객 빼놓고 은행에서 바꾸는 멍청이는 없다. 달러를 철저히 통제한다. 그러나 '제2의 유태인'으로 활약하는 고려인 환전상들이 길가에 즐비, 달러당 500숨에 바꾸어준다. 학교교장의 한달봉급이 5000숨이므로 월급은 10달러쯤 되는 셈이다. 콜호즈 19학교 김 빅토르 교장은 구소련시절 300루블 봉급으로 모스크바는 물론이고 페테르부르크, 크림반도까지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은 모스크바에 갈 차비도 안된다.
그래서 텃밭이 중요하다. 대개 100㎡ 땅에 집을 짓고 텃밭을 지녔다. 고추 배추 가지 콩 딸기 토마토 등을 키우며 살구나무 석류 배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그런 대로 `자급자족'이 된다. 고려인은 반드시 토종닭이나 돼지를 키운다. 알을 바자르(시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식량으로도 쓴다. 우즈베크인들의 텃밭은 더 효율적이다. 그네들은 채소농사를 짓지 않는 대신에 소 말 양 염소 거위 등 유목전통을 지킨다. 염소젖을 짜서 새벽에 시내에 내다팔아 생필품을 사온다.
사회주의 해체국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매춘은 해체의 정도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 타슈켄트에서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이루어지는 10여개의 공인된 나이트클럽에는 매혹적인 타슈켄트의 젊은 여자들이 홀을 메운다. 춤과 노래를 즐기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답게 뛰어난 춤솜씨를 보여준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우즈베크 여성이 일행에게 조용히 말한다. "50달러!" 조금 있다가 "40달러!" 가격이 내려간다. 술집을 안내한 김빅토르 교장의 아들인 김 세르게이는 웃으면서 말한다. "이런 술집에 오는 여자들 절반 이상은 그렇고 그래요."
변화는 여인들의 옷차림에서 두드러진다. '사회주의형 국영패션'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배꼽티, 반바지가 성행한다. 방목과 전쟁에 종사하던 유목민 남자들은 할 일이 사라지자(?) 대충 노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여성들은 부지런히 일한다. 그런 탓일까. 여성들은 외출할 때면 반드시 성장을 한다. 화려한 빛깔의 옷을 차려입고 장신구에 신경을 쓴다. 남자들이 대충 입고 사는 데 반해 정작 즐기는 측은 여성들이다. 보기에도 좋다.
<새벽 5시까지 흔들고 노래하고...>
우즈베키스탄은 '이행기'에 있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친서방노선을 택하면서 이슬람세력을 경계한다. 3월의 폭탄테러사건을 회교근본주의 책동으로 보기 때문에 이슬람은 '박해'를 받는다. 틈새를 비집고 콜호즈에도 한국 개신교회가 날로 번성한다. 그러나 고려인 신도 빼놓고는 타민족 교인은 없다. 공책과 연필 나누어주기, 한국 여행시켜주기 등 '전가의 보도'를 들이밀면서 '밀어붙이기식'으로 세계 선교에 앞장서고 있다. 이슬람세력을 제어하는 카리모프 대통령 밑에서는 민족갈등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앞으로 이슬람 세력이 강해지면 '끔찍한 종교탄압'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그런데도 한국 개신교회는 이곳에서도 교파간 각축전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콜호즈에 아침이 밝아오면 국영카페 옆 고목나무 밑에는 노인들이 모여든다. 원동에서 기차에 실려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할 때 대개 젖먹이거나 소년이었던 이들이 이제 노인이 됐다. 투박한 함경도사투리의 노인들은 남한사람을 만나면 놓아주질 않는다. 푹 파인 눈자위 주름가에 세월에 실려온 한민족의 서글픈 100년이 아로새겨진다. 눈물이 나온다.
가슴에 늘 훈장을 달고 나오는 박 미하일 옹(78)은 구소련의 당관료. 훈장은 빛바랜 영욕의 추억을 말해준다. 원동에서 머나먼 길을 떠나온 이들에게 역사의 회한이 없을 수 없다. 김 빅토르 교장선생은 북조선 두번, 대한민국 한번, 도합 세번씩이나 조국을 다녀와 동포사회에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통한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를 '한국인'이나 '조선인'이라 자칭하는 법이 없다. 그저 '고려 사람'이라 할 뿐이다. 그 고려 사람들이 수십만명이나 존재한다. 이들이야말로 지난 20세기에 우리 역사가 남긴 유산이 아닐까.
2, 3세대는 고려말 전혀 몰라
국내 신문에 보도된 중앙아시아 이주민의 원동(遠東·극동지역)으로의 귀환노력은 잘못된 보도다. 우즈베크인들에 의한 고려인 탄압설도 부풀려졌다. 잔존한 1세대가 원동으로 귀환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제는 고려말을 전혀 모르는 2, 3세대. 그네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뿌리박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크로드의 카라반 대상들이 지나치던 길목. 멀리 천산남로와 북로를 거쳐 중국의 장안에 이르고 신라땅에까지 동서문화가 교류되던 번성하던 서역땅. 석양이 지는 들판에서 유목민의 후예들이 양떼를 몰고 귀환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가난하다. 사회주의 시절, 한창때는 정말 '잘나갔다'. 이미 50년대에 신작로가 포장됐고 전기와 가스가 들어왔다. 바자르와 극장, 음악학교, 병원 따위가 시골까지 들어섰다. 극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콜호즈의 '시계'는 멈췄다. 화려한 공연의 막을 올리던 문화궁전의 분수대도 서 버렸다. 콜호즈 임원들은 고백한다. "시장경제로의 이행기다. 상황은 현재진행형. 지난 5년간 수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앞으로 어디로 나가야 할지 솔직하게 모르겠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