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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에 핀 꽃
양 천 석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성공부동산재테크 전담강사)
못 이룬 배움에 대한 갈망
해방의 만세소리가 아직 은은한 메아리로 남아있던 1945년 가을, 나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조그만 시골마을인 마동리에서 태어났다. 내 또래 여느 시골출신과 마찬가지로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그리고 형제 또한 많았다.
모두가 보리 고개를 걱정하던 시절, ‘배움은 삶의 밑거름’이라 여기신 아버지의 의지에 힘입어 어려운 형편에도 읍내에 있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말쑥한 교복에 교모를 눌러쓰고 단어장을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20리 등굣길 발걸음은 술래를 피해 숨는 어린아이 발걸음처럼 가벼웠다. 하굣길 꼴망태를 짊어진 남자친구들과 바구니에 채소를 받쳐 든 동네처녀들의 부러운 시선이 어깨에 닿으면 나도 몰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던 행복했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커가는 동생들 때문에 학업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보면서, “인생은 마라톤이다. 나는 너희들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것뿐이다. 곧 만날 수 있어”하는 자신감에 밝은 마음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결혼, 계속 불어나는 식구들…… 가장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계속 내 어깨를 짓눌렀다. 배움에 대한 갈망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지만 30년이 훌쩍 지나도록 마라톤의 출발점에 서지 못했다.
공장새마을운동과의 만남
1971년 6월 동화석유 주식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4년2개월 만에 승진하여 일선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1973년 1차 석유파동 당시 유류수급 방법에 대한 제안으로 회사에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당시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이셨던 성암 신태호 회장은 1978년 7월 광주상공회의소 입소를 권유하였고 나도 지역 유일의 종합경제단체인 광주상공회의소에 즐거운 마음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덕에 2년여를 경리ㆍ회계 업무를 주로 하면서 성격과 적성에 정말 잘 맞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만족했던 나는 또 다른 능력이 내 안에 숨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1980년초 공장새마을 운동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큰 원동력의 하나였던 새마을운동을 산업체에 적용하자는 취지로 공장의 원가절감, 물자절약, 생산성향상을 추구하는 운동이었다. 광주전남 56여개 업체를 찾아다니면서 교육ㆍ상담하고 평가하는 업무를 수행했는데, 내 적성에 잘 맞았다. 내 생에 가장 신바람 나게 일했던 시절이었다.
처음부터 잘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전문가를 모시고 보조하는 데 그쳤지만 개선사항이 필요한 부분이 내 눈에 띤 것은 강사연수를 마치고 난 후 부터였다. 전국의 담당자가 모인 가운데 공장새마을운동의 시행목적과 사례, 효율적인 운영방안, 마인드제고 등 수차례에 걸친 교육연수를 마치고 나서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끊임없는 자기계발의 불을 당기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사로 나서신 교수님들의 달변과 해박한 지식전달 능력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고, “나도 언젠가는 강단에 서 보리라” 결심했다.
체득한 실전부동산! 그러나 아직 두려움이……
직장에서 경리과장을 하면서 회관신축업무를 맡게 되었다.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에 위치한 광주상공회의소 회관은 지하1층 지상7층 규모로 건축당시인 1983년도에는 최신 매머드급이라 할 수 있는 규모였다. 건축경험이라고는 나의 집을 지어본 것이 다였지만 매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현장감독일에 매달렸다. 때로는 시공사의 현장감독과 주먹다짐을 하였으나 현장 일꾼들과 막걸리도 나누면서 내가 가진 정열을 쏟았다. 다시 돌이켜 봐도 젊음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그 업무를 맡으라고 한다면 자신이 없다.
현 광주상공회의소 회관은 냉난방기 리모델링을 제외하고는 “신축 후 25년이 지났어도 어느 한군데 손볼 것이 없다”는 후배들의 전언에 가슴 뿌듯하다. 집 앞에 있는 회관을 볼 때마다 보람이 느껴진다.
건물신축과의 인연은 손아래 동서의 병원을 신축할 때 다시 이어진다. 오로지 의사가 천직이라 여기고 의료봉사밖에 모르는 동서부부는 병원신축에 대한 전권을 내게 맡겼다. 터닦기 공사, 실내장식까지 내 의지대로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집 짓기부터 시작된 부동산과의 인연은 3번째 이어졌다.
이후 광주상공회의소 회관 뒷편에 철골주차장을 지을 때 감독을 맡는 등 조직 내에서는 부동산 통으로 여겨졌으며, 이후 광주시내에 많은 오피스 건물이 신축될 때마다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는 문의가 잇따랐지만, 이를 거절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답변이 미진하다고 생각되면 광주은행 신축본점건물, 광주MBC방송국 등을 시찰하여 장단점을 분석해 보기도 했다.
그동안 부지매입부터 신축까지 현장감독으로 몸소 체득한 경험과 오랜 건물관리 노하우 등이 몸에 배면서 나름대로 건축과 부동산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건설회사 창업의 유혹이 있을때마다 흔들리기도 했다. 충분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면서도 두려움이 마음 한편에 있어 주저할 수밖에는 없었다. 실무경험에 걸맞는 이론이 내게는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꼈기에 광주상공회의소에 주저앉고 말았다.
공부는 나의 힘
지난 1997년 그동안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IMF외환위기가 찾아왔다. IMF는 우리경제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었다.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구조조정만이 기업회생의 유일한 도구인 것처럼 만연하여 사오정이란 말이 보통명사로 인식되었고, 안정되었다고 인식된 우리 직장에도 떠나가는 동료가 생겼다.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경륜보다도 컴퓨터를 잘 다루는 직장인이 우대받는 시대, 나도 뒤져서는 안 되겠기에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컴퓨터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1997년 9월부터 15주간 매주 토요일마다 5시간씩 강행군하는 수업을 받으면서 문득 단어장을 외우며 즐거운 마음으로 등교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책가방을 들고 등교할 때의 즐거움, 아들딸 같은 친구들과 수업하고, 토론할 때의 열정…… 나는 완전이 30년 전으로 돌아갔다. 워드프로세서, 엑셀, 인터넷 등 어제까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듣도 보도 못한 프로그램들을 알아가면서 만학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가장 나이 많은 수강생인 나를 궁금해 하시는 원장님의 면담요청에 원장실을 찾았다. 만학의 즐거움에 대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하던 중 학점은행제 과목신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앞으로 전남대학교평생교육원에 학점은행제 과정이 신설될 계획이란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평생교육원에서 틈틈히 정규대학 과정의 140학점을 취득하면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자격증 또한 학점으로 인정이 된다고 했다.
원장님의 설명을 듣는 순간 고교 졸업식장에서의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마라톤의 출발지점에 당당히 서겠다고, 내게 맞는 맞춤형 교육이 그려지면서 “비록 많이 늦었지만, 그동안 잠시 잊고 살았던 나 자신과의 약속을 이제 지키겠노라”고 다짐했다.
원장님께 부동산학과의 신설을 건의하고 학과개설을 기다렸다. 그리고 2년을 기다린 끝에 부동산학과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날로부터 33년이 훌쩍 지난 1999년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학기 등록을 마쳤다.
생각보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오랜 동안 숨어있던 학구열이 용광로처럼 솟아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요점정리를 하고, 새벽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공부하고 버스 안에서, 그리고 걸으면서도 꾸준히 공부하였다.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던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4번이나 지나고 4년 반 만에 48개 과목 144학점을 이수하고 전 과목 평균 A학점을 기록했다. 동기생중 유일한 출석률 100%로 2004년 2월 26일 마침내 전남대학교 제52회 학위수여식장에서 최고령 60세의 나이로 학사모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기쁨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곧바로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지역개발학과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여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20여 년 동안 업무를 통해 체험한 부동산에 관련 실무경험을 토대로 항상 부족하게만 여겼던 이론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립함으로써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직장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늦었지만 제2의 인생 준비를 위해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이뤄냈다. 2004년 10월15일 33년4개월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하던 날 눈물짓던 선배들과는 달리 웃을 수 있었다.
부동산학 강의와 컨설팅으로 제2의 인생 출발을……
곧바로 다음해 1학기부터 내가 학위를 받았던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전남대학교평생교육원 함평분원ㆍ영광분원ㆍ여수분원, 첨단종합사회복지관, 광산구평생교육원, 광산구 근로자 노인복지관, 광주광역시 도시철도공사, 메트로문화센터,하남농협, 전파관리소, 한국도로공사, 광주흥사단 등에서 성공부동산 재테크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 하는 강의였지만 실무와 이론을 접목한 대안제시와, 돈 되는 투자요령, 부동산세법, 부동산경매,주택임대차보호법,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등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계자산에서 가장 비중이 큰 부동산에 대한 강의 등이 조금씩 호응을 얻어 나를 찾는 곳이 제법 많은 인기강사가 되었다.
나보다 훨씬 젊고 훌륭한 경력을 가진 분들이 강의할 곳을 찾는 현실에서도 내가 찾는 일보다는 나를 찾아주는 곳이 많아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는 수강생들에게 “부동산 투자도 과거의 방법을 답습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매수 물건의 정확한 분석과 유연한 사고로 수요가 있는가를 철저히 조사 분석하고 반드시 현장조사를 선행하되 여러 차례에 걸쳐 세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남들이 투자하지 않고 관망만 하고 있는 부동산침체기에 투자하여 고부가가치를 시현해야 한다”고 늘상 강의한다. 특히 나는 강의능력보다는 오히려 컨설팅 능력이 있다고 감히 자평하고 싶다. 수강생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면 직접 현장을 찾아가 분석하고 조언함으로써 많은 수강생들이 은행 예금금리 세배 이상의 고수익를 올리는 것을 볼 때의 행복과 보람을 매일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실무형 컨설턴트’라고 부른다.
오늘도 나를 찾는 분들을 찾아 달리느라 분주하다. 새벽에 일어나 강의안을 준비하고 아침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대충대충 옷입고 대문을 나설 때면 집사람이 웃으며 “고목에 꽃피는 얼굴보기 힘드네” 하면서 배웅한다.
사례로 본 투자 백태
부동산 매물을 보지도 않고 계약하거나, 판단을 잘못하는 실수예방을 위해 그동안 컨설팅 사례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기술해 본다.
사례1)
내 강의를 열심히 듣는 하남산단에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배사장님. 협소한 공장부지로 난감해 하고 있었다. 몇 차례 현장답사를 통해 살펴보니 그 공장부지에서는 확장할 공간이 없을 뿐 아니라 인접공장 또한 매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그 공장을 매도하고 지하철 운행으로 접근성이 우수하며 모기업과 가까운 평동산단으로의 이전을 강력히 추천했다. 대신 매도할 공장부지는 서두르지 말고 충분한 기간을 가질 것을 상담했다. 한참 후 삼성전자 가전공장이 수원에서 광주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삼성가전공장이 하남산단에 이전하면 반드시 계열공장이 하남산단에 입주하게 되므로 이때는 하남산단의 수요증가로 부동산가격이 상승하므로 그때 파십시오. 이때 평동산단으로 이전하되, 향후 공장 확장을 감안하여 현재보다 3배 이상의 공장부지를 확보하십시오”라고 상담했다. 배 사장은 내 상담을 충실히 따라 높은 가격에 기존 공장을 매도하고, 이전할 공장은 경매물건을 감정가의 60%선에서 매입하여 매출신장은 물론 부동산 수익을 크게 올렸으며 지금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사례2)
수강생 김씨. 부동산 투자를 원하는 데 어디에 투자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분의 자금력은 은행대출을 포함하여 3억원 정도. 요즘 인기 있는 다가구(원룸ㆍ투룸)주택에 투자를 권유하고 여러 차례 함께 물건을 현장을 답사하여 조사 분석한 뒤 적지를 골라주었다. 본인의 투자한 자금대비 20%가 넘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사례3)
수강생 박씨. 본인의 농지를 팔기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써놓은 부동산 투자 책을 읽고 시세의 2배가 넘은 농지를 묻지마 매입하였다. 현장답사 후 잘못 투자한 것으로 판단되어 손해 없이 계약금을 환불받는 요령을 알려줘 500만원을 돌려 받았다.
사례4)
남편이 순천으로 발령난 수강생 이씨. 순천의 D아파트를 전세계약하기 전에는 근저당권이 설정되지 않았는데 계약 직후 근저당권을 설정했다. 그렇다면 임차인은 대항력이 2순위가 되어 주택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전세금에 대해 채권확보가 어려워 본인의 전세금을 집주인에게 전액 받아낼 수가 없었다. 귀책사유가 집주인에게 있기에 바로 계약을 해지토록 상담하여 계약금을 전액 돌려받았다.
사례5)
2006년 7월말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인 많은 수강생들에게 취득세 등록세 감면 정보를 알려주어 건설회사에 연체금을 주더라도 입주시점을 9월로 조정토록 상담하여 취득세와 등록세를 각각 50% 절감할 수 있었다.
사례6)
광산구 비아동에 있는 밭890평에 단감나무를 심어 20년 동안 경작, 본인 인건비와 비료 값 등을 포함하여 연간 3백만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던 수강생 이씨. 하남산단과 인접해 있어 물류창고를 신축하여 임대할 것을 상담, 연간 7천만 원의 고수익을 올려 완벽한 노후대책을 마련하여 주었다.
사례7)
첨단지역에 3억원으로 신축상가를 매입하려던 수강생 김씨.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상가투자를 보류하고 수요층이 두터운 다가구주택에 투자토록 상담하였다. 결국 상가분양업체는 미분양으로 인해 부도가 났고, 김씨는 내 권유를 받아들여 투자자금 대비 15%까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사례8)
친언니가 서울강남의 기획부동산에 다니는 수강생 임씨. 강원도 철원의 군사보호구역의 임야에 평화의 도시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에 현지에 가보지도 않고 200평을 평당 2십만원에 계약했다. 군사보호구역에는 건축허가가 나지 않고 매매가가 너무 터무니없이 높다고 상담하여 계약금 300만원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사례9)
하남산단 인근에 1층에 상가, 2층에 주택으로 본인이 2층에 거주하는 수강생 노씨. 1층 상가 활용방안을 묻는 이분에게 1년 이상 비어 있는 상가를 현장을 답사하여 주변상황을 정확히 조사 분석한 결과 원룸5개를 개조하도록 상담하여 매월100만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사례10)
충남 당진군 송악면 정곡리에 있는 임야 300평을 현장을 찾아가 확인하지도 않고 기획부동산 직원의 말만 믿고 계약한 최씨. 현장답사결과 야산도 아닌 경사가 매우 심한 산중턱의 임야로 건축도 어렵고 시중가격보다 3배 이상 비싸게 계약했기에 계약금 1천만 원을 반환 받을 수 있도록 상담하여 1개월 후에 계약금을 돌려받았다.
사례11)
2006년 1학기 강의하면서 자고 나면 아파트가격이 폭등할 때 많은 수강생들은 초조하여 지금이라도 아파트를 매수하여도 되는가를 문의하였지만 지금의 아파트가격은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거품이 너무 많이 끼여 있으므로 매수하지 말고 기다리면 좋은 기회가 온다고 상담하고 만학으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연구했던 일본의 부동산 사례를 알려주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앞으로는 대형아파트 값은 하락하게 되고 중소형주택이 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4년이 지난 현재 부동산가격이 하락하자 많은 수강생들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였다고 찬사를 받고 있다. 부동산투자는 정확한 이론과 실무가 겸비된 전문가의 투자 자문을 받지 않고 본인의 얕은 지식으로 투자했을 경우에는 엄청난 손해만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