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공[始祖公] 이 무[李 茂]
우리 성씨의 시조가 되시는 어른의 이름자 즉 휫짜는 李 茂라 쓰고"무 자 할아버지" 라 읽습니다.이 어른과 이름이 닮은 조선초기 무장이 하나 있지만 그는 시대적으로도 크게 차이가 나는 동명이인이니 혼동하지 않기 바랍니다. 시조공 께서는 [차마 이름을 자주 거론할 수 없어 시조공-始祖公-이라 함]원래 중국 당나라 고종때 황실과 같은 성을 쓰고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려고 군사를 이르킬때 소정방[蘇定方]의 참모장 격인 중랑장[中郞將]자격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공헌을 하시게 되자 김유신과 김춘추가 공을 무척 추앙, 지금 황해도 땅을 식읍으로 하고 연안백[延安伯]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마련하니 공은 당나라로 돌아가시지 아니하고 이 땅에 자손을 남기시게 되어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조 할아버지에 대해 좀더 자세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먼저 시조 할아버지의 태어나신 날자는 아직 기록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모르고 있습니다.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왜놈들의 침공에 사면초가가 되었던차 이를 극복할 심산으로 당나라에 지원군을 요청, 이에 중랑장이란 직함을 지니시고 서기 660년3월에 당나라 왕실의 대표하여 오신 것인데 이미 역사적으로도 밝혀진 일이지만 김유신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결사대에 의하여 진격하지 못하고 부여 입성하는 약속날을 지키지 못하자 당나라 장군들이 신라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지레 짐작하고 트집을 잡아 백제를 멸하는 즉시 신라까지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우리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신라를 치는 일은 당나라의 당초 의도와는 다르며 신라장병 또한 용기 백배한 모습을 보니 함부로 신라 군사를 넘보는 것은 명예스럽지 못하거니와 지금 고구려가 백제 망하는걸 그냥 보고 있을 형세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정세하에 오히려 백제를 평정하는 일 조차 실패할 우려도 있으니 우선 신라 군사들과 무예 시합을 하여본 다음에 신라까지 병합[倂合]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라고 욕심 많고 무모한 당나라 장군들을 달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일촉즉발 당나라와 신라가 다시 엉겨 붙어 또 전쟁을 한마당 치루어야하는 비극적인 위기를 견제하여 많은 생령을 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이로서 당나라의 체면도 지키고 온 국력을 들어 백제를 치느라고 피로에 지친 신라의 위태한 정황도 모면케 하여 주어 마침내 양국간의 평화[平和]를 유지케 한 당시로서는 매우 탁월한 조치를 하셨기 때문에 그 공적[功跡]은 역사에 높이 기록되어 마땅한 것입니다.
이 기록은 조선환여지[朝鮮奐與誌] 망해정기[望海亭記]에 있는바
"신라를 구해 준 은인[恩人]"이라고 김유신이 극구칭송[極口稱頌]하였다는 기록은 당시로서는 매우 감개 깊었던 모양으로 기록 역시 실상을 그대로 묘사한 듯 매우 상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는 정복을 해서 영토를 넓힌 장군에 대해서는 그 공을 높히려 하지만 막후에서 아슬아슬한 위기를 극복하고 많은 인명의 회생을 미리 막아준 공로에 대하여는 그 기록을 소흘히 다루는 형편이라 시조 할아버지의 억천만겁[億千萬劫] 기리기리 칭송하여 마땅한 공적을 우리 자손들은 잘 알고 본받아야 합니다.
옛말에도 곡돌사신. 초두란액[曲突徙薪 焦頭爛額]이라는 지혜로운 말이 있는데 이는 미리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고치고 불붙기 쉬운 땔감을 치워 버린 방비를 해서 사고를 막은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오히려 예방[豫防]은 커녕 사고[事故]가 터진 다음에 불을 끄느라고 머리털이 타 버리고 얼굴이 그을린 자의 공로만 쳐들어 인정해 준다는 말과 흡사한 것입니다. 옛말하나 그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시조 할아버지께서 이미 이러한 문제를 미리 통찰하시고 일을 잘 마무리 지운 것을 알게 된 김유신과 김춘추는 그야말로 당나라와의 전쟁을 또 시작하여야 하는 위기를 간신히 모면케 하여준 시조 할아버지의 탁월하신 판단을 고맙게들 여기고 이에 답하기 위하여 황해도 연안을 중심으로한 식읍[食邑] 700호를 드린것이 아닙니까.
그후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은 서기 668년 고구려까지 아울러 마침내 삼국 통일의 대업이 성취되자 김유신의 주청도 있어 이 고마운 은인에게 보다 확실한 보답을 하고자 식읍 1000호와 연안후[延安候]로 하여 우리 시조 할아버지를 공경하면서 당나라로 가시는 것을 만류하였던 것입니다.
황해도 일대의 토지와 인구를 소유하고 관장하였다는 것으로 일시적인 행정관이 아니라 영구적인 왕토[王土]와 같은 것이며 봉건시대 제후[諸侯]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높으신 위치입니다. 지금도 경상북도 군위군[軍威] 효령면 장군동에는 제동서원이 있는데 그곳 숭무전[崇武殿]에는 3장군[이 무,김 유신,소정방]세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이 있고 해마다 단오절[음력 5월 5일]에는 제사를 올리였는데 이제는 3월 3일로 날짜를 바꾸어 지금도 그 고을의 수장인 군수[郡守]가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墓所]는 황해도 연안지방에 있다는 전언이 있으나 남북이 가로막혀서 찾을 수 없고 다만 1821년 6월경에 연안읍 서쪽 옥녀봉 아래 은일동에 큰 고총이 하나 있다는 것을 그 기록문과 묘의 지석[祉石]을 현재 제2국립묘지 가장 높은 자리인 충남 유성읍 갑동 신좌유향[申座酉向]에 단소[壇所]를 정하여 해마다 자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참배객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묘지석에는 분명히 "延 安 伯 李 茂"라고 기록되어 전합니다. 국립묘지 경내에 이미 1500년이 지난 어른의 단소[壇所]를 정할 수 있게된 사연도 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박씨인데 국군묘지법을 만들고 이미 그 부근에 모시고 있던 시조 할아버지의 단소를 옮길려고 하자 우리 종친들이 그 대통령을 찾아가서 시조 할아버지의 역사적 공적을 말한즉 그 대통령도 "마땅히 이 어른은 이 자리 맨 높은 곳에 설단[設壇]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