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1)구석기 시대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미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랜 된것은 구석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전의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조각된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술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창에 찔린 동물들을 보면서 동물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공포심을 제거하여 자신있는 사냥을 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또한 그들은 주술적인 힘을 빌리려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괴이한 모양의 물건들에 자신의 상징을 새겨 넣는 과정에서 이른바 부조라는 것을 창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기원전 15,000~10,000 오스트리아)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항을 작품에 실어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고, 위의 사항또한 알 수 있다. 예술이란 항상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해 느끼는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일반적으로 지식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화가가 보고 또 알고 있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느낀 것에 더 흥미를 가지는가에 따라 그림도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2)신석기 시대
인류가 채집경제에서 벗어나면서 질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종교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의 작품, 스토운헨지(기원전 15~19세기경, 영국)는 우리에게 어떤 경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면서 초인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와 작업에 있어서의 노동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동기가 되는 힘은 바로 종교적인 것이었을 것라는 짐작을 하며, 여기서 그들은 일상을 지배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3)원시미술
원시적이다라는 말은 도시나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거나, 문자를 사용하는 문명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 이를 총칭하여 일반적으로 원시적이다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의 미술 또한 우리에게 생활과 연계하는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원시적 주술의 유효성을 보이는 사나움은 구석기 시대의 수렵 주술에 있어서의 현실에의 충실함과 마찬가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영웅들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상기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새를 머리에 얹은 남자상(BC 19~20C, 뉴기니의 세픽강유역), 수호자상(19~20C, 가봉)을 예로 들 수 있겠는 데, 이들의 공통점은 그 시기에 있어서 정령이 깃드는 곳이라는 믿음을 지녔던 곳이 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 메소포타미아 미술
1)고왕국 시대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바야흐로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이 통치하는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도시와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최고의 작품은 역시 회화였다. 이 작품들을 볼 때, 형상에 거의 사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영효과가 없고, 벽에 밀착된 것처럼 평면적이고 형산의 세부묘사가 생략되어 있다. 약화법으로 간단히 그려진 단순화된 형상들은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은 누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후생활에 있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육체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집트인들은 미이라를 만들고 천으로 그것을 싸서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을견고한 관에 넣었다. 또한 이집트인은 죽은 사람의 영혼도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활용품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일상의 자재도구등을 분묘에 비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분묘에 매장이 불가능한 것은 묘실의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는 분묘가 건축, 조각, 회화의 거의 모든 것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집트 미술은 문자 그대로 사자를 위한 미술이라 할 수 있다.
2)신왕국시대
중왕국 시대에 히크소스족의 침입으로 테베라는 도시를 제외한 전 이집트의 지배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1570년경 테베의 군주들은 침략자를 축출하고 이집트 전토에 통일된 지배권을 되찾았는 데, 이와 같은 이집트 황금시대의 도래를 신왕국 시대라고 일컫는다. 이 시대의 미술의 특징은 2000년 전에 정립된 회화 및 조각의 엄격한 규칙을 답습하고 있기는 하나, 때로는 대담한 자유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규모에 있어서 아주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도 엿볼수 있다. 헤시 라의 분묘에서 보았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작품이 발견되고 있는 데, 여기에는 전작에서 발견되지 못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전의 미술 작품을 지배하고 있던 모종의 질서에 대해 상당부분 자유로와졌음을 엿볼수 있게 한다. 또한 측면과 정면 시선이 서로 교차되고 있었던 고왕국 시대의 작품에 비해, 측면 시각의 사용을 억제한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이크 응 아톤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 지는 데, 이는 수도를 옮기면서 활기찬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장려하였다. 이크 응 아톤의 부조상을 보게 되면 이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이크 응 아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트의 흉상에서도 볼 수 있다. 채색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움과 사실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식은 이크 응 아톤의 타계 후에 다시 아몬 신관들이 득세했을 때에도 볼 수 있는 데, 그 예가 바로 투탕카멘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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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헤테프 부부> |
<스핑크스 상> |
<이크 응 아톤> |
<아멘호텝왕> |
<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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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쉬 왕자의 상> |
<에빈 II> |
<우난쉬> |
<사르곤 II와 고급관리> |
에게 미술
에게 해는 크레타 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만이며, 에게 미술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성된 미노스 문명의 해양 미술 문화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었다. 이 습성이 미술에도 반영되었는 데, 대표적으로 투우사의 프레스코 라는 작품이 미노스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영토의 미케네에 영향을 미쳐 생성된 것이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의 궁전은 미노스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 있으며 견고한 벽면과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미케네의 사자문은 이러한 양식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 상부에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돌로 된 두 마리의 사자 부조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 미술
1)회화
그리스의 회화는 우리에게 상당부분 누락되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회화에 있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제작한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단지 그들의 회화가 벽화중심이어서 건축물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져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 회화는 수많은 채화도기에 분명히 남겨져 있다. 프시악스 (네메아의 사자를 교살하는 허큘리스)라는 작가가 제작한 이 도기는 본래의 도토(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흙)가 작고 있는 흙색에 대신 하여 검은 색과 어두운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로써 중량감이 있는 두 몸뚱이에 양감이 표현되어 있고, 과감한 단축법의 사용, 그리고 위의 수법에 의해 달성된 둥그스름한 효과가 균형있고 통일적인 구도와 뒤섞여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또한 프시악스는 이전에 있어 자신의 작품에서 대상을 표현하는 색이었던 검정색을 반대로 배경으로 삽입하여 바늘에 의해서 가는 형태의 선을 표현하는 불편함을 제거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단축법의 연구가 계속되었고, 이는 바로 평면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조건을 부여하게 된다. 그 후로 그들은 이집트의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클라시즘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림의 평면성이 공간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인물의 눈을 측면시점으로 보고 있으며, 사물을 보는 시점은 이전의 왜곡된 방식이 아닌 올바른 방식으로 발전되고 있다.
2)조각
기원전 7세기 말경부터 만들어진 조각은 이집트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넓은 어깨와 발의 위치, 메소포타미아 조각에서 볼 수 잇는 머리털과 큰 눈과 같은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대부분 채색되어 잇고, 긴장감과 생명감이 넘쳐나 있다. 아르카익 시대의 초기 인물상의 유형은 매우 적으며 남성의 누드 입상과 의복을 걸친 여성의 입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신과 인간에게 공통되는 육체적 생명력과 완전성의 이상을 나타내는 청년상과 이상적인 여성의 형태와 의복의 결합이 잘 나타난 소녀상이 있다. 아르카익 시대 말기의 빈상의 전사 상에선 골격의 구조와 움직임을 잘 표현되어 있으며 활동중인 인간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 있다. 클라식 시대의 조각의 특징은 억제된 감정과 내면의 계시가 잘 표현되어 있다는 것과 골격의 축이 수직선이 아니라 S자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 후반은 클라식 양식의 원숙기인데, 파르테논 신전은 최고의 클라식 미술 작품이다. 이 신전에 있는 조각중에 디오니소스는 균형잡힌 우미함이 잘 나타나 있으며 파르테논 열주랑 뒷벽 윗부분에 있는 연속 프리즈의 부조는 공간과 깊이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표현되어 있다. 기원전 4세기 중반이후부터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는 데, 대표적 작품으로 영웅적인 나체상인 빈사의 골인이 있다. 그러나 이 상에는 초기 그리이스인이 생각하고 있던 인간에 대한 개념에 반대되는 야성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빈사의 골인보다 더 극적인 것은 1세기 정도 후에 만들어진 라오콘이며 그것은 격렬함과 긴장감으로 충만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리이스 미술의 근원적이고 열정적인 충동의 표현은 그리이스 미술의 종말에 이르러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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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트라케섬의 승리> |
<밀로의 비너스> |
<라오콘 상> |
<적회식 물병> |
로마 미술
그리이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이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이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이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이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이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이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이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이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이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이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로마인들은 멀리 북아프리카, 영국, 스페인, 페르시아만, 카스피해까지 그 들의 우수한 유물을 남기게 되었다.
1) 건축
로마인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토목공학을 얘기할 수 있다. 그들의 건축은 공중목욕탕, 도로,수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은 그들의 정복자로서의 자신감과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예로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 중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거대한 투기장으로 내부에 계단식 관람석을 받쳐 주는 아치들인 세개의 층 각각에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의 세 가지 건축양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식 구조와 그리이스 형식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고 이 후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이 건축물에 아치와 궁륭을 사용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또다른 업적이다.
2) 조각
로마인들은 주로 그리이스의 조각을 모방, 수집하여 그들의 화려한 저택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로마의 조각은 초상 조각과 설화적 부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초상 조각에서 그들은 전쟁 영웅의 두상을 신성의 지배력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 영웅적으로 이상화하여 제작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이 인물의 미묘하고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로마의 초상조각은 훨씬 사실적이고, 치밀했으며 정확하고 의지력있는 개성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선조의 모습을 미이라로 만들던 풍습과 연관된 듯한 관십이 로마에도 있었는 데 그것은 사자의 초상을 밀랍으로 만들던 것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더 견고한 대리석으로 초상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인보다 더 실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초상제작에 힘썼다. 설화적 부조에서는 로마의 황제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과시하기 위한 기록으로서의 면을 보여준다. 그리이스 인들이 신전의 프리즈에 새겨넣었던 주제가 일상적인 행렬이었다면 로마인들은 일시적 사건을 다룸으로써 로마 조각가들의 예술적 의도가 기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인들은 부조제작에 있어서 환조처럼 느껴지게 하는 깊이감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3)회화
로마인들이 제작한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그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던 이집트에서 발견되 유물로 로마의 회화를 짐작해 볼 수 밖에 없다. 조각에서 처럼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화가나 최소한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그리이스 회화의 특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이윰에서 발견된 소년의 초상은 납화법으로 그린 패널화인데, 이것은 내구성이 강한 엔카우스틱 기법(납화법. 뜨거운 납을 섞은 안료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고대 회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기원전 4세기경 파우시아스가 완성했다.주로 천정의 패널에 조그마한 인물들을 그릴 때 사용했다.)으로 색채가 밝고 생생하다. 이 기법은 로마 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명 프레스코(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태리어로 신선하다는 뜻. 덜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에 애어들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석고가 마르기 전에 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며 그림의 수정도 불가능하다. 기념 건조물의 벽화 그리기에 적합하다. 건조한 지방에서 가장 영구적.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 ) 와 함께 벽장식에 이용되었다. 로마 벽화는 19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당시 묻힌 나폴리 부근의 폼페이와 그 밖의 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이들 벽화 그림에서 로마인들은 완벽한 단축법과 빛과 그림자에 의한 정교한 모델링으로 사물이 실물과 같은 입체감을 띠고 있고 미약하게나마 원근법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각에서와 같이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것들보다 훨씬 깊이감이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 로마의 미술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그리이스 미술의 전통을 잇고 그들의 미술을 수용, 모방, 수집하여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을 차용하였으며 무수한 복제품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로마 미술은 그들의 정복지역의 종교와 관습등과 어울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며 신과 영웅들의 아름다운 형태를 시각화하는 방법을 후대에 가르쳐 주었고 이것은 서양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중세 초기 미술
로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예술가들에 의한 초기의 회화들이 있다. 이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들이 사자를 매장한 지하묘소, 즉 카타콤(지하묘소)의 벽과 전장에 그려진 것들이다. 성 피에트로 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초, 로마)을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카타콤 벽화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벼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2) 채색사본
이러한 설화적인 모자이크룰 생각한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 소재를 찾아왔다. 이러한 성서를 사본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패널화의 예술성에 필적하는 작품을 생성해내었다. 이것들의 초기 양식은 그리스,로마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채색사본의 등정으로 한정된 화면안에 많은 얘기들을 효율적으로 넣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3) 비잔틴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4)모자이크
최초 황금시대의 모자이크는 콘스탄티노플보다는 오히려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변방이었던 라벤나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을 성 비탈레 성당의 제단 양쪽 벽면에 있는 한 쌍의 모자이크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종들(547년경, 이탈리아의 라벤나, 성비탈레 성당) 에서 융성한 비잔틴 제국의 배경에 이루어진 화려한 유림모자이크의 현란함을 맛볼 수 있다. 신하와 성직자 및 시녀들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비 테오도라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은 새로운 인간미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726년에 이르러서 황제의 성상금지령이 발단이 되어 약 1세기동안 비잔틴 회화와 모자이크의 발달은 중단되었다.제 2황금시대(850-1200)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모자이크에 나타난 정신화된 인간미의 이상과 휼륭하게 조화된 고전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책형(11C, 다프니 수도원)은 1기 황금시대의 모자이크에서 강조된 영원성과 신성에 고전미술의 인간성과 육체적 우아함이 덧붙여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전주의의 심오한 일면은 인간적 감정의 고귀함에 있으며 기원전 5세기의 그리이스 미술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억제되고 고귀한 인간적 고통의 표현이다. 이콘icon 즉 패널에 그려진 성화상은 제2황금시대에 수많이 제작되고 숭배되어 왔다. 그러나 그 기원은 성상파괴 논쟁 이전으로 소급된다. 성모자에서 보이는 미의 이념은 이전의 고전시대와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데, 밀랍화 수법과 명암에 의한 모델링은 로마 초상화와의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모습의 묘사에서 천상적인 미의 이상과 조소적인 표현이 두드러 진다. 또한 기하학적 화면구성에서 연유하는 강한 인상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이콘은 에술의 창의성보다는 장인적 기능에 더 의존하는 것이었다. 옥좌의 서모자와 같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후면의 광휘에서 우리는 당시의 작품이 강조했던 바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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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 벽화> 성소피아 성당 소재 |
<린디스판> |
<린디스판 복음서> |
<성마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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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좌에 앉은 성모와 예수> 목판에 템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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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물고기의 기적>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
로마네스크
10세기 중반 카롤링거 왕조의 분열이후 세력을 잡은 오토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세력을 위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황제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였다. 972년에는 오토2세가 비잔틴의 테오파노 공주와 결혼하면서 게르마니아 지방에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기도 했다.또한 이시기에는 노르만 족, 헝가리 족, 사라센 족들의 침입이 종식되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고 예술활동이 활발하였다. 11세기에는 카놋사의 굴욕등,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시기였으며 성상파괴 문제로 인해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다.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승리 대표라 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붕괴와 함께 소멸되었던 석조조각의 부활은 11세기에 이르러 일반서민 사이의 신앙이 부활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의 조각은 로마말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형태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의 구성, 인물의 정면성, 건축적 틀속에 끼워 넣은 배치법들은 비잔틴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프랑스 로마네스크 조각의 절정인 므와사키 수도원의 남쪽 정문의 조각은 아일랜드 괴수 교차 문양의 계보에 속하기도 한다. 조각가에 비해 로마네스크 화가들의 그림에선 전시대로부터 그렇게 혁신적인 발전을 보이지는 않는다. 뛰어난 세밀화<복음서 기자 성요한>의 가장 자리 꽃 문양은 로마 장식 모티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인물상은 칼롤링 왕조 미술과 비잔틴 미술을 모델로 삼고 있다. 또한 틀의 짜임새가 인물의 형태와 엮어져 놀라운 통일성을 낳고 있다. 이 시기의 회화에선 선적인 성격과 표면의 색조 구성사이의 일관성 있는 조화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관성 있는 의장을 태어나게 했으며 표현력에서도 상당한 진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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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 대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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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쇠 세례반> |
<수태고지>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
<수태고지> |
고딕
서양의 중세는 원시적인 방식과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수도원 중심의 문화권에서 도시의 성장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성당 중심의 문화가 도래한다. 성당은 많은 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주인 사람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신의 완벽한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당시 중세의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중세인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고딕 양식에 있어서 모든 미술의 목적이 단지 종교의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나 지식또한 발전하고 있음 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고딕 양식은 특히 성당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평가를 받게되며 이와 함께 조각, 회화, 공예까지 확대 발전하게 된다. 4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중세가 끝나는 시점으로 보는 14세기 까지를 중세로 볼 때 고딕 양식은 중세의 모든 미술 양식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라 하겠다.
1)건축
기독교의 발전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안정적인 동유럽에서 보다 다변하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내는 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인들에 의한 성당 건축의 주심 원리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 새로운 양식의 주된 특징은 실용과 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하는 원리라고 하는 수직양식의 원리, 건축 기술상의 획기적인 발명인 교차 궁륭이라 할 수 있다. 교차적 궁륭이란 11세기 초 목조로 덮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꾼 이후 고딕 석조 건축에서는 둥근 천장의 무게가 벽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었기에 이의 해결책으로 늑재를 엇갈리게 가로 질러 놓는 방식이다. 건축가들은 또 궁류형 천장의 아치들을 지탱하는 데 아치만으로도 충분함을 알게 되어 기둥들 사이의 무거운 석벽을 없애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창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여기에 외부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뾰족아치를 사용하므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이 가능해졌다. 성당의 하중은 벽에서 부벽으로 옮겨진다. 이것으로 성당의 정점의 높이의 조절이 자유로와졌으며 고딕의 특징은 첨탑과 공중부벽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은 첨형아치와 공중부벽으로 쓸모없게 된 외벽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치장한다. 이로서 돌과 유리로 완성된 성당의 황홀한 구조는 이전의 로마네스크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인간을 압도하고 천상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기독교의 또다른 초월의 세계의 신비감을 하늘의 영광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보다 더 엄격한 구성으로 건축적 완벽성을 지향했고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건축에 옮겨 중세 교회 건축양식을 대성했다. 이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쇠퇴하다가 19세기 고딕 부활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학 공중 건물, 상용건물 등의 건축에 이용된다.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 아미앙 성당영국 웨스트 민스터 성당. 솔즈베리 성당, 옥스퍼드 대학이탈리아 밀라노 성당등이 그 예이다.
2) 조각
* 프랑스
로마네스크의 조각보다 더 추상적인 초기 고딕 조각이 남아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조상들의 특징은 원주 자체의 견고한 원통형을 이용 환조 조각의 첫걸음을 내딛었으며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이 조상들의 옷 주름은 금방 흐를 듯 유연하며 그 안에 생생한 육체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의 조각가들이 고대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랭스 성당의 조상은 고전주의가 자취를 감추고 간결, 수직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우미의 양식이 나타나 후기 고딕 양식의 기준이 된다. 최소한 이 시기의 조각가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실감나게 자기들이 느낀 방식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을 전 시대 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한 점은 이 시기 이후 나타나는 르네상스의 기본원형이 되기에 이른다.
* 독일
프랑스인으로부터 조각의 전통을 전수받은 독일의 조각가들은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성당 내부에서 조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조각으로부터 자유로왔으며 훨씬 개성적인 표현을 구현하였다. 나움부르크 성당의 조상은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그리스도의 매장>은 나타낸 필사본은 인물들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되 베끼거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닌 더욱 감동적이고 생명감을 불어 넣으려 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이탈리아
13세기에 이르러 고딕 조각이 이탈리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는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이북보다 훨씬 고대의 전통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조각은 덜 고딕적이었는 데 고딕적이라고 불릴만한 작가는 니콜라 피사노였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옷주름의 흐름과 성실한 모델링에서 프랑스의 영향과 고대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 국제양식
1375년과 1425년 사이에 서유럽에 전역에 퍼진 양식을 말하는 데, 주된 특징은 유연한 곡선 형식으로 인위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에 세속적인 상류사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들이다. 이것은 13세기 중반 화려한 프랑스 궁정양식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데, 15세기 초까지 번성하였다. 국제양식 조각의 알프스 북부 최대 거장으로 클라우스 슬뤼터의 작품과 알프스 남부의 기베르티의 작품이 있다.
3) 회화
* 프랑스
고딕 양식에서 회화의 범위는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다. 회화로 채워져 있어야 할 성당의 벽면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시대의 채색 사본은 화려하고 도상적인 주제를 표현한 색유리와 자리를 바꾸고 대성당의 건축과 함께 스테인드 글라스도 함께 황금시대를 맞는다. 프랑스의 회화의 중요 위치로 자리잡게 된 이 것은 1250년 이후 대성당 건축이 시들해지면서 사양길에 접어들고 다시 채색 사본이 유행하게 된다.
* 이탈리아
벽화, 즉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이는 알프스 북부에서 회화가 스테인드 글라스로 대치될 무렵, 이들은 그리스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교회당에 유리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스코화, 벽면 모자이크, 패널화는 알프스 이남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13세기의 비잔틴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작가 지옷토의 출현을 부른다. 그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한데, 환조라 할 만큼 공간의 깊이감, 원근법, 옷의 유연한 흐름 등은 평면위에 가장 실감나게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렸다. 비잔틴 회화를 이어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린 화가 둣치오는 템페라로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한 장면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원근법이 사용되었으며 시정 넘치는 친밀감과 사실적이고 깊이감 있게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마르티니, 로렌쳇티 형제의 그림이 있다.
* 국제양식
국제 고딕 양식의 첫단계는 지옷토와 둣치오의 이탈리아 자연주의에 프랑스 시모네 마르티니의 우아함을 혼합시키고 후기 로마 회화의 고대 양식을 가미시킨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플랑드르 예술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브뢰데들람의 <신전에서의 경배> 는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패널화를 그린 랭부르 형제는 달력의 세밀화가 나타난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 국제양식회화의 제 1인자인 젠틸레 디 파브리아노는 부드러운 음영과 옷주름의 유연함, 주의깊은 동,식물의 관찰은 빛이 형상이나 색채로부터 독립하고 있으며 빛의 중요성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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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교회당 내부> |
<노트르담 성당> |
<멜기세덱, 아브라함, 모세> |
<'노트르담 드 라 벨베리에' 창> |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14세기 중반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특별히 지옷토와 단테의 출생지였던 부유한 상업도시 피렌체에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흐름이 강하게 나타났다. 피렌테는 새로운 아테네로 부상될 만큼 시민예술의 야심찬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예술가를 엘리트 집단으로 인정하는 등 미술가의 지위가 향상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들 수 있으며 그는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자기식대로 결합, 표현하였으며 원근법, 소실점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뒤이어 알베르티가 건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 데, 그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형식을 절충하여 개인 주택에 적용하는 건축기술을 보여 주었다. 15세기 최고의 조각가 도나텔로는 로마의 유적을 제계적으로 연구한 르네상스의 아버지이다. <성지오르지오>나 <죽코네> 모두 고전 예술에 있어서의 균형 잡힌 움직임의 의미가 회복되었으며 고대 로마 조각을 재현, 새로운 도상으로 재창조하였다. 플랑드르 화가들의 나체상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나체상은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추구하여 인간의 상체를 구조체로 다루었으며, 옷은 신체를 감싸는 듯하게 표현되었다. 경쾌한 아치 대열과 고린트식의 기둥이 잘 표현된 천국의 문,<야곱과 이삭의 얘기>의 기베르티는 선명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원근법을 구사하였으며,테라코타에 전념한 롭비아와 로마조각보다 더 개성적인 대리석 조각가 롯셀리노도 유명하다. 다빈치의 스승인 베록키오는 사방으로 뻗쳐 있으나 우아하고 연속적인 동작을 보여주는 <돌고래를 안은 동자>를 조각했다. 베록키오는 어떤 의미에서 도나텔로의 폭넓은 세계와 대담한 예술적 야망에 필적했던 작가였다.
1)회화
피렌체 회화는 격렬한 동세와 떨림이 강한 윤곽선을 유지하였으며 많은 작품이 고전 작품에의 제재를 따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15세기 말에 유행된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짐작할 수 있는 데, 그들은 고전고대를 연구하면서 종교를 인간적인 것으로 해것하였으며 그리스, 로마의 예술,철학,종교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을 꾀하였다. 마사치오는 26살에 요절했으나 15세기 회화 분야에 있어 경탄할 만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는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성모와 성요한이 있는 성삼위일체>는 지옷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나텔로처럼 의복보다는 육체를 더 중시한 르네상스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부르넬레스키의 고전적 건축과 과학적 원근법의 완벽한 응용이 잘 나타나 있다. 마사치오의 <삼위일체>와 흡사한 <성모자와 성자들>을 그린 베네치아노는 색채구사에 있어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였다. <성십자가>의 피에로 델라 프란테스카는 빛을 이용하여 깊이감을 표현하였으며, 마사치오를 연상시키는 연상시키는 엄격한 자세의 인물상과 자신의 그림세계의 object를 기하학적 개념(구, 원통, 원추)으로 파악하여, 현대 추상화가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칭해질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는 이교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영성이라는 공통분모의 발견으로 높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였는 데, 이 작품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마사치오로부터 이어지는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화가로 만테냐를 들 수 있는 데, 그는 이야기의 내면적 의미를 중시한 지옷토에 비해 외부적인 형태에 관심을 나타냈었다. 만테냐의 <형장을 끌려가는 성야곱>은 앙각시의 원근법으로 나타내었으며 프레스코 벽화 중 가장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로마풍의 건축과 의상, 장신구에서 "엄격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엿볼 수 있으며 긴장되고 완강한 모습의 인물상은 도나텔로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특별히 나체상으로 소묘한 만테냐의 소묘로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밑그림은 나체상으로 구성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벨리냐의 <법열에 잠긴 성프란체스코>에서 웅대한 자연경관과 부드러운 색채를 볼 수 있으며, 부조처럼 윤곽선으로 표현한 카스타뇨의 가죽그림<다윗>은 동세와 동작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코처럼 일부러 근대적 표현법을 회피한 작가도 있다. 파올로 우첼로는 원근법과 단축법을 많이 사용하고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는 <산로마노의 대승>을 그렸고, 메노초 고촐리는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는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을 그렸는 데, 이들의 작품들은 모두 상류계층이 작가들에게 원하는 요구에 부응할 만하다.
2)르네상스의 주체
중세의 인간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그리스도교가 자리답고 있었던 시대의 모든 미술이 창작은 종교에 묶인 채 그 나래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생각이 확대되어 나가는 시대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급속한 기술과 발달은 인간의 시각 확장을 가져다 주었다. 이에 영향받은 것은 단지 사회에 국한 된것은 아니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둣치오, 지옷토, 로렌쳇티 형제와 같은 화가들에 의한 시각 예술의 융성, 단테와 페트라르카, 복카치오와 같은 문학가들에 의한 문학등의 발전등과 같은 전반적인 문화의 융성이 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자신들의 세기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여명기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자아에 대한 보다 진보적인 노력들이 연결되었다. 위와 같이 신에게로 쏠렸던 시선이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지게 되자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각이 도래하게 되는 데 이가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대규모적인 고대 문예의 부흥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고대문예의 부흥은 특히 시각예술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르네상스를 주도한 사람들은 다름아닌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대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따른 것이 아닌, 고전적 전통을 그리스도교와 융합시켜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던 사람들이었다.
부르넬레스키(1400-1450)
조각에 있어서는 초기 르네상스 영웅시대를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구현매체였으며 그 중심은 기베르티의 부조로 부터일 것이다.(세례당 청동문공모:1401-1402)기베르티는 그의 어색한 마감이나 세련되지 못한 표현에도 새로운 인본주의적 문화와 보조를 맞춘 예술가로서 당선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이상적인 최초의 르네상스인일 수 있다. 조각가이자 건축, 화가, 학자인 사람의 표본이었다.
도나텔로(1386-?)
최초로 인체에 대해서 고전시대와 비슷한 태도를 추구했다. 성 마르코 상은 고대 이래 처음으로 자 자체로 설 수 있는 조상이며(즉, 콘트랍포스터의 참뜻을 충분히 회복한 조상이다)그는 인체를 운동할 수 있는 관절을 가진 구조물로 취급하고 옷속의 육체의 형상에 의해 결정되는 부차적 요소로 취급하였다. <성지오르지오상>의 밑의 부조에서는 물리적으로 두께가 얕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회화적 깊이의 환각이 생기게 한다는 새로운 부조를 창안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놀랄만한 풍경의 묘사는 다양한 각도의 대리석에서 빛을 부여하는 미묘한 면의 억양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이 부조는 어느 화가도 이처럼 일관된 분위기적인 풍경묘사를 이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언자상 <죽코네>는 도나텔로의 리얼리즘의 결정적인 작품으로 오랫동안 각별한 명성을 누렸다. 어느 조각보다도 사실적이며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모델을 주변에서 찾지 않고 신적인 영감을 얻은 것을 기초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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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베르티의 <세례받는 그리스도> |
마사치오의 <성삼위일체> |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
보티첼리의 <피렌체의 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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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옷토의 <그리스도를 애도함> |
베노초 고촐리의 <베들레헴으로 가는 동방박사들> |
만테냐의 <갈보리언덕> |
만테냐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성야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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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첼로의 <산로마노의 대승> |
도나텔로의 <헤롯왕의 잔치> |
도나텔로의 <다비드> |
도나텔로의 <성지오르지오> |
고딕후기:알프스북부
1420년 경 북유럽의 화가들과 이탈리아 화가들은 국제양식의 한계를 넘어 대담하게 전진해 갔다. 그러나 북유럽의 화가들은 과거의 전통을 고수해 나가는 경향을 고수하였는 데, 이에는 상당히 비스한 경향이 동시에 출현하게 되엇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분하여 전자는 초기르네상스라고 부르고 후자를 후기 고딕양식이라고 부른다. 알프스 북부에 있어서의 예술의 경향은 기존의 경항을 고수하면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처럼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음악과 회화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회화에 있어서 소위 플레말레의 화가라고 일켤어지는 이들의 노력이 확대되었다. 이것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원숙한 기법을 가진 자연으로의 회귀라 하여 그들을 찬양하였다.
플레말레의 화가
그의 걸작으로는 1425년 에 제작된 수태고지가 있다. 이 수태고지에서 이전의 고딕양식과 구별되는 사실은 바로 놀라울 만큼의 사실성과 현장감이다. 원숙하지 않은 원근법을 이용했지만 빛의 관리나 형상의 크기, 색채와 촉감등이 뚜렷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여태까지의 수태고지는 이렇듯 생활로 내려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플레말레의 화가가 제작된 수태고지는 성모 마리아를 일상이라는 배경으로 이끌어 내렸다. 이를 위해 그는 다양한 상징이라는 방법을 이용하여 방안을 채우고 있는 각종의 물건들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 아이크 형제 (Hubert, Jan Van Eyck)
그들의 노력은 유화에서 발견된다. 이전의 유화에 대한 생각을 보다 진일보 시켜준 장본인 들인 것이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이전의 화가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비교하여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이 보여준 세세한 변화는 우리들이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미묘한 재미를 더해 준다. 시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책형에서 보여주는 시선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시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책형이라는 작품을 더 작품성을 지니게 해주는 결과를 나타내어 준다. 그러나 플레말레의 화가들이 그렸던 그림에서 보여주는 옷주름등의 세부적인 열의는 비슷하게 나타내어 준다. 반 아이크 형제가 일구어낸 가장 큰 성과는 아무래도 대기 원근법의 확실한 이해일 것이다. 화가의 자연을 바라보는 세심함을 일깨워 주는 성과가 아닐까 한다.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
얀 아이크 형제와 더불어 플랑드르 화가 중 거장의 대열에 끼는 사람이 바로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이다. 그의 작품 중 십자가에서 내림은 모난 옷주름과 정확한 모델링으로 플레말레의 화가의 그림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얀 반 아이크의 부드러운 음영과 풍성한 색채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있어서의 그림은 과거의 피에타상에서 볼 수 있었던 조소적인 비애가 각 인물의 표정에 담겨져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 로제의 회화 예술은 많은 추종자를 낳게 했는 데, 이는 아비뇽의 피에타에 잘 나타나 있다.
봇슈 (Hieronymus Bosch)
15세기 후기 북유럽에서 가장 이채로운 화가는 네덜란드인 봇슈이다. 그의 그림은 추악한 모습과 정체불명의 상징들로 가득찬 환상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쾌락의 동산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그림은 여러 가지 상징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그것들의 하나하나의 의미를 심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봇슈는 엄격한 모럴리스트로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는 눈으로 알려주는 일종의 교훈으로 보인다. 즉 쾌락의 동산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작품감상용이 아닌 훈계이자 경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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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말레 화가의 <수태고지> |
반 아이크 형제의 <아르놀피니의 약혼> |
반 아이크 형제의 <마돈나> |
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의 <아기 예수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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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르 반 데르 바이덴의 <십자가에서 내림> |
봇슈의 <쾌락의 동산> |
봇슈의 <천국과 지옥> |
봇슈의 <미치광이들의 배> |
이탈리아전성기 르네상스
재생이라는 개념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였다. 서구에서 16세기 초엽은 서구 역사상 가장 혼란하고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앞선 시대, 즉 14,5세기의 발견들의 꼬리를 물고 인간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사상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강대국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이로 인한 식민지와 해상 무역을 위하여 힘의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잇따르게 되었다. 알프스 이북의 나라들에서 루터와 칼빈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이 나왔으며 대성당의 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던 교황의 힘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서 교황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노선을 가게 된 알프스 북부의 나라들은 르네상스의 양식이 더 늦게 수용된다. 이 지역 대표적 화가로는 뒤러와 홀바인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로 르네상스 예술이 처음으로 태동한 피렌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엇으므로 르네상스로 같이 분류하지는 않는다. 초기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에게 있어 특히 가장 중요한 임무를 떠 맡았던 건축가들을 고민스럽게 했던 것은 대성당의 건립이었다. 당시 시대를 움직였던 가장 기초 단위의 힘이 종교였으므로 성당건축은 가장 중요한 미술의 한 영역이었다. 원근법, 소실점,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결합하는 데 성공한 전시대의 브루넬리스키, 그 뒤를 이은 알베르티에 이어 16세기에 이르러 교황의 대성당을 건축하는 브라만테는 고전 건축의 이상과 기준을 흡수, 재현한다. 이들은 거의 제작소로부터 어려서부터 스승의 일을 도우며 기법을 익혔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던 16세기-이들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h (1452 - 1519)
고대 그리이스의 고전 시대와 같은 영광의 시대인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 기간이 그가 생존해 있던 때였다. 그는 역사상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만능의 천재였으며 자신이 예술가라는 데 자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 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 기체 역학, 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자연세계를 관찰하는 데 예술가의 눈이 가장 완벽한 기구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에게 자연을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의미하며 예술가만이 가장 휼륭한 과학자이며 예술가가 본 것을 생각하고 그림으로써 나타내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베록키오의 제작소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으며 근육과 혈관의 위치등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 적 구도를 연구하였으며 근육과 혈관의 위치등 인간과 동물의 해부학적 구도를 연구하였으며 이는 그의 소묘와 글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휼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등은 이 위대한 대예술가의 손으로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된다. 후원자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고, 모든 방면에 능란한 전천후 예술가로서 다빈치는 당시 세도가였던 메디치가의 비현실적, 관념적인 지적 세계로부터도 자유로워 자신이 본 것을 오랫동안 숙고하여 그림에 옮기기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한 장면을 그리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소비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그의 사고 체계가 얼마만큼 풍부한 상상력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대상으로 맞서 치열하게 한 인간으로서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살다가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의 이해 아래 살다가 삶을 마쳤다 한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방박사의 예배>,<최후의 만찬>,<모나리자> 등이 있다. <동방박사의 예배>는 르네상스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기존의 프레스코화가 아닌 그가 새롭게 시도한 유화템페라로 그린 것이다. 빛과 그림자의 표현이 뛰어나다. 전성기의 과도기적 작품이다. 전시대의 거장 만테냐의 작품과 비교하면 건물과 인간을 대치되게 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방면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구도를 정하고 그다음 보조 역할로서의 건축의 모티브를 정하였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한 식당에 그려진 것인데, 이 그림이 수도원 식당에 걸렸을 때의 반응은 굉장한 것이었다 한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눈을 중심으로 원근법이 사용되었고,뒤로 상징적 건축은 구도의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이 그림의 내용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데, 그는 가장 치밀한 계산아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한 무리의 군상을 목표로 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그림에 대한 확고한 생각은 가장 간결하게 그린 그림으로 나타낸 그의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대한 논의는 끊임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그림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놀라울 정도의 살아있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는다는 것이다. 피렌체의 한 부인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로는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을 이 작품을 유명하도록 만든 것은 스푸마토라는 특이한 채색법의 사용에 있다.스푸마토란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뒤섞여 들어가는 듯 한 채색법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상상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 다빈치는 이런 신비스런 미소를 눈과 입꼬리에 남겨 놓으므로서 보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의 미술이 마침내 도달한 목표였는 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는 대조적인 사람,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활을 반영해 주는 작품을 남긴 도메리코 키를란다요로부터 3년동안 도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그로부터 프레스코화의 확고한 테크닉과 소묘의 철저히 기초를 배우고 이 성공한 스승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당시 세도가였던 메디치가의 소장품들을 즉 고대 그리이스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했다. 그는 이로부터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스승의 비법을 알았으며 인체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연구, 인체 해부학을 탐구하였다. 그도 역시 다빈치처럼 화가인 동시에 조각가, 건축가, 시인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라고는 과학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빈치가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봤을 때, 미켈란젤로는 인간을 거의 신과 같은 독특한 존재로 보았다. 다빈치가 조용히 사색하는 과학자이자 예술가였다면 그에게 영감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으며 이런 영감은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예술가는 신과도 같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고가며 자신의 강한 개성과 끊임없이 싸웠던 그의 가장 뛰어난 역량은 그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그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다. 프레스코화인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그려진다. 그 성당은 그 전시대의 유명한 화가들 보티첼리, 그의 스승인 기를란디요 등의 거장들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었는 데 궁형 천장만은 비어 있어 교황이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을 것을 제안함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 작업은 근 4년 동안 조수를 쓰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그렸다. 내용은 성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인데, 천장 복판에는 창세기와 노아의 이야기를, 창문 사이 벽에는 예언자와 많은 수의 성서 속의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 그 중에서 성서 테마중 가장 뛰어난 부분은 천장의 중앙 부분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이다. 여기서 전시대의 지옷토와 마사치오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전에 볼 수 없던 강렬한 감동이 있다. 최초의 인간아담이 잠에서 깨어난 듯 조물주 신의 손길을 느끼는 모습은 차옺의 순간과 신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내 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그가 율리우스 2세의 묘비 건립의 일부분이었던 군상 중 하나인 빈사의 노예와 다윗상, 모세상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평소에 회화에서 보다 조각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다. 격렬하고 뒤틀린 듯한 포즈,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듯한 자세등은 아무리 자세가 복잡하더라도 하나의 통일감, 즉 전체적인 윤곽의 뚜렷함 이나 단순하고 안정된 듯한 느낌이 있다. 이는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일 수 있는 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의 예술의 비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라파엘로 산티 Raffaello Santi (1483 - 1520)
르네상스의 3대 거장 가운데 가장 젊었으며 가장 까다롭지 않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요청대로 로마로 오기 전 다빈치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또 다른 그의 스승인 페루지노로부터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고 공간의 깊이를 표현한 정돈되고 우아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서정성과 미켈란젤로의 극적이며 회화적인 풍요한 화풍을 결합한 견고한 미술을 창조했다. 그는 동 시대의 두 대가와는 다른 면을 보여주는 데 그것은 그가 그린 인물들의 순수함와 이상성에 있다 한다. 당시 자연의 충실한 재현을 중요시 하지 않았던 대로 그도 역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고대 고전시대의 이상미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잃기 쉬운 생명감과 성실성을 확보하므로 자신의 그림을 이상화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는 벽화를 그린 벽화가이자 또 초상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성모상의 원형이 된 그란두카의 성모와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 학당, 교황 레오 10세의 초상, 요정 갈라테아 등이 있다.
지오르지오네 Giorgione (1478 - 1510)
지오반니 벨리니의 제자.<폭풍우> 경치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주제가 됨. 사물과 사람을 미리 그려 놓고 나중에 공간 속에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연,땅,나무,빛,공기,구름 그리고 도시 풍경 및 나무들과 인간을 통틀어 하나로서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이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영격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
티치아노 Tiziano (1477 - 1576)
벨리니, 지오르지오네의 뒤를 잇는 베네치아의 대가. 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이 근대 회화의 중심적 사고 방식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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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다빈치의 <수태고지> |
다빈치의 <성가족> |
다빈치의 <모나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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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제로의 <모세상? |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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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성모> |
라파엘로의 <레오 10세> |
라파엘로의 <성가족> |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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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르지오네의 <폭풍우> |
티치아노의 <한남자의 초상> |
티치아노의 <박쿠스제> |
티치아노의 <페사로 일가> |
북구의 르네상스
<후기고딕>성향의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은 1500년대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선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전사조와 후기고딕의 만남으로 그 경향은 매우 다양했으며 남부와 다른 북부지방 특유의 성격이 드러난다. 대체적인 경향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빛깔, 공간미를 배제한 꽉 찬 구성,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가득찬 신비감, 판화의 대중적 성공과 전파도구로서의 보급과 발전등을 들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주도 세력국으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들 수 있다.
독일
독일은 뒤러 (Albrecht Durer : 1471~1528)로부터 말할 수 있겠다. 그 선구적 역할은 숀가우어, 미하엘 파허에 연원하나 이탈리아여행과 독일의 고딕 성향이 이상적으로 만나 이상적인 북구양식의 인체효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뒤러가 단연 독일의 북구 르네상스인이랄 수 있겠다. 25세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이 가득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판화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는 데 그의 판화 속 인물들은 만테냐의 판화에서 배운 것이다.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한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배율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려 인체를 왜곡하기도 하였다. 뒤러는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 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틴 루터의 신봉자가 되어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자화상>은 1500년의 작품으로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나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는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권위와 예술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사명감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또, <멜랑꼴리아>, <4인의 사도>, <네기질>등에서 보이는 함축적인 상징성은 북방르네상스의 기질을 보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뒤러의 <네사도>는 독일 회화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세익스피어 만큼 신비스러운 존재인 그뤼네발트(Matthis Grunnewald)는 후기 고딕양식의 원근법을 구사하여 완강하고 단단한 인물상을 그려냈다. 그의 "아이젠하임 제단화"는 당시의 최대의 판화가로서 목판화와 동판화를 통해 16세기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는 데,이는 대단히 중세적이면서 초인적인 스타일로 표현된 "그리스도인의 책형"과 그 패널 안쪽의 , 생명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율동감의 "수태고지","합주하는 천사","성모자","부활"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책형"을 보면 인물상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 이는 그뤼네발트가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근대 미술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에 의도적으로 되돌아 간 것이 분명하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 1467~1543)
영국에서 궁정화가로 활동했는 데, 그는 북부 유럽의 세부표현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의 위대성과 견실성을 교묘하게 조화시킨 초상화를 그렸다. <헨리8세>는 의상이나 보석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인물의 성격까지도 잘 드러나 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Albrecht Altdorfer : 1480~1538)는 산속을 헤메며 자연을 연구하였으며 그가 남긴 수채화와 동판화,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인물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작가가 느끼는 풍경만이 그려져 있다.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르네상스는 그 정신을 그대로 이었다고 말하거나 대표적인 작가를 내세우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에 이르는 네덜란드 풍경화, 플랑드르 회화가 탄생하는데 전조를 마련한다. 즉 1500-1600년대에 이르러 풍속화, 정물화등이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15세기의 플랑드르 회화인 얀 반 아이크 형제, 플레말레의 화가에서 비롯하였으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는 브뤼겔에 이르러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수 있다. 농민생활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인문주의자로서 실제 풍경을 스케치하고 이용하는 사생적인 면에서는 <사냥꾼들의 귀환>에서 전형적인 풍경의 경치를 볼 수 있다. <농부의 결혼식>에서는 소박하고 거칠은 농민들의 모습을 최소한의 모델링으로 간결한 색처리로 명료하게 하고 있다. 구도에 있어서도 철저히 계획된 일관있는 연출을 하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에서는 교훈적인 내용의 성경구를 인용하여 여러 가지 풍자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인물은 보슈의 영향을 받고 풍경이 주가되는 과감한 공간구성의 풍경화에서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민들의 취향에 호응하는 일상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를 비롯하여 세속적인 모든 테마, 즉, 풍경화, 정물화가 1500년대에서 1600년대 사이에 그 윤곽을 드러낸다.
프랑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왕실주도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특히 1494년 이탈리아 원정을 실시한 샤를르 8세는 새로운 성을 건축하는데 이태리 양식을 활용하고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체리니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한편 퐁텐블로파라는 일련의 작가 미상의 예술가들이 이태리 마니에리즘을 수용하여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을 낳았고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그 내용은 고대 신화와 우의를 다루며 관능적이고 기교적인 나부나 화려한 귀족들의 모습을그렸다. 이와 같이 프랑스는 궁정양식의 화려한 미술이 발달하였으며 이는 바로크 시대의 회화에 곧바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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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의 <네사도> |
뒤러의 <전사> |
뒤러의 <잡초> |
뒤러의 <아담과 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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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의 <자화상> |
뒤러의 <자화상> |
그뤼네발트의 <십자가의 책형> |
그뤼네발트의 <부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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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트도르퍼의 <풍경> |
브뤼겔의 <농부의 결혼식> |
한스 홀바인의 <상인 게오르크 기체> |
한스 홀바인의 <성모와 마이어시장의 일가> |
마니에리즘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 그 기교적인 면에서 오는 차가움과 건조함이 개인의 주관적 성향의 극대화 결과 전성기 르네상스와 다른 경향을 의도하고 자연과 고대형식의 주관적 이상화를 지닌 내적 통찰력이 재평가 받고 있다.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겨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 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후기작을 이 경향의 일부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으나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고나점에서 자연미(이상미)가 아닌 세련미와 예술적 기교, 신비한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콘트랍포스터의 극단적인 바른 포즈와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단축버과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이다.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인물묘사에서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레토의 <최후의 심판, 만찬>은 그 이전의 <최후의 심판>과 비교하면 단번에 확인되는데 강한 불빛의 명암대비, 동세가 격한 인물들의 움직임고 불안정한 사선구도등이 마이에리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 그레코와 코렛지오는 종교화를 그렸다. 히 엘 그레코는 톤이 밝고 대담한 붓질과 신비스러운 종교화를 이루고, 반면 코렛지오는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인체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그는 신화를 다른 내용에서도 환성적인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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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 |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유해발견> |
코렛지오의 <거룩한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