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직장에서 2박3일의 일정으로 지방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행으로 두 사람의 직원이 있어, 나까지 세 명으로 이루어진 지방의 공공기관 방문견학 일정이었다. 모처럼 만에 외지에서 숙박을 하는 출장으로서 약간의 설레임도 있었고, 집에서 사무실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거듭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도 해방감을 준다. 서울지역의 기관을 방문하고서 경기도 하남으로 향했다.
하남에서는 목적한 시설을 방문하기 전에 시청에서 근무하는 옛 동료를 잠시 만났다. 십 오륙 년 전, 한 이 년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친구와 같았던 동료였다. 하루의 일정이 하남에서 마감되는지라, 일박하면서 옛 친구와 더불어 소주나 한 잔 나누었으면 했는데, 마침 그 친구가 그날 중으로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해야 한다기에 훗날을 기약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헤어지면서 차 창 밖으로 배웅하고 있는 옛 동료의 모습이 쓸쓸하게 비쳐졌다. 세월의 연륜은 속일 수 없어 마냥 동안(童顔) 같았던 그의 얼굴도 잔주름이 짙게 새겨져 있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각자 제갈 길을 가고 있는 삶의 고달픈 역정이 얼핏 떠올라, 쓴웃음으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얼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한 곳을 방문한 다음 고속도로를 타고 천안으로 향하였다. 다음 날 방문키로 한 기관이 천안에 소재해 있어, 일찍 도착하여 거처를 마련한 다음 피로를 풀기 위해서였다. 천안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한동안 시내를 배회하였다. 외곽지역에 있을 깨끗한 장급 모텔을 선택하자는 일행의 주문과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천안 삼거리까지 가서는 조그만 정자와 숲을 가꾸어 놓은 "천안삼거리 공원"에서 막걸리라도 한 잔 먹고 싶은 심정이 꿈틀거렸으나, 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어 인근의 모텔을 찾기로 했다. 일행에게 유서 깊은 천안삼거리의 풍류와 회고를 두서없이 지껄이면서, 숙박할 곳을 정하고 난 후에 택시를 타고 와서 술 한 잔을 하자고 했다.
천안삼거리 공원 앞 길가에 오밀조밀 자리해 있는 몇 개의 민속주점을 보니, 내가 태어난 고향 공주(公州)로 가는 고갯마루 쪽을 향하고 있어 아련한 회포가 어린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 . 여우도 죽을 때면 낳은 곳으로 머리를 향하며 숨을 거둔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아릿한 고향에의 그리움을 곰씹어 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속도로 부근의 모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저녁식사와 술 한 잔 할겸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천안삼거리로 가려 하였으나 도심에서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빈 택시는 눈에 띄지 않았다. 갑자기 바람을 동반한 추위의 엄습으로 몸들을 웅크리며, 길가에서 서성거리다가 가까운 길가의 음식점을 찾기로 했다.
마침 인적이 드믄 대로변을 막 벗어난 상가 쪽에 음식점 간판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에 썬팅으로 해물탕, 찌게 백반류가 빛바랜 채 쓰여 있었다. 식당 안에 들어가니 썰렁한 실내에 여자 한 명과 남자 둘이 화투를 치고 있었고,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광(光) 파는 사람도 없이 셋이서 고스톱을 치는구나하고 슬며시 웃으면서 주인을 찾았다.
나는 고스톱을 잘 치지 못한다. 겨우 분위기에 어울릴 정도의 실력이어서 피치 못할 경우에만 놀이에 낀다. 가끔씩 처가댁에 갈 때면 고스톱을 좋아하는 처남들과 처숙부님, 동서와 밤새도록 어울리곤 하지만, 내기에서 잃은 기억만 떠오른다.
상대방의 패를 속으로 계산하고 실수(實數)와 허수(虛數)를 연달아 내놓아 승리를 이끌어 내는 수읽기 게임에 약한 내 자신의 아둔함도 있겠지만, 평소에도 이해득실에 둔감하고 이재(理財)에 어두운 나의 미련함이 원인일 것이다.
음식점 주인은 고스톱 치는 다방마담 같은 여자의 전화를 받은 듯 밖에서 바쁘게 들어왔다. 땅땅하고 후덕하게 보이는 모습이 재래시장에서 좌판을 펴 놓고 각종 반찬류를 파는 익숙한 풍모의 전형적인 초로의 아주머니였다.
해물탕에 식사와 소주를 시켜 한 잔 마시면서 서서히 하루의 피로가 풀려지기 시작하면서 일행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먼 곳으로 와서도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업무에 관련된 일이라서 가끔씩 제동을 걸고는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자며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멋적게들 웃다가 몇 마디 하고는 어느새 다시 업무 얘기로 연결되어 셋이서 껄껄 웃고 말았다.
고스톱 치는 사람들과 우리 일행만 있는 한산한 식당의 분위기 때문인지, 주인아주머니가 힐끗거리면서 일행의 대화를 듣다가 소주 한 병 추가주문을 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술과 함께 무언가를 들고서 얼른 다가오더니, 헛기침과 더불어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가 펴놓은 것은 두툼한 앨범이었다.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앨범을 보니, 기교 없이 끼워 놓은 스냅 사진들에는 젊은 권투선수가 트로피를 들고서 포효하는 모습과 코우치와 후원자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서 부어오른 얼굴로 승리를 만끽하는 사진도 보였고, 시합 중인 장면으로서 스트레이트를 내 뻗고 있는 광경 등 젊은 권투선수의 파이팅 넘치는 사진첩이었다.
사진 속의 젊은 파이터는 이내 알아 볼 수 있었다. 이틀 전 심야에 텔레비젼에서 녹화 중계한 올해의 프로권투 신인왕전에서 본, 열아홉 살의 인파이터로 천안00체육관 소속의 백모 선수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 선수를 빨리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신인왕에 화려하게 등극 하였다는 것보다도,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제법 풍상을 겪은 듯한 특이한 인상과, 결승전에서 거의 완벽한 기량을 구사하는 30세의 막강한 상대를 무지막지(?)하게 몰아 붙여 케이오 시키던 광경이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즘 보기 힘든 헝그리 복서의 빛나는 투혼이었다. 과거 칠십 년대에 우리나라의 경량급 세계 챔피온들이 철저한 헝그리 정신으로 혜성과 같이 등장하던 때의 당찬 그 모습이었다. 홍수환의 사전오기 신화가 그랬고, 김태식과 유제두의 등장이 그랬었다.
식당 아주머니는 아들의 천하평정에 감격스러워 했다. 옆에서 아주머니의 고생도 이제 끝입니다라고, 격려조로 얘기해 주면서 "내가 아드님의 팬이요. 하는 것을 보니 꼭 세계 챔피언이 될거요"하니, 슬며시 앨범을 가슴에 껴안고는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얼굴에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주머니의 모습에서는 거친 인고의 세월에 대한 망각과, 무던히도 속을 썩였을 아들을 향한 뜨거운 모정이 끈끈히 발산되고 있었다.
식당 문밖까지 배웅하면서 자주 들르라고 인사하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모텔로 향하면서 소주 몇 병에 거나해진 심신은 더없이 훈훈하다. 하남에서는 십여 년 만에 만나는 동료를 보았고, 천안에서는 신인왕 복서의 어머니 집에서 우연히도 술을 마셨다.
내일 가게 될 대구에서는 또 어떠한 만남이 있을까 ... 역시 여행은 새로움의 발견이요,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인간사(人間事)의 끈을 연결하는 단초(端初)가 분명하다.
(1999 . 2 . 4)
1 [가으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길지만 결코 길지만은 않은 삶의 여정을 돌아다봅니다. 낮선 곳 낮선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어떤 형태로든 인연의 고리가 연결되기도 하고...선생님의 여정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2.03.22>
2 [한기홍] 가으리님! 관심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졸편에 대한 과분하신 호평!! 채찍으로 여기겠습니다. 자주 방문해 주세요.^^ <2002.03.23>
3 [김동삼] 싸인 받아놓으시지 않구요? 잘 지내셨지요. 제일먼저 출근하여 창문을 여니 뒷산의 까치소리가 경쾌하게 들립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으려나. 작은 기대를하며 하루를엽니다. 까치소리만큼 경쾌한 하루되시길... <2002.03.26>
4 [한기홍] 동삼님! 항상 저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시는군요. 님의 금옥같은 수필을 항상 훔쳐보고 있습니다. 언제고 뵙게되면 쌓인 회포를 풀어 볼 참입니다.^^ <2002.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