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웅, 안중근.
민족의 혼을 부활시킨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삶이 무대 위에 재현되었다.
올해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1910년 한일병합으로부터 꼭 100년이 되는 해다. 또한 1909년 10월 26일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이듬해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화하신 안중근의사 서거 100주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대한의병참모중장인 그는, 거사 동기를 이토가 대한의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따라서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해줄 것을 요구한다.
안중근 의사가 거론한 이토의 죄명은 총 15가지로, 명성황후 살해, 한일협약 5개조 체결, 한일신협약 7개조 체결, 양민 학살, 이권 약탈, 동양평화 교란 등에 달하지만, 일본은 1910년 2월 14일 일방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그해 3월 26일 형을 집행한다.
서른 한 살의 청년 안중근이 사형을 언도받기 전,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으라'는 서문을 보내 그의 삶이 욕되지않길 바랐다. 그 역시 참된 의인의 길을 택했다.
이토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중대사였으나 그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에 의한 재판을 받았다. 독실한 신도였던 그를 입장이 난처해진 천주교 역시 외면하고 만다.
안중근 의사는 법률과 국제정세에 밝았으나 변호사 선임 및 국제재판을 받게 해달라는 요구까지 묵살당하자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시간을 벌어 민족의 갱생을 위하여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신부로 자랄 수 있기를 고대했던 장남 안분도는 12살 되던 해 죽게 된다. 그리고 차남 안중생은 살기 위하여 변절자가 되는 슬픈 행보를 걷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은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박문사'를 세운다. 문제는 안준생이 박문사에 등장해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자신이 속죄하는 발언을 하면서 일본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하게 된 것이다.
이에 김구는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민족의 반역자가 된 안중생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후에 그는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의 아들로 입적되어 영혼없는 목숨을 부지해갔으며, 아들과 손자는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도 박해받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도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댓가로 치뤘다.
그러나 그 사건을 맡았던 일본인 검사와 판사 그리고 형장을 지키던 간수조차 그의 의로움에 감화되어 존경을 표하게 된다. 진정한 성인(聖人)은 온몸으로 육박해오는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눈물겹도록 지고지순한 선을 이루어낸다. 악을 악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악조차도 선함으로 뒤바꾸어놓는 기적과도 같은 행보를 남기는 것이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자가 책을 출간하는 세상이 되었다.
일본의 한국 강제합병과 식민정치가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겨 발전시켰다는 논리가 교과서로 편찬되는 시대가 되었다.
친일파 청산의 역사적 임무가 중고등학생들에게 그리고 대학강단에서 빨갱이 운운하는 좌파정신으로 왜곡되어 가르쳐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게 되었다.
2차대전 A급 전범들의 신사참배를 공식적 국가행사로 진행하는 것에 일본 스스로 아무 거리낌없는 이상한, 이 이상한 나라에 나는 살고 있다.
극소수 기적적으로 생존해계신 정신대 할머니들께 진심어린 사과는 커녕 99엔을 던져주는 일본정부에 대해 분노할 줄 모르는 2010년의 대한민국정부와 살고 있는 나는 염치없는 소시민이다.
나는 안중근 의사가 누군지도 모르는 대다수의 학생들 앞에서...
2PM의 재범군의 귀환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호소하는 십대들 앞에서...
이 아이들의 행동하는 지성(?)에 이 땅의 독립투사들이 그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죽어간 비극의 근현대사의 토양에...
국회의원의 평생 품위유지비는 만장일치로 법안 통과되어도 애국선열의 후손들은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의 뜻을 기릴 수도 없이 조국으로부터 냉대받고 잊혀져갔음을...
이 불편한 진실을 나의 아이들이 알기 원한다. 이 기막힌 현실을 나의 아이들이 바로 보길 바란다. 바로 그들이 우리 존재를 가능케 했던 전제가 되고 있음을 또렷이 확인하기를 그리하여 살신성인하신 그 날의 선택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이 땅을 지켜나가기를 기도한다.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지고 있는 이 역사에 이 겨레를 사랑했던 안중근 의사의 삶이 아로새겨져 있다.
잘려질 수밖에 없었던 100년전 그의 뼈아픈 약지 손가락에 흘렀을 붉은 선혈에 통곡한다.
안중근 의사의 주검은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있다. ‘나라를 찾거든 고국에 묻어 달라’던 안중근 의사의 간절한 바램을 아직도 후손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를 지킨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예우받고, 독립영웅들의 뜻을 경건히 기릴 수 있는 이 땅이 되길 희망한다.
민족과 국가를 팔아넘긴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민족지도자의 탈을 쓰고 국권을 장악하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친일파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뺄수도 있는 그녀의 용감무쌍함에...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보며 가위질 오려붙이기 된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교과서...
이것은 키치(kitsch)다.
여기서 안중근의 시 <장부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첫댓글 장부가! 잘 보고 갑니다^^
선생님의 글이 아이들을 자라게
실은 키치란 용어를 명확하게 몰라서...
"이것은 키치(kitsch)다."
사전을 옮겨 봅니다
키치 [kitsch]출처: 시사상식사전
화가의 정신이 들어있는 순수 미술품과 그렇지 않은 미술품 간의 구별을 위해 사용된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처음 생겨난 용어로 당시 급격한 산업화와 교통 통신의 발달, 대중문화의 탄생 등으로 그림에 대한 소유 욕구가 확산된 것이 키치를 나타나게 한 배경이다. 현대에 이르러 고급 예술, 고급 문화와는 별개의 대중 속에 뿌리를 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키치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