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요리 |
북경은 고대에 오주로 불리었고 전국시기에 연도, 요시대에는 배도, 후에는 금, 원, 명, 청의 중심도시로 약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북경 요리는 이미 1000여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있다.
북경사람들 원래의 음식습관은 산동성과 비슷하다. 요나라 이후로 특히 원대에 수도를 북경으로 정한 다음부터, 동북과 몽고 등지에서 많은 소수민족들이 이전,정착하여 음식과 문화방면은 북경본지의 風와 소수민족風이 동시에 성행하기 시작으며 만, 몽, 회족 등 소수민족들은 특히 양고기를 즐겨 먹는데 그들의 대량이주로 음식문화에서 양고기를 원료로 요리를 만드는 특징을 형성하였다.
동시에 북경은 역사적으로 여러국가의 중심도시로 있었기때문에 전국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으로 궁청옥주(궁청의 황제 밥을 짓는 주방), 황가 주방이 비교적 효율적이었고 요리 기술이 발달되었으며 전국의 요리문화가 집중되어 요리 기술이 상대적으로 발전되었는데 이는 북경요리 체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서 산동요리의 영향이 제일 컸다 고 할수있다. 이런환경으로 북경본지風과 산동風, 궁정요리 및 소수민족 요리등이 융합된 북경요리가 형성되었다. 북경요리의 요리 방법은 작(튀김), 류(구불림), 폭, 고(구움), 소(볶음), 주(삶다), 솨(데침) 등이 위주이며 요리의 맛은 취, 향, 선이 특색이다. 주요 요리로는 "북경오리구이", "조류어편", "초초어", "산양육", "배웅장", "작불수권", "백자육", "불고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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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오리 구이 |
"북경오리구이"는 역사가 깊다. 일찍 남북조의 "식진록"에는 "구어"라는 일설가 있었다. 원조천력년간(공원 1328년~1330년)의 옥선의 무사혜작의 《음선정요》중에도 "구운오리"라는 요리명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일종의 "오리구이"었다. 정중 "북경오리구이"는 명조에서 시작되었다. 주원장이 수도를 남경에 건립한 후 명궁의 옥주는 남경의 살찌고 고기가 많은 호수오리로 요리를 만들었는데 오리 요리의 맛을 농하게 하기 위하여 숯불에 구었는데 오리가 먹으면 입안에 향기가 넘치고 살찌면서 느끼하지 않아서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황궁에서 "오리구이"로 불리었다. 15세기 초 명대에서 수도를 북경으로 옮길 때 오리구이기술도 북경으로 이전되었다. 더욱 발전되어 옥천산 진어를 사용하였는바 가죽이 얇고 고기가 연하여 구미에 맞고 맛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명조만력년간의 태감 유약우가 쓴 《명궁사. 음식호상》중에는 "본지(북경)는 구운 오리, 닭, 거위가 위주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그때 구운 오리가 북경의 중요한 요리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명조 하정시대 북경에는 벌써 오리구이 전문점이 탄생하였고 이름은 "금릉노편이방"이었다. 청조에 와서 "오리구이"는 건륭, 자희태후 및 조정 왕궁대신들이 즐겨 먹는 궁청 요리가 되었다. 동치 3년 북경에는 또 "전취덕오리구이점"이 생겼고 그때부터 "북경오리구이" 유명해졌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경사미찬, 오리보다 묘한것이 없는데 구운것이 최고다"라고 한다. 이 요리는 명조 때에 제작창조 되여 현재까지 전해왔으며 중국내에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소개되었고 외국인들은 중국제일의 요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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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쇄羊肉(일종의 샤브샤브) |
"쇄양육"은 북경에서 제일 유명한 겨울의 음식으로 이미 1000여년의 역사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쇄양육"은 중국의 동북과 몽골의 소수민족지구에서 시작되여 최초에는 "삶은 양고기"로 불리었다. 남북조시기에 동질불 가마(爐)가 나왔는데 불 가마(爐)를 사용하여 양고기를 삶 는 방법이 점차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위서, 료본전》에는 "요자(흉악자)... ... 동으로 부어 만든 기구를 사용하는데 아구리가 크고 배가 넓다. "동찬"이라 하는데 얇고 가벼워 식품을 익히는데 편이하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현재 "공화가마(爐)"와 "소불가마(爐)"의 전신이다. 이로부터 동 가마(爐)를 사용하여 무엇을 끓이거나 얇은 양고기를 끓이는 것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쇄양육"이 대도시로 진입한 것은 명조이고 진짜로 "쇄양육"으로 불리운 것은 청조 시기부터이다. 17세기중엽 "불가마(爐)산양육"은 이미 청궁 동령가요리로 되었고 청궁 선식단상에 으뜸 요리가 되었다. "쇄양육"은 북경의 원 "정양루"에서, 후에는 "동래순"양고기점에서 팔렸는데 이곳에서 경영하는 "쇄양육" 은 유명하며 20년대 상해 등 대도시에 전해져 상해의 유명한 요리로 되었다. 현재 전국 많은 대도시에서는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철이나 모두 이 요리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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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焞肥오리 |
"청둔비야"는 청대의 자희태후가 제일 즐겨 먹는 요리로 지금도 북경지방의 유명한 요리이다. 오리는 중국에서 역 대로 가축중의 진품으로 되어있었는데 영양이 풍부하고 자부신체 작용이 있다. 청대《수식주음식보》의 일설에 의하면 "오리, 감량. 자오장의 음, 청허노의 열, 보형행수, 양위생진 , 지수식경, 소나사적. 웅이비대노자가 양하고 쏘세지,해 삼과 함께 하면 보력에 우승하다."한다. 때문에 역대의 제왕상장은 모두 오리요리를 즐겨 먹었으며 당조이래 궁중연회 에서는 통오리를 많이 준비했으며 궁정옥의도 요리와 동총하초를 같이 끓여서 옥선을 많이 만들었다. 그때 자희태후는 " 청돈비야"를 매우 즐겨 먹었다. 그러나 청궁옥선방에서 오리를 끓이는 방법은 여중 부동하였다. 그는 깨끗하게 처리함 오 리에 조미료를 넣은 후 도자기 그릇에 넣고 절반정도의 물을 넣은 다음 덮개를 잘 덮어서 기가 새지 않게 하고 잔 잔한 불로 3일을 끓여서 오리가 완전히 다 흐지게 하였다. 흐져서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이 젓가락으로 집으면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자태후가 먹을 시는 오리고기도 먹지만 대부분은 오리가죽를 먹었다. 그는 오리가죽은 "청돈전야"의 제 일 맛좋은 부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후에 이 요리는 또 "만한전석" 중의 큰 요리가 되었다. 계(鷄)속 중국 역사 의 최후의 황제 애신각루. 부의가 집정할 때까지도 거의 매일 오리를 먹었다. 그러나 그때는 "청돈비야"라고 하지 않고 "삼선오리"라했다. 이런 "청돈오리"는 후에 각지의 요리점에서 공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원료에 향버섯과 쏘세지를 배합료로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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潘魚 |
"반어"는 북경의 전통 요리이다. 전설에 의하면 청대에는 반조음이라는 한림이 있었는데 북경 "광화주" 요리점의 오랜 고객이었다. 그가 산 잉어로 향버섯, 새우말림 등을 넣어 닭고기 국으로 끓인 요리를 만들었는데 고기살이 연하고 맛이 극히 좋았다고 한다. 후에 그는 친히 창조한 고기조리법을 "광화주"의 요리사에게 전수하여 요리점 유명한 요리 중의 하나가 되었고 전 도시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요리를 반조음이 발명한 것이기 때문에 "반어" 혹은 "청증반어"라고 한다. 1930년 "광하주"가 문닫고 그곳의 주요 요리사는 "동하주"로 이전하여 본 요리도 또 "동하주"의 유명한 요리가 되여 현재까지 보존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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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井竹蓀湯 |
중화민국초기 청궁 선방이 해산되면서 "방선" 반장으로 전해졌는데 이 반장의 상등 요리로 되었다. " 죽순으로 요리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서 이미 1000여년의 역사가 있다. 일찍 당조의 《유양잡주》과 청대 《소식 설역》중에서는 죽순의 형태, 산지, 요리 방법, 맛에 대하여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죽순은 일종의 식용균으로 중국의 희귀한 산진으로 옛날에는 제왕의 옥선 요리로 되어 있었고 현재는 국연에서 귀빈을 모실 시 사용하는 요리로 되여 있 다. 고기가 바삭하고 연하며 맛좋고 향기로우며 영양가가 풍부한 특징이 있다.
유관부문의 조사에 의하면 매 100g 의 죽순 중에는 단백질 이 20%, 지방이 2.6%, 탄수화합물이 38.1% 및 16가지의 아미노산, 다종의 촉매와 고 분자의 탕(湯) 등 영양물질이 들어있어 "식묵게"로 불리우고 국제시장에서 명망이 높다. 죽순으로는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수 있으며 탕(湯)도 만들수 있다. 1971년후 미국의 키신저가 여러차례 중국을 방문할 때 제공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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