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의 전파
들어가는 말
16세기 이후 서구문명의 흐름은 칼빈주의를 모르고서는 바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사회의 중심은 교회였고, 교회의 개혁은 바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쳤다.1)
칼빈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사상체계를 가리킨다. 칼빈이 이 사상을 모두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사상의 중요한 해설가였다.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사상을 목회 현장에서 실천하였고, 그의 성경 강해와 논문 및 서신들은 말씀 중심의 그의 신학 체계를 잘 보여 준다. 칼빈은 단순한 신학자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 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300년 동안 개혁교회들의 필수적 신학 교과서가 되었다(The Institute became for three centuries the essential textbook of theology in the Reformed churches.)2)
복음적 신앙에 대한 칼빈의 짜임새있는 확증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그 반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였다.3) 칼빈의 가르침은 어떤 다른 개혁가의 그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정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위그노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화란인들을 준비시켜 그들의 국가적 이익을 영웅적으로 수호하게 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으며, 영국의 청교도주의를 형성했고, 뉴잉글랜드 특성의 기반이 되었다. 칼빈의 신학은 그것이 침투해 들어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들을 취했으나 그것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4)
1. 프랑스의 개혁교회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5)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루이 11세(1461-83)는 후에 마키아벨리적인(Machiavellian) 것으로 생각된 정책들을 시행했으며 충고에 귀를 귀울이지 않고 통치했다.6)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7)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 하에 있어야 했다.8)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9)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10)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11)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를 찬탈했다고 말했다.12)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the pleasure of the king)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13)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the new learning of the Renaissance)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14)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모(Meaus)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한다.15)
이 모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하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다(1528년). 이것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다(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다.16)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Luther's doctrine of justification)를 기대하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 돋힌듯이 팔렸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모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었다.17)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모 그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18) 1525년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19)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작하게 된 것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도 박해 때문이었다.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가 되었다.20)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이다.21) 칼빈은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신교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리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강요?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교리의 변호라고 예찬하였다.22)
?기독교강요?가 유럽의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이야말로 지대한 것이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몇 주 후에 부처(Bucer)는 칼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귀하를 그의 종으로 택하셔서, 가장 부요한 은혜를 교회에게 전달하도록 하셨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소위 <벽보 사건>이 있었다. 즉, 1534년 10월 17일 밤에 미사를 반대하는 내용의 벽보가 파리 시내 여러 곳에 붙여졌다.23) 다음 날 아침, 파리 시민들은 자기들의 집과 공공건물과 교회에 벽보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대담한 전단을 뿌린 자들은 왕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왕의 식탁용 냅킨이 놓여있는 그릇에다 그 전단을 한 장 놓고 갔다. 화가 난 프랑소아는 뚜르농(Tournon)의 추기경 및 다른 성직자들과 상의한 후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박해는 무차별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다.24) 교묘하고 야만적인 고문들이 개발되었고, 그 중에는 사람을 간헐적으로 불에 굽는 기계인 에스트라파데(the estrapade)도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다.25)
바로 이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출판된 것이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서(a reasoned exposition of their faith)를 가지게 되었다.26)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렸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27)
앙리 2세(1547-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는 방‘(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28)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다.29)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다. 1559년 5월 파리에는 약 50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다. 신속히 완전한 합의를 거쳐 그들은 권징의 형식과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30)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31)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32) 소위 ‘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섭없이 허용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당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에 이 책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33)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칼빈의 마음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었다.34)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1549년 6월, 칼빈은 한 부인35)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도록 격려하고 있다 :
“우리 구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the Kingdom of the Son of God our Saviour)가 확장될 때, 그리고 주의 가르침의 좋은 씨앗(the good seed of his doctrine)이 널리 모든 곳에 뿌려질 때 우리가 기뻐해야 하듯이, 나는 당신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이르러 당신으로하여금 주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옥의 심연까지라도 당신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것과 이와같이 하심으로써 당신을 향한 무한한 동정심을 표현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요. 따라서 성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사용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duty)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에게 부르심으로써 우리의 전생애(our whole life)가 그의 영광이 되도록 우리를 구별시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른 무엇보다도, 즉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임을 철저히 확신해야 합니다.”36)
또한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you must remember, that wherever we may go, the cross of Jesus Christ will follow us, even in the place where you may enjoy your ease and comfort)”라고 했다.37)
또한 칼빈은 복음적 신앙때문에 옥에 갖힌 리용(Lyons)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격려하고 있다:38)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두신 능력을 아무 것도 동요시킬 수 없을 확신합니다. 분명히 오랫동안 여러분은 마지막 싸움(the last conflict)에 대해 묵상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주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다스릴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은혜가 모든 시험들을 이길 것임을 확신하십시요...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분이 세상보다 더 강하다는 말씀을 명해야 합니다. 여기있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리용의 신자들은 5월 16일, “용기를 내십시요. 나의 형제여, 용기를!” 이라고 서로 격려하면서 순교하였다.
칼빈은 1557년 9월, 파리의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우리는 여러분께 위대한 스승(the great Master)이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바, 인내로써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부탁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육신에 있어서 지극히 힘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들(our enemies)이 우리를 공격할 때, 그 때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격정에 대항하여(against ourselves and our passions) 싸울 때라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요... 복음때문에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비난을 하나님의 복음이 받는 것 보다는 오히려 우리 모두가 전멸 당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종들의 재로부터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for God will always cause the ashes of his servants to fructify,...). 그러나 지나친 행동과 폭력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39)
칼빈은 이 서신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술책(the craft of Satan)을 지적하면서, 교회가 한 목소리로 일치단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40)
1557년 9월, 칼빈은 파리의 감옥에 감금된 여성들에게 보낸 격려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만일 남자들이 연약하고 쉽게 곤란을 당한다면, 여성의 연약성은 여러분의 타고난 체질(your natural constitution) 때문에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의 연약함(the infirmity of his followers)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법을 잘 알고 계십니다.”41)
칼빈에 의하면,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자들의 증오의 대상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칼빈은 옥에 갇힌 여성들이 그들이 가진 은혜의 분량에 따라(according to the measure of grace)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42)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셨고, 주님을 통해서 여러분이 구원을 소망하며,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님께 속하는 영예를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4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적들이 반박할 수 없을 말과 지혜(mouth and wisdom)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확고함과 불변함(firmness and constancy)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칼빈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고, 부활의 증인이 되기도 한 여성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여성들이 어떠한 용기와 절개를 지니고 잇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사도들이 주님을 버렸을 때 어떻게 그들이 그와같은 놀라운 불변함으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었는지, 그리고 여성이 어떻게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자(messenger)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그들 [많은 여성들]의 순교가 열매 맺도록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순교자의 영광 뿐만 아니라 세상의 영광도 얻지 않았습니까?”44)
칼빈은 그들을 격려하면서, 고대의 그리고 최근의 이러한 고상한 본보기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Set before you, then, these noble exemplars, both ancient and recent, to strengthen your weakness, and teach you to repose on His who has performed such great things by weak vessels.)45)
1557년 10월, 칼빈은 프랑스 왕에게 개신교의 신앙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은 프랑스의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 in France)의 신앙을 해설한 것이다.46) 칼빈은 제일 먼저 프로테스탄트의 신관을 설명하고 있다(In the first place, we believe in one God, of a simple essence, and yet, in which there are three distinct persons, as we are taught in the Holy Scriptures, and as the doctrine has been laid down by ancient councils ;...). 칼빈은 고대의 박사들이 거부한 모든 분파들(sects)과 이단들을 혐오한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47)
인간관에 관해서는 말하기를, 인간이 순결하고 완전하게(흠 없게) 창조되었으나, 그 자신의 범죄에 의해 그가 받은 은혜로부터 타락했다고 진술하고 있다(We believe that man, having been created in purity and integrity, has fallen by his own fault from the grace which he had received, and by this means is alienated from God who is the source of justice and all good ; so that his nature has been wholly corrupted, and being blinded in mind, and depraved in heart, he has lost all integrity, nothing whatever remaining of it.).48)
칼빈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을 거부한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49) 아담의 모든 후손(all the race of Adam)은 원죄에 감염되어 있다. 그 원죄는 유전적 악덕이다(... that original sin is a hereditary vice). 원죄는 단순한 모방(simple imitation)이 아니다.50)
칼빈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빠져있는 파멸로 부터 선택받은 자들(the elect)이 건짐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 모두는 멸망할 수 밖에 없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와 구원을 주시기 위해 구속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다.51)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 이 희생 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with full confidence)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또한 양자됨(adoption)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본래 소유하고 계신 것을 누리게 된다.52)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by faith alone) 이 의(義)의 참여자가 된다. 성령의 은밀한 은혜는 우리 안에 이러한 믿음을 불러 일으켜 주신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선물(peculiar gift)이다.
성만찬(the holy supper)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소유하고 있는 연합에 대한 증거이다.53) 세례는 우리의 양자됨에 대한 증거이다. 양자됨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가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해졌고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삶 가운데서 새로와졌다.54)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법과 규정에 순종해야만 하며, 세금이나 부과금을 내야 한다. 단, 하나님의 주권적 제국(the sovereign empire of God)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호의로써 복종의 멍에를 메야 한다.55)
칼빈의 서신만으로 쉽게 30여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 칼빈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거절당한 사람은 없었다. “실업자가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학생들이 기숙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방도를 얻도록, 복음전파자들이 항상 강건한 영혼을 소유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그는 편지를 보냈다.”56) 칼빈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 “낮에 해가 비치는 동안에는 창밖을 내다 볼 시간도 없다네. 만약 이대로 계속된다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일세. 일상업무를 다 마친 후에도 수많은 편지를 써야 하고, 수많은 문의에 답해야 하지. 이 때문에 잠을 걸르는 밤이 너무도 많은 실정일세.”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57)
2. 네덜란드의 종교개혁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a distinctive factor in the life of the Dutch nation)가 되어왔다.58)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59) 이 운동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Deventer)에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60)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였다(1398년). 형제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본명은 Thomas Haemerken)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61)의 신앙을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이다.62) 그는 라덴빈스(F. Radewins)의 영적 지도 아래 있게 된 12세 때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운동에 전적으로 몰두하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혹은 the Modern Devotion) 운동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학교들을 세웠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덕과 하나님 경외를 배웠으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수도원과 교회에서 생활할 사람들로서 준비를 갖추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와 수도원은 신비적 명상의 삶(the mystic life of contemplation)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람들에게 회개와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그들의 학교는 학문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고전 연구를 격려하였다.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악덕을 보았고, 교회의 부패에 대한 저항을 글로 표현하였다.63)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는 그의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에서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의 본문을 편집하여 출판했다(1516년). 이것은 종교개혁을 위한 중요한 공헌이었다.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많은 요인들은 종교개혁을 향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criticism of the doctrine and practice of the Catholic hurch).
둘째로, 단순하고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simple, practical, Biblical Christianity)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다(revival of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이것은 로마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었던 면이었다.64)
그러면,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리 읽혔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65)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66)
종교개혁 당시 화란의 통치자는 카알 5세(Karl Ⅴ, 1500-1558)였다. 그는 1519년 신성로마 황제(1519-1556)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신성로마 황제가 된 다음부터 화란의 개신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67) 16세기 중엽 화란은 오늘날의 벨기에, 룩셈부르크(Luxemburg)와 함께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화란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6세기 중엽의 화란은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고, 당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또한 화란은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화란은 일찍부터 인문주의가 발달하여 북구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카알 5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루터교도가 아니라 재세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화란 재세례파의 기원은 1520년대 말 독일 출신의 호프만(Melchior Hofmann, c. 1496-1544)68)이 화란과 독일의 북부 국경지방인 프리즐란트(Friesland)에서 전도활동을 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재세례파를 멜키오르파라고 한다.69)
멜키오르파의 지도자였던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복켈손(Jan Bockelson)이 독일 서북부 뮌스터에서 ‘시온 왕국’이라는 재세례파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한 1533년 이후, 화란의 수많은 재세례파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로마교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의해서도 심하게 박해받았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이 모두 비판하였다. 그들은 수만명이 죽었고, 오늘날까지도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찬송학과 순교론이 동정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있다.
재세례파의 교리는 후에 보다 평화적인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대부분 수정되었다. 시몬스는 카톨릭 사제의 신분에서 루터의 사상으로, 그리고 다시 재세례파의 견해로 옮겨간 인물이었다. 메노파(Mennonites)는 16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70) 메노파는 성인 신자에 대한 세례를 주장하고, 개체교회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며 교인의 세속 권력 참여를 반대한다. 17-18세기에 이르러 메노파는 네덜란드 안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71)
카알 5세의 지하에서 화란의 개신교도는 전반적으로 보아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5세 때에 화란에서는 종교로 인한 국가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알 5세의 뒤를 이어 필립 2세(재위 1556-1598)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편협하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인 필립 2세는 4년간 네덜란드에 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72) 그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정책을 수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필립의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73)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제단과 상(image)을 파괴하였다. 군중 봉기는 성공했으나, 무자비한 억합 정책이 뒤따랐다. 스페인의 장군 알바 공작(the duke of Alva, 즉 Ferdinand Alvarez de Toledo, 1508-1582)은 필립 2세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었고,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 정책을 펴, 기를 꺾었다.
1567년 8월, 알바 공작은 브뤼셀에 입성하여 여러 귀족들을 체포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9월 20일부터 법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소위 피의 의회(Council of Blood)를 조직하였다. 알바 공작은 유죄에서 처형까지 사이에 죽은 10만명의 신교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74)
1584년 북부 네덜란드는 오렌지 공(公) 윌리암(1533-1584)75)의 지휘 아래 한 연방을 형성하였다. 긴 기간 동안의 쓰라린 투쟁을 거쳐 그들은 로마교회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76)
새로 세워진 개혁교회는 그들의 신앙 성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와 ?벨직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77)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칼빈주의적인 것으로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1561년에 칼빈의 제자인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가 개정하였고, 1572년에 도르트레히트(Dordrecht)회의에서 승인을 얻었다.78)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신조(the creed of Netherland Protestantism)가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techism)을 채택하였다.79)
1575년 라이덴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프라네커(Franeker), 그로닝겐(Groningen), 우트레히트(Utrecht) 그리고 하더위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학교육(theological training)을 실시하는 학교가 되었고 여러 나라로부터 학생들이 몰려 왔다.
17세기까지 화란의 신학자들은 전(全) 기독교계에서 높은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개신교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고 칼빈주의를 더 널리 전파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Their influence on Protestantism generally was very great and accounted for the further spread of Calvinism).80)
한편,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81)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게속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82)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기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에게 그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코오른헤르트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83) 코오른헤르트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기사야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라고 보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항상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론으로부터 ‘힌트’를 받아 칼빈의 예정론에도 비판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자기의 이러한 사상 변화를 상당 기간동안 숨겼다. 그러다가 1603년 라이덴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같은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고마루스(Gomarus, 1536-1641)와의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에 반대하였다.84) 그는 유기의 작성 혹은 이중예정을 부정하였다. 고마루스는 타락전 예정설을 고수하고 유기의 작성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정된(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85)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86)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
① 예정 :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87)
② 구속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만인구원론은 믿지 않았다).88)
③ 죄 혹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89)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렸다.90)
④ 은혜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91)
⑤ 성도의 견인 :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反)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92)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읜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93)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94) 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