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도학 정치에 대한 주장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장을 계기로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 되어 갔으며 뒤에 퇴계(退溪) 이황(李幌) 율곡(栗谷) 이이(李珥)
같은 학자가 탄생 될수 있었던 것이다.그의 도학 정치는 조선 시대의 일반 서민들
까지도 주자(朱子)의 가례(價例)를 지키는 계기가 되었다.
1519년(중종14) 38세에 이르러 훈구(勳舊) 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게 이르렀다.즉
그들은 우선 부정한 정국 공신(靖國攻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여 4등급으로 나누어 정국 공신에
봉하여 귀족의 지위와 국가에서 토지 및 노비를 부당하게 책정 하여 자격이 없는
사람을 빼버리자고 왕에게 건의 하여 결국 103명 가은데 78명의 훈작을 삭제 급진
적인개혁을 단행 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안게되엇다.
이사건으로 보수세력의 불만은 극도에 다다랐다 이무렵 중종도 정암(靜庵)의 급격한
개혁주장에 차츰 염증(厭症)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왕의 마음을 포착(捕捉) 판을
뒤집을 기회를 엿보던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등 훈구공신(勳舊功臣)등은 경빈박씨
(敬嬪朴氏)등 후궁을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무고 하도록 하고 대궐비원
대철 나뭇잎에 꿀과 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走肖 는趙씨를 뜻하니 조광조가 왕(王)
을 도모한다는 뜻이다.)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갈가 먹도록 하여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켰다.
1519년11월 16일 이에 조광조 선생은 왕에게 올렸다.
사생사 세소 시자(士生斯世所恃者)
군신이기망료(君心而己忘料)
국가 병통 재어(國家病痛在於)
이원 고욕 신국 맥어(利源故欲新國脈於)
무궁 이기돈 무타의(無窮而己頓無他義)
이세상 선비로 태어나 믿을 사람은 임금 뿐이요올바른 정치를 하고 기강에 병통이
되는 근원을 재거하여 새롭게 무궁한 맥을 찾고자 하는 일입니다.여타에 다른 생각이
없음을 깊이 머리숙여 말씀 올립니다.
그러나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絿) 함께 사사(賜死)의명이 내렸다
그때를 지켜본 영의정 정굉필(鄭宏弼)은 마땅치않게 여기고 왕에게 간곡한 해명변호를 하게
되어 일단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1519년 11월 18일 끝내는 능성(綾城)으로 유배(流配)의길로 떠나 동년 11월 25일 유배지 능주에
도착하였다.그로 부터 유배생활을 시작한 가운데 정암(靜菴)선생의 일파로 몰려 삭직(削直) 낙향
(落鄕)했던 학포(學圃)양팽손(梁彭孫)선생을 맞나게 된다.(능주읍에서 약8km 거리인 도곡면 월곡리)
학포선생은 매일 조석으로 적중생활(謫中生活)하는 정암선생을 예방하고 괴로움을 같이하면서
그중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였으며 오로지 왕의오해가 풀릴 날만을기다리고 있었다.
그가운데 정암선생은 회심(懷心)의 마음을 시로표현 학포 선생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진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는 다음과같다.
수린신사 상궁조(誰燐身似傷弓鳥)
누가 이몸을 마치 활맞은 새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자소심 동실마옹(自笑心同失馬翁)
나 스스로만은 말잃은 늙은이 마음같이 웃고만있네,
원학정진 오불반(猿鶴定嗔吾不返)
운숭이가 짖고 학들이 울어대지만 나는 돌아가지 못하리,
기지난 출 복분중(豈知難出覆盆中)
엎어진 독안에서 나올수 없다는 것을 어찌 알수있으리오.
1519년(중종14)년 11월 25일유배지인 능주에 도착하여 적중(謫中)생활 25일 만인
12월 20일 밖은 눈바람 치는데 어명을 전하는 금부도사(禁府都事)류엄(柳淹)의"어명
(御命) 이요"하는 북창(北窓)을 울리는 납덩어리같은 외침과 더불어 죽음의 사자(使者)
가 찾아왔다. 운명을 체념하고 몸을 씻고 새옷을 갈아입은후 먼저 집에 보낼 편지를
쓰기를 조용히 마치고 또 그 회포의 시인 사세사(辭世辭)를 쓰고약을 마신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향년 38세)
절명시
애군여 애부(愛君如愛父)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우국 여우가(憂國如憂家) 나라 걱정을 내집걱정 하듯 했노라,
백일 임하토(百日臨下土) 백일이 밝고 밝아 대지를 비추어,
소소조단심(昭昭照丹心) 거짓없는 내마음 훤히 또 비추리라.
정암은 임금이 성군으로 바른 정치를 하고 신하는 바른 도로 임금을 바로 받들고 좁은 나라레서
한정된 재화를 극소수에 편중 되지않게 가급적 백성이 고루 살수있게 세상을 고쳐 가기를 주장
하다 그만 기득권 세력에 몰려 끝내 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만다.
이비석의 기단거북이는눈도 코도 입도 없다 기단의 거북은 비의 주인의 삶과 관련
하여 많은 모양을 지닌다 이거북의 모양이 말하듯 무슨 할말이 있고 무엇을 보고십
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내려온 성리학의 발달은 새로운 사조의 학문을 이룬 학자를
나았으니 퇴계(退溪) 이황(李幌) 정구(鄭逑) 허목(許穆) 성호이익(李瀷) 권철신(權哲身
정약용(丁若鏞) 으로 이어져 실학을 이루게된다.
이비석이 세워지고 1676년(숙종2년4월)100년후인 1777년 에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을 흠모했던 허목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게될 정약용이 이곳에이르니 세월의흐름과
이어짐이 우연이 아닌듯싶다.
성리학(性理學)의 학문의 표준을 삼은 사람은 정암 조광조 선생으로 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극한 대립을 보였든 남인의 거두 허목은 벼슬을 그만두고
노구에 연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볻산을 들려 조광조 선생의 사당을 들려가고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선생이 죽고 149년 만에 그의 비문을 짓게된다.
지금까지 올리글 들은 사진 현판에 정암선생의 시를 풀어 올리신 화순군 지정 문화유적
명예 관리인 오정섭 선생 께서 만드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과 이고장의 문화
유적(文化遺蹟) 책에서 옮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