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안톤 슈낙의 수필에 나오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우리를 슬프게 했으면 좋겠다. 차라리 훌쩍 흘러가버린 세월, 이별, 사라짐 등 인생의 의미를 관조하게 하는 것들이 우리를 슬프게 했으면 좋겠다. 아니 차라리 이루지 못한 꿈, 회한, 미련 등 푸른 빛 아쉬움이 우리를 슬프게 했으면 좋겠다. 이런 슬픔들은 슬퍼할 가치가 있는 슬픔들이다.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이런 유(類)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홍콩 발(發) 한국 농민들의 시위-진압-구금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손가락이 짤리고, 중금속 오염으로 전신마비가 되고, 게다가 임금착취를 당한 채 불법체류자로 공갈협박 당하며 숨어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초점 잃은 눈빛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자고 나면 망하는 소리, 절망하는 소리, 죽는 소리 등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서민들의 절규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카드 빚으로, 생활고로, 도산으로 자살한 불쌍한 영혼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네 전봇대에 붙어 있는 '못 받은 빚 찾아줌'이라는 대행업소 광고문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7년생 인삼밭이 지난 밤에 몽땅 털렸다는 농민의 억장 무너지는 소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건희 일가 불법 재산증여 수사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기발한 사기극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런데 이런 슬픔들을 위로해 주는 통렬한 신약의 예언이 있다. 한 번 또박또박 읽어 보는 것도 좋을 우리를 위한 경종이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둬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야고 5,1-6).
일곱째 계명은 '지상의 재물'과 '인간 노동의 결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 계명은 이들을 관리하는 데에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명한다.
이 계명의 기본 취지에는 (사유)재화의 공공성, 인간의 노예화, 인신매매 금지, 광물-식물-동물 자원에 대한 지배권 공유, 공동선, 자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랑 등이 함축적으로 포함돼 있다. 이를 체계적으로 강령화한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이다.
우리는 일곱 번째 계명을 '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씀으로 알아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하느님은 에덴의 범죄 이후 사람이 살아갈 방법으로 땀을 흘리게 하셨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9).
그것이 힘들든 고통스럽든 '땀'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계유지의 정당한 방법이다. 그러기에 땀은 소중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누구든지 흘린 땀만큼 정당한 대가를 얻게 된다. 땀을 흘린 사람은 그만큼의 대가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누군가의 소유물을 훔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그 소유물을 정당하게 획득하기까지 흘린 땀을 훔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기, 위조, 폭리, 절취, 착취, 가로챔 등으로 이웃의 거룩하고 소중한 땀을 훔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직접적으로 도둑질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둑질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경우들도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차지하는 모든 행동은, 비록 그것이 민법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곱째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빌려 온 재물이나 습득물을 일부러 간직하고 있거나, 장사할 때의 속임수, 부당한 품삯을 지불하는 행위, 타인의 무지나 필요를 틈타서 물건 값을 올리는 행위 등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409항).
도둑질은 탐욕(貪慾)에서 나온다. 다음에 나오는 아구르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탐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를 잘 가르쳐 준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8-9).
탐욕은 자칫하면 과욕으로 변해 부유함을 꿈꾸게 하고 너무 부유해지면 "주님이 누구냐?" 하며 배은망덕에 빠뜨린다. 또 너무 가난하게 되면 생존의 문제 때문에 탐욕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아구르는 꼭 필요한 만큼만 청하고 누리겠다는 지혜로운 기도를 바쳤다.
사실 이 세상 모든 재물은 하느님 것이다. 그러기에 청하기만 하면 필요한 만큼 주신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강력하게 상기시킨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눠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말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을 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선물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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