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한 HItch-hike
막내딸이 이틀 후에 미국에 들어간단다.
간 밤에 서울 집과의 통화에서 확인하고 함께 식사라도 하려고
흩어져 있는 가족을 소집해 놓았으므로 다녀와야 했다.
3시간쯤 더 걷다 가려고 여느 날처럼 새벽에 나섰다.
한여름이지만 월출산의 새벽 공기는 선선하고 싱그러웠다.
영암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표를 예매하고 신북면까지는 옛길이
따로 있다 해도13번 국도를 많이는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급히 영암으로 리턴하려면 차량 통행이 빈번해야 하니까.
덕진면(德津)사무소, 잘 조성한 도로공원 휴게소, 양동마을 등을
지나 신북면(新北)사무소 인접 지점에 도착해서는 너무 많이 와
버린 듯 해 돌아갈 영암(靈岩)길이 걱정되었다.
무화과 판대대 여인의 대답은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어쩌다 한 번씩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라니.
삼남대로에서만은 산에서와 달리 자진 봉사 차까지도 사양하고
오직 걷기만으로 일관하려 했던 초지를 마침내 깨고 말았다.
예매한 표의 무효가 우려되어서 라기 보다 서울행 운행 간격이
워낙 크기 때문이었다.
대간과 정맥들에서 숙련된 히치-하이크술(術)이 곧 발휘되었다.
재개 후 첫 고마운 이는 서울 법전출판사의 젊은 이민영님.
완도에 가는 길이라는 그는 13번도로 직행로를 버리고 터미널을
거쳐 갔다.
초지가 그랬다 해도 어쩜 믿는 데(편승)가 있었기에 지방버스의
운행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멀어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2일을 까먹고 전번의 해남행 때처럼 나주역에 도착했다.
역시 그 때처럼 영산포에서 영암행을 타려 했다.
그런데 승차한 버스가 반남면(潘南)행이었다.
시.군이 다르고 다소 돌긴 해도 신북면과 인접했으므로 접근이
훨씬 용이하리라는 순간적인 판단에 그냥 갔다.(전일 신북에서
반남방면 이정표를 보았던 기억이 나서)
마침 영산포장날이라 남녀 촌로(村老)들의 대화도 들을만 했다.
촌 마을 구석구석을 점검하듯 살피는 재미도 솔솔했다.
반남에 내려 신북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무덥긴 해도 신북 한하고 걸을 각오였는데(어차피 걷기 위해서
나선 것 아닌가) 다가오는 갤로퍼를 향해 무심코 손을 들었다.
편승을 흔쾌히 허락한 운전자는 신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13번 국도를 통해 영암으로 가려 한다고 했다.
국도에 들어선 후 잠시 착각하여 내릴 지점을 지나쳤음을 들은
운전자는 곧 유턴하여 신북쪽으로 다시 갔다가 되돌아 갔다.
60대 초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덕담까지 하며 폭염에
늙은 나그네의 건강까지 염려해 준, 고마운 그는 영암김병원의
정신과 과장 서홍석.
폭염을 무릅쓰고 걷는 중인 늙은 길손이 이 중견 사이카이어터
(psychiater)의 눈에는 어떻게 비취었을까.
아무튼 그의 극진한 호의로 순조로운 나주길이 되었다.
아마도 전국에서 가장 싼 곳?
신북면(新北) 소재지길 구도로가 1km 남짓 잘 보존되어 있다.
13번 신국도로 인해 옛길이 됐고 그 전엔 일본에 의해 신작로가
됐고 그 이전에는 정녕 삼남대로 오랜 옛길이었을 것이다.
왕복 4차선의 새 도로 이전에는 이 길도 어엿한 13번 국도 대접을
받았겠지만 차량 왕래도 뜨음한 한가로운 시골길이 되고 말았다.
면사무소에 들어가 냉수 한 컵 마신 후 지역의 자료를 얻어보려
했으나 줄 만한 것이 없단다.

신북면소재지로 가는 옛길
면(面) 중심지라 식당은 많아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중국집
외엔 홀 늙은 이의 식단이 거의 없다.
평산리라고도 부른다는 간은정마을(월평리), 신국도와 다시 합류
하는 지점의 새 정자가 쉬었다 가라는 듯 친근하게 다가왔다.
담소중인 중로(中老) 몇 분이 날 반기었다.
정자 옆뒷집, 현수막이 걸린 평산식육식당(만남의 집)의 메뉴에
대해서 넌지시 물었더니 주저 없이 이구 동성으로 갈비탕.
밖에서 보기 보다 꽤 넓은 식당 안에 손님이 거의 찼다.
늙은 이의 식욕이 바닥인 것을 미리 알고 있는가.
군침이 돌도록 모두가 먹는 데 열정적이었다.
과연 추천받을 만한 갈비탕인데다 방금 잡아왔다는 간.첩엽 한
접시가 뒤따라 왔다.
메뉴판은 팔도를 섭렵한 늙은 이를 더욱 놀라게 했다.
암소 생고기(400g)10.000, 생등심(400g)15.000, 갈비살(400g)
20.000, 이 푸짐한 갈비탕도 5.000, 소주(1병)2.000 .....
월, 수, 금요일에 소를 잡는데 오늘이 바로 수요일 소잡는 날.
아마 그래서 소고기 인심이 더욱 후했나?
자그만 면소재지에 이런 한우고기집이 또 있단다.(오다가 본 듯)
수입 쇠고기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인데도 전국에서 가장 저렴한
국내산 고기만 먹고 사는 지방이 아닌가.
만복(滿腹) 다스리기와 한더위 피서를 겸해 깔끔한 정자 유선각
(遊仙閣) 마루에 발랑 누워 잠시 오수를 즐겼다.
이름(이 지방 정자의 보통명사란다) 그대로 신선 놀음을 한 것이다.

유선각과 평산식육식당(뒤 우측)
게다 소리 요란했던 영산포
그런데 편히 쉬지는 말라는 사인(sign)인가.
30초 ~ 1분 정도 앉았다 일어나면 말짱한데 정자에서 편히 쉰
후에는 왜 자꾸만 제동이 걸릴까.
노변에 세워진 1km 간격의 작은 이정표말 하나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기를 다시 반복했다.
땡볕 피할 만한 데라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아무데서나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다소 웬만할 때엔 무작정 많이 가야만 했다.
시장해서 찾아간 휴게소는 곳곳이 폐문이더니 포식하고 나니까
지나치는 휴게소가 다 영업중이다.
신북공업단지 지역을 벗어나 나주시(羅州)에 접어들었다.
세지면(細枝)을 조금 밟고 왕곡면(旺谷)에 들어섰다.
영산동(이전의 榮山浦) 일대가 제법 큰 시가처럼 다가옴으로서
나주성 입성이 카운트다운된 셈이다.
나주시 다운타운에 들기 직전 왕곡면 장산리(長山) 13번 국도변
소공원 안의 자연석 기념비가 오가는 이의 눈길을 끌고 있다.
구한말(1880년대) 자기 땅을 경저리(京邸吏:註)에게 강탈당한데
이어 일제의 수탈창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겼던 이 일대의
농민들이 해방과 더불어 잃었던 땅 되찾느라 피와 땀을 흘렸다.
이 피땀의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1991년 이곳에
농민공원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
경저리는 삼남대로를 통해서 강탈했고 일제는 신작로를 만들어
수탈했고 기념비는 13번 국도상에 세웠다.
말만 다를 뿐 동일한 장소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23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 부터는 오전에 나주역에서 버스로
통과했던 길이라 좀 익숙한 느낌이었다.
영산대교를 건널 때는 담양군 용면 용추봉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호남정맥 순창 ~ 담양구간의 용추봉(龍湫)이 영산강의 발원지인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좀 더 친근하게 담아 두었을 텐데.
종주때 헬기장으로 변한 정상에서 갑자기 쏟아진 쏘나기에 흠뻑
젖은 기억 밖에 없는데 지금 건너고 있는 강물의 발원지라니....

영산강 상류
낮에 북적대던 장마당은 어수선한 파장이고 일제의 잔재들(동양
척식주식회사 건물과 일인들이 살던)이 남아 있을 법 한데 늙은
길손이 확인할 길이 없지 않은가.
영산강 따라 여기(영산포)까지 침입하여 괴롭혔던 왜구였다.
강점기에는 그들이 우리나라의 경제를 독점하고 착취하기 위해
세운 국책회사(國策) 동척(東洋拓殖株式會社) 목포지점 영산포
출장소를 두고 본격적인 수탈 정책을 폈다.
골목마다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고 기모노에 게다소리 요란했던
지역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나주역 사건도 영산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