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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부흥운동
한국교회 성도들이 꼭 읽어야 할 메시지
김문 요약
1. 비운의 조선역사
19세기 조선의 역사는 한 마디로 비운의 역사였습니다. 백여 년 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973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조선의 역사는 일련의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였습니다. 그 당시 아시아는 남하하고 있고, 중국은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었고, 일본은 아시아의 발판기지로 삼으려고 했고, 그리고 미국은 한국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의식 있는 한국의 지도자들이나 국민들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나라는 일본도 아니고 중국도 그리고 미국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오직 민족을 구원하실 이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이 철저한 의식이 백년 전에 한국인들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돌이켜 볼 때 1세기 전의 민족적 위기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 가운데 영적인 각성운동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기쁘신 섭리였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 놀라운 부흥운동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9세기말에 무디 부흥운동, 1904-1905년에 웨일즈 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8년 중국 호난성 부흥운동은 이 시대 방흥한 대표적인 부흥운동입니다. 한국의 부흥운동은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민족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백성들이 서서히 깨닫기 시작할 즈음 미국과 영국, 호주, 웨일즈, 인도에서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이 영적각성의 밑거름을 제공한 데다 외국으로부터 부흥운동의 소식은 좌절과 실의,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백성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사경회 운동과 깊은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습니다. 한국의 부흥운동을 이해할 때 꼭 기억하실 것은 한국의 부흥운동이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특징되는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의 특징은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이 회개운동은 말씀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성령은 독자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1903년과 1904년의 선교보고서에 의하면 평양 지역의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 지역은 물론 목포에서, 그리고 심지어 중국 심양에서까지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에서 열리는 사경회가 있는데도 멀리 평양 지역 사경회로 몰려드는 이유는 영적 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평양을 비롯한 북부지역은 영적 각성운동의 센터가 되었던 것입니다. 북부 지역에 영적 각성운동이 일고 한국교회 성장을 주도하면서 한국 안에 평양지역과 서울지역이 비교되기 시작했습니다. 1903년 당시 신학월보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서울 교회나 평양 교회나 하나님을 섬기고 읽는 성경도 하나요 가는 곳도 한 곳이요, 가는 길도 한 길이요, 믿음과 바람이 다 같거늘, 평양 교우들은 열심히 힘쓰고 서울 교우들은 잠자는 모양이니 성경이 가라사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얻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보시는 교우들은 평양 교우들이 열심히 힘써 하나님을 섬기는 정성을 알기 바랍니다."
2. 하디의 원산부흥운동 이야기
1903년 8월 원산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발흥했습니다.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 하디로 알려졌지만 이 부흥운동의 모체인 기도의 불씨를 놓은 사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남감리교 여 선교사 와이트와 카나다 장로교 여 선교사 매컬리 두 명의 여자 선교사였습니다. 와이트 선교사는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사건 때문에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온 사람이었고 매컬리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로 원산에 거점을 삼고 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모여서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선교사들 가운데 영적인 각성 운동이 잇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기도모임이 1934년 한국 선교 50주년을 맞았을 때 하디가 "1903년 조선교회 부흥의 불길은 감리교화 장로교의 두 여선교사가 연합하여 기도하는 중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그 기도모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기도의 소문이 주변에 알려졌습니다. 기도모임은 그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합류하면서 원산 지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함께 기도하는 모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1903년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이들 원산지역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공개적인 기도회를 열고 남감리교 의료선교사 하디를 강사로 청빙합니다.
이미 은혜를 경험한 가운데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1주일 동안 요한일서를 가지고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도회 처음부터 하디는 성령의 강권적인 은혜로 울음으로 강의를 시작하여 울음으로 강의를 끝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그 안에 역사하셔서 그의 교만을 꺾으시고 그 안에 자리잡고 있던 은밀한 죄악들을 통회케 하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하디는 자신의 교만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알다시피 필자는 토론토 의과 대학을 졸업해서 의사라고 하는 자부심, 의과대학을 졸업했다는 교만함, 그리고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실패의 원인이 한국 사람들에게 있다고 생각을 햇는데 그러나 실패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제가 말씀을 통해서 발견했습니다." 기도회 동안 원산의 기도회 그 현장에 모인 선교사들 앞에서 있는 그대로 다 토로한 것입니다.
곧 하디의 회개는 그곳에 모인 이들의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하디의 회개의 고백을 들은 그곳에 모인 선교사들 역시 "우리도 똑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그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인들 가운데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선교사들이 고백합니다. 사실 한국인들은 체면 문화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의식하지만 하나님은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한국 선교 초기 한국인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들을 깊이 통회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요즘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하디가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토로하기 시작하니까 한국인들 사이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로소 한국인들이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 진 것입니다. 하디의 회개에 이어 회중들 사이에서도 죄를 깨닫기 시작하자 원산 감리교회에 회개의 역사, 영적각성이 일어났습니다.
하디를 통해 한국인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하디를 통해 동료 선교사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료에 의해서 동료가 은혜를 받기가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디가 은혜를 받은 후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운 도전과 은혜를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삶의 변화였습니다. 회심 후 그의 삶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만 아니라 동료들이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변화를 받기 전에는 하디한테 치료를 받으러 한국인 환자들이 잘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디가 너무 쌀쌀맞아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의사인 하디를 찾아가기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디가 은혜를 받은 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후에는 그가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디의 변화가 그만큼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이 같은 하디의 인격적 변화를 지켜본 동료 선교사들은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성령께서 하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디가 만난 그 성령을 자신들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사모했던 것입니다.
하디는 자신이 인도하는 집회를 통해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경험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 가운데 영적각성운동을 위해 자기를 도구로 부르셨다는 일종이 소명의식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1904년 2월에 그에게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금화군 지경대로 향했습니다. 강원도 지경대로 향하던 하디는 그곳 가까이 새술막에 하루를 묵으면서 "하나님이여 원산에서 베푸셨던 똑 같은 은혜를 이곳에서도 베풀어주시옵소서"라며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강원도 지경대에서 집회 동안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디는 후에 이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주님은 나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그 다음 12일 동안에 사경회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결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을 받았고 지난 3년 동안 남감리교와 관련이 있었던 거의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몇몇 새로운 사람들이 회심을 경험했다. 사경회가 끝나기 전날 미국의 영사의 소환을 받고 서울에 갔던 원산의 나의 동료 선교사들이 새술막에 도착을 했다. 그들도 그 다음날 그 동안에 있었던 함께 기도해 왔던 사역의 성령의 권능의 은혜로우심으로 뒤덮인 것을 발견하고는 대단한 격려와 힘을 얻었다. 그 날의 집회 특별히 그날 오후 집회와 저녁 집회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일생 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후 하디를 통해 부흥운동이 서서히 확대되어 1904년 6월에 들어 비로소 "부흥회"라는 말이 한국에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회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쓰였습니다. 하나는 이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신앙을 갱신하거나 신앙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이 이 기회를 통해서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부흥회는 그런 면에서 기성 신자들이나 처음 교회에 찾아온 초신자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하디의 부흥회가 계속되면서 부흥운동이 저변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1월 안식년을 계획하고 있던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원산 부흥운동의 불길이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0월에 서울과 평양과 제물포에서 열리는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세 군데서 똑 같은 놀라운 회개의 역사,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0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린 하디의 서울집회에 성령의 능력이 놀랍게 나타났습니다.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남녀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10월 16일부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하디의 평양부흥회 때에 주께서 권능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심령을 사로잡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한 선교사는 "이 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강하게 회개하는 백성들은 본국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철저한 회개의 역사는 이어 열린 하디의 제물포 부흥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케이블 선교사는 Korea Methodist에 "또 다른 놀라운 부흥"이라는 글에서 "나는 결코 전에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 그와 같은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할 만큼 성령의 역사가 강력했습니다. 하디가 인도한 서울과 평양과 제물포 집회 모두에 강력한 회개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부흥운동의 움직임을 목도하면서 선교사들은 영적 각성운동이 이 민족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부흥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기 위해 1906년 1월 신년부흥회를 전국적으로 갖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장감연합공회 결성 때 참여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일차적으로 추진할 것이 불신자들을 전도해 교회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는 기성신자들이 성령의 충만, 영적각성을 경험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이 일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부흥집회 첫번째 목적은 새로운 신자의 등록보다 교회 내에 영적각성이어야 합니다. 사역이 먼저 깊이가 있으면 그 다음에 자연히 넓이는 따라 올 것입니다." 새신자 전도에 앞서 기성신자들이 먼저 영적으로 각성하는 일이 선행될 때 한국 교회가 참된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기성신자들이 먼저 은혜를 받아야 전도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진단이었습니다.
3. 평양 대부흥운동의 전야
1906년 신년부흥회를 통해 부흥운동의 열기가 더욱 더 저변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1907년 하반기에 접어들어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첫째가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평양선교사 사경회입니다. 남녀,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평양 지역에 있는 모든 남녀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일주일간 사경회를 개최했습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였습니다. 기도와 성경공부로 1주일을 보내는 동안 성경공부를 위해 택한 요한 1서는 참석자들에게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특히 하디는 평양지역 선교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그 후 어떻게 성령께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진솔하게 간증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그곳에 참석한 자들에게 승리하는 길은 "비통의 눈물과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뿐임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았습니다.
많은 동료 선교사들을 감동시킨 1906년 8월 하디의 평양선교사 사경회는 한국의 선교사들을 먼저 영적으로 무장시켜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예비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자기 마음에 임하셨는지 차분하고 조용하게 전하는 하디의 간증과 설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 가장 큰 은혜를 받은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 선교사는 자신이 은혜를 받은 요한 1서를 가지고 장대현 교회 제직회들을 모아놓고 자체 사경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강한 임재 속에 자신의 죄악을 철저하게 통회하는 길만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1907년 1월에 열린 겨울 사경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하반기에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은 서울 선교사 사경회였습니다. 이 사경회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위원이자 유명한 부흥사였던 존스톤이 주 강사를 맡았습니다. 평양선교사 사경회에 참석했던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모두가 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1906년 북장로교연례보고서가 밝히는 것처럼 선교사들에게 행한 존스톤의 강의는 성령께서 듣는 자들의 심령과 삶을 감동해, 그들 가운데 점점 더 놀라운 사랑과 간절한 기도열을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행한 그의 강의 역시 매우 유익했고 그의 방문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발흥에 중요한 전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선교사 사경회를 마친 후 존스톤은 평양을 방문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인도했습니다. 이미 서울 사경회 때 선교사들에게 도전을 주었던 존스톤은 이날 장대현교회 교우들에게 웨일즈 부흥운동과 인도 카시아 지방 부흥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참석자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그 같은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날 존스톤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인도 교회에 번져 부흥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음을 말하면서 조선에서 누가 교회를 부흥시킨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겠느냐, 있으면 손을 들고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중은 잠잠하였고 응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에 신학생이자 장로로서 교회에 봉사하는 조사인 길선주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손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이것을 본 존스톤 박사는 장차 조선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고, 길선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한 시간에 걸친 이 예배로 인하여 모든 청중들에게 은혜가 충만해졌고, 장대현교회를 비롯하여 전국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조짐을 내비치게 되었습니다.
이후 길선주 장로는 웨일즈 부흥운동에서 이반 로버츠가 귀한 도구로 쓰임받은 것처럼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원대로 그를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길선주 장로는 존스톤의 집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황해도 재령에서 도 사경회가 열렸을 때 길선주 장로가 그곳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재령지역에 큰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때 김익두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김익두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밭 갈듯 하는 성령의 맹령한 보습에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쏟아놓고 통회의 눈물을 걷잡을 수 없이 흘렸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불길은 용서 없이 각 사람의 마음의 죄를 파헤쳤습니다. 통회하던 이재선 장로는 거꾸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교회를 위해 준비하여 두신, 김익두 조사, 이원민 등 유력한 지도자들이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이 먼저 은혜를 받게 하시고 존스턴을 통해서 장대현교회의 수석 장로인 길선주가 은혜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길선주의 뒤를 이을 김익두를 준비해두신 것입니다.
1906년 하반기에 일어난 세 번째 중요한 사건은 목포부흥회였습니다. 1906년 가을 프레스톤이 담당하고 있는 목포 지역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저다인을 강사로 부흥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런 이때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던 것입니다. 프레스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저다인 집회에 대해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저다인)는 성령충만한 사람이었고, 그의 설교에는 성령의 현시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통해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고는 의를 논증해 내서는 절제, 죄성의 심판, 죄사함의 필요성, 죽음 같은 정적이 모두에게 임하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외과용 수술 칼처럼 사람의 심령을 깊이 쪼개어 은밀한 죄악들과 영혼의 숨겨진 암세포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는 그곳들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후 죄의 고백이 수십명의 괴로워하는 영혼들에 임해 힘있는 남자들도 어린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성령께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암세포와 같은 그곳에 모인 이들의 온갖 사악한 죄악들을 다 도려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목도한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앞으로 있을 평양 대부흥운동을 예비하시려는 깊으신 섭리였습니다.
평양지역 선교사들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계속하고, 목포에서 놀라운 부흥운동 소식이 들려오던 그 즈음에 평양 지역에서도 강력한 영적각성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스왈른이 블레어 선교사와 자신의 선교지역 시골교회 한 곳을 방문했을 때 예배 인도 중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스왈른은 청중을 휩쓸고 있는 강력한 감정을 억제하려고 찬송을 불렀지만 청중들 가운데 통회의 역사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다른 분이 임재하셔서 청중들을 압도하고 계신 것"을 확인한 스왈른은 그분에게 사회권을 양도하고 가능한 자신은 뒤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스왈른과 블레어는 평양으로 돌아와 이 소식을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평양 지역에 곧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일기 시작했습니다.
12월 22일 재령에서 열린 황해도 도 사경회를 마치고 돌아온 길선주의 심령에는 "성령의 불이 줄곧 타올랐고 영력은 전보다 갑절이나 넘쳤습니다. 부흥의 희망은 확연했고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 움직임 속에 길선주는 이길함 선교사를 방문하여 특별집회를 평안남도 도 사경회 직전에 개최하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1906년 12월 26일 수요일 특별집회 첫째 날 장대현교회는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이날 길선주는 오랫동안 준비한 첫날의 메시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이날 길선주는 혼신을 다 해 이 민족과 이 사회를 살리는 원동력이 성령충만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날 그의 메시지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큰 도전과 감동을 동시에 제공해주었습니다. 이날 메시지가 끝난 후 온 회중이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길선주는 기도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아 계속 기도하고 돌아갈 사람은 조용히 일어나 돌아가라고 말하자 수백명이 남아서 밤이 맞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12월 27일 목요일 길선주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습니다. 이날 그의 설교는 성령께서 심령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지만 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들어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길선주의 메시지는 힘이 있고 능력이 수반되어 청중들을 온전히 사로잡아 시간이 지나면서 청중들 가운데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늘어갔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온 회중이 통성기도를 할 것을 길선주가 요청하자 회중의 기도는 회개로 화했고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통회의 소리가 회중 가운데 가특 찼고 간증을 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임하자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길선주는 회중을 진정시킨 후 나라의 법과 사회적 윤리와 도덕을 어긴 범죄는 상대와 화해를 하고 또 무엇이 더 필요하다면 개인적으로 자기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날 길선주는 공개 간증을 삼가고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찬송과 기도로 집회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기 원하는 사람은 남아 기도하도록 했는데 이날 수백명이 남아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12월 28일 셋째 날 금요일 저녁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미 길선주의 설교를 통해 매일 저녁 놀라운 은혜가 계속 된 가운데 열린 이날 집회에서는 평양 시내 영문 앞에 사는 순포(경찰) 방은덕이 길선주의 설교를 듣고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날 방은덕은 장대현교회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고 그 집회 중에 사람들이 온갖 죄악들을 다 자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범죄자들을 잡아 실적을 올릴 음흉한 생각을 갖고 저녁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날 길선주는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택하랴?"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물건을 도둑질한 사람은 잡을 수 있지만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죄 있는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고 그는 갑자가 "아이고" 하는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안정을 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선생님! 나를 살려주십시오."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길선주가 잠시 설교를 중단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자 그는 진정되었습니다.
길선주는 다시 설교를 계속하면서 십자가 상에서 좌우의 강도가 있었으며 하나는 주님을 비방함으로 지옥에, 다른 하나는 회개함으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렸다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주님은 천당과 지옥 둘 중 양자택일할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이 외침을 들은 방은덕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길선주가 막 설교를 끝내려하자 그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길선주를 향해 "선생님, 이 죄인이 용서 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천당에 와서 죄인을 잡으려 했던 방순포 죄인입니다. 어찌하오리이까?"라며 대성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회개의 고백은 그곳에 참석한 회중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마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일어나 교회당은 회개와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통성기도는 강렬하게 계속되었습니다. 찬송 소리는 우렁찼고 회중은 기쁨에 겨워 춤을 추는 듯했습니다.
장대현교회의 특별집회 소식은 곧 평양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그 소식은 평양 근방뿐만 아니라 준국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사방 백여리 밖에서까지 교인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까지 모여들었고 집회는 은혜의 동산으로 화했습니다. 회중은 교회를 떠나려고 하지 않아 수백 명이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새벽기도회와 성경공부 시간을 막론하고 저녁 집회 수효에 못지않았고 집회마다 만원이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사람들은 길선주의 성경 해석에 도취되었습니다.
12월 29일 토요일 특별집회 넷째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길선주는 사도행전 5장 1-11절의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앞에 숨을 자는 없다"는 제목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의 간증이 이어졌고 회중의 울음소리는 장내에 가득하였습니다. 이날 승복을 입은 승려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길장로님!" 하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는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귀 교회에서 장로님의 인도로 큰 기적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수일 째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 회합의 광경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고 장로님이 설교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이 사파 세계에서 진정한 화평을 얻는 길이 그리스도이심을 이제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길진경이 증언한 대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승려는 자신의 팔목에 끼었던 염주를 길장로에게 건네주면서 "길장로님께 이것을 드립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10년간 불도를 닦았던 승려의 염주였고 그 염주에는 김덕엽(金德曄)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그를 위해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온 회중은 사람을 감화시키고 마음에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2월 30일 주일날 다섯 째 날 특별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세 번에 걸쳐 길선주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진리에 대한 해석적인 설교"를 외쳤습니다.
12월 31일 월요일 마지막 집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길선주는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온 이들에게는 무궁한 영원세계를 준비하셨다는 내세와 천국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날 장대현교회 특별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부르는 찬양 소리가 평양 전역으로 메아리쳐 울렸습니다. 이날 법복을 입은 한 카톨릭 신부가 일어나서 간증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4. 한국의 오순절, 평양 대부흥운동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사경회는 지방에서 올라온 약 1000명이 참석했고 낮에는 반으로 나뉘어 성경공부를 했으며 2주간의 낮 집회에 평양시내 교우들은 참석이 허용되지 않고 모두 지방에서 올라온 자들이었습니다. 1월 6일부터 시작된 저녁집회에는 평양시내 사람들의 참석도 허용되었습니다. 여자들은 장대현교회에 자리가 없어 사창골 교회, 산정현교회, 남문밖교회, 서문밖에 있는 사랑채에 모여 선교사들의 아내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평안남도 도 사경회에서 길선주와 선교사들이 설교를 전담하였고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사회를 보았습니다.
매일 저녁 약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져녁집회의 열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열기를 더 해 갔습니다. 저녁집회 마지막 이틀간에 놀라운 영적 대각성운동이 폭발한 것입니다. 1월 14일, 15일 이틀 동안에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역사라고 평가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첫 영적재각성이 나타난 것은 14일 저녁집회 때였습니다.
상투를 틀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평안남도 전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강대상을 향해서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현장에 참석해 그들의 기도를 들은 한 사람은 이들의 기도가 전혀 흥분된 군중심리에 의해 드려진 기도가 아니라 매우 논리적이었고 이성적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현장에 있던 블레어는 이렇게 그날의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내어 간절히 함께 기도하였다. 그 효과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전혀 혼동이 없었고, 일치와 조화가 있었으며 모든 영혼들이 기도하려는 저항할 수 없는 충동 가운데 함께 기도하였다. 바로 오순절과 같이, 그들은 한 장소에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분은 그 밤에 평양에 오셔서 모두 울도록 역사하셨다. 어떤 이는 뒤로 물러가서 울기도 했다. 또한 한 순간에 온 청중이 울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무엇이 일어났는가 깨닫기 전에 청중 가운데서 죄의 고백이 시작됐다."
20명의 남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자 잠시 울음을 멈춘 회중은 고백 후에 다시 울면서 통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공개적인 죄의 고백과 회중의 통회 가운데 임하신 것입니다. 공개적인 죄의 고백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현장에 있던 모든 선교사들은 "성령이 죄인들의 영혼 위에 임하면 죄인은 죄를 고백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멈추게 할 어떤 힘도 이 땅에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 선교사는 다음 날 선교본부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편지를 띄웠습니다. "어떤 말로도 어제 있었던 그 집회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결코 목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의 현시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며 이제 그들이 집에 돌아가서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도우시고 각자의 교회에서 이들을 놀랍게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놀라운 영적 대각성의 현장에 있던 이길함과 블레어 선교사는 다음날을 위해 새벽에 잠을 자야 되는데 너무 흥분이 되어서 잠을 못자고 참석하지 못한 다른 선교사들의 집을 방문해서는 "드디어 우리가 만났다. 드디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셨다. 와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날 선교사들은 정오 기도회에 모여 부흥의 역사가 15일에도 계속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월 15일에도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날 집회는 월요일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있은 후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한 뒤 약 육칠백명이 남아 계속 기도했습니다. 이날의 집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월요일 집회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이길함의 증언을 빌린다면 "이 집회는 월요일 저녁 집회와 흡사했지만,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훨씬 강력하였다."
이날의 역사에 대해 그 현장에 있었던 스왈론 선교사 역시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 성령의 역사는 전날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만 더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날 장로들, 그리고 또한 목사들 사이에 큰 죄악들이 드러났는데, 모두가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제까지 자신이 범한 그 극악한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힘에 압도된 것처럼, 건장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이 통회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모임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마지막 심판을 보는 것처럼, 너무도 무시무시했습니다. 다만 나는 그날 밤의 장면을 설명하기에 더 이상 어떤 단어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선교사들은 교회 지도자들인 김씨와 주씨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강단에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서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 아니라 특히 방위량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하는 죄를 범했다며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그의 번민으로 인한 단말마의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보기에 너무도 비참했습니다. 그는 정신없는 사람처럼 땅에 넘어졌습니다. 그가 넘어지자 회중은 눈물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선교사들도 간단히 멈출 수 없어 회중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동안 회중은 조용해졌으나 다시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새벽 2시까지 죄를 고백하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날 한 대학생이 음란과 증오와 온갖 자신이 지은 죄를 자복하며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온 회중도 따라 울었습니다. 사경회 마지막 날 성령의 역사가 전날보다 더 강하게 임한 것입니다. 이날 역시 그 포문을 연 사람은 길선주였습니다. 그날 길선주가 설교를 할 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 장로는 설교하는 길선주 장로의 얼굴이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다음날 길선주는 외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주터 그것은 길선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 때 완전 장님이었다가 아직도 장님인 길선주 그러나 여기서 그의 얼굴은 대단한 위엄과 능력의 얼굴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고백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동료 장로가 동료에게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날 길선주의 설교에 동료 장로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앞에서, 더 큰 성령의 인도하심 앞에서, 길선주 그의 외침은 성령의 외침이었지, 동료의 외침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 앞에서는 선교사가 따로 있고 한국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용서 받을 죄인이었습니다.
온갖 죄악들이 다 토로되었습니다. 어느 한 여인은 자기가 청일 전쟁 때 아이를 업고 뛰는 게 너무 힘드니까 업고 있는 아이를 내려놓고 그녀의 아이 머리를 나무에 부딪쳐 죽이고 도망쳤다며 회개한 것입니다. 한 의료선교사의 요리사는 울면서 "지금까지 항상 나는 우리 주인을 속였습니다. 내 집도, 내 토지도 주인을 속임으로 장만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통회했습니다.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그것을 보상했습니다. 선교사의 신임을 받고 토지 구입 위탁을 받았던 어떤 교사는 대지를 500달러에 구입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80달러 밖에 지불하지 않았다며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정리하여 420불을 되돌려주었습니다. 매캔지를 돕는 한 소년은 선교사를 속여 사취한 4달러가 마음에 걸려 18마일이나 걸어서 찾아가 청산했고, 평북 의주의 한 부자는 첩을 두고 두 딸까지 두었으나 은혜를 받고 첩과 헤어졌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 몰래 음행죄를 지었다며 공개적으로 회개하였고, 그 현장에 있던 남편은 울면서 부인의 죄를 용서해준 일도 있었습니다.
블레어 선교사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술합니다. "내가 결코 전에 보지 못했던, 또 하나님께서 만약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는 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와 같은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악이 공개적으로 그날 밤 고백되었습니다. 감정으로 인해 창백해지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심신이 괴로운 가운데 백보좌 앞에 서 있는 죄악 된 심령들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고 있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들은 죄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그 죄악을 청산하였습니다. 놀라운 부흥운동의 역사가 나타난 그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왔습니다. 도둑맞은 돈조 되돌아왔으며,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이 전반적으로 바로 잡혀졌습니다. 이처럼 평양 대부흥운동은 개인의 각성으로 그치지 않고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사회변혁의 동인이 되었습니다.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너무도 많은 영향과 결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놀랍게 성장한 것도, 러일전쟁, 을사조약, 고종의 퇴위, 한일합방의 위기 속에서 이 민족과 교회가 지탱될 수 있었던 것도, 기생과 환락의 도시 소돔이라고 불리던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뀐 것도, 사회 개혁이 일어나 수많은 학교들이 설립되고, 여성들의 사회적 신분이 높아진 것도, 그리고 신분 타파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도 평양 대부흥운동을 통해서였습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자리잡을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준 것도 평양 대부흥운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