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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스턴 (1813~1873)
미개한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암흑의 세계에 빛을 던져준 ‘아프리카의 아버지’라고 불린 위대한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무렵, 1840년대의 아프리카 대륙은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고 문명이 전파되지 않은 대륙이었다.
해안지방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륙 내부를 성공적으로 탐험한 사람도 없었고, 대륙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전혀 몰랐다. 그저 상아와 황금과 흑인으로 상징되던 이 미지의 대륙을 최초로 탐험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리빙스턴이다.
리빙스턴의 어린시절
리빙스턴은 1813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열 살 때부터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리빙스턴은 이웃들의 불행한 모습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자라나면서 점점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불행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중국선교의 꿈이 아프리카선교로 바뀜
리빙스턴이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중국의 기독교 전도에 관한 책을 읽고 중국 전도를 결심하고, 선교사 자격을 획득하여 중국으로 출발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중국행이 불가능해질 무렵, 때마침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선교사 모펫의 부흥회 설교를 듣고, 아프리카 미개지 전도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는 선교사들이 더러 파견되었으나, 아프리카의 미개지 전도는 매우 드물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같은 토인들끼리, 다른 마을이나 다른 종족을 습격하여 포로로 사로잡아 온 토인들을 가축처럼 부리거나,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이렇게 팔린 노예들은 항구로 끌려가 노예선에 실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이 되곤 하였다.
1840년 12월,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라, 5개월 동안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에 도착한 리빙스턴은 곧 토인들의 말을 배우고 밀림 속에 있는 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 과정에서 사자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빼앗길 뻔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한밤중, 한 토인이 문을 두드리며 급한 왕진을 청했다. 밀림의 맹수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리빙스턴은 “병이란 때가 늦으면 고칠 수 없는 법이오. 옳은 일을 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니 아무 일 없을 것이오.”라고 오히려 사람들을 위로하며, 토인과 함께 캄캄한 밀림 길을 담대하게 걸어나갔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토인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래서 토인들은 리빙스턴이 말하는 친절한 하나님이 바로 리빙스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미개한 생활을 하는 토인들이 더 많은 아프리카의 오지(奧地)로 들어감
아프리카의 오지(奧地)에는 미개한 생활을 하는 토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안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서 그들을 깨우치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질이 나쁜 토인들이 살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오지로 간다는 리빙스턴의 결심에 반대했다.
“나는 이 아프리카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토인들은 병이 들어도 의사가 없어서 그대로 죽어갑니다. 상처를 입어도 치료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나쁜 환경과 습관을 내가 가서 바로잡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나 혼자서라도 오지로 가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의 결심은 굳건했다.
가족을 데리고 오지(奧地)로 이동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만나서 결혼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죽음의 사막이라는 칼라하리 사막 북쪽에 있는 느기미라는 호수 부근입니다. 30명의 토인들이 30마리나 되는 소를 끌고 뒤를 따랐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 무서운 사막의 맹수들,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타는 듯한 갈증, 이 모든 악조건으로 인해 사막 기후에 익숙한 토인들마저 기운을 잃고 쓰러져 갔다.
물이 귀한 칼라하리 토인 마을에 도착
리빙스턴 일행은 온갖 고생 끝에, 2개월만에 칼라하리 토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행은 그곳에서 저마다 타조알 한 개씩 받아들고,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고는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칼라하리 토인들은 물이 없는 곳에 살고 있었으므로 물을 가장 소중하게 간수해야 했다. 그들은 적의 습격으로부터 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물을 타조알에 채워 땅 속에 묻어둔다.
이 마을의 여자들은 타조알에 물을 채우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축축한 땅을 찾아 보릿대처럼 생긴 풀줄기를 땅에 꽂고는, 입으로 물을 빨아 올려서 타조알 속에 채워 넣는 데 세 시간이나 걸린다. 리빙스턴은 이런 불편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 주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에게 신앙심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리빙스턴은 천막을 치고 곧 환자를 치료하면서,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도 금방 토인들과 사귈 수 있어서, 그들을 의심하던 토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열병에 걸렸을 때 다 함께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토인들
어느 날 아이들이 열병에 걸렸을 때 토인들이 다 함께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모습을 본 리빙스턴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몰랐던 야만적인 토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고생을 무릅쓰고 온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착한 마음을 그들 마음 속에 간직하게 된 것이다. 얼마 후, 리빙스턴은 목숨보다 사랑하는 딸을 열병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게 된다.
칼라하리 사막 더 북쪽에 있는 마콜롤로 마을로 이동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많은 그는, 슬픔을 몰아내고 다시 일어나서 칼라하리 사막을 지나 더 북쪽에 있는 마콜롤로라는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아프리카의 진기한 식물이나 동물· 토산물 등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 조사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마콜롤로에 도착하게 된다. 리빙스턴 일행은 그곳에 짐을 풀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탐험을 계속했다.
잠베지 강 발견
1851년, 그는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잠베지 강을 발견하여, 강의 모양과 너비· 깊이 등을 기록하여 영국에 보냄으로써, 당시 아프리카의 지도가 바뀌게 되었다. 그는 그 공으로, 영국 지리학 협회로부터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다.
그 당시의 아프리카에는 어디든지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리빙스턴이 거주하고 있는 마콜롤로에도 노예 상인들의 손이 뻗쳐 있었다. 토인들은 포로로 잡아온 노예를 팔아서, 그 돈으로 총을 사들였다.
노예 매매 중지를 위한 교역촉진을 위하여 해안선 탐험 시작
‘노예 매매를 그만두게 하려면 먼저 문명국의 물건을 손쉽게 얻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오지에서 해안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뚫어, 자유롭게 장사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생활 수준도 높아지고 또 편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리빙스턴은, 오지에서 해안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을 탐험하기로 결심했다. 이 길만이 아프리카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자, 그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목숨 건 서해안 탐험길
드디어 그는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탐험길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도중에 야만인이나 맹수에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는 유언장을 써 놓고 떠났다. 서해안을 향해 나아가던 리빙스턴은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다.
고열이 계속되어 음식을 삼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는 소 잔등에 엎드려 비를 맞으면서도, “서해안, 서해안으로!” 하고 계속 일행을 재촉했다.
리빙스턴 일행이 치보크 마을을 지나가려 할 때, 그 마을의 토인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나와서 일행을 막아섰다. 마을을 지나가려면 두 사람의 토인을 두고 가라는 것이었다. 리빙스턴이 강경하게 거절하자 ,토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창을 쳐들었다.
리빙스턴은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는, 토인 대신 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제안하여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리빙스턴을 따라온 토인들은 소가 아까워서 차라리 자신들이 노예로 가겠다고 나섰다. 리빙스턴은 “너희들의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 너희들 모두의 목숨과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었다. 그러한 리빙스턴이었기에, 토인들은 그를 ‘빠빠(:추장에 대한 경칭)’라고 불렀다.
오지에서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 발견
그 후에도 사나운 토인들의 많은 방해와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드디어 바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오지에서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마콜롤로를 떠난 지 반년만인 1854년에야, 포르투갈의 식민지 항구 루안다에 도착했다. 쇠약해진 리빙스턴은 영국 군함으로 옮겨져 간호를 받게 되었다. 몸이 완쾌되자, 그는 여행 중에 조사해온 지리· 동물· 식물· 그리고 각 지방의 토산물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영국으로 보내면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노예매매를 금지하도록 힘을 써 달라는 편지도 써 보냈다.
다시 오지에서, 이번에는 동해안으로 나가는 길 개척
다시 마콜롤로 마을로 돌아온 리빙스턴은, 이번엔 동해안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서해안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사나운 종족들이 있기에, 토인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다시 여행 계획을 세운 것이다. 토인들은 그들의 빠빠가 이토록 자신들을 위해 걱정해 주는 것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리빙스턴은 “행복의 빛은 동쪽에서 비친다는 말을 굳게 믿고 탐험을 할 것이오” 라며 동해안을 향해 몇 명의 일행과 함께 출발했다.
‘소리내는 연기’로 불리던 너비가 1,700m나 되는 ‘빅토리아 폭포’ 발견
도중에 일행은 토인들이 일컫는 ‘소리내는 연기’가 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토인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연기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서운 요술쟁이가 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연기가 되고 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연기의 정체는 바로 너비가 1700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큰 폭포였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폭포에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5개월 후의 동해안 도착으로 아프리카 대륙 횡단 성공
일행은 다시 강을 내려가 5개월 후에는 동해안에 도착하여 마침내 아프리카 대륙 횡단에 성공하였습니다.
귀국과 임종
리빙스턴과 스탠리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은 3회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1차: 1841-56, 2차: 1858-64, 3차: 1866-73). 1차 탐험은 잠베지강(Zambezi River)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2차 탐험에서는 니아사호(Lake Nyasa)를 발견했으며, 3차 원정에서는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중부내륙지방에 들어 가서 루알라바강(Lualaba River)을 발견했습니다(1871) 리빙스턴과 반갑게 만나는 스탠리
1871년 11월 58세 때에 그는 식량이 떨어져서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뉴욕 헤럴드의 통신원이었던 스탠리가 그를 찾아내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주어 탐험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탠리는 물론 그를 찾아내서 독점취재를 함으로써, 신문기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됩니다.
1873년 60세 되던 해에 리빙스턴은 치탐보(Chitambo) 근처에서 병사하게 되었는데,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그의 시신은 현지에 매장되지 않고 아프리카 동해안의 섬인 잔지바르(Znzibar)로 옮겨진 후 영국으로 이송되어(1874년 4월), 웨스트민스터 애비(Westminster Abbey)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루어집니다. 당시 잔지바르에는 회교도인 술탄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노예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리빙스턴의 탐험도 사실은 처음에는 잔지바르의 노예상인들의 보호와 협조를 얻어서 이루어졌던 것이나, 그후 그가 회교도 노예상인들이 원주민 부락을 습격해 학살을 일삼고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목격하고는,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노예제도를 폐지시켜야한다고 더욱 역설하게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의 죽음으로, 영국에서는 그의 지론을 지지하는 여론이 크게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발견한 루알라바강은, 그 후 스탠리의 탐험(1874-77)에 의해서 나일강의 상류가 아니라 콩고강의 상류라는 것이 증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