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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성령님!
- 수정 증보판 -
부제: 성령님의 자서전
김수동 지음
감수 및 추천의 변
오늘의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성령론 때문에 오히려 성령 하나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발표된 김수동 목사의 논문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나의 사랑, 성령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은 신학적 용어나 학술적 용어가 깃든 딱딱한 내용을 피하고 쉽게 풀어 대화하듯 친절하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저자는 오늘날 교회가 삼위 일체 하나님을 가르칠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친근하게 호칭을 사용하면서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호칭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성령 하나님을 “성령님”으로 호칭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보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성령 하나님을 잘 설명하고 있는 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예를 들면 성령세례와 성령의 인침을 중생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 등이다.
성령 하나님의 속성부터 설명하기 시작한 저자는 성령 하나님과 창조, 구원, 중생, 세례, 교회, 은사, 열매 및 충만에 이어지는 방대한 내용을 잘 정리하였다. 비록 주관적인 면이 있지만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애쓴 흔적이 매우 돋보인다.
2005년 3월 25일
칼빈대학교 총장
김의환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비록 성령님의 감동으로 책을 쓰고 출판을 했지만 조급한 마음으로 했기에 부족한 것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인격이나 성품에 대한 내용, 그리고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YHWH, the LORD)와 “주”(the Lord)의 정확한 개념과 번역상의 오류를 더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많은 부분을 수정하고 “성령과 여호와”라는 장을 추가하였다. 원래 “영적인 존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단지 “성령”이라고만 기록해도 될 것을 왜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등 수 많은 다른 명칭들을 사용하셨는지, 또 성령강림절 이후에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다음 마지막 일곱 교회(모든 교회)에게는 왜 일률적으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는지 우리들은 그 의도를 알아야 할 줄 믿는다. 보이지 아니 하시는 성령님께서 실제로 창조와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지금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들어내시고 인정받기를 원하심을 믿고 더욱 더 성령님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 수정 증보판을 내주신 쿰란출판사께 감사드린다.
저자
차 례 감수 및 추천의 변/2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4
제 1 장 들어가는 말/6
제 2 장 성령님 안녕하세요?/11
제 3 장 성령님은 누구세요?/18
제 4 장 성령과 삼위일체/26
제 5 장 성령의 다른 명칭/48
제 6 장 성령의 상징들/56
제 7 장 성령과 창조/58
제 8 장 성령과 구원/61
제 9 장 성령과 인침/79
제10 장 성령과 중생/81
제11 장 성령의 세례/93
제12 장 성령과 교회/117
제13 장 성령의 이중사역/127
제14 장 성령의 열매/142
제15 장 성령의 은사/145
제16 장 성령의 충만/151
제17 장 성령의 모든 사역/155
제18 장 성령의 이름/161
제19 장 성령과 그리스도/187
제20 장 성령과 말씀/192
제21 장 성령과 여호와/206
제22 장 나의 사랑, 성령님!/215
제23 장 맺는 말/227
제 1 장 들어가는 말
약 10년 전부터 서아프리카에 있는 부르키나 파소라는 나라에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두 차례씩 성령론 세미나를 해왔습니다. 성령론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꼭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수백 명의 목회자들은 한 목소리로 크게 “아멘”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보신 분은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신 거의 모두가 고개를 옆으로 흔듭니다.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다시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모두가 “아멘!”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 예수님을 만나보고 악수라도 하신 분이 있습니까?”
역시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고 대신 모두 고개를 옆으로 흔들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보지도 못한 하나님을, 만나보지도 악수도 못해 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역시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딱 한 분이 성경을 높이 들고 “이 성경 때문에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본일이 없고 예수님 또한 만나보지도, 악수도 해 본적이 없지만 믿는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믿은 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다시 말해서 전도를 통해서 믿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이가 역시 성령님의 감동으로 회개하여 믿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롬 10:9-15, 요 15:26-27 + 16:7-13).
여러분 중 혹 믿지 않는 이웃에게 성경책을 주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백이면 백 모두 하나님을 믿기는 고사하고 더 멀리 달아날 것입니다. 혹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님만이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요 16:7-9), 우리를 모든 진리(예수)로 인도하시고(요 16:13), 성령님만이 예수를 증거하시며(요 15:26) 또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그리고 성경 자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사 34:16, 딤후 3:16, 벧후 1:21).
이렇게 우리의 영혼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이는 성경도, 성자 예수님도, 치유도, 기적도, 부활도, 구원이나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론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신론이나 기독론, 삼위일체론, 창조론, 인간론, 죄론,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교회론 등 어떠한 조직신학도 제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물론이려니와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성령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소홀하게, 심지어는 성령님을 무시하는 사태로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 관한 것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던 저는 30대 초반에 모 회사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사장으로 왔습니다. 독일에 와서도 열심히 교회를 다녔지만 소위 “구원의 확신”이 없다가 주님의 은혜로 “성령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신학을 한 후 목회자가 되어 프랑크푸르트에서 교민목회를 시작했습니다. 40이 넘어 구원을 받고 50이 넘어 목회를 시작하니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신학에 대한 부족함 때문에 서울 사당동에 있는 총신 목회대학원에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겨울 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을 하게 되고 졸업논문으로 쓴 것이 “창조와 구원사건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연구”였습니다. 참으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이 책의 대부분도 그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며 좀더 읽기 쉬운 문장으로 바꾸고 논문에서 쓰지 못했던 간증이나 예화를 추가했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글을 어찌 이 작은 책자로 다 쓸 수 있겠습니까마는 부족한 종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을 모두 그러나 간략하게 썼습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쓰는 목적은 지금까지 소홀하게 대접 받아오신 성령님이 귀하게 여김을 받으시고, 무시당해 오신 그 분이 참 하나님(렘 10:10)으로 인정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모독까지 당해오신 그분께 영원토록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려서 이 마지막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예수의 이름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역사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속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해요!” 혹은 “예수님 사랑해요!” 하듯 똑 같은 고백을 성령님께도 드리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사랑해요!”
제 2 장 성령님 안녕하세요?
로마서 10장 18절에 보면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골로새서 1장 23절에는 “이 복음은 천하만민에게 전파된 바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예수님의 말씀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주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여 주후 100년도 되기 훨씬 전에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천하만민에게” 이미 전파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말씀과 맞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마 24:3)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가 아직도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요 “순교당한 주의 종들과 형제들의 수”(계 6:11)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은 3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부활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것이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실로 엄청난,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것”이란 바로 “영혼 구원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제자들의 더 큰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2,000년이라는 세월이 거의 다 되어가는 21세기 초두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주님이 오시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순교당한 주의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일어났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그대로 계속되었더라면 주님은 벌써 오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충만한 수나 순교 당한 주의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차지 않았으니 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수가 아직 차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특히 하나님의 종들이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신 성령님에 대해 무지했고, 그분을 소홀히 했고 무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소련과 서아프리카에서 목회자들을 위한 성령론 세미나를 하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이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성령론의 대가라고 알려진 17세기의 청교도 죤 오웬(John Owen)을 필두로 그 뒤를 이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 고든 피(Gordon D. Fee), 아더 핑크(Arthur W. Pink) 그리고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등 외국인 학자들은 물론 국내의 많은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교회가 성령님에 대한 무지나 무시, 또는 오해와 왜곡, 심지어는 멸시와 모독까지 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얼마 전 새해 첫 주일예배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주일설교 제목은 “성령님 사랑해요”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는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남자집사 한 분이 얼굴이 상기된 채 저에게 쫓아와서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 사랑해요’ 아니면 ‘예수님 사랑해요’는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성령님 사랑해요’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성령론 성경공부 시간에 한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해 무지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 분을 무시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요. 확실한 것은 몇 백 년 전이나 몇 천년 전뿐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님은 멸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이 우리와 같은 인격체이심을 믿으십니까? 인격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인격체이심은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지만 가령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모독을 당했다고 가정했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기분이 나쁘고 감정이 상하여 그들과 상대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성령님 역시 그 분이 무시당하면, 아니 무시까지 안 당하시드라도 단지 인정을 못 받으시고 환영을 못 받으신다 해도 그 분의 마음은 아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감정을 가지신 인격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베니 힌(Benny Hinn) 목사님께서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란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만 성령님이 인격체(person)이심을 참으로 간단 명료하게 나타낸 제목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그리고 성부나 성자와 같이 성령님도 그분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이 말씀은 성령님이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이 말씀은 성령님이 자기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을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이 말씀은 성령님이 그 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령님을 가리키실 때 삼인칭 대명사인 영어의 “He”(그, 그분; 요 15:26, 16:7-8+13)를 사용하셨고, 성경 여러 곳에서 성령님은 인격체로서 활동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하시고”(행 8:29, 10:19, 13:2, 딤전 4:1, 히3:7, 계 2:7 등)
“가르치시고”(요 14:26)
“증거하시고”(요 15:26)
“위로하시고 (행 9:31)
“주장하시고”(행 16:6-7)
“인도하시고”(요 16:13)
“도우시고 간구하시고”(롬 8:26-27)
즉, 우리와 똑같은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활동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격체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정 받고, 환영 받고 그리고 또한 사랑 받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 또한 어제도, 오늘도 그리도 앞으로도 그 분이 인정 받고 환영 받으실 때는 역사하시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도무지 역사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 3 장 성령님은 누구세요?
먼저 성령이란 단어의 뜻을 설명하겠습니다. 성령은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루아흐”(Ruach) 그리고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프뉴마”(Pneuma)라고 하며 그것은 똑같이 숨, 호홉, 바람, 생기 그리고 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특별히 보혜사라고도 불렀는데 헬라어로 “Parakleto”, 영어로는 “Counselor” 혹은 “Comforter”라고 하며 위로자, 돕는 자 또는 변호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혜사에 대한 것은 나중에 별도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는 “the Spirit” 혹은 “the Holy Spirit”이라고 첫자를 대문자로 표시하며 한글로는 그냥 “영” 또는 “성령” 즉 “거룩한 영”이라는 뜻이며 “거룩” 이라는 단어의 원 뜻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거룩성” 은 그래서 피조계 즉 이 세상이나 우리와 구별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통 성부(the Holy Father), 성자(the Holy Son) 그리고 성령(the Holy Spirit)이라고 표시하거나 말을 합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는데 어떤 문제나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성부(the Holy Father)라는 말은 요한복음 17장 17절에 딱 한 번 나오고, 성자(the Holy Son)라는 말은 한번도 나오지 않고, 그냥 아들(the Son)이라고 나오는 반면 성령(the Holy Spirit)이라는 단어는 수십 번 나옵니다(영어로 “the Spirit”이 “성령”으로 번역된 곳도 많이 있다). 이것은 성령님의 “거룩성” 이나 “성결함”을 그만큼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님이 하나님과 똑 같은 신성과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바로 하나님이심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사 40:28, 느 9:5, 롬 16:26)라고 하였는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와 같이 성령님도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수 22:22; 시 50:1, 겔10:5)라고 하였는데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와 같이 성령님도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다”(시 139:1-4)라고 하였는데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니라”(고전 2:10-11)와 같이 성령님도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렘 23:24)라고 하였는데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10)와 같이 성령님도 무소부재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암 4:2, 사 6:3)라고 하였는데 “성결의 영”(롬 1:4) 또는 문자 그대로 “거룩하신 영”과 같이 성령님도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16)라고 하였는데 “성령의 사랑”(롬 15:30)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갈 5:22)과 같이 성령님도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시 118:1)라고 하였는데 “주의 선한 신을 주사”(느 9:20)와 같이 성령님도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평강이시다”(롬 15:33, 빌 4:9등)라고 하였는데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화평”(갈 5:22)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사 65:16)이라고 하였는데 성령도 “진리의 성령”(요 14:17, 15:26)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히 12:15)라고 하였는데 “은혜의 성령”(히 10:29)과 같이 성령님도 은혜로우십니다.
이와 같이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성령님도 가지고 계시며 성령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5장 3-4절에 보면 “성령님을 속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하여 성령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성령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주 하나님”(the Lord God)이라고 부를 때의 “하나님”은 물론 “성삼위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모두 “하나님”(the God) 이시고 또한 “주”(the Lord)도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주님”인 것은 아무 문제없이 인정하나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은 알겠는데(행 5:3-4) “주님”이라고 인정하는 데는 약간 인색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는 “주”(the Lord)라고 기록된 것이 “성령”을 의미함을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 기록된 “주”는 대부분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던 “성자 예수님”을 뜻하고 있습니다만 다음 성경 구절을 잘 살펴보면 “주”라고 기록된 것이 “성령님”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누가복음 5장 17절에 보면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 능력”의 “주”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처음부터 성자 예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마 12:28 ).
마가복음 16장 20절에 보면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 때도 “주”는 물론 “예수의 영”이시자 “주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자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하셨는데 이 때의 “주 예수께서” 의 “주”는 틀림없이 “성자 예수님”을 의미하지만 “주께 받은” 할 때의 “주”는 “성령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으로 계셨던 성자 예수님을 사실상 만난 일이 없으며 더더구나 그분께 어떤 말씀이나 교훈을 직접 들은 일이 없습니다.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인자되신 성자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계시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by revelation from Jesus Christ)로 말미암았다고 했습니다(갈 1:12). 그런데 계시하시는 분은 성자 예수님이 아니고 성령님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 보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정신”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 뜻은 “성령”이며 영어로는 “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through the Holy Spirit) 명하셨음을 볼 때(행1:2)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성자 예수님께서는 얼마던지 “성령을 통해서”(through the Holy Spirit)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마치셨기에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 자신에 대해 증거하실 것이고(요 15:26), 또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26). 이미 성령님께 맡기신 구원 사역을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행 1:16)와 같이 대부분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성령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모습도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행 8:20)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행 10:19)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행 13:2)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증거하여..”(행 20:23)
“..성령이 말씀하시되..”(행 21:11)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계 2, 3장)
구약에서도 성령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나옵니다.
“주의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가라사대”(겔 3:24).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겔 11:5).
이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주”(the Lord) 라고 기록된 많은 경우가 성령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도 “주님”이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자 “하나님”이신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제 4 장 성령과 삼위일체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위 일체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의미를 잘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삼위 일체란 말이 없기 때문에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에는 삼위 일체란 말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수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한 후 내린 결론은 “삼위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등한 “인격체”이신 “삼위”(three Persons)가 계시는데 이 “삼위”는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고 모두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이 우주에는 오직 유일하신 “한 하나님”(One Godhead)만 계시기 때문에, “삼위”지만 “한 하나님” 이라고 해서 삼위 일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삼위가 하나가 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이것은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님들이 삼위 일체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듭니다. 즉 하늘에 태양이 있는데 이 태양은 둥근 공 같은 모습의 본질이 있고 거기에서 빛이 나오고 또 열이 나오는데 각각 다르게 나타나지만 태양은 하나다 라고 설명합니다. 또 이런 예화도 듭니다. 즉 자동차에는 전기를 발생시키는 배터리(battery)가 들어있는데 이 배터리에서 나오는 전기로 불을 켤 수도 있고, 빵빵 하고 소리를 낼 수도 있으며 또 시동을 걸어 차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같이 세가지 각각 다른 기능을 하지만 한 배터리에서 나온 전기는 하나다라고도 설명합니다.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도 합니다.
아버지: 본질로서의 하나님
아들 : 형상(본체)으로서의 하나님
성령 : 영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omnipresence)하시지만 사역의 장(field)으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 분도 있습니다.
아버지: 우주 밖에 계신 하나님
아들 : 우주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
성령 :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아는 그 어떤 예화나 설명을 가지고도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바르게 이해하거나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 능력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그 누구도 삼위 일체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비 중의 신비”요 “가장 위대한 신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삼위 일체의 신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사 65:17, 66:22, 벧후 3:13, 계 21:1), 그리고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요 3:29, 고후 11:2).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믿고(행 1:14) 또한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벧후 3:12, 계 22:20).
그런데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보았던 광경은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 인간의 모습으로 스데반 집사에게(행 7:55-56)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으며(계 1:13-16) 백마를 탄 모습으로도 보여주셨지만(계 19:11-13) 막상 하늘 보좌 우편에는 그러한 모습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잘 보면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이(인간의 모습이 아닌)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 같은 무지개라고 되어있습니다(계 4:2-3). 분명 어린양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으로부터 책을 취하셨는데(계 5:7) 그분의 전체의 모습이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계시다면 틀림없이 성부 하나님의 모습이어야 하고, 성자 하나님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어린양만 보입니다(계 5:6). 여기에서 “사이에”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 뜻은 “가운데 혹은 중앙에”(center or midst)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보면 분명히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은 보좌 가운데에도 계시는 것입니다(계 7:17).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계 22:1+3,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같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성자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9-10)고 하셨고, 더더욱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 어린양(계 5:6)으로부터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 1-9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주”(the Lord), 즉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the King, the LORD Almighty)을 본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옷자락”(the train of his robe)은 성전에 가득한데 막상 그분의 얼굴 모습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주의 목소리를 들었고 여호와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누가는 이 “여호와”가 “성령”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행 28:25).
우리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 일체를 믿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삼위 일체의 신비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 것 같은 큰 비밀(깊은 신비=a profound mystery)이라고 했습니다(엡 5:31-32).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모르고 어찌 신랑 예수와 신부인 교회의 사랑을 알 수가 있겠으며 부모와 자식(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을 모르고 어찌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 된 우리들의 사랑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가정(가족 제도)을 만들어 주시고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다음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삼위하나님의 깊고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삼위 하나님이 확실히 계시된 곳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28장 19절입니다.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대 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 중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세 위”가 계시고 성령님은 “제 삼위” 즉 세 번째에 해당하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비록 순서상 그렇게 표기했지만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
“아들 아버지 성령”(롬 15:16, 고후 13:13)
“성령 아들 아버지”(엡 4:4-6)
“아버지 성령 아들”(벧전 1:2)
“성령 아버지 아들”(유 20-21)
“아들 성령 아버지”(롬 15:30)
삼위 하나님은 그 존재와 영광과 권위와 위엄과 능력과 가치에 있어서 서로 우열이 없고 동등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물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확실하게 기록된 곳은 없지만 성령님에 대해서는 수없이 많은 기록이 나와 있고 아버지와 아들 개념은 솔로몬과의 관계에서(삼하 7:14) 그리고 고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father, 시 68:5))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우리 아버지”(the LORD is our Father)라는 구절이 몇군데 나옵니다(신 32:6, 시 89:26, 사 63:16, 64:8, 렘 3:4+19, 말 2:10). 이것은 “창조주로서의 아버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성부 하나님”(God the Father)이라는 개념이 훨씬 큽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여호와는 성령이시다”라는 장에서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외에 구약 여러 곳에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하였는데 이 때의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며 복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 삼위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인 것입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3:22)
“우리가 내려가서”(창 11:7)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라는 복수단어를 사용하셔서 삼위가 같이 사역하신 것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에는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 즉 성령님이 별도로 나옵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셨는데 영어로는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인데, 26절에서 계속 “우리”라는 복수단어를 쓰다가 갑자기 “자기”(his)라고 삼인칭단수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수로 쓰인 “자기”는 다름이 아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 고후 4:4)이라고 한 것같이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같이 계셨던 삼위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에서도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도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사역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6장 24-26절에서는 “여호와”가 세 번 계속 나오며 이사야 6장 3절,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는 “거룩하다”가 세 번 계속 나와서 “삼위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편 113편 1-3절 및 시편 118편 10-1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이 세 번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다음 구절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48:16 하반절) 영어로는 “the Sovereign LORD has sent me, with his Spirit.” 여기에서 “주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 “나”는 “형상으로서의 하나님” 즉 “성자 하나님” 그리고 “그 신”은 “성령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 42장 1절에 나오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12장 8절에도 인용이 된 메시야 되신 성자 하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자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은 그 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요 8:56, 창 17/18장 참조)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말씀하셨으며(출 33:11, 민 12:8, 신 34:10) 여호수아에게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수 5:14-15)
혹자는 주님의 구원 사역을 셋으로 나누어 말씀하기도 합니다. 즉 구약 시대를 성부 하나님의 시대,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때를 성자 하나님의 시대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를 성령 하나님 시대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항상 같이 일하셨지만 구약 시대에는 아버지가, 성자 시대에는 아들 예수가 그리고 성령 시대에는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혹은 주체가 되어 일하신 것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 성자 예수님은 삼 년 반 동안 인자로서 그리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단독으로 사역하신 것 같지만 실은 성령님께서 항상 함께 하셨고 또한 아버지도 그 성자 예수님 안에 함께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 10:38, 14:10-11, 17:21-23). 그리고 삼위 하나님께서 같이 일하신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님은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오셨고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후 성령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체이신 성령님 단독으로 사역하시는 것 같지만 성령님 안에는 아버지와 아들도 함께하시는 것입니다(요 14:16-23, 특히 23절 참조). 참으로 신비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제는 삼위 하나님께서 일체가 되시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모두 “주님”이시오 “하나님” 되심으로 “일체”가 되신다고 앞 장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모두 “주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삼위가 일체가 되는 중요한 요소는 “거룩함”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않으시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그래서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세 번 외치는 것입니다(사 6:2, 계 4:8). 삼위 일체 하나님이신 만군의 주 여호와께 쉬지 않고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삼위가 일체가 되는 요소는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요 1:1).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성자 예수님이십니다(요 1:14). 또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되어있습니다(엡 6:17). 성령과 말씀에 대해서는 별도의 항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넷째로 삼위가 일체가 되는 요소는 모두가 “구원자”(Savior=Christ)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삼위가 일체가 되는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로 삼위가 일체가 되는 요소는 “삼위 하나님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셋째, 넷째, 다섯째 그리고 여섯째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별도의 항에서 다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곱째로 삼위가 일체가 되는 중요한 요소는 “내주하심”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we will come to him and make our home with him)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오신 그 사람에게 “우리” 즉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오셔서 거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내주하심)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3)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고 했던 것입니다(롬 8:10, 고후 13:5, 갈 2:20, 골 1:27).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일체가 되시는 가장 중요한 요소, 다른 말로 하면 가장 중요한 본질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NKJV에서는 “God is Spirit”이라고 하여 “영”을 “성령”이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은 성령이시다”라고 주장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란 말은 틀림없이 맞지만 “하나님은 성령이시다”란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프뉴마 호 데오스”인데 주어인 하나님(데오스) 앞에 정관사(호)가 나와 있고 보어인 영(프뉴마)이 오히려 맨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문장 배열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그랜드종합주석 참조). 다시 말해서 “영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령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부 하나님도 성자 하나님도 모두 “영적인 존재”라는 뜻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의 두 가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하나님은 영이시다”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첫째, 전술한바와 같이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spiritual-being)라는 것이고 오직 영적인 존재끼리만 교제(사귐)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과 천사와(마귀와 그 졸개들은 타락한 천사들)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귀신과 대화도 하지만 영이 없는 동물들과는 교제를 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가 아닌 것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가령 영적인 존재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이 빠지면 과연 아버지가 하나님이 될 수 있겠으며, 아들 하나님에게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안 계시면 과연 아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야말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본질(DNA)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영이시다”란 말은 “하나님은 제한이 없으시다” 혹은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unlimited, no limit)라는 뜻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제한되어 있고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은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영원”이 나옵니다.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무소부재”(Omnipresence)가 나옵니다. 지식(지혜)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전지”(Omniscience, All-knowing)가 나오며, 능력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전능”(Omnipotence, Almighty)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용서와 사랑도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시고”(골 1:15, 딤전 1:17, 히 11:27), “볼 수도, 본 자도 없고”(요 1:18, 딤전 6:16, 요일 4:12) 더구나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출 33:20)고 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의 모든 속성은 “영”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여기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거기에는 사과나무 뿌리가 있고, 사과나무 줄기가 있고, 사과나무 잎이 있으며 그리고 사과나무 열매가 있습니다. 뿌리와 줄기와 잎과 열매는 각기 그 모양과 색깔이 다르지만 “사과”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은 그들 안에 흐르고 있는 “사과의 진액”(DNA)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각기 “위”가 다르고 하시는 “사역”도 다르지만 그 “삼위”를 “일체”가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성령님”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아버지와 아들도 같이 오시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더 핑크는 “영혼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본질적이며 중심적인 요소는 곧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성령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그리스도가 성령 사역의 중심이라는 것과 성령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뜻하듯이 성령께 영광 돌리는 것은 정확히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장 첫머리에 한글성경에는 소위 “삼위 일체”라는 말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단어가 없지만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서 “삼위는 하나”라는 것을 말씀드렸고 특히 성령님이야 말로 삼위가 하나되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영어나 독일어 성경 중에는 “삼위가 하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을 보겠습니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NIV 영역은 7절이 아닌 6절 하반절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And it is the Spirit who testifies, because the Spirit is the Truth.”
NASB 영역은 7절로, 역시 비슷합니다.
“And it is the Spirit who bears witness, because the Spirit is the truth.”
그런데 NKJV 영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이제는 독일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루터판 번역(Martin Luther Uebersetzung)을 보겠습니다.
“Denn drei sind’s, die da Zeugnis geben im Himmel: der Vater, das Wort und der Heilige Geist; und diese drei sind eins.”
또한 정부 교회가 아닌 자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 중 쉴락터 번역(Schlachter Uebersetzung,
Das Neue Testament, Schlachter Version 2000)은 다음과 같습니다.
“Denn drei sind es, die Zeugnis ablegen im Himmel: der Vater, das Wort und der Heilige Geist, und diese drei sind eins;”
이것들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는데 이는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며 이 셋은 하나입니다.”
NKJV에 보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이가 하늘에 셋이 있고, 8절에 보면 땅에서도 셋이 있다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바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께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동일하게 증거하시는데 이 “세 분은 바로 하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어로 “삼위 일체”는 “Dreieinigkeit”이며 말 그대로 “셋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저는 많은 성경 사본들이 왜 이렇게 중요한 구절을 삭제 내지 다르게 번역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 신학교에서는 신, 구약성경의 원본은 없다고 가르치고 우리는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시는 그렇게 중요한 생명의 말씀의 원본이 없어지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 어디엔가 잘 보관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여기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에게 맡기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진리는 반드시 들어날 것이고, 성경에서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여러 번 명령하셨던 주님은 그 말씀을 의도적으로 가감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동등하시다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비록 모든 것이 동등하시더라도 성경을 보면 삼위 하나님 서로가 서로를 높여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서로 영화롭게 하시는 모습을 봅니다(요 5:19-23, 12:28, 13:20, 17:1-5, 벧후 1:17).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반면(요 16:14)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높이신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고쳐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막 5:1-20, 눅 8:26-39). 그 사람은 자기 마을로 가서 “예수”께서 자기를 어떻게 고쳐주셨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 하셨나”(막 5:19) 혹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눅 8:39)고 하시며 “주” 혹은 “하나님”이 큰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주”와 “하나님” 되심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성자 예수님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언제나 “인자”라는 겸손한 칭호를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사실을(마 12:28) 확실하게 아시는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바로 “주”와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겠지만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2;32). 누가복음 12장 4-10절에서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오직 “성령님”만을 두려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또는 “주님” 하고 부를 때 그 개념을 확실히 하고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을 다 부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인격체이신 성령님을 의식하면서 예배드리고 성령님을 높이면서 찬양드릴 때 더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지금, 이곳에 그리고 내 안에서(within me), 우리 가운데서(among us) 실제로 운행하시고, 교통하시고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바로 인격체이신 “주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성령 하나님만 경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 안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아버지의 영이시자 아들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예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바로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큰 능력이 나타나며, “예수의 이름”은 또한 구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고 그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삼위 일체에 대해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신다면 그에 관한 전문서적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일체 삼위”, 다시 말해서 “일체가 삼위로 나타나심”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은 한분”(One Godhead)이신데 태초부터 “삼위”로 함께 계셨고, 모든 사역을 함께 하셨지만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을뿐만 아니라 전술한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사랑하는 마음때문에 “삼위”로 역사하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제 5 장 성령의 다른 명칭
성경에는 성령님을 뜻하는 수많은 다른 명칭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신” “여호와의 신” “나의 신” “성신” “지혜와 총명의 신” “하나님의 성령” “주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 “아들의 영” “진리의 영” “아버지의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은혜의 성령” 등 제가 찾아낸 것만 해도 거의 30여 개가 있습니다(나머지는 독자 여러분이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영”이나 “성령” 또는 “성신”으로 표기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러한 다른 명칭들은 성령님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 그리고 그 분의 다양한 사역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은 성령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일을 하신다는 뜻이며 바로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주 여호와의 신”(the Spirit of the Sovereign LORD)은 성령님이 대주재로서의 일을 하시는, 바로 여호와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시는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명칭들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됩니다.
또한 영어문법에서 “of”라는 단어는 양쪽에 명사가 올 때는 두 명사가 동격임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를 영어로 쓰면 “the city of Seoul” 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시의 이름은 서울이고 서울은 하나의 도시며 그래서 “Seoul”과 “the city”는 동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아버지의 영”, “아들의 영”, “생명의 성령” 등도 마찬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란 명칭은 매우 탁월한 방법에 의해서 그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은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라고 한 존 오웬(John Owen)의 말은 극히 타당한 것입니다.1)
또한 “영원하신 성령”(히 9:14)은 성령님의 속성이 영원하시다는 뜻이며 “은혜의 성령”(히 10:29)은 성령님의 은혜로운 성품을 나타냅니다.
“신”이나 “영” 혹은 “성령”이란 말 대신에 다음과 같이 표현한 곳도 많이 있습니다.
“전능자의 기운”(the breath of the Almighty, 욥32:8)
“여호와의 기운”(the breath of the LORD, 사 40:7)
“하나님의 기운” (the breath of God, 욥 27:3)
“하나님의 입김” (the breath of God’s mouth, 욥15:30)
이것은 “루아흐”(Ruach)나 “프뉴마”(Pneuma) 같이 이름 그대로 호홉 즉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시는 성령님을 뜻하며 동시에 그분의 능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손”이나 “손가락” 그리고 “팔”이라고 표시된 곳도 많은데 역시 성령님의 능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을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라는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손”(the hand of the LORD, 사 25:10)
“하나님의 손”(God’s hand, 삼상 5:11)
“그 거룩한 팔”(his holy arm, 사 52:10)
“여호와의 권능”(the hand of the LORD, 겔 1:3)
“주의 능한 손”(your mighty hand, 대하 6:32)
“주의 손가락, 주의 손” (the work of your finger’s,
or hands, 시 8:3+6)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마태는 “하나님의 손” 대신 “하나님의 성령”(마 12:28)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역대상 28장 12절에서 “성신”이라고 표현한 것을 19절에서는 “여호와의 손”이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성경 여러 곳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신 11:12, 대하 16:9, 잠 5:21 등)
“주의 눈”(왕상 8:29+52, 대하 6:40, 느 1:6 등)
“내 눈”(왕상 11:38, 렘 16:17 등)
“여호와 보시기에”(왕상 15:26 등, 영어로는 공히 in the eyes of the LORD임)
이 말씀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을 보면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데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말이 나옵니다(계 5:6). 또 예수님이 이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3:1).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일곱이란 뜻이 아니고 “완전하시고 충만한 능력을 가지신 성령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눈”은 온 세상뿐 아니라 나의 모든 언행 심사를 감찰하시는 성령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잠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분이 전도사 시절에 어느 조그마한 시골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1930년대 어느 해 여름, 그 마을에 장티푸스란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교회의 교인 한 분이 그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의약이 빈약했기 때문에 그 병으로 죽을 경우 전염될까봐 위문하러 가는 것은 고사하고 장례식도 못하고 바로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은 그 집에 가서 예배드리고 장사 지낼 모든 수속을 다 해 줬는데 그만 자신이 그 병에 걸려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분이 죽어 관 속에서 아홉 시간 가량 있다가 다시 깨어나셨는데 그 동안 천국에 갔다 온 간증입니다.
천사가 자기를 데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데리고 갔는데 보좌 위에 하얀 스크린이 있고 그 스크린에 자기의 전 과거가 모두 비춰지는데 자기의 모든 언행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했던 것, 마음에 품었던 것들이 다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천사장이 주님께 이 전도사는 지옥에 보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할 때 주님께서 이 전도사는 아직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내려 보내라고 하셔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천국에서 본 것 중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들의 앞뒤가 비디오 카메라 렌스로 꽉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들으면서 주님은 그 비디오 카메라로 나의 언행 심사 모두를 찍고 계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렸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에도 “네 생물들의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계 4:6+8). 또 에스겔 선지자도 같은 표현을 했습니다(겔 10:12). 그 당시 비디오 카메라를 알 리가 없었던 그들은 비디오 카메라의 렌스가 모두 “눈”으로 보였던 것이고 이 “눈들”은 모두 우리의 “폐부와 심장을 살피시는”(렘 17:10, 20:12) “성령님의 눈” 바로 “성령님”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요한에게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불꽃 같은 눈(계 1:14, 2:18, 19:12), 그리고 다니엘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의 횃불 같은 눈(단 10:6)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사 34:16, 딤후3:16, 벧후 1:21)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하나님” 혹은 “여호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도 되는데 왜 구태여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수 없이 많은 “영”을 기록하셨으며, 또 단순히 “하나님의 영”이나 “주의 영” 또는 간단히 “성령”으로만 표시해도 되는데 왜 수십 가지의 다른 명칭으로 표현하셨는지 그분의 의도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님은 이러한 여러 명칭들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일은 내가 다 했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역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삼위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고 지금도 같이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실제로 행하시고 마무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신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령님은 그 분의 뜻대로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켜 성경을 쓰게 하셨지만 다른 위이신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이 모르는 가운데 기록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이 모두 인정하고 동의한 가운데 이 성경을 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아더 핑크(Arthur Pink)는 그의 성령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들과 호칭들을 통하여 때로는 자신의 완전하심을 보이시고, 때로는 자신의 다른 면을 보이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낱낱이 알려주시는 것이다. 중략. 지금까지 논의한 사실들은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성령이 과연 그의 신적 성품과 거룩한 성격 면에서 어떤 분이신가는 성경에서 그에게 붙여진 많은 이름과 여러 가지 다양한 호칭들을 통해 알 수 있다.”2)
제 6 장 성령의 상징들
성경에는 성령님에 대한 여러 가지 상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비둘기, 기름, 물, 불 그리고 바람 등입니다. 이 중 특별히 물과 불과 바람에 대해서 왜 그러한 상징을 쓰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물과 불과 바람은 “생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이 없으면, 불(빛과 열)이 없으면, 바람(숨, 호홉, 생기)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인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이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로 물과 불과 바람은 “청결”을 뜻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물이나 불이나 바람을 사용합니다. “성결의 영”(the Spirit of holiness, 롬 1:4)이신 성령님은 이름 그대로 “거룩하신 영”이시고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바로 청결을 주관하시는 분인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셋째로 물과 불과 바람은 “능력”을 뜻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소위 능력(power)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비와 홍수와 폭포수와 쓰나미 즉 물입니다. 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는 산불과 각 종 무기와 폭탄 즉 불입니다. 여러 종류의 태풍과 폭풍과 회리바람 즉 바람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능력이시고 또 능력을 주관하시는 분인 것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인 것입니다(눅 1:35).
넷째로 물과 불과 바람은 “심판” 즉 “죽음의 심판”을 뜻합니다. 노아 시대에 전 세계는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부분적으로 물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불의 심판도 받고 있습니다. 바람의 심판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은 불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사 4:4, 벧후 3:7). 모든 생명체로부터 숨(호홉) 즉 바람을 거두어 가면 죽음이 옵니다(욥 34:14-15). 성령님은 바로 심판을 주관하시는 분인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새 시대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sovereign power)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과 죽음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교회들은 성령님을 다시금 존귀하게 여기고, 받들고 그를 의지하여 우리의 모든 사역, 특별히 구원 사역을 이루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 7 장 성령과 창조
모든 창조와 재창조(구원)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로힘”으로 복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삼위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마지막 때까지 같이 일하고 계심을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모든 일을 시행하시고 마무리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성경은 성령님 단독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지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뜻의 집행자로 활동하셨고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으로 끝을 내도 되는데 왜 2절에서 구태여 “하나님의 신”을 기록했는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위 말씀과 같이 “셀 수 없는 하늘의 만상”(렘33:22)과 오늘날 존재하는 지구는 성령 사역의 직접적인 산물인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 40:7).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또한, 이와 같이 성령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와 보존을 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숨(생기)으로 아담은 살아있는 영이 되었고”(창 2:7).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이와 같이 성령님은 인간의 생사화복도 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른 뼈들도 살아있는 군대로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겔 37장).
이에 관한 몇몇 신학자들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아더 핑크: “창조 자체는 성부와 성자의 이루신 일
일 뿐 아니라 성령의 작품이다.”3)
존 오웬: “삼위는 존재의 순서에 의해 사역의 순서
도 분명히 구별된다. 모든 것이 포함되며,
온전하며, 완전하게 행하시는 분은 성령
이시다. 중략.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끝맺으시는 것은 성령께로 돌려진다.”4)
헨드리쿠스 벨콥: “성령은 하나님께서 창조와 재창
조 중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의 숨’이다. 하나님의 영
은 바로 활동하시는 하나님 자체
이다.”5)
독자 여러분은 이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는데 성령님께서 직접적인 간여를 하시고 마무리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 8 장 성령과 구원
창조와 보존 사역에서 실제로 역사하셨던 성령님께서 이제는 재창조 즉 구원 사역에서 하시는 역할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은 우리에게 주신 66권의 성경 말씀이 정확하고 틀림이 없음을 믿습니다. 또한 기록된 모든 말씀은 일점 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마 5:18).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는 “왜”라는 관점을 가지고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왜,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기록하셨을까” 생각하며 읽지 않으면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 즉 성령님의 의도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지, 왜 동물의 피 제사를 드리게 하셨고, 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그리고 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는지 등 “왜”라는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을 때 비로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구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구약성경 66권을 관통하고 있는 단어를 한마디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로 “예수”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와” 의 헬라어 음역이고 “여호수와”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즉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벧전 1:9)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라고 계속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라고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 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창세 이후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질”(빌 1:6) 것입니다.
창조와 보존 사역에서처럼 이 구원 사역도 삼위 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중 한 분이라도 빠지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3-4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버지께서 택하여 주시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택하셨어도 “아들 예수의 피가 없으면 구속 곧 죄 사함”(7절)이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죄 사함이 없으면 당연히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롬 10:1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는다고 고백을 해도 그 믿음과 고백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되고 합당하지 못하면 “약속의 성령으로 보증”(엡 1:13-14)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보증을 받지 못하면 물론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 여권을 가진 내가 미국에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미국을 가고 싶다고 해서 미국 정부가 내게 비자를 그냥 내주지 않습니다. 나는 일단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가서 비자 신청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비자 신청”을 했다고 해도 “비자”를 내주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백만장자라 해도, 유명한 교수라고 해도, 사성 장군이라 해도, 혹 능력이 많이 나타나는 신령한 주의 종이라 해도 “비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비자 신청서류에 기록한 모든 내용들이 미국 정부의 법에 맞아야 비로서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면 하늘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는데 그 “법”이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미국 비자를 신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고 그 믿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시며 그 믿음에 합격되어야 비로서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주시는데 성경에서는 이것을 “성령의 인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으면 그것이 “천국갈 수 있는 보증”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소위 “영접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흔히들 부흥회 같은 데서(예배나 개인전도 때도 마찬가지) 복음을 전한 후에 결신하도록 초청합니다. 그리고 “영접 기도”를 따라 하게 합니다. 결신자들이 각자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자기의 주와 구주로 고백하면, 인도자는 “여러분은 이제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합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러한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접 기도를 했다고 구원 받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십대 때 예수님을 나의 주와 구주로 고백하고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수년 후 독일에 온 후에도 신앙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물론 독일에서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이 어린 한 여자 집사님이 저에게 정색을 하고 물어보는 것이 있었습니다.
“김 집사님! 구원의 확신이 있으세요?”
어안이 벙벙해진 저는 말을 잊고 있다가 이 집사님이 건방진 생각이 들고 화도 나고 해서,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면 주시는 것이지!”라고 하면서 그 여자 집사님에게 대든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그 때 구원의 확신이 있었다면 그 여자 집사님의 질문에 “아멘! 할렐루야!”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로부터 약 십 년 후에 성령세례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참으로 간절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고백했을 때 또는 물 세례를 받는 그 순간 성령으로 거듭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은 셈” 치고 교회를 다니고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소금의 함량이 약 4퍼센트인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과연 우리 교회들은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닌지 반성해야 되지 않을까요?
흔히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 성령을 받았다 즉 구원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면 틀림없이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말은 맞지만 반대로 “동물은 사람이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원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같이 하고 계십니다. 한 분이라도 빠져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일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성자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구원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교회를 통해 구원 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을 성령 시대 또는 교회 시대라고 부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원하면 아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 3:16).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어떤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길”이신 것입니다. 그 “길”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길을 말하며 그것은 오직 “참사람”이며 “참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같이 변화산에 올라갔던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Listen to Him! 마 17:5, 막 9:7, 눅 9:35).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닌 내 아들 예수의 말만 들으라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던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게 하시고 예수만 남게 하신 후 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신 후(요 3:3-5)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부터는 보혜사, 즉 진리의 성령님에 관해 계속 말씀해 주셨습니다(요 14-16장). 부활하신 후에도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보혈을 흘려주시고 이 땅에서의 사역을 다 마치신 후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지 않으면 천국에 올 수 없음을 잘 아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고 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하셨던 것입니다(눅 24:49, 행 1:4-5).
지금까지 아무도 성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며 또한 우리 중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다가 승천하신 성자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 믿는다는 근거는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오직 보혜사 성령님만이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 16:13). 여기서 “모든 진리”는 바로 “예수님”을 뜻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요 16:7-9).
성령님만이 예수를 증거하실 수 있습니다(요15:26).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는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예수를 믿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라고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창조와 보존 사역뿐만 아니라 구원 사역 역시 주도적으로 하시고 또한 마무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 구원 사역의 양대 봉우리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두 주인공은 물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이 두 사건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없는 오순절 사건은 있을 수 없으며 오순절 사건 없는 십자가 사건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이루어졌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는 성자 예수님의 사역, 특히 부활 사건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 역사하신 성령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성자 예수님은 성령님에 의해 잉태되시고(마1:18) 태어나셨다(눅 1:35).
- 요단 강에서 세례요한에 의해 물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께서 비둘기 형체를 가지고 내려오셨다(마 3:16, 막 1:10, 눅 3:22, 요 1:32).
- 세례 받으신 후 예수님은 시험 받으시러 성령님에 의해 광야로 내몰림을 당하셨다(막 1:12, 눅 4:1-2).
-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다(눅 4:14).
- 성령이 임하심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함을, 그리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셨다(눅 4:18-19).
-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셨다(마 12:28, 눅 11:20).
-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흠 없는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히 9:14).
-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롬 8:11).
-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행 1:2).
그 후 오순절에 놀라운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성령님 단독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독”이라는 단어 대신에 “주체적” 또는 “주도적”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지만 이는 스스로 완전한 인격체이신 성령님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 안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삼위 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성자 예수님은 구원 사역에서 차지하는 성령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거역하거나 훼방하면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시고 오직 “성령님”만 두려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마 12:31-32, 막 3:28-29, 눅 12:4-10).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전도를 받고 말씀을 듣고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이제는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요 16:9)이기 때문에 죄인은 천국에 갈 수 없고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를 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어느 나라에서 오랜 가뭄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 나라 정부에서 쌀을 무상으로 갖다 주어 방송으로 광고를 합니다.
“국민 여러분! 한국 정부에서 우리 나라 백성들을 위해 쌀을 무상으로 보내왔습니다. 양식이 없는 분들은 누구든지 와서 이 쌀을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명을 건지시기 바랍니다. 돈은 안 내셔도 됩니다!”
이렇게 했을 때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와서 쌀을 받아가지고 가서 먹고 살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에는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었지만 지금은 “그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굶어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전에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죄인이기 때문에)” 지옥에 갔지만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잠시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그분을 영접한다는 뜻이며 그리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이면 당연히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여기에서 “영접한다”는 영어 단어 “receive”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수를 영접한다”라는 뜻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천 년 전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가 승천하신 성자 예수님을 지금 우리가 어떻게 영접하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오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신다”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요한복음 14장과 15장 그리고 16장에서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면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이고 그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인데 이 “다른 보혜사”가 바로 “영으로 오시는 예수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그리고 16장에서도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절)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절)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즉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속에 계시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영접(receive)의 뜻을 지닌 헬라어는 람바노(lambano)로서 같은 단어가 요한복음 20장 22절의 “성령을 받으라”, 고넬료 가정이 “성령을 받았으니”(행 10:47) 그리고 사도행전 19장 2절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이름 즉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이고 “그를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진실로 믿고 고백할 때 바로 그 순간 보혜사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 아니면 성령을 받아야 구원을 받느냐 하는데 사실은 같은 의미입니다. 마치 동전의 앞뒤나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습니다. 가령 물속에 있는 세균을 죽이기 위해서는 물의 온도가 섭씨 백 도가 되든지 아니면 물이 끓든지 하면 되는데 물이 섭씨 백 도가 되면 물은 끓는 것이요 물이 끓는다는 것은 물의 온도가 백 도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요 이치인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예수를 믿으면 성령은 받게 되어 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히 4:12)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엡 6:17). 검이 아무리 좋아도 검의 주인이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좋고 능력 있어도 그 말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어 그 말씀을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우리가 자유케 되는 것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입니다(고후 3:17).
평강의 왕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읽거나 들었다고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충만히 거하실 때 비로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서신서 여러 곳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임하셔야 은혜와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은혜의 성령님”(the Spirit of grace, 히 10:29)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6)
“성령님은 삼위 일체의 모든 사역을 완성시키시고,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아무도 성령님에 의하지 않고는 인자에게 갈 수 없으며 성령님이 그에게 인자를 증거하지 않는다면 인자를 알 사람은 없는 것이다.”
또한 홍인규 박사는 그의 논문 “바울과 성령”에서 “구원은 믿는 자의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완성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7)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시는데 성령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제 9 장 성령과 인침
“성령과 구원” 장에서 “성령의 인침”은 “구원의 보장”이 된다는 말씀을 간단히 했습니다만 성령의 인침에 대한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1:13-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이러한 성경 말씀을 볼 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요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은 천국 가는 확실한 “구원의 보증”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인친다”라는 말은 “도장을 찍는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내 것이다” (you are mine, 사 43:1)라와 같이 소유 개념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5절을 보겠습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이 말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의 확실한 보장”이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소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들도 모두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침은 바로 구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 10 장 성령과 중생
먼저 여기서 “중생”(=거듭남)이라는 단어는 “성령으로 거듭남”이라는 뜻으로 사용함을 밝힙니다. 우리는 중생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신학자나 목사들도 한결같이 인정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요 3:3-5). 다시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기 위해서 즉 천국 가기 위해서 왜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성경 말씀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솜씨로 지음을 받았던 아담과 이브는 뱀의 모양을 가지고 나타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창 3:1-19). 그래서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벧후 2:19)는 말씀과 같이 아담과 이브를 비롯해서 그 후에 태어난 모든 자손들은 마귀의 종이 되었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원죄)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 모든 인류는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지옥)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하고 또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라고 했으며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다” (골 2:13)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5절에서 이보다 더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며(창 6:5),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며(창 8:21) 그래서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게 되었고(전 9: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요(렘 17:9),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광패(막 7:21-22)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죤 칼빈은 이것을 “인간의 전적부패 혹은 전적무능”이라 했고, 계속해서 그는 “부패는 인간의 모든 부분 즉, 그의 몸과 영혼에 뻗쳐 있고, 죄는 인간의 기능 모두(전체)를 오염시켰다. 그의 마음, 그의 의지 등을 말이다. 이런 타고난 부패의 결과로서, 자연적인 인간은 영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 간단히 말해서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죄 중에서 죽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8)
그러면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인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은 “결코 할 수 없다”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다시 일으키고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유명한 의사라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어떤 지식이나 지혜로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육 제도가 좋고 사회적, 역사적, 과학적, 문화적 지식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벧전 1:23). 곧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날 수 있는 것입니다(요 1:13). 그래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딛 3:5-6)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셨으며(엡 2:1+5)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엡 2:8). 그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나는 것이 바로 중생이고 성령은 우리 영에게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 3:5-6). 우리의 죽은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우리의 전체가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 이요 또한 구원의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사랑에 있다. 이러한 인자하심과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우리에게 오신바 되시고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중보를 연결시키시는 유효적이며 직접적인 요인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성이 유효적으로 회복되고 중생의 씻음이 되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정화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분이시오 중생의 창시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9)
중생 역시 성령의 인침과 같이 구원의 보장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중생의 시기에 대해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령의 인침과 특히 성령세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만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관계를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중생과 성령세례를 모두 구원의 보장으로 보고 있으며 그 받은 시기도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중생과 성령세례가 모두 구원의 보장은 되지만 그 받은 시기는 다르다는 것이고 또 한편의 학자들, 특히 오순절 계통의 학자들은 중생은 구원으로 보지만 성령세례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중생한, 즉 구원 받은 성도들이 받는, 또는 받아야 할 소위 제2의 축복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구원의 보장임은 물론 받은 시기도 동일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의 의견에 대한 반론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설명하기 쉽게 a 와 b로 구분하겠습니다.
a. 중생과 성령세례는 동일한 구원의 보장이지만 그 시기는 다르다는 주장
b. 성령세례는 구원과 상관이 없고 중생한 성도들이 받는 제2의 축복이라고 하는 주장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세례”만을 의미하기로 합니다.
a항의 학자들의 주장은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 이미 중생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중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하는 것도 구원이요 오순절 성령세례도 구원이라고 한다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원을 두 번 받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는 과연 구원을 두 번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구원은 한 번만 받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b항의 오순절파 학자들도 오순절 성령세례를 제2의 축복으로 보는 것 외에는 중생을 오순절 성령세례 전에 받았다고 하는 주장은 a항의 학자들과 같습니다. b항의 학자들의 주장이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것은 나중에 “성령과 세례” 장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중생의 시기에 대해서만 다루겠습니다.
제자들이 오순절 전에 중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는 다음의 성경 구절들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둘째,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셋째, “예수께서 가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10).
넷째,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첫째 항에 대해서는 “성령과 구원” 장에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반드시 고백합니다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다고 다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얼마든지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7:21).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항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통해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 때 중생했다면 그 다음에 바로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며,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되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고 자신을 저주했지만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천국 소망이 있는데 그럴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셋째와 넷째 항의 주장은 “깨끗하여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미 중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즉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어떠한 말씀으로 깨끗하여졌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성찬식까지 다 마친 다음에 나가서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졌다면 가룟 유다는 왜 깨끗해지지 않았는지요. 그 이유는 그 때까지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좀더 부연 설명을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예언)이 확실히 이루어질 때에는 그 시제를 미래가 아닌 과거나 현재완료형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 40장 2절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현재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영어로 보면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Speak tenderly to
여기에서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이 약 750년 후에 일어날 미래,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약 750년 후에 일어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확실한 예언이기 때문에 미래 시제가 아닌 “죄 사함을 입었다”라는 현재완료 시제를 쓴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때도 “권세를 주셨다”에 영어 give의 과거형인 gave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확실한 예언이기 때문에 미래형이 아닌 과거형을 쓴 것입니다.
한 군데만 더 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는데 “세상을 이기었노라” 할 때의 “세상”은 물론 “이 세상 임금인 마귀”(요 16:11)를 뜻하는 것이고 그 마귀의 권세는 “사망권세”(히 2:14)인데 이 사망 권세를 이긴 때는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너무나 확실한 예언이기 때문에 “이겼다!”(I have overcome!)라고 현재완료형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오순절 전에 벌써 중생했다면 죽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데 목숨이 아까워서 주님을 버리고 도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앞으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이 거듭나게 될 것을 확실히 아셨기 때문에 “너희는 이미 깨끗해졌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물과 불과 바람으로 상징된 성결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 오셔야 비로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사 4:4).
또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했을 때 중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창조 시 성령이 입김을 불어 넣어 첫 사람 아담이 산 영이 된 것같이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살려주는 영”으로서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사명을 주시는 일종의 행동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이와 비슷한 행동 예언을 한 것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행 21:10-14). 나중에 일어날 일을 행동을 통해서 예언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왜 그 즉시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예수님 만나기 이전 상태, 즉 고기잡이로 돌아갔는지(요 21:3)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성령을 받았다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행 1:4-5)도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중생 즉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이요 이것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신 오순절 성령강림(성령세례) 때 처음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은 성령세례이고 성령세례는 중생이며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고 단지 다른 각도에서 본 것입니다.
제 11 장 성령의 세례
먼저 “성령세례”라는 단어는 원래 성경에는 없는 것이지만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오순절 학파가 주장하는 것, 즉 성령세례는 구원과 상관이 없고 중생한 성도들이 받는 제2의 축복이라는 주장이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세례야말로 구원의 확실한 보장이 된다는 것을 성경 말씀을 근거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순절 학파들이 잘못한 것 중 첫번째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성령의 외적 역사만 바라보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충만”이라는 단어와 “방언”이라는 은사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모인 제자들은 성령 충만했고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왜, 무슨 이유로 그들을 성령 충만케 하셔서 방언을 주셨는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하나며(고전 12장) 또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도 됩니다(막 16:17). 사실 방언은 구원과 상관은 없지만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방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10:45-46, 19:6).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 다른 은사들은 구약 시대에도 다 있었는데 이 방언과 방언통역만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비로서 나타납니다.
그 옛날 언어를 흩으셨던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세대에는 영적인 언어로 통일시키기 원하시는 깊은 뜻이 있으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표적도 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자체만 볼 것 같으면 방언 같은 새로운 표적을 보여주실 때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오순절 학파들은 방언과 같은 외적인 역사를 통한 성령님의 내적인 역사 다른 말로 하자면 내적인 변화 즉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를 간과한 것입니다.
오순절 학파는 두 번째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단순한 성령강림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약속하셨던 것임을 간과했습니다.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바로 그 전에 성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결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도 이것이 증거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즉 “성령세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성령세례는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약속의 말씀 중 한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 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7-21).
베드로 사도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설명하면서 요엘 2장 28절의 “그 후”를 “말세”로, 32절의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주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으로 바꿔서 말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비단 요엘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나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강림에 관한 그 많은 예언의 말씀들을 일일이 다 인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 군데만 더 참고하겠습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the Spirit)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사 32:15).
“또 ‘내 신’(my Spirit)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도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7).
구약에서 수없이 약속된 말씀이 바로 “백성과 하나님 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입니다. 그 내용인즉 앞으로 새 언약, 더 좋은 언약을 줄 터인데 그것이 바로 참다운 “하나님과 백성” 관계이며 이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도 유효하다는 것인데(계 21:3+7) 이것은 오직 “내 영”이나 “내 신” 즉 “하나님의 영”이시자 “여호와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성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학파들은 세 번째로 성경에서 수없이 약속했던 “성령세례”의 목적이 “은사”가 아니라 바로 “구원”인 것을 간과했습니다. 보수적인 신학자들 중에서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나오는 “성령의 세례”는 구원과 동일하게 보고 있지만 오순절 성령세례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을 분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그 분들에게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단지 능력이나 여러 가지 은사만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 되풀이하여 약속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물론 신약 시대에 와서도 수많은 선지자들과 주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 기적과 이사와 표적들을 행했는지 성경이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약속을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능력을 주실 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구태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도, 그 때가 아니라도 능력은 얼마던지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만 하더라도 오순절 이전에 이미 수 많은 능력을 행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었고(마 10:1+8, 막 6:7+13, 눅 9:1, 10:17-19) 베드로는 심지어 성령의 능력으로 유사 이래 물위를 걸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야말로 종말론적인 사건이요, 성령의 능력으로 땅 끝까지 증인이 되기 위한 사건이요 그 목적은 바로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극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사건이 바로 성자 하나님의 동정녀 탄생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시고 죽으신 후 부활 승천하지 않으면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메시아=그리스도=구세주”에 대한 약속을 “새 영”에 대한 약속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해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이고, 신약성경은 “메시아가 오셨고 다시 오실 것이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반드시 외아들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정녀에게 탄생케 하시고 천사를 통해 말씀 하셨습니다. “아들을 나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 1:21).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주신 분명한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일 크고 중요한 목적은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여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 나오는 세례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증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가 헤롯 왕에 의해 죽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물로 세례도 주었지만 그의 주된 사명은 “메시아 되신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가 증거한 첫번째 사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입니다. 그 뜻은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시고 피를 흘려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2).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법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히9:22)는 말씀대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내 대신 누군가가 피를 흘려줘야 하는데 황소나 염소의 피로는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하고(히 10:4) 오직 “죄가 하나도 없으신”(히 4:15, 벧전 2:22, 요일 3:5) “예수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할 수 있기 때문에(히 9:12, 요일 1:7)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가피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해내기 위해 잡아서 피를 흘리게 했던 바로 그 “유월절 양”이라고 했던 것입니다(고전 5:7, 출 12:1-12).
그런데 문제는 그 어린양이신 아들 예수님이 피를 흘려주신 것만 가지고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흘리시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미 다 구원을 받았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또다시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다시 말해서 성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첫째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둘째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 복음서 기자가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그 내용이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하므로 네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모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요 1:33).
NIV 영역으로는 모두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으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은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으로 모두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같은 말씀이 사도행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행 11:16).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미래수동태인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we we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
이것은 이미 성령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과거수동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증거대로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성자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 하셨지만 간접적으로 성령세례에 대한 말씀을 한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여기에서 왕권(영어로는 kingdom으로 왕국이란 뜻)이란 다스리는 권세이며 천국의 왕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오실 보혜사 성령님(이사야 61장 1절에는 영어로 ‘the Spirit of the Sovereign LORD’로 ‘최고의 통수권자 여호와의 영’이라는 뜻=필자 역)을 뜻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16-23절에서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이자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가 오시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
이 말씀 또한 요한복음 3장 3-7절에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성령세례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성령에 대한 구절이 많은데 특히 “보혜사”란 단어를 주시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7장 38-39절에서 성자 예수님은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외쳐 말씀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는 “진리의 영”이신 “다른 보혜사”(another Counselor)가 오시면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혜사(요일 2:1, Parakleto=대언자)라고 하시며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영어에서 another 란 단어는 본질은 같지만 모양이나 형태가 다른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아라비아산 말과 몽고산 말이 있을 때 다 같은 말이지만 산지가 다르기 때문에 another horse(다른 말)이고 본질이 완전히 다를 때는 other 란 단어를 씁니다. 예를 들어 말과 소는 같은 동물이지만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other animal(다른 동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라고 하신 것은 “보혜사 성령님”이 자기와 똑같은 본질과 성품을 가지셨으나 형상으로서가 아닌 “영으로 오실 보혜사”란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다음,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후 영광을 받으셔야만 보혜사를 보내실 수 있다는 뜻으로 요한복음 7장 39절 말씀을 보충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3절에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하신 것이고, 성자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처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수의 강”같이 들어오신 사건이며 그렇게 성자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이룬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어가 또 있습니다. 어쩌면 “보혜사”란 단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에서 “내 이름”이란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 곧 성령=필자 역)
다시 말해서 성령님, 곧 보혜사가 오실 것인데 그 보혜사 성령님은 “내 이름” 즉 아들의 이름인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 이름”을 가지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비로서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령세례와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는 그가 피를 흘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후 그 예수라는 이름을 성령님께 주셔서 이제는 보혜사가 되신 성령님을 120문도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 주셔서(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권능”이라는 단어의 뜻을 밖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오순절 학파와 같은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구태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라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권능 중의 권능” 혹은 “기적 중의 기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한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입니다. 한 영혼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귀한 생명입니다. 설령 내가 그 어떠한 능력을 행한들, 심지어 말 한마디로 온 천하를 창조할 수 있고 또 없이할 수 있을지라도 내 영혼이 지옥에 간다면 그 능력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은 바로 “예수 이름”을 소유하는 것이고, 그 “예수의 이름”이 내게 있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고 내가 가진 “예수의 이름”을 나누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이미 능력을 받고 귀신들도 쫓아냈지만 그 안에 아직 “예수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모두 도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실된 마음으로 예수를 믿었고(요2:11+22-23),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결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마 26:35, 눅 22:33, 요 13:37).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울 때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몇 번씩 만나보고 대화도 했던 그들이었지만 결국 예수님을 만나기 전 상태, 즉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예수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성자 하나님께서도 살아 계셨을 때에는 그 이름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야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그 이름을 주실 수가 있었고 그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서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마지막 말씀 “증인이 되리라”는 영어로 “will be my witnesses”이며 미래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증인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여기서는 명령형이 아니고 “내 증인들이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 이름을 가지면 그 이름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엡 1:21, 빌 2:9-10) 죽을 때까지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증인”의 헬라어 “마르튀스” martus는 순교자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예수 이름으로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후 거의 모든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으며 사도 바울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행 21:13). 그래서 다음의 성경 말씀들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 15:26-27).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계 22:17).
위의 말씀들은 모두가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신부이자 교회인 우리가 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님은 오직 예수만을 증거하러 오셨고 예수님은 오직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만 증거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복음(예수)을 전하고 있는가, 또 전도를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처음에 은혜 받고 난 다음에 열심으로 전도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성령충만이 떨어질 때 전도의 열심도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위해서 더욱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때 많은 경우 성령님의 은사도 같이 나타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계속해서 제자들을 통해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은사를 자신들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예수의 이름”을 증거함으로 저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주어서 구원 받게 하는 데 썼던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갔던 제자들이었지만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의 이름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예수 이름의 권세”가 얼마나 큰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걸으며”(행3:6-7).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이 낫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며”(행 4:30).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행2:38, 8:16, 10:48, 19: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전할 때 수천 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며”(행 2:41, 4:4).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 바로 예수이며”(행 4: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예수)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행 2:21, 롬 10:13, 욜 2:32, 시 116:4).
“하늘에 있는 자들과(천군 천사들) 땅에 있는 자들과(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 땅 아래 있는 자들(마귀와 그 부하들)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으며”(빌 2:10).
이와 같이 엄청난 권세가 있는 이름이기 때문에 마귀는 “예수의 이름”을 제일 싫어할 뿐만 아니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할 뿐만 아니라(행 4:18+28, 5:40) 그 이름을 사용할 때 핍박도 하는 것입니다(행 5:41, 벧전 4:14). 마귀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의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떨어지게 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의 이름”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님의 인침”, “성령으로 거듭남(중생)”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성령세례)”, 이 세 가지 성령의 역사가 모두 “구원”과 동일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동시에 그들은 “중생” 하는 것이요 그것이 또한 “성령의 인침”인 것입니다.
성경에 “중생”이나 “성령의 인침”보다 “성령세례”란 말이 더 많이 기록된 이유는 창조주이시고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어 육신의 제한을 받으셨고,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누명을 쓰셨고, 고통과 상관이 없으신 분이 모진 고통과 고난을 받으셨고, 특히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지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는 정 반대편에 계셔야 했던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시어 우리를 위한 크신 사랑을 보여주셨던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쓰셨던 방편이 바로 “성령세례”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아버지께로부터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보내신다” 혹은 “부어주신다”라고 하신 뜻을 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보다 열등하거나 인격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동등하신 위격이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 이름”을 가지고 오시며, 이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며, 보혜사 성령님은 택한 영혼들 안에만 들어오셔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혜사 성령님은 창세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엡 1:4) 아들 예수에게 보내시어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만 오시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 6:37-40+65).
오순절 때 있었던 성령강림(성령세례) 사건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해도 “성령세례’는 지금도 세계 방방곳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잠시 “불세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자는 성령세례를 받을 때 “불세례”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상령세례를 받는 사람에 따라 몸이 뜨거워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의 “불세례”는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판을 의미합니다. “불세례”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고 바로 이어지는 절에 보면 알곡과 쭉정이 이야기가 나오며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세례를 받은 경우가 다섯 번 나옵니다.
첫째로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한 장소에서 온전히 기도에 힘쓸 때 성령님이 오셨습니다(행 1:14, 2:1).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는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8:7, 9:17, 19:6).
다섯째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행 10:44).
위 다섯 번의 경우 외에 베드로 사도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행 2:38)고 했으며,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눅 11:9-13).
위의 모든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말씀”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 가정을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는 모두 기도의 결과입니다. 회개기도, 안수기도, 합심기도 등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계실 줄 믿습니다.
제 12 장 성령과 교회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제일 크고 중요한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눅 19:10)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얻기 위해서”(롬 8:15-19)이며 또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요일 3:8)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행 9:15, 롬 9:17, 출 9:16, 신 32:3). 한 마디로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 일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서 성자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반석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요, 예수님의 이름이요 그리고 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하는 성도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리니”는 영어로 “I will build my church”이며 미래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내 교회”가 언제 세워졌느냐 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처음 오셨을 때 즉 오순절 성령강림 때였습니다. 혹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광야 교회(행 7:38)를 들어서 구약 시대에도 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 광야 교회는 영어로 “assembly in the desert”라 하여 일종의 대회 혹은 총회라는 개념이지 예수님께서 목적하시고 의도하신 교회(헬라어=ekklesia)는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서 교회론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본 성령님과 교회의 관계를 말씀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교회에 대한 다른 명칭들이 나옵니다. 많은 학자들도 이러한 명칭들을 교회의 다른 이미지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첫번째 “하나님의 백성” 대신에 “하나님의 자녀”를 가지고 다음의 세 가지로 정의하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a. 하나님의 자녀(요
b.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 1:22-23, 골 1:18+24)
c. 성령의 전(고전
그런데 성경에서는 교회(church)를 부를 때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혹은 God’s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고전 1:2, 10:32, 11:16+22, 고후 1:1, 살후 1:4, 딤전 3:5 등).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의 교회”, “아들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교회”로 풀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삼위 하나님의 교회와 위에 기술한 교회의 세가지 다른 이름(이미지)이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교회의 첫번째 이미지인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권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자녀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자녀”(children)라는 말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만 “자녀”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 할 때의 “하나님”은 “아버지” 개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자녀)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아버지와 아들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거나 증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가 우리를 낳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낳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우리 부모가, 내 아버지가 “이 아들은 내가 낳은 내 자식이요”라고 인정할 때에만 비로서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히 1:5, 5:5, 시 2:7)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겠습니까? 바로 “성령으로 인”을 쳐 주시고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 서부의 대 목장주가 자기 소유의 소 엉덩이에 자기의 이름 첫 자(initial)를 인두로 지져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stigma)을 남기는 것같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성령으로 인”을 치셔서 우리를 그의 영원한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목사님들을 위한 성령론 세미나를 할 때 위와 같은 비유를 이야기해 드리는데 할 때마다 빨리 이해해서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아프리카에 가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직도 얼굴에 흉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흉터의 모양이 다 다른 것입니다. 제가 한 목사님에게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얼굴에 있는 흉터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네, 이것은 우리가 같은 가족이라는 뜻이지요.”
즉 같은 종족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같은 종족끼리는 그 흉터의 모양이 같습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보통 수십 종족들이 섞여 살고 있으며 아직도 풍습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서 말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다니는 부르키나 파소만 해도 약 70여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는 서로 다른 종족끼리 서로 싸우는데 옛날에는 얼마나 더 많이 싸웠겠습니까? 얼굴이 모두 검은 그들이기에 상대방 종족과 자기 종족을 구별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종족 표시를 하기 위해서 제일 잘 보이는 얼굴에다 같은 모양의 흉터를 낸 것입니다. “너는 우리 가족이다!”라는 소속 내지 소유 개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셔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바(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롬 8:14-16) “그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갈 4:6). 한번 자녀가 되면 영원히 자녀이듯이 예수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님이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그래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요 14:16).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는데(갈 6:17)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이고 “예수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을 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이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의 개념은 몸을 가시고 이 땅에 오셨던 “아들 하나님”과의 관계로서의 “몸”입니다. 아들 하나님은 육신의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교회를 자신의 몸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지체)이 되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으며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우리를 자기의 몸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교회의 세 번째 이미지는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의 “전”은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전”이 됩니다. “성령의 전”이란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 전 혹은 집”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몸은 “성전” 즉 “거룩한 집”이 됩니다. 흔히 구교에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성인”이란 칭호를 주는데, “성인”이란 다름이 아니고 “성령님”을 모신 사람이 바로 “성인”(saint, 약자로 St.)인 것이요 그러한 무리를 “성도”(saints)라고 하며 성경에도 여러번 나옵니다. 성도란 다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모두는 각각 “성인”인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셨습니다(요 2:19-20).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떻게 하여 우리를 성령의 전으로 만드시겠습니까?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시키셔서 “성령의 전”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로 만드셨는지 살펴봤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위 하나님 구원의 방법 교회의 다른 이름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인침 하나님의 자녀
아들 하나님 성령으로 세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성령 하나님 성령으로 중생 성령의 전
다 같은 의미이고 구원 받는 것이지만 삼위 하나님의 입장에 따라 교회를 만드시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인침)이 필요하고 아들 하나님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세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 모두가 똑 같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중에서 제 삼위이신 성령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잠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0-1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남자는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그 육체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같은 언약을 계속 되풀이해서 해주십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신 10:16, 30:6, 렘 4:4).
우리는 이 말씀이 신약에 와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뜻은 참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그 할례는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신령은 성령을 뜻함). 그래서 성령을 거스르면 마음에 할례를 받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행 7:51).
교회의 또 다른 이미지인 “하나님의 백성” 관계도 역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 될 자격이 없고 결국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백성이나 성도는 물론이요 교회의 감독자(overseer)를 뽑아 양 떼들의 목자를 삼으시는 분도 역시 성령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행 20:28).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예수의 이름”을 가지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성령세례”이고 그것이 바로 “중생”이며,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인치는 것”이고 이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참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며,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 13 장 성령의 이중사역
지금까지 여러 가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실상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뿐 아니라 저 우주나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성령님의 간섭 없이, 그 분의 역사 없이, 그 분 모르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역도 실제로 성령님께서 하신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하시는 대부분의 일이 영혼 구원과 관계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일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을 고치는 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여기서는 “성령의 이중 사역”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미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약간 불분명한 점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제의 성경 말씀은 요한복음 7장 39절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 앞절 3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을 반복, 확인해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영생을 주는 생명수”(water of life, 계 22:17)요,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생수의 강”인 것입니다. “흘러나리라”는 영어로 “will flow”이며 미래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어 39절에서 이 “생수의 강”은 믿는 자가 앞으로 받을 “성령”이라고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받을 성령”이니 그 당시에 “성령”이 저들에게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구절을 뒷받침하는 말씀들이 계속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영어로 보면 미래시제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And I will ask for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Counselor to be with you forever-the Spirit of truth. The world cannot accept him, because it neither sees him nor knows him. But you know him, he lives with you and will be in you.”
이어 요한복음 14장 26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미래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will send)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will teach)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will remind) 하시리라.”
계속해서 15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will send)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will testify).”
16장 7절 하반절에도 미래시제입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will not come)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will send).”
이제 누가의 기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I am going to send)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49).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하셨느니라”(행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But you will receive power)”(행1:8).
모두 미래시제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당시에는 아직 “성령님이 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그 때 당시와 그 이전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아니 분명히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창조 사역을 감당하셨던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님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여러 가지 다른 명칭을 가지고 역사하셨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성령님은 처음부터 역사하셨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성자 예수님의 잉태(마 1:20, 눅 1:35)
- 세례 요한의 잉태(눅 1:15)
-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눅 1:41)
-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눅 1:67)
- 시므온(눅 2:25-27)
- 예수님의 세례(마 3:16-17, 막 1:9-11, 눅 3:21-22, 요 1:32-34)
- 예수님의 광야 시험(눅 4:1)
- 갈릴리에서 돌아오심(눅 4:14)
- 성령으로 기뻐하심(눅 10:21)
-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심(마 12:28, 눅 11:20)
사도 요한은 분명히 성령님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러면 성령님이 두 분이시란 말입니까?
영국에서 공부하셨다는 어느 흑인 목사님 한 분은 자기는 실제로 성령님이 두 분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친 교수의 자질도 문제이지만,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능히 그럴만한 소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성령님이 두 분이신가요?
아니지요. 성령님은 분명히 한 분이십니다(고전12:13, 엡 2:18, 4:4). 단지 성령님의 사역이 이중적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뿐이며 이 이중적인 사역은 보혜사 성령님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 오신 후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님의 이중 사역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외적 역사(outer works)와 내적 역사(inner works)로 구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외적 역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마다 택하신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외적 역사는 성령님의 “사역적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세, 여호수와, 삼손, 기드온, 다윗, 솔로몬, 사무엘, 베드로, 요한 그리고 바울등 모든 예언자, 선지자 및 사도들을 사용하실 때 실제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적인 역사는 보통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나고 물리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러나 구원과 상관이 없고 일시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삿 13:25, 14:6+19, 15:14). 그런데 16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the LORD)는 “여호와의 신”(the Spirit of the LORD)을 의미하며 성령님은 일단 임하셨다가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같은 말씀이 삼무엘상 16장 14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필요할 때 주시지만 필요 없을 때나 쓰임 받지 못할 때는 떠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후 성령이 떠나시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your Holy Spirit)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시 51:12). 히브리서 6장 4-6절과 10장 26-31절에 보면 심히 두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님들이 위의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 때문에 논란이 있는 줄 압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구절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어도 놓친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 좀 했다고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롬 8:35)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한 번 들어오시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놓친다고 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아예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은 셈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들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성령님의 외적 역사로 말미암아 큰 능력을 행한 종들의 타락을 말하고 있고, 그런 사람들은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무서운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행했던 종들이 타락하는 것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성령훼방=신성모독, 마 12:31-32, 막 3:28-29, 눅 12:10, 행 7:51).
단지 외적인 성령의 은사만 추구하면 안 되고, 실제로 능력을 많이 행하는 주의 종들은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후 15:3). 다시 말해서 자신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령님의 은사로 말미암아 얻은 많은 능력을 자기의 유익으로 삼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받고 크게 부흥했을 때 타락한 주의 종들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타락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를 열심히 잘 나갔고 직분도 받고 하는 중에 능력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많은 물질이 쌓일 때 그것을 자기들의 유익으로 삼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맛본 후 타락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외적 역사는 물론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며 전적으로 성령님의 뜻에 따라 나누어 주십니다(고전 12:4-11). 그래서 소위 “은사 개발”이란 말도 잘 분별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 데로 여러 가지 은사와 달란트를 주십니다.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잘 개발하여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소위 “영적인 은사”(영어로 manifestations of the Spirit 혹은 spiritual gifts)는 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그 분의 뜻대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령님의 은사는 끝이 났고 더 이상 없다고 하나 성령님의 은사는 지금도 세계 방방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들은 이 땅에서만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성령님의 외적인 역사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계에서 흔히 쓰는 “성령체험”이라는 말도 분별하여 조심해서 쓰던지 아니면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성령체험을 한 것을 가지고 자칫 구원 받은 것과 같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순절 계통에서는 방언을 하면 구원 받은 것으로 말하는데 물론 구원 받은 사람이 방언을 할 수도 있고 또 성령세례를 받을 때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한다고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 12:30).
다음은 성령님의 내적 역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내적 역사는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보이지 않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같이 질적인 변화요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이 변화하므로 성령님의 “인격적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역사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요14:16). 이 성령님의 내적 역사는 우리의 힘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엡 2:8-9).
이 성령님의 내적 역사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 받음”이요 “성령으로 거듭남”이요 또한 “성령의 인침”인 것입니다.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의 내적 역사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갈 5:22-23). 이 성령의 열매야말로 성령님의 성품이요 예수님의 성품이요 또한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성령님의 내적 역사를 경험해야 하고 아울러 외적 역사(은사)도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2:31, 14:1).
그런데 성령님의 외적 역사와 내적 역사는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바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던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령님의 이중 사역에 대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전12:4-13).
위 말씀 4절의 “성령”(the Spirit), 5절의 “주”(the Lord) 그리고 6절의 “하나님”(the God)과 같이 각각 다르게 표현한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령 여기서 “주”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이해하여 삼위 일체 하나님의 동시적인 사역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 나오는 문맥과 연결해보면 계속 “한 성령”이라고 한 것같이 위에 나오는 “주”와 “하나님”을 “성령”으로 이해하면 훨씬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의 “주”도 그리고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은사”와 “직임” (service=봉사)과 “역사”(working)를 주시고, 하게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11절까지는 성령님의 외적 역사인 은사가 나와 있고, 이 은사는 아무나 다 받는 것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 성령님의 뜻대로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그 사람들이 다 능력을 행하거나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2:29-30). 그리고 12-13절은 성령의 내적 역사로서 성령의 세례를 말하고 있고 이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한 몸”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외적, 내적 역사를 간단히 도표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적역사 내적역사
물리적 변화(예:물/얼음/수증기) 화학적 변화(예:물/포도주)
외적으로 나타남(능력, 병 고침) 안에서 변화함(죄인-의인)
일시적(삿16:20,시51:11,히6:4-6) 영구적(요14:16)
성령님의 뜻대로 주심(고전12:11) 은혜의 선물(엡2:8-9)
필요에 따라 주심 일회적(세례, 중생, 인침)
성령의 은사로(고전12:4-11) 성령의 열매로(갈5:22-23)
이 세상에서만 필요 이 세상과 천국에서 필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말씀하셨던 “생수의 강”이란 다름이 아닌 “예수 이름”으로 오실 “보혜사 성령님”을 뜻한 것이었고 오순절 성령강림 때 비로소 오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님의 이중 사역은 계속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 14 장 성령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한 것은 성령의 이중 사역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혹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이미 발간된 다른 성령론 책을 참고하시고 여기서는 추가로 몇 가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제일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 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기쁨)과 평강(화평, 평화)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열매는 영어로 “fruit”이며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 열매 안에 아홉 가지의 다른 성품이 동시에 같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가령 사랑은 나타나는데 기쁨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마음에 기쁨은 넘치는데 평강이 없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 희락 평강 :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인내 자비 양선 : 자기 이웃과의 관계
충성 온유 절제 : 하나님과의 관계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을 때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사랑과 희락과 평강인 것입니다.
참고로 NIV 영역을 같이 보시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사랑(love)
희락(joy=기쁨)
화평(peace=평강, 평화)
오래 참음(patience=인내)
자비(kindness=친절)
양선(goodness=선함,착함)
충성(faithfulness=신실, 성실)
온유(gentleness=상냥함, 관대함)
절제(self-control=자제, 극기)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주님은 “성령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의 내적 충만 즉 성령의 열매를 충만하게 맺으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의의 열매, 기쁨의 열매 등 열매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열매중의 열매야 말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위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시고 여러분의 성령 충만 여부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랑에 대한 정의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잘 살펴 보면 됩니다. 그 사랑도 사랑의 모든 성품이 다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충만하게 맺어서 예수님을 꼭 닮으시길 바랍니다.
제 15 장 성령의 은사
이 성령의 은사도 “성령의 이중 사역”을 참조하되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시면 다른 성령에 관련된 책을 보는 것이 좋겠고 역시 추가로 몇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식의 말씀의 은사”(고전 12:8)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분이 아는 지식 중 일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이스라엘과 아람이 싸울 때 엘리사 선지자는 아람 군대의 모든 움직임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함으로써 싸울 때마다승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님께서 그분이 아는 지식을 엘리사에게 알려주신 경우입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고전 12:8)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3장에 보면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나옵니다. 솔로몬은 두 여인에 대한 사정을 몰랐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왕상 3:28) 지혜롭게 판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의 신”(사 11:2)이신 성령님의 은사였습니다.
그 외 다른 은사들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만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언은 성령님의 은사이면서 또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막 16:17-18)도 됩니다. 그러나 믿음 또한 성령의 은사(고전 12:9)임을 생각할 때 그 믿음의 표적도 모두 성령님의 은사라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에 대해 설명드리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말 “방언”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방언”이란 “지방 사투리”를 의미하며 성경에도 이와 같은 뜻으로 쓰인 곳이 많습니다. 구약 히브리어 “lashon”(창 10:5)이나 “saphah”(사 19:18)는 공히 “방언”으로 번역이 되었고 영역에서도 “language”(NIV, NKJV, NASB)로 되어 있어 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번역에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지방 사투리”란 의미의 “방언”은 헬라어로 “dialektos”인데 사도행전 2장 6절과 요한계시록 7장 9절 등에 나와 있고 위 영역 본에서도 모두 “language”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glossa”까지 모두 “방언”으로 번역한 것은 무리인 것입니다. 위 영역 본에서는 모두 “tongues”로 되어있고 독일어 번역에서도 “혀가 말한다”는 의미인 “Zungenreden”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1절에도 “glossa”가 나오는데 전후 문맥을 보면 6절에 나오는 “dialektos”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앞으로 나오는 “방언”을 모두 “혀가 말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우선 방언은 아무도 그 의미를 아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 사람의 혀를 움직여서 그 사람의 영이 비밀을 하나님께 고하기 때문입니다(행 2:4, 고전 14:2).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가 모르는 외국어를 하는 것도 방언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위의 성경 말씀이 틀리게 됩니다. 혹자는 사도행전 2장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 말로 이해했다는 구절을 들어 소위 외국어 방언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이것 역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성경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저는 그 방언을 듣는 사람들이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저들이 술 취했다고 조롱을 했는데 그들은 방언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제자들을 포함한 120문도가 각각 다른 나라 말로 말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수십 가지의 다른 외국어를 한꺼번에 말할 때 아무리 자기 나라 말이라고 해도 알아듣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또 어떤 부흥 목사님들은 사람들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시면서 방언으로 기도하신 다음 그 방언을 통역해 줍니다. ‘사랑하는 딸아, 혹은 사랑하는 아들 아…” 이것 또한 성경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방언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하지만 방언 역시 말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면 안 됩니다(고전 12:31, 14:1+4+39). 사도 바울은 자기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는 것을 감사했습니다(고전 14:18). 그러나 교회에서 방언으로 말할 때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합니다. 통역이 없을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권합니다(고전 14:14-15). 방언으로 말하거나 기도할 때 내 영이 활발해지고 영감과 영력이 강해집니다. 내 자신에게 덕이 됩니다.
다음에는 “예언”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예언”의 뜻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요16:13)이겠습니다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21, 계 1:2-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거의 모든 말씀은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이었고 이 예언은 이미 거의 다 이루어졌고 또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더 큰 은사 중에서 특별히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셨을까요?(고전 14:1+4+39)
그 이유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믿음으로 선포한 모든 말은 예언이 되며 이 예언은 틀림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히:dabar, 헬:logos)의 능력은 우리가 하는 “말”(히:dabar, 헬:logos)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 14:28)고 하셨고, “입술의 열매를 짓는(창조하는) 나 여호와”(사 57:19)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입을 크게 열 때 그 분이 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시 81:10).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교회에 대해서, 모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자녀에 대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으로 선포한 모든 말은 예언이 되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면 놀라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자녀들에게 유익이 되고 덕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4:3-6).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예언을 사모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방언, 방언통역 그리고 예언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한번 받으면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은 위 세 가지 은사의 사용법을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자세히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은사를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을 따라 구해야”(고전 14:1)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소위 “은사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장”인 13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 제일 먼저 나타나는 성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내적 역사인 열매를 충만하게 맺은 다음에 성령님의 외적 역사인 은사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은사는 열매를 맺기 위한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한 성령님의 방편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 “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이지만 “성령의 나타남”이라고 표현하는 것같이 성령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방편도 됩니다. 비단 주의 종뿐만 아니라 거듭난 성도라고 할 때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어찌 참다운 신앙생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16 장 성령의 충만
신약성경에는 두 종류의 성령 충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로는 다 같이 “충만”이지만 헬라어나 영어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 “filled with”의 충만이요 다른 하나는 “full of”의 충만입니다. 헬라어로 “filled with”의 충만은 “pleetho”로 동사형이며 “full of”의 충만은 “pleerees”로 명사형입니다.
“filled with=pleetho”의 충만은 성령님이 밖으로부터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것이고 이럴 때에는 성령님의 외적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full of=pleerees”의 충만은 성령님이 안으로부터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것이고 이럴 때에는 성령님의 내적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외적인 성령 충만일 때는 기적이나 병 고침처럼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며, 내적인 충만일 때는 내 안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것이고 이것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성령이 충만하여(filled with=pleetho) 말씀을 전했을 때 삼천 명이 변화되어 구원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행 2장).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역시 성령 충만하여(full of=pleerees) 말씀을 전했을 때는 군중들은 회개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을 들어 스데반 집사를 쳐서 죽게 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돌로 친 사람들을 용서합니다(행 7장).
베드로의 성령 충만은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 같은 성령의 외적 역사로서 사람들을 감동시키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저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은 역사가 일어난 것이고, 스데반의 성령 충만은 성령의 내적 역사로서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은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내적 충만”이 동사인 “filled with”로 쓰여진 곳이 성경에 두 군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와 에베소서 5장 18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입니다. 이 때의 충만은 영어로는 모두 “filled with”이지만 헬라어로는 “pleeroo”로서, 내적 충만을 나타내는 명사인 “pleerees”에서 파생한 동사형이기 때문에 같은 동사인 영어 “filled with”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52절의 기쁨 충만은 성령의 내적 충만인 성령의 열매를 맺은 결과이고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외적 충만이 아닌 “full of”의 내적 충만을 받아 항상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성도답게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내적 충만이지 외적 충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적 충만인 은사는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그 분의 뜻대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하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내적인 성령 충만은 말씀대로 살겠다는 나의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적인 성령 충만이 이루어질 때 나의 마음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되고 그러할 때 우리는 예수를 온전히 닮게 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filled with”와 “full of”가 나오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filled with(외적 충만): 눅 1:15+41+67, 행 2:4, 4:8+31, 9:17, 13:9
- full of(내적 충만): 눅 4:1, 행 6:3+5, 7:55, 11:24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계 2,3장). 성령님의 음성이 바로 성자 예수님의 음성이요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음성으로도 그리고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지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이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은 충만하게 역사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하시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 능력도 받아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제 17 장 성령의 모든 사역
이 장에서는 성령님의 외적, 내적 사역 모두를 일람하여 자연계뿐 아니라 인간계의 모든 일, 그리고 가정과 교회 내외의 모든 신앙생활은 모두 성령님의 인도와 간섭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원합니다.
1. 예수를 증거하심(전도와 선교): 요 15:26-27,
행 1:8, 4:8+31, 5:32, 6:10, 13:2+4, 20:28,
계 22:17
2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 롬 8:16, 갈 4:6
3 중생케 하심: 요 3:5-7, 딛 3:5
4 성도를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심: 요 14:26,
눅 12:12, 롬 2:13, 행 8:29, 10:19, 13:2
5 능력을 주시고 행하심: 행 1:8, 눅 1:35, 욥33:41, 34:14-15, 시 33:6, 104:30, 사 40:7
6 부활케 하심: 롬 8:11
7 도우심과 간구하심: 롬 8:26-27
8 모든 진리(예수)로 인도하심: 요 16:13
9 예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심: 요 16:14
10 세상을 책망하심: 요 16:8
11 은사를 주심: 고전 12:8-12
12 열매 맺게 하심: 갈 5:22-23
13 거룩하게 하심: 고전 6:11, 살후 2:13, 벧전1:2
14 보호하고 지키심: 딤후 1:14, 벧전 1:5
15 하나되게 하심: 고전 12:13, 엡 4:3
16 소망이 넘치게 하심: 롬 15:13
17 속 사람을 강건케 하심: 엡 3:16
18 자유케 하심: 고후 3:17
19 지혜와 지식을 주심: 출 31:3-5, 사 11:2
20 봉사와 예배하게 하심: 빌 3:3, 벧전 4:11
21 교제케 하심: 고후 13:13, 빌 2:1
22 위로하심: 행 9:31
23 교회를 부흥케 하심: 행 11:21+24
24 강권하시고 경계하심: 행 20:22-23
25 교회 감독자를 세우심: 행 20:28
26 보이시고 통달하심: 고전 2:10
27 하나님의 사정을 아심: 고전 2:11
28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심: 고후 3:18
29 하나님을 찬양케 하심: 행 10:46
30 기쁨을 주심: 눅 10:21, 갈 5:22, 살전 1:6
31 예언, 꿈, 환상을 주심: 행 2:17-18, 11:28, 고후 12:1-2, 계 4:2, 삼상 10:6+10, 욜 2:28
32 주님을 보게 하심: 단 10:5-7, 계 1:17
33 죽은 자같이 되게 하심: 단 10:8-9+17, 계 1:17
34 장소를 이동 시키심: 행 8:39, 겔 3:14, 8:3, 11:1, 37:1, 왕상 18:12+46
35 율례를 행하게 하심: 겔 36:27
36 지시하심: 행 1:2
37 예수를 주라 부르게 하심: 고전 12:3
38 임산(잉태)케 하심: 마 1:2, 눅 1:35, 갈 4:29
39 새롭게 하심: 딛 3:5
40 위기 때 말씀하심: 마 10:20
41 귀신을 쫓으심: 마 12:28
42 생명을 주심: 요 3:6, 롬 8:2, 고후 3:8
43 피 흘리게(순교) 하심: 행 1:8, 히 9:14
44 감동 시키심: 삿 13:25, 14:6, 대상 12:18, 대하
24:20
45 말씀을 모으시고 기록하게 하심: 사 34:16, 딤후 3:16, 벧후 1:21
이상 45가지를 열거했습니다만 모두 다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5장에서 말씀드린 “성령의 다른 명칭”들에 나오는 것을 다 기록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감동” 이나 “여호와의 감동”(삼상 10:26, 삼하 24:1, 대하 36:22 등)이라고 기록된 곳도 성령님께서 하셨다고 보고 신약에서도 “주”(the Lord) 라고 기록된 곳을(행2:47 등) 성령님께서 하셨다고 보면 실제로 모든 일을 이루어가고 마무리짓는 분은 성령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기독교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 셋을 들라면 단연 믿음 소망 사랑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세가지 중요한 활동을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 성도 상호간의 사랑의 교제와 말씀 공부 그리고 전도와 선교가 되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령님 없이,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성령님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말씀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성경에는 흥미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28-30절에 보면 예수님에게 화가 난 고향 동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산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으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9-21절에 보면 물 위를 걸어오셨던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그 배는 곧(immediately)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8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을 잡기 위해 온 군졸들에게 “내가 예수다” 했을 때 저들이 뒤로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비록 성령이 하셨다고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성령님의 권능으로 된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 우주와 세상과 인생의 모든 일은 대주재이신 성령님(the Spirit of the Sovereign LORD, 사 61:1)께서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 18 장 성령의 이름
이 장에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제 5장의 “성령의 다른 명칭”과는 다른 의미에서 “성령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그 인격체를 나타내며 그 인격체의 얼굴과 같습니다. 그 인격체를 대표합니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는 컴퓨터에 이름만 입력하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자료(data, 정보)가 나옵니다. 그 사람의 생년월일에서 시작하여 출생지, 학력, 경력, 가족 사황, 주소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관청에서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름을 말해야 합니다. 학교나 직장을 들어갈 때에도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외국에 여행을 갈 때도 사진과 이름이 들어 있는 여권이 있어야 합니다.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에도 이름을 말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이름은 이렇게 중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는 사람은 살 수가 없고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화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어느 날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가서 이름을 대니 그런 사람은 없다는 컴퓨터의 응답이 나왔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본인이라고 주장해도 은행 직원은 컴퓨터에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상대를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 주인공은 할 수없이 그 은행의 다른 지점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역시 똑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민 등록하는 관청으로 갔습니다. 그 관청 직원은 컴퓨터를 눌러보더니 이 사람은 이미 죽은 걸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자기는 엄연히 살아 있다고 아무리 고함치고 주장해도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 주인공은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컴퓨터의 맹점을 지적하기 위한 목적이었겠지만 사람에게 그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이름에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뜻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더하실 것이다”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입니다. 이름은 보통, 부모 특히 아버지가 자식에게 지어줍니다. 그 이름에는 자식이 그 이름같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소원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전통이 있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이름을 많이 지어줍니다. 그 이름을 가진 사람같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매우 소중하게 여깁니다.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면 상당히 좋아합니다. 자기 이름이 알려지고 높아지면 아주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의 명예를 지키기 원합니다. 어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사람들은 먼저 그 아이의 아버지 이름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욕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이름에 먹칠했다고 야단치고 심지어 집에서 쫓아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이나 가문의 명예를 위하여 목숨까지 걸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며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를 원합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유럽의 관광지에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성에 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벽이나 책상 같은 곳에 자기 이름을 써놓는 것을 봅니다. 한국 사람들의 이름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벽에 페인트칠을 해서 깨끗하게 해놓았는데 다음에 가보면 또 낙서가 돼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으며 제발 이름값 좀 하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와 똑같이 하나님도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이름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신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는지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는 “이름”이란 단어가 매우 자주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또는 “주의 이름”, “내 이름”, “내 거룩한 이름”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독교 사전”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적 요소다. 그 이름이 그의 본성과 인격적 성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를 소개할 때 먼저 자기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로써 그의 백성은 그를 알고 그를 경배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의미하며 또한 그의 권위 및 임재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략.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계약적 이름은 여호와가 있고, 일반적 이름으로는 엘, 엘로힘, 엘로아가 있으며..후략.”10)
그런데 여기서 “엘” 또는 “엘로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한 것은 엄격히 말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이란 하나님을 뜻하고 “엘로힘”은 복수적인 의미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은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Jehova) 혹은 “야훼”(YHWH)만이 유일하게 인격적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야훼”란 뜻은 “스스로 계시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출 3:14)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야훼)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출 6:3, 15:3, 34:5-6 등).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서로 이름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고 예의입니다. 서로가 이름이나 나이 그리고 자라난 배경 등을 알고 나면 대화가 훨씬 부드러워지고 말이 잘 통하게 됩니다. 모세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아마 모세도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모세의 이 질문에 난처하셨을 것입니다. 원래 통성명은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정상이겠는데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인 하나님에게 이름을 묻다니요!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친절하게도 이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나다!” 이것은 저의 번역입니다만 영어로 된 문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대문자로 “I AM WHO I AM!”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영어문법에서는 I 가 주어가 되고 AM 은 동사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I AM 이 주어가 되고 WHO I AM 이 보어가 되어 “나는 나다!”로밖에 번역이 안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무슨 이름을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한글 개역성경에서 이것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한 것도 참 멋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의 히브리어 원어는 “haya” 혹은 “hawa”로 존재동사를 의미하는 고대언어입니다. 영어의 be 동사와 같은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YHWH(야훼, 여호와)가 나왔기 때문이며 이 우주에서 “스스로 있는 자”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밖에 안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어떠한 피조물이 스스로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아돈” 혹은 “아도나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도 “주인”(상전, master)이라는 뜻이지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아닌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야훼)라고만 알려주셨는데 이 이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 관계에서,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시는 의미로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승리케 해주시는 여호와” 할 때는 “여호와 닛시”(출 17:15)로,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 할 때는 “여호와 샬롬”(삿 6:24)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여호와”란 단어는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여졌기 때문이지만 구약성경에도 나오는 하나님(God) 그리고 히브리어 아도나이의 헬라어 역인 “퀴리오스” 즉 “주”(주인, master)라는 단어만 나옵니다.
그러나 이 신약 시대에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임마누엘” 되신 아들을 보내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아버지의 소원과 뜻을 담아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라는 이름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입니다. 다른 말로 “성자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삼위가 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계시해주시고 이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제자 삼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제자 삼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세계 모든 교회에서는 신 구교를 막론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라고 합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뜻은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의미이고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례를 주라는 뜻인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장관을 임명할 경우 “대통령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대통령의 이름 “아무개”라는 것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효력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이라고 하여 “이명박”이란 “이름”이 “꼭” 들어가야지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말만 있다면 효력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할 때 “성자의 이름”이 “예수”인 것은 알겠는데 “성부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을 몰라서인지 아니면 확실치 않아서인지 모르지만 대부분 그냥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어떻게 따랐는지를 사도행전에서 찾아보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보면 됩니다. 먼저 제자들이 세례에 관해 언급한 구절들을 사도행전에서 찾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행 2:38).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행 8:16).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행 10:48).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의 열 두 제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행 19:5).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충실히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혹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줬던 것입니다. 그 의미는 “성자의 이름”이 “예수”인 것은 물론이고 “성부의 이름”도 “성령의 이름”도 역시 “예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요한도 그의 복음서에서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43절에서 성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영어로는 이렇습니다. I have come in my Father’s name. 즉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아버지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셨는데 이 이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아들 예수님은 두 번이나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7:11-12).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 다름 아닌 “예수”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는 “성령의 이름”도 역시 “예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이 뜻은 아버지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텐데 “내 이름” 즉 아들의 이름인 “예수”라는 이름을 주어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것은 “성령세례”와 “성령의 이중사역” 장에서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이 “예수”라는 이름이 왜 그렇게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신학으로 유명한 고든 피는 그의 책 “바울,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함께 있는 것”이라는 참으로 좋은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새로운 임재”(영어로는 presence 즉 함께 있는 것을 뜻함, My Presence=출 33:14)라고 했습니다.11)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타락해서 하나님을 떠나거나 또는 헤어지는 일 없이 영원토록 한 몸이 되어 함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성막에 거하며(출 25:8) 거기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25:22). 함께 있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전을 건축하는 목적이 성막을 지을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또는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것입니다(왕상 8:17-18, 왕하 23:27, 대상 22:7+10+19, 29:16, 대하 2:4+6, 6:7-10, 34+38 등). 그런데 또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두기 위해” 전을 건축한다고 하신 것입니다(왕상 8:16, 대하 6:20). 열왕기상 9장 3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그러나 아무리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또는 “주의 이름을 두신” 성전이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는 그 화려한 솔로몬 성전도 불에 타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법칙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결국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스스로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 2:21).
그러나 스스로 성전이 되신 아들 예수님 또한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죽어야 부활하실 수 있고 부활하셔야 하늘에 오르실 수 있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으며 그 다음에야 비로서 그 “예수의 이름”을 보혜사 성령님께 주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을 가진 “임마누엘” 되신 성자 예수님이시지만 육신을 가진 이상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실 수가 없었고 또 그 이름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예수 이름”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비로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실 수가 있고, 우리를 “성령의 전”으로 만드셔야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실 수가 없는데(왕상 8:27, 행 7:48, 17:24) 하물며 질그릇같이 연약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나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을 주신 방법을 400미터 릴레이 경주에 비교해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400미터 릴레이는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뜁니다. 네 사람 모두 뛰어서 마지막 주자가 일착으로 들어오면 그 팀 네 사람 모두가 금메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착으로 들어왔다 해도 손에 바통(baton)이 없으면 실격이 됩니다. 그래서 매 주자는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잘 전해줘야 합니다. 혹 바통을 떨어뜨리면 아무리 급해도 그 바통을 다시 주워서 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자기 아들에게 자기와 똑 같은 이름을 주고 그 이름 뒤에 “Jr.” 를 붙여줍니다. Jr.는 영어 Junior의 약자로 우리나라 말로는 보통 “2세”라고 부릅니다. “3세”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강원도에서 예수원을 창설하신 대천덕 신부의 정식 이름은 R.A. Torrey III(토레이 3세)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의 이름”인 “예수”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들을 나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 1:21). 그 아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계시다가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신 다음, 그 “예수의 이름”을 “성령님”께 드렸고 “예수 이름을 가지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 “예수 이름”이라는 바통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야 우리 안에 비로서 “예수의 이름”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의 이름”을 가지신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뜻이고(빌 2:13, 요일 4:12)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뜻인 것입니다(롬 8:10, 고후 13:5, 갈 2:20, 빌 1:21).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론 세미나를 하면서 이 부분을 설명할 때는 목사님 네 분을 강단 앞으로 나오시게 합니다. 바톤 대신에 볼펜을 드리고 400미터 릴레이 경주부터 설명합니다. 그런 다음 이제 그분들은 하나님이 됩니다. 첫번째 주자는 아버지 하나님이 되고 두 번째 주자는 아들 하나님, 세 번째 주자는 성령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주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첫번째 주자가 볼펜을 두 번째 주자에게 줍니다. 두 번째 주자는 세 번째에게, 세 번째 주자는 그 볼펜을 네 번째 주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볼펜이 바로 “예수 이름”인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너무나 쉽게 이해하고 또 얼마나 좋아하고 신나 하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고 신이 나는지 아시겠습니까?
세 번째 주자이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네 번째 주자인 내게 오셔서 “예수 이름”을 갖게 하셨습니다. 400미터 릴레이 경주에서는 보통 네 번째 주자를 그 팀에서 제일 잘 뛰는 선수에게 맡깁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우리가” 즉 “내가” 제일 잘 뛰는 주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삼위 하나님이신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내가 한 팀을 이루어 일하지만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우수한 선수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 9 10장을 잘 읽어보면 이 말의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천사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사람들과 얼마든지 대화를 하지만 직접 복음을 전하지는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꼭 먼저 믿은 성도들을(빌립 집사, 아나니아, 베드로 사도 등)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또는 천사들이 직접 복음을 전하지 못하시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해 보상해 주신다는 약속이 참 많이 나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찬물 한 그릇 대접해도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0:42). 사실상 하늘나라에 그러한 상급이 없다면 우리가 구원 받은 즉시,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 받은 순간 우리를 그 좋은 하늘나라에 데려가시면 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데도 왜 힘들고 괴로운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지요. 바로 상급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상급 중의 상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니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시는 주 하나님께서 이제는 영혼 구하는 상과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 전능하신 그 분께서도 복음 전하는 일만은 꼼짝을 못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네 번째 주자인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성령님도, 천사들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은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릴레이에서 제일 잘 뛰는 선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이름을 주신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예수의 이름”을 주신 이유가 또 있습니다.
- 그 이름에는 마귀의 결박을 끊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시 118:10-12, 눅 24:47, 행 10:43, 고전 6:11, 요일 2:12).
- 그 이름에는 구원과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시54:1, 79:9, 116:4, 사 63:16, 요 1:12, 20:31, 행 2:21, 16:31, 롬 10:13, 요일 5:11-13).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 그 이름에는 축복이 있으며(민 6:27, 시 118:26, 129:8, 말 4:2)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기 때문입니다(골 2:3).
- 그 이름이 우리를 “드시고” 보전하시기” 때문입니다(영어로는 공히 protect, 시 20:1, 요 17:11-12).
- 그 이름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렘10:6).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21, 히 1:4), 지극히 높여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9-11).
그래서 성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고(요 14:13-14),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요 15:16, 16:23). 그 후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병자를 낫게 하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던 것입니다(행 4:30).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예수의 이름”을 주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이제 우리가 가진 그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라는 것이며(행 9:15),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예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롬 9:17, 출 9:16, 신 32:3, 시 83:18, 사 64:12).
성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베푸신 많은 기적 중에서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은 소위 오병 이어의 기적입니다(마 14:15-21, 막 6:35-44, 눅 9:12-17, 요 6:1-13).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나 구절들은 담고 있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교자에 따라 오병 이어에 관한 설교를 여러 가지로 할 수 있겠으나 아주 중요한 영적인 가르침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주리고 또 죽어가는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바로 생명의 떡인 말씀이고 그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이름”은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 마귀는 그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합니다(행 4:17-18, 5:28). 우리는 그러한 마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할 때 “주여!” 혹은 “주님!”하고 부릅니다. 물론 유일하신 성삼위 하나님을 의식하고 부르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주의 이름”이 바로 “예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여” 혹은 “주님” 하고 부르기 보다는 “예수님!” 또는 “예수여!”라고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혹은 “주 예수님!” 하고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습관상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는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라는 헬라어 “둘로스”(doulos)는 원래 “노예”라는 뜻이고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노예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마귀”로부터 사셨기에 이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노예는 “자신의 시간(여가), 자신의 재물, 자신의 처자식, 자신의 의지, 자신의 목숨까지”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명령만”이 최고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최고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르면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의 종”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면 미국이나 유럽 특히 제가 살고 있는 독일의 성도들 대부분은 기도한 후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기도 후에 그냥 “아멘”만 합니다. 아니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the Lord)이 아닌 “주들”(lords)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든 신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라고 고백하고 찬양했던 느브갓네살 왕은 결코 유일신이신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신교주의자였습니다(단 2-4장).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다신교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물론 우리는 “예수의 이름” 때문에, “복음”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예수)으로 욕을 먹으면 복을 받는 것이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행 5:41, 딤후 1:8, 행 21:13, 벧전 4:13-14).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엡 5:20, 골 3:17). 세례(침례)를 줄 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도 물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이 있어야 모든 것이 “효력이 있고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엡 3:15).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이름인 “예수”를 그토록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고 하시며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하면 반드시 죽이라”(레 24:11+16)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딤전 6:1, 딛 2:5)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두신 솔로몬 성전이라 할지라도 불 타 없어지게 하신 것입니다(왕상 9:3+7, 대하 7:16-20). 주의 대적들로 하여금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히며 “주의 이름”을 능욕하게 하신 것입니다(시 74:7-10).
우리의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를 때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3-24)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거나, 모독하거나, 더럽히거나(렘 34:16, 겔 20:39 등), 멸시하면(말 1:6)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짐승(마귀)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계 13:6) 우리가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말 2:2).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신 28:58, 대상 29:13)이요,
- “크고 두려운 이름”(수 7:9, 삼상 12:22, 대하6:32, 시 76:1, 99:3)이요,
- “높고 뛰어난 이름”(시 148:13)이요,
- “영원한 이름”(시 72:17, 135:13)이요,
- “거룩한 이름”(시 30:4, 111:9, 사 29:23, 겔20:9+39)이요,
- “선한 이름”(시 52:9, 54:6)이요,
- “아름다운(majestic=장엄한) 이름”(시 8:1+9)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 “높이고”(시 34:3, 사 12:4)
- “즐거워하고 기뻐하며”(시 89:12+16)
- “경외하고”(신 28:58, 시 61:5, 86:11, 102:15)
- “사랑하고”(시 5:11, 69:36, 사 56:6)
- “찬양하고”(시 30:4, 44:8, 54:6 등)
- “감사하고”(대상 6:35)
- “영광 돌리되”(시 86:9+12, 96:8, 사 66:14, 살후 1:12 등)
-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양 해야”(시 72:19 등)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자체는 인격체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인격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름을 인격체로 묘사한 곳도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사 30:27, See, the Name of the LORD comes from afar).
주님은 왜 그냥 주 하나님 혹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지 않으시고 “그 이름”을 찬양하라고 하셨을까요? 예수의 이름을 가지시고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이제는 한 몸을 이룬 신부인 우리들과 같이 만물들의 찬양을 받으시려는 신랑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 19 장 성령과 그리스도
디도서에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God our Savior)이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딛 1:3, 2:10, 3:4). 디모데전서 1장 1절에도 나오고 또 누가복음 1장 47절에서는 소위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 에서 “하나님 내 구주”(God my Savior)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내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리고 디도서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Christ Jesus our Savior, 1:4)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our Savior, 3:6)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our great God and Savior, Jesus Christ, 2:13)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혹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세 절(딛 1:3, 2:10, 3:4)에 나오는 “우리 구주 하나님” 할 때의 “하나님”은 2장 13절에 의하면 “하나님이시며 구세주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장 47절에서 마리아가 “하나님 내 구주”라고 했을 때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삼위 일체 하나님”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아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태어나지 않았고,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는 것도 아직 확실히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우리 혹은 내 구원의 하나님 혹은 구원의 여호와”란 말이 신약보다 훨씬 많이 나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대상 16:35, 시 25:5, 79:9, 사 60:16 등).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단어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의 헬라어 번역이고 원래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이지만 기름을 붓는 까닭은 그가 받은 직분 즉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또는 메시야의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구원자, 구세주 또는 구주라고 번역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내 구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는 “구세주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천 년 전에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던 성자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가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성자 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험한 십자가를 지시고 모진 고통가운데 피를 흘려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성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당연히 존경과 사모와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번 말씀 드렸듯이 구원은 성자 하나님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선택해 주시고 아들은 피 흘려 대속해 주시고 보증으로 성령님의 인침을 받아야만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엡 1:4+7+13).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삼위 하나님 모두가 구세주(Savior=Christ)가 되십니다. 또한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이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께서는 공히 “그리스도 예수”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삼위 하나님의 “신비한 일체”가 여기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히 13:8)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20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여기에서 “회개하고 돌이켜”는 영어로 “Repent, then turn to God”인데 다시 말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주”(the Lord)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이 때 “그리스도 예수”는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지만 사도행전 2장 38절 말씀 “회개하고 죄 사함 받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의미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의 직분을 감당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신,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가지신 “보혜사 성령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4절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고 했는데 이때도 “주 예수”의 능력은 실제로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한 것도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그의 책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그리스도가 성령 사역의 중심이라는 것과 성령을 안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뜻하듯이 성령께 영광 돌리는 것은 정확히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것입니다.12)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저는 이런 제안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좁은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가 승천하신 “성자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넓은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 성삼위 하나님께 영원토록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제 20 장 성령과 말씀
현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경전(canon)이 있습니다. 경전이 없는 종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독교는 바로 예수교이고 예수교는 어떠한 교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교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기를 원치 않지만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이야말로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다른 종교의 경전에 비해 권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참으로 위대한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원해서 다른 종교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보통 다른 종교의 경전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쓴 것입니다. 반면 성경은 약 40여명의 사람들이 거의 1,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썼습니다. 시간과 장소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록한 성경이 한 주제 즉 “예수”로 통일이 되었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한 저자가 썼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만이 매년 베스트 셀러인 것만 봐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는 달리 예언이 있은 후에 태어난 분도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객관적인 이유가 아닌, 이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있는 유명한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4절에는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것을 이 자리에서 다 논할 수도, 다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만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 몇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또는 “예수를 믿는다” 할 때 그 개념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 이천 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다가 승천하시어 우리가 만나본 일도 없는 성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요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예수님)을 믿습니다”를 영어로 하면 “I believe God(Jesus)”이 아니라 “I believe in God(Jesus)”이 됩니다. 즉 “하나님(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예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분의 인격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목적은 무엇보다도 “구원”(딤후 3:15)이요 “생명”(요 20:31)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생명의 떡”(요 6:35+48)이요 바로 “생명”(요 14:6)이라고 하신 성자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 즉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복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전체가 복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복과 땅의 복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요삼 1:2)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말씀에 순종하면 복이지만 그렇지 않고 불순종할 때는 도리어 저주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다”(신 30:15+1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민 23:19, 사 40:8, 55:11, 마 5:18, 24:35).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창 1:1, 히 11:3) 바로 그 동일한 말씀으로 이 천지를 불에 타서 없어지게 하실 것입니다(벧후 3:7).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다 이루어졌고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 말씀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와 파괴의 능력이 있음같이 우리가 하는 말 또한 똑같은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땅과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도구가 다름 아닌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을 음식이 아닌 말로 키웁니다. 학교에서는 말로 가르칩니다. 회사는 말로 경영합니다. 군대는 말로 통솔하며 나라도 말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교회야말로 말과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일 긴 장인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과 율법과 법도에 관한 말씀만 들어있는 것입니다.
원래 창조의 능력만 있었던 말이 인간의 타락 후에는 파괴의 능력도 갖게 되었으며 마귀 또한 말로 특히 중상모략으로 사람과 세상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고 하였고 또한 “입의 열매”(잠 12:14, 18:20) 혹은 “입술의 열매”(사 57:19)를 먹고 사는 것이며 그래서 “말이 씨 된다”라는 우리 나라의 속담은 성경적이며 맞는 말인 것입니다.
특히 잠언서에 보면 말이 갖는 능력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로 건강을 회복합니다. 말로 가정을 회복합니다. 말로 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말로 나라를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온량한 혀는 우리가 잃었던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도 회복할 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잠 15:4).
주님은 왜 우리에게 많은 성령의 은사 중에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한 모든 말은 그래서 예언이 되며 그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녀들에게, 교회에서는 성도들에게 예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적이고 복되고 유익되고 긍정적이고 덕이 되고 칭찬하는 말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말만 나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만 하고 이제는 이 말씀의 저자가 성령님이시라는 것과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저자가 성령님이라고 증거합니다(사 34:16, 딤후 3:16-17, 벧후 1:20-21).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말씀하셨다”(행 1:16)라고 하셨고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행 28:25)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7절에 “성령을 받았으니”(they have received the Holy Spirit) 한 것을 다음장인 11장 1절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had received the word of God)라고 한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일체가 되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말씀이라는 것은 이미 제 4 장 “성령과 삼위 일체”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엡 6:17)입니다. 검이 아무리 좋아도 그 검을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생명이 되고 복과 능력이 된다 해도 그 말씀을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히 4:12).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계1:12), “내 입의 검”(계 2:16)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계 19:15+21) 등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검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의 “입의 기운”은 영어로 “the breath of his mouth”이며 이것은 제 5 장 “성령의 다른 명칭”에 나오는 “전능자의 기운”(the breath of the Almighty, 욥 32:8), “하나님의 기운”(the breath of God, 욥 27:3), “하나님의 입김”(the breath of God’s mouth, 욥 15:30) 등과 비교해 볼 때 성령님의 능력이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저자이자 말씀 자체이시며 말씀을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천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대부분 주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항상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로 기록한 것을 다른 곳에서는 “성령”으로 기록한 곳들이 있습니다. 다음 표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여호와 성령
시 78:40 사 63:10
시 95:7-11 히 2:7-11
사 6:9-10 행 28:25-26
렘 31:33-34 히 10:15-17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구약의 대부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영어로는 the LORD said to Abraham/Moses),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says the LORD),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declares the LORD Almighty) 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해도 되고 아니면 구약 시대는 성부 하나님의 시대라고 한 것같이 “아버지 하나님”으로 이해해도 아무 무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장 22절과 24절 특히 에스겔 11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Then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me, and he told me to say).
성령님께서 직접 임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로 기록된 것이 “성령”을 뜻하는 것이라고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모든 말씀은 성령께서 하셨다고 해도 역시 무리가 아닌 것입니다.
학개서를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두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지만 만군의 여호와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2장 5절에는 “나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1장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셨다고 나와 있는데 “흥분”이라는 히브리어 단어(ur)가 역대하 36장 22절에서는 “감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학개 1장 13절, 2장 4절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말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와 똑 같습니다. 영어로는 “I am with you”입니다. “감동”을 주시는 분은 삼위 하나님 중 성령님이십니다. 학개서에도 성령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곳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1장 4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saying)라 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말씀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의인화”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인격체”는 아니지만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동등하게 예우하고 있기 때문에(요 1:1) 성경 여러 곳에서는 “말씀”을 의인화하여 “인격체”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삼상 3:21).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삼상 15:23+26).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시 56:4+10).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시 107:11).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 도다”(시 107”20).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시 147:18).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행 11:1).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행 20:32).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그런데 소선지서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 대신에 “묵시”(옵 1:1, 미 1:1, 나 1:1, 합 2:3, vision=이상) 혹은 “경고(의 말씀)”(나 1:1, 합 1:1, 말 1:1, oracle)라고도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묵시로 되었든, 경고로 되었든 간에 그것은 모두 “여호와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미 1:1, 말 1:1). 그런데 이 “묵시”라는 단어의 영역은 “vision”이고 이것이 요엘서에서는 “이상”(욜 2:28)으로, 이 구절을 인용한 사도행전 2장 17절에는 같은 “vision”이 “환상”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묵시”든, “이상”이든 또는 “환상”이든 같은 히브리어 어원이므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묵시”가 잠언 29장 18절에서는 영어로 “revelation”(계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호와의 말씀”이나 “묵시”나 “경고”가 어떻게 주의 종들에게 임할까요? 앞서 “여호와”라고 기록된 것들이 모두 “성령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 또한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상”이나 “계시”는 삼위 하나님 중 “성령님”의 사역에 속하기 때문인 것입니다(욜 2:28, 엡 1:17). 성령님 자신이 말씀이신데다 구약성경은 물론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성령님이 직접 말씀하신 곳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는 “형상으로서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의 종들과 직접 대화하는 모습이 나옵니다(창 18장; 민 12:8 등). 그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같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종들에게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 같이 구약 시대의 “형상으로서의 하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종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 사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성자 예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이시고 “성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며”(마 4:4)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시 1:2)할 뿐만 아니라 또한 “종일 묵상”(시 119:97)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말씀을 잘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의 저자이시자 “지혜와 총명의 신”(the Spirit of wisdom and understanding, 사 11:2)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엡 6:18)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님이 기뻐하십니다. 건전한 신앙생활을 수레로 비교할 때 “말씀”과 “기도”는 그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말씀에 치우치면 율법주의가 되기 쉽고 기도에 치우치면 신비주의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책 중의 책”인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말씀 되신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지으시고 스스로 말씀되시고 그 말씀을 검으로 사용하시는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제 21 장 성령과 여호와
지금까지 “성령과 삼위일체, 성령의 이름 그리고 성령과 말씀”장을 통해서 구약에서 6,828번이나 나오는 “여호와”(그랜드 종합주석 출애굽기 3장 참조)가 사실상 “성령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본장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성령님이 여호와이심을 더욱 확실하게 해드리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신들(=하나님들, gods)이 있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神)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웃 나라인 일본에는 대략 800만의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또 인도에는 무려 3억 3천만이나 되는 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찌 일본이나 인도뿐이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나름대로의 신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 중 첫번째가 바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라고 하신 것같이 이 세상에는 “다른 신들”(other gods)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신들뿐이 아니고 “주들”(lords)도 많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상들”(idol)도 많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신 4:28, 렘 1:13, 19:26, 고전 8:5 등).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여호와도 섬기고 자기의 신들도 섬겼으며”(왕하 17:32-33) 심지어 “여호와의 전”(성전=교회) 안에 바알과 아세라등 우상들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왕하 23:4-7). 사도 바울은 “탐심(greed=욕심)은 우상 숭배”(골 3:5)라고 했습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섬기지 않던, 자기 자신의 “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여호와(야훼, YWHW)는 참 하나님이라”(렘 10:10)고 했으며 그래서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냐”(삼하 22:32, 시 18:31)라고 했으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라”(수 2:11)고 했으며, 그래서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라”(대상 16:26)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혹은 나라)은 복이 있다”(시 33:12, 144:15)라고 하신 것입니다. 혹자는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야훼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까? 아니지요.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우리의 하나님이실뿐 아니라 온 우주의 하나님”이십니다(행 17:24). 그런데 우리는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호 4:6)라고 한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여호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잘 아시다시피 “안다”라는 히브리어는 “야다”(yada)이며 “경험하여 알다, 깨달아 알다, 분별하여 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알되 힘써 알자”라는 뜻은 여호와가 과연 누구신지 그분의 인격을 알뿐만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알자는 것입니다. 물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왠만한 신학자나 목회자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분은 없을텐데 문제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의도를 깨닫고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알기는 하되 그대로 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에서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산상수훈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일점일획이 떨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마 5:18, 눅 16:17).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말씀들을 떨어뜨리고 있지 않은지요.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구약성경을 보면 “나는 여호와다”(I am the LORD)란 말씀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란 말씀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에스겔서에 많이 나옵니다(겔 13:9, 21, 23 등). “알리라”(will know)라는 미래형을 쓴 이유는 “너희가 아직 나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참 하나님(true God)이신 여호와”를 잘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인사를 할 때 “저는 아무개입니다”라고 이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김수동입니다” 할 때 “김수동”은 저의 이름입니다. 영어로는 “I am Kimsudong.”입니다. 그런데 “I am”이 없는 “Kimsudong”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 혹은 본체”(essence or substance, DNA)가 없는 이름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호와다”라고 이름을 가르쳐주신 그분의 “본질”(DNA)은 바로 “성령님”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모세에게 “I AM WHO I AM.”(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라고 말씀하신 “I AM”이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성령과 삼위일체” 참조)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 구속자(Redeemer) 그리고 구원자(Savior)”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사 60:16, 64:8 등). 여호와께서는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피 흘리시고 죽으신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자(그리스도=메시야)가 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다!”(I am Jesus! 행 9:5, 22:8, 26:15). 구약에 정통했던 바울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분이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여호와는 성령이시다”(The LORD is the Spirit)라고 담대하게 고백했던 것입니다(고후 3:17). 물론 한글 개역성경에는 “주는 영이시니”라고 되어 있고 영어로는 “The Lord is the Spir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호와는 성령이시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참 하나님의 이름”이고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고유 명사”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the LORD)란 이름이 신약에 와서 모두 “주”(the Lord)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마 3:3, 눅 4:18, 행 2:21 등). 물론 헬라어 kurios를 “주”라고 했기에 “번역상의 오류”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그러나 “의미상의 오류”인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의 “주”(the Lord)는 거의 모두 “주인 혹은 상전”(master, owner)의 개념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시편 8편 1절의 “여호와 우리 주여” 할 때의 “주여”는 히브리어로 “아돈” 즉 “주인”이라는 뜻으로 “여호와가 우리의 주인”임에는 틀림이 없고 신약에서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마 6:24). 그러나 “여호와(야훼)나 예수의 이름”은 “주인” 개념을 훨씬 뛰어 넘는 엄청난 이름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주인들”(lords)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기 때문에 상기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여호와는 성령이시다”라고 번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물론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주인”(master)은 성령(the Spirit)”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가복음 4장 18절에 있는 말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의 “주의 성령”이 누가복음 “원본”에는 어떻게 쓰여졌는지 궁금합니다. 필사하는 과정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 못 되었을 수도 있었겠고, 누가를 비롯한 사람들이 “야훼”란 이름을 감히 부르거나 필기할 수가 없어서 퀴리오스(주)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동일한 말씀(“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The Spirit of the Sovereign LORD is on me)을 주셨던 “여호와이신 예수님”께서 퀴리오스란 단어를 쓰셔서 “주의 영”이라고 하셨을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들이 잘 쓰시는 “주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 행 2:21, 롬 10:13)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구절은 원래 요엘서 2장 32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인용한 것인데 “여호와”(the LORD)가 “주”(the Lord)로 변한 또 다른 예인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어 모든 신학교 교수님들이나 목회자님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기를 원합니다. 신약에 나오는 모든 “주”나 “주님”이라는 단어를 “여호와”나 “주인”으로 구분해서 번역을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인용된 구약에서 “여호와”란 단어가 있으면 신약에서도 “여호와”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야훼)”는 변할 수 없는 고유명사이고 “참 하나님”이시자 우리의 “참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여호와”란 단어를 쓰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예수”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만이 효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영어의 NKJV은 구약의 “LORD”을 신약에서서도 모두 “LORD”로 인용을 잘 한 것인데 한국어 성경에는 모두 “주”(the Lord=master)로 번역이 된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제 왜 “여호와(야훼)의 본질(DNA)”이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의 이름이 구약에서는 “여호와”요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것을 확실히 아셨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모든 교회들)에게 말씀하실 때 마지막에는 한결 같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나님이나 예수님” 대신 왜 “성령님”이라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옛날 “들으라, 이스라엘아” 하시며 끊임없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던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다름이 아닌 바로 “여호와의 영이신 성령님”이셨고 그 동일한 “성령님”께서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신의 몸 된 교회들”에게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은 바로 그분이 지으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10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성령님”만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의 음성이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했습니다. 정말로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말씀을 사랑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야말로 생명과 성결과 능력과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시되 온전히 순종하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2 장 나의 사랑, 성령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하나님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사랑에 대한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사랑에 대한 설교를 제일 많이 했고 또 제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와있는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의 주제는 거의가 다 사랑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부흥회 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일일이 한번 조사를 했더니 사랑이라는 단어가 거의 다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이 뭐길래?”인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만 빠졌다 뿐이지 세상이 온통 사랑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중에는 참으로 감동적인 것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을 하며 목숨을 건 사랑도 합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의 여자 조연 생각이 납니다. 그 여자 조연은 화면에 나올 때마다 거의 눈물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를 떠나 다른 여자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전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제 마음은 항상 당신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달려오겠어요”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은 “아! 그 여자에게 하나님의 심정이 있구나!”였습니다. 비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심정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그토록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비록 저들이 하나님을 모른다 해도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들도 실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하지도, 받지도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제들을 한번 보겠습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전쟁 살인 도적 간음 강간 폭력 도박 마약 등등 셀 수도 없는 많은 죄들이 사실은 “사랑 없는 까닭”인 것입니다. 물론 저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무리 형제를 미워해도 자기 자식은 사랑합니다. 비록 자기 공장에서 불량 식품을 만들어 팔기는 해도 그 식품을 자기 자식에게는 먹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웃나라를 미워해도 자기 조국은 사랑합니다. 소위 나름대로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뚤어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비뚤어지게 만들어버린 원수 마귀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래 전에 본 미국 영화가 생각납니다. 백만장자인 남자 주인공은 자기 마음에 드는 큰 저택을 삽니다. 방만 해도 수십 개요 넓은 정원과 수영장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주인공이 그 집에 혼자 서 있는데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는 여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영화를 보면서 저는 천국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는 그 저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좋을 것이고, 아니 크고 좋은 정도가 아니라 끝이 없을 것이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이 우주도, 이 지구도 그 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천국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만 계십니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실까요? 나 혼자 천국에 있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초가삼간이 훨씬 낫다고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말은 하나님은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주지 않으면, 사랑을 받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분께서는 목숨까지 주어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으로 우리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하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과 개미가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서로 수준이 비슷해야 문제가 덜 생깁니다.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벽을 뛰어 넘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죄” 문제였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히 9:22)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내어 주셔서 십자가의 피로 사람들의 모든 죄를 씻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자 죄인인 우리들을 자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위해 엄청남 양보를 하셨고, 엄청난 사랑을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자신과 동등한 수준으로 만드시기 위한 그 분의 사랑! 과연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독생자”라도 아끼지 않으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가 나와 내 자식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식을 죽게 할 사람이 있을까요? 자신이 죽을지언정 자식은 살립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벌레만도 못한 인생들을 위해 참으로 큰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큰 “낭비”를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낭비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낭비”를 해 본 일이 있는지요. 나라의 절반이 아니라 나라를 몽땅 줄 수 있는 사랑을 해 본 일이 있는지요. 옥합을 깨뜨리는 “낭비의 사랑”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목숨까지 내어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제일 큰 사랑이라고 하신 예수님(요 15:13)이 손수 그 사랑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혹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나 친구를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별 볼일 없는 정도가 아니고 구더기만도 못하고(욥 25:6, 시 22:6) “죄인이고 원수”가 아니었습니까?(롬 5:8+10) 그러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준 사랑”을 하신 예수님을 위해 우리도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 몸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거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말 그대로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결의 영”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고 그리고 들어오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보다 다른 사람을,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그래서 그 분은 견딜 수 없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출 34:14)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는 질투와 투기를 알아야 합니다(아 8:6-7).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이 다를 여자를 사랑한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마음과 질투로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우리도 질투할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거룩하신 성령님의 질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은 우리로부터 99.99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의 사랑을 받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누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하십니까?
젊은 시절에 한 여자를 짝사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젊은 남녀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짝사랑하는 것만도 괴로운 일인데 그 여자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비참한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짝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고 하지요. 그 당시 그 여자로부터 듣고 싶었던 오직 한마디의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수동씨,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합니까?
예수님께서 왜 우리더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셨는지 그 의도를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으로부터는 사랑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 참으로 부담되고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내 자식으로부터 사랑 받기 원하지, 사랑하지도 않는 남의 자식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와 똑같이 우리의 사랑을 받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누구십니까?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아니십니까? 우리는 누굽니까? 벌레만도 못한, 본전이 지옥 갈 수밖에 없었던 죄인의 괴수가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들은 감히 나를 사랑해도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부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아 2:10+13)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원래 비밀이 없습니다.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해줍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목숨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수많은 면류관과 상급을 예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여러 가지 다른 명칭들을 통해, 모든 사역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친구로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진리로서, 보혜사로서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성령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야고보서 4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 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현대인의 성경”에는 더 쉽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살게 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하찮은 말로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의 뜻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또 한편 말할 수 없이 시기와 질투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들을 성령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은 바로 성령님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을 가지신 그 분은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이 말씀은 앞서 야고보서와 같은 의미이지만 훨씬 강한 어조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지만 또 한편 투기(질투) 역시 음부(죽음, 무덤)같이, 불같이 잔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훔 1장 2절에서는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질투가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랑은 불같이 질투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고대소설 “춘향전”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많이 읽히고 사랑 받는 소설인 줄 압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춘향이는 자기에게 수청들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변학도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정절을 지키게 했을까요? 춘향이는 자기를 데려가기 위해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난 이 도령의 말을 틀림없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 때 만약 춘향이가 변학도에게 수청을 들었더라면 하고 상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춘향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오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신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입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틀림없이 믿는 신부 된 우리들이 성춘향보다 못하면 어찌하겠습니까? 신부의 면사포에 점이나 흠이 있으면 어찌되겠습니까? 하나님보다 이 세상 것을 더 사랑하면 어찌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약 4:4, 요일 2:1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은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님도 사랑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And hope does not disappoint us, because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whom he has given us.).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30절에서는 “성령의 사랑”이라고 했으며, 사랑은 또한 “성령의 열매” 중 첫번째인 것입니다(갈 5:22).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를 “성령님은 사랑이시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우리의 주님이시자 하나님이시며 예수의 이름을 가지신 성령님께 매일 사랑의 고백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령님 사랑해요!”
제 23 장 맺는 말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다고 하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방인의 손을 빌어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 16:2-3). 저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확실한 계시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계시를 가지고 있고 또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똑 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교회들이 소위 “성령 운동” 하는 교회나 성도를 무시하거나 핍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니라”(갈 4:29)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들어가는 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만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성령님에 대해 무지하고 그래서 소홀히 하고 나아가서 성령님을 무시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데까지 온 것입니다. 주의 종들 특히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 구원 문제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이고, 지금은 성령님께서 단독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인도가 아니면 죄를 깨달을 수도, 예수님께 갈 수도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구원을 받지 못하면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계 2,3장). 주의 종들은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님의 음성은 다름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의 음성이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며 이것은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삼위 하나님이 일체가 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말씀”인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무시하면 그것은 바로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며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여호와의 밀씀”을 버렸기 때문에 여호와께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삼상 15:23+26). 성령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말씀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요!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성령론이 너무 혼잡스럽게 되어 무엇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성령님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성령님에 대해 혼잡스럽게 하는 것 또한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마귀의 속임수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여 구원의 완성 즉 예수님의 재림을 늦추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캠벨 몰간은 그의 <성령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틸 박사(Dr. Steele)의 말을 빌자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정통교리의 보호자(the Conservator of Orthodoxy)는 성령이신 것이다. 교회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신조가 아니다. 개별 교회가 교회의 모든 진리들을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13) 특히 너무나 많은 교단이나 신학교가 난립하고 있어 혼잡한 우리 나라의 교계 지도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입니다. 올바른 성령론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집니다(마 24:12).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벧전 5:8). 세상이 아니고 교회(성도)들을 찾아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미혹당하기 십상입니다. 예수 이름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우리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성령 충만할 수 없고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주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와 같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며(고전 13:13)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모든 율법을 이루는 것이 사랑일진대 성령님의 도움 없이 어찌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령님의 은사 없이 어찌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감정을 가진 인격체이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높여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진대 우리는 우리의 주인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그 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며(계 2,3장),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하며(엡 4:30),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하며(살전 5:19),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하며(갈 5:16),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며(갈 5:17),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갈 5:22-23),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할 때(갈 5:25)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서(엡 5:18) 성령의 권능을 가지고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행 1:8).
저는 부족하나마 이 책을 통해서 한국 교계가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올바른 사역을 감당하여 세계 교회의 모범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지”(호 4:6) 않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성령님)를 알되 힘써 알아야”(호 6:3) 하겠으며, 그럴 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성령님)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사 11:9)입니다.
또한 이 책으로 말미암아 주의 모든 종들이 삼위일체 주 하나님을, 특별히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사랑하여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성령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마음껏 사용하셔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순교 당한 주의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빨리 차서 주님의 재림이 더욱 앞당겨 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의 길이 평탄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 책의 모든 독자들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주
1) 존 오웬, 성령론(이근수 옮김), 여수룬(1999), p.48-49
2) 아더 핑크, 성령론(지상우 역), 엠마오(1994), p.24
3) ibid. p.21
4) 존 오웬, 성령론(이근수 옮김), 여수룬(1999), p.77-78
5) 헨드리쿠스 벨콥, 성령론(황승룡 역), 성광문화사(1990), p.19
6) 아브라함 카이퍼, 성령의 사역(김해연 역), 성지출판사(1999), p.319-19
7) 홍인규, 바울과 성령, 총회목회대학원 제 50 회 여름학기 교안(2002), p.446
8) 데이비드 스틸러, 커티스 토마스 공저
칼빈주의의 5대 강령, 생명의 말씀사(1991),
p.35
9) 존 오웬, 성령론(이근수 옮김), 여수룬(1999), p.130
10) 한영제 편, 기독교사전, 기독교문사(1991),
p.1013
11) 고든 피, 바울,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길성남 옮김), 좋은 씨앗(2001), p.31
12) 제임스 패커, 성령을 아는 지식(홍종락 옮김), 홍성사(2002), p.345+370
13) 캠벨 몰간, 성령론(김정식 옮김), 아가페 출판사(1994), p.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