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조가 뭔지 아시죠? bald eagle 대머리 독수리라는 새입니다. 실제로는 대머리가 아니고 머리가 흰색 털로 덮혀 있어서 멀리서보면 대머리 같이 보인다고 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저도 멀리서 보면 그렇게 보일까요? 사실은 white 흰색이라는 뜻의 balde, e 자가 하나 더 붙죠? b/a/l/d/e라는 고전영어에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발음도 같고 어차피 머리가 벗겨진 것 같이 보인다 해서 b/a/l/d, bald 대머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자료를 찾아 보았더니 이 새는 높이가 1m가 되고 날개를 펴면 2.3m 정도가 되는 큰 새입니다. 미국과 카나다등 북아메리카에만 서식하는데 사진을 봤더니 정말 멋있게 생겼습니다. 흰 머리가 그렇게 멋있는 줄은 예전에 몰랐습니다. 먹이를 노리다가 순식간에 내려와서 먹이를 안고는 쏜살같이 창공을 차고 올라가는 그 모습은 정말로 장관이라고 합니다. 이 새는 또 수영도 한다고 합니다. 물속에 가라 앉아서 수영 하는 것이 아니라 물위를 날개로 치면서 날아가는 것이죠. 하늘로 비상하는 속도가 시속 100마일을 낼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freeway를 달리는 차 보다도 빠른 속도입니다. 독립후인 1782년에 미국의 국조로 채택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을 가슴에 품은채, 참담한 현실을 이기고 나라를 시작한 미국에 딱 알맞은 그런 상징적인 새 같습니다.
이 날개치며 올라가는 독수리의 힘찬 비상을 바라보면서 초기 이민 개척자들은 생각 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수확 할 것 없는 맨땅!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맨몸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이 있다. 저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 가듯이 우리도 그렇게 올라가리라! 지치고 고달픈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새로운 선택에 대한 확신을 주었음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 음성을 통하여 힘을 잃고 피곤에 지친 자가 힘을 회복하기를 소원 합니다. 꿈과 소망이 희미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확신이 생기기를 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힘찬 발걸음을 띄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 임재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선포 될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입니다. 자진해서 이민온 사람들도 아니요 고향산천 뒤로 한채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입니다. 전쟁에 져서 끌려온 사람들이 무슨 마음에 드는 직업이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겠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없습니다. 손과 발이 쇠 사슬에 묶인채 노예살이를 하거나 강제 노역에 동원 되었습니다. 조그만 잘못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조금만 게으르면 채찍을 맞습니다. 싫건 부려 먹다가 병들고 약해지면 내 팽개쳐 집니다. 꿈과 소망을 가져 볼래야 가져 볼만한 환경이 허락되지 않은 그런 사람 들 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금만 고생하면 멀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 갈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생각들 마저 깨집니다.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어려움을 이기면 기쁨이 올거라고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데, 10년 20년 50년 세월은 야속하게도 흘러 가기만 할뿐 삶의 무게만 더 해 집니다.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인생의 꿈과 함께 피곤함과 곤비함이 그들을 송두리째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습니다. 내 원통함을 왜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내가 처한 현실이, 내가 당하는 아픔이 도대체 언제까지 가야 합니까? 육신이 지치고 피곤 합니다. 영혼이 곤비하여 쓰러질 것 같습니다! 2500년전 바벨론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침이었습니다.
환경은 다르고 시대는 달라도 이 곤비함과 피곤함은 여전히 현대인들마저 짓누르고 있음을 봅니다. 세세한 내용은 좀 달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침이 우리가 외치고 있는 소리와 별로 다를바 없습니다. 어쩌면 육신적인 고달픔은 덜 할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피곤함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보다 우리가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 일하면 되는 것이었고 주는 것 먹으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우리스스로 결정 해야 합니다. 잘못된 판단과 결정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누가 조언을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크고 작은 이런 순간들이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긴장을 하지 않을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비록 쇠 사슬에 묶여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목을 옭아 매는 현실의 사슬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분은 그러 더라구요 우체통 열기가 싫대요. 그것 열며는 쇠사슬과 비수가 가득 들어 있어 숨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뭔 이야긴가 했더니 각종 고지서 납부 이야기 하는거였습니다. 사실 외국생활 하면서 누구나 느끼는 생각일 겁니다. 제가 옛날에 어떤 분 한테 엽서를 한번 보낸 일이 있는데 그분이 답장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숨통을 꽉 조이는 괴물같은 것들이 가득한 우편함을 오늘도 싫은 마음으로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침 햇살처럼 환히 웃고 있는 한 장의 엽서가 있더군요. 오랜만에 우체통이 그렇게 이뻐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어디 쇠 사슬이 그것 뿐이겠습니까? 이런 사슬 저런 사슬 어쩌면 쇠사슬보다 더 무거운 사슬들을 치렁 치렁 목에 매고 어깨에 매고 다니는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죽채찍을 맞았지만 우리는 스트레스라는 새로운 채찍을 맞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목이 뻣뻣해지는 경험 몇번씩 하게 되지 않습니까?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삶의 모습속에서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평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언제 어느 구석에서 툭하고 터질지 모르는 긴장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얼마전 주보의 글에도 한번 실었지만 어느 한 기관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50년전 미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조건은 72가지가 였다고 합니다.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496가지로 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50년전에는 18가지 였는데 오늘날은 28가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생활이 낳아지고 풍성해 진만큼 그만큼 신경을 써야 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영육이 곤비하고 피곤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긴장과 복잡함과 내리 누르는 스트레스 좀 풀어 본다고 스포츠를 합니다. 여행을 합니다. 각종 취미생활을 개발을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숙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닙니다. 잠시 잊게 할 수는 있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육체가 피곤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 오는 피곤이 라면 아마 이런 방법들로도 얼마든지 풀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본질 적인 문제가 우리를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그런 방법 들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는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곤비하고 피곤한 몸으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인생의 근본적인 곤비와 피곤은 어떻게 풀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 하라는 것입니다. 29절 이하를 다시 봅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오직 여호와 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 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인생의 여러 가지 짐으로 피곤 하십니까? 실패같이 느껴지는 일들 때문에 곤비 하십니까? 여러 가지 육체의 질병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라!"
하나님은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그가 느끼는 피곤이 실패가 주는 피곤이든, 질병이 주는 피곤이든, 인생의 여러가지 무거운 짐이 주는 피곤이든 간에 반드시 그 피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새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시간 이후 저는 여러분들께서 어떤 환경에서도 피곤해 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어떤 여건에서도 쓰러져 낙담해 있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떠한 악 조건 하에서도 절대로 무너져 내리지 않으리라 확신 합니다. 왜 입니까? 여러분들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 하는자이기 때문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도록 오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특별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28절을 함께 읽습니다. "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 하신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 하신자" 여러분 이 하나님을 생각 하면 벌써 힘이 솟지 않으십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어떤 하나님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계 1:8 은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말씀 합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모든 사물과 법칙의 시작이시요 끝이되시고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 처음부터 계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함께 하실 하나님! 영원 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유한한 우리의 머리로 어찌 그 영원을 다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만은 그래도 예수 믿고 나니까 우리는 믿어지지 않습니까?
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 하셨고 우리를 창조 하셨습니다. 이 우주가 얼마나 어마 어마한 것입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1977년에 토성 탐색을 위해서 미국에서 우주선 하나를 쏘아 올렸습니다. 보이저 1호입니다. 그 우주선은 지구를 떠나면서 하루에 120 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렸습니다. 도저히 실감이 안 나는 속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기를 무려 3년 2개월 이나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토성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실감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토성, 금성이 포함된 이 태양계도 우리가 볼 때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전 우주에 비하면 그것도 한쪽 모퉁이의 작은 점 하나 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 우주는 도대체 얼마나 넓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올려 다 보는 저 하늘이 얼마나 광대하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좁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이 그 만큼 크고 광대한 것이라면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크고 광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창조하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이 천지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질서와 조화 속에서 운행을 하십니다. 어쩌면 우주와 천체, 대 자연의 법칙이 그렇게 오묘 할 수가 있습니까. 어느 것 하나 우연의 법칙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 13절은 이렇게 모든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 하십니다.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할렐루야! 천지와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이 영원 하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피곤치 않으신 분입니다. 절대로 곤비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명철이 한이 없으시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새힘을 주시고 새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 하십니다. "오직 나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라!"
'앙망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바'(qavah)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여러 가지 물건을 비틀어서 하나로 묶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앙망 한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나를 비틀고 내 지혜를 비틀고 내 지식을 비틀고 내 재물을 비틀고 내 환경을 비틀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로 묶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의지하고 싶은 것들,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들, 내가 소망하고 꿈꾸는 것들 다 비틀어서 하나님을 향하여하나로 묶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 하는 것들, 내 힘으로 어떻게 할수 없는 것들, 나를 억누르고 짓누르는 모든 아픔과 서러움을 다 비틀어서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보혜사 성령만 바라고, 소망하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밥도 먹고 살아야 하고 자녀들 공부도 가르쳐야 하고 건강도 지켜 나가야 하며 각자가 가진 인생의 목표를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소망하고 의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업도 자녀의 양육도 건강도 인생의 꿈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이 모든 것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것 다 포기하라는 그런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업도 흥왕되도록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도 훌륭한 인격으로 세상을 바로 이끌어 나가도록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도 건강하게 잘 지켜야 합니다. 내가 가진 인생의 꿈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펼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 하는 속에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도, 자녀를 양육해도, 건강을 지켜도, 인생의 꿈을 이루어도 그 근본이 어디를 향하여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것 그것 때문에 여호와를 앙망하지 말고 이런 것 다 비틀고 다 묶어서 진실하게 순수하게 여호와를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 합니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배 볼때만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순간에도 주를 앙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를 앙망한다는 것이 성경 묵상하고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 그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함께 하시는 주의 손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계에 손님이 오면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보내 주셨구나 감사하고 기뻐 하십시오. 그 사람이 얼마나 귀하게 보이겠습니까. 귀찮게 굴거나 꼴보기 싫은 손님 와도 하나님께서 나의 성품을 갈고 닦으시려는구나 주의 뜻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매상 올라갈때만 할렐루야 하지말고 매상 떨어질때도 임마누엘!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아픔이 있을 때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음 밧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나음을 소원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 하나님 은혜를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구 하시기 바랍니다. 순간 순간 생기는 기쁜 일이나 곤란한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화가 나는 일이나, 참을수 있는 일이나 못 참는 일이나 어떤 순간에도 여호와를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꿈도 주님꿈만 꾸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 합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새 힘을 부어 주신다 약속 하십니다. 31절을 다시 읽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어떤 새힘을 부어 주십니까?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다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께로 새 힘을 받은 사람들은 하늘을 향한 소망이 굳건하게 생기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굳건해지면 우리가 짐으로 생각 했던 모든 것들, 우리를 피곤하게 했던 모든 것들이 인생의 날개로 바뀝니다. 거추장 스러운 짐으로 느껴졌던 것들이 오히려 나를 하늘 높이 날아 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의 삶이 가치 있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는 하나님의 딸이요 나는 왕같은 제사장이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내가 아침이 되면 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위해 죽고 예수 위해 살고 예수님 때문에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갈수 있게 됩니다. 이런 우리가 인생의 문제로 피곤하거나 곤비 해야할 이유가 도무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새 힘을 주십니까?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않을 것이요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약속하십니다. 이 험한 세상 살아가는 그 발걸음 마저도 하나님께서 가볍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모든 것을 비틀고 하나로 묶었는데 어찌 가볍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내가 바라는 것 모든 내가 소망 하는 것 모든 내가 꿈꾸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기로 했는데 어찌 힘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앞만 보고 달음박질 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지치지 않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앞 뒤 좌우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곤치 않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이시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 하시기를 다시 한번 결단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의 어떠한 것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의 어떠한 것도 하나님 보다 귀하게 두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가진 세상의 어떤 소망도 하늘의 소망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염려도 근심도 하나님께 다 맡깁니다. 나의 실패도 무거운 짐도 하나님께 내려 놓습니다. 나의 질병도 나의 문제도 다 아룁니다. 이 모든 것 다 비틀어 묶어서 주님을 사모하는 통로로 쓰기를 원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순간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앙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설사 더 이상 피할곳 없는 벼랑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이라는 날개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 가듯 새힘을 주실 것입니다. 달려도 걸어도 지치고 피곤치 않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찬양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