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해제[東國通鑑解題 ] 저자 민병하 《동국통감》은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아 성종 16년(1485)에 완성하였으며,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말에 이르는 동안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엮은 통사(通史)로서, 모두 5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초기에 편찬된 통사류(通史類)로는 권근(權近) 등이 왕명을 받아 태종 3년(1403)에 완성한 단군 조선 이래 고려말까지의 《동국사략(東國史略)》이 있고, 서거정 등이 왕명을 받아 성종 7년(1476)에 완성한 단군 조선 이래 신라말까지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가 있는데, 《삼국사절요》에 대하여는 이하 《동국통감》의 편찬 과정을 말하는 자리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동국통감》의 편찬에 착수한 것은 세조 4년(1458) 9월에 세조가 ‘본국의 서기(書記)가 탈락하여 자세하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삼국사(三國史)》와 《고려사(高麗史)》를 합하여 편년 사서(編年史書)를 만들고자 한다.’라고 하여 문신에게 명하여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는 한편, 제서(諸書)를 방취(旁取)하게 하였다는 《세조실록(世祖實錄)》의 기록이 바로 그 시작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세조는 기존의 《삼국사》와 《고려사》를 합하고 다시 사료를 더 수합 보완하여 중국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준하는 편년체 통사로서 《통국통감》을 편찬하려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조가 이러한 《동국통감》을 편찬하려 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먼저 생각되는 것은 중국의 《자치통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자치통감》은 송(宋)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중국 고대로부터 5대(五代)까지의 편년체에 의한 통사로서 역사상 여러 나라의 치란 흥망(治亂興亡)을 편람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사서(史書)였다. 《자치통감》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쳐 세종은 그 16년(1434)에 《자치통감》을 인쇄 보급하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이듬해에는 집현전(集賢殿)의 학사(學士)들로 하여금 《자치통감》의 훈의(訓義)를 짓게 하여 이를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하여 문신들에게 반사하였다. 세종은 뒤이어 주자(朱子)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대하여도 훈의를 만들게 하여 그 20년(1438)에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이라 하여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세종의 《자치통감》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 세조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고, 그 영향은 세조로 하여금 《자치통감》에 준하는 《동국통감》의 편찬을 결심하게 만든 것 같다. 세조가 세종 때 《자치통감》에 대한 관심과 그 훈의본(訓義本) 작성에 어느 정도 참여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어도 부왕(父王)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컸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되는 것은, 《자치통감》과 같은 통시대적(通時代的) 통사는 역사의 체계적 수립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을 신성시하거나 미화되는 일이 많아, 이와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 전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세조의 입장에도 부합되어 세조는 통사로서의 《동국통감》의 편찬을 결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세조는 왕위 찬탈의 정당화에 힘쓰는 한편, 전제 왕권의 강화와 부국 강병을 통한 실지 회복에 힘을 기울이던 군주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조가 《동국통감》을 편찬하려 한 동기를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위와 같은 원인이 그 일부가 된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 4년(1458) 9월에 문신에게 명하여 《동국통감》을 편찬케 하였다. 그리고 그 편찬의 명이 내려질 때 이미 《동국통감》이란 책이름이 지어진 것을 보면 세조로서는 그 동안 그 편찬을 위하여 상당한 연구와 준비가 있어 왔던 것이 분명하며, 그 체재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삼국사》와 《고려사》를 합하고 거기에 여러 문헌에서 자료를 수집 보완하여 자료집격인 장편체(長編體)를 도입한 편년체의 통사로 그 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세조는 그 4년(1458)에 《동국통감》의 편찬을 명하였으나, 세조의 뜻대로 그 편찬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자세히 알 수 없어도 그 가운데는 세조의 전제 왕권 강화의 입장과 수사관(修史官)들의 유교 사관(儒敎史觀)의 견지 입장과의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 아래 《동국통감》의 편찬 사업에 새로운 궤도가 잡힌 것은 세조 9년(1463)의 일이었다. 즉 세조는 같은 해 9월에 서현정(序賢停)에 나가 습진(習陣)을 열람한 후, 입시했던 최항(崔恒)·양성지(梁誠之)·송처관(宋處寬)·이파(李坡)·김수녕(金壽寧) 등에게 《동국통감》 편찬에 힘써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 데에 뒤이어, 양성지로 하여금 대궐 안의 유생(儒生)들을 데리고 편찬을 맡게 하고 신숙주(申叔舟)와 권남(權擥)에게는 감수(監修)를 맡게 하였으며 이파로 하여금 출납(出納)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편찬 부서로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설치하고 거기에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두었다.
이러한 새로운 조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국통감》의 편찬 사업은 원만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동국통감청의 설치와 때를 같이하여 세조와 수사관들 사이에 그 편차상(編次上)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세조는 당상과 낭청을 불러서 편차를 물어보기도 하고 직접 작성한 편찬상의 기본 원칙을 규정한 범례(凡例)를 그들에게 전하기도 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찬 사업은 여전히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세조는 그 11년(1465) 정월에 좌승지 윤필상(尹弼商)에게 명하여 《동국통감》의 편차서책(編次書冊)을 봉하여 바치게 함으로써 그 편찬 사업이 일시 중단 상태에 들어간 것 같다.
그러다가 세조 12년(1466) 3월에 동국통감청의 당상관(堂上官)으로 최항·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양성지·서거정·임원준(任元濬)·이파·이영은(李永垠) 등 9인을, 낭관(郞官)으로 이봉(李封)·성윤문(成允文)·윤자영(尹子濚)·이수남(李壽男)·정난종(鄭蘭宗)·정효상(鄭孝常)·김계창(金季昌)·권계희(權季禧)·배맹후(裵孟厚)·이경동(李瓊仝) 등 10여 인을 새로 임명하여 편찬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편찬 진용의 개편이 있은 후에도 편차 사목(編次事目)을 둘러싸고 세조와 수사관들 사이의 갈등이 그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성과도 기대할 만한 것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으며, 세조 13년(1467)의 이시애(李施愛)의 난(亂)과 그 이듬해 세조의 훙서(薨逝)로 세조에 의한 《동국통감》의 편찬 사업은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조의 유지는 뒤로 이어져, 예종은 그 원년(1469) 10월에 최숙정(崔淑精)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국통감》의 완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예종의 훙서로 또한 실현을 보지 못하였고, 그 실현을 보게 된 것은 다음 성종 때였다.
성종은 그 5년(1474)경 신숙주에게 《동국통감》을 완성토록 명하였는데, 그 이듬해 신숙주가 죽자 노사신·서거정·이파·김계창·최숙정 등에게 명하여 《동국통감》을 완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7년(1476) 12월에 일단 이를 완성하여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라는 명칭으로 왕에게 바쳤다. 이렇게 《동국통감》의 편찬이 《삼국사절요》로 귀착된 것은 앞서 세조가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컸었음과 그 완성 당시 단군 조선 이래 신라말까지의 고대사 부분만이 완성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전하는 단군 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동국통감》은 성종 14년(1483)에 시작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되었다. 즉 성종 14년 10월에 서거정이 여러 문신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에 대한 주석을 붙이고 있던 중, 경연 자리에서 연주시격의 주석과 함께 《동국통감》의 편찬을 청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년 만인 성종 15년(1484) 11월에 이를 완성하였는데, 이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을 보게 된 것은 이미 앞에 완성된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 기왕의 사서를 대본(臺本)으로 하여 정리 편찬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편찬자는 자세히 알 수 없어도 서거정을 비롯한 세조 이래의 훈신(勳臣)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완성된 《동국통감》에 대하여 성종은 만족하지 않았는데, 특히 사론(史論)에 대하여 그러하였다. 그에 수록된 사론은 모두 기성의 사론을 인용한 것들뿐이고, 편찬자가 새로 지은 사론은 한편도 없었다. 그리하여 성종은 《동국통감》의 개편을 명한 것 같으며, 성종 16년(1485) 7월 드디어 개편된 《동국통감》이 완성되어 이를 《신편동국통감》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 전하는 《동국통감》이다.
이 《신편동국통감》의 편찬자는 훈신계(勳臣系)의 서거정·이극돈(李克墩)·정효항(鄭孝恒)·이숙감(李淑瑊)·김화(金澕)·이승녕(李承寧)과, 사림계(士林系)의 표연말(表沿沫)·최부(崔溥)·유인홍(柳仁洪), 그리고 손비장(孫比長) 등 10인이었는데, 이것을 보면 《신편동국통감》은 훈신과 사림의 합작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라 하겠다. 또 《신편동국통감》에 새로 204편의 사론이 첨가되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8편을 최부가 새로 지었다는 것을 보면 그 나머지의 대부분도 사림계에 의하여 새로 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신편동국통감》은 대개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를 대본으로 하여 그것에 첨삭(添削)을 가하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화한 모두 56권으로 된 사서(史書)로서,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외기(外紀)·삼국기(三國紀)·신라기(新羅紀)·고려기(高麗紀)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권외(卷外)에 해당되는 외기는 단군 조선·기자 조선·위만 조선·사군(四郡)·이부(二府)·삼한(三韓)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단군 조선 이래 삼한까지를 본기가 아닌 외기로 취급한 것은 자료의 부족으로 왕대별(王代別) 서술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기는 신라·고구려·백제로 되어 있는데, 삼국을 대등하게 취급하되, 이 시대를 무정통 시대(無正統時代)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삼국을 독립시키지 않고 하나의 편년(編年)에 묶어서 서술하였는데, 연기(年紀)는 처음에 간지(干支), 그 다음에 중국의 연호, 다시 그 다음에 우리나라의 왕년(王年)을 표시하였다. 신라기는 통일신라 시대에 해당되어 문무왕 9년(669)에서 신라말까지의 역사로 되어 있으니, 이렇게 편차상(編次上) 통일신라 시대를 독립시킨 것은 종전의 사서와는 달리 신라의 삼국통일을 공식상 인정한 것이 되어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그리고 연기는 삼국기의 경우와는 달리 처음에 간지, 그 다음에 신라의 왕년, 다시 그 다음에 중국의 연호를 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다음의 고려기에서도 동일하여 매우 긍정적이다. 고려기는 고려 시대에 해당되어 고려 태조 19년(936)에서 고려말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렇게 고려기에서 태조 19년부터 서술하고 그 이전은 신라기에서 서술한 것은 고려의 건국에 대하여 그만큼 의의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된다. 사실 고려 태조는 신라의 반적 궁예(弓裔)의 부하였으므로 그를 신라의 반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태조의 건국에 대하여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없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론(史論)은 역사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과 역사 사실에 대한 고증(考證)을 가한 논술인 것이나, 《동국통감》의 경우에는 포폄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동국통감》의 사론 가운데 170여 편은 《삼국사기》·《동국사략》 등에 수록된 기성의 사론을 인용한 것이고, 204편은 《신편동국통감》의 편찬자에 의하여 새로 지어진 신사론(新史論)으로 되어 있다. 이 신사론은 삼강 오륜(三綱五倫)을 존중하는 것, 절의(節義)를 숭상하는 것,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것 등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것들로서 그 논지는 조선의 사대부층에게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한국사관(韓國史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국통감》은 그 사론이 한국사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것 이외에, 단군 조선 이래 고려말까지 통사로서 체계화한 사서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의가 큰 것이다. 또 《동국통감》의 편찬을 계기로 국초 이래 활발하던 역사의 관찬(官撰) 사업이 일단락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태조 이래의 역사의 관찬 사업으로는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정도전(鄭道傳) 등에 의하여 편년체의 《고려사》가 편찬된 것을 비롯하여, 태종 때 권근 등에 의한 편년강목체에 의한 통사인 《동국사략》,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 의한 기전체(紀傳體)의 《고려사》, 문종 때 김종서 등에 의한 편년체의 《고려사절요》, 성종 7년(1476)에 서거정에 의한 편년체의 《삼국사절요》가 편찬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국초 이래 역사 관찬 사업의 마무리 단계로 《동국통감》이 편찬되었던 것이다. 참조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올리는 전(箋), 동국통감(東國通鑑) 서(序), 동국통감(東國通鑑) 범례(凡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