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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 법정동
망우동(望憂洞)【법정동】
망우동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망우고개’에서 유래되었다. 망우고개는 높이 780m의 망우산 정상에서 거의 동북쪽에 위치한 국도 46번과 6번이 접경되는 지역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다음 사후에 묻힐 곳을 찾기 위해 개국공신 남재(南在) 등을 대동하고 명당(明堂)을 찾던 중, 현재의 건원능(建元陵) 부근에서 세혈(三穴)을 얻었는데 이곳은 이미 남재가 묘터를 잡아 놓은 터였다. 이에 태조가 남재에게 다른 곳과 바꿀 것을 제의하였으나 남재는 “왕릉 예정지였던 곳에 어찌 후일에 제가 묻힐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경(不敬)일 뿐 아니라 후손에게도 중죄가 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불가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내가 불망기(不忘記)를 써 줄 터이니 이것으로 증빙을 삼으라”하고 친히 불망기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일설은 태조가 명당을 찾던 중 중신들이 지관(地官)들과 함께 검암산(儉岩山)밑의 능터를 다시한번 살펴보고 흡족한 마음으로 환궁하는 길에 망우산 고개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이제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於斯吾忘憂矣)”하였다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리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이곳의 지세로 보아 선왕(先王)이 묻힐 자리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 이때 무학 대사가 태조에게 "선왕의 능지보다 대왕의 신후지지로 적합 합니다" 다시한번 살펴보라고 권하여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본즉 과연 명당임이 밝혀졌고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는 길에 망우 고개 위에서 잠시 멈추어 자신이 보았던 능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아! 아!, 이것으로 오랫동안 근심을 있겠노라."고 한데서 망우고개 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삼각점이 되는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 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3만년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한강유역 확보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후기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초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양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에 속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양원리(養源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가 되어 변동 없이 내려왔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소속 되어 망우동이 되었으며 1977년 9월1일에는 망우동이 망우1·2동으로 분동·신설되었다. 그 뒤 1980년 7월 1일에는 망우 2동을 망우 2·3동으로 분동·신설하였고 그후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자 망우동은 중랑구에 소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우리(望憂里)【옛 법정동】
망우리 동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망우고개’에서 유래되었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 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3만년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한강유역 확보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후기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초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양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에 속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양원리(養源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가 되어 변동 없이 내려왔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소속 되어 망우동이 되었다. →망우동(望憂洞)【법정동】
면목동(面牧洞)【법정동】
면목동은 조선시대 이곳 들판을 구문(旧門)계, 고문(古門)계, 문계, 곰계 등으로 불렀으며 목장의 문이 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 즉 ‘面牧’이란 말목장 또는 목문(牧門)의 소재지로 마목(馬牧)의 의미와 유사하며 목장을 마을 앞에 두었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또 성동구 살꽂이다리(箭串坪)를 중심으로 한 목마장과도 관계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 면목리였으며 198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 ; 성외) 전관중계(箭串中契), 하계(下契) 면목리동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면목리와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 일부에 해당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 면목리가 되었다. 그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면목동은 동대문구에 소속되었다.
1968년 1월 1일에 행정동 간 조정으로 면목동이 면목1, 2동으로 분동 되었고 1973년 7월에는 관악. 도봉의 2개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 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면목3, 4동으로 분동하였다.
1975년 10월 1일에는 면목 2동을 면목 2· 5동으로, 1977년 9월 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 6동으로 분동하였고 1988년 1월 1일 대통렬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자 면목동은 동대문구로부터 분리, 중랑구에 소속되었으며 면목1·2·3·4·5·6·7동으로 분동하였다. 그후 1992년 7월 1일 면목6동을 면목6· 8동으로 분동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목리(面牧里)【옛 법정동】
묵동(墨洞)【법정동】
묵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먹(墨)을 제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라고 도하며 또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 마을의 동명으로 붙여야 학문 이 발달한다는 비기설(秘記說)에 따라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먹골’ 또는 ‘먹굴’이라 불렀다. 월계동은 옛날 마을 가운데 연못이 있어 그 연못 모양이 연적(硯滴) 같아서 ‘연촌(硯村)’ 또는 ‘벼루말’이라 했으며, 또 하계동은 ‘필동(筆洞)’, 즉 ‘붓골’이라 불렀다. 따라서 월계동․ 하계동․ 묵동을 연결하면 삼각 형이 되므로 그 안에 인재가 배출된다고 믿고 있었다.
조선시대(1895, 5, 26) 전국을 23부 336군으로 개편한 이듬해 8월 6일,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한성부에서 분리,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망우리면 묵동리(墨洞里)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自意)로 경기도 행정구 역을 폐합 개편할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묵동리가 되었다.
그 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시의 대대적인 구역확장이 있었는데 이때 서울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묵동이 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로 중랑구가 신설되어 묵동은 중랑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묵동리(墨洞里)【옛 법정동】
상봉동(上鳳洞)【법정동】
상봉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자연마을인 상리(上里)의 ‘上’자와 봉황리(鳳凰 里)의 ‘鳳’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망우리면(忘憂里面) 상리․봉황리로 변동 없이 내려왔다.
상봉동의 옛지명 가운데 하나인 봉황동(鳳凰洞)은 중앙선 철로 남쪽에서 상봉2동에 해당되는데 102번지와 103번지 일대이다. 이곳의 지형은 낮지만 나르는 봉황의 모습(飛鳳形)이어서 알을 까기 위해 봉황이 막 날아와 앉는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동명이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상봉리가 되었다.
그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동대문구에 소속되어 상봉동이 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어 중랑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봉리(上鳳里)【옛 법정동】
신내동(新內洞)【법정동】
신내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여러 마을 이름 중에서 신현(新峴) 마을의 ‘新’ 자와 내곡(內谷) 마을의 ‘內’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망우리면(忘憂里面) 신현리(新峴里) 내동 리(內洞里)였다.
일제시대 초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신현리, 내동리였으며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신내리(新內里)가 되었다.
그 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시의 관할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속하여 신내동이 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어 중랑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 르고 있다.
1996년 3월 1일, 신내동을 신내1·2동으로 분동·신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곳은 신내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많은 아파트 신축공사로 신흥주택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신내리(新內里)【옛 법정동】
중하리(中下里)【옛 법정동】
중화동(中和洞)【법정동】
중화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봉화산(烽火山) 아래 자연마을인 가운뎃마을(中里) 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中下里)’라고 하였는데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중화리(中和里)’로 고쳐졌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중리(中里)․하리(下里)였다. 일설에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南面) 길완리(吉完里)라는 설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楊洲 郡) 구리면(九里面) 중하리(中下里)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당시, 동민들의 의견이 ‘하’(下)자 대신 화목을 도모하는 의미로 ‘화’(和)자를 넣어 중화동으로 개칭할 것을 서울특별시에 건의, 동대문구에 속하여 중화리(中和里)라 하였다.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자 중화동은 중 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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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법정동
답십리(踏十里)【법정동】
답십리의 유래는 왕십리와 같이 ‘조선 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도(王都)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하여 동이름을 ‘답십리’(踏十里)라 했다‘는 구전(口傳)이 있으며 일설에는 ‘동대문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이므로 ‘답십리’라는 땅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때 한성부 동부 인창방의 일부로서 성저(城底) 십리가 되므로 답십리라 하였으며 1751년(영조 27년)에 간행된 수성책자(守城冊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 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 성외) 답십리계(踏十里契)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답십리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답십리는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 속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원말, 웃말, 아랫말을 병합하여 다시 답십리라 하여 성밖이 되므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붙였었다가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다시 경성부에 편입하여 경성부 답십리정(踏十里町)이라 하고 1943년 4월 1일 구제(區制) 직제로 동대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고 1945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치었고 1946년 10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의하여 답십리정을 답십리동으로 고치고 1963년 1월 1일 답십리 1, 2동으로 분리되었다. 1977년 9월 1일에 답십리1, 2, 3, 4, 5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답십리동(踏十里洞)【법정동】
답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초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도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동명을답심리(踏尋里)’라 했다는 구전(口傳)이 있으며, 일설에 의 하면 동대문으로부터 십 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왕십리와 같이 답십리라 는 동명이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城底) 10리에 속해 있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 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성외) 답십리계(踏十里契)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답십리계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고 1911년 4월 1일 경기 도령 제3호에 의해 답십리는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 속했으며 1914년 4훨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자의로 축소 병합시킬 때 성외에 해당된 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으며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답십리는 답십리정 (踏十里町)으로 개칭되었으며, 1943년 4월 1일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역소(區役所) 관할 내에 속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치고 1946년 10월 1일 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답십리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답십리정(踏十里町)【법정동】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원말, 웃말, 아랫말을 병합하여 다시 답십리라 하여 성밖이 되므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붙였었다가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다시 경성부에 편입하여 경성부 답십리정(踏十里町)이라 하고 1943년 4월 1일 구제(區制) 직제로 동대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고 1945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치었고 1946년 10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의하여 답십리정을 답십리동으로 고치었다. →답십리(踏十里)【법정동】
병점리(餠店里)【법정동】
신설동(新設洞)【법정동】
신설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숭신방(성외)에 새로 설치된 신설계(新設契)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 신설동은 새로 마을이 만들어졌다 하여 ‘새말’ 또는 ‘신 리(新里)’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발간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숭신방(성외) 신설계(新設契)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신설동(新設洞)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통폐합시킬 때 신설동은 성외 지역에 해당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신설리(新設里)라 하였으며 1936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의 구역을 확장하였는데 이때 신설동은 경성부에 다시 편입되어 신설정(新設町)이라 하고 동부출장소(東部出張所) 소속이 되었다. 그 뒤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부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누어지면서 신설동은 동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신설동이 되어 동대문구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설리(新設里)【법정동】
신설정(新設町)【법정동】
용두동(龍頭洞)【법정동】
용두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에 소속되었고 영조27년(1751)에 발간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인창방(仁昌坊)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용두리(龍頭里)였다.
1911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하여 경성부 행정조직이 개편되었다. 즉, 도성 내는 5부 36방으로 하고 성외는 8면으로 하였는데 이때 용두동은 고양군 인창면(仁昌面)에 속하였으며 그 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로 동과 구역을 통폐합할 때 용두동은 성밖 지역이라 하여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으며, 1936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대폭 확장하였는데 이때 신설동은 경성부에 편입되어 용두정(龍頭町)이라 하고 동부출장소 관할 아래 속했다. 그 후 1943년 4월 1일 총독 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부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누어질 때, 용두정은 동대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용두동이 되어 동대문구에 소속돠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두리(龍頭里)【법정동】
용두정(龍頭町)【법정동】
이문동(里門洞)【법정동】 이문동 동명의 유래는 마을에 도둑을 지키는 이문(里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 름이다. 우리말로 ‘이문골’ ‘이문안’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里門洞’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외 지역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발간된 「도성 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이문동(里門洞)이었다.
일제 초기인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하여 경성부 인창면 이문동(里門洞)이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이문동 성밖 지역에 해당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이문정(里門町)으로 고쳐지면서 동부출장소에 속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6년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이문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문리(里門里)【법정동】
이문정(里門町)【법정동】
장안동(長安洞)【법정동】
장안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목마장(牧馬場)으로 유명했던 ‘장안벌’, 즉 장 안평(長安坪)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한글학회 지은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장한성(長漢城)은 아차산(峨嵯山)주위에 있는 옛성으로 아단(阿旦)산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였는데 돌로도 쌓고 흙으로도 싼 흔적이 남아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서로 각축전을 벌였으며 고구려 평강왕 때, 장수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전사하였음’이라 기록되었다. 또한 장한벌은 송정동과 답십리 사이에 있었던 벌판으로 조선시대 군마의 방목장이자 기마훈련장이었다. 이에 따라 '마장 안벌'이라 하던 것이 '장안벌'로 줄여지고 이 명칭이 '장안벌' 또는 '장한벌'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안동은 조선시대에는 목마장이었으나 개화기(開化期)부터 차차 농토로 개척 되어 비옥한 토지로 변하자, 일제(日帝)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장안평 의 농토를 동양척식회사에 강제로 소속시켜 그들의 소유가 된 바 있다.
1914년 9월 27일 경성부조례 제 8호에 의하여 동부, 서부, 북부, 용산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하고 남부 관내를 제외한 경성부 전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동부, 서부, 북부의 출장소는 일시 폐지되고 그 업무가 본청으로 이관되기도 하였지만 1936년 4월 경성부의 구역이 확장됨과 함께 다시 동부, 서부 및 영등포출장소가 설치되어, 그동안 존속하여 오던 용산출장소와 함께 경성부의 성외지역을 관할하였다. 이때 각 출장소가 폐지되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종전 동부출장소 관내에 동대문구가 설치된 것이다.
그 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해 중곡동‧능동‧군자동이 성동 구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됨에 따라 그 일부를 통합해서 신설된 마을이 바로 장안 동으로, 동대문구에 서울시 동의 연혁 중 연륜이 짧은 마을이다.
1975년 10월 1일 장안동은 서울특별시조례 979호에 의거, 당시 성동구 중곡동, 능동, 군자동 각 일부를 통합하여 장안동을 신설함으로써 장안동이 만들어졌다.
1985년 8월 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 2015호에 의거, 동사무소를 설치(41동→43동)하고 장안1, 2동을 장안1, 2, 3, 4동으로 분동하였다.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이었던 장한평, 장한벌의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현재 지하철 5호선이 통과하고 있는 이곳의 지하철역 이름을 장한평역(長漢坪驛)으로 이름을 지어 옛 이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동대문구 장안동 중고자동차시장 앞을 기점으로 하여 장안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사가정길과 교차하는 도로를 장한로(長漢路)로 명명하여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
전농동(典農洞)【법정동】
전농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왕의 친경지(親耕地)였던 적전(적전; 일명 典農) 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6)에 발간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성외) 전농리계(典農里契) 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계(東小 門外契)의 전농리였다.
그 뒤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강행된 뒤 일제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친 다음해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仁昌面) 전농리 라 칭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우리의 부(府)・군(郡)을 통폐합을 단행할 때, 이곳을 성밖 마을이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한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시키고 일제식 명칭인 전농정(典農町)으로 개칭하여 동부출장소 관할 아래 두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부출장소를 동대문구로 개칭할 때 동대문구역소의 관할 아래 두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전농동이 되어 동대문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농리(典農里)【법정동】
전농정(典農町)【법정동】
제기동(祭基洞)【법정동】
제기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의 풍농(豊農)을 기원하기 위해 이 마을에 친경 대(親耕臺), 즉 선농단(先農壇)을 만들어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계터(제터)․북제기․방아다리․보린계(保隣契) 등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동부 인창방창(仁昌坊)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수성책자(守城 冊子)인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제기리계(祭基里契)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제기리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韓日合邦)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도성 외의 동을 용산․ 서강(西江)․ 두모(豆毛)․ 숭신(崇信)․ 인창(仁昌)․ 연희․ 한지(漢芝) 등 8면으로 하였을 때 제기리는 경성부 인창면에 속하였으며, 그 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자의로 통폐합 또는 축소시켰는데 이때 제기동은 성외라는 이유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숭인면 일부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됨에 따라 제기동은 일제식 명칭 개정에 따라 강제로 제기정(祭基町)으로 개칭 되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로 구(區)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개칭할 때, 제기동으로 하여 동대문 구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기리(祭基里)【법정동】
제기정(祭基町)【법정동】
청량리(淸凉里)【법정동】
청량리동(淸凉里洞)【법정동】
청량리 동명의 유래는 현재 청량 1동 2번지에 청량사(淸涼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량사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안내 문에는 옛날부터 이곳에 절터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청량사가 있는 곳은 바리산의 푸른 수림(樹林)과 맑은 샘물이 흘러 여름철에 청량(淸涼)한 기운이 감 돌아 옛날 피서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성외)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성외) 청량리계(淸涼里契)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 계(東小門外契)의 청량리(淸涼里)가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5부 8면제가 실 시될 때 청량리는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 속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 시 제7호에 의해 부(府)․ 군(郡)의 명칭 및 관할구역을 자의로 개정하였는데, 이 때 청량리는 성밖 지역이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속했 으며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 변경하였는데 이때 고양군 숭인면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됨에 따라 동부출 장소를 두고 청량리를 청량리정(淸涼里町)으로 고쳐 이 출장소 관할하에 두었으 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구(區)제도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청량리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관할하 에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량리정(淸凉里町)【법정동】
회기동(回基洞)【법정동】
회기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산5번지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묘소인 회묘(懷墓, 陵 ; 현 西三陵 경내 이장)가 있는 데에서 유래 되었다. 연산군 10년(1504)에 능으로 승격되어 회릉이라 했으며 이 마을을 회릉 동(懷陵洞)이라 하였다. 그 뒤 능이 다시 묘로 됨과 함께 회묘동(懷墓洞)으로 불 렀으며 ‘懷’자가 다시 음이 같은 ‘회(回)’자로 바뀌어 회기동(回基洞)‧ 회묘리(回墓 里)로 되었다가 회기리(回基里)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성외)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회기리(回基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 회기동 병점리(餠店里)라 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우리나라 부(府) ․ 군(郡) ․ 동(洞)을 자의로 통폐합을 단행할 때 회기동은 도성 밖 지역에 해당된다고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소속시켜 회기동 부근 병점리를 합하여 회기리(回基里)로 하였다. 병점리는 옛날 이 마을에 떡을 파는 전이 많이 있었던 데서 ‘떡전거리’라고도 하였다.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 회기정(回基町)으로 개칭하였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구(區)제도 실시에 의해 동대문 구역소에 소속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회기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기리(回基里)【법정동】
회기정(回基町)【법정동】
휘경동(徽慶洞)【법정동】
휘경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순조(純祖)의 생모인 원빈(緩嬪) 박씨의 묘소 인 휘경원(徽慶園)이 있은 데서 유래되었다. 원빈 박씨의 산소는 철종 6년(1855) 10월에 양주 순강원(順康園;풍양 仁嬪金氏묘) 우강(右岡)으로 옮겼다가 철종14년 5월에 다시 양주 달마동(達摩洞)으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城外)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휘경원(徽慶園)이라 하였 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仁昌面) 휘경원이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로 동명과 구역을 통폐합할 때 휘경동은 성밖 지역이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시키고 ‘園’자 대신 ‘里’자를 붙여 휘경리라 했으며,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휘경리는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일제식 명칭인 휘경정(徽慶町)이 되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구(區)제도를 실시하면서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 제1조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휘경동으로 하여 동대문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랑구 법정동
망우동(望憂洞)【법정동】
망우동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망우고개’에서 유래되었다. 망우고개는 높이 780m의 망우산 정상에서 거의 동북쪽에 위치한 국도 46번과 6번이 접경되는 지역에 위치한 고개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다음 사후에 묻힐 곳을 찾기 위해 개국공신 남재(南在) 등을 대동하고 명당(明堂)을 찾던 중, 현재의 건원능(建元陵) 부근에서 세혈(三穴)을 얻었는데 이곳은 이미 남재가 묘터를 잡아 놓은 터였다. 이에 태조가 남재에게 다른 곳과 바꿀 것을 제의하였으나 남재는 “왕릉 예정지였던 곳에 어찌 후일에 제가 묻힐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경(不敬)일 뿐 아니라 후손에게도 중죄가 돌아가게 되는 것이니 불가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내가 불망기(不忘記)를 써 줄 터이니 이것으로 증빙을 삼으라”하고 친히 불망기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일설은 태조가 명당을 찾던 중 중신들이 지관(地官)들과 함께 검암산(儉岩山)밑의 능터를 다시한번 살펴보고 흡족한 마음으로 환궁하는 길에 망우산 고개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이제 오랫동안 근심을 잊을 수 있게 되었노라(於斯吾忘憂矣)”하였다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리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이곳의 지세로 보아 선왕(先王)이 묻힐 자리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 이때 무학 대사가 태조에게 "선왕의 능지보다 대왕의 신후지지로 적합 합니다" 다시한번 살펴보라고 권하여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본즉 과연 명당임이 밝혀졌고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는 길에 망우 고개 위에서 잠시 멈추어 자신이 보았던 능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아! 아!, 이것으로 오랫동안 근심을 있겠노라."고 한데서 망우고개 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삼각점이 되는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 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3만년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한강유역 확보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후기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초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양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에 속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양원리(養源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가 되어 변동 없이 내려왔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소속 되어 망우동이 되었으며 1977년 9월1일에는 망우동이 망우1·2동으로 분동·신설되었다. 그 뒤 1980년 7월 1일에는 망우 2동을 망우 2·3동으로 분동·신설하였고 그후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자 망우동은 중랑구에 소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우리(望憂里)【옛 법정동】
망우리 동이름의 유래는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망우고개’에서 유래되었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 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의 역사는 기원전 3만년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한강유역 확보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며, 후기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초 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양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에 속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양원리(養源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가 되어 변동 없이 내려왔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소속 되어 망우동이 되었다. →망우동(望憂洞)【법정동】
면목동(面牧洞)【법정동】
면목동은 조선시대 이곳 들판을 구문(旧門)계, 고문(古門)계, 문계, 곰계 등으로 불렀으며 목장의 문이 있던 곳에서 유래되었다. 즉 ‘面牧’이란 말목장 또는 목문(牧門)의 소재지로 마목(馬牧)의 의미와 유사하며 목장을 마을 앞에 두었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또 성동구 살꽂이다리(箭串坪)를 중심으로 한 목마장과도 관계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楊州面) 면목리였으며 198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남서(南署) 두모방(豆毛坊 ; 성외) 전관중계(箭串中契), 하계(下契) 면목리동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면목리와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 일부에 해당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 면목리가 되었다. 그뒤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동구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면목동은 동대문구에 소속되었다.
1968년 1월 1일에 행정동 간 조정으로 면목동이 면목1, 2동으로 분동 되었고 1973년 7월에는 관악. 도봉의 2개구가 증설됨과 동시에 구간 조정으로 면목동의 일부가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면목1동을 면목3, 4동으로 분동하였다.
1975년 10월 1일에는 면목 2동을 면목 2· 5동으로, 1977년 9월 1일에는 면목1동 일부를 면목 6동으로 분동하였고 1988년 1월 1일 대통렬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자 면목동은 동대문구로부터 분리, 중랑구에 소속되었으며 면목1·2·3·4·5·6·7동으로 분동하였다. 그후 1992년 7월 1일 면목6동을 면목6· 8동으로 분동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목리(面牧里)【옛 법정동】
묵동(墨洞)【법정동】
묵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먹(墨)을 제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라고 도하며 또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 마을의 동명으로 붙여야 학문 이 발달한다는 비기설(秘記說)에 따라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먹골’ 또는 ‘먹굴’이라 불렀다. 월계동은 옛날 마을 가운데 연못이 있어 그 연못 모양이 연적(硯滴) 같아서 ‘연촌(硯村)’ 또는 ‘벼루말’이라 했으며, 또 하계동은 ‘필동(筆洞)’, 즉 ‘붓골’이라 불렀다. 따라서 월계동․ 하계동․ 묵동을 연결하면 삼각 형이 되므로 그 안에 인재가 배출된다고 믿고 있었다.
조선시대(1895, 5, 26) 전국을 23부 336군으로 개편한 이듬해 8월 6일,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나누면서 한성부에서 분리,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망우리면 묵동리(墨洞里)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自意)로 경기도 행정구 역을 폐합 개편할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묵동리가 되었다.
그 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로 서울시의 대대적인 구역확장이 있었는데 이때 서울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묵동이 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로 중랑구가 신설되어 묵동은 중랑구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묵동리(墨洞里)【옛 법정동】
상봉동(上鳳洞)【법정동】
상봉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자연마을인 상리(上里)의 ‘上’자와 봉황리(鳳凰 里)의 ‘鳳’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망우리면(忘憂里面) 상리․봉황리로 변동 없이 내려왔다.
상봉동의 옛지명 가운데 하나인 봉황동(鳳凰洞)은 중앙선 철로 남쪽에서 상봉2동에 해당되는데 102번지와 103번지 일대이다. 이곳의 지형은 낮지만 나르는 봉황의 모습(飛鳳形)이어서 알을 까기 위해 봉황이 막 날아와 앉는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동명이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상봉리가 되었다.
그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동대문구에 소속되어 상봉동이 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어 중랑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상봉리(上鳳里)【옛 법정동】
신내동(新內洞)【법정동】
신내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여러 마을 이름 중에서 신현(新峴) 마을의 ‘新’ 자와 내곡(內谷) 마을의 ‘內’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망우리면(忘憂里面) 신현리(新峴里) 내동 리(內洞里)였다.
일제시대 초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신현리, 내동리였으며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신내리(新內里)가 되었다.
그 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시의 관할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동대문구에 속하여 신내동이 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어 중랑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 르고 있다.
1996년 3월 1일, 신내동을 신내1·2동으로 분동·신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곳은 신내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많은 아파트 신축공사로 신흥주택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신내리(新內里)【옛 법정동】
중하리(中下里)【옛 법정동】
중화동(中和洞)【법정동】
중화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봉화산(烽火山) 아래 자연마을인 가운뎃마을(中里) 과 아랫마을(下里)의 글자를 따서 ‘중하리(中下里)’라고 하였는데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중화리(中和里)’로 고쳐졌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중리(中里)․하리(下里)였다. 일설에는 경기도 양주군 남면(南面) 길완리(吉完里)라는 설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楊洲 郡) 구리면(九里面) 중하리(中下里)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당시, 동민들의 의견이 ‘하’(下)자 대신 화목을 도모하는 의미로 ‘화’(和)자를 넣어 중화동으로 개칭할 것을 서울특별시에 건의, 동대문구에 속하여 중화리(中和里)라 하였다.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중랑구가 신설되자 중화동은 중 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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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법정동
답십리(踏十里)【법정동】
답십리의 유래는 왕십리와 같이 ‘조선 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도(王都)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하여 동이름을 ‘답십리’(踏十里)라 했다‘는 구전(口傳)이 있으며 일설에는 ‘동대문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이므로 ‘답십리’라는 땅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조선 때 한성부 동부 인창방의 일부로서 성저(城底) 십리가 되므로 답십리라 하였으며 1751년(영조 27년)에 간행된 수성책자(守城冊子)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 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 성외) 답십리계(踏十里契)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답십리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답십리는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 속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원말, 웃말, 아랫말을 병합하여 다시 답십리라 하여 성밖이 되므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붙였었다가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다시 경성부에 편입하여 경성부 답십리정(踏十里町)이라 하고 1943년 4월 1일 구제(區制) 직제로 동대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고 1945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치었고 1946년 10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의하여 답십리정을 답십리동으로 고치고 1963년 1월 1일 답십리 1, 2동으로 분리되었다. 1977년 9월 1일에 답십리1, 2, 3, 4, 5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답십리동(踏十里洞)【법정동】
답십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초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왕도를 정하려고 이곳을 밟았다 하여 동명을답심리(踏尋里)’라 했다는 구전(口傳)이 있으며, 일설에 의 하면 동대문으로부터 십 리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왕십리와 같이 답십리라 는 동명이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城底) 10리에 속해 있었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 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성외) 답십리계(踏十里契)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답십리계로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고 1911년 4월 1일 경기 도령 제3호에 의해 답십리는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 속했으며 1914년 4훨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자의로 축소 병합시킬 때 성외에 해당된 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으며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답십리는 답십리정 (踏十里町)으로 개칭되었으며, 1943년 4월 1일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역소(區役所) 관할 내에 속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치고 1946년 10월 1일 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답십리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답십리정(踏十里町)【법정동】
1914년 4월 1일 경기도 고시 제7호에 의해 원말, 웃말, 아랫말을 병합하여 다시 답십리라 하여 성밖이 되므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붙였었다가 1936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다시 경성부에 편입하여 경성부 답십리정(踏十里町)이라 하고 1943년 4월 1일 구제(區制) 직제로 동대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고 1945년 8월 15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고치었고 1946년 10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의하여 답십리정을 답십리동으로 고치었다. →답십리(踏十里)【법정동】
병점리(餠店里)【법정동】
신설동(新設洞)【법정동】
신설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숭신방(성외)에 새로 설치된 신설계(新設契)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 신설동은 새로 마을이 만들어졌다 하여 ‘새말’ 또는 ‘신 리(新里)’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동부 숭신방(崇信坊)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발간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숭신방(성외) 신설계(新設契)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신설동(新設洞)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통폐합시킬 때 신설동은 성외 지역에 해당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신설리(新設里)라 하였으며 1936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의 구역을 확장하였는데 이때 신설동은 경성부에 다시 편입되어 신설정(新設町)이라 하고 동부출장소(東部出張所) 소속이 되었다. 그 뒤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부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누어지면서 신설동은 동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신설동이 되어 동대문구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설리(新設里)【법정동】
신설정(新設町)【법정동】
용두동(龍頭洞)【법정동】
용두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모습이 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에 소속되었고 영조27년(1751)에 발간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인창방(仁昌坊)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용두리(龍頭里)였다.
1911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하여 경성부 행정조직이 개편되었다. 즉, 도성 내는 5부 36방으로 하고 성외는 8면으로 하였는데 이때 용두동은 고양군 인창면(仁昌面)에 속하였으며 그 뒤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로 동과 구역을 통폐합할 때 용두동은 성밖 지역이라 하여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으며, 1936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대폭 확장하였는데 이때 신설동은 경성부에 편입되어 용두정(龍頭町)이라 하고 동부출장소 관할 아래 속했다. 그 후 1943년 4월 1일 총독 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부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누어질 때, 용두정은 동대문구역소(東大門區役所)에 편입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용두동이 되어 동대문구에 소속돠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두리(龍頭里)【법정동】
용두정(龍頭町)【법정동】
이문동(里門洞)【법정동】 이문동 동명의 유래는 마을에 도둑을 지키는 이문(里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 름이다. 우리말로 ‘이문골’ ‘이문안’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里門洞’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외 지역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발간된 「도성 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이문동(里門洞)이었다.
일제 초기인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하여 경성부 인창면 이문동(里門洞)이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이문동 성밖 지역에 해당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이문정(里門町)으로 고쳐지면서 동부출장소에 속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6년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이문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문리(里門里)【법정동】
이문정(里門町)【법정동】
장안동(長安洞)【법정동】
장안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목마장(牧馬場)으로 유명했던 ‘장안벌’, 즉 장 안평(長安坪)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한글학회 지은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장한성(長漢城)은 아차산(峨嵯山)주위에 있는 옛성으로 아단(阿旦)산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였는데 돌로도 쌓고 흙으로도 싼 흔적이 남아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서로 각축전을 벌였으며 고구려 평강왕 때, 장수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전사하였음’이라 기록되었다. 또한 장한벌은 송정동과 답십리 사이에 있었던 벌판으로 조선시대 군마의 방목장이자 기마훈련장이었다. 이에 따라 '마장 안벌'이라 하던 것이 '장안벌'로 줄여지고 이 명칭이 '장안벌' 또는 '장한벌'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안동은 조선시대에는 목마장이었으나 개화기(開化期)부터 차차 농토로 개척 되어 비옥한 토지로 변하자, 일제(日帝)는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장안평 의 농토를 동양척식회사에 강제로 소속시켜 그들의 소유가 된 바 있다.
1914년 9월 27일 경성부조례 제 8호에 의하여 동부, 서부, 북부, 용산의 4개 출장소를 설치하고 남부 관내를 제외한 경성부 전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동부, 서부, 북부의 출장소는 일시 폐지되고 그 업무가 본청으로 이관되기도 하였지만 1936년 4월 경성부의 구역이 확장됨과 함께 다시 동부, 서부 및 영등포출장소가 설치되어, 그동안 존속하여 오던 용산출장소와 함께 경성부의 성외지역을 관할하였다. 이때 각 출장소가 폐지되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종전 동부출장소 관내에 동대문구가 설치된 것이다.
그 뒤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해 중곡동‧능동‧군자동이 성동 구에서 동대문구로 편입됨에 따라 그 일부를 통합해서 신설된 마을이 바로 장안 동으로, 동대문구에 서울시 동의 연혁 중 연륜이 짧은 마을이다.
1975년 10월 1일 장안동은 서울특별시조례 979호에 의거, 당시 성동구 중곡동, 능동, 군자동 각 일부를 통합하여 장안동을 신설함으로써 장안동이 만들어졌다.
1985년 8월 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 2015호에 의거, 동사무소를 설치(41동→43동)하고 장안1, 2동을 장안1, 2, 3, 4동으로 분동하였다.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이었던 장한평, 장한벌의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현재 지하철 5호선이 통과하고 있는 이곳의 지하철역 이름을 장한평역(長漢坪驛)으로 이름을 지어 옛 이름을 이어가고 있으며, 동대문구 장안동 중고자동차시장 앞을 기점으로 하여 장안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사가정길과 교차하는 도로를 장한로(長漢路)로 명명하여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
전농동(典農洞)【법정동】
전농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왕의 친경지(親耕地)였던 적전(적전; 일명 典農) 이 있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6)에 발간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성외) 전농리계(典農里契) 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계(東小 門外契)의 전농리였다.
그 뒤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강행된 뒤 일제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친 다음해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仁昌面) 전농리 라 칭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우리의 부(府)・군(郡)을 통폐합을 단행할 때, 이곳을 성밖 마을이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8호에 의한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시키고 일제식 명칭인 전농정(典農町)으로 개칭하여 동부출장소 관할 아래 두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동부출장소를 동대문구로 개칭할 때 동대문구역소의 관할 아래 두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전농동이 되어 동대문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농리(典農里)【법정동】
전농정(典農町)【법정동】
제기동(祭基洞)【법정동】
제기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의 풍농(豊農)을 기원하기 위해 이 마을에 친경 대(親耕臺), 즉 선농단(先農壇)을 만들어 왕이 친히 제사를 지내던 자리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계터(제터)․북제기․방아다리․보린계(保隣契) 등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동부 인창방창(仁昌坊)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수성책자(守城 冊子)인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제기리계(祭基里契)였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제기리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韓日合邦)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도성 외의 동을 용산․ 서강(西江)․ 두모(豆毛)․ 숭신(崇信)․ 인창(仁昌)․ 연희․ 한지(漢芝) 등 8면으로 하였을 때 제기리는 경성부 인창면에 속하였으며, 그 뒤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동명과 구역을 자의로 통폐합 또는 축소시켰는데 이때 제기동은 성외라는 이유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에 편입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숭인면 일부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됨에 따라 제기동은 일제식 명칭 개정에 따라 강제로 제기정(祭基町)으로 개칭 되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로 구(區)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개칭할 때, 제기동으로 하여 동대문 구의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기리(祭基里)【법정동】
제기정(祭基町)【법정동】
청량리(淸凉里)【법정동】
청량리동(淸凉里洞)【법정동】
청량리 동명의 유래는 현재 청량 1동 2번지에 청량사(淸涼寺)라는 사찰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량사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안내 문에는 옛날부터 이곳에 절터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청량사가 있는 곳은 바리산의 푸른 수림(樹林)과 맑은 샘물이 흘러 여름철에 청량(淸涼)한 기운이 감 돌아 옛날 피서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성외)에 속했으며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의하면 동부 인창방(성외) 청량리계(淸涼里契)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 계(東小門外契)의 청량리(淸涼里)가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5부 8면제가 실 시될 때 청량리는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 속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 시 제7호에 의해 부(府)․ 군(郡)의 명칭 및 관할구역을 자의로 개정하였는데, 이 때 청량리는 성밖 지역이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속했 으며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해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 변경하였는데 이때 고양군 숭인면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됨에 따라 동부출 장소를 두고 청량리를 청량리정(淸涼里町)으로 고쳐 이 출장소 관할하에 두었으 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구(區)제도 실시에 따라 동대문구 에 속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청량리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관할하 에 두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량리정(淸凉里町)【법정동】
회기동(回基洞)【법정동】
회기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산5번지에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묘소인 회묘(懷墓, 陵 ; 현 西三陵 경내 이장)가 있는 데에서 유래 되었다. 연산군 10년(1504)에 능으로 승격되어 회릉이라 했으며 이 마을을 회릉 동(懷陵洞)이라 하였다. 그 뒤 능이 다시 묘로 됨과 함께 회묘동(懷墓洞)으로 불 렀으며 ‘懷’자가 다시 음이 같은 ‘회(回)’자로 바뀌어 회기동(回基洞)‧ 회묘리(回墓 里)로 되었다가 회기리(回基里)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성외)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회기리(回基里)였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 회기동 병점리(餠店里)라 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우리나라 부(府) ․ 군(郡) ․ 동(洞)을 자의로 통폐합을 단행할 때 회기동은 도성 밖 지역에 해당된다고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소속시켜 회기동 부근 병점리를 합하여 회기리(回基里)로 하였다. 병점리는 옛날 이 마을에 떡을 파는 전이 많이 있었던 데서 ‘떡전거리’라고도 하였다.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 회기정(回基町)으로 개칭하였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구(區)제도 실시에 의해 동대문 구역소에 소속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회기동으로 하여 동대문구 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기리(回基里)【법정동】
회기정(回基町)【법정동】
휘경동(徽慶洞)【법정동】
휘경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순조(純祖)의 생모인 원빈(緩嬪) 박씨의 묘소 인 휘경원(徽慶園)이 있은 데서 유래되었다. 원빈 박씨의 산소는 철종 6년(1855) 10월에 양주 순강원(順康園;풍양 仁嬪金氏묘) 우강(右岡)으로 옮겼다가 철종14년 5월에 다시 양주 달마동(達摩洞)으로 옮겨졌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仁昌坊; 城外)에 속했으며 갑오개혁(1894) 때 에는 동서(東署)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휘경원(徽慶園)이라 하였 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 인창면(仁昌面) 휘경원이 되었으며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 획정에 따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일제가 자의로 동명과 구역을 통폐합할 때 휘경동은 성밖 지역이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에 편입시키고 ‘園’자 대신 ‘里’자를 붙여 휘경리라 했으며, 그 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에 의하여 경성부 구역확장에 따라 휘경리는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일제식 명칭인 휘경정(徽慶町)이 되었으며 194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해 구(區)제도를 실시하면서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 제1조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고칠 때 휘경동으로 하여 동대문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