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9일 황인오(黃仁五·42)씨는 노동부 구직센터에 가서 구직지원서를 냈다. 출옥 후 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바로 생계문제였던 것이다.
『뭘 해 먹고 살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입니다. 제가 이렇게 빨리 석방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출옥할 때 어차피 10년은 더 징역을 산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4년간은 일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법을 어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적으로도 어긋나지 않는 경제활동을 통해 세상에 보답하고 우리 가족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집중적으로 할 작정입니다』
희망업종에는 노무관계 상담직이라고 썼다. 그는 이전 사북탄광에서 광산노동상담소를 운영했던 경험과 감옥 안에서 익힌 상담기법 등을 활용해 현재의 「대책없는」 생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가 상담직을 희망한 것을 두고 「불온한」 생각을 갖는 이도 있을 것이다. 혹시 그런 일을 통해 그가 이전처럼 노동운동을 다시 하려는 게 아닐까, 아니면 간첩단을 조직하려는 것은 아닐까라고.
그러나 그는 변했다. 수감 이전에는 노동자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노사 양측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합리성을 생각한다. 6년의 수인생활을 통해 그는 온건한 노사관계론을 정립했다. 과거의 자신이 편향된 이념으로 세상을 재단해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놓친 채 사용자는 나쁘고 노동자는 무조건 옳다고 여겼던 점을 수정하게 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본가 계급을 물려받은 이가 있고, 스스로 노력해서 자본가가 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부를 이루면 남들보다 더 많이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의무와 도덕이 따르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들이라고 덮어놓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류라는 집단이 영속하는 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고 볼 때 공산주의 사회가 되더라도 초기에는 일정하게 교정되다가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기성사회 안에서 조화롭게 평화를 이뤄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사 문제도 그렇습니다. 결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당국 몰래 북한까지 갔다온 인물로 주체사상 신봉자였던 그가 이토록 큰 변화를 겪게 된 동인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저 자신과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화해하고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도해 보려는 것이 제 생각이요, 다짐입니다. 이념의 허망하고 파괴적인 속성, 특히나 북한 체제의 비극적 파국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 이렇게 멀고도 험난한 길을 우회해야 했던 제 어리석음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또한 겪을 것은 다 겪어야 도달하게 될 제 삶의 방식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부지역당 사건 내막
중부지역당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92년 9월15일. 황씨는 북한에서 밀파된 거물급 간첩 이선실에게 포섭돼 90년 10월17일 이선실을 따라 밀입북, 노동당에 가입하고 간첩교육을 받은 뒤 공작금, 노동당 강령 규약 등을 갖고 같은 달 23일 돌아온 혐의(간첩 및 반국가단체 구성·가입)로 구속됐다.
황씨는 당시 서울대대학원 서양사학과 2년에 다니고 있던 동생 인욱(仁郁·31)씨와 노동운동을 하며 알고지내던 전 민중당 성남을지구당 노동위원 최호경(崔虎敬)씨 등 핵심 주사파 12명을 북한노동당에 가입시키고, 91년 7월말경 최씨 등과 함께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하고 산하에 강원 충북 충남 3개 도당을 결성했다.
이 사건이 대선을 앞두고 처음 드러났을 때 단순한 우연이라는 안기부의 주장과 달리 수사발표 시기가 계산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수사발표에서 정형근 당시 안기부 수사차장보는 북한이 『오는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내려보냈다고 공개 발표해 의혹을 더했다.
그러나 황씨는 안기부의 수사발표를 대부분 시인했고, 재판 과정에서 세 가지 사실만을 부인했다. 우선 민중당을 지원한 이선실이 과연 북한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느냐는 것. 황씨는 이를 부인하다가 97년 8월 펴낸 옥중수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천지미디어)에 『내가 만난 이선실(이선화)이 북한 권력서열 22위인 이선실과 동일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국 후보위원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또 조직의 명칭과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실제 존재 여부가 문제였다. 황씨는 1심에서 자신들의 지하당이 조선노동당의 강령을 채택한 게 아니라 한민전의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내세워 애국전선이란 명칭을 주장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였지만 실제 명칭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다. 황씨는 『한민전은 실체가 없는 선전기관일 뿐인데 아직도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했다.
「IMF시대도 살 만하지 않은가」
―이전의 조직운동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는지요.
『제가 가만히 있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변혁운동에 뛰어들었을 때는 결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일의 의의를 먼저 보고 후에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감옥을 나설 때는 이제 제 이익을 먼저 챙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비인간성, 야만성은 아직도 살아 있는데 그런 면까지 도외시할 것인지요.
『9월초에 정선 탄광촌을 갔다왔습니다. 광산 노동상담소 간사로 일할 때 알게 됐고 저의 석방운동에 헌신적이었던 정선성당 김영진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때는 옳다고 생각해서 했던 일이고,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 이제 몸도 마음도 집안도 추스르며 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열차를 타고 가는데 탄광촌 주변 역에 석탄이 하나도 없고, 우리가 살던 함백의 광부용 사택도 없어졌더군요. 신부님께 여쭤봤어요.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사는지. 모두 농사짓고 산대요. 그 동네 길 하며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그림 같더군요. 60∼70년대 살던 것에 비하면 IMF 시대라고 해도 살 만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보다 사회가 더 좋아져야 하고 많은 모순들이 완화돼야 하겠지만 모순없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회의 모순과 불협화음들을 얼마나 잘 관리하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만큼 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생활이 안정되고 여러 정황이 좋아진다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으로 기여할 일을 찾겠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들이 흔히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고 하지요. 제 처지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희생하고서라도 남을 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러 비겁하긴 했어도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 사회에서는 그렇게 절박한 문제가 많은 것 같지 않고, 제가 섣불리 뛰어들 자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가족들에게 끼쳤던 고통들을 조금이라도 갚는 게 우선입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특히 강조하는데 과거에도 그 점을 몰랐던 것은 아닐텐데 왜 지금에 와서 그렇게 강조하는지요.
『제 아들 두하(10) 얘기를 먼저 해볼게요. 제 아들에게 어린 시절의 저처럼 기성회비를 못 내 학교에서 쫓겨가는 그런 것은 물려줄 수 없습니다. 이전의 저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기여하고 그를 통해 아들에게 변화된 사회를 물려주려고 했다면, 지금은 제 개인적 노력으로 제 가족만이라도 곤궁함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도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들 두하는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온 사실을 압니까?
『그 점이 참 고민스러웠습니다. 제가 옥중에 있던 어느날 두하가 제 엄마에게 아빠는 왜 경찰서(교도소)에 가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아내가 면회 와서 그 얘기를 하더군요. 아버지로서 뭔가 대답할 말을 찾아야겠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고민 끝에 「아빠는 나름대로 옳은 일을 한다고 했는데 뭔가 오해가 생겨서 경찰서(교도소)에 들어갔다, 아빠가 치러야 할 일을 치르고 있는 것이며 경찰도 옳은 일을 한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한 가지 자랑스럽게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김대중대통령과 비슷한 시기에 계엄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갔었고, 같은 날 풀려난 적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대개 대통령을 좋아하니까 그 사례를 통해 스스로 현재 아빠의 처지를 유추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광부 아들 3형제가 운동권
―이번에 동생 인욱씨와 함께 출소했을 때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내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라고 했다면서요.
『「이젠 됐다, 이젠 들어갈 일도 없을 테니까, 둘 다 나와서 이제 안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가족이 석방되는 일이 처음은 아닙니다. 셋째인 인혁이와 막내인 인욱이 저를 합해 3형제만 8번, 어머니 아내 제수씨까지 따지면 모두 11번 석방을 맞았으니까요. 과거에는 변혁운동을 하다 감옥에 갔다 오는 것이 당장은 고통스러워도 사회적으로 대부분 정당한 것으로 인식했었고, 우리 자신도 고무돼 있던 때여서 그것이 상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중부지역당 사건은 경우가 다르고, 정말 기약할 수 없는 감옥살이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풀려나와서 가족들의 감회가 남달랐을 겁니다』
황인오씨의 지난한 삶을 추적하다 보면 현대사의 비극적인 큰 사건들과 만나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92년 중부지역당 사건 때는 인오씨를 비롯해서 동생 인욱씨, 전 민가협 부회장이었던 어머니 전재순씨(65), 아내, 제수씨가 간첩으로 몰렸다. 당시 4살 된 아이(두하)도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 20일간 억류돼 있었다. 4남2녀 중 첫째인 인택씨(45·운수업)만 빼고 나머지 3형제가 모두 운동권이었던 집안이다.
인오씨는 정선 함백 탄광의 광부였던 황중연씨(66)의 4남2녀 중 둘째.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그의 삶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우리 장수황씨 조상 중에 황희 정승이 있다』는 말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 같지만 당시엔 그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황희 정승의 자손이라는 것을 긍지로 삼아 저는 뭔가 남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을 전전하며 10대 광부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또래들이 월급을 받으면 그날 저녁 술집이나 창가로 몰려가곤 했지만 저는 가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집안이 그런 대로 잘 살았는데 중간에 어떤 계기로 몰락했다고 느끼고 저를 통해 우리 집안이 중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인오씨는 9월 초 그런 심중을 형제들에게 처음 그런 토로했다고 한다.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세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그의 가슴 한 켠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정치가의 꿈을 키운 것도 그 때문이다.
80년 사북사태에 휩쓸리다
중학교를 2학년 때 중퇴한 황씨는 상경해 중국집 등을 전전하다가 의류공장에 취직, 1년간 재단사로 일했다. 일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해서 공무원시험이나 멀리는 사법고시까지 치를 작정이었다.
그러나 1970년의 의류공장, 전태일이 자신의 목숨을 불사르며 고발했던 바로 그 의류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그는 점점 절망하게 된다. 공부에 집중할 시간도, 책을 살 돈도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72년 고향으로 돌아가 17살에 광부가 돼 아버지와 같은 작업장에서 곡괭이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광부는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래도 그게 낫더군요. 광부가 되니 돈도 더 벌 수 있어 책이라도 한 권 더 사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석탄을 캐면서도 정치가가 되려는 꿈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78년 방위병 시절 작은 싸움에 말려들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군 영창 생활을 하면서 정치가의 꿈이 물거품이 됐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신분 상승의 꿈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창창한 나이였던 그는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 그걸 통해 신분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감옥 안에서 신학 관련도서를 접하면서 그는 우연히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한완상씨가 주간으로 있던 「기독교 사상」,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나온 책 들을 읽게 됐다. 그런데 그 책들 속에는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의 세계가 있었다. 그 책들은 어린시절 주변의 탄광노조를 보면서 노조활동은 건달이나 하는 것쯤으로 여겼던 그의 노조관을 바꿔놓았다.
『그때 비로소 저는 사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출옥 후 돈을 이용하는 더러운 선거, 노조위원장들의 비리 등을 지켜보면서 의식화된 노동운동이 필요하다고 절감했습니다. 교회 청년들과 함께 「노동의 역사」 등을 공부하기 시작한 게 80년 2월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도 못 돼 사북사태가 일어났어요. 저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일어났지만 기왕에 일어난 일이니까 적극 가담했지요』
사북사태는 80년 4월21일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 700여명이 임금 소폭 인상과 어용노조에 반발해 농성을 벌이다 사북읍 일대로 확대된 사건이다. 이는 유신시대 얼어붙었던 노동운동의 잠재력을 보여줬으나 「민주화보다 안정」을 내건 신군부의 집권 명분이 되고 말았다.
광부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과격한 행동들이 터져나올 때 황씨는 질서있는 파업으로 바꿔보려고 했다고 한다. 경찰관을 폭행하는 광부들을 제지하다 오히려 흥분한 광부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는 것.
미스유니버스 대회장 폭파 미수
사북사태 이후 경찰은 경찰관 살인 혐의로 그를 수배했다. 그러나 수사 결과 사망한 경찰은 투석전 당시 돌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수배를 받고 도망다니던 그는 2개월 만인 6월29일 미스유니버스 대회장 폭파 미수사건으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미스유니버스대회 개회식장에 직접 만든 사제폭약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폭약은 폭파용이 아니라 위협용이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지 한달밖에 안 된 상황에,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도 항의하는 뜻으로 내한 공연을 취소한 마당에 그런 미인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만 무엇보다 미국 CBS TV가 그 대회를 실황중계한다고 해서 단상을 점거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과 김대중씨 등 정치범의 석방, 국회해산의 부당성 등을 전세계에 알리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2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82년 12월 석방됐다. 이후 그는 성남 지역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만남의 집에서 정인숙·김문수·최호경 씨 등을 만나 노동운동의 재기를 다진다. 84년 겨울 4년 만에 다시 사북에 정착한 그는 사북 천주교회 청년회장으로 광부들을 대상으로 한 의식화 교육을 진행하고, 85년부터 광산노동상담소에서 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성균관대 4학년에 재학중이면서 학생회 기획부장을 하던 동생 인혁이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서울 모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있다는 얘기를 듣고 꾀를 냈습니다. 서울대 2학년으로 학내 이념서클에 들어가 있던 막내 인욱이를 불러 그 경찰서 관내에 가서 경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치장에 들어간 인욱이가 인혁이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인혁이는 몇 번의 구타 외에는 고문을 당하지도 않고 건강하다는 걸 알았죠』
86년 인욱씨는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구속되고 인혁씨(36·성남노총 사무국장)는 잠적중이었다. 자식 걱정에 전전긍긍하던 어머니 전씨는 마침내 민가협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다 인혁씨가 체포되자 전씨는 실신하고 아버지 황씨도 몸져 눕고 말았다. 부모를 봉양해야 할 의무와 사북의 상담소 일 사이에서 고민하던 인오씨는 자식들의 민주화운동을 비로소 이해하고 받아들인 부모를 서울에 두고 다시 사북으로 내려갔다.
인오씨는 87년 1월 사북에서 아내 송혜숙(宋惠淑)씨를 만났다. 84년 인천 대한마이크로 노조 결성사건으로 강제해직된 이였다.
『아내는 학생 잡지에서 표지모델을 제안해 올 만큼 예뻤는데 자신은 그런 데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노동운동에 헌신적이지는 않았지만 자기 삶에 대해 반듯한 의지를 갖고 있어 마음에 들었습니다. 곧 결혼을 약속했지요』
그해 8월 그는 동원탄좌와 함백광업소 등의 파업을 배후조종한 혐의(제 3자개입)로 구속돼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고, 출옥후 다시 상담소로 들어갔지만 그 지역 운동세력과 의견이 달라 결국 88년 12월 상담소 생활을 정리했다.
의견 충돌로 사북 떠나
이 무렵 인오씨는 작은 음식점을 냈다가 실패하고 아내마저 임신중독증에 걸려 진퇴양난에 처했다. 89년 8월 그는 출산을 앞둔 아내를 처가로 보내고 자신의 청춘을 바친 사북생활을 정리하고 성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 저곳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던 그는 건축 노동자 소개업소인 용역 사무실을 인수하고, 서울 신림동에 정착해 건축업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황씨는 당시를 『그때만큼 내 육신을 움직이는 데서 오는 무형 유형의 기쁨을 누렸던 때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90년 7월 문제의 이선실이 그를 찾아왔다. 이선실은 당시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 이미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황씨 역시 이선실이 일찍 혼자 된 노파이며 그동안 식당과 바느질 일로 모은 재산을 각종 민주단체에 쾌척해왔고, 그 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민중당 건설 작업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선실이 간첩 권중현과 김동식을 소개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에게 조선노동당 강원도당책을 제안했다. 처음에 그는 그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저도 언젠가 한번쯤 레닌이나 카스트로 같은 혁명의 영도자, 전국적 판도의 우이(牛耳)를 잡고 흔드는 영도자의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러시아 역사를 읽으면 레닌과 저와 동일시하고, 중국사를 읽으면 모택동을 저를 동일시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꿈이요, 현실 세계에서 제게 그럴 역량이나 자질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탄광에서 겪은 몇 차례의 권력 투쟁, 도토리 키재기나 다름없는 주도권 다툼이 있었던 사북에서의 경험 등으로 혁명 영도자의 꿈은 비현실적이라고 절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권중현의 거듭된 제안에 그는 마음이 흔들렸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것과 북한에 대한 당시 그의 몇 가지 관념 때문이었다. 우선 그는 북한이 남한보다 민족사적 정통성이 있다고 봤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사회주의 형태의 국가가 될 것이어서 북한과 연계해 남한의 변혁운동을 질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89∼90년 동구가 무너지면서 꼭 주사파가 아니라도 사회주의 일반을 지지하고 신봉했던 사람들은 북한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사회주의국가라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인류가 수천년 동안 꿈꾸어온 「천년왕국」, 내 몫보다 우리 몫을 더 생각하는 사회, 모든 사람이 고르게 누리는 평등한 사회에 대한 애착을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 투영한 것이죠. 그때 운동권 내부에서 북한이 망하기를 기대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북측 공작원의 손을 잡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애증
―북한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바뀐 것은 어떤 계기입니까.
『앰비벌런스(ambivalence: 동일 대상에 대한 애증 병존) 상태라고 할까요. 북한과 연계할 때부터 북한을 무조건 찬양하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사」를 보니 북한이 자신들의 역사를 진술하는 데 솔직하지 못한 게 많더군요. 사실을 과장하고 윤색하는 게 예사였습니다. 92년 초 김정일 생일 때 북한 주민의 생활비를 42.3% 인상했다며 북한 언론이 대대적으로 선전한 적이 있습니다. 남한 주사파들은 그것이 김일성 정권의 치적인양 선전했고요. 저 역시 지하당에서 만든 간행물에는 그 점을 찬양했지만 그렇게 떠들 게 아니었습니다. 권중현 김동식은 북한이 돈이 필요 없는 사회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생활비를 인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는 주민들 삶에 화폐가 절실히 필요한데 그동안 곤궁함을 겪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적어도 저는 그때 그런 점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명색이 주체사상을 하늘로 여겨야 할 총책이어서 그런 말을 조직원들에게 끄집어내지 못하겠더군요. 동생 인욱에게만은 그런 제 심경을 토로하곤 했습니다』
―하부 조직에 그런 자신의 생각을 전하지 않은 것은 단지 총책이라는 직위 때문이었습니까?
『조직 강령에도 나와 있듯이 유일사상이라고 하는 주체사상을 목숨처럼 지켜야 하는 조직입니다. 그런 의문을 갖는 것만으로도 배신행위였으니까요. 적어도 조직을 속속들이 장악할 때까지는 그런 발언을 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의 지령에 따라 중부지역당을 만들었는데, 그 당을 통해 남한 사회를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당시 남한 내에 주체사상을 추종하던 NL계열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하당을 통해 그들의 운동 방향을 일정하게 통일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방향을 통일함으로써 정권을 교체하고 남한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토대를 형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도와는 다르게 남한 사회는 변화해왔는데 현 정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현실 문제를 이렇다 저렇다 말할 처지가 아닙니다. 심지어 박정희 정부까지도 그 정부가 성공했어야 우리 전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현 정부도 잘 돼야지 실패하면 특정 정파가 실패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물론 과정이 얼마나 민주적인가가 중요하겠지요. 개인적으로 저를 일찍 풀어준 현 정부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감옥 안에서 성경 전체 베껴
―감옥 안에서 가톨릭에 귀의했다면서요.
『95년 5월 들어 성서를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은 만큼 조금씩 쓰다가 기왕 시작한 것 성서를 통째로 베껴쓰기로 했습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 불력을 빌려 몽고군을 퇴치하고 불심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을 떠올렸습니다. 처음에는 성서를 베끼면서 하루 빨리 저를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98년 5월말이 돼서야 한 번 다 썼습니다. 쓰던 도중 머릿속에 잡념이 가득해 때로는 제가 뭘 쓰는지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써나갔지요.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제가 정화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탓이오」 라고 참고 살고 싶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사실 원망도 많았습니다. 황인오가 어떻게 살았는데, 우리 가족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데, 하는 원망 말입니다. 어쨌든 그 작업을 통해 제 안의 고름을 짜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하당 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그 사이 18일 동안에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요.
『살고 싶었습니다. 안기부에 잡혀가 있을 때부터 살아나가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사형을 구형받고보니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사형선고를 받으면 집행할 때까지 얼마간 시간이 있는데 그 기간을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저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이 어떻게 견딜 것인가 생각하니 정말 미치겠더군요. 사형이 구형되면 자살방지용으로 수갑을 채웁니다. 정말 갑갑한 노릇이지요. 처음에는 교도관과 옥신각신하다가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형수처럼 수갑을 풀려고 애쓰지도 않고 조용히 있었더니 1주일만에 수갑을 풀어주더군요. 그렇게 선고 형량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 안에서 어떤 공부를 했습니까?
『96년에 대입 검정고시를 마쳤습니다. 내친 김에 학사고시까지 보고 싶었는데 무기징역 받은 이는 5년 이상을 살아야 시험 치를 자격이 주어집니다. 교도소 형기 기산원칙에 따르면 저는 금년 7월25일이 만 5년째였습니다. 그래서 그 계산하고 경영학이나 법학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출옥했으니 연습만 하다가 나온 꼴이 됐네요. 그 외 열심히 공부한 것은 노사관계 대인관계 등 상담기법 분야 책들이었습니다. 그런 책을 읽고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배운 것을 적용해보기도 했습니다』
3류 연금술사의 회한
―감옥에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큰 고통이겠지만 특히 불편한 것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바깥 사회에 대한 구구한 억측과 망상이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수용자들끼리 쓰는 말 중에 「철창이 인삼 녹용」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도관이나 바깥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말인데 「철창만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이가 철창 믿고 까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갇힌 상황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평정을 유지하다가도 사소한 일로 몇날 며칠을 망상으로 보내게 됩니다. 노름판에서 본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감옥 안에서는 그 이상으로 본성이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계기로 한번 상대방이 미워지면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재소자들끼리 그런 말을 합니다. 증오하다 원수지간이 되는 것, 그런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지 못하는 그것이야말로 최대의 징역이라고요』
―출옥으로 오랜만에 자유를 누리게 됐는데 어떤 점이 특히 좋은지요.
『80년 사회 변혁을 위한 활동가로 살겠다고 다짐한 뒤부터는 늘 수사관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다방 같은 데 누구를 만나러 들어갈 때도 우선 내부를 일별하고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앉습니다. 유사시에 도망갈 퇴로는 어디 있는지, 무기로 사용할 것이 있는지를 염두에 둡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 습성을 버리지 못했었지요. 그러다 이번에 출옥한 뒤로는 누군가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가장 속시원한 일입니다』
황인오씨는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했던 자신을 「3류 연금술사」라고 불렀다. 개인적 부귀영화나 공동체의 번영을 꿈꾸며 자신의 전 생애를 투여한 고대 이래의 몽상가들과 그들이 만든 연금술의 운명을 자신의 삶에 비교했다.
현대화학의 원조였던 연금술이 발달할수록 그 영역은 축소된 것처럼 80년대식 민주화 운동이 성공한 그만큼 민주·민중 세력의 입지 또한 지속적으로 축소돼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변혁운동가로서 자신의 자리를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는 그의 개인적 판단일 뿐이다.
그는 이제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가려 한다. 기성 사회를 전복하려던 간첩단 총책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선 자리를 더욱 단단히 만들려고 하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편입되려 한다. 사설 노사문제 상담소 같은 데서 그와 마주치더라도 그를 간첩으로 몰지는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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