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 마지막 임금의 최후
글/ 강기옥
조선 명종 시대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는《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에 해당하고 영일만 구룡반도를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 하여 지금의 장기곶을 호미곶(虎尾串)이라 했다. 그 호미곶에서 호랑이 등을 타고 북쪽으로 오르는 길이 7번 국도다. 그 국도는 동해안의 단순한 해안선을 따라 난 도로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열린 바다와 서쪽 내륙의 백두대간 줄기가 시선을 유혹하여 운전이 어려울 정도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망설이며 달리는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경상북도 울진을 벗어나서 삼척의 묵은 역사가 답사객을 기다린다.
신남의 해산당을 지나 궁촌에 이르면 고려의 역사를 한 몸으로 짊어지고 바닷바람에 고단한 숨을 몰아 쉬는 공양왕릉이 있다. 죽어서도 편안히 잠들지 못했음인가. 바닷바람이 센 곳에 구렛나루가 덥수룩한 얼굴처럼 덩치만 큰 무덤이다. 굳이 릉이라 할 것도 없이 초라한 묘역이다. 준경묘나 영경묘는 후손에 의해 추존된 왕인데도 그 위용이 대단하나 생전에 왕위에 있었던 공양왕릉은 쓸쓸함과 외로움만이 감돌아 허전하기 그지없다.
위화도 회군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을 몰아내고 9세의 세자를 창왕으로 세웠다. 그 이듬해에는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를 달아 강제 폐위하고 신종의 7대손 왕유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왕유는 그렇게 45세에 고려의 34대 왕이 되어 고려 왕조와 운명을 같이 했다.
이성계는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으나 명분이 없던 그도 민심은 천심이라는 순리를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우왕과 창왕의 존재가 거슬려 공양왕으로 하여금 그들을 살해하게 하고 공양왕은 다음해에 패덕한 왕이라는 명분으로 폐위시켜버렸다. 그 후에 이성계는 용상에 올랐다.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으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길 재
공양왕의 무덤에서 자기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은 고려말기로 돌아가 야은 길재가 읊은 시조라도 읊어야 하리라. 역사의 향기는 그렇게 음미하는 자에게 더 친숙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한 그루 나무도 멀쭝히 서서 안으면 내 품에 안기지 않는다.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자세를 맞추어 안아야 그 나무의 결 고운 생명감을 느낄 수 있듯이 역사도 그렇게 현장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역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곳에서 또 다시 패자의 아픔을 느껴야 한다. 공양왕의 무덤은 이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양에도 있기 때문이다. 패자의 역사는 언제나 승자에 의해 각색될 수도 있고 기록에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유실될 수 있다. 그래서 공양왕릉을 놓고 삼척시와 고양시가 서로 자기 영내에 있는 것이 진릉(眞陵)이라고 우기고 있다. 서로가 근거를 제시하며 상대방을 공격하지만 정확한 사료에 의하지 않으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를 지켜보는 답사객을 식상하게 하기 쉽다. 공양왕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시비의 발단이 되기는 하지만 세종실록에 안성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현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어 문화재청에서는 고양 원당의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인정하고 사적으로 지정해 놓은 상태다.
그래도 삼척부사가 공양왕릉을 개축했다든가 미수 허목이 쓴 척주지에도 공양왕릉에 대한 기록이 보여 시비의 여지는 남아 있다. 이 기회에 사계의 학자들이 함께 연구하여 결론을 내리든지, 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합의점을 도출해 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북 남원에서 흥부마을을 놓고 두 지역이 싸우다가 1992년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의 고증을 통해 인월면 성산리는 박첨지 설화에 의해 흥부와 놀부가 출생한 곳으로, 아영면 성리마을은 춘보설화에 의해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곳으로 받아들인 예는 공양왕릉의 문제 해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지방자치단체가 관광객 한 명이라도 더 끌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인지, 자기 고장을 찾는 손님에게 참된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관여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도 아픔을 지닌 우리의 역사이기에 같이 품을 수 있는 안목을 기르면 되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아(E. H. Carr)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이며,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듯이 우리는 그 사실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고 교훈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