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작품평~개별작]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는 수필
- 한기홍의 ‘아프리카를 그리며’ -
허창옥(수필평론가)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먼저 해둔다. 신문기사가 소재이다. 신문기사나 영화의 내용에서 글을 이끌어내는 것은 비교적 수월하다. 하지만 이미 독자들이 숙지하고 있는 객관적 사실을 글로 써서 공감을 얻어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작가의 기량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작품 ‘아프리카를 그리며’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과 그리움의 심상에서 출발하여 현생인류 화석에 대한 신문기사 그리고 액자소설(?)이라 할 수 있는 호모사피엔스 이달투의 가족 이야기, 그리고 다시 현재로 이어진다. 작가(일인칭) - 이달투(삼인칭) - 작가(일인칭),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다. 생물학적 사유를 떠나서 지리적 역사적으로 자신의 기원을 유추해 보는 과정이 재미있다. 작가의 유추를 따라가다 보면 빠른 장면의 전환이 보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마침내 독자는 ‘곰나루 언덕을 뛰어’가는 새카만 악동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작품의 중간에 삽입된 원시인 가족 이야기는 판타지이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는 어른 두 명과 어린이 한 명의 화석에 살을 입히고 생명을 불어넣어 이야기 속 가족으로 등장시키는 데까지 상상은 뻗어나간다. 그리고 비교적 자세히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이달투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자유에 대한 희구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크허허어… 우와야,”
“어후르르… 어흐르르,”(171쪽)
옛사람의 언어도 만들어냈다. 유성의 나라로 가고 싶은 이달투의 염원은 아마도 작가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 것일 게다. 결말부분에 가서 작가는 문명, 윤리실종, 물신주의의 현대를 혐오하면서 ‘무위의 강물을 떠 마시고 싶다’고 토로한다.
아!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173쪽)
이 문장에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 아프리카는 결코 지명이 아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야하는 아득한 시원의 어느 시점이며 장소이다. 누구에게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은 있다. 그래서 울림이 크고 깊다.
-격월간지 「에세이스트」 2005년도 통권2호 수록 평론-
한기홍의 <滿月>
허창옥(수필가. 문학평론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월」은 문학적 형상화가 잘 된 작품이다. 아버지가 -노숙자-아버지-노숙자로 이어진 구성이다. 아버지와 화자. 노숙자와 그 아들. 두 가계의 부자가 등장한다. 작가는 늙어가는 아버지를 축축한 눈으로 바라보고 노숙자는 잃어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젖는다. 만월이 교교하게 천지를 감싸던 어젯밤, 아버지가 동네 삽십 계단 위 언덕배기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얘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예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야이, 이눔들아! 날 보라구. 날!” 하시면서 한동안 삿대질에 이어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추시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중략) 덩더쿵 덩더쿵 소리가 교교한 달빛에 뒤범벅이 되어 쏟아져 내리듯 신명나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월. 삽십 계단.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아버지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져 글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그 아버지는 복덕방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부동산 중개소에서 한 달에 계약서 몇 장 못 쓰시고 동네 노인들과 낮술로 소일하신다. 효도를 다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작가는 우울하다. 그 우울함이 귀가 길에 서울역에서 본 노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희망도 꿈도 벗어버린 채 신산한 몰골을 내보이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등짝을 맡긴 사람들’과 플랫홈에서 담배를 빌려 달라던 오십 줄의 노숙자를 생각한다. 잃어버린 아들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그 노숙자의 모습이 처연해서 작가는 가슴이 저렸을 것이다.
막차. 플랫홈 공중에 걸린 이만오천볼트 전기선 위로 부서지는 달빛이 작가의 그런 심정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수준 높은 표현이다. 줄거리의 두 갈래. 아버지와 노숙자의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그리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잇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웃음 잃은 시대와 빈곤한 사회 분위기로 두 가지 이야기를 연결할 수는 있겠다. 그리고 물기 어린 부자간의 애정이 두 갈래의 이야기를 이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글 뒤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결미 부분에서 작가는 삼십 계단에 올라서 아버지처럼 두 팔을 쳐들고 어깨를 들썩여 본다.
그런데 내 어깨에 떨어지는 교교한 달빛 때문일까. 묘하게도 덩실 덩실 천지가 돌아가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글 밖에서 작가는 덩더쿵 덩더쿵 춤을 추었을 게다. 그 춤에는 아버지와 노숙자에 대한
작가의 애련한 마음이 묻어났을 터이다.
(『에세이스트』4호, 2005. 11-12월호, 허창옥, <자기고백과 성찰의 문학>, 315-316쪽)
한비 시인님의 /누항시, 자명고를 기우며/ 에 대한 작은 소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참빛 김동욱(시인)
누항시 = 생명시
때로 시인에 내재한 의식의 흐름 (configuration of think; stream of mind) 이, 의식의 분열을 가져오면 한비 시인이 스스로 지적한 것처럼 누항시가 될 수 도 있지만 그러나 /무의식의 의식/은 시적 영감, 순간 포착을 통한 영감 (Inspiration) 을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건져낸 의식을 초월한 생명력이 살아 숨쉬는 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李相의 많은 시들이 그러했고, 가끔씩 우리도 그런 무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시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Inspiration 이 항상 있는 건 아니지만, 저 자신의 경우 내가 얼마만큼 창작의 안테나(Sense of Creation) 를 켜고 다니느냐에 따라 자주 그런 기회를 습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한비 님의 시 / 자명고를 기우며/ 는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언어가 어느 순간 무엇 인가의 motive에 의해 Inspired(영감화 된) 되어진 것이라 봅니다. 뿌연 황사가 마치 오랜 흑백 필름처럼 비쳐지는 재래시장 한 복판을 벗어나 홀로 서있는 한 시인은 그곳에서 갑자기, (사실은, 옛날의 골동품들과, 장고와, 한 구석에 잠든 악기들---을 보고서) 오래 누적되어 온 추억을 떠 올리며 순식간에 Inspiration 을 통해 써 내려간 시라고 봅니다.
시인은 푸념 같은 소리를 통해, 둥둥둥 찢겨진 자명고 소리를 통해 푸념처럼 사회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토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와 일치된 푸념 같은 시인의 목소리가 정색하고 넥타이 멘 젠틀맨의 목소리 보다 더 크게 각인되어 지는 것은 왜일까요? 나는 늦봄 재래시장 한켠에서 눈물에 취해 토해 내는 시인의 푸념에 도취하여 잠 들 수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황홀하리만치 밝은 대낮같은 캄캄한 어둠의 도시 한 복판에서 ---- /참빛 드림/
(2003 . 5 . 14)
* 제 홈페이지 문학란의 손님 창작방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chambitsesang.com
한기홍의 「겨울 팽나무, 아내여 이것 좀 보오」
김종완(수필평론가 . 에세이스트 발행인)
제주 기행문이다. 작가는 제주 땅을 밟으면서도 고단한 삶의 무게를 떨쳐내지 못했다. 직장 일로 동행하지 못한 아내가 눈에 밟힌다. 몇 차례 자영업의 실패로 버거운 빚을 안고 산다. 박봉은 여섯 식구의 생활비 정도였고, 두 아이의 교육비와 이자상환은 아내의 빠듯한 맞벌이로 해결하는 형편이다. 계획에 잡혀 있는 문우들과의 문학기행을 아내는 빠졌으면 하는 눈치였다. 제주의 날씨는 추웠다. 십 년 만의 폭설이요, 추위라고 했다.
작가는 제주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여러 가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엉뚱하게도 관광품목에는 들어 있지도 않은 팽나무만을 본 듯하다. 김정희의 유배지에 가서 「세한도」를 보고 나오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팽나무다. 도대체 제주의 팽나무가 어쨌기에 작가의 눈을 놓아주지 않는가.
저게 무어요? 운전기사에게 물으니, 마치 코를 풀어 팽개치듯 '팽나무요'한다. 팽나무의 모양새가 워낙 그로데스크하여 '토사구팽 할 때 그 팽이요?' 물으니, '그렇소. 제주에선 저 나무만이 장수한답니다. 원체 몰골이 구불거리고 쓰임새가 없어 도끼 맞을 일이 없는 나무지요. 그래서 그런지 삼사백 년 먹은 팽나무는 보통입지요.' 하며 피식 웃는다.
작가는 제주관광은 흥미가 없는지 마치 팽나무 아래 주저앉듯 典籍을 찾아 아예 莊子의 人間世編을 펼쳐들고는 南伯子棊를 찾는다. 남백자기가 거대한 팽나무를 만났다.
남백자기는 탄식하면서 나무의 장구함에 경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쓸모가 없었기에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군! 신(神)과 같이 추앙 받는 사람도 이처럼 항간의 재능이 없었기에,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聖人이란 항간의 재능이 없었기에 가능한 경지라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 곳이 없는 존재, 그것은 오늘날 작가가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몇 번의 자영업의 실패는 그에게 심한 열패감을 안겨주었나 보다.
작가는 제주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 추사다. 선생의 謫居址에 있는 전시실에서 한 점의 그림 앞에서 묵묵히 서있다. 작가는 “어깨 위에 또다시 천근의 무게로 짓누르는 추운 삶의 한기”를 느낀다. 歲寒圖에서다. 묵화에서 섬광처럼 쏟아져 오는 쓸쓸함이 동짓달 北原의 황량한 삭풍처럼 가슴에 휘몰아친다. 갈필로 그린 추운 소나무, 잣나무를 지나 그림의 오른편 상단에 새겨진 세한도 畵題가 아득히 꽂혀오는 메마른 선생의 일갈 같아서 어느새 등줄기에 엷은 땀이 배었다.
“추운 시절의 그림일세. 우선이 이것 좀 보게나(歲寒圖 . 藕船是賞).” 우선은 추사선생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호다. 그런데 작가는 그 그림에서 창백한 아내의 얼굴을 본다. 까칠까칠한 붓으로 춥게 그린 허름한 집의 창문에서. 가슴 아프다. 추운 그림을 그린 추사도, 그 그림 앞에서 새삼 천근의 삶의 무게를 느끼는 작가도, 따뜻한 집이 아닌 추운 집의 창가에 그려지는 아내도.
전시실을 나왔다. 이제부터 독자들은 작가가 펼치는 본격적인 예술의 세계를 감상하게 된다. 한기홍, 그는 우리 시대에 몇 안 되는 아티스트다. 세한도에서 추사의 기개를 배웠다. 작가는 팽나무 한 그루를 추사의 적거지 돌담 너머에 세워 그의 기개를 펼친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세한도의 고절함을 털어 내려는 듯 담배를 꺼내 물고 소나무가 있는 돌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 팽나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부르짖고 말았다. 막 들이킨 담배연기가 놀란 목구멍에서 회오리치면서 울컥울컥 기침이 터져 나왔다. 추사선생의 자화상인 늙은 소나무처럼 낙락장송이 된, 팽나무 한 그루가 돌담 밖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그윽이 웃고 있었다. 거침없는 제주의 풍상 속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생명의 끄나풀을 은인자중하면서… 내면으로만 빙그레 웃으면서 넉살좋게 살아온 팽나무. 장자가 감탄한 신목(神木)이 그저 그렇게 서있었다. 뒤틀린 몸뚱이하며, 구불대는 가지에 투박한 조롱박 같은 겨울날 웃음을 잔뜩 매달고서 말이다.
앞에서 세한도의 창문에서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는데 어찌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내를 등장시키지 않으리. 그런데 이 사람, 막힘이 없다. 추사가 소나무로 세한도를 그려 그의 제자 우선에게 주었듯이, 그는 팽나무로 또 한 편의 세한도를 그려 그의 아내에게 바친다.
여행길 내내 쓸쓸했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팽나무 밑둥 닮은 공동(空洞)이 환한 원으로 점차 커지면서, 보름달 같이 둥그런 아내 얼굴이 일렁였다. 아내가 곁에 있다면 반평생 그리도 인색했던 사랑한단 말이라도 거침없이 해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거렸다. 담배를 비벼 끄면서 나직이 뇌까렸다.
'추운 겨울 팽나물세, 아내여 이것 좀 보오'
기막힌 결구다. 추사는 종이 위에 세한도를 그리고 “추운 시절의 그림일세, 우선이 이것 좀 보게나(歲寒圖.藕船是賞)” 라고 화제를 썼다. 작가는 낙락장송 팽나무가 서 있는 빈 하늘 한 쪽에 “추운 겨울 팽나물세, 아내여 이것 좀 보오”라고 화제를 휘갈겨 썼다. 한기홍의 세한도가 완성되었다.
작가여, 우리 항간의 재주가 없으니 聖人이나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2010년도 ‘에세이스트’ 통권29호 김종완 수필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